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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호미곶광장에 웬 고래?

지난 7월 포항 호미곶에 호미곶여행자센터가 개관했다. 호미곶광장에 초록색 인조잔디가 덮인 고래 형상의 건물, 해오름무대 안에 지상 2층의 여행자센터가 설치됐다. 1층과 2층의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용히 독서도 할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이다.이곳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들을 수 있다. 포항의 관광명소나 유적지의 위치 뿐 만 아니라 인근 지역과 연계해서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수화물 보관함이 있어서 무거운 가방을 안전한 곳에 맡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휴대기기 충전도 가능하며, 휠체어와 유모차, 수유실도 마련돼 있어 보행이 힘 드는 사람이나 어린아이와 동행하는 여행객들도 편의를 제공 받을 수 있다.김경화 문화관광해설사에 의하면 “편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지만 여행자센터를 모르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아쉽다”고 한다.한국관광통계에 따르면 2019년 이후 관광객 수가 급격히 줄었다. 한국을 방문한 외래 관광객은 2019년에 비해 약 96% 줄었으며, 국민해외여행객은 약 97% 감소했다. 2022년 임인년 포항 호미곶 한민족해맞이축전도 취소됐다.코로나19는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움츠러들게 한다. 자가격리·거리두기·재택치료·위드 코로나·백신패스 등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예견하지 못했던 단어들이 일상 언어가 됐다. 우울하고 답답한 현실이지만 집에만 있을 수 없다.호미곶 새천년기념관에는 전망대·수석전시실·화석전시실·포항의 옛 모습 사진과 포항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실·가상체험관이 여행객들을 기다린다. 광장에는 상생의 손, 영원의 불씨함, 연오랑 세오녀 상 등 다양한 볼거리와 포토 존도 있다. 국립등대박물관 옆, 해안에는 이육사의 시 ‘청포도시비’도 있다.여행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호미곶여행자센터. 개방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4시30분(하절기 오전 10시~오후 5시, 점심시간 낮 12시~오후 1시)이며, 수화물 보관료는 무료이다. 즐겁고 알찬 여행을 원한다면 여행자센터를 적극 활용할것을 추천한다.

2022-01-02

봄 산이 입안에 가득

코로나로 힘든 시국이다. 더러는 입맛이 사라진 지 오래라고 한다. 이럴 때 잃었던 식욕을 살아나게 해 줄 자연의 맛을 소개한다.국립공원 주왕산 초입에는 자연식을 파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넓은 황토집이 눈길을 끄는 ‘청솔식당’은 맛 좋기로 소문난 집이다. 봄 산에서 채취한 것들로 주인장이 직접 만드는 나물 반찬 덕분이다. 골담초 꽃 무침, 당귀 나물 무침, 뽕잎 햇순 김치, 방풍 김치, 가죽 장아찌, 박쥐나물 장아찌 하나같이 삼삼하고 담백하다. 토종 도토리 묵무침과 청국장 소스를 곁들인 샐러드는 아예 요리에 가깝다. 입안에 착 감기는 밑반찬 종류만 스무 가지가 넘는다. 현지인은 물론 외지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두부도 지역민들이 농사지은 콩으로 주인이 직접 만든다. 순두부찌개 한 술을 입으로 가져간 손님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자아낸다. 구수함이 한도를 초과한다는 뜻이다. 고추장, 된장, 청국장 등 장 종류도 주인 부부가 직접 담근다. 이 집의 인기 메뉴에 고추장 더덕구이가 들어가는 건 장맛도 톡톡히 한몫한 까닭이다. 약수로 푹 고운 토종닭백숙도 빼놓을 수 없다. 촉촉하고 부드럽다. 몸보신 제대로 하려면 이만한 게 없다.자연식으로 채운 한 상차림으로 속이 든든해지면 주왕산 제3폭포까지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맛 집에서 봄 산을 경험했으니 겨울 산을 오르는 일도 훨씬 상큼해지는 건 당연하다.국립공원 입구에서 ‘청솔식당’으로 간다고 하면 가게 전용 무료주차도 가능하다.

