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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아브락사스

`데미안`의 소주제는 `알 깨고 나오기` 이다. 싱클레어가 보낸 새 그림 편지에 대한 답으로 데미안은 다음과 같은 쪽지를 준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신학교 시절 분신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시절 헤세는 선과 악, 신과 악마, 밝음과 어둠 등 이 세상을 이분법적인 세계로 나누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예민하고 조숙한 신학생은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아브락사스를 끌어들였다. 좋은 생각, 신에 대한 의지, 도덕적 잣대 등이야말로 세상을 트집 잡기 쉽고, 인간 내면을 옭아매는 파괴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악덕의 세계 역시 다른 한 세계이고, 그 또한 인간을 지배하는 한 관념으로 보았다.금기에의 내면적 모든 도전은 아브락사스로 불릴 만하다. 저급한 욕망과 성스런 영혼 따위로 인간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경직된 사고를 대신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를 아브락사스에 담아내고자 했다. 젊은 음악가 피스테리우스를 만나 싱클레어는 그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주고받는다. 피스토리우스가 음악을 하는 건 단지 음악은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싱클레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편할 테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험난할 거야. 그래도 한번 가보지 않을래?` 이렇게 아브락사스를 알리는데 급급한 피스토리우스 역시 낡은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 싱클레어로서는 자신의 내면을 알아가는 게 더 급선무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싱클레어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실행하고자 했다. 길들여진 훈계, 윤리적 죄책감 등에 쌓여 있는 한 아브락사스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밝고 어둠, 신과 악마, 좋고 나쁨 이 모든 이분법을 버리고, 신인 동시에 악마인 세계를 향해 제 영혼의 날개를 단 모든 것들이 싱클레어에게는 아브락사스였던 것./김살로메(소설가)

2013-01-29

사회적 증거의 법칙

군중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대의에 따라 움직인다. 남들처럼 하면 적어도 손해날 일은 없으니 묻어가는 편리를 택한다. 인터넷 공간을 예로 들자. 같은 이슈라도 댓글이 없는 쪽보다는 댓글이 한 번 달리기 시작하는 쪽에 더 많은 댓글이 달린다. 또, 첫 댓글이 호의적이면 부정적일 때보다는 훨씬 많은 다른 댓글을 유도한다. 원글 자체보다 다른 댓글의 움직임에 따라, 쓰고자 하는 댓글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마치 빨간 불인데도 바쁜 누군가가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면 너도나도 우루루 따라하게 되는 것과 같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통상 시장의 95퍼센트는 모방자이며, 단지 5퍼센트만이 창조자`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5퍼센트의 창조자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95퍼센트의 모방자로 살아가는 편리를 택한다. 가끔 도저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창조자에 의해 세상은 뒤집어지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 혁명의 성공 뒤에도 여전한 나머지 95퍼센트의 모방자가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 물리적 상황이든 심리적 상황이든 대의를 좇을 확실한 군중이 있다는 것.인간의 이런 심리적 상태, 즉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는 경향을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라고 한다. 사이비 종교가나 정치꾼은 군중 심리를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도덕이나 경건을 가장한 흰소리로 옳고 그름이 제각각인 군중들을 선동할 수 있는 것도 이 군중 심리를 백 번 활용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날 예언이 실패해 천국행을 가지 못해도 여전히 신도 수는 줄어들지 않고, 청문회 때마다 차마 들어줄 수 없는 비열함의 꼼수가 넘치는 얼굴이 쉼 없이 등장하는 것도 군중보다는 언제나 창조자가 한수 위에 있기 때문이다.이런 현상의 원인에는 군중의 우매함도 있지만 특유의 `귀차니즘`도 한몫한다. 체념의 친구가 된지 오랜 군중은 웬만해선 별다른 자극을 받지 못한다. 군중의 피로지수가 높을수록 위대한 창조자를 만나기는 어렵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28

이름 이홍경

1900년대 초반까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은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다. 하층민부터 상류층 여성까지 필요에 의한 호칭·애칭·별호 등은 있었겠지만, 결혼하면 이마저도 출신 마을에 빗댄 택호나 아이의 호칭에 붙어 누구 엄마로 불렸다. 상류층에서는 친정의 성씨를 따라 박씨 부인, 김씨 부인 등으로 지칭되는 것이 통례였다. 정약용의 부인은 홍씨 부인이고, 유희춘의 부인은 송씨 부인이 되는 식이다. 송씨 부인 호가 `덕봉`이라 해서 그게 공식적인 이름인 것은 아니었다. `송덕봉 부인`이나 `송덕봉 씨`로 불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한말 재야 지식인 황현이 남긴`매천야록`에 이러한 여성의 이름과 사회 진출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지용의 아내가 일본 사교계에 진출을 하면서 `이홍경`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 여성 이름의 시초라고 황현은 적고 있다.국운이 기울면서 상류층 부인들도 저항파와 친일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나중에 독립운동을 돕게 되는 우국부인회와 이지용 부인 등이 소속된 친일부인회가 그 둘이다. 남편 따라 일본 나들이를 가면서 원래 홍씨였던 이지용의 부인은 자신의 성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이홍경`이란 이름을 썼다. `예부터 우리나라 부녀자들은 이름을 쓰지 않고 다만 아무개 씨라고만 했다. 이때 왜국 풍속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이름을 써서 사회에 진출했는데, 이홍경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매천야록은 기록하고 있다.이홍경은 품행 문란으로 매국하는데 앞장섰다. 일본 실무자들과 상대를 바꿔가며 연애를 했다. 질투를 느낀 하기하라에게 혀를 깨물리자,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비웃었다. 기왕 여성으로서 제 이름이 불리길 원했다면 좀 더 당당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매국의 사교장에서 그 첫 이름이 쓰였다니 아쉽기만 하다. 당시 여성 일각이 제 이름을 찾으려 맹렬히 나선 것은 응원할 만하나, 친일의 수레에 그 불명예의 이름을 싣게 되었으니 안타까울 수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3-01-25

