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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삐

세상 일 혼자서 되는 게 없다. 서로 돕고 배려해야 매끄러운 결실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누구나 주변의 도움 요청을 쉽게 거절하지는 못한다. 독선보다는 연민이, 이기심보다는 배려가 훨씬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제대로 거절하는 법을 배운 적 없으므로 착한 사람들일수록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떠맡는다. 그리곤 힘들어한다. 누구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과 내 안의 실체는 다르다. 그 둘은 같아서도 안 된다. 페르소나와 실체가 같다면 이 사회는 엉망이 되어 버릴 것이다. 부드러운 관계를 위해 누구나 조금씩은 가면의 얼굴을 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가면은 절대 부정적이거나 위선적인 게 아니다. 명랑 사회를 위한 윤활유 역할이다. 하지만 너무 착해서 굴레를 자초한다면 그것 또한 욕심이 아닐까.언제나 약지 못해서 힘겨워하는 후배가 있다. 스스로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타인의 요청엔 너그러우려니 몸과 마음이 고달프단다.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고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여러 관계망들에 지쳐간단다. 모든 걸 놓아버리기엔 그동안 쌓아온`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허락하질 않는다.소와 개의 우화가 떠오른다. 힘든 일만 반복하던 소가 개를 꼬드겨 탈출을 도모한다. 개는 목줄까지 벗어던진데 비해 소는 밧줄로 쓰겠다고 고삐를 달고 도망을 간다. 하지만 얼마 못가 돌덩이에 고삐가 걸려 꼼짝달싹도 하지 못한다. 자유로운 개는 저만치 도망가는데 소는 주인에게 곧장 붙잡히고 만다. 고삐라는 길들여짐의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죄, 그게 소의 운명이다.절실하게 원한다면 과감하게 고삐를 버려야 한다. 욕심이란 고삐를 달고 달리니 제 풀에 넘어지고 돌턱에 걸리고 만다. 되잡혀 멍에를 지느냐 도망쳐 기회를 잡느냐, 이 명백한 답 앞에서 어리석은 자는 망설이고, 현명한 자는 뛰쳐나간다. 단, 아직 지치지 않았다면 어리석지 않았으므로 계속해서 멍에와 고삐를 친구로 둘 지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30

줄리앙

꼬불꼬불한 머리칼에 그윽한 눈매, 길고 뾰족한 코와 앙다문 입술, 비현실적으로 긴 목을 가진 미소년 상, 줄리앙 석고상이다. 그 이름도 모르던 학창시절부터 꼭 한 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줄리앙은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의 청년상이다. 줄리앙은 프랑스식 이름이고, 이탈리아 식 이름을 되찾자면 줄리아노 쯤이 되겠다. 미켈란젤로의 메디치 가의 묘당을 장식하는 여러 작품 중 하나였던 줄리앙이 몇 백 년 뒤, 데생용 모델로 이렇게 사랑받게 될 줄 작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호기심에서 등록한 데생 기초반에서 그린 석고상 순서는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아리아스 등이었다. 단연 줄리앙을 그릴 때 몰입도가 가장 높았다. 하지만 재능 없는 열정은 호기심 충족이라는 선에서 만족하는 게 옳다는 걸 깨쳤을 뿐이다. 그림 배우기를 접은 건 후회하지 않지만 줄리앙을 다시 그릴 수 없다는 것은 조금 서운했다.누군가의 강연회에서였다. 사물을 제대로 보는 눈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그때 자료 화면으로 활용한 것이 줄리앙 석고상이었다. 한데 만날 보는 앞면뿐만 아니라 뒷면, 옆면까지 비교 배치한 사진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내가 본 줄리앙은 앞면 또는 고작해야 약간 비스듬한 옆면 정도였다. 단 한 번도 뒷면을 그린다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기는커녕 줄리앙의 뒷면이 있다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원래 전신상이니 미켈란젤로가 뒷면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다.사물의 이면을 보는 눈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다 끝난다면 안타깝지 않을까. 줄리앙의 뒷모습을 더듬어본다. 주름 사이에 파고드는 고독과 우수, 뽀글거리는 뒤통수 머리칼 밑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원형 탈모, 이음새가 터져나갔을 등쪽 갑옷선 등을 살필 때 그것을 제대로 보고 그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귀티 줄줄 흐르는 줄리앙의 실체는 그의 목덜미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우리는 그 사실을 놓친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9

