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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 선 밑으로 차 바치지 마세요”에 대해

등록일 2016-10-28 02:01 게재일 2016-10-2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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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에 쓰인 글자의 `힌 선`은 `흰 선`으로, `바치지`는 `받치지`로 쓰는 것이 옳다. 어문규정 혹은 맞춤법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맞춤법이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 말끔한 말로 진심까지 전달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법규, 규정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인간의 실제적 삶보다 언제나 더 늦게 도착하기 때문이다.
▲ 바닥에 쓰인 글자의 `힌 선`은 `흰 선`으로, `바치지`는 `받치지`로 쓰는 것이 옳다. 어문규정 혹은 맞춤법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맞춤법이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 말끔한 말로 진심까지 전달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법규, 규정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인간의 실제적 삶보다 언제나 더 늦게 도착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문장쓰기` 수업에서 쓰려고 찍어두었다. 이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나는,`쓴 자`의 교육수준과 그 이기심에 대해 이야기했고, 문장 속에는 너희의 치부와 너희의 인격이 드러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 고 이빨을 까며 젠체했다. 그런데 사진을 찍었던 곳을 다시 지나며 저 글을 `쓴 이`가 아닌 나의 성급함과 무지를 반성하게 되었다. 나의 성급함과 무지는 오독에서 비롯한다. 나는 `흰 선 밑으로 내 차를 댈 테다`라고 읽었다. 정확한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무식할 뿐만 아니라 이기심 많은 인간이라는 나의 선입견과 독선이 이러한 오독을 낳은 것이리라.

사진에는 잘 나와 있지 않으나, `힌 선 밑`은 빌라의 현관이다. 흰 선 아래에 차를 대면 입주자들이 불편하기 때문에 이 흰 선 위로 차를 주차해달라는 뜻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쓴 이는 설령 배운 것이 없을는지는 몰라도 입주자와 차주인 모두를 배려하는 인격자일 것이다.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비방했던 것을 반성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신원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우선 정체가 모호한 `바치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문맥을 고려할 때) “바치지”가 `주/정차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단어의 기본형은 `바치다`일 수는 없다. `바치다`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다”와 같이 정중하게 무엇을 드린다는 의미로 쓰이거나, “술을 바치다”와 같이 주접스럽게 무언가를 좋아하다는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치지`의 기본형을 `바치다`로 보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바치지`는 어디에서 온 말일까? `받침목(돌)`은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다. 받침목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은 그리 멀지 않다. 1985년 경향신문에서는 “오늘 아침 승용차 바퀴 받침목 빼내자 `꽝`”이라는 기사가 실렸으며, 1998년 12월 9일자 매일경제에는 “또 차량이 어떠한 경우에도 저절로 굴러가지 않도록 바퀴 밑에 받침목이나 받침돌을 괴어놓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게는 저 혼자서 서 있을 수 없기에 받쳐야 할 작대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그것을 신뢰할 수 없었던 시절 차에는 `받침목(돌)`이 있어야 제대로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동안 사람들은 지게를 받치듯, 차를 받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를 받친다`는 말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말일 것이며, 또 시대의 변화와 함께 이 말은 사라져갔을 것이다.

어찌되었던 “바치지”가 `받치지` 즉 `주/정차하지`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글을 쓴 사람의 나이다. `주차`라는 말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것은 자가용의 보급과 함께이다. 1975년 포니의 출시와 함께 1987까지 주차라는 단어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신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단어의 빈도가 갑작스럽게 많아진 것은 1988년 이후로, 이때부터는 신문에서 거의 매일 `주차`라는 단어를 볼 수 있게 된다. `주차`라는 단어의 대중화는 1985년 액셀, 1986년 프라이드와 르망, 1988년 쏘나타와 같은 차량이 출시되고 이것이 대량 소비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 문장을 쓴 이가 `주차`보다는 `차를 받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며, 1980년대 후반부터 일상화되기 시작한 `주차`라는 단어를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저 글을 쓴 사람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마시오`가 아닌 `마세요`를 썼다는 것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시오`는 격식을 갖춘 말로 구어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상대를 높이는 존칭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낮추지 않으면서 상대를 높이는 특이한 형태의 높임이다. 그래서 `마시오`는 단호하다. 이와 달리 `마세요`는 상대를 더 높이면서 거추장스러운 격식을 벗어던진다. 격식에서 벗어난 “마세요”는 차주인에게 단호하게 `호소`하기보다 정감 있게 `부탁`한다. 그가 사용한 `시오`와 `세요`의 차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김연수의 소설을 일절을 인용하는 것이 더 낫겠다.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짜피 人生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아니겠냐`라고 쓴 뒤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중간에 `느`자를 삽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이가 생긴 뒤에야 나는 그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됐다(김연수, `내가 아이였을 때`, 74면).

그렇다. “마세요”는 “아니겠느냐”처럼 읽는 사람을 배려하여 단정적인 말하기를 피한다. 이 말들은 완곡하며 또한 부드럽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인격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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