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예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실제 경험에서 따왔다. 일반적으로 부끄러움 앞에서 글은 솔직할 수 없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식 글쓰기는 그걸 해낸다. 작가는 경험하지 않은 모든 글은 허구라고 단정 짓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 경험의 최고 수위에 부끄러움으로 명명되는 그녀의 수치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부끄러움`이라는 작품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1952년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다른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이 문장 하나 만으로도 에르노식 글쓰기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작가는 정신적 외상이 된 일련의 체험들을 까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통스럽고 불편하지만 당돌하고 진솔한 글쓰기를 통해 인간 본연에 대해 성찰한다.
알고 보면 글이란 게 얼마나 기만적이고 허영덩어리인가. 내 부끄러움, 내 수치, 내 껄끄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수치심이나 증오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들을 객관화시켜 글로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 약점을 방어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진실한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충족감만큼이나 수치심을 경험하며 산다. 하지만 충족감은 발설하기 쉽고, 수치심은 감추기에 쉽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경험치가 많아서인지 그미가 쓴 `부끄러움`을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바로 검색했더니 절판이다. 중고판매를 알아본다. 육천 원이던 책값이 적게는 이만 원에서 많게는 십만 원까지 불어났다. 남의 부끄러움엔 시쳇말로 돌 직구를 날리기 쉽지만 내 부끄러움을 글로 까발리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걸, 귀해진 중고책값이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