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소나기`의 중심인물은 이름이 없다. 소년, 소녀로 불린다. 황순원은 이들에게 이름을 주지 않은 것처럼 이들을 휘감고 있는 것은 감정 상태도 명명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수록된 교과서는 이것을 “사랑”이라 가르친다. 정말 그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소녀가 징검다리에서 소년을 기다렸다고 해서, 감히 다가오지도 못하는 소년에게 `바보`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런 소녀를 만날 수 있길 소년이 바랐다고 해서 소년과 소녀가 사랑하는 걸까? 둘이 함께 산에 올랐다고 해서, 소년이 소녀를 위해 꽃을 꺾어왔다고 해서, 소나기를 피해 수숫단 속에서 비를 그었다고 해서, 소년이 소녀를 업고 도랑을 건넜다고 해서, 소녀가 죽기 전 검붉은 물이 든 스웨터를 입혀서 묻어달라고 했다고 해서, 소녀와 소년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소년과 소녀는 매우 복잡하고, 야릇하고, 미묘하고, 그래서 여리고 연약한 어떤 상태를 헤매고 있다. 이 상태에 비해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무겁고, 너무 분명한 말이다. 분명 손을 내밀거나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이 감정을 움켜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감정이 손아귀에서 아스라질지도 모르며, `사랑해`라고 말할 때 뿜어져 나오는 입김에 이 감정이 공기 중으로 흩날릴지도 모른다. 소년과 소녀는 조심스러워 감히 말조차 할 수 없다. 아니 지금 이 상태만으로도 충만해서 더는 욕심을 낼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요즘 세대들이 말하는`썸`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썸`이라는 말은 어쩐지 가볍고 얇고 장난스럽게 느껴져 소년과 소녀가 함께 앓고 있는 이 감정에 딱 맞는 말 같지는 않다. 소년과 소녀는 한없이 가벼우면서 동시에 한없이 무거운 상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게재된 것은 1952년,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래서 평자들은 이 소설을 순수소설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쟁을 반대하는 다른 어떤 소설보다 효과적으로 반전을 말한다는 점에서 목적성을 가지며, 전쟁과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이런 소설을 가졌다는 것은 참 행운이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내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장면은 사실 이것이다.
이 날 밤, 소년은 몰래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으로 갔다.
낮에 봐 두었던 나무로 올라갔다. 그리고 봐 두었던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호두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굵은 호두야 많이 떨어져라, 많이 떨어져라, 저도 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작대기를 내리 치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열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뎠다. 그늘의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불룩한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옴이 오르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근동에서 제일가는 이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어서 소녀에게 맛보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아시겠지만 가을에는 호두가 익는다. 도시에서만 살아온 친구는 호두가 나무열매라는 사실에 놀란다. 아니 왜? 그렇게 단단하고 누르스름한 껍질을 가진 호두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나? 그도 그럴 것이 시중에서 파는 호두는 녹색의 외과피가 없기 때문에 그 매달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호두를 `호두송이`라 부르는 것은 마치 밤송이처럼 외과피를 포함하고 있어서다.
황순원도 도시 사람인지, 아니면 양반집 도련님이었는지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깐 일은 없나보다.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까면 `옴`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녹색물이 손에 배어 싯누렇게 된다. 날씨가 추워지면 외과피는 자연스럽게 벌어지는데 이것을 `히디기 돈다`고 한다. 아이들은 히디기가 돌기 전부터 호두를 따서는 돌에 껍질을 갈아 그 알맹이를 빼먹는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손이 싯누렇다 못해 호두물이 배어 시꺼멓게 변한 손을 꺼내놓았다.
이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년의 마음 때문이다.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소년은 호두를 서리한다. 남의 것을 훔친다는 죄책감에 `열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디는 소년의 여린 마음을 나는 사랑한다. 끝내 소녀에게 주지 못한 저 호두는 어떻게 되었을까? 소년은 습관처럼 호두를 만질 것이고 호두는 소년의 손때가 묻어 만질만질해졌을 것이다. 아무리 만져도 만질 수 없는 그리움과 함께 소년은 호두의 내과피처럼 `단단한 고요함`을 배우며 자랄 것이다. 호두의 껍질이 단단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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