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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에 대해-`카모메 식당`을 보고

등록일 2017-03-17 02:01 게재일 2017-03-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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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카모메 식당` 중. 왼쪽은 식당 주인인 사치에, 가운데는 마사코, 제일 오른쪽에는 미도리가 있다. 이 영화는 세 사람이 왜 자신의 나라를 떠나 이 먼 핀란드까지 왔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살아간다.
▲ 영화 `카모메 식당` 중. 왼쪽은 식당 주인인 사치에, 가운데는 마사코, 제일 오른쪽에는 미도리가 있다. 이 영화는 세 사람이 왜 자신의 나라를 떠나 이 먼 핀란드까지 왔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살아간다.

감기에 걸렸다. 둔감한 편인데 감기가 온다는 것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 공기를 깊이 들여 마시면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이때 감기약을 먹으면 된다. 감기가 걸린 뒤에 감기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감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모르겠다, 흠, 될 대로 되라지, 뭐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감기에 걸리고 나니 정말 죽을 맛이다.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깨어 있는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데, 하루가 이렇게 길까 싶을 정도로 시간은 더디다. 깨어나면 억지로 밥을 먹었다. 밥을 꼭꼭 씹으며 밥이 참 달다는 생각을 했다.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가 떠오른 것은 이 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밥과 사랑

소설가 김훈은 언젠가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라고 말했다. `카모메 식당` 역시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밥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으며, 순환적 절기와 풍속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사람의 육체에 깊이 베이고 육화된 밥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원한과 치욕을 참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 영화는 헬싱키에서 일본식 밥집을 운영하는 사치에가 주인공이다. 그녀가 왜 핀란드에 오게 되었는지 이 영화는 도무지 말하지 않는다. 사치에는 이런 감독을 닮았다. 그녀의 식당에 한 남자가 무단 침입했을 때가 그렇다. 이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가 왜 여기에 들어왔는지, 이런 것들을 묻는 대신 사치에는 그저 주먹밥을 만들어 그를 먹인다. 마치 탕자가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라도 있었다는 듯 말이다. 자신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하지만 우리는 주제넘게 묻기를 좋아한다. “당신은 왜 배가 고픈가, 무엇이 당신을 배고프게 하는가?”

우리는 밥을 먹지만, 그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슬픔 역시 밥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슬픔의 뒤편에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으리란 법은 없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슬픔의 원인을 찾지 않는다. 남편이 떠나간 이유를 모르는 여자는 그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 슬픔과 함께 살아간다. 어쩌면 울음을 참는 유일한 방법이란 그 울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 슬픔을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특권적 평범함

`아멜리에`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평범한 삶을 성찰한다는 점에서 `카모메 식당`의 주제에 닿아 있다. `카모메 식당`이 평범한 삶을 평범한 차원에서 다룬다면, `아멜리에`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평범함이 비범하고 특별한 삶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한다.

`아멜리에`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에는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갈 무렵, 세계가 추구한 거대 시장과 그러한 자본주의의 경쟁구도에서 밀려난 사람들, 또는 그 경쟁을 거부하거나, 그 경쟁에 끼어들 능력도 없는 소외된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렇긴 하지만, 그들의 삶을 연민이나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간난하고 지난한 삶을 한껏 과장하고 포장하여 영웅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이를테면 `아멜리에`의 주인공 아멜리에가 낡은 상자를 발견하는 장면은 마치 영웅 서사시에나 어울릴 법한 필연적 운명이나 계시처럼 느껴진다. 사소한 일들은 이런 식으로 격상된다. 낡은 상자의 발견으로 아멜리에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는 없지만, 그녀의 삶은 현실의 논리가 아닌 초월적 질서 속에 편입되며, 그녀의 모든 행위는 영웅적인 어떤 것으로 변모한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평범하게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애써 강조한다. 특별하게 이불을 말리는 것만큼이나 평범하게 이불을 말리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하며, 라면 전문점 아저씨는 맛있는 라면을 끓일 수 있음에도 평범한 라면을 끓이기 위해 애쓴다.

`아멜리에`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의 평범함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택된 어떤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범한 삶은 비범한 삶과 다를 바 없으며,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결국 평범함이 특권적 위치를 쟁취하게 된다.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카모메 식당`도 평범함에 대한 이야기가 맞긴 하지만, 평범함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채 평범함을 그저 평범함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그런 평범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이자, 가장 난해한 장면은 마사코와 사치에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다. 마사코가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정말 부럽군요.”라고 말하자, 사치에는 “아뇨, 그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죠.”라며 그 말을 받는다. `원하는 삶`이란 삶에 어떤 목적이나 목표가 전제가 되어야 하며, 그것과 합치될 때 비로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한다. `원하는 삶`이란 싫은 것을 무릅쓰는 삶이다.

그런데 삶의 목적이나 목표가 사라진다고 해서 이것이 곧 절망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목적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사치에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목적이나 목표가 아닌 삶, 삶 그대로에 열중하는 삶, 그러할 때 던져진 우리는, 피조물인 우리는, 진실로 삶에 충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 공강일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이 영화는 서로의 인사를 품평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마사코의 인사는 정중하며, 미도리의 인사는 투박하다. 가장 훌륭한 인사는 사치에의 것이라는데 둘은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뭐가 특별할까? “이랏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어서오십시오)” 사치에의 인사에는 어떤 특별함도 없다. 사치에의 인사는 손님에게 예의를 가장하지도 않으며, 불손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녀의 인사는 인사라는 말의 의미와 가장 일치하는 인사, 말 그대로의 `인사`다. 사치에에게 손님은 욕망의 대상도, 수단이나 목적도 아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며, 더 정확히는 인사`만`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역시 이와 같다. 삶에 열중 할 때, 그 삶은 평범할 뿐이겠지만, 적어도 그 평범함이 우리를 기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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