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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봉서 모화리까지-어둠보다 무서운 것들

등록일 2016-04-15 02:01 게재일 2016-04-1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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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야간산행
▲ 삼태봉 자락에서 바라본 모화리. 어둠 속 불빛은 강물처럼 출렁인다. 저 불빛이 없었더라면 어둠의 바닥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둠이 무서운 것은 어쩌면 어둠에 가려진 알 수 없는 무엇 때문일 것이다. 아니 무엇이라고 여겨지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 삼태봉 자락에서 바라본 모화리. 어둠 속 불빛은 강물처럼 출렁인다. 저 불빛이 없었더라면 어둠의 바닥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둠이 무서운 것은 어쩌면 어둠에 가려진 알 수 없는 무엇 때문일 것이다. 아니 무엇이라고 여겨지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1. 경주 삼태봉:지구의 자전 속도

기령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6시를 훌쩍 넘고 있었다. 마우나오션 근처에 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경주에서 자고 아침엔 시내를 둘러보고 싶었다. 삼태봉을 지나 토함산까지 여섯 시간. 거기까지 갈 순 없을 것이다. 초행길인데다 랜턴도 없고, 핸드폰 배터리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다.

“아아, 달빛에 반사되어 달이 되는 호기심

호기심이 소년들을 홀려 상봉에서

상상봉으로 밤새도록 끌고 다닙니다”

―신대철 `칠갑산1` 부분

달빛에 반사되어 달이 되고 싶었을까? 상봉에서 상상봉으로 그렇게 밤새도록 끌려 다니고 싶었던 걸까? 산을 향해 발길을 놓았다. 산자락에 걸렸던 해는 빠른 속도로 기운다. 지구는 1초에 약 460m 속도로 돌지만, 나는 아무리 재게 걸음을 디뎌도 채 2m를 걷지 못한다. 이 경기는 이길 수 없다. 지구가 돌고 있는 속도를 몸으로 느낄 수 있고, 저 거대한 지구에 비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인간인 지를 이해할 수 있다. 2016년 4월 1일 경주시각으로 해는 오전 6시 9분에 떠 오후 6시 44분에 진다. 이때부터 지기 시작한 해는 그 긴 여운을 남기고 오후 7시 30분께부터 더는 빛을 내놓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거의 4km를 걸어 삼태봉과 마우나오션과 허브캐슬 갈림길에 닿았다. 허브캐슬까지 2.2km, 마우나오션까지 0.7km, 삼태봉까지 0.3km. 삼태봉을 올라 여기로 다시 돌아와 안내판을 찾아 허브캐슬로 내려갈 수 있을까? 산보다 어둠이 무섭고 어둠보다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안다.

#2. 봉천동 청룡산:무서운 것들

한 때는 봉천동이라 불렸다. 그곳에 연구실이 있었다. 연구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가락 사이로 시간이 흘러내렸고, 나는 우죽거리다 버스를 놓치는 일이 허다했다. 큰 길을 따라 걸으면, 신림 9동 아무도 기다릴 리 없는 내 자취방까지 30~40분이면 족했다. 하지만 밤을 가르는 차 소리가 싫었고, 그 차들보다 느린 내가 싫었다. 굳이 청룡산을 넘었다. 청룡산은 해발 150m에 지나지 않는 산이지만, 그렇게 낮은 자세로 기어 봉천동과 신림을 가르고 낙성대까지 이어진다. 도로는 이 산 둘레를 따라 뻗어 있었다.

자정을 맞은 밤은 고요했고 어두웠다. 산을 넘어가면 집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길을 알진 못했다. 산으로 들어서면 차 소리를 잊을 수 있었지만, 매번 길을 잃었다. 겨우 길만 보이는 어둠 속을 걸으며 어둠 저 편이 무서웠다. 도깨비, 여우, 귀신. 이런 것을 만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기실 무서움은 어둠 편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렁였다. 이 어두운 산을 걸어 내려오거나 오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일까, 어떤 끔찍한 일을 저 산 속에 묻어두고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은 제 마음대로 자라났고, 그런 무서운 생각들이 어둑한 사물들에 덧씌워져 실체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정말 무서운 것은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었다. 나였다. 정확히는 내가 가진 상상력이었다.

▲ 공강일
▲ 공강일

#3. 경주 모화리:“비겁해지는 거래”

초행길이었으므로 어차피 거리감각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발을 놓을 곳을 살펴야 했다. 길은 무척 가팔랐다. 가파르다고 했으나,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숫자는 객관적이지만 감각할 수 없었고, 길의 경사에 관해선 주관적이었지만 그 주관이 내겐 훨씬 도움이 되었다. 2.2km. 평소라면 30분이면 충분했겠으나, 길은 끝나지 않았고 어둠은 더 빠르게 짙어지고 있다. 무서운 생각이 나면 노래를 불렀다. 아주 깊은 야산인데도 봉분이 많았다. 그 앞을 지날 때는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이 영면하시길 빌었다. 소는 영민해서 산에서 길을 잃으면 무덤 옆에서 잔다고 한다. 그런 소를 한 마리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내가 소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큰 눈을 껌벅거리며 드러누워 되새김질을 하고 싶었다. 아침이 밝으면 무를 먹으리라, 소가 된 게으름뱅이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내가 저런 곳을 내려왔네, 휴 다행이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길이 넓어지고 있었다. 소음처럼 들리던 차 소리가 반갑다.

영화 `올드보이`의 철웅(오달수 분)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봐. (겁나) 용감해질 수 있어.” 단지 그뿐일까. 상상력은 무서움을 낳지만 동시에 상상해야만 가능한 것들도 있다. 상상력을 가진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은 기어이 나를 지나갈 것이다. 견뎌낼 수 있을까. 그와 함께 “그런 일도 있었다”고 말하는 시간을 상상한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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