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운 남학생들의 도움으로 겨우 종주를 마칠 수 있었지만 그 일은 내게 꽤 충격이었다. 주량도 모른 채 마신 한 잔 소주에 취해 다음날에야 깨어났던 사건처럼 수치스럽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괴와 민폐를 불렀던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정글의 법칙` 같은 다큐에서 힘든 상황일수록 의연하게 대처하는 여성 출연자를 보면 마구 존경심이 인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나 자신을 알자`는 말을 자주 새기게 되었다.
명강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베테랑일수록 꾸러미가 간소하다는 여행전문가의 충고는 내 경우 옳았다. 그 옛날 지리산 종주에서 겪었던 낭패감을 떠올리며 짐을 줄이고 또 줄이라는 그 말을 무조건 신봉했다. 최대한 가벼운 짐을 꾸렸다. 얼마나 줄였는지 공간이 남아돌아 가방을 움직이면 덜컥이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러면 가벼운 짐 싸기만 옳은가. 그럴 리가! 때에 따라 무거운 짐은 생명까지 구할 수 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성가셔하면서도 근시와 돋보기용 두 개의 무거운 안경을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저격수는 대통령의 가슴팍을 겨냥했다. 하지만 총알이 주머니 속 강철 안경집에 굴절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다. 내 짐이 무겁다고 느끼는 자는 덜고, 그 짐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챙겨서 떠나면 된다. 인생은 어차피 전세 아니면 월세, 선택의 연속이니까.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