카뮈와 사르트르

카뮈와 사르트르가 결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견해차이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다가간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와의 연합을 꾀했지만, 공산당에서 탈퇴한 뒤 도덕적 대원칙에 충실했던 카뮈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노선에 염증을 느낀다. 사르트르는 어느 순간 카뮈를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카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간직할수록 자기 자신을 그와는 반대의 이미지로 규정하려 애썼다. 한 때 카뮈를 열렬히 부추겨주었던 사르트르를 생각한다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카뮈가 스승 그르니에의 저서`섬`재판 서문에서 `의식은 예외 없이 다른 의식의 죽음을 추구한다.`고 사실상 사르트르를 지적했을 때, 사르트르의 입장은 희곡`닫힌방`을 빌려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고 맞받아치는 격이 되었다. 카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에 많은 지식인들이 매혹되었다는 것을 사르트르에 빗대 경고한 것이었고, 빈정대기 좋아하는 사르트르는 이런 까뮈를 인정할 수 없었다. 추도사에서조차 사르트르는 `당신은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카뮈에겐 모독적인 태도를 취하기에 이른다.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의 표면적 이유는 그 상이 냉전의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지만 다분히 카뮈를 의식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7년 앞서 카뮈가 `정의보다 앞에 있는 내 어머니`라는 수상 소감으로 그 상을 받고 상금으로 집을 산 것과는 대조적이다. 겉으로 보기엔 알제리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카뮈와 파리의 유복한 가정 출신인 사르트르 딱 그만큼의 다른 행보이다.개인적으로 카뮈 쪽에 정감이 더 간다. 하지만 누가 더 옳은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당대의 석학 둘이 이런 논쟁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갈등하는 맞수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라는 데 묘한 위안과 쾌감을 느낀다. 위대하나 평범하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갈등하며 성장하는 존재인 것을./김살로메(소설가)

2013-01-24

지아야, 지아야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은 웃음을 줄 때가 많다. 드라마는 습관이 되지 않아 지겨워서 못 보고, 텔레비전 영화는 작정하고 보는 것이 아니면 잠이 와서 포기하기 일쑤이다. 그나마 예능과 다큐멘터리에 쉽게 빠지는데, 예능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리는데 그만이고, 다큐멘터리는 경험하지 못하는 여러 상황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주니 즐기게 된다. 요즘 신설된 예능`아빠, 어디가`덕에 웃다가 울다가 한다. 큰 즐거움이다. 아이들과 아빠들이 오지 마을 자연 속에서 여러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우선, 등장하는 아이들이 하나 같이 순진무구하다. 어린이의 외관만 가졌을 뿐, 성인 연기자 저리가랄 정도의 탤런트 기질을 뽐내는 여타 프로그램 아이들과는 좀 다르다. 시청자로서는 돈 들이지 않고 청량 음료를 마시는 기분이랄까.얼굴만 귀엽고 천진한 게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살아있다. 이유 있는 떼를 쓰다가도 의젓한 형 노릇을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로 넉살좋은 붙임성을 보여주는 아이도 있다. 청아한 모습으로 새침한 듯 무심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자애가 있는가 하면, 애틋하고 난만한 모습으로 그 애를 따라다니며 보호하려는 아이도 있다. 그 어떤 가공된 연기 없이 아이들은 즉흥적이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그 중 윤후는 어린아이가 내뿜을 수 있는 좋은 캐릭터를 다 가지고 있다. 개구쟁이이면서 의젓하고, 호기심이 많으면서도 배려가 깊다. 이성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남자애들 사이엔 의리도 있다. 매순간마다 `지아야, 지아야`를 외치며 여자애를 챙기는 윤후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한 때 저마다 순수했을 어린 시절을 돌이키게 된다.살다 보면 세상이 동심을 잃게 하겠지만, 그 고운 천성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룻밤 기획으로 끝날 게 아니라 그 순수함이 시청자에게 통할 때까지는 살아남는 프로그램이 되어줬으면 한다. `지아야, 지아야` 외치는 투명한 동심이 큰 위로가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23