괜한 걱정

학교 현장에 있는 친구 덕에 특강할 기회가 생겼다. 지난 두 달 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과 소박한 얘기로 공감할 수 있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아이들과 나눈 주제는 `소중한 나`이다. 학업 못지않게 정신 건강도 중요하기 때문에 일선 학교에서는 이런 프로그램도 계획했을 것이다. 자아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단계 중 가족 간의 갈등 부분이 있다. 학생들은 비교적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출한다. 멍석만 잘 깔아주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내어준 자료지에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쓴다. 가족에게서 들은 상처의 말들을 적어 보는 코너가 있다. 내가 엄마로서 뱉은 온갖 악행(?)들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한 뒤, 자신들이 겪은 모욕적인 말들을 적어 보라고 하면 걸러지지 않은, 수위 높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흔하진 않지만 솔직함을 넘어 적나라한 가정사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대부분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에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부모에 대해 너무 심하다 싶은 자료지를 작성한 학생들이 있다. 언어폭력을 일삼는 부모가 있다는 반증이다. 부모가 내뱉은 상처 깊은 말 때문에, 불신과 원망으로 가득한 설문지를 작성한 아이들 앞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이것도 소중한 자아를 형성하는데 극복해 나가야 할 것들이라고만 말했다.걱정하는 건, 학생들이 작성한 그 자료가 혹시라도 진실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재미로 썼는데 오해를 사서 상담의 대상이 된다면 괜히 미안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오래 관찰한 담임선생님이 그걸 판단하지 못할 리 없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모두 소중한 나를 찾겠다고 기꺼이 나섰는데, 괜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사례가 된다면 이건 내 잘못이 아닌가 하는 소심증이 발동하는 것이다. 자료지 하나가 아이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겠지. 이래저래`나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8

명랑

`명랑`의 사전적 뜻은 `1. 흐린데 없이 밝고 환하다. 2. 유쾌하고 활발하다`이다. 한데 날씨가 명랑하다, 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 걸로 보아 요즘에는 후자의 뜻으로 정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명랑`은 지금과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작가 소래섭 강연을 들은 후 그 사실을 알았다. 그의 몇몇 저서 중 단연 관심 가는 것은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이다. 작가에 의하면 적어도 일제강점기 때의 `명랑`이라는 낱말은 지금의 `유쾌하고 활발하다`라는 의미와는 좀 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오늘날의 `건전`, `모범` 등의 단어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숨은 뜻은 `체제에 길들임`, `불온함을 용납 못함`등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통치 권력의 입맛에 맞는 시민 길들이기가 당시의 `명랑`이란 말에 집약되어 있었다.당시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도시 명랑화`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들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퇴치하는 것이 경성 명랑화의 주된 모토였다. 명랑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없애야 할 것들이었다. 거리 방역사업에 몰두하고, 분뇨 정비 사업을 벌였으며, 이만 명이 넘는 걸인 퇴치에 사활을 걸었다. 그리하여 길들여진 모범 학생을 만들고, 대중매체를 통제했으며, 불온한 행위는 퇴출시켰다. 불온한(?) 경성 전체가 명랑화 사업에 동원된 것이다.강요된 건전과 부자연스런 절제가`명랑`이란 말로 포장되었던 당시 의식이 오늘날에 와서 완전히 고리를 끊었다고는 할 수 없다. 경성의 불온함을 허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개별자의 건전한(?) 불온을 허락지 않는 경직된 구조이다. 프랑스와즈 사강이 말했던가. 사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통제를 위한 명랑이 아니라 개방을 위한 명랑일 때 `명랑`이란 말의 밀도 높은 진정성이 담보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명랑이란 말이 그다지 명랑하게 쓰이지 않는다는 이 씁쓸함!/김살로메(소설가)

2012-11-27

공존의 방식

나는 숫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부류이다. 고등학교 때 미적분이 뭔지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는 과외 금지 시대였기 때문에 사교육 열풍도 없었다. 해서 몇몇을 제외하곤 다들 나처럼 고만고만한 수학 실력을 자랑(?)했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얘기다. 아직도 꿈속에선 수학 때문에 힘겨웠던 학창시절을 자주 만난다. 수학 또는 숫자에 대한 이런 내 트라우마를 이해 못하는 아들딸 때문에 가끔 서운할 때가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숫자나 퍼즐 맞추기 게임이 나오자 아들과 딸은 신이 났다. 숫자나 도형의 조합을 위해 저토록 골머리 썩는 게 재밌다니 나로선 이해불가이다. 내가 유도하는 대화에는 시큰둥하다가 하잘것없어 뵈는 숫자 놀이에 몰입하는 걸 보니 영 마뜩찮다. 오랜만에 모였는데, 내가 낄 자리는 없다.오전에 참석했던 한 특강 중`3 +4 = ?`와`? +? =7`이 부분이 떠오른다. 어떤 이는 정답이 딱딱 떨어지는 사유체계를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답이야 비록 정해져 있더라도 그 길로 가는 여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전자의 경우 애매모호한 것을 못견뎌한다. 그들은 정답이 두 개 이상 있어 뵈는 언어 영역을 싫어한다. 정답이 시원하게 나와야 안심이 되는 수학 과학 같은 과목을 좋아한다. 나 같은 이는 그 반대다. 수학적, 과학적 사유 체계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으니 그런 건 생각만 해도 갑갑하고 두렵다. 대신 여러 생각이 가지치기하는 인문학적 책 읽기에서는 위안도 받고 소화하기도 쉽다.나와 성향이 완전히 다른 아이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들 또한 내가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게다. 가르치거나 강요한다고 성향이 굳어지는 건 아닌가 보다. 후천적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성향은 선천적인 게 더 강한 것 같다. 그 선천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명랑한 소통을 모색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식구끼리도 충분히 다를 수 있고, 그건 틀린 게 아니니까. /김살로메(소설가)

