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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 심청 혹은 ‘현자’ 심청

등록일 2018-05-11 20:50 게재일 2018-05-1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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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오른다. 여기에서 진흙이 번뇌라면 연꽃은 해탈이다. 심청이 연꽃 속에서 부활했다는 것은 인간적 고뇌를 모두 벗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심청은 효녀를 해탈한 현자로도 볼 수 있다.
▲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오른다. 여기에서 진흙이 번뇌라면 연꽃은 해탈이다. 심청이 연꽃 속에서 부활했다는 것은 인간적 고뇌를 모두 벗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심청은 효녀를 해탈한 현자로도 볼 수 있다.

△심청의 죽음

어버이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빠졌다는 심청을 떠올린다. 심청은 스스로 선택하여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판다. 이런 심청의 선택은 자발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자발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시야를 확장해 보면 이러한 심청의 자발적 선택 역시 사회에서 습득되고 사회가 설득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어쩌면 당대의 사회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효(孝)’라는 사회적 압력이 작동했고, 이것에 굴복한 꽃다운 심청은 반강제적으로 행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인당수에 빠지는 행위, 이것이 심청의 운명이었다고 말이다. 그녀의 이름이 이를 증거한다. 심청의 이름인 한자어 ‘沈淸’에서 ‘啞은 성씨로 쓰일 때는 ‘심’이라 읽지만, ‘잠기다’라는 뜻으로도 쓰이며 ‘침’으로 읽힌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그 ‘침묵’에도 이 한자를 쓴다. 침묵은 말 없음에 잠긴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심청’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심청은 이름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맑은 물에 잠기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다”라는 말은 동어반복 밖이라 할 수 있다. “맑은 물에 빠질 소녀(심청)는 맑은 물(인당수)에 빠졌다(침청).” 심청은 이름 속에 자신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심청은 운명에 굴복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그녀는 수동적이고 패배주의에 찌든 나약한 여성이다.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된다. 여기서 아버지는 단순히 아버지가 아니라 남성, 국가, 사회, 권력 등과 같이 심청을 억압하는 것들을 상징한다. 여성은 이런 대명사 ‘아버지’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제 심청은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추락한다.

△운명과 자유의 문제

그런데 운명을 따라가는 삶은 꼭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인 삶의 방식일까? 이것이 스토아학파가 처한 문제였다. 이들은 개인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운명이라는 것을 굳건히 믿었다. 그들이 보기에 운명은 “이겨낼 수 없고, 제지할 수 없고, 방향을 돌릴 수 없는 원인”이다.

이런 운명이라는 거대한 원리에 맞추어 가는 삶을 긍정하는 사람을 스토아학파는 현자라고 보았다. 얼핏 보기에 현자의 삶은 운명의 굴레에 갇힌 비주체적이며 수동적인 삶처럼 느껴진다. 스토아학파의 가치의 실행자인 ‘현자’에게 자유가 주어질 것 같지는 않다. 운명과 자유, 라는 이 모순적 관계를 스토아학파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스토아학파는 자유를 새롭게 해석해 낸다. 그들은 자유를 필연성이라고 보았다. 스토아학파는, 어리석은 사람만이 꼭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즉 어리석은 사람은 운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현자는 사건의 법칙(성)을 자기 자신의 법칙(성)이라고 본다. 현자는 다른 것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운명을 긍정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의(恣意)를 중시하며 이 자의는 정욕과 무질서의 격정으로 넘쳐흐른다. 이 자의 혹은 욕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유롭지가 못하며, 자기 충동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병든 사람이다.

그러나 스토아철학을 바탕으로 이런 ‘자의’를 지배하게 되어 건강해진 현자는, 운명의 필연성에 짓눌려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키케로의 말처럼 철학은 영혼의 의약이다. 철학자가 자기의 육체적인 성장과 성숙을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처럼, 현자는 운명이 정해준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며 이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다.

△자유 : 운명을 발견하는 일

스토아학파는 운명을 말하면서 어떻게 자유를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린 힐스베르그의 결론은 이렇다. 모든 운명을 긍정하며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자유며, 이 자유를 괴로워하지 않는 자가 현자라는 것.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토아학파의 윤리의 핵심 개념은 오이케이시스(Oikeiosis)에 대해 말해야 한다.

오이케이시스는 윤리적인 규범을 외부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내면에서 끌어내어 ‘전용(자기 것으로 삼음, Zueigung)’하는 일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플라톤의 오이케이온(Oikeion=선)도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평균적 또는 보편적으로 이상화된 ‘인간의 본성’도 아니다.

“오이케이오시스란 ‘자기 것으로 삼음(Zueigung)’이다. …중략…스토아학파가 말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은 플라톤의 윤리학이 말하는 그런 오이케이온(Oikeion=아카톤 <선>)도 아니고, 또 똑같이 이상화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의 본성도 아니며 감각적인 자기지각에서 충동적으로 생긴 오이케이오시스임이 분명하다(‘서양철학사’, 1992, 318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는 외부에서 왔거나, 인간의 평균적인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 규범의 목록이 존재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규범이 있기 때문에 그 규범을 지키면 윤리적이다. 이에 반해 스토아학파에게는 규범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윤리적 규범을 부정한다. 그들에게 윤리적 규범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 있다.

스토아학파에게 윤리가 내면에 있다면, 운명도 이와 같다. 외부에서 운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 운명이 새겨져 있고, 스토아학파는 수행을 통해 이 운명을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 비록 운명이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운명을 찾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인 것이다.

인간은 운명을 알지 못하며 개인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자신의 운명을 찾으려는 노력 그 속에서 절대적 자유가 생성된다. 이 자유는 윤리나 도덕에 지배받는 자유가 아니라 그러한 모든 것을 뚫고 날아오르는 자유다. 새로운 윤리와 도덕을 창조하는 자유다.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다시 말해 운명은 주어져 있지만 인간은 운명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명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운명은 ‘나’의 내부에 각인되어 있다. ‘나’를 끝까지 밀고 나갈 때 비로소 운명은 발견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나’를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는 곳까지 밀고나가는 일, 이것이 자유며, 스토아학파의 윤리다.

다시 ‘심청전’으로 돌아와 보자. 심청은 자신의 이름이 ‘맑은 물에 빠지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치마로 자기 얼굴을 감싸고 인당수에 들어갔던 그 때 비로소 심청은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연꽃으로 부활한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것은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전용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심청은 ‘효녀’이기 이전에 ‘현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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