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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어둠과 글쓰기의 밀도

등록일 2016-11-11 02:01 게재일 2016-11-1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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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강일 서울대 강사

학생들에게 글쓰기 강의를 시작할 때면,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각오로 써야 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정작 나는 그렇게 못 쓰지만, 학생들이 나 대신으로라도 이런 글을 써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 이야기는 우주의 어둠으로부터 시작한다.

우주에는 숱한 별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무수히 많은 은하가 존재하며, 또 태양과 같은 행성이 은하 속에 더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주엔 태양과 같이 빛을 뿜어내는 별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빛들에 의해 밤도 낮처럼 환해야 한다. 그런데 왜 밤하늘은 어두운 것일까?

이 문제는 1820년대에 활동했던 독일인 물리학자 올버스 혹은 올베르스(Heinrich Wilhelm Olbers)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올베르스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올베르스 역시 나름의 답을 내 놓았는데, 먼지와 가스층이 빛을 모두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다른 행성이 내는 열과 빛을 먼지와 가스층이 흡수하고 있다면, 이러한 먼지와 가스층 역시 빛을 방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열역학 제1법칙이 말해주듯 에너지는 보존되기 마련이며 그렇게 흡수된 빛은 어떤 식으로든 방출될 수밖에 없다. 결국 먼지와 가스층이 빛을 흡수한다고 해도 거기에 방출된 빛에 의해 밤하늘은 밝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제대로 된 답일 수 없다.

이 문제에 해법의 실마리를 던져 준 사람은 물리학자도 그렇다고 과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밤하늘의 신비에 매료되었던 애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였다.

“별들이 끝없이 나열되어 있다면 밤하늘은 눈부시게 빛나야 한다.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별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주공간의 대부분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멀리 있는 천체로부터 방출된 빛이 아직 우리의 눈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유레카`, 1848

포는 이런 답변을 내놓고 자신의 아이디어가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에 틀렸을 리가 없다”고 당차게 말했다. 저 오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실제로도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방출된 빛이 왜 우리의 눈에 도달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정도. 대부분의 어려운 문제가 그러하듯 이러한 문제는 인식의 지층에서 몇 발자국만 벗어나도 금방 답을 얻을 수 있다.

180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우주가 무한히 넓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 균일하게 퍼져 있는 정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나 균일한 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태양과 같이 빛을 내는 별들 역시 균일하게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구가 태양을 등지고 있는 밤중에도 다른 항성이 내는 빛에 의해 밤하늘은 밝아야 한다. 과학자들은 이런 인식에 가로막혀 과학자들은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포는 사유를 통해, 글쓰기를 통해, 당대적 인식을 무참히 깨뜨려버렸던 것이다.

▲ “새 신발을 샀다며 /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 나는 마침 면도를 막 끝낸 참이었다. / 두 사람은 교외로 / 가을을 툭툭 걷어차며 걸어갔다.” 이것은 일본 시인 가야마 쇼헤이가 1938년 발표한 짧은 작품이다. 지금 산은 온통 가을이어서 가을을 툭툭 걷어차며 걷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 “새 신발을 샀다며 /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 나는 마침 면도를 막 끝낸 참이었다. / 두 사람은 교외로 / 가을을 툭툭 걷어차며 걸어갔다.” 이것은 일본 시인 가야마 쇼헤이가 1938년 발표한 짧은 작품이다. 지금 산은 온통 가을이어서 가을을 툭툭 걷어차며 걷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천체로부터 방출된 빛이 아직 우리의 눈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 속에는 빛이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조건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왜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주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대의 우주관을 완전히 뒤집는 인식이다. 왜냐하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우주가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동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무한한 우주가 아닌 분명히 한계를 가지는 유한한 우주를 사유하게 되었다.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멀어지고 있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니 행성의 빛은 멀어지는 우주공간 속에서 영원히 지구를 향해 달려오고 끝끝내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포는 이러한 사실의 언저리에 비슷하게 가닿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사유가 가능했던 것일까? 오로지 언어로. 포는 언어가 만드는 아름다움에만 빠져 있었기 때문에 통념이나 상식이라는 인식 너머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가설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밀고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통 `미쳤다`고 말하는 그 상태 말이다. 글쓰기는 인식 내부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바깥을 지향한다. 그것이 글 쓰는 자의 윤리이며 존재론적 사명이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법, 도덕, 윤리, 나아가 사실이라고 불리는 것들까지도 넘어서는 일, 가로막힌 인식을 문장과 문단을 이용해 도약하는 일, 그것이 글쓰기의 `허리`이며, 글쓰기의 `자궁`이다. 이런 글쓰기가 아니라면 무엇 하러 글쓰기를 감행한단 말인가.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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