스치듯 스미듯

사랑은 어떻게 올까? 대개 찰나적이고 때론 서서히 다가오는 게 사랑이다. 캠퍼스 느티나무 그늘에서 희고 긴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고스톱 패를 돌리는 여학생의 특이함에 남학생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도무지 그 긴 손가락과 고스톱과 무심한 얼굴이 왜 떠오르는지도 모르는, 그 부조리한 상황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단박에 사랑에 빠져버리는 것. 거기엔 이유도 조건도 없다. 반면에 몇 년 간 알고 지내던 여학생이 서서히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취업과 결혼을 해야 하고, 부모님과 2세 걱정도 하는 시기가 맞물려 사랑이란 감정이 자연스레 싹튼다. 이유와 조건이 충분한 사랑이다. 사랑의 흔한 두 예를 들어 보았다. 그 중 사랑의 염결성에 더 가까운 쪽은 찰나적 사랑이다. 적확하고 조리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즉흥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흐린 눈으로 봐야 첫눈에 반할 수 있다. 계산 없는 사랑은 `사랑을 하는 단계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후자의 필요에 의한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시작은 `찰나적` 사랑만큼 순도 높은 건 아니다.불교 용어 중에 돈오(頓悟)와 점오(漸悟)라는 말이 있다.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깨치는 것이 돈오이고, 수행의 공을 쌓아 서서히 깨닫는 게 점오이다. 사랑으로 견주자면 돈오의 사랑이야말로 순수한 사랑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흔히 나이 들도록 사랑 한 번 못해 봤다고 말했을 때 이는 돈오의 사랑을 못해봤다는 의미이다. 점오의 그것은 타협의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그 시작이 돈오의 사랑만큼 강렬하지는 않다.돈오든 점오든 그 사랑의 시작은 창대하나 그 끝은 제 각각이다. 하늘과 부처가 아닌 이상 그 사랑의 유지와 책임은 오롯이 당사자들에게 있다. 한 눈에 반하든, 서서히 반하든 서로 물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과정에 필요하다. 깨지기 쉬운 사랑의 속성 앞에서 갈등하는 갈대로 스치듯 스미듯 살아가는 게 필부필부의 삶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22

수수가 붉어졌네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홍까오량 가족`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강렬한 인상이 모옌의 원작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다.`홍까오량`은 `붉은 수수`를 뜻하는데, 이 책 1,2장`붉은수수`및`고량주`부분이 영화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감독 `장이모우`와 배우 `공리`를 위한 것이었다. 관람객 입장에서 원작가인 모옌까지 주목하기는 쉽지 않다. 원작을 떠난 영화는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이기를 원하고, 개봉 당시는 모옌이 전 지구촌 작가도 아니었다. 웬만한 이슈가 되지 않고는 영화의 원작가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모옌은 행운 작가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란 쾌거 하나로 장이모우나 공리 못지않게 `붉은수수밭`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연작 중편들로 이루어진`홍까오량 가족`은 항일 무장 투쟁, 애달픈 민중들의 삶, 한 가족의 애증사 등이 일렁이며 붉어가는 수수밭 사이로 교차 편집되어 있다. 읽을수록 울림이 큰 것은 우리의 일제강점기 역사 또한 그 작품 속 궤도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서걱대는 수수잎에 손가락이 베일만큼, 익어가는 고량주에 온몸이 취할 만큼 아련하고 강렬한 이야기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조금 아쉬웠다.소설가를 이야기꾼과 문장꾼으로 나뉜다면 모옌은 전자에 속했다. 할 말이 넘치다 보니 구성이 산만해져버렸다. 중복되는 에피소드와 반복되는 묘사 때문에 피로함이 몰려왔다. 생생하고 사실적인 표현도 너무 잦으면 독자는 지루해진다.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작가이다 보니 곁가지치기를 덜한 것 같다.목마르다고 끊임없이 두레박질만 할 수는 없다. 효율적인 두레박질은 목을 충분히 축일 때까지 만이다. 선명한 이야기에 분명한 호흡을 기대한 독자라면 책 두께가 조금 더 얇아도 좋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홍까오량 가족`은 이야기와 구성을 동시에 바라는 걸 버린 뒤에야 더 잘 몰입하게 되는 작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21

괜한 걱정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걱정하는데 허비한다. 건강 문제부터 시작해 밑도 끝도 없는 온갖 걱정을 달고 산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오히려 걱정한다는 그 걱정 때문에 골치만 아플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 역시 걱정이 많다. 가족들이 좀 더 건강하기를 바라고, 자식들 미래가 평탄하기를 원하며,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기를 욕망한다. 얼마나 현실적 이기심으로 가득한 걱정인가. 알고 보면 모든 걱정은 괜한 짓거리이다. 그 말 속엔 미래적 함의가 숨겨져 있다. 오지도 않은 일을 가불해서 생각하는 것이니 비생산적인데다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이다. 과거를 말할 때 우리는 걱정이란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과거는 `후회`는 할 수 있을지언정 `걱정`할 대상은 아니다. 걱정이란 오롯이 현재 이후의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지나지 않으니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가.한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을 끌어안고 산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법륜 스님의 강의를 열심히 쫓아다니고, 혜민 스님의 어록을 쉴 새 없이 밑줄 그어도 걱정해서 해방되기는 어렵다. 담백하게 자신을 버리는 게 쉽지는 않다. 어느 누군들 자유를 얻기 위해 팽팽한 삶의 밧줄을 쉽게 놓아버릴 수 있을 것인가. 갖춘 종교인의 경지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걱정이란 일상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기를 바랄 뿐이다.내가 하는 걱정은 타인에겐 사소하게 보일 때가 더 많다. 제 삼자에게 설득시키지 못하는 걱정은 걱정으로서의 값어치가 없다. 걱정은 부정을 전제하는 것이지 긍정을 사는 행위는 아니다. 우리가 걱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걱정을 이만큼 하고 있다` 는 자기 보상 심리 때문일 것이다. 소심한 자가 쓸데없이 걱정할 때 적극적인 사람은 보란 듯이 행동한다. 걱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을 꿈꾼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8