2012-11-26

17세

열일곱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나이다. 소통할 상대가 어른이라면 열일곱은 참 애매한 나이이다. 단독자로 뭔가를 요청하기엔 시건방져 보일까 걱정하고, 단체로 뭔가를 어필하기에도 반항끼 있어 보일까 애태우는 나이이다. 되바라지지 못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기성 사회에 편입하는 과정이 쑥스럽고 불편스럽기만 하다. 한 아이를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심각한 고민은 아니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적응기를 지켜봐주기만 하면 된다. 전형적 모범생인 그녀 고민의 예는 이런 거다. 배가 고파 분식점에 들어간다 치자. 왠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키면 분식점 주인에게 버릇없게 보일까봐 스스로 주방까지 걸어가 조심스레 주문을 한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어른을 공경하라고 배웠고, 될 수 있으면 그녀 스스로도 모범생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으니까.그래놓고 본인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괜찮다. 한데 뭔가 대접 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면 고민거리가 된다. 어른에게 모범생이고 싶은 욕구와 손님으로서 대접 받고 싶은 당당함이 상충한 것이다.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어른들에게 먹히는 것이 싫은데, 자신도 모르게 그들이 원하는 행동에 길들여져 버렸다.그래서 당당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부러 친구들과 삼겹살도 먹으러 가고, 물횟집에도 들러 본다. 뼈다귀해장국집 문도 열어 보고, 피자집에도 주문 전화를 넣어본다. 의연하게 소비자 역할을 시도해 본다. 의외로 아무렇지 않다. 어느 누구도 당당한 소비자 연습을 하는 열일곱을 질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어렵기만 하다면 그건 기성 사회의 잘못이다. 어른처럼 당당한 열입곱을 사회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억압된 위선의 부산물이 모범으로 비칠 수 있는 사회라면 그건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열일곱 살 그들에게 자연스런 당당함을 연습시키는 건 기성세대가 할 일이다. 의연한 소통 방식을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것은 플라톤을 배우고 공자를 익히는 것만큼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3

시집 읽기

인터넷 서점을 클릭하면 서재 코너가 있다. 누구나 원하면 자신만의 서재를 가질 수 있다. 그 서재의 여러 역할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누구나 그곳에 독후감을 올릴 수 있다는 거다. 한데 그곳을 들락거리면서 의아했던 점은 타 분야에 비해 시집 리뷰가 드물다는 것이다. 인터넷 서재를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 문학 사이트나 개인 블로그에는 그야말로 시가 넘쳐 난다. 우리나라엔 시인만 해도 삼만 명이 넘는다니 그럴 만도 하다. 시인이 많은 나라이니 시집을 읽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들이 감상문을 올린다면 긴 글에 비해 더 많은 편수가 인터넷 서재에 등록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시집 리뷰가 드문 건, 시를 자기 식으로 해설한다는 게 쉽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온다. 예비 문학도들이 가장 예민해질 시기이다. 젊은 시절부터 신춘문예 당선시집은 웬만하면 사 모았다. 당선시들 중 내 취향에 맞는 작품들을 만나면 심사위원께 큰절을 하고 싶을 정도이다. 어쩜 이리 탁월한 선택을 했을까 싶어서다. 풀썩이는 맘 자락에 단비를 주는 시를 발견하는 시안(詩眼)이라니.나아가 어쩌면 나도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가늠해보곤 했다. 작은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시는 짓는 게 아니라 절로 써지는 거다. 한마디로 그분이 오셔야 된다.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만들어진 시인은 시인이라 불릴 수는 있겠지만 진짜 시인은 아니다.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생래적 시인이 못되는 사람은 좋은 시를 찾아 감상하면 된다. 시작의 고통을 덜 수 있는데다 영혼의 요기까지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데 요즘 유행하는 시들을 곁에 두고 읽자니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천상 시인인 사람들이 사라졌을 리는 없다. 문제는 내게 있다. 참신하고 재기발랄한 시들을 접수하기엔 내 문학적 상상력이 너무 늙어 버렸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2

모성 본능

가끔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있다. 결혼했다는 것과 남편이 있다는 것까지는 입력이 되는데 `엄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루 종일 뭔가 얽힌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긴 하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면 좋겠는데, 엉뚱한 사유들 때문이니 그게 문제다. 언제나 개별자로서의 자아가 모성을 가진 자로서의 나를 앞선다. 보통 `엄마`라면 어떤 상황에 있건 자식 생각이 우선이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족쇄가 되니, 한 번쯤 아이들에게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기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엄마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딸이나 아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그제야 아참, 내가 엄마였지, 하고 당혹해한다.아이들이 아프다고 하면 그 순간은 진심으로 맘이 짠하다. 그 맘이 하루 종일 지속되면 좋으련만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밤늦게 걱정하는 남편을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 자책한다. 이쯤 되면 혼란스럽긴 하다. 내게 모성이 없는 걸까? 모성은 본능일까, 아니면 사회화 과정의 산물일까?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살갑게 챙기고 알뜰히 보살피는 모성지상주의자는 아니다. 방임을 가장한 허용적인 엄마이고, 권위적이지 않은 시쳇말로 쿨한 척하는 엄마이다. 자식에게 밀착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 엄마가 이래도 되나 싶을 때도 있다. 모름지기 엄마라면 그 무엇보다 자식을 최상의 자리에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혼란이 오기도 한다.하지만 스스로 얻은 결론은 결코 나는 모성이 없는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모성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사회가 정해놓은 방식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고 모성이 없는 건 아니다. 모성을 천성이나 운명의 자리로 묶어두려는 사회적 억압 구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 모성을 의심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성 신화를 버리고서야 다양한 모성 모델이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1