2022-01-02

‘영화계의 큰별’ 신성일 선생 1주기… 성일가를 다녀오다

지난해 가을, 큰 별이 졌다. 배우 신성일의 타계 소식이었다. 오는 11월 4일이 영화로 우리에게 꿈을 심어주었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되는 날이다. 마지막까지 거처했고 지금은 그의 영혼이 잠들어있는 영천시 괴연동은 어떤 모습일까.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성일가를 찾았다.성일가는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채약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약초가 많이 나서 채약산이라 불렀다 하니 땅의 기운이 좋은 곳이다. 영천에 자리한 초등학교 교가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산이기도 해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임은 틀림없다. 그 산세의 푸른 기운에 얹혀살고 싶었던, 이젠 고인이 된 신성일의 등신상이 마당 가운데 서서 우릴 반긴다. 집 둘레에 벚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2011년 결혼 47주년 기념으로 심었다고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신성일씨가 한 그루, 엄앵란씨가 한 그루, 자녀 셋의 이름이 각각 적힌 나무들이 그 옆을 지키고 섰다.필자가 찾아간 날은 서늘한 기운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렸다. 궂은 날임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가을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채약산 단풍은 그의 영화로부터 위로받으며 성장했던 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기 충분했다. 거기에 당대 최고의 배우가 살던 곳이라는 엄숙함까지 더해져 이곳이 새로운 문화 관광 콘텐츠로서의 역할이 있을 가능성을 엿보게 해줬다. 살던 때는 제대로 된 진입로조차 없었지만 서거 1주기를 앞두고 길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올 연말까지 그의 묘소가 있는 마당까지 길이 완성된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2007년, 신성일씨는 영천으로 이주해 10여 년간 많은 추억을 남겼다. 하필 영천이었을까. 궁금했다. 그는 반백이 지나 정치생활을 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도움을 받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이 마을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 농민은 말없이 많은 일을 해줬다. 신성일씨는 고마움을 전하러 찾아갔다. 마침 밭둑에서 참을 먹고 있었다. 신성일씨는 그 장면을 보고 잠시나마 쉴 수 있도록 원두막을 지어 선물 했다. 그 후 이 마을을 가끔씩 들렀던 신성일씨는 주변 산세와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마음마저 편안하자 아예 자신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지금 성일가 마당가에 그 원두막이 옮겨져 있어 찾아오는 이들이 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기에 좋은 경치를 선물하고 있다.성일가에는 여전히 그의 손길이 구석구석 뻗어 있다. 뒷마당에는 그가 담근 된장 고추장 단지가 도란도란 둘러앉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 같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 드셨던 신성일 배우는 장을 볼 때면 마트보다는 시장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시장에 앉은 할머니들이 파는 과일과 채소를 주로 샀고 소박한 음식을 즐겨 먹었다니 소시민으로 살아간 그의 정겨운 면이 엿보였다. 신성일, 한 때 그 이름은 우리나라 영화의 상징 그 자체였다. 1960-70년대 전성기를 보내면서 수백 편의 영화에 출연한 신성일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의 이름을 빼면 이야기가 안됐다. 1937년에 태어나서 2018년 11월 4일 새벽에 운명하였으니 한국 나이로 82세,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100세 시대를 맞이한 것을 감안하면 평소 건강하기로 알려진 그였기에 지병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더 오래 살 수 있었으리라. 80세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영화에 대한 의욕이 넘쳤던 터라 그의 암투병과 죽음은 많은 영화인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줬다.신성일은 별 중의 별로 각인돼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노래만 들어도 ‘별들의 고향’이라는 제목이 떠오를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영화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남자배우로서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년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의 이름이 등장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영화의 흥행도 달라질 정도였기에 앞 다투어 그를 출연시키려고 경쟁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작을 하면서도 소모되지 않고 스타성을 겸비했던 불가사의한 ‘영화 청년’이었다. 국내 각종 영화상을 수상했고,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평생 영화만을 생각하고 살았던 한국 영화의 역사 그 자체가 된 인물이다.그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요양병원에서 보냈다. 거기서도 매주 한 번 ‘신성일 영화제’를 열고 자신이 출연한 작품들을 지인들과 함께 감상했다. 와병 중에서도 그는 직접 연기를 하기 위해 영화를 기획했었다. 주연은 신성일. 그러나 그는 작품을 연출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원래는 그 작품에서 사위 역할이었던 안성기를 신성일 역할로 해 놓았다고 한다. 그의 유작은 아직 진행 중이다. 지난해 추도식에 참석한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최기문 영천시장은 고인의 꿈이었던 ‘신성일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자택인 영천시 괴연동 성일가 내에 건립될 기념관이 벌써 기대된다. 고인이 보관해왔던 각종영화 관련 기록과 대본, 의상 등을 전시하고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질 예정이라고 한다. 고인의 생전 주거 공간인 한옥은 그대로 보존을 하고 서재로 쓰던 자리에 새로운 기념관 건물이 들어서는 방향으로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둘레에 ‘성일로’라는 이름으로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등산로도 닦고 공연장도 들어설 전망이다.기와가 얹힌 한옥 건물은 사람의 기운이 있으면 천년을 간다고 한다. 그가 떠나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으나 신성일 배우가 안방에서 곧 나올 듯 한 느낌이다. 문 곳곳에는 찾아온 사람들이 그의 생활이 궁금해서인지 구멍을 뚫어서 본 흔적이 있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를 아끼는 마음만 간직하고 조용히 둘러보고 갔으면 한다. 한국영화가 올 해로 100년을 맞았다. 곳곳에서 기념하는 전시회와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 100년의 획을 그은 신성일의 기념관이 어서 빨리 건립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돌아왔다. “대배우 답지 않게 소탈했던 형님이셨죠”신성일씨가 생전 영천에 오면 가장 많이 만난 이는 영천시장내에 살고 있는 정길락(70·사진)씨다. 신성일 배우보다는 13살 어리다. 성일가내 한옥을 지으면서 둘은 만났다.“형님은 영화만 생각하며 살아온 터라 건축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죠. 그런 마당에 까다롭기 그지없는 한옥을 짓는다고 나서 처음에는 무척 고생을 했었습니다”정씨는 “형님이 한옥 입주 때 환하게 웃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면서 생전에 성일가에 대해 큰 긍지를 가지셨다고 회고했다. 또 “대배우 답지 않게 소탈했었다”면서 가족처럼 지냈는데 너무 일찍 보내드려 마음이 아프다고 되뇌었다.둘 사이의 정은 주변에도 알려져 있다. 멀리 출타했던 신성일씨가 영천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정길락씨가 있는 영천시장에 들러 얼굴을 보고 집으로 가곤 했다고 한다. 형제처럼 지낸 둘은 신성일씨의 또 다른 거처였던 서울 마포 아파트에 종종 함께 가서 며칠을 같이 지내기도 했다. 이는 엄앵란씨도 잘 알고 있는 일. 정길락씨는 “다가오는 기일에는 어떤 행사를 할 계획인가를 엄앵란 형수님께 물었더니 돌아가신 분의 뜻에 따라 가족과 가까운 친인척만 모여 취재진 없이 조용히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고 전한다. 정씨는 얼마 전에도 신성일 가의 잔디를 깎고 돌아왔다. 보고 싶을 때 한번 씩 찾아갔다 오면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말속엔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었다./김순희 시민기자

2019-10-27

“지열발전 참여 전문가에 대한 감사·조사 반드시 이뤄져야”

