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강아지 `열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전화기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열무는 전화기를 향해 짖지 않는다. 곧장 현관으로 달려가 꼬리를 흔들며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으면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다 털레털레 내 옆으로 돌아와 털썩 소리가 나도록 누워버린다.
열무는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온다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나 보다. 아마 열무는 밖에 나갔던 엄마가 돌아왔고, 그 목소리는 현관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모르긴 몰라도 열무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비록 자기 방식이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현관에 엄마가 없는데, 엄마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걸까, 열무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열무는 이 혼란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내가 잘못 들었겠지, 라고 간단히 생각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열무는 내 옆에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눕는다. 열무는 내가 컴퓨터를 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열무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오래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혹은 외면함으로써 혼란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혼란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혼란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뭐 이런 식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루마니아의 민속학자인 콘스탄틴 부라일로이우는 마라무레쉬라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민요 하나를 채집할 수 있었다. 산의 요정이 젊은 남자에게 홀렸는데, 그 남자의 결혼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질투심에 불탄 요정이 남자를 바위 꼭대기에서 아래로 떠밀어버린다. 그 다음날, 목동들이 남자의 시신과 함께 나무에 걸려 있는 모자를 찾아낸다. 목동들이 시신을 마을로 가져오자 남자의 약혼녀가 보러 온다. 약혼자의 목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장송곡 하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랫말은 신화적인 암시들로 가득한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제례용 가사이다”-엘리아데`영원회귀의 신화`, 57면
이것은 마라무레쉬 마을의 아름다운 민요에 관한 이야기다. 결혼식을 앞둔 남자가 있었다, 그가 산에 올라갔다, 그랬다가 그만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하지만 요정이 젊은 남자에게 홀렸다거나 그래서 요정이 젊은 남자를 죽였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다. 젊은 남자가 죽을 때는 옆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시신은 사고가 있었던 그 다음날이 아닌 바로 그날 찾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 젊은 남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모르는 빈 칸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민속학자 부라일로이우도 이렇게 생각했을려나? 여하튼 그는 이 민요의 유래가 무척 궁금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요라고 말했다. 부라일로이우는 집요하게 탐문한 결과 이 민요에 등장하는 젊은 청년과 실제로 약혼했던 여성을 만나게 된다.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오래된 민요라더니 어떻게 약혼했던 여성을 만날 수 있었던 거지?
이 민요는 사실 아주 평범한 비극이었다. 그녀의 약혼자가 어느 날 저녁 부주의로 절벽에서 미끄러진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비명 소리를 들은 산사람들이 그를 마을로 데려오고, 그 얼마 뒤에 그는 목숨을 거둔다. 장례식에서 남자의 약혼녀는 마을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평범한 장송곡을 되풀이해서 불렀지만, 그 노래에 산의 요정에 대한 언급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요정 같은 건 없었다. 젊은 남자는 산에 올라갔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고 며칠을 앓다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젊은이의 죽음을 좀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 젊은 남자에게 찾아온 불운을, 그것도 결혼을 앞둔 이에게 찾아온 불운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우연처럼 찾아오는 사고의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 민요와 그 내력담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 2008년 `광우병 사태`를 어떤 사람들은 `광우뻥 소동`이라고도 한다. 그것이 `뻥`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 미국산 수입 소고기 협상에 대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충분히 주지 않았고, 국민들은 여기에 반발했다. 그래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유독 `이야기`가 많았다. 메르스 사태, 세월호 사태, 최순실 사태, 사드 배치 등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는 만들어졌다. 이것이 정부에 의해 유언비어나 괴담으로 규정되었다. `이야기`든 유언비어든 괴담이든 그 출처와 유포의 가장 큰 조력자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은 정권 자신이다.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다. 세월호와 잠수함의 충돌설, 세월호가 핵폐기물을 싣고 있었다는 주장, 부재한 7시간 동안 대통령의 행방과 관련된 각 가지 추문들이 그러하다. 가라앉은 세월호를 인양하고, 대통령이 자신의 행적을 명확히 밝힌다면 유언비어나 괴담은 유포되지 않을 것이다. 위협과 협박은 유언비어를 증폭시키지 근절시키지는 못한다. 의혹이 있다면 감추지 말고 투명하게 밝히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검 수사를 성실히 받겠다더니 수사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어왔다. 어제는 수사 날짜가 합의되었다는 뉴스가 들리더니, 오늘은 특검이 대면조사 날짜를 유출했다는 이유로 조사가 무산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혼란한 정국이 계속될 것이다. 이 혼란을 회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혼란을 정리하려는 노력, 그것이 유언비어나 괴담을 만들 수도 있지만, 혼란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진실은 인양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더욱이 우린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