마들렌느 과자

학창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였다. 속지에 담긴 작가의 사진을 칼로 오려 간직한 적이 있다. 오늘 신문에서 나보다 더한 사람을 보았다. 고종석 작가의 고백인데 젊은 날 헌책방에서 책을 훔친 적이 제법 있단다. 강도 높은 고백인데, 당시엔 죄책감도 없었다나. 작가는 헌책방 주인을 계급의식 관점으로 본 듯하다. 싸게 손에 넣어 비싼 값으로 팔았을 터이니, 가난한 학생이 평생 대여(?) 좀 한들 어떠리, 하는 맘이었던 것 같다. 책 안의 주요 정보를 개인의 욕심 때문에 독점하는 행위는 부도덕하다 못해 파렴치하다.하지만 그 치기 역시 책에서 배웠으므로 내 죄 역시 반감돼야 마땅하다! 그 시절, 설익은 청춘들의 감성을 쥐락펴락했던 전혜린이란 에세이스트가 있었다. 그가 독일 유학시절 필요한 자료를 도서관에서 슬쩍해왔다는 고백을 읽으면서 나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때 오린 사진이 프루스트였다. 자책감보다 더한 치기어린 만족감이 있었음을 나도 고백해야겠다.하지만 빌린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작가 사진만 불법으로 쟁취한, 못다 읽은 책으로 남고 말았다. 한 마디로 지겨웠다. 만연체 문체 때문이었다. 끝날 줄 모르는 접속사로 이루어진 복문은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한데 만화로 된 그 책이 있다는 걸 알았다. 당장 샀다. 그 유명한 장면인 마들렌느와 홍차 부분에서 마들렌느 과자 모양이 무척 궁금했다.홍차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식탁. 왼쪽 손에 홍차 한 스푼을 뜬 마르셀은 콧수염 가까이 들이대고 그 향을 음미한다. 접시에 놓인 마들렌느 과자 한 조각을 떼어 스푼 속 홍차에 찍는다. 그 순간, 온갖 오감이 발동해 마르셀은 의식의 흐름 여행을 하게 된다.만화로 된 이 책만으로도 프루스트를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단, 빌린 책이라면 마들렌느 과자 실체를 확인하고 그 모양이 탐나더라도, 절대 칼로 오리는 행위는 삼갈 것. 책 귀한 시대는 지났으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1-20

우연이 준 선물

방과 후 문예교실에서였다. 기억에 남을 만한 선생님에 관한 단상 써오기를 숙제로 냈었다. 학생다운 재기발랄하고 감수성 풍부한 글들이 발표되었다. 남학생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게 한 선생님에 대한 서운함, 정신적 동질감을 주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 감성적인 격려의 메시지를 아끼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등이 주된 이야기였다. 그 중 한 학생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머핀과 초콜릿을 준비했단다. 기회를 봐서 교무실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 선생님이 안 계실 경우 다른 선생님을 후보로 새겨뒀다. 그냥 나오면 제 맘도 들키는데다, 다른 선생님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교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바라던 선생님은 안 보이고 평소 무섭고 냉정하게 보이던 한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엉겁결에 `선생님 드세요.` 하고 쫓기듯 선물을 드리고 나왔다. 맘에도 없는 일이라 그리곤 잊고 있었단다.한데 며칠 뒤 그 선생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더니 정성 깃든 편지와 작은 선물을 주시더란다. 놀람과 감동이 동시에 밀려오더란다. 냉정하게만 보이던 선생님이 제 이름을 기억해준 것만도 고마운데, 편지까지 주셨으니 눈물이 날 지경이더란다. 그 글의 제목은 `우연이 준 선물`이었다.이처럼 우리는 우연을 통해 한 사람의 진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현상일 뿐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 타인을 규정할 수 있는 명백한 객관성이란 인간 앞에서는 없다. 경험한 만큼만 보기 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타자를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감성적 동물이다. 따라서 한 대상을 바라볼 때 제 삼자의 말에 휘둘릴 필요도 내 안의 편견에 내몰릴 이유도 없다.멀리서 본 높고 험한 산의 위용보다 가까이서 본 나무 잎새 뒷면의 떨림이 훨씬 더 실체에 가까울 때가 많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그런 선물이라면 자주 주고받고 싶다. /김살로메(소설가)

