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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김천

등록일 2017-03-03 02:01 게재일 2017-03-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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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년 김천역 근처의 금정통 모습이다. 신작로 양 옆으로 늘어선 일본식 적산가옥 사이를 두루마기에 갓을 쓴 사람들이 희끗희끗 지나고 있다. <br /><br /> /고서적전문가 손희준 수집자료
▲ 1906년 김천역 근처의 금정통 모습이다. 신작로 양 옆으로 늘어선 일본식 적산가옥 사이를 두루마기에 갓을 쓴 사람들이 희끗희끗 지나고 있다. /고서적전문가 손희준 수집자료

△김천과 `만세 전`

서울에 갈 땐 김천역을 이용했다. 버스를 타면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는 서울을 굳이 기차로 가고 싶었던 건 기차에 대한 근거 없는 `로망` 때문이었다. 한편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에 등장하는 김천과 김천역이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만세전`은 `흥부전`이나 `춘향전`에 사용되는 `전(傳)`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기 `전(前)`으로, 싱겁게도 `만세전`은 만세를 부르기 전이라는 뜻이다. 제목처럼 `만세전`은 3·1운동 이전의 조선에 대한 이야기긴 하지만, 내용은 결코 싱겁지 않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인화는 동경에서 기차를 타고 고베(神戶)를 지나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거기에서 다시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경부선을 타고 경성에 도착한다. 1박 4일의 고단한 여정이었다.

이인화가 경성까지 도착하는 과정은 근대화의 과정을 닮아 있다. 일본에서 수입된 근대화는 가장 먼저 부산에 닿았고, 부산을 지나 경성에 종착하게 된다. 이인화가 잠깐 쉬어가는 곳이 김천이다. 김천에는 그의 큰형이 보통학교의 훈도로 재직하고 있다. 이인화의 다른 가족이 모두 서울에 사는데 큰형이 김천에서 훈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인화의 큰형은 아버지가 정치열에 들떠 가산을 더 이상 탕진하지 못하도록 막고 짜임새 있게 집안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한학으로 다져진 촌생원”이다 보니 경성에서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작가는 다른 도시도 아니고 왜 하필 김천에서 살게 했던 것일까?

김천은 3·1운동을 전후한 일제강점기 하의 우리나라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경성으로 불렸던 서울은 일본의 동경과 유사한 도시로, 부산은 조선 진출의 거점도시로 계획되었다. 이와 달리 김천은 경부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노동자가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 소설은 당시 김천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큰형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인화는 을씨년스럽게 낡은 대문을 보며 “거진 쓰러지게 되었는데 문간이나 좀 고치시지?”라고 혼잣말처럼 중얼댄다. `형님`은 이렇게 대꾸한다. “얼마나 살라구! 여기두 좀 있으면 일본 사람 거리가 될 테니까 이대로 붙들고 있다가 내년쯤 상당한 값에 팔아 버리랸다. 이래봬도 지금 시세루 여기가 제일 비싸단다.” 신도시에 집을 사서 되팔아 돈을 불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제 강점기 신시가지에는 일본인이 살고, 구시가지에는 조선인이 모여 사는 이중도시였다는 것 정도다.

△훈도의 환도(環刀)

당시에는 선생님을 훈도라 불렀다. 훈도의 위세나 위용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이들은 검은 제복에 망토까지 두르고 허리에는 환도라고 불리는 긴 칼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런 `형님`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형님은 망토 밑으로 들여다보이는 도금을 물린 검정 환도 끝이 다리에 터덜거리며 부딪히는 것을 왼손으로 꼭 붙들고 땅이 꺼질 듯이 살금살금 걸어 나오다가, 천천히 그 동안 경과를 이야기하여 들려준다.

`환도(環刀)`는 군복에 착용하는 긴 칼로 그 길은 1.2m 정도다. 이 칼이 멋져 보일 수도 있지만 `형님`은 환도에 익숙하지 않고 그런 환도는 그의 다리에 터덜거리며 부딪친다. 그는 그 부딪침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주 살금살금 걷는다. 염상섭은 나라를 빼앗기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따르며 살아야 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형님`의 옷차림과 행동거지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한 거추장스러운 망토와 어색한 환도를 찬 `형님`의 모습은 조류 속에서 떠밀리는 김천의 모습을 닮아 있기도 하다.

△`만세 전`과 `만세 후`

이인화는 경부선을 따라 상행하며 일본식 근대화의 열기와 이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비참한 모습을 직면하게 된다. 심천역, 지금으로 말하자면 영동역에 기차가 멈추자 일본 헌병의 검문검색이 벌어지고 갓장수가 붙잡힌다. 대전역에서 역시 기차는 예고 없이 30분가량 정차하고 조선인 오륙 명이 붙잡힌다. 기차에서는 헌병들의 검색이 벌어져 어수선하다. 이러한 일련의 소동을 본 이인화는 일본에서 일본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

그제서야 이인화는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것을, 그리고 조선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무덤이라는 것을, 그러한 무덤으로 가득 찬 거대한 공동묘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은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지만 무덤과도 같은 조선을 부활시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세전`이 경부선을 따라 상향했다면 3·1만세운동은 경부선을 따라 하향했다. 근대화의 열기는 원한과 울분의 감정으로 바뀌어 이번엔 경부선을 따라 하행하는 셈이다. 염상섭이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는지 알 길이 없으나, 소설과 현실은 매우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3·1만세운동이 철도 노선을 따라 전파된 이유는 휴교령과 관련이 깊다. 총독부는 고종 장례가 낳을 소요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휴교령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유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들이 고향으로 가지고 간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저마다 독립에 대한 갈망은 고종의 승하를 더욱 가열시켰을 것이다.

때마침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학생들의 가슴 어딘가에 욱이고 또 욱여넣었을 슬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혹은 고향에서 그들의 울분과 분노를 표출시켰다. 그런 이유로 3·1운동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짧게는 4월 길게는 6월까지 이어진 대규모의 장기적 저항운동이었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이 소설이 비록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기 전해의 겨울이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긴 하지만 소설로 발표되었던 시기는 `만세`가 있은 지 3년이 지난 1922년이었다.

한 명민한 연구자는 이 소설이 “미래의 시간이 과거 속으로 삼투하는 특이한 시간구조”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만세전`에는 과거 속에 이미 다녀간 미래의 흔적이 파편처럼 존재하고 있다.

어쩌면 시간은 이런 식으로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중간쯤에 현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온 시간과 미래에서 온 시간이 만나는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지점에 현재가 기입되는 것이리라. 2017년 3월 1일, 탄핵반대집회와 촛불집회가 대치하는 `지금여기`의 혼란스러움이 곧 현재의 형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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