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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는 짐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3-06-28 00:13 게재일 2013-06-2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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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 초반 동아리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다. 험한 산을 며칠에 걸쳐 종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다. 합리적인 등반 채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들뜬 나머지 이것저것 꾸러미만 늘렸다. 이틀째였던가. 급경사인 등산로 앞에서 나를 비롯한 여학생 몇은 그만 울음보가 터졌다. 체력은 바닥인데 무거운 배낭마저 어깨를 짓누르니 설움이 북받쳤던 것이다. 하지만 강단 있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눈썹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배웅 나왔다가 엉겁결에 뾰족 구두 차림으로 합류한 후배조차 의연한 모습이었다.

너그러운 남학생들의 도움으로 겨우 종주를 마칠 수 있었지만 그 일은 내게 꽤 충격이었다. 주량도 모른 채 마신 한 잔 소주에 취해 다음날에야 깨어났던 사건처럼 수치스럽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괴와 민폐를 불렀던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정글의 법칙` 같은 다큐에서 힘든 상황일수록 의연하게 대처하는 여성 출연자를 보면 마구 존경심이 인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나 자신을 알자`는 말을 자주 새기게 되었다.

명강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베테랑일수록 꾸러미가 간소하다는 여행전문가의 충고는 내 경우 옳았다. 그 옛날 지리산 종주에서 겪었던 낭패감을 떠올리며 짐을 줄이고 또 줄이라는 그 말을 무조건 신봉했다. 최대한 가벼운 짐을 꾸렸다. 얼마나 줄였는지 공간이 남아돌아 가방을 움직이면 덜컥이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러면 가벼운 짐 싸기만 옳은가. 그럴 리가! 때에 따라 무거운 짐은 생명까지 구할 수 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성가셔하면서도 근시와 돋보기용 두 개의 무거운 안경을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저격수는 대통령의 가슴팍을 겨냥했다. 하지만 총알이 주머니 속 강철 안경집에 굴절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다. 내 짐이 무겁다고 느끼는 자는 덜고, 그 짐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챙겨서 떠나면 된다. 인생은 어차피 전세 아니면 월세, 선택의 연속이니까.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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