2012-11-19

그래도 꽃보다 사람

오전 일정을 끝내고 콧노래를 부르며 차에 올랐다. 힘든 일을 마친 뒤라, 친구와 점심 겸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 생각에 기분은 최고조였다. 그것도 잠시, 교차로에 진입하는 순간, 시커먼 물체가 허공에 날리더니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 차끼리 접촉사고가 났는데, 떨어져 나온 범퍼가 공중제비로 내 차 옆구리를 찍었던 것.날씨도 추운데 점심 약속마저 깨지게 돼 짜증이 났다. 하지만 별 소소한 일이 생기는 게 인간사인지라 덤덤하게 기다리기로 한다. 한데 사고 당사자 두 사람의 대처 방식이 극명하게 달랐다. 재미나면서도 씁쓸한 장면을 관찰하느라 추운 줄도,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조심스레 대화를 시도하고 다른 한 사람은 무조건 성가셔한다. 뭔가 말을 꺼내려는 한쪽에게 다른 쪽은 손사래를 치며 단박에 잘라 버린다. 보험사 담당자들이 오면 그들끼리 알아서 하면 된단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어디 더 흠집난데 없나하고 자신의 차에만 눈길을 준다.군말 필요 없다는 택시 기사는 이런 일을 대처하는 확실한 매뉴얼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대화를 시도하려는 한쪽은 그 상황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식을 택한 경우였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 격인 내게도 전자는 그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후자는 필요 이상으로 미안함을 표시한다.`남의 시간 뺏어서 어쩌나, 오늘 하루 일진이 안 좋다고 생각해 달라` 등 나름 인간적인 해법을 취한다. 아무리 봐도 잘못은 `입 다물어`파가 더 큰데, 배려는 `수다쟁이` 파가 앞선다.왠지 씁쓸했다. 배짱 좋게 뻗대는 노회함보다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시도하는 진솔함이 훨씬 보기 좋았다. 기계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시스템을 따른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도 없고, 역지사지를 모른다면 그게 잘산다고 할 수 있을까. 흠집난 제 차를 살피는 것보다 맘 불편할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게 우선 아닐까. 꽃보다도 아름다운 게 사람이라 했거늘 차보다도 못한 게 사람이라면 어디 살 맛 나겠나./김살로메(소설가)

2012-11-16

잘 지내기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할 순 없다. 거꾸로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원하는 대로 사랑하고 바라는 만큼 사랑받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종교는 왜 필요하고 철학은 왜 생겨났겠는가. 심술 많은 창조자는 태초에 인간을 만들 때 그 형상을 빌려주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인품까지 내어주지는 않았다. 갈등하고 번민하는 건 불완전한 인간의 생래적 운명이다. 신이 아닌 `인간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나름 노력한다.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나만의 몇 가지 원칙을 훈련하고 있는 중이다. 우선, 논쟁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논쟁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한두 번 시도해보고 소통이 안 된다 싶으면 놓아 버리는 게 최선의 평화다.둘째, 어떤 상황에서 양자택일할 경우 내가 손해나는 쪽을 택한다. 상대가 이익을 가져갔다고 그 상대가 이긴 게 아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건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된다.셋째, 리액션이나 피드백은 필수다.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최대한 공감을 한다. 반대로 내 쪽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상대의 진솔한 의견을 요청한다. 모든 타인은 나보다는 객관적이다.넷째,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 리더 역할일 경우, 일은 무조건 타인에게 맡긴다. 리더는 일을 잘 하는 자가 아니라 멍석을 잘 까는 자여야 한다. 끊임없이 배려하고, 의논하고, 믿어주는 게 진정한 리더이다.다섯째, 인정하고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시샘과 부러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타인의 장점을 높이 사기 시작하면 그 사람에 대해 절로 존경심이 인다. 어느 순간 그 장점을 따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이런 몇 가지 사실만 맘에 새겨도 사람 사이에서 오는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아직 만족할만한 실천 단계는 아니지만 노력 중이다. 가끔 인간사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다섯 가지 실천 사항 중 어느 하나가 삐걱댔기 때문이리라./김살로메(소설가)

