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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산다는 것

등록일 2018-07-20 20:38 게재일 2018-07-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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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송화. 김광섭은 이렇게 썼다. “나는 무너지는 뚝에 혼자 섰다. /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 채송화. 김광섭은 이렇게 썼다. “나는 무너지는 뚝에 혼자 섰다. /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장난감과 놀이

보들레르는 언젠가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세밀하게 관찰한 적이 있다. 그가 보기에 아이들은 모두 연출가며, 연기자이자 동시에 마술사다. 아이들은 단순한 무대장치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연극을 펼친다. 이를테면 집에 있는 평범한 의자가 마차가 되기도 하고, 때론 말이 되고 그런가 하면 승객이 될 수도 있다. 병정인형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는 건 그럴 수 있지만, 병정인형이 아닌 병마개, 체스 말, 공깃돌도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런 놀라움과 궁금증은 보들레르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도 수긍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놀이가 끝나면 인형을 분해해버린다. 어떤 아이는 장난감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부셔버리는 아이들도 있다. 이런 아이들의 파괴적인 행동은 또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보들레르는 궁금한 것 투성이다.

보들레르의 궁금증이 시작되는 지점은 장난감이다. 그가 보기에 장난감은 무척 신기하다. 장난감은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말을 할 수도 있다. 장난감이 아닌 것도 장난감이 될 수 있고,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으며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형태를 지닐 수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보들레르는 아이들이 장난감을 부수는 모습을 모며 “장난감의 영혼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보들레르의 수첩-장난감의 모랄”, 51쪽, 문학과 지성사)라고 묻는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답에 가깝다. 장난감의 영혼을 찾는다는 것은 장난감 안에 영혼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들레르는 장난감의 영혼이 이런 일을 가능케 한다고 믿었다.

△놀이와 언어

보들레르는 장난감이 가진 놀라운 힘, 그 힘의 근원을 궁금해했다. 하지만 장난감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장난감에 영혼이 있다는 다소 엉뚱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보들레르의 결론은 그의 한계이기보다는 당시 사회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보들레르가 장난감이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에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더 나은 결론에 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난감의 변신술은 장난감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장난감을 사용하는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행위, 이 놀이라는 행위가 장난감에게 마술적인 힘을 부여한다. 놀이를 하지 않을 때도 의자를 마차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아이다! 놀이의 마술적 힘은 놀이라는 형식 속에 있다.

그리고 놀이를 할 때 아이들은 꼭 대상에게 이름붙이는 것을 빼먹지 않는다.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겼던 것’처럼 의자를 마차라고 명명할 때 의자는 더 이상 의자가 아닌 마차가 된다. 즉 대상에게 놀이에 걸맞은 이름을 붙일 때 대상은 본래의 용도에서 벗어나 놀이에 걸맞은 용도로 변화한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가 놀이가 될 수도 있다.

또 명명 행위와 놀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놀이라는 영역을 벗어나면 그 효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놀이를 하지 않을 때에도 의자에게 마차라고 이름붙이는 아이가 있다면, 그 또한 정말 이상한 아이다! 따라서 명명 행위 없는 놀이는 불가능하며, 놀이를 벗어난 명명 행위 역시 불가능하다. 언어가 부여될 때 대상은 원래의 성질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

△언어와 가상

아이들의 놀이에서 언어는 가상적 힘을 만들어낸다. 의자를 마차라고 여길 때 거기에는 마차라는 개념이 따라온다. 마차에 대한 나름의 개념이 없다면 놀이는 불가능해진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가상이란 결국 개념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이런 것이 놀이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종이에 지나지 않는 것을 ‘돈’이라고 명명할 때 그것은 한낱 종이쪼가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압도적인 힘을 행사하게 된다. 포도주가 ‘보혈’이 되고, 과자가 ‘성체’가 될 수 있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의 삶 역시 일종의 거대한 놀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단어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사랑을 깨닫는다고 했으나, 사랑은 그저 명명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명명된 것이 서로에 의해 승인되면 그때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되고 그와 동시에 사랑이라는 가상이 덧씌워진다.

사랑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묻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데이트를 하고 손을 잡고 키스를 한다. 사랑에 대한 개념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어떤 감정이 사랑으로 명명될 때 가상의 작동이 가속화되고, 사람들은 사랑을 하기 보다는 사랑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행동들을 흉내낸다.

사랑이라는 개념이나 관념을 모두 사용했을 때, 사랑이라는 개념이 계속해서 가지를 뻗지 못할 때 사랑은 식는다. 자신이 상정한 사랑의 가상으로부터 사랑이 멀어질 때 사랑이라는 감정을 바로 알게 된다. 그 사랑이라 불렸던 것들이 사실은 무수한 감정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은 그렇게 식는다.

△언어와 삶

우리가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 삶이라는 단어다. 삶이라는 단어를 산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정말 문제는, 우리의 삶이 삶이라는 단어에 국한될 때 발생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삶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만 할 때가 된다. 자기 스스로 삶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때부터 삶은 끝이 난다. 그건 죽지 않아도 죽은 삶이다.

놀이와 언어가 불리될 수 없듯이 삶과 언어가 분리될 수 없다. 언어와 가상 또한 분리될 수 없다. 언어는 텅 빈 껍질이자 내용이다. 과육을 포함하지 않은 사과껍질이 있을 수 없듯이 언어는 결코 언어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장난감을 해체하여 그 속에서 영혼을 발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행위 속에 영혼이 있는 것이지 어느 특정한 대상에 영혼이 몰려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삶은 삶이라는 언어 안에 있지만, 그 언어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랑 역시 이와 같아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살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을 연극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느낄 수 없다. 다시 말해 사랑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인생은 연극이긴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연극은 끝이 있지만 인생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조차 삶이라는 연극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이 아니라 삶이라는 언어를 산다. 언어가 곧 삶이어서 그 언어를 살지 않을 수는 없다.

단어를 사는 것이 곧 삶을 사는 것이다. 핵심은 단어의 개념에 매몰될 것인가 아니면 그 단어를 선점할 것인가에 있다. 단어를 사용만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일 것인가, 이것을 결정해야 한다. 놀랍게도 삶은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스스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하여 모든 삶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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