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준 상처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건 건 얌전한 모범생을 순간의 판단 잘못으로 자전거 도둑으로 몬 경우였다. 그 아이와 부모의 눈빛이 나를 용서하지 않았기에 그건 아직 미완의 사죄로 남아 있다. 그들의 분노와 응어리가 현재진행형이라면 당연히 내 사죄 또한 그러해야만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용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그 역시 내가 판단할 것은 못 된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이 용서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피해자를 또 한 번 수렁으로 빠뜨리고, `내가 살인범이다`에서는 공소시효가 면죄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피해자와 관계자를 농락한다. 출옥한 범인이 `봐라, 법과 대중이 날 이렇게 용서하는데, 당사자인 너희들만 용서하지 못하고 있잖아.` 라는 뻔뻔함으로 용서의 칼자루마저 자신이 가지려 한다.
용서의 시효는 가해자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용서의 아버지는 시간이다. 정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면 피해자가 필요한 시간만큼 기다려주는 게 양심 있는 자의 태도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잘못을 해놓고도 용서의 시효마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 자숙 기간이나 용서의 시효는 한 사흘쯤이면 충분한 것일까. 용서의 기간이 단축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몰라 반문하기까지 한다.
법적용서는 공소시효가 정하고, 하늘나라에서는 신이 용서한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엔 시간이 용서한다. 그 시간을 정하는 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피해자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스스로를 성찰할 일이다.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른 피해자인척 하는 건 상처 입은 자에게 대한 예의가 아니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