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기간 동안 여러 곳을 휘돌았을 때 그것은 `시청박(視廳搏)`에 머문 것이지 `견문득(見聞得)`에 이른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보면 차 탄 채 풍광을 보다가 내려, 낯선 축조물과 거리를 배경으로 빛의 속도로 사진을 찍고 밥 먹고, 다음 장소로 옮겨 잠자는 것, 이것이 여행의 전 과정이었다.
패키지여행의 한계였다. 여행에서 가장 필요한 자발적 의사와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았기에 뭔가를 깊이 새긴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합리적인(?) 비용만큼의 합당한 결과였으니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
인증욕이 발동해 셔터만 바쁘게 눌러댔을 뿐 그들 삶 자체를 들여다 볼 기회는 좀처럼 가지지 못했다.
이국의 문 닫힌 여염집안의 티타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평원에서의 농사꾼의 망중한, 마을을 흐르던 푸르거나 흙빛 시냇물의 감촉 등을 새기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토록 날 좋았던 이국 밤하늘의 별 한 번조차 쳐다보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였다.
주마간산 식 여행은 견문득과는 한참 멀다. 그렇다고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비록 시청박에 머물렀지만 그 또한 여행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로, 듣자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로 정의하고 있다.
이희미(夷希微)는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분명한 실체가 아니다. 도가 그러하듯 여행에도 완벽한 실체가 있을 수 없다. 닿을 수 없는 한 지점을 향해 바람 맞으며 떠나보는 일, 그 과정에서 삶을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 그것이 여행 궁극의 목표 아니겠는가.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