예고할 때 지키기

몇 개월째 왼쪽 어깨가 아프다. 흔히 말하는 오십견이 온 건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데 점점 통증이 심해진다. 팔을 뒤로 젖히거나 위로 올리기가 힘들고, 밤에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욱신거린다. 병원 가는 걸 싫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병원을 찾는다. 석회석건염이란다. 어깨 힘줄 사이에 돌이 생기는 것인데 노화현상 중 하나란다. 뼈 사진을 보니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석회석이 쌓여있다.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그 돌이 다른 조직을 긁어 대서 그렇게 아팠던 것이다. 빨리 왔으면 치료 기간을 줄일 수 있었을 거라고 담당의가 말한다.치료과정의 번거로움과 시간적, 물적인 부담에 앞서 부끄러웠다. 병원 가기가 귀찮거나 두려운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가 자가진단이라는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별 거 아닐 거야`와 `큰병이면 어쩌지?`사이를 왔다갔다하다 끝내 별 것 아닐 것이라는 자기합리화를 꾀하고 만다. 그 시간에 병원 뛰어갈 것이지, 자가진단을 하고 처방전까지 스스로 써댄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은 황폐해진다.합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모순투성이인 게 사람이란 동물이다. 제 삼자의 일일 때는 대개 객관적이고 옳은 답을 아주 쉽게 내놓는다. 하지만 그것이`내가 처한 상황`으로 바뀔 때에는 모범적이고 지당하신 그 답안들은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다. 답안과는 상관없이 끝까지 미루고, 내 식으로 판단하다 일을 그르치고 만다.좋은 일은 예고 없이 와도 안 좋은 일은 예고 없는 게 드물다.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이 헤어지자고 하는 일은 없으며, 충분히 준비했는데 시험을 망치는 일은 없다. 인간에겐 직감이란 게 있어, 변심한 상대의 행동을 눈치 챌 수 있고, 덜한 공부로 생기는 심리적 불안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을 애써 무시하거나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일이 커진다. 모든 일은 예고할 때 빨리 대처하는 게 낫다. 미루어 판단하다 보면 너무 늦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7

열정이 중요해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다. 시골에서는 피아노 교습소가 있는지도 몰랐다. 고작해야 어깨너머로 배운 풍금으로 기본 화음을 넣어 `꽃밭에서` 정도를 치는 정도였다.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도시로 나왔을 때는 한 반에 예닐곱 정도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 같았다. 역시 부러웠다. 하지만 한 번도 부모님께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웃자란 눈치가 알아서 욕망을 제어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피아노를 배우지 못한 건 관심과 열정 부족 때문이었다. 간절히 바랐다면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다른 길도 있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 경제력이 확보되었을 때라도 배우면 그만이었다.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그 환경을 부러워했는지도 모른다. 간절히, 열렬히 원하면 이루게 되어 있다. 그 가난하던 시절, 열성적인 남자 동창은 엄마를 졸라 피아노를 배웠고, 끝내 성악가가 되었다. 진실로 원한다면 환경은 문제가 될 수 없다.그렇더라도 그 옛날처럼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하고 싶었던 걸 못했다는 소리를 자식에겐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방학 중인 아들녀석이 무에타이와 드럼, 영어와 일어를 배우고, 여행과 헬스도 하겠다고 했을 때 `무조건 오케이`라고 답했었다. 하지만 방학 전의 욕망은 다만 희망 사항이었을 뿐, 막상 아들은 그 어느 것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방구들 한 쪽을 차지하고 그 동안 못했던(?) 게임만 즐긴다. 그토록 원했던 건전한 활동(?)들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 겨우 영어 공부한다고 제스처를 취하는데 마뜩잖기만 하다.언제나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기 쉬운 게 사람이다. 간절함이 없는 시도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를 이루는 데는 환경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 내가 피아노를 끝내 배우지 못한 것은 부모 탓이 아니라, 내 바람이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6

애도의 방식

누군가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내가 아는 한 그미는 효녀였다. 오랜 병구완을 한 이도, 임종을 지킨 이도 그미였다. 나는 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어머니 곁에서 이미 숱하게 울었기 때문에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 눈물과 애도는 크게 상관이 없다.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애도가 깊은 것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애도가 얕은 것도 아니다. 애도의 양상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애도란 그 대상과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심리적, 정서적 상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는다. 어머니에 대한 애도 단상집이다. 사진으로 어머니를 추억한 `밝은 방`을 읽었을 때 이상으로 신선한 충격이다. 스물셋에 전쟁 과부가 되어 일흔넷에 죽은, 그의 모든 것이었을 어머니를 작가는 애도한다. 노트 네 조각 낸 메모지에다 마음 깊이 어머니에 대한 단상을 이어간다. 2 년에 걸친 그의 일기는 어머니에게 다가가고자하는 작가의 내밀한 어록이다.어머니에 관한 그 어떤 형태의 문학적 완성품을 생각하면서 메모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이 글이 문학이 될까봐 경계하다가도 결국 문학이 될 거라는 모순을 예감하기도 한다.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라고 적는다.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애도일기는 문학적 성과물로 재탄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한 가지 안심인 것은 애도일기가 그 어떤 다른 형태의 문학 작품으로 가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그의 죽음이 앞당겨지지 않았더라면 그의 애도 일기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 작품이 되는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문학작품보다 때로는 날것의 육성이 더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있다. 온전히 일기로만 살아남은 애도일기를 읽는 것은 독자로서는 행운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5

안케도 알지요?

