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을 지나가는 버스인데, 시청엘 가려면 지하철을 타라한다. 어쩔 수 없이 서울역에 내렸다. 지하철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빡빡하다. 지하철은 배가 터질 듯 사람을 태우고, 겨우 한 정거장을 지나쳐 배가 홀쭉해진다. 시청역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데만 10분이 넘게 걸린다. 두 시간 전에 서울역에 도착한다고 전화를 주신 부모님은 연락두절이다. 농민회 분들과 행진 중이려나?
사람들과 함께 떠밀리고 있다. 정말 이렇게 많은 인파라니, 사람의 파도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나는 분명 흐르고 있다. 평소 같으면 아무리 천천히 가도 1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한 시간을 넘게 걷고 있다. 핸드폰은 울리긴 하지만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참 이런 일이 다 있다. 2016년 11월 12일. 하야시키기 딱 좋은 날씨에, 하야시키기 딱 좋을 만큼 사람들이 모였다.
불과 몇 달, 아니 몇 달이 뭐야, 정확히 10월 셋째주까지도 대통령의 지지율은 25%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24일 JTBC의 결정적 한 방, 대통령의 연설문을 최순실이 고친 정황이 보도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대통령이 다음날 바로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통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주일이 안 가서 다시 두 번째 사과를 했지만, 국민은 사과든 죽창이든 닥치는 대로 던질 기세였다. 우리 옆집 아저씨의 지지율을 조사해도 대통령의 그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100명 중에서 5명이라니. 이 정도면 가문의 수치라 해야 옳겠지만, 정작 수치심을 느낀 건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었다.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종로에서 서대문까지 최저 25만에서 최대 130만명이 모였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엔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이 있었다. 대통령님께서 국민대통합을 그렇게 입버릇처럼 되뇌더니, 이 어려운 때에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해내신다. 참 대단하다.
그런데 찬물을 끼얹어 미안하지만, 이 사건을 조금더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그동안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행한 아주 미미한 악행에 지나지 않는다. 4대강 사업과 녹조, 2014년 4월 17일 세월호, 2015년 6월의 메르스 등에 비하면 말이다. 국민의 직접적인 안전과 생명이 직결된 일에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았나?
세월호 참사로 295명이, 그것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장되었고 아직도 9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일에는 화내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교통사고로 한 해 4천명 이상이 죽는다며, 세월호도 그런 교통사고 중 하나라고 말하는 파렴치한 정부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더니, 겨우 이 따위 일에 온 나라가 난리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순실이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겨우 연설문 고친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어떻게 세월호와 교통사고가 같을 수 있겠어요. 생각 좀 해보세요. 배가 침몰하고 있었어요. 해경이 선원과 선장들은 다 구하고 학생들은 구하지 않았다고요. 배에서 나오라고 말만 했어도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한 게 아니라 정말 구해주지 않았다구요. 보다 못한 국민들이 온갖 대책을 다 내놓았는데 정부는 듣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냥 그 어린 아이들이 수장되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지켜봐야 했어요. 아시겠어요? 정부가 저들을 고의로 수장시킬 때 그걸 지켜본 우리 역시 공범이라는 걸 말입니다. 우리는 중 그 누구도 천국에 가진 못할 겁니다.)
메르스가 생떼 같은 서른일곱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었나? 국가와 병원이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해서 병을 고치러 간 병원에서 병에 옮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왜 우리는 분노하지 않았나? 독감에 걸려 죽는 사람이 한 해 300명이 된다고 떠벌리는 저 벌레만도 못한 정부와 여당의 정치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하더니 말이다.
우리는 작은 일에만 분개한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의 일에 대해서만 분노하고, 분노해야 할 대상이 명확해야만 분노한다. 그래서 이제 그 분노가 목표와 방향을 찾은 것 같아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그런데 걱정이다. 저 많은 죄인들 중 단 한 명만 처벌해도 이 많은 국민들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아서 말이다. 세월호 선장에게 무기징역을 때리고, 누가 봐도 아닐 것 같은 유병언의 시체를 찾은 것만으로도 우리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던가.
대통령을 비롯한 저 확신범들이 유유히 사라지고 나면, 억울하게 죽은 세월호, 메르스의 희생자들은 누가 어떻게 달래주나. 우리는 또 이 분노를 어떻게 삼켜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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