11.15포항촉발지진과 관련, 현재 감사원의 감사가 진행 중에 있다. 머잖아 감사원의 감사결과가 발표되리라 본다. 정부조사단이 포항지진의 원인을 지열발전소에 의한 촉발로 규정한 만큼, 포항시민들은 감사원이 내놓을 감사 결과가 궁금하기만 하다. 어떤 경우든 간에 미래에 두 번 다시 포항과 같은 참사 수준의 실수를 반복치 않기 위해서도 이번 감사는 엄격해야 실시돼야 할 것이다.필자는 포항지진을 추적하는 동안 매우 궁금한 대목 하나를 갖게 됐다. 포항지열발전소 사업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당위성과 타당성을 주장하던 그 당시의 전문가들과 과학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하는 부분이다. 포항이 지진으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지금까지 그들은 어떠한 입장도 밝힌 바 없다. 포항시민들은 지진으로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재산피해액만 10조 원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보면 소위 과학자이고 전문가라는 그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시민들의 시각에서 접근했었더라면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포항지열발전소에 참가한 과학자와 전문가들은 왜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일까.지진과학자들이 포항지열발전소 사업에 발을 담글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지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위해(risk)상황에서 사업자 측에 제공할 수 있는 남다른 지식과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처음에는 남다른 자긍심으로 참가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사업자 측으로부터 회의 수당 등 대가도 받았다. 그 대가는 어떻게 보면 세금이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사업 자체가 정부 지원을 받아 추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후에 나타난 일련의 절차에서 전문가들이 제 기능과 역할을 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포항지진 사태를 보면서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사업자 편익에 가담시킬 때 어떤 위험이 빚어지는 것인가를 확실히 관찰했다.우리 사회에는 전문가 이용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특히 공직자들이 특정 사업을 실시하면서 나중에 돌아올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문가 그룹을 자주 동원하고 있다. 그들의 유명세에 기대어 추후 일이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책임으로부터 살짝 비켜날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전문가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연, 현실적으로는 쉽지가 않다. 특히 전문가 그룹은 논리 생산이 일반인들에 비해 탁월하다. 필요에 따라 방향도 틀어주는 등 입맛에 맞게 요리해 주기도 한다. 이런 사례는 소위 전문인들이 하는 용역 등에선 부지기수다. 그러나 무슨 문제가 발생한다손 치더라도 그들에게 책임을 입증시키기란 쉽지가 않다. 전문가라는 그들이 ‘나는 이렇게 보고 생각했다’하면 책임은 문제를 제기한 측에서 입증해야 하기에 그 길이 간단치가 않다. 그렇다면 포항지진은 어떠할까. 지진으로 온통 난리가 났지만 가장 중요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 그들로부터 자백을 들어본 일은 없다. 그런 점에서 지진과학자들에게 지역주민과의 효과적인 소통 기술과 전문 지식의 부재에 따른 책임을 물어 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린 ‘라퀼라 재판(L‘Aquila Trial)’은 포항시민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이탈리아 라퀼라 지역은 2009년 4월 6일 규모 6.3 지진이 발생하여 300여명이 죽고 수천명이 다쳤다. 그곳도 6.3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수백 차례 미소지진이 발생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지진 일주일 전에 재난위원회가 소집됐다. 그러나 재난위원회는 회의 후 지진경보를 발령하지 않았다. 거대 지진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였다. 또 지진 위험성도 완전히 배제했다. 특히 그 위원 중에 한사람은 지진 위험이 없으니 집에서 편한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시라고 권고했다. 숨진 사람들 가운데 29명은 대피했다가 이 애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변을 당했다.이탈리아 법원은 2012년 10월 1심에서 7명의 과학자들에게 징역 6년 벌금 1000만 유로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판결의 이유는 간단하다. 재난위원회 소속 과학자들이 ‘정확하지 않고 불완전하며 모순된 정보’를 시민들에게 제공하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과학계는 법원의 선고가 나오자 즉각 반발했다. 완벽한 지진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과학자를 처벌하는 것은 정당치 않다는 것이었다. 반면, 주민들은 “모든 희생자를 위한 역사적 선고”라는 반응을 보였고, 시민단체들은 “과학이 문제가 아니라 공포에 질린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에서 잘못됐다”며 정당한 판결이라는 입장을 내놨다.그렇다면 미소지진이 수백차례 발생하는 상황에서 지진전문가는 주민들을 상대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미국 캘리포니아지진센터 토마스 조든 소장이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라퀼라 지진이 일어났을 때를 한 번 봅시다. 재난 상황에선 많은 허위정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언론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거짓과 허위 정보가 넘쳐납니다. 그런 때에 책임 있는 과학자 당국자가 정보를 주지 않으면 혼란은 더욱 가중됩니다. 단기적인 예측에서 더 권위가 있고 과학적이며 시의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해야 하며 과학자들도 대중을 상대로 투명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기술적인 부분뿐 아니라 일반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까지 숙지해야 할 것입니다. 지진과 관련해서는 언제쯤 정보를 공개할지 기준이 되는 ‘임계치’를 미리 만들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과학자는 지진 위기 상황에서 일반시민을 상대로 시의 적절하게 의견을 내고 기술적인 부분도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포항지열발전소 프로젝트에 참가하여 정보를 제공한 학자와 전문가들은 과연 포항시민과 소통하였는가. 이제 그들이 답할 때가 됐다. 포항지열발전소 사업 과정을 따라가 보면 전문가들이 결정한 결과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왜 그랬을까. 과연 지열발전소가 지진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지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진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대목에선 더욱 말문이 막힌다. 그들은 지열발전소를 운영하기 위한 수리자극을 5차례나 하면서 시민에게 지진발생 경보 체계 즉 신호등체계에서 포항시에 알리는 경보 매뉴얼에서조차 제외시켰다. 지열발전소가 내재하는 위해(危害: risk)를 대처하기 위한 소통채널을 처음부터 가동하지 않았던 것이다.포항지열발전소에 적용한 지진대처 7단계 프로토콜(미국학자 E. Majer 모델)을 검토하면 ‘위해소통’(risk communication)의 부재를 입증할 수 있다. 이 모델은 2단계와 7단계에서 주민과의 대화를 공유해야 하는 실천이 있다. 그러나 이런 지침들은 서류에만 남았을 뿐 실행은 되지 않았다.정부 지진조사단이 촉발지진이라는 발표를 한 이후 학자들(부산대 김광희 교수, 고려대 이진한 교수, 정부 조사단장인 이강근 교수)은 포항지진 경우 3∼4차례 예방할 기회가 있었다는 진단을 했다. 2016년 11월과 12월쯤에 시추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이수(mud loss)현상이 발생했을 때, 두 번째는 2017년 1월 16일에 1차 수리자극을 시도하여 규모 1.4 지진 발생으로 예상보다 큰 지진이 발생했을 시점, 세 번째는 2017년 4월 15일 3차 수리자극으로 규모 3.1 지진이 발생했을 때였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때 지열발전소 운영을 무조건 중단하고 전문가들에 정밀 진단을 받아야 했었다고 했다.포항지열발전소 참가 학자와 전문가들은 지진이 규모 3.1 이상 발생했는데도 왜 정밀조사를 권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주민 및 포항시 당국과 지진위해를 대비한 대화채널을 왜 전혀 가동하지 않았을까.그리고 자기들끼리 무슨 논의를 거쳐 2017년 4월 3.1 지진 발생 4개월이 지난 8월과 9월에 4차 5차 수리자극을 과감하게 강행했을까. 더욱이 그들은 8월에는 ‘순환연성 수리자극(cyclic soft stimulation)’ 실험을 시도(4차 수리자극)하여 성공했다면서 외국학술지에 두 편의 논문까지 발표했다. 지진 위해에 대처하는 소통채널은 전혀 가동하지 않은 채 말이다.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당당함은 지진 이후에도 이어진다. 포항시민들이 지진고통을 받고 있을 당시 그들은 2018년 12월과 2019년 1월에 이어 또 다시 5월에 국제학술지(Water Resources Research)에 4차 수리자극 실험 결과를 논문(Harmonic Pulse Testing for Well Monitoring)으로 발표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특히 그들은 정부가 포항지열발전소에 관한 어떤 정보도 주민 안정을 앞세워 공개를 차단하고 있었던 시점에 포항지열발전소에 관한 정보를 외국인 전문가와 공유하면서 논문을 공개했다. 그들은 포항의 아픔을 어느 선에서 받아들였기에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윤리적 측면에서도 납득이 어려운 대목이다. 어떻게 정보를 받았는지, 아니면 정보 통제 규제를 받지 않았는지 등 감사원 감사에서 밝혀져야 할 사안이다.필자는 포항지열발전 사업에 참가한 과학자와 전문가에 대한 감사와 조사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들이 제대로 된 역할을 했더라면 포항지진은 사전에 방지 할 수도 있었다고 보기에 더욱 그러하다. 지진 전후 시점을 추적해보면 석연찮은 점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포항시민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그들이 행한 일련은 일들에 있어서 포항시민들은 눈에 아예 없었다. 물론 그들은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과학 능력을 그동안 소신껏 실천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납득이 돼야 가능하고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포항지열발전사업에 참가한 전문가와 과학자들은 미소지진과 거대지진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지진위해 대비한 소통채널을 가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이 사실을 몰랐다면 그들을 전문가라고 선발한 측에 더 잘못이 있고, 알았다면 그들은 형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포항지열발전소 사업에 이름을 올린 전문가그룹은 서로가 이리저리 인연이 있는 것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선후배부터 동문, 사제지간 등 너무나 복잡하다. 그러니 그 안에서 고백의 소리를 듣기란 요원하다. 포항지진은 포항지열발전소가 촉발시킨 것이었다. 이제는 포항지열발전 사업에 참가한 과학자와 전문가라면 시민 앞에 나와 사태 전말을 밝혀 줘야 한다. 그게 최소한의 도리고 학자적 양심이다. 누군가의 고백이 있었으면 더 좋겠지만 그건 지나친 기대일 것 같아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답답하고 안타깝다./양만재 시민기자(포항지열발전부지안정성검토 TF 위원)

2019-06-30

“지열발전 관련자들, 포항시민과 소통 채널 가동했나?”

