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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난리다

등록일 2016-11-04 02:01 게재일 2016-11-0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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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강일 서울대 강사

한 여자 때문에 나라가 난리다. 아니 둘? 그것도 아니면 셋? 미국의 대선주자이자 막말의 대가인 트럼프가 “여자 대통령의 끝을 보려면 한국 대통령을 보라”고 일갈했다는 루머까지 떠돌았다. 여성 비하나 일삼는 인간에게 이런 말을 들으려니 죽을 맛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트럼프까지 당선시킬 기세라며 극보수 단체 사이트에서도 비아냥거린다.

주말에는 전국적으로 5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있었다. 비록 가진 못했지만, 여러 보도와 사진을 통해 그 현장이 어땠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때도 그랬다. 광화문은 거대한 군중의 가장행렬장이었다. 유모차를 몰고 나온 엄마부대, “2MB USB를 찾습니다”와 같은 피켓, 그리고 제대로 놀란 정부가 보여준 명박산성까지….

이번 시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나보다. 하야, 탄핵, 퇴진 이런 팻말이 거개였지만,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이 곳곳에서 넘쳐났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퇴하세요.”, “간절히 빌면 온 우주가 하야를 돕는다”는 플래카드는 그나마 점잖은 축에 속했다. 잠시지만 광화문 교차로 중간에 단두대가 등장하기도 했다. 최순실이 대통령을 꼭두각시처럼 조정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한 그룹은 “대통령직을 사퇴하겠습니다”라는 가상 기자회견을 선보였다. `순siri`, `ㄹ혜`, `유라`라는 이름표를 달고 등장한 이들은 그 이름에 해당하는 가면을 썼다.(siri는 `실`이며 `ㄹ`은 자세히 보면 `근`의 축약이다.) `유라`는 가면 대신 “이모~ 잘 좀 끌어봐.”라는 말풍선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을 탔다. 그런가하면 “이게 나라입니까?”라는 현수막으로 무대를 꾸미고, 살풀이 복장으로 “시굿선언” 퍼포먼스를 펼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여기엔 선녀 코스튬을 한 팔선녀도 함께했다.

주최가 있고, 그들에 따라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런 집회를 생각했다면, 글쎄?

그런 시위는 애저녁에 사라진 게 아닐까. 참여자들은 한 곳에 모였을 뿐, 생각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다. 이들의 배후에는 종북세력도 없고, 불순세력도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뿐이다. 언젠가 한 시인은 이렇게 썼다.

… 전략 …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 중략 …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이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 송경동 `사소한 물음에 답함`

▲ 국정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 씨가 검찰에 출두했을 때 벗겨진 구두다. 신발을 끌고 온 역사를 `이력`이라 부른다. 그녀는 검찰 출두 하루 전 얼마의 이력을 벗어놓은 것일까? 그녀가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면 헐벗고 발 벗은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설움을 위안 받나.
▲ 국정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 씨가 검찰에 출두했을 때 벗겨진 구두다. 신발을 끌고 온 역사를 `이력`이라 부른다. 그녀는 검찰 출두 하루 전 얼마의 이력을 벗어놓은 것일까? 그녀가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면 헐벗고 발 벗은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설움을 위안 받나.

2008년 `광우병 사태`가 잠잠해진 뒤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다고 정부는 여론몰이를 했지만 여지껏 불순세력을 찾아내진 못했다. 그런데도 이 사태는 `광우뻥 파동`이니 `광우병 난동`으로 불리곤 한다. 거기엔 정말이지 배후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었다. 정부가 국민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국민의 안위 따위는 신경도 안 쓴 채 조약을 체결한, 대통령에 대한 분노, 그건 순수한 분노였다. 배후가 있다면, 무리한 조약을 체결한 정부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자 국민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국민의 분노는 잦아들었지만, 문제의 본질, “30개월 미만 및 30개월 이상의 미국쇠고기를 수입한다는 쇠고기협상”은 바뀌지 않았다. 통렬히 반성했던 대통령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배후를 찾겠다며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다. 우리 역시 광화문에 나갔다는 사실조차 지워버리고 불순세력에게 선동당한 일부 몰지각한 국민들이 벌인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국민의 분노는 무섭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이어서 이내 사라지고 만다. 철지난 `광우병 촛불`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지금`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해 국민은 수치와 분노를 느끼고 있다. 감정은 한낱 감정이어서 사태의 심각성이나 본질을 망각할 때가 많다. 이 사태의 본질은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이며, 그 대안은 관련자들, 그리고 이를 방조한 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다.

어쩌면 우리는 또 다시 핵심을 놓쳐버리고 분노했던 이유조차 잊어버릴지 모른다. 그건 감정이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권력을 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더 멀리 뛰기 위해 개구리가 움츠리듯 이들은 지금 웅크리고 있다. 이 사태를 얼렁뚱땅 견뎌내고 더 견고한 방식으로 탄압과 배후색출을 감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는 안녕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안녕은 집이나 술자리가 아니라 저기 거리와 광장에 있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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