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년이나 지났다. 하루는 더뎌도 한 해는 잘도 흘러간다. 2009년에서 2010년으로 넘어가던 그 해 겨울, 울주군 천전리와 대곡리에 있는 암각화를 보기 위해 몇 번이고 내려가 며칠씩을 묵고 돌아왔다.
천전리 암각화에는 주로 석기 혹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추상적인 문양과 신라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그림과 글자가 새겨져 있다. 법흥왕의 동생과 그 부인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명문(銘文)이 적혀 있어 서석(書石)이라고도 부른다.
대곡리에는 거북이가 엎드린 듯한 모양을 한 바위라는 뜻의 반구대가 있다. 여기에는 주로 고래, 사람, 소, 호랑이 같은 동물을 그려놓아서 반구대 암각화라고 부른다.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는 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기게 되었다. 겨울에는 물이 적어 잠기진 않지만, 뭍에서 반구대까지는 물이 가로막고 있어 가까이에서는 볼 수 없다.
이 두 개의 암각화는 아득한 시절에 새겨졌는데,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새겼는지 알 수 없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역시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분명히 저기에, 수천 혹은 수만 년 동안 존재하고 있음에도 알 수 없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우리가 계속해서 모른다는 것이 가능하다니 참 이상하다.
우리는 우주가 대폭발을 통해 태어났다는 것도 알고 있고, 심지어 100분의 1초로부터 탄생 직후 3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까지 알고 있으며, 앞으로 우주가 어떤 모습이 될지 역시 추론할 수 있다. 우주의 탄생이라는 그 까마득한 시간, 137억년이라는 그 까마득한 시간, 너무도 까마득해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는 저 암각화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기껏 몇 만 년도 채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물론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를 잡는 모습,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래서 문화재청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이 맞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선사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어떤 습관과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항상 궁핍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먹을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여기에는 선사인들은 지적인 활동이나 정신적인 활동 같은 것들은 없었으며, 원시인이나 야만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더 깊은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 선사시대를 바라볼 수는 없을까, 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더욱 지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닐까. 암각화를 찾아다녔던 것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을 제기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따라다녔던 선생님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그분은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이었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그런 사유가 좋았다.
그곳에서는 주로 사진을 찍으며 서석과 반구대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하루는 아침 9시에 도착해서 해가 지도록 사진을 찍을 때도 있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선생님은 암각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먼저 돌에 새겨진 형상 바깥을 볼 필요도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많은 고래들이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 고래의 형상을 주목한다. 그런데 그림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부분, 그러니까 고래와 고래가 만나는 여백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에 집중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암각화를 들여다보면 커다란 창도 보이고, 뿔 모양의 그릇도 보인다. 또 다른 방법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전체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서석은 커다란 배를 닮았고, 반구대에서는 큰 얼굴과 스핑크스 모양의 사람도 찾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선사인들이 의도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의도적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것이 맞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그런데 서석 아래에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고 의미 있는 암각화를 하나 발견했다. 이 암각화는 학계에 보고된 적도 없는 그야말로 발견에 해당하는 암각화다. 여기에는 집처럼 생긴 암각화가 그려져 있고, 샤먼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집의 오른편에 서 있다. 집은 한옥처럼 생겼는데 지붕이 있고, 기둥도 있다. 큰 기둥은 총 네 개가 있다. 그렇게 해서 세 개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바닥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방마다 다른데 제일 왼쪽은 대청마루처럼 바닥이 높고, 가운데 방은 바닥이 가장 낮다. 집 옆에 샤먼은 만세를 하는 듯 팔을 치켜들고 있다. 머리에는 뿔 같은 것이 양쪽으로 삐죽 솟아있고, 두 개의 눈이 정확히 찍혀 있고, 팔등신 미녀처럼 긴 다리를 가지고 있다.
새기는 기법으로 봐서는 천전리나 대곡리에 새겨진 것과 같고, 형상을 표현하는 방식도 유사하다. 이것이 선사인들이 만든 것이라면 정말 큰 발견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선사시대의 집이 움막형태였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암각화가 정말 선사인들이 그린 것이라면 당시의 집은 한옥에 가깝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이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운 것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배움은 우리의 사유를 더 넓은 곳으로 확장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사유를 배움이라는 한계 속에 가두기도 한다.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이란 쉽지 않다.
그런데 뭐 어떤가. 선사인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무식한 원시인이 아니었다고 상상한다고 해서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구석기 시대는 무려 70만 년이나 된다. 인간은 기원 후 기껏 2000년 밖에 살지 않았으며 현대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축적해 왔고 말도 안 되는 발전을 이룩해왔다. 그런데 70만 년 동안 구석기인들은 마냥 멍청하게만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현대인의 오만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난다면 이런 암각화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