2012-11-15

삼십 년

`책과 창녀는 무척 젊게 만들어준다.` 발터 벤야민이 한 말이다. 그의 사유집`일방통행로`의 소제목`13 번지`는 책과 창녀의 공통점에 대한 부분인데 `벤야민다운` 독창적 생각으로 차 있다. 오래된 친구들을 너무 오랜만에 만나고 난 뒤 이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벤야민의 그 말을 내 식으로 바꿔 말하면 `오랜 친구는 무척 젊게 만들어준다.`가 된다. 우리를 무척 젊게 만들어주는`오랜 친구`는 한 가지 단서를 달고 있어야 한다.`자주 만난 오랜 친구`가 아니라 `오랜 만에 만난 오랜 친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삼십 년 정도는 못 만났던 사이라야 우리를 젊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랜 친구라도 자주 만나면 늙음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고, 삼십 년 만에 만나면 `젊음`을 환기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육체적 현실은 늙었으나 심적 현상은 그때그대로임을 확인하는 청량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대학동창 열댓 명이 거의 삼십 년 만에 만났다. 이것저것 다급해진 궁금증만큼 섞어 마신 술 때문에 누군가는 빨리 취했다. 민낯을 드러낸 채 싱크대 앞에서 칫솔질까지 해대는 여자 동창들의 뻔뻔함도 남자애들의 무람없는 너털웃음 속에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삼십 년이 무색할 정도로 모두 순순한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아내를 잃은 이도, 자식을 먼저 보낸 이도 있었다. 잘난 마누라를 만난 이도, 보수적인 남편을 거느린 이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앞장서는 이도, 주변부에서 겉도는 이도 있었다. 다양한 세상만큼 각양각색의 삶을 변주하고 있었지만, 같은 이십대를 살았다는 공감대 하나만으로 웃고 떠들며 젊은 날을 돌아볼 수 있었다.삼십 년 시간의 강을 용케도 건너왔다. 앞으로 쌓아갈 나머지 삼십 년도 그렇게 과장 없이, 침잠도 없이 담담하게 맞고 싶다. 늦가을 흩어지던 낙엽비 아래서 제 젊음을 사고 싶다면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소집할 일이다. 책 못지않은 젊음을 가져다줄 테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1-14

사랑이 올 때

사랑하지 않아야 사랑이 온다. 사랑하면 그 사랑은 달아나기 십상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첫사랑은 실패로 남는다. 사랑을 이론서 안에서만 이해하려 한 치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기만해왔다.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혼란이다. 대개 어느 한쪽의 괴로움을 수반하는 심리적 기 싸움이 사랑이다.수많은 문학작품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었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충만해진다는 것도 거짓이다. 그런 건 신 앞에 모든 걸 맡긴 종교인에게서나 가능하다. 실제 더 많이 사랑할수록 패배자일 뿐이다. 덜 사랑해야 승리자가 되는 건 사랑의 속성이다.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상처의 다른 이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첫사랑에 백전백패하는 이유는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고 주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저울추가 없다고 믿었던 순정함이 사랑을 그르친 것이다.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연민과 자책은 없을 수 없겠지만, 사랑 앞에서 괴로움 따위는 친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 사랑하는 쪽은 상대의 연민과 자책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앞에서 늘 괴로움을 친구로 둘 뿐이다.어려서 순정했던 그 미세한 떨림은 비밀스러울 수가 없었다. 순정할수록 감춘 마음은 더 티가 났고 그래서 상처 받기도 쉬웠다. 가장 순수했던 감정이라고 다 사랑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상처뿐인 사랑이라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일 수가 없다. 제 사랑을 완벽하게 주관하지 못한 사랑을 어떻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그냥 아픔일 뿐이다.사랑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걸 안 뒤의 사랑이어야 정녕 아름다울 수 있다. 현명한 자는 사랑을 부릴 줄 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을 버리고서야 온다. 안타깝게도 모든 현명한 것들은 너무 늦게 알게 된다는 사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13

이제 시작이다

시험이 끝났다. 시험장에다 날개를 떼어놓고 오기라도 한 것일까. 한풀 꺾인 새처럼 교문을 나서는 그들 어깨 위로 저녁 안개가 내려앉고 있었다. 아무렴, 대책 없이 따사로운 햇살보다는 눈치껏 감싸주는 안개가 그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우르르 몰려나오는 수험생들 가운데 울상 짓는 몇몇의 실루엣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꿈을 얻기 위해 몇 년을 달려왔다. 하지만 아뜩하기만 한 지문(地文) 앞에서 그들은 몇 번이고 그 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부정적 정의를 환기시켰을지도 모른다. 꿈은 꾸는 것이지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너무 어려워 절망의 예고편처럼 읽히는 시험지 앞에서 자조적 탄식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천지 유리벽인데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은 더해가고, 그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맘 아플 몇몇 수험생들에게 자꾸만 감정이입이 된다. 먼 시절을 돌이키면 그 때 내 심정이 딱 저랬다. 이제껏 맛보았을 몸과 마음의 가장 큰 상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낙담은 이르다. 입시는 가장 큰 현재형 고통일지 모르지만 가장 우스운 미래형 코미디이기도 하니까. 힘겨울 그들의 `지금`에게 용도 폐기용 충고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늦은 깨달음들이 세상엔 널렸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삶은 지속된다. 희망을 버린 절망의 나날보다는 절망을 이긴 앞날이 그래도 더 많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건, 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문을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볼 수도 없었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군분투했을 그들이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며칠만 힘겹다가 툭 털고 일어나, 내팽겨 쳐 둔 날개를 가지러 갔으면 좋겠다. 들숨날숨 한 호흡 크게 쉬고 새벽길 나서는 그들 어깨를 상상한다. 안개 자욱한 그 길, 귀 열고 눈 뜨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날개 돋는 시절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1-12