2018년 4월에 이어 2019년 5월 24일, 1년여 만에 사이언스(science) 과학저널이 포항지진에 관한 논문을 또 발간했다. 이번에는 소위 ‘포항레슨’을 중심으로 정책 포럼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본 논문 원고의 평가자들과 사이언스의 편집자가 논문 게재를 결정한 것은 분명 사회적, 과학적 가치인 타당성과 신뢰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포항시민에게는 과학적 가치와 더불어 또 다른 귀중한 실증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 논문이 포항시민 입장에서 포항 심부지열발전소 건설과 운영에 관여한 정부와 기업, 학자, 전문가를 상대로 지진재난의 책임을 가릴 수 있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5월 24일에 발표된 논문의 제목, ‘Managing injection-induced seismic risks’을 우리말로 옮기면 “지하유체 주입이 유발하는 지진 위험 관리”이다. 쉽게 해석하면 지열발전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물 주입으로 유발될 수 있는 지진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부제도 풀이하면 ‘물 주입으로 잠재적 위험이 누적되어 지진 위험성이 증가하는 현상을 평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위험관리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포항지진이 보여주었다’는 뜻이다.논문의 저자들은 포항지진과 포항지열발전소의 연관성 조사에 참여한 이강근 정부조사연구단장과 W.L. Ellsworth를 비롯한 13명의 국내외 학자들이다. 논문의 시사점과 교훈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심부지열발전소는 수리자극을 통해 지하의 뜨거운 암반에 균열망을 형성시켜 물을 주입하고 데워진 물이 지상의 발전기를 통해 전력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방식에서 수리자극이 큰 지진을 유발할 수 있고 수리자극에 투입되는 물의 양에 따라서 지진의 최대 규모가 좌우된다는 경험적 가설이 틀렸다는 것이다. 또 하나, 지열발전소가 발생시키는 지진이 수리자극 이후 바로 지진이 발생한다는 가설과 수리자극이 중단되면 큰 지진이 더 이상 발생되지 않는다는 가설의 부정을 포항지진의 경험적 증거로 입증했다.두 가설은 포항지열발전소에 참여한 관계자들이 규모 5.4 포항지진이 발생한 이후, 포항 지진은 지열발전소가 발생시킨 유발 지진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동원한 가설이다. 그들은 수리자극에 사용된 물의 양(1만2천t)으로는 규모 5.4의 거대지진이 발생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그들은 2016년 1월부터 2017년 9월까지 5차례 수리자극을 시도했다. 1, 2, 3, 4차 수리자극에서 발생한 지진은 자극 이후 바로 발생했다. 하지만 2017년 9월에 시도한 5차 수리자극은 2달 뒤에 일어났기 때문에 포항지열발전소가 발생시킨 유발촉발지진이 아니라 자연지진이라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 지난 2018년 5월 이진한, 김광희 교수와 그리골리 등 외국학자들에 의해 발간된 두 편의 사이언스 논문에 이어 이번 논문에도 실려 있다.포항지열발전 실증시설 현장에 있는 두 개의 지열정 중에서 한 쪽 지열정(PX-1)은 물이 잘 주입되었지만, 다른 지열정(PX-2)에서는 물 주입이 순조롭게 되지 않았다. 통상적인 압력으로 PX-2에서 물 주입이 잘되지 않자 물 투입 압력을 통상 수리 자극에서 쓰는 압력인 20MPa(메가파스칼) 이상을 초과하여 거의 5배 수준인 90MPa 수준까지 높였다. PX-2지열정에서 1차, 3차, 5차의 수리자극을 하면서 90MPa 수준에 이르는 압력으로 단층에 과도한 충격을 주었다. 지진을 촉발시킬 수 있는 자극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PX-2 지열정의 굴착과정 동안 3.8㎞ 깊이에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단층을 만났고(intersected), 이후 거의 90MPa에 가까운 압력으로 1차와 3차 수리자극을 하면서 90차례 이상의 유발 지진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본진을 일으켰던 단층을 계속 자극시켰다고 한다. 이후 2017년 9월까지 연속된 수리 자극은 이미 이 지역의 지구조적 상태(tectonic state)에 따라 임계상태에 있었던 단층을 촉발케 한 환경을 조성했다. 단층이 임계상태에 도달해 있었다는 전조는 2017년 4월 15일의 규모 3.2지진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그들은 수리자극을 멈추지 않고 8월말에서 9월 사이에 다시 90MPa 수준의 압력으로 수리자극을 재개하여 거대지진을 촉발시켰던 주역들임을 암시하고 있다.결국, 강한 물 주입 압력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수리자극 과정에서 알려지진 않은 단층을 계속 자극하여 지진을 수십 차례 발생시키고 결국 10㎞에 이르는 단층을 파열시켜 규모 5.4에 이르는 거대지진이 발생했다는 근거를 찾아냈다. 또한, 저자들은 유발지진들 중 가장 큰 지진이 물 주입량과 상관없고 그 지역 일대의 지구 구조적 상태와 유발지진의 발생 횟수가 더 큰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수리자극만으로 거대지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부정했다. 이는 포항지열발전소 관계자들의 주장을 부정하는 담론이다.두 번째로 논문의 저자들은 수리자극 이후 바로 지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제기했다. 1960년대 이후 지진 사례로 예증하고 있다. 1967년 미국 콜로라도를 강타한 규모4.8 지진은 주변의 깊은 지열정에 수리자극이 종료된 이후 1년 지나서 발생하였다. 스위스 바젤 경우에도 3.1 지진이 발생하여 발전소 개발을 중지하고 물을 배출하여 감압을 시킨 이후 2~3 달 뒤에도 규모 3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수리자극 이후 바로 지진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넥스지오측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본 논문에서 실제 사례로 증명하고 있다.사이언스 논문은 포항지열발전소를 조사하면서 밝혀낸 사실에 근거하여 5.4 지진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방안도 제안하고 있다. 포항시민 입장에서 보면 5.4 거대지진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방안도 있지만, 동시에 포항지열발전소를 주도하고 감시 감독해야 할 정부, 기업, 학자와 전문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함의도 있다. 4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첫째, 지열발전소의 입지 선정이다. 포항 심부지열발전소는 포항 도심과 항구, 그리고 산업단지 부근에 근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지진발생의 위험에 대처하는 방안은 지열발전소 건설과 운용에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지진위험의 진원지를 밝히고 대응, 감시, 위험 저감의 방안과 전략을 정부관계자와 주민이 함께 참여하여 마련하는 것이 “최상대책”(Best Practice)으로 봤다. 