▲ 이경우 편집국장제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11일 중소기업청의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정권 인수 수순을 밟아가자 이 지역 민심이 바닥부터 서서히 부글부글 끓고 있다. 도대체 80-80(투표율 80%와 득표율 80%)의 대가가 뭐냐는 것이다.새정부 출범의 막중한 임무를 맡은 인수위에 지역 인사들의 참여가 예상외로 저조하자 나온 여론이다. 물론 박근혜 당선인은 대선 기간은 물론 당선 후에도 인선 기준으로 `대탕평`과 `국민대통합`을 강조했다. 청와대와 정부 조각 등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선에서 보여준 지역의 역할을 생각하면 예상을 너무나 벗어나는 초라한 성적표라는 불만이다.박 당선인은 지난 1998년 15대 총선 당시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 지난해 4월 19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했다. 그동안 `선거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선거에서 초능력을 발휘한 박 당선인은 선거때면 정작 당신의 지역구보다는 늘 다른 후보 지원유세에 열중했다. 선거 뒤면 지역민들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박 당선인을 선택했는지 박 당선인도 알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당선인이 지역민들에게 심적 부채의식은 갖고 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다.박 당선인은 국회의원시절 지역구였던 달성군에 선거 때나 신년교례회 등 행사가 있을 때 찾긴 했지만 공식 일정을 마치면 곧장 숙소에서 칩거 상태에 들었다는 것이 지역 기자들의 전언이다. 물론 기자들과 식사를 한다거나 별다른 소통이 없었다고 한다. 지역민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무관심한 사촌`이었다. 지역의 한 서울주재 정치부 기자는 국회의원 박근혜를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은 물론, 전화 통화조차도 어려웠다고 실토한다.박 당선인이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에 무관심했다는 지역민들의 반응과는 달리 지역구의 현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챙겼다는 것이 당 쪽의 해명이다. 역사를 가정할 수는 없지만 지역 일각의 “다른 후보를 선택했더라면 달성군 발전을 10년은 앞당겼을 것”이란 비난을 해명하면서다. 지금 달성군은 대구의 과학전진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현풍면에 1조9천억원이 투입된 대구테크노폴리스가 올 6월 완공되고 구지면에는 1조7천억원이 투입되는 대구국가산업단지가 조성중이다. 문희갑 전 대구시장 당시 큰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긴 하지만 달성군에 엄청난 예산이 퍼부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포항지역이 굵직굵직한 국책 사업들을 많이 펴고 있는 데는 현 이명박 대통령의 형님 이상득 전 의원의 공이 절대적이란 사실은 다 아는 비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항에서조차 “형님 덕분에 포항이 상대적으로 역차별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중앙에서 포항의 현안을 설명하고 예산을 챙기려 했다가도 야당의 `형님예산`이라는 한 마디에 모든 공작들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는 얘기다. 차라리 선거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떳떳이 포항 몫을 챙겼을 것이라는 욕심에서일 것이다.박근혜 당선인은 후보시절 지역 언론사 간부들과 식사를 하면서 지역 표심을 “안케도 알제”라고 표현했다. “말 안해도 속으로 모두 공감하는 박 당선인에 대한 지지”가 표로 연결된 것이 이번 대선의 결과였다. 그 표심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 시절, 비록 당신의 지역구는 팽개쳐놓고 남의 선거 지원유세를 벌였더라도 예산에서는 지역구를 챙겼다고 지역민들은 믿고 싶어한다.비록 인수위와 정부 조각 등에서 지역 인사를 배제하더라도 박 당선인이 지역 현안만은 챙겨 줄 것이라 지역민들은 기대한다. 그것이 지역민들에게는 특정인을 청와대나 정부 고위층으로 뽑아올려 출세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지역민들은 당선인이 “안케도 알제”를 배신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것이 무관심한 사촌에서 옆집으로 이사온 사촌이 되는 길이고 심적 부채를 청산하는 방법이다.

