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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다행이어라

등록일 2017-01-20 02:01 게재일 2017-01-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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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전집` 출판에 부쳐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혹시 여러분은, 1936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 제목이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당시에는 `메밀`을 `모밀`로도 불렀는데 한글맞춤법 원칙이 바뀌면서 `메밀`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제6차 교육과정(1996년)에 따라 국정고등교과서 국어(상)에 실리면서 `메밀꽃 필 무렵`은 이 소설의 제목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언어도 변한다. 원래 `모밀`이었던 것이 `메밀`로 바뀌었으니 작품 속의 단어들 역시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 실제로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아니나) 달빛에 감동하여(야)서였다. 이즈러는졌(ㅈㅓㅆ)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느)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녀)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즘생)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니)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닢)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여)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곰)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ㅤㅇㅒㅆ었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낭)딸랑(낭) 메밀밭께로 흘러(너)간다. 앞장 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녔)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 멋에 적적하지는 않았(었)다.”

▲ 애니메이션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부분. 조 선달, 허 생원, 동이가 나귀를 타고 걷고 있다. 달이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는 밤, 메밀꽃은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더욱 하얗게 빛난다.
▲ 애니메이션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부분. 조 선달, 허 생원, 동이가 나귀를 타고 걷고 있다. 달이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는 밤, 메밀꽃은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더욱 하얗게 빛난다.

인용한 부분은 한국소설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회자되곤 한다. “()”(괄호)는 처음 발표되었을 때 표기된 것인데, 예컨대, `짐승`은 `즘생`이었고 `소금`은 `소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과거의 단어를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현대어에 맞게 바꿀 것인가? 이게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인용문에 있는 “[ ]”(대괄호) 부분은 최초 게재본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옮김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출판된 책에서는 `흐붓`이라고 해놓을 자리에 `흐뭇`을, `흐뭇`이라고 해야 할 자리에 `흐붓`을 표기해 놓았다. 또는 `흐붓`을 없애고 모두 `흐뭇`으로 바꿔놓은 것도 있다.

다시, 이게 무슨 문제냐고? 당연히 큰 문제다. 그 문제를 두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이효석은 `흐붓`이라고 썼지 `흐뭇`이라고 쓰지 않았다. 작가가 쓰지도 않은 것을 마음대로 바꾼다면 그것을 이효석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의미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흐뭇하다`는 `흡족하다, 만족스럽다`의 뜻이지만, `흐붓하다`는 `흐벅지다`에서 파생된 말로 여겨지며, “탐스러울 정도로 두툼하고 부드럽다 또는 양이 많다”의 뜻을 지닌다. 그래서 `달빛이 흐뭇하다`는 것은 `달빛이 흡족할 만큼 만족스럽다`는 뜻이지만, `달빛이 흐붓하다`고 하면 `달빛이 탐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포근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둘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느껴진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의 `이효석문학관`.
▲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의 `이효석문학관`.

모르긴 몰라도 이효석은 그 어감과 의미를 생각해서 `흐뭇`이 아니라 `흐붓`을 썼다. 이런 아주 미미하고 미세한 부분까지 고려해서 작가는 단어를 선택한다. 그런데 마음대로 단어를 바꿔버린다면 작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며, 그만큼 작품의 느낌도 상쇄된다. 작가는 이런 것들에 매달린다. `이런 일`, 그러니까 `흐붓`과 `흐뭇`을 구분하는 일은 경제학적으로나 실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별 볼일 없는 일`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며, 세월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그 뿐인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평창군은 봉평에서 매년 `이효석 문화제`를 열어 수만의 관광객을 유치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사에 이런 걸출한 작품이 기록되며, 이를 통해 학생들은 문학의 아름다움과 우리말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도 이것을 `별 볼 일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이효석전집`(총6권)이 출판되었다. 이 작업은 2012년 5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거의 5년이 걸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효석이 최초로 게재한 작품과 또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수정한 작품들을 일일이 비교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효석이 쓴 것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에 사시든 이효석의 아드님이신 이우현 선생님이 한국으로 귀국하셨고, 이 작업에 드는 모든 비용을 자비로 부담하셨다. 또 작업에 직접 참여하여 고언을 해주셨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신 이상옥 선생님은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청년보다 더 큰 열정을 가지고 편집과 교감의 책임을 맡아 가장 성실하게 이 일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채정 선생님, 이지훈 선생님, 나보령 선생님이 교정작업에 참여하여 실무를 해주었다.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효석전집`의 출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작가도 그렇지만 학자 역시 이런 `별 볼 일 없는 일`을 위해 노력한다. 가장 지루하고, 가장 볼품없으며, 인기도 없고, 아무런 영광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 그런 일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참여한다. 그리하여 작품은 새롭게 거듭나며, 시간이라는 거대한 파도와 싸워 이겨낸다. 여전히 온몸과 마음을 받쳐 작품을 쓰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작가들의 노고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첨단과학과 공학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문학은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안과 감동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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