정부관계자와 지열발전소 프로젝트에 참여자 및 독립된 전문가들이 함께 시간에 따라 진화하는 ‘잠재된 위험요소’(hazard)와 지진 발생 시의 ‘위해도’(risk) 등을 평가하고 지속적인 정보 수집을 통해서 업그레이드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운영을 중단 혹은 계속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논문의 주장에 비춰 포항지열발전소의 건설과 운영에 참여한 정부와 기업, 학자, 전문가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은 지진위험을 평가할 조직과 체계를 갖추고 있었는가? 그런 조직을 만들지 못하게 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지진을 알리기는커녕 지진을 진동으로 표기하면서 감추려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지진을 진동으로 표기하면서 슬쩍 감추려고 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지열발전소가 반경 2㎞ 내에 7만~8만의 도심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임을 몰랐다고 할 수 있는가? 부지 선정의 결정자는 누구인가? 단층 조사도 충분히 안된 현재의 부지를 선정한 과정에 정부 관계자, 학자, 전문가들은 어떤 역할 분담을 했는가? 지진위험을 예방하는 도구인 신호등 체계(Traffic Light System: TLS)에서 인구 밀집지역인 점을 감안하면 더욱 보수적으로 운영해야 했다. 그런데도 오히려 운영을 멈추는 빨간 신호의 경계를 2.0에서 2.5로 올려 위험평가체제를 완화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던가? 2.5로 완화하기도 모자라서 지진 통보 대상에서 포항시를 삭제하지 않았던가? 신호등 체제를 완화하고 포항시에게 통보하는 것을 삭제한 시스템으로 변경한 주동자는 누구인가? 이때 정부 관계자는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두 번째 2년이라는 시간 차원이다. 2016년 1월부터 본격적인 물 투입을 시작하여 2017년 11월 15일에 5.4 지진이 발생할 시기까지 기간이 약 2년 가까이 된다. 마지막 5차 수리자극 내지는 PX-2정에서 규모 3.2 지진이 발생할 때까지 시추 및 수리자극을 하면서 심부에서 수십 차례 지진들이 발생하였다. 또한 2015년 10월 말경 PX-2정에서 시추 작업을 하는 동안 160t 이상 이수누출 현상이 발생하여 현장지질학자의 기록이 존재하는데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무시하는 무능력을 보였다. 이수누출 현상을 포착했음에도 무시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외국전문가는 어떻게 알고 외국학술대회에서 발표하였는가? 외국 전문가와 현장 관계자는 이수누출 현상에 대한 논의를 했는가? 외국전문가는 알고 있는데 한국 전문가는 왜 몰랐는가? 알고도 외면했는가?논문은 2년 동안 PX-2 지열정 근접 지역에서 지진이 수십 차례 발생했는데도 지진위험을 평가하는 작업을 왜 하지 않았는가를 간접적으로 묻고 있는 문장도 있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자료가 2017년 4월 3차 수리자극의 자료이다. 이 자료를 전문가 집단들이 분석했더라면 5.4 지진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문장이다. 2017년 4월 15일 규모 3.2 지진이 발생한 4개월 이후 4차 수리자극을 시도하는데 4차 수리자극을 허용한 정부 당국자는 누구이며, 무슨 근거로 용인을 하였는가? 이 때 유럽 전문가들과 함께 4차 수리자극을 수행했는데 스위스 바젤의 사례를 잘 알고 있었을 외국 전문가들과 함께 규모 3.2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수리자극을 계속해도 된다는 안전을 무시한 과감한 결단은 누가 내렸는가?세 번째, 협치 체제의 운영이다. 논문은 지열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유발지진의 잠재적인 위험, 지진 발생시의 위해도를 모니터링하고 분석하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열발전소 프로젝트팀 관계자들과 과학전문 연구기관과 함께 참석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포괄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으로 실천한다. 협치 체제는 지속적인 대화채널과 개방적인 정책을 실천하는데 우선성을 둘 것을 요구했다. 지열발전소 관계자들은 정부당국과 여타 외국 전문가, 그리고 포항시민과 포항시 관계자들과 대화 채널을 가동하였던가? 전혀 하지 않았다. 정부는 몰라서 하지 않았는가 알면서 하지 않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해당 기업은 물론이고 전문가와 학자들은 외국 학술지에 여러 논문들을 서둘러 발표하면서도 운영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포항시민과의 대화 채널을 왜 가동하지 않았는가? 그 책임자가 누구인가를 가려내야 할 것이다.네 번째, 지진위험을 예방하고 차단하는 신호등체계이다. 논문은 포항시가 인구 밀집 및 산업 중심지역 부근에 지열발전소 입지를 결정했다면 신호등체계(TLS) 모델은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여 운영해야 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단순히 수리자극에 따라 발생하는 지진 규모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신호등체계로는 수리자극 작업의 운영여부를 결정하거나 지진위험에 대응하기 어렵다. “위해도에 근거한 신호등체계”(risk-based TLS)를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구 밀집지역임을 고려하면 단순한 잠재적 위험요소(hazard)가 아닌 확률이 낮더라도 실제 지진시의 사람에게 피해 가능성을 고려하는 위해도(risk)를 기반으로 신호등체계가 적용되어야 했다. 양만재씨 실제 위해도 기반의 신호등체계는 수리자극 뿐만 아니라 지하의 심부 저류층, 지열정 투입 주변의 심부 지질구조와 수리자극에서 발생하는 지진의 통계와 다양한 자극에서 비롯되는 단층자극의 통계에 근거한 “발전된 신호등체계”(advanced traffic light system) 혹은 새로운 데이터를 계속 수집 적용, 업데이트하여 잠재, 실제 위험을 평가체제로 하면서 독립된 전문가, 정부규제자와 지방자치단체 정책결정자,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운영 지속이나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적응신호등체계”(adaptive traffic light system)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논문은 포항지진의 조사경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글을 맺는다. “실제위험 위해도 조사와 분석은 독립된 전문가와 프로젝트에 책임을 가진 정부당국자가 참가하여 공식적인 절차에 의거하여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이는 포항조사경험에서 학습한 것이다.”포항지열발전소의 건설과 연구에 참여한 학자와 전문가, 기업가들도 포항지진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지진위험과 위험관리에 관한 이런저런 자료를 만들었고 논문도 발표하였다. 그들이 발표한 논문(K. I. Kim et al., 2018)도 발전된 신호등체계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등체계가 2013년에 알려졌는데도, 포항지열발전소가 수리자극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2016년에 적용하지 않고 미래 연구 과제로 미룬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미래과제로 돌린 탓에 5.4 포항지진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들이 바로 포항 지진재난의 원인 제공자이자 책임자가 아닌가?/양만재 시민기자(포항지열발전 부지안정성검토TF 위원)