2013-01-14

오랜 강도 흐른다

그 여자 까칠하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착하디착한 남편에게도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 답례를 할 겨를도 없이 남편은 저 세상으로 떠났다. 대범하고, 빈정대는 이면에 여리고 따스한 여자는 그 성격대로, 상처 주고 상처 받기를 반복한다. 여자에게 남편의 죽음보다 더한 슬픔은 유일한 혈육인 아들의 무관심이다. 우울증 앓는 아들은 재혼한 아내와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 중이다. 담당의는 이 모든 상처는 엄마로부터 기인한다는 진단을 내린다. 여자의 악다구니, 매질, 냉소적 태도가 아들의 트라우마가 될 줄 그때는 아들도 엄마도 알지 못했다.우연한 계기로 여자는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하버드대 출신의 남자는 잘난 척에다 오만한 것으로 마을엔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데이트를 거듭할수록 남자에게 끌린다. 단 한 번도 그 잘난 하버드대 출신이라는 걸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다. 역시 겪어보지 않은 모든 것에는 판단 유보가 필요해, 라고 여자는 중얼거린다. 동성애자인 딸과 절연한 사연을 털어놓는 남자에게 여자는 깊이 공감한다. 여자 또한 삐걱대는 모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던가.여자의 유일한 희망은 죽을 때 숨이 금세 끊어지기를 바라는 일. 남편의 죽음과 희망 없는 아들과의 관계 앞에서 그녀가 바라는 건 그 뿐. 하지만 남자를 만날수록 생의 활기를 얻는 것은 어쩔 것인가. 의외로 보수적 정치 성향인 남자에게 실망하기도 하지만 아픈 남자가 여자를 기다릴 땐 최선을 다해 달려간다.정서적 심리적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노년의 남녀 눈빛은 적요하고 따스하다. 삶은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기에 맞잡은 두 손이 필요한 것. 여자는 아직은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다. 늙은 소도 쟁기질 할 수 있고, 오랜 강은 안으로 깊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여자 나이는 일흔 넷이고, 이름은 올리브 키터리지. 통찰 깊은 소설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동명 소설의 주인공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1

머그컵 철학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 그 주체와 대상은 오직 `나`에 관한 것이었다. 서구의 전통적 존재론을 대표하는 이 명제는 모든 생각을 `나`란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전제한다. 그 사유 안에는 타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내 문제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타자를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런 생각에 몰두하느라 타자로까지 사유 영역을 넓히지는 못했다. 이러한 자아 귀환형 외곬 사유가 전체주의를 낳았다고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한다. 편협한 전체성을 낳는 자아와는 별개로, 타자는 운명적으로 무한자유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전체와 무한`이란 개념으로 정리했다. 타자의 무한성은 결코 나의 카테고리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나의 바깥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그 타자를 나비 잡듯이 내 손아귀에 넣겠다는 그 지점에서 세계관은 충돌한다.사소한 예를 들어보자. 지인의 집들이 선물로 영국제 찻잔을 사들고 간다 치자. 그 집의 주방엔 사은품으로 받았음직한 머그컵이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다. 사은품 회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그 머그컵이 우아하거나 고급스러울 리는 없다. 하지만 실용적이고 깔끔해 집주인은 그 컵을 애용한다. 한데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 온 찻잔으로 바꿔. 하기야 이 유명 브랜드 찻잔을 알기나 하겠어?이 경우 영국제 찻잔의 우위성에 점수를 주는 `나`의 전체성은 사은품 머그컵을 애용하는`타자`의 무한성을 침범한 경우가 되겠다. 생활수준이 비슷하다면 브랜드 찻잔과 실용성 머그컵 사이는 취향의 차이 딱 그만큼이다. 한데 존재론적 전체성에 함몰된 우리는 내 영역 밖의 타자에게 내 식으로 문화 코드를 바꾸라고 충고하고 무시한다. 엄연한 폭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윤리성을 강조한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그에 의하면 윤리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 물론 여기서 윤리란 타자 앞에서 갖춰야 할 `나`의 도덕관을 말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0

자기계발서의 힘

관심 끄는 자기계발서 한 권을 만났다. 반값 판매 도서를 사면서 함께 주문했던 책인데 `마흔, 당신의 책을 써라`이다. 저자 김태광은 솔직히 처음 들어본다. 첫 책을 낸 이래 몇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냈단다. 마흔이 되기 전에 110권의 책을 써 기네스북에도 등재가 되었다나. 수많은 그의 책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한 권의 책은 무척 고무적이다. 독자의 나태한 생활을 질타하고 정신무장을 독려한다. 시간이 나야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없는 시간을 내서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가 돼야 책을 내는 게 아니라, 책을 내야 작가가 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글에 미친 사람들의 특징은 글 관련 이외의 활동에는 자제심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글쓰기, 강연, 글 가르치기, 독서 외에는 그 어떤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나처럼 낮잠을 자거나, 수다를 떨거나 술잔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자아실현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게으름과 핑계란다. 성공하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할 수밖에 없다.일상이 평화롭기만 하거나 성공할 마음이 없는 사람, 성공했거나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 등은 자기계발서가 별로 필요치 않다. 춥고, 배고프고, 열망하는 자들만이 자기계발서를 펼친다.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자기계발서 한 권 쯤은 읽어도 좋을 계절이다. 앞서 욕망을 실현한 사람들이 보내는 채찍과 동기부여에 조금이나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여기서 잠깐, 자기계발서 작가들엔 두 부류가 있다. 성공해서 책을 낸 부류와, 성공하기 위해서 책을 낸 부류. 김태광 작가는 후자이다.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아리송하긴 하다. 하지만 자기계발서의 현실적 목적은 물리적 성공이고, 궁극적 목적은 자아실현이니 독자로서 둘 다 옳다고 해두자. 진정성은 차치하고라도 두 그룹 다 치열하게 살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본받을 만하지 않은가. 자기계발서는 책 내용보다 그 저자의 정신력을 눈여겨볼 때 더욱 유익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9

