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강일의 바람의 경치<Br>경주 김유신장군묘, 안개와 벚꽃 속에서 잃다
일찍 일어난 탓일까? 안개가 흐리게 도시를 감싸고 있다. 문득 안개는 어쩌다 `안개`라 불리게 되었을까를 생각한다. 궁금함은 버짐처럼 번져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던 단어들을 낯설게 만든다. 눈, 하늘, 발, 길, 나무…. 희뿌연 안개 속에 웅크린 사물처럼 명료했던 단어들이 흐려진다.
발길은 어느새 서천교에 닿는다. 백운산과 묵장산에서 시작된 물은 경주 내남면에서 만나 형산강을 이룬다. 신라시대 수도를 가로지르던 가장 중요한 강 중 하나였던 형산강은 경주시와 포항시를 거쳐 영일만으로 유유히 흘러든다. 남상(濫觴). 배를 띄울 정도의 큰 강물도 그 근원은 술잔을 띄울 정도의 미약한 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말도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아`, `어`와 같은 말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에서 시작한 말은, `아(我)`를 낳고 `여(汝)`를 낳고, `아버지`로 `어머니`로, 다시 `할아버지`로 `할머니`로 이어져 친족을 이루고 부족을 거쳐 민족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안개가 겹겹이 쌓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말 위에 말을 쌓아 위계와 윤리와 이념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득하기만 한 생각들 너머로 벚꽃은 만개한다. 벚꽃 속에서 되뇌이던 생각을 잃고 넋마저 놓아버린다. 가냘프고 가녀린 꽃잎은 흰빛이라고도 분홍빛이라고 할 수 없는 잡히지 않는 빛이다. 그도 그럴 것이 `꽃맥`을 따라 붉은 기운이 바깥쪽을 향해 엷고 얕게 퍼져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사람에게 혈맥이 있고, 잎에 잎맥이 있다면 꽃에 있는 저것은 꽃맥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벚꽃은 스스로 둥근 천정을 만들며 형산강을 따라 김유신장군묘를 향해 이어진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소실점. 회화나 설계도 등에서 투시(透視)하여 물체의 연장선을 그었을 때 선과 선이 만나는 점을 일컫는 말이다.`만나는 점`이라고는 했으나, 그 `만남`은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길을 걸으면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라 여겨지는 지점에 이르러도 거긴 여전히 길일뿐이다. 소실점은 다시 그만큼의 거리로 달아난다. 무한이라 불리는 것은 그러한 성질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걸어도 아무래도 닿을 수 없는 곳, 늘 똑같은 거리만큼 물러나 있는 곳, 그 다가갈 수 없음. 그것은 어쩌면 죽음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삶을 살 순 있지만 죽음을 살 순 없으므로 죽음은 우리의 삶에 닿을 수 없다. 그리고 벚꽃은 기어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김수영은 이렇게 쓴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
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
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김수영 `봄밤` 전문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무엇을? 어쩌면 이 시는 저 벚꽃에 대한 시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것일는지도. `봄밤`,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스러짐을 완성하기 위해 나아간다. 이미 스러질지라도 자신의 모두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서두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멸할 것이니 서둘러 사멸하는 것도 옳겠으나 이왕 사멸할 것이라면 그 정해진 사멸의 정면을 바라보며 사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러짐의 순간순간이 모두 사용될 때 스러짐은 스러짐이라는 빈껍데기만 남길 것이다. 사멸을 서두르지 않는 일, 사멸을 천천히 사용해감으로써 사멸을 소진시키는 일, 그것이 어쩌면 사멸이라는 그 무거운 운명, 벗을 수 없는 운명을 벗지 않은 채 벗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하여 마땅히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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