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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구나무 선 가을 - 가을과 홍상수의 영화에 대해

등록일 2016-11-25 02:01 게재일 2016-11-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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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 갔다가 물속에 떨어진 낙엽을 찍었다. 그랬더니 낙엽 대신 나무가 불쑥 들어섰다. 짧은 문장을 붙이고 싶었다. “물구나무선 가을이 흐린 시간 너머로 흐르고 있다.”
▲ 산에 갔다가 물속에 떨어진 낙엽을 찍었다. 그랬더니 낙엽 대신 나무가 불쑥 들어섰다. 짧은 문장을 붙이고 싶었다. “물구나무선 가을이 흐린 시간 너머로 흐르고 있다.”

이 예민한 상황에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영화감독 홍상수의 이혼조정 신청이 이슈가 되고 있나보다. 중년의 감독이 낯선 여자를 만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는 내용의 영화를 무던히도 찍더니, 이제 홍상수는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삶을 살려고 하나보다.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니까. 홍상수의 영화는 실제로 그런지 아니면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개가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문턱에 있는 느낌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십 대에 내가 느꼈던 낯설면서 낯익은 정체모를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20대 전체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는 것도 공부도 연애도 뜻대로 되지 않아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고 집 앞 카페를 찾았던 그 날, 사람이 다니는 길 쪽의 넓은 창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고 비스듬히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오기엔 너무 이르고, 비가 오기엔 너무 찬 그런 날, 그런 오후였다. 그때 형이 내 옆을 지나갔다. 밖에서 보는 형은 집에서 보던 형과는 달랐다. 나보다 더 궂긴 얼굴을 하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차마 형을 불러 세우지 못했다. 그날 형이 낯설게 느껴졌던 건, 그가 집에서는 지을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형이 나처럼 고뇌하고 나처럼 젊음을 헤쳐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동질감보다는 일종의 배신감을 같은 것을 느꼈다.

홍상수 영화는 낯선 공간을 낯익은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를테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화성행궁, `옥희의 영화`의 아차산,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남한산성, `우리 선희`의 창경궁, `북촌방향`의 북촌 등 홍상수가 배경으로 삼는 공간은 모두 다르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모두가 같다. 그래서 낯선 공간은 낯익어지고, 그런 낯선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낯익음 때문에 낯설어진다.

나는 이것이 불만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화성행궁은 나에게는 매우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20대의 끄트머리에서 무엇이든 실패했고, 수원에 있던 친구의 집으로 도피하여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화성행궁을 배회하며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홍상수는 영화를 찍기 위해 일부러 수원을 찾아 화성행궁을 영화의 중심배경으로 삼은 주제에, 이것이 가진 세월의 두께와 의장을 걷어내고, `그저 그렇고 그런 곳`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 때문에 화성행궁이 더 낯설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느낀 것은 낯섦이 아니라 모욕감인지도 모르겠다.

홍상수는 늘 이런 식으로 맨 얼굴을 들이민다. 그래서 한동안 그의 영화가 불편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사람을 웃기게 만드는 재주가 있긴 하지만, 그 웃음을 유발하는 어이없는 행동은 다름 아닌 나의 행동이었고, 내가 알던 누군가의 행동이었다. 처음 본 여자 앞에서 눈물을 짜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함춘수(정재영)는 나였고, 프라이버시를 콕콕 집어내어 상대를 민망하게 만든 방수영(최화정)은 너였으며, 그런 낯 뜨거운 질문 앞에서도 낯 두껍게 앉아있던 함춘수는 그였다.

사건 속에 있을 땐 그 기만과 허위를 몰랐는데,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었고, 그 가소로운 말에 속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홍상수는 그런 나를 사건의 바깥으로 끌고 나와, 허망과 기망을 기어이 보게 만들고, 그런 것들의 실체를 알게 만든다. 홍상수는 나의 삶이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내 귀에 속삭인다. 그러니 불편할 밖에.

▲ 공강일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확히는 `우리 선희` 이후부터, 그의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애잔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만과 허위가, 살아가고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홍상수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거개가 영화감독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때 탁월한 영화를 만들었고, 대단한 열정을 가졌고,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뜨거움이 식어버린 뒤, 그들은 과거를 껍질처럼 뒤집어쓰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때로, 그 열정 가득한 삶 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랑하는 척하며, 슬픈 척하며, 방황하는 척한다. 그것이 `척`이라는 것을 자신도 알겠지만, 그것을 `척`이라고 인정해버리면 살아갈 수 있을까? 그들은 살아내기 위해 더욱 진지하고 의욕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연기한다. 그러다보면 자신까지 감쪽같이 속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의 과장과 과시는 웃기기보다 슬프다.

“내 귀는 소라껍질 /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고 노래했던 시인이 콕토였던가. 홍상수의 등장인물은 화석처럼 굳은 과거의 껍질을 집어 들고, 이글거리는 과거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사이 눈이 내려 그들이 걸어온 길이 하얗게 덮이고 있다. 그들도 우리도 왔던 길로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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