에포닌의 바리케이드

모든 혁명은 미완이다. 영원히 성공한 혁명이라는 건 애초에 있을 수 없다. 혁명의 속성은 지속적인데다 언제나 희생을 요구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혁명은 일어나고, 누군가는 혁명을 꿈꾼다. 혁명은 민중들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낭만적 자기 구원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에서 실패한 혁명인 1832년의 공화파 청년들의 봉기 사건을 소설적 모티프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레 미제라블` 열풍에 편승해 최근 개봉한 영화와 국산 뮤지컬 둘 다를 보았다. 수많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애정이 가지만 감정이입이 가장 잘 되는 인물은 단연 에포닌이었다. 그녀는 짝사랑하는 마리우스를 대신해 죽음을 자처한다. 하지만 마리우스의 애도는 애석하게도 인간애적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맘에 코제트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 간의 사랑이 될 수 없었던 것. 영화와 뮤지컬에서 에포닌의 경우, 지고지순한 사랑과 희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설과 달리 아무래도 감동을 얻어내기 위해 미적 장치를 극대화 한 것 같다.혁명과 사랑을 동시에 꿈꿨던 에포닌이란 바리케이드가 없었다면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이 이루어졌을까. `불쌍한 사람들`의 대표 아바타이자 장발장의 마스코트인 코제트 보다 에포닌에게 더 눈길이 가는 건 그녀의 캐릭터야말로 아름다운 민중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높은 곳의 생각이 아니라 낮은 곳의 행동으로 그 임무가 완수된다. 혁명과 사랑의 희생양이 되었으면서도 그걸 최대의 행복이라 여긴 에포닌을 충분히 애도해주고 싶다.비가 오면 도로는 은빛으로 반짝일 테고, 강물엔 도시 불빛이 아롱진다. 별빛에 나무는 빛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에포닌은 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에포닌의 상상일 뿐, 세상은 낯설고 마리우스는 잘 살 것이며 혁명 또한 계속 될 것이다. 죽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그녀의 빗속 아리아 `on my own`이 계속해서 환청으로 들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8

나목에 걸린 인형

간만에 친구랑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식당 안은 한갓졌다. 방학인데다 한파까지 이어져 나 같은 아줌마들이 칩거를 하는 바람에 그런 모양이었다. 서너 테이블 밖에 안 되는 손님들은 그나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근데 좀 전부터 가족끼리 온 옆 좌석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티 나게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문한 음식을 앞에 두고 여자는 불편한 눈빛이 역력했고, 뒷모습만 보이는 자녀 둘은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접시에 박고 포크질을 한다. 남자는 꽁한 얼굴로 제 앞의 접시를 여자 쪽으로 밀어낸다. 건너오는 말을 조합하자면 남자는 무슨 일로 조금 늦게 합류한 것 같았다. 아이들 식성에 따라 여자가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늦게 온 남자는 그게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먹어야 하니 고역인 모양이었다. 여자가 접시를 남자 쪽으로 다시 밀어주자 남자는 곁가지로 나온 밥만 시위하듯 먹기 시작한다.저 식구는 왜 레스토랑에 왔을까? 처음부터 남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시키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종업원이 우리한테도 그랬듯이 은근히 같은 메뉴를 주문하기를 권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바람에 여자는 메뉴를 통일했을 수도 있겠다. 남자도 그렇지. 이왕 그렇게 된 것 자식들과 여자를 위해 즐겁게 먹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주눅 든 채로 어린 아이들이 음식에 코를 박고 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리다.우리가 주문한 음식도 나왔다. 육즙 반지르르한 스테이크가 차려지는데도 식욕이 돋지 않는다. 창밖을 내다본다. 나목이 된 자작나무 가지에 바람에 실려 가던 것인지, 누군가 일부러 던진 것인지 모를 비닐 인형이 걸려 있다. 가려줄 잎 하나 없이 매달린 저 인형, 몹시 추워 보인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저 나목에 걸린 인형처럼 보인다. 덩달아 인형이 된 내 속내를 감추고자 친구 앞에서 퍼뜩 어색한 입 꼬리만 올린다. 겨울일수록, 추울수록 따습게 보듬어야 할 저마다의 인형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7

도덕 교육의 현실

유가 사상의 최대 목표는 체제 유지였다. 그 정당성을 부여 받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충효란 덕목이었다. 충효의 보조 항목으로서 예의와 도덕이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논리였다. 다시 말하면 예의와 도덕은 높은 자를 위한 헌사에 필요한 것이지, 낮은 자를 위한 배려로서 그리 매력적인 도구는 되지 못했다. 학교 현장에서의 도덕 교육도 그런 현실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김상봉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도덕 교육은 참된 자유인을 위한 게 아니라, 노예를 위한 그것이다. 체제 유지에 원활한 시민을 기르는 게 우리 도덕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이 되어버렸다고 김 교수는 우려한다. 자유와 개인적 가치, 세계관과의 갈등 등은 국가와 집단, 위계질서 앞에서는 언제나 나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때의 예의와 도덕은 약자가 강자에게 취하는 마땅한 종속의 액션이 되고 만다.창의력이 배제된 각종 국제 대회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고 있으니 불온하지만 우리 도덕 교육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권력자와 집단의 부당성은 힘없는 자와 개별자의 정당성 위에 군림한다. `몹쓸 놈, 예의도 모르는 자`는 약자에 해당되는 것이지 강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더 무서운 것은 약자이고, 피해자이던 그 길들여진 시민들이 집단이 될 때는 똑같이 권력자가 된다는 것이다.군 복무에 충실해야 할 유명 가수가 국민 미녀 배우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질투심에 불타는 군중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노예 교육에 길들어져왔는가는 깡그리 잊은 채, 그의 잦은 휴가에 대해 핏대를 올리게 된다. 연예 병사의 휴가 시스템이 어제 오늘 도마에 오른 것도 아니건만 집단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 정당성과 도덕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곤 그 시스템과 개별자를 향해 분노한다. 하지만 그 집단이란 명분이 헛다리를 짚는데 더 재능을 발휘할 때가 많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이것조차 착한 노예를 키우는 우리 도덕 교육의 병폐라면 너무 자조적일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1-04