오늘은 어제의 거울

모든 오늘은 어제의 집합체이다. 내일 없는 오늘은 있어도 어제 없는 오늘은 신생을 제외하곤 없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몸짓과 생각은 좋든 싫든 어제의 결과물이다. 앙다문 입술, 조심성 없는 매무새, 무심한 위로의 말, 주춤거리며 멀어지는 발길, 재바른 손놀림, 자주 흘리는 눈물, 위선에 찬 악수, 쏘다녀 비릿해진 머릿결, 전의를 상실한 눈빛…. 이 모든 것들은 축적된 어제가 내보낸 오늘 삶의 무늬들이다. 오늘을 이루는 이 무늬결이 단단하거나 부서지는 건 어제 역시 단단하거나 부서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늘을 산다고 믿지만 실은 어제에 갇혀 산다. 오늘을 버리고 싶다는 것은 어제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고, 오늘을 부여잡는 건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는 완곡한 바람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였으므로.삶이란 이처럼 어제와 오늘이 얽힌 유기적 총체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소설`어제`에서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는 지난한 삶을 무심한 듯 냉정한 필치로 그린다. 장식 없고 건조한 그녀의 문체는 화려하고 다사로운 문체보다 훨씬 더한 감동을 준다. 창녀의 딸이라는 과거도, 노동자라는 현재도 연인에게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주인공의 막막함. 거기다가 연인과 같은 아버지를 뒀다는 혼자만의 비밀까지 감당해야 하는 주인공은 스스로를 제외하곤 어디서도 제 운명을 이해받지 못한다. 끝내 고통스런 어제인 연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 독자로서 가슴이 아픈 건 운명의 가혹함이라는 신파가 아니라 산다는 것의 비루함에 이야기의 초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결코 과거를 파먹으며 자학하지 않는다. 사랑을 포기한 그 자리엔 현실이란 오늘이 배치되어 있다. 말하자면 죽도록 사랑했던 연인이 떠나도, 더 이상 꿈꿀 이유가 없어도 인간은 어떻게든 현실과 타협해서 살아가게돼 있다. 다만, 어제에 발목 잡힌 오늘이 그 어제를 영원히 밀어내지는 못한다. 어제에 저당 잡히는 걸 견딜 수 있는 건 그것이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09

사과의 계절

창 너머 은행나무 가로수들, 달린 잎보다는 떨어져 뒹구는 잎들이 더 많다.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 계절 속절없이 가고 있다. 이맘때면 백만 번이라도 사과를 다시 하고픈 아이 한 명이 떠오른다. 은행잎 날리고, 찬바람 돋던 어느 오후였다. 현관 앞 복도에 세워둔 자전거가 없어졌다. 새 것이기도 했지만, 자전거 타기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딸내미를 위해서라도 되찾고 싶었다. 그 즈음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자주 자전거가 없어졌다. 분명 상습 절도범이 계획적으로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미치자 자전거를 찾고 싶은 것 이상으로 그 절도범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싶어졌다.아파트 관리실의 협조를 얻어 CCTV를 확인했다. 엘리베이터 안을 비추는 화면에 드디어 자전거 도둑이 떴다. 한데 화면 속 얼굴은 아무리 봐도 내가 열고 있는 논술교실의 회원이었다. 모범생이었지만 화면에 그렇게 나온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 캡처한 사진을 그 아이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 아이 짓이 아니었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애 모습이라고 그 아이가 확인해주었다. 선명치 않은 화질을 믿고 착하디착한 아이를 자전거 도둑으로 오해 하다니.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었다.사과를 한다고 했지만 내 사과는 충분치 않았다. 사과라는 건 상대가 온전히 받아줄 때까지 해야 한다. 하지만 진심을 전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몇 년 뒤 한 고등학교에 특강을 나갔을 때 그 아이를 만났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 아이를 보자 반갑고 미안한 마음에 계속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를 외면했다.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사과를 했지만 상대방이 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사과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었다. 당시 무조건적이고 깔끔한 사과를 하지 못했던 내 맘을 용서하지 못하겠다. 한참 지난 일이지만, 노란 은행잎 뒹굴고 찬바람 스미는 날이면 내 컸던 실수와 미흡했던 사과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몇 번이고 계속해도 모자랄 나의 사과./김살로메(소설가)