2019-05-27

“촉발지진이 할퀸 포항, 모두가 함께 치유해나가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주에 각각 포항지진 현장을 찾아 이재민들을 위로 격려했다. 포항지진이 지열발전소로 인해 일어난 인적재난(人災)이라는 발표 이후 포항을 찾은 최고위 정치권 인사들이다. 저마다 특별법을 제정, 포항을 재건하겠다고 약속했다. 때맞춰 정부도 이달말 제출될 추경 편성안에 포항지진과 관련한 지원예산을 포함시킬 것으로 알려져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이 흐름이 이어져 포항이 다시 도약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포항은 2017년 11월 15일 규모 5.4 지진 이후 여전히 지진도시란 오명을 쓰고 인구감소와 부동산 가치 하락으로 이어지며, 기업의 역외유출과 관광객 감소 등의 지역경제 기반이 무너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등 정신적 고통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참담함이 이어지고 있음을 정부와 정치권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재춘 시민기자 - 원인과 책임규명, 그리고 ‘포항촉발지진’으로 이름 붙여야정부합동조사단이 지난 1년여에 걸쳐 포항지진의 원인을 조사한 결과, 지열발전소 건설과정에서 과도한 물 주입으로 인한 것이라고 발표했기에 인재에 대한 책임규명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누구를 처벌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향후 비슷한 국책사업의 과정에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미 일부 관련단체에서는 원인규명을 위한 감사원 감사청구, 검찰에 민형사상 고소 등의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으며, 산업통산자원부장관도 정부차원에서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하겠다고 밝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번에 원인규명과 책임소재에 대하여 명확히 밝혀 정쟁과 지역갈등의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복구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항간에서 경상북도 및 포항시 등 지방정부의 책임을 거론하기도 한다. 필자 역시 경북에서 오랜 기간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사업관리에 있어 일정 부분 소홀함이 있었다는 지적을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지열발전소 건립은 국책사업이다. 소위 대체에너지 개발차원에서 다루어진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국가시책사업에 일반국민들이나 지방정부로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실제, 포항시 등은 사업추진 과정에서 정확한 정보도 없이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고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직도 포항시와 지역사회에선 지열발전소 건립 당시의 정부 관계기관 문서에는 접근조차 어렵다. 따라서 책임규명은 어차피 정부가 주도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조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외 전문가로 조사단을 구성하되, 지역의 관계자를 반드시 포함시켜 투명성을 보장해야 한다. 지진피해 복구과정은 원인조사와 책임규명 그리고 손해배상과 지역경제 활성화대책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이미 이루어진 원인조사에 더해 재발방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책임규명과 별도로 시민들이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절차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권 보호는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이므로 현 정부 책임 하에 배상이 추진되어야 하며 미루어서는 안 된다. 또 개인적으로는 ‘포항지진’ 보다는 ‘포항촉발지진’으로 용어를 통일했으면 한다. 자연지진이 아니라 인적재난임을 명확히 해야 정부도 분명한 책임감을 갖고 접근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법 제정포항지진특별법 제정에 여야가 공감을 하고 있으며,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하여 전국적인 관심을 얻었다. 이제 본격적인 특별법 제정 절차에 돌입해야 한다. 정부에서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추진부처를 정하여 법률안 마련 등 추진일정을 발표해야 한다. 과거의 사례에 비추어 총리실이 주관부처가 되어 관련부처를 총괄하고 이견조정에 나서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여야가 함께 특별법 제정에 나서야 한다. 이때 현장과 피해자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재개정으로 인한 시간적 낭비를 막아야 한다. 특별법에는 지진발생에 대한 국가책임 명시, 피해자에 대한 배상, 범정부적인 대책기구, 포항경제 활성화 대책, 재발방지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체계 구축 등을 담아야 한다. 지역에서는 포항시 주도의 공청회를 통하여 시민들의 여론이 법률안에 반영되도록 하고, 추진조직에 대하여도 주도권 다툼으로 비춰지지 않도록 폭넓게 구성하여 추진동력을 보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민들께서도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좋으나 대책 없는 비방으로 지역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정치권도 마찬가지란 것을 명심하고 그동안 불안에 떨어온 시민들의 고통을 제일 먼저 고려하고, 지역의 미래를 담은 특별법이 제정되도록 모두의 역량을 모아야 한다. -지열발전소 보전하여 재발방지 연구 및 교훈의 장으로지열발전소 건설과정에서 주입하여 아직도 지중에 남아있는 6천여t의 물 의 처리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지열발전소를 영구히 폐쇄하고 시추공에 주입된 물을 전부 빼내야 한다는 주장과 물을 빼내면 수압변동에 의한 수리자극 때문에 지진이 유발될 수 있으니 심부관정을 모두 메워야 안전하다는 논리가 맞서고 있다. 시민들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현 상태에서 또 다시 지진이 발생한다면 지금의 논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부는 조속히 미소지진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지진계를 지열발전소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설치하여 면밀히 체크하고, 지중에 남아있는 물에 대한 처리와 지진재발 방지 및 안전조치를 최우선적으로 강구하여야 한다. 한편 산업통산자원부에서 지열발전소를 원상 복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칫하면 증거 인멸 시도라는 논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 그것보다는 현장을 보존하여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시민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현장을 보전했으면 한다. 안전조치를 확보한 후 일반에게 공개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고 다크투어리즘의 사례로 활용하면 좋겠다.-이재민에 대한 주거안정 대책아직도 거처를 정하지 못한 이재민들에 대한 임시주거시설을 확보하고 기간연장과 함께 임대료 지원과 장기저리의 융자지원을 통한 주거안정 도모가 우선되어야 한다. 특히 피해를 입은 저소득층을 위해 공공임대주택 건설 공급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한 독거 어르신이 상실감에 빠져 고독사 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되지 않도록 지역공동체와 사회안전망이 촘촘히 형성되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특별도시재생사업 추진체계 정비 및 지원현재 흥해 일부지역이 특별도시재생지역으로 지정되어 사업이 추진 중이다. 그러나 국가나 지방정부에서 추진하는 공공사업 외에, 피해주민들이 진행해야 할 재건축 및 재개발사업은 사업절차의 복잡성과 관련법규에 대한 전문성 부족 등으로 곳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포항시와 경상북도에서는 자연재해대책법에도 근거가 있는 지구단위종합복구계획의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피해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필요하다면 단지별로 담당직원을 지정하여 토론과 자문에 응하도록 하고, 재생계획에는 주민광장, 도서관, 체육시설, 다목적 문화시설 등 커뮤니티 공간과 ‘어르신의 집’같은 주민복지 공간 등이 충분히 확보되도록 계획하여 반영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원활한 사업추진을 위해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역경제부흥 종합 계획 추진포항시와 경상북도는 ‘고베의료산업도시구상’과 같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지역경제부흥 종합대책을 마련하여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여야 한다. 특히 이번 위기를 재기의 기회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선 우선 미래 신성장 동력 청사진을 잘 그려야 한다. 지역산업구조 재편에서부터 첨단산업 육성까지 꼼꼼히 챙겨야 한다. 영일만항과 배후산업단지에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고 현재 분양이 저조한 블루밸리공단도 차제에 활용방안을 폭넓게 들여다봤으면 한다. 영일만항 여객터미널도 내년에 완공되면 판을 키워야 할 것이다. 북방경제협력위원회에서 영일만항과 일본의 기타쿠슈와 후쿠오카 그리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잇는 통일페리를 구상하고 있는데, 영일만항이 실질적인 환동해 중심항구로서의 위상이 서도록 이번 기회에 확보하여야 한다. 이외에도 흥해권에 위치한 경제자유구역을 조속히 조성하고, 제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한 신약 산업 등 첨단산업구조를 갖추어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가 부흥하도록 해야 한다. 다행히 경상북도에서도 대책추진단을 발족하겠다고 하니 포항시와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과 지원이 되도록 협력하면 좋겠다.-도시 접근성 개선아직도 경북 동해안지역은 전국적으로 볼 때 교통오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투자와 기업유치에 가장 큰 장애물이자 관광의 저해요소이기도 하다. 이를 개선하지 않고는 포항을 비롯한 동해안권의 획기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포항에서 영덕까지의 동해고속도로구간에서 누락된 영일만대교 구간도 재건 계획에 포함시켜서 실질적인 고속도로의 기능이 확보되도록 하여야 한다. 또 포항의 인프라가 영덕에서 울진을 거쳐 삼척까지 이어지도록 하여 북방경제시대에 대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철도 또한 동해안 구간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다. 관광철도라고는 하나 디젤열차로 운행하는 단선일반철도는 우리의 경제규모를 볼 때 시대에 뒤떨어짐은 자명하므로 고속화 복선화하여 철도를 통하여 대륙으로 진출하는 실크로드의 꿈이 실현되도록 하여야 한다.-국민재난교육의 장 및 메모리얼 공간 확보앞서 살펴봤듯이 중국과 일본 등지의 지진피해지역은 복구과정에서 피해현장을 보전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포항도 이 사례들을 벤처마킹했으면 한다. 촉발지진의 참상과 이를 극복한 시민들의 노력과 흔적을 다양한 형태로 기록보존하고 재난연구·교육 및 국제적인 정보교류를 위한 연구센터를 조성하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지진 및 재난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진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피해주민을 위해 심리케어센터도 마련, 상담과 치료를 하는 등 관련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메모리얼 공간인 ‘지진극복기념광장’ 또는 ‘기념공원’을 조성하여 다시는 포항과 같은 인공지진 사태가 발생되지 않도록 국민적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지진극복 시민화합 및 안전도시 선언 국제행사유치지진을 극복한 시민들의 노력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시민지진극복축제’도 도입을 권하고 싶다. ‘흥해향교 이팝축제’와 같은 지역축제와 연계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포항시와 정부의 지역부흥 성과를 대외적으로 알리고 도시 이미지 개선을 위해선 국제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것도 좋겠다. 중국 탕산의 경우 지진의 참상을 극복한 사례를 2016년 세계정원박람회를 통하여 국제사회에 알리고 환경도시를 선언했는데 좋은 사례라고 본다.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을 잇는 ‘세계레가타(범선)대회’도 유치하여 개최함으로써 환동해 중심도시의 위상과 안전도시 포항을 국제적으로 각인시켰으면 한다.지금 포항은 사상 초유의 사태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정부와 관계기관은 소통을 통한 치밀한 대응과 미래지향적인 구상 그리고 소신 있고 과감한 추진으로 지역경제가 반드시 부흥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시민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하겠다. 한 마음으로 단합하여, 나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배려하는 시민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있다.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포항재건에 나선다면 정부는 물론 전 국민들도 포항에 따뜻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 위기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다시금 대한민국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포항의 자존심을 되찾고, 세계 속에 우뚝 선 포항이 되기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염원한다. 포항시민 여러분 파이팅! 포항이여 용기를 내라!끝/이재춘 시민기자

