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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듣는 산행

등록일 2017-07-14 02:01 게재일 2017-07-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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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포리예요. 저 희뿌연 산에서부터 몰려오는 비구름 보이세요. 아마 저 비구름이 저를 따라왔나 봐요. 비는 한곳 빠짐없이 내려앉았고, 저는 비속을 새처럼 물고기처럼 반은 날고 반은 헤엄쳐 윗왕실재에 닿았어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함성 때문에 목이 다 쉴 정도였죠. 비속에서 여름은 무성해져가고 있었고, 저 역시 자꾸만 자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백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포리예요. 저 희뿌연 산에서부터 몰려오는 비구름 보이세요. 아마 저 비구름이 저를 따라왔나 봐요. 비는 한곳 빠짐없이 내려앉았고, 저는 비속을 새처럼 물고기처럼 반은 날고 반은 헤엄쳐 윗왕실재에 닿았어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함성 때문에 목이 다 쉴 정도였죠. 비속에서 여름은 무성해져가고 있었고, 저 역시 자꾸만 자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침에 시계를 보고 한 말은 “앗, 늦었다!”도 아니고, “큰일났네”도 아니었어요. “아니, 시간이 왜 이래!”였죠. 그도 그럴 것이 오전 6시12분이었거든요. 산악회 버스는 오전 7시에 출발해요. 제가 있는 곳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적어도 오전 6시22분 지하철은 타야 해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택시를 타야 하나, 비도 오는데 안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침대에 앉아 1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럴 시간이 없다구, 발딱 일어났네요. 자기 전에 씻은 걸 다행이라 생각하며 옷부터 꿰었어요.

가지고 갈 짐은 대충 냉장고에 넣어두었어요. 그런데 막상 가방에 담아보니 제법 많더군요. 레몬 맥주 두 캔, 장수막걸리 하나, 지평막걸리 하나, 공주밤막걸리 하나, 그리고 이온음료 두 개, 생수 세 개, 거기에 데친 토마토, 체리, 머루포도 따위를 넣었어요. 그것만으로도 30ℓ짜리 제 가방은 꽉 차더군요.

그렇게 준비해서 나온 시각이 오전 6시19분. 지하철을 향해 냅다 달렸어요. 거의 1km 넘는 거린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어요. 오전 6시34분에 있다던 지하철이 31분에 도착했어요. 일요일 아침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제가 산행에 늦을 걸 염려해서 그랬는지 지하철이 쌩하니 시원하게 달려주었어요. 산악회 회장님께 늦을 수도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하려고 전화를 드렸어요. 웬걸 회장님이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역에 내리면 택시를 타고 버스를 따라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역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6시56분, 거기에서부터 뛰어 버스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6시58분! 휴우 다행이다.

45석 버스에 사람이 꽉 찼네요. 저는 제일 뒷좌석 구석에 앉았어요. 아, 행선지를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오늘은 상주시 내서면과 공성면을 잇는 백학산을 종주할 예정예요. 산 높이는 617.6m. 그렇게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다고 해요. 대신 산행거리는 20.7km로 상당히 먼 편예요. 날씨도 덥고 비도 올 것 같아 아마 초죽음이 될 것 같아요. 괜히 따라온 건 아닌지 벌써 후회가 몰려오네요.

버스가 상주로 들어서자 회장님은 큰재로 갈까, 지기재로 갈까 고민을 했어요. 비가 오면 지기재에서 씻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더군요. 회장님은 기상청에 전화를 했는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는지 비 올 것을 확신했어요. 그래서 저희의 산행 코스는 정해졌어요. 보통은 거꾸로 오른다고 하는데 저희는 지기재에서 출발해서 개머리재, 백학산, 윗왕실재, 개터재, 화룡재를 지나 큰재로 내려오기로 했어요. 벌써 지기재에 왔나 봐요. 도착했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산우들이 우루루 몰려 내렸어요.

우리 산악회는 이게 문제야. 내리면 말야 같이 간단히 맨손체조든, 도수체조든, 3억 5천을 주고 만들었다는 늘품체조든 뭐 그런 것 좀 하면 좋잖아. 그러면 나같이 굼뜬 인간도 여유롭게 준비도 하고 그럴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무꾼 님(이분의 닉네임이랍니다)이 “막내 어서 따라가” 하는 바람에, 스틱도 안 맞추고, 장갑도, 물도 안 꺼냈지만, 눈물을 머금고 출발!

이젠 저도 이 산악회에 몇 번 나왔다고 사람들을 거의 다 알아볼 것 같아요. 그 중에는 저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선배님도 있어요. 반갑게 인사를 하며 길을 재촉했어요. 농로를 따라가다가 산으로 올라갔다가 도로를 건넜다가 임로를 따라갔다가 갈림길에서 분명 왼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 하고 혼자 엉뚱한 길로 들어섰어요. 뒤에 따라오신 분이 “거기가 맞아요?” 하네요. 혼자 엉뚱한 길로 갈 뻔했어요.

가방은 무거웠고 비는 올 듯 말 듯 어정쩡했고요 습기가 많아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부패해 가는 느낌이었어요. 아 벌써 백학산이네요. 저도 모르게 두 시간을 걸었나 봐요. 그런데 제가 도착하자마자 선두그룹은 벌써 먹을 것 다 먹고, 제가 오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횅하니 가버리는 거예요. 앗, 제가 싸온 술 좀 드시면 안 되나요. 과일만 먹고 선두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으로 후다닥 일어났어요.

백학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였던가요. 무슨 소리지? 나뭇잎 위로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싱그러운 잎들에 튕기는 빗소리는 맑고 부드럽기 그지없었어요. 비가 오는 것도 `듣다`라고 하는 거 아시죠? 비가 듣는다고 처음 말했던 사람은 비가 오는 걸 촉감이나 시각이 아니라 소리로 먼저 알았나 봐요. 빗줄기가 듣는 소리를 듣는 일이라니! 그렇게 감격하는 사이 굵은 빗줄기가 무성한 잎들을 헤치고 제게로도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세찬 빗줄기에 두드려 맞듯 흠씬 젖었는데, 아, 이렇게 좋다니요. 어떤 걸 청우(淸雨)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게 그런 비가 아닐까요. 비 속에서 산도 들도 저까지도 더불어 청아해지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산속에서 홀로 “우와 우와” 소리만 연거푸 내며 뒷말을 잇지도 못한 채 반은 날고 반은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갔어요. 산우(山雨) 속에서 산우(山友)를 지나치며, 어이쿠 산에서도 뵙고 수영장에서도 뵙네요, 이랬던가요. 아니면, 수영은 할 만하세요, 였던가요? 전 새처럼 물고기처럼 단숨에 윗왕실재에 이르렀어요.

산에서 비를 만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봐요. 이러려고 아침에 씻지 않았던 걸까요. 상선약수(上善若水)! 그 말이 딱이더군. 언젠가 박완서는 소나기가 오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어요.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 밖까지 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 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 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한 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 웅성대던 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 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나 피마자나무와 자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2015, 30면).

정말이지 비는 군대처럼 쳐들어왔고, 저는 폭발적인 환희 속에서 산과 나무와 길과 함께 젖어 그들과 구분할 수 없었어요. 산 속에서 비 듣는 소리를 들으며 온갖 소리를 맡고 맛 볼 수 있었어요. 그동안 왜 사람들이 등산이 아니라 산행이라 하는지 몰랐어요. 익숙해질수록 알겠더군요. 등산은 애써 산을 오르는 것이지만, 산행은 산과 어우러지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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