2012-11-08

아줌마 단상

우리 사회에서 아직 `아줌마`라는 말은 긍정의 의미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더 강하다. 처음부터 나쁜 의미로 쓰인 건 아닐 것이다. 아주머니에서 출발한 그 말은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의 부인네를 친숙하게 칭할 때 두루 쓰이는 말이었을 게다. 하지만 이제는 사전조차도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사전적 의미의 아줌마를 오늘 대로변에서 목격했다. 한 남자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그것도 분에 차지 않는지 핸드백으로 남자의 가슴팍과 어깨 등을 닥치는 대로 내리치고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는다. 재혼 가정인 모양인데 딸 혼사 문제로 낮술한 잔씩 한 김에 실랑이를 벌이는 듯했다.아줌마의 여러 이미지 중 `그악스러움`이 담긴 얘기는 옛날에도 있었다. 구한말 때의 여행가 새비지 랜도어는 우리의 아줌마 관찰기를 이런 내용으로 기록했다. 꿔 간 돈을 갚지 않은 포졸이 오리발을 내민다. 채권자 남편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자 구경만 하고 있던 아내가 빨래방망이로 포졸을 때려 실신시킨다. 정신 차린 포졸이 달아나자 끝까지 쫓아가 포졸을 얼음판에 쓰러뜨리고 얼굴을 물어뜯기까지 한다. 보다 못한 새비지 랜도어가 말리다가 무릎을 얻어맞아 달걀만한 혹이 생겼다나.예나 지금이나 `아줌마`는 약간은 그악스럽고 조금은 불편한 이미지로 그려지나 보다. 하지만 양성 평등론과 여성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그 말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리게 되었다. 남성의 그악스러움과 불편부당함은 `아저씨`로 한정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어머니, 엄마`가 주는 이미지만큼 성스러운 위상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아줌마도 여성인 만큼 너무 부정적인 의미로만 국한되지 않기를 희망해본다.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이라면서 아줌마들 힘을 돋우는 여성 단체도 있지 않은가./김살로메(소설가)

2012-11-07

도나도나 그리고 존 바에즈

`도나도나`란 포크송은 반전(反戰)가수 존 바에즈가 불러 유명해졌다. 구슬픈 가락의 그 노래는 물론 그녀가 처음 부른 건 아니다. 유태인 작곡자와 작사자가 따로 있고 곡에 얽힌 사연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태인 이웃을 지켜본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마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는 송아지의 슬픈 눈은 맥없이 수용소로 잡혀가는 유태인들을 가리키리라. 들을 때마다 가사에 나오는 송아지, 제비, 바람, 농부의 이미지가 하나의 그림처럼 떠오른다.속박된 송아지의 슬픈 눈앞에는 가없이 자유로운 바람의 웃음(어쩌면 비웃음일지도)과 맘껏 나는 제비의 날갯짓이 펼쳐진다. 송아지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그런 송아지의 눈빛을 보는 달구지의 주인인 농부가 말한다. “억울하면 날개 달고 제비처럼 날아보지 그랬니”라고. 자유가 소중하다면 나는 법을 배우라고.훗날 기타 든 존 바에즈가 이 노래를 자기화해 불렀을 때, 비폭력 저항 및 자유에 대한 상징의 기치와 매우 잘 어울리는 노래가 됐다.온몸으로 읊조리듯 고백하는 목소리와 시적이고 구성진 노랫말 때문에 귀가 절로 열린다.특히, 후렴구인 `도나도나` 부분은 묘한 여운이 남는다. 후렴구 도나도나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원곡에 충실하자면 절대자인 구원자를 의미할 것이고, 시적인 가사에 충실하자면 이탈리아 말로 `부인`이란 뜻도 있다니 그렇게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를 갈구하는 노랫말로 보자면 단순한 추임새 기능으로 봐도 무방하다.도나도나를 떠올린 건 얼마 전 `존 바에즈 자서전` 신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미화된 찬사만이 아니라 치부와 약점마저 오롯이 담겨있는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출간기념회 겸 고희를 넘긴 존 바에즈가 전 세계를 돌며 구슬프게 읊는 자유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도나도나해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06

여성의 범주

한 심리학자가 시사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해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여성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발언 때문에 각종 매체가 시끄럽다. 아마 `최초의 여성 대통령론`을 펼치는 박 후보의 정체성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나 보다.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이해된다. 하지만 정치 문제를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한 때도 잊은 적 없는 나 같은 시청자는 금세 흥분지수가 높아질 만하다. 황상민 교수의 논지는 대개 이렇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생식기가 아니라 역할의 차이이다. 여성의 대표적 역할은 결혼하고 애 낳고 그 애를 키우는 것이다. 박 후보가 결혼을 했나, 애를 낳았나? 학교 다닐 때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대우받는데, 결혼하고부터 여성들이 차별 받는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여성의 차별을 이야기하기가 사실 힘들다.이 말 속엔 모름지기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시집살이도 해보고, 남편 보필도 제대로 해봐야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나아가 모성을 잃어서도 안 되며, 온갖 세파에도 끄덕하지 않은 불굴의 의지를 경험한 경우라야 진정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여성관을 어떻게 저리 쉽게 방송에서 드러내고 떠들어댈 수 있을까.세상의 모든 여성은 다만 여성일 뿐이다. 결혼하고, 애 낳고, 단맛 쓴맛을 경험해봐야 꼭 여성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한정된 의미의 여성은 전 여성의 반에도 못 미친다. 결혼 안 한 여자, 아이 안 낳은 여자, 세파에 시달려보지 않은 여자도 부인할 수 없는 여성이다. 모성이 없어도 여성이요, 심지어 여자라고 자기 정체성을 확신하는 단순 생물학적 남성도 여성이라 할 수 있다.여성의 범주는 마초적 성향의 남자 잣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여성이면서도 남성적 시각으로 같은 여성을 바라보는 치들과 더불어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가 저런 시각의 보유자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