2019-04-15

“대지진의 상흔 씻은 중국·일본·대만을 보고 배우자”

지난 3월20일 정부합동조사단이 포항지진은 포항지열발전소 건설과정에서 무리하게 엄청난 양의 물을 강제로 지중에 주입함으로써 촉발된 것이라는 발표 후 이제 가장 관심사는 피해를 입은 시민들에 대한 손해 보·배상과 포항재건 프로젝트가 됐다.국책사업으로 추진하다 대참사가 발생한 만큼 국가가 포항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책임에 대한 범위가 워낙 광범위하고 지금까지 지진으로 인한 재건 매뉴얼이 없다는 점에서 시민들이나 시정부나 중앙정부마저도 혼란스런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인근 국가인 중국, 일본, 대만에서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와 대응 및 복구, 사후관리를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항지진 극복과정에의 포항 재건 방안 마련도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어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나름의 생각들을 정리해 봤다. -24만명 사망 초대형지진 극복한 중국 탕산시중국 허베이성 탕산지진은 1976년 7월 28일 새벽3시42분 규모 7.8의 지진이 발생했다. 단 23초만에 24만2천769명의 사망자와 16만4천851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대참사였다.탕산시는 1943년에 탕산철강이 창립될 정도로 석탄과 철광석의 생산기지로 유명했다. 지진발생 당시 인구가 150만 명이 넘어 화북지방 최대의 도시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특이한 점은 중국정부는 지진발생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사망자가 24만 명이 넘는다는 보도도 1979년에서야 나왔다. 문화대혁명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당시의 중국정부는 복구과정에서도 자력복구를 주장하며 인민해방군 10만 명을 투입하여 군사작전 같은 복구에 나선 반면, 외국의 원조를 거부하고 외국인의 출입마저 10년간 통제하였다.지진발생 30주년인 2006년 7월 28일 지진을 완전 극복했다는 의미에서 연면적 7천246㎡의 ‘탕산항진기념관’을 개관하고 항진기념탑에 후진타오 주석이 헌화하는 등 국가급 추도식을 처음으로 개최했다. 2010년에는 펑사오강 감독이 영화 ‘탕산대지진’을 발표하여 중국에선 큰 흥행을 거두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중국정부와 허베이성은 지진발생 40주년을 맞아 2016년 4월 29일부터 10월 16일까지 지진극복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2016탕산국제원예박람회’를 개최했다.탕산시정부의 초청으로 필자는 포항시의 경제문화사절단을 인솔하여 현지에서 공연과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지진극복사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중국정부는 20세기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인 탕산대지진의 참상을 기억하고 피해를 극복한 의지를 기리기 위하여 2007년 5월에 ‘탕산지진극복광장’을 조성하고, 대리석으로 만든 초대형 기념비 5개에 사망자 24만 명의 이름을 새겼다.기념비 1개당 크기는 너비 19.76m 높이 7.28m다. 이 숫자는 지진발생일인 1976년 7월 28일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의미라고 했다.지진 당시 공표를 거부했던 중국정부는 이후 탕산지역 재건에는 치밀하게 대응해 왔다. 90년대부터 국가차원에서 추진한 환발해경제권 개발정책의 일환으로 탕산시 창이페이텐구에 120㎢ 면적의 국가급 경제개발특구를 지정하고, 30만t의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을 구축하여 세계 8위의 물동량을 소화하는 세계적인 항구도시를 만들기도 했다.수도 베이징과 220km의 직통 고속도로를 개설하여 2시간이면 접근할 수 있도록 접근성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이처럼 국가와 지방의 노력으로 지진을 완전 극복한 탕산시는 현재 인구 760만 명의 허베이성 최고수준의 경제도시이자 환발해 경제권의 중심도시로 변모했다.-10년만에 복구된 중국 쓰촨성 대지진쓰촨성 대지진은 리히터 규모 8.0으로, 2008년 5월 12일 14시28분에 중국을 뒤흔들었다. 6만9천227명의 사망자와 37만7천여명의 부상자 및 실종자 그리고 5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직접적인 경제손실만 8천452억 위안(142조원)이었다.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의 댐이라고 자랑하는 ‘샨사댐’이 있는 쓰촨성은 인구가 3천만 명에 달할 정도로 중국 내륙지역의 핵심지역이어서 충격이 컸다.쓰촨성에선 이후에도 지진이 잇따라 주민들을 공포속으로 몰아넣었다. 5년 뒤인 2013년 4월 20일 오전 8시경에도 야안시 루산현에서 7.0규모의 강진이 발생하여 롱먼지역의 절반이 파괴되어 이재민 231만 명이 발생하고 196명이 사망했다.또 2017년 8월 8일 저녁 9시19분에도 쓰촨성의 티베트 창족의 자치구로 유명관광지인 장자진에서 규모 7.0의 지진이 발생하여 1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중국정부는 쓰촨성 대지진 10주년을 맞은 2018년에야 완전복구를 선언한다. 청두시에서 열린 ‘쓰촨 지진 10주년 국제 연구토론회’에 시진핑 중국주석도 복구과정에 관심을 표명하는 등 국제사회의 협력과 사례에 대하여 공감을 나누었다.중국 정부는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한 5월 12일을 ‘재난방재의 날’로 지정하여 매년 지진경보시스템을 포함한 재난구조체계를 점검하고 각급 관공서와 학교에서는 정기적으로 지진대피 훈련을 실시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다.쓰촨성에는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복구과정에 동참한 국민들의 봉사정신과 국제사회의 협력을 기리고자 마련된 다양한 지진 유적공간이 많다. 