강 건너는 꽃잎처럼

꽃잎 한 장 저 먼 강을 건넜다. 가만 속울음만 내었다. 강 아주 건너기 전, 그 꽃잎의 숙명은 마을마다 웃음꽃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웃음보란 깃발을 단 나룻배가 강어귀마다 정박할 때 많은 들꽃들은 그 꽃잎이 내려놓을 웃음보따리보다 앞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잘 웃지 않던 꽃들도 그 꽃잎이 머무는 동안엔 콧잔등에 실팍한 주름 만들어가며 어금니가 보이도록 웃어젖히곤 했다. 꽃잎 한 장이 뿜어내는 웃음 바이러스에 모두 감염된 덕이었다. 그 꽃잎 이름은 황수관이다. 그의 추모 특집 방송을 보았다. 웃기 위해 천만 번쯤은 노력했을 그의 안면 근육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신바람 지수가 높아지면 가끔씩 호흡이 달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조차 물에 젖은 토란잎 같은 목소리가 되어 시청자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세 번만 생각하면 오해도 이해하게 되고, 두 번만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심오한 철학을 주는 강연이 아니라 생활 속의 짜릿한 발견을 주는 이런 말씀이 피로에 쌓인 나 같은 이에겐 무척 도움이 되었다.오늘만 해도 그렇다. 사진 한 장 편집하는데도 컴맹인지라 너무 자주 물으니 남편은 지쳐 나가 떨어졌고, 딸내미는 그나마 연민이 이는지 침착하게 다시 가르쳐 준다. 황 박사가 말했다. 늙은 부모가 까치란 새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세 번 되묻자, 아들은 `까치라니까, 몇 번이나 말해야 돼요?` 라고 쏘아 붙였다나. 하지만 그 아이 세 살 때, 스물 세 번이나 까치, 라는 새의 이름을 군말 없이 가르쳐준 이는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귀찮게 하는 자식마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묘사할 수 있는 이가 부모인 것.황수관 박사의 이런 촌철살인하는 위트와 따뜻한 유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서럽다. 살짝 건네는 쪽지 같고, 걸터앉기 편한 의자 같던 웃음 전도사를 새해부터 추모해야 한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문태준의 시처럼 `나 혼자 꽃 진 자리에 남아 시원스레 잊지도 못하고` 며칠을 앓게 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3

느낌표를 꿈꾸며

2013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귀밑머리 쓸어 넘기고 옷깃 여민 채 해를 맞는다. 두꺼운 구름 사이로 우주의 붉은 기운이 서린다. 이른 빛은 언제나 아침노을로 먼저 오신다. 가까운 바다 냄새와 먼 산을 배경으로 마침내 태양이 그 위용을 드러냈을 땐 눈물이 핑 돈다. 어느 새해 아침을 이토록 경건하게 맞이한 적 있었던가. 비의를 품은 듯, 신비함을 실은 듯 새 아침의 아우라는 제 존재를 충분히 발산했고, 모든 물상들은 평화로운 풍경이 되어 그 빛을 수렴하고 있었다. 해가 솟자마자 교교했던 아침은 신기하리만치 빠르게 그 빛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언제 솟는 해를 기다렸냐는 듯 환하고 밝은 기운이 금세 세상을 점령하고 만다.내 온몸의 기를 풀어 둥근 해에 의탁한다. 저 새 빛, 가슴을 데우는 메아리 같은 말씀으로 화하기를 기도한다. 새해에는 느낌표 같은 날들이 많아지기를.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날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절망하는 가운데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얻고 싶고, 희망하는 가운데도 그 살아있음이 배가되는 날을 꿈꾼다. 눈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고, 눈 감고 있다고 못 보는 것도 아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오감을 열어보겠다. 기왕이면 가슴에다 감수성의 손길을 오래 머물게 하겠다. 그리하여 대상마다 고귀한 느낌표 하나씩을 달아주겠다. 내 무딘 감각의 어혈이 풀려 이제껏 보아온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다.제대로 된 느낌표를 얻기 위해 한 호흡마다 말줄임표 하나씩도 분양 받으련다. 누웠던 감흥들이 느낌표로 살아나려면 진중한 사색의 낯빛도 필요하겠다. 숨어 희생하는 말줄임표를 빌려 꿈틀거리는 많은 느낌표를 건져 올리겠다. 따옴표나 의문부호는 잠시 미뤄두겠다. 숱한 말들의 희롱이거나 잔치일 따옴표 대신, 느낌표의 극대화에 이바지할 말줄임표 하나만 벽에 붙여두겠다. 쌈박한 느낌표를 갈망하는 새해 아침 설레기만 한다. 아직은 꿈꿔도 좋을 새해인데다 일출을 본 덕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