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라는 말이 헷갈렸다. 풍경은 `경치`(風景)라는 뜻도 있지만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風磬)이라는 뜻도 있다. 풍경(風景)이 바람이 만드는 경치라면 풍경(風磬)은 바람이 만드는 소리다. 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절에서 풍경(風磬)은 그윽하게 울려, 그 소리가 절 전체로 퍼지면 하나의 풍경(風景)이 된다. 그리하여 풍경(風磬)과 풍경(風景)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風磬과 風景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은상이 작사하고 홍난파가 작곡을 한 “성불사의 밤”이라는 가곡을 알게 된 뒤부터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뎅그렁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일 젠 또 들릴까 소리 나기 기다려져
새도록 풍경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홍난파는 이은상의 시조가 마음에 들어 곡을 붙였다고 했다. 어떤 점이 좋았는지 구체적 밝히고 있지 않으나 그가 이은상의 시조를 좋아하긴 했던 것 같다. 홍난파는 1931년 7월 미국 유학을 떠나 1933년 2월에 귀국했고, 같은 해 5월 `조선가요작곡집`을 간행했다. 이 작곡집은`제1집 노산시조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러니까 돌아와서 거의 제일 먼저 한 것이 노산의 시조에 곡을 붙이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조에 나오는 성불사는 어디에 있는 절일까? 물론 속리산에도 성불사는 있고, 심지어 그 절에는 `성불사의 밤`이라는 시비(詩碑)도 있다. 이 곡에 나오는 사찰은 미안하게도 속리산의 그것이 아니라 황해도 정방산의 성불사라고 한다. 이 시조는 이은상이 1932년 출판한 `노산시조집`에 실려 있으며, 시조에는 거의 모두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성불사의 밤`에는 1931년 8월 19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짐작컨대 이것은 시를 쓴 날짜이거나 시를 쓰기 시작한 날짜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은상이 성불사에 들렀던 날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시에는 그 지명이 꼭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꼭 `영변에 약산`의 진달래꽃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는데, 정지용의 `장수산`이 꼭 장수산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이성복의 `남해금산`이 꼭 남해금산일 필요는 없다. `성불사의 밤`의 `풍경(風磬)` 역시 꼭 성불사의 풍경이 아니어도 된다.
그런데 아무런 연관성 없는 것들, 처음에는 자의적으로 엮어 있던 것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면서 사회성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당신의 걸음마다에는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을 뿌려야만 하며,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산은 장수산이어야만 하며, “그 여자 울면서 떠나간 돌”은 남해금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의 어느 돌이어야만 한다. 성불사의 풍경(風磬) 역시 그런 식으로 필연성을 갖게 된다. 당신과 당신의 이름이 처음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가 결국에는 당신을 생각하면 당신의 이름이 떠오르고, 당신의 이름을 떠올리면 당신이 떠오르는 것처럼 자의적인 것들이 유통되고 지속되면 어느 사이 필연성이라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런 식으로 성불사의 풍경(風磬)은 숱한 풍경 중의 하나가 아닌 유일한 풍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
성불사를 찾은 `손`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이은상 자신이겠지만, 나는 이보다 더 큰 고민을 가진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해본다. 아주 가는 바람 한 줄에도 흔들릴 것이 분명한 풍경 소리에 잠들지 못하는 그는, 지독한 괴로움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풍경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주승(主僧)`은 잠들어 있다. 주승과 달리 저 `객(客)`은 무명(불교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하는 고제·집제·멸제·도제의 근본의에 통달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무명을 벗어던진 주승보다는 저 손님이 부럽다. 그가 앓고 있는 그의 고통이 부럽다. 도망치듯 도시를 떠났겠으나 여전히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격렬한 생각들, 그 괴로움은 물질적인 것이나 육체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리라. 생활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경제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만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저 손님의 고통은 순전히 정신적인 종류의 어떤 것이리라. 사랑이나 신념 같은 것들,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성불사에 들린 저 사람이 부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생활이 아니라 펄떡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생활이 아닌 삶. 고통과 환희, 그런 격정에 휩싸이는 삶. 더 격렬한 격정을 갈구하는 삶. 그 뜨거운 삶이 나는 못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