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깎이
세상에 귀찮은 것이야 많겠지만 그 중에 수위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손톱을 깎는 일이 아닐까? 세수와 양치질이 귀찮은 것의 목록에서 빠질 리 없겠지만, 매일매일 피할 수 없이 해야하므로 무뎌지기도 하고 어느 정도 포기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어느새 자라 있는 손톱. 늘 새삼스럽게 귀찮은 것은 바로 손톱을 깎는 일이다. 더군다나 그 손톱깎이란 놈은 찾을 때마다 어디론가 숨어버리지 않는가.
동물들은 손이 없으므로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들은 발톱도 깎지 않는다. 깎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깎을 틈이 없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야생의 생활환경은 발톱이 자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인간, 그리고 인간이 키우는 애완동물만이 손톱과 발톱을 인위적으로 깎게 된다. 문명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이루어주지만, 이처럼 사소하면서 귀찮은 문제들을 남겨주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데 만약 손톱깎이를 찾지 못했다면,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외출해 손톱이 부러지는 불상사라도 일어난다면, 그땐 손톱깎이를 원망해야 할지, 새삼스레 그 고마움을 떠올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의 손톱깎이가 태어난 지 불과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가위를 들고 끙끙대며 손톱을 깎지도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는 고마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
손톱깎이는 간단한 도구로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인류 역사가 수천 년을 기다린 끝에 만나게 된 기계장치이다. 손톱깎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로 ‘지렛대의 원리’인데, 손톱깎이에는 두 가지 유형의 지레가 동시에 적용된 ‘복합지레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손톱깎이의 손잡이에 힘을 가하면, 손잡이의 돌기에 의해 윗날이 내려가고, 중앙의 봉에 의해 아랫 날은 올라가는 방식인 것이다.
지레의 원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는데, 피라미드와 같은 놀라운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지렛대라고 알려져 있다. 지레의 구체적인 과학적 원리 또한 일찍부터 밝혀져 있었는데, 이를 처음으로 정리한 사람은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에게 긴 막대와 받침대만 주어진다면 지구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큰소리 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왕은 해변에 군함을 건조하고 이 군함 안에 병사들을 가득 태운 후 이것을 물에 띄우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를 응용한 도르레를 사용하여 이를 아주 쉽게 해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지레의 원리가 오래되었다면,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손톱깎이를 만드는 데는 왜 이렇게 긴 세월이 걸린 것일까? 아무리 손톱깎이가 복합지레를 사용한 나름 ‘복잡한 기계 장치’라고 할지라도, 긴 세월 동안의 인류는 참으로 무심했다는 생각도 든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노력이 문명을 만들어 냈다면, 인간은 문명에게 엄청난 빚을 진 셈이다. 그럼에도 문명은 인간에게 손톱을 깎는 일과 같은 사소한 귀찮음에서부터,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단순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명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문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다. 이제 와서 발톱이 길지 않도록 흙바닥에서 생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공학은 바로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공학자는 그런 것들을 고민해야 하고, 그리고 또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학이다. 오래된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간편한 손톱깎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공학이라면, 공학은 그 이상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공학자들이 모여 온난화, 대체연료 등 다양한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꿈꾸며, 공학은 이러한 꿈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발전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술발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역시 고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공학자에게는 윤리의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완속여과지
우리나라에서 콘크리트로 지어진 구조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무엇일까? 다리, 은행, 궁궐, 외국 대사관? 아쉽지만 어느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상수도 시설인 완속여과지다. 완속여과지는 1908년 뚝도수원지에 만들어졌다. 그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제일 아래에는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다시 모래를 덮고 그 위로 물을 흘려보내면 된다. 물이 매우 느리게 흐르는 동안 물속에 섞인 불순물이 가라앉게 된다. 이 완속여과지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이 겨우 상수도 시설이라니 허망한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완속여과지가 만들어진 이후 우리는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1906년까지 미국의 필라델피아시는 장티푸스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전염병을 퇴치하는데 있어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전염병 예방접종이 아니라 바로 완속여과지였다. 1906년 도입된 완속여과지는 전염병의 발병률을 급격히 감소시켰고 뒤이어 도입된 염소소독과 같은 공정이 추가되면서 인구 10만 명당 장티푸스의 발병률을 연간 500~600명에서 50명 이하로 낮출 수 있었다.
미국공학한림원(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이 ‘인류가 쌓은 최고의 업적 20가지’에 완속여과지를 넣었는데, 상하수도 시설이 인간의 평균 수명 연장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냉장고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20세기 중반까지 전세계적으로 가장 흔한 암이었던 위암 발병률을 급격히 낮추어 놓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
얼마 전 정년퇴임을 앞둔 두 교수님이 시골에 사는 것과 도시에 사는 것 중 어느 쪽이 건강과 장수에 더 도움이 되는가, 라는 것을 두고 논쟁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한 분은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훨씬 건강에 좋다는 주장을 내놓았고, 다른 분은 노년에는 의료시설과 가까운 도시에서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건강에 더 바람직하다는 새로운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러한 토론은 생산적이기 보다는 소모적이다. 둘 중 하나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절충하여야 한다. 도시스러운 도시, 시골스러운 시골은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종의 판타지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도시가 주는 이점과 시골이 가진 장점을 결합하는 일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상집 ‘월든’은 환경 파괴에 기반한 현대적 삶에 경종을 울리는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버리고 소로처럼 자연 속에 들어가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한 삶은 한 개인에게 가능할지는 몰라도 전 인류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공학과 과학으로 대변되는 물질문명을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효과적이고 합리적으로 이용하여야 한다.
시골은 시골로서의 편안함과 안락함이 존재하며 도시는 도시로서의 편리함과 쾌적함이 존재한다. 편안과 편리를 동시에 추구하고, 안락과 쾌적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향이야말로 우리 인류가 나아가야할 방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