특히 주민 1만 명 중 절반 이상이 숨지거나 실종된 원촨현 잉슈진 마을엔 진앙지인 쉬언커우 중학교의 붕괴된 교사 등 지진현장을 그대로 보존하여 지진피해의 심각성과 부실공사의 흔적을 통해 반성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2009년에는 연면적 6천㎡ 규모의 ‘원촨 지진박물관’을 건설하여 개관하고 30개의 전시실에는 지진발생일로 부터 6월 12일까지 1개월간의 수습과 응급복구과정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여 전시하고 있다.2013년에는 지진피해가 가장 컸던 북천현에 지진으로 갈라진 지반을 형상화한 ‘원촨 대지진기념관’을 건설하여 면적 1만748㎡의 전시관에 지진구호 및 복구관련 자료를 전시하여 일반에게 공개했다. 1천560㎡면적의 별관은 지진 현장과 방재대응 체험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며, 연간 4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다. -대지진후 더 성장한 일본 고베일본 고베 대지진은 1995년 1월 17일 새벽 5시46분에 규모 6.9로 발생, 6천434명의 사망자와 4만3천792명의 부상자 등 막대한 피해를 냈다. 당시기준으로 10조 엔에 이르는 재산상 피해였다.인구 150만 명의 인구밀집지인 고베에 집중된 이 지진은 새벽시간에 일어나 시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특히 입체적으로 건설된 일본 교통체계의 특성상, 한신고속도로와 신칸센 철도 등 교통간선시설의 파괴로 교통체계가 마비되어 큰 피해와 불편을 끼쳤다. 긴급복구에만 3개월이나 걸렸다.일본은 고베 지진 이후인 1995년 건축법을 개정하여 내진설계 기준을 마련하고 적용했다. 당시 지진으로 90%의 건물이 파괴된 나가타구의 목조주택 밀집지역이 내진설계가 반영된 최신주택과 고층건축물의 숲으로 완전 변모된 것도 그 영향이다.일본정부는 또 시내 곳곳의 지하에 100t 규모의 저류조를 만들어 비상시 재난에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오사카와 고베를 잇는 한신고속도로의 철근강도를 3배로 늘리고 교각의 폭도 2배로 키우는 등 공공시설의 내진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특히 10년간에 걸쳐 6개 분야 54개 테마로 나누어 대지진에 대한 원인과 피해조사 및 대응의 적정성에 대한 검증을 통하여 459개 항목을 돌출하여 이를 지진대응 정책안에 반영하는 성과를 남겼다. 이런 지진의 피해 참상과 복구노력의 기록을 보존하여 교훈으로 삼고자 일본정부에서는 2002년 4월 고베시에 대지진 기념관인 ‘사람과 방재 미래센터’를 개관하였다.센터는 2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관은 지진기록 등을, 동관은 향후에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공간으로 구성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곳에는 아시아방재센터(ADRC), 국제방재부흥기구(IRP), UN국제재해경감전략기구(UNISDR) 등 방재관련 국제기구도 입주시킨 상태. 방재에 관한 국제협력과 네트워크 구축차원에서다.효고현립대학 방재연구센터 등 교육기관도 유치하여 재난대응 전문가 육성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2004년 4월에는 ‘심리케어센터’를 개설하고 의사와 연구원 등 23명을 배치하여 지진에 대한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연구와 피해자 상담 및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1997년 7월에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 메리켄항만공원 구역 내에 ‘지진 메모리얼 파크’를 조성하여, 지진으로 파괴된 방파제와 시설의 일부를 당시상황 그대로 보존하고 피해사진과 복구과정의 도표를 공원 한쪽에 비치하여 당시의 긴박함과 아픔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 지역은 지진 참상을 보존하면서 한쪽은 현대식으로 개발한 점이 확인된다.유적지 인근에는 대형 쇼핑센터와 테마파크 등의 시설들이 즐비하다. 국내외 관광객을 겨냥한 것들이다. 이제는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코스로도 떠올라 있다. 재난의 흔적조차도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지진으로 고베시는 인구 감소와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나, 국가와 지방정부 그리고 시민들의 일치된 노력으로 눈부신 부흥을 일궈낸 대표적 지역으로 꼽힌다.항만복구도 2년 만에 완료하는 등 인프라가 자리를 잡아가자 고베시 정부는 1999년 미래형 지식산업을 통한 경제부흥과 함께 고령화 사회의 의료복지 서비스질 개선을 위하여 정부·기업·대학이 함께하는 ‘고베의료산업도시’ 구상을 발표하고 첨단의료센터, 임상연구정보센터 등의 시설이 갖춰 나갔다. 이후 네슬레 등 세계최고수준의 연구소 및 기업을 유치하기 시작하자 중앙정부도 각종 정책으로 화답했다. 실제, 고베의료산업도시는 ‘지진부흥특정사업’과 ‘첨단의료산업특구’ 등 중앙정부 사업으로도 다수 선정되어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또한 인근도시인 오사카, 교토와 협력을 통하여 2천만인구의 간사이경제권을 구축함으로써 지진의 상처를 말끔히 씻고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었다. 8년 후에는 고령화, 저출산 등 국가적인 인구감소 추세 속에 지진 전 인구를 회복하기에 이른다.여러 면에서 유사점이 많은 고베의 사례를 포항시는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현장보전으로 복구한 대만 타이완 대지진 (921대지진)규모 7.7의 지진으로, 1999년 9월 21일 새벽 1시47분에 난터우현을 진앙으로 발생했다. 9월21일 발생했다 해서 921지진으로 부르는 대지진으로 2천415명의 사망자와 실종자 29명, 부상자 1만1천305명과 재산상 피해 미화100억 달러(한화11조원)에 달하는 큰 피해가 났다.대만정부는 복구하면서 지진참상 상태를 원형그대로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국민들에게 평소 안전에 대한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지반이 융기하여 교사가 붕괴되고 트랙이 변형된 광복중학교 현장을 보존하고, 남은 부지에 ‘921지진교육원구’를 2007년에 건설하여 개장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다. 이재춘 시민기자 지진피해현장과 수습 및 복구과정의 기록물과 사진·영상·디오라마 등을 전시한 재건기록관과 내진설계 건축물의 모형과 지진파가 건축물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지반의 변형과 액상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지진공학관도 참고할 만하다. 대만정부는 921지진 이후 건축법규를 강화했다.초·중·고등학교에 의무적으로 지진경보기를 설치하도록 하고 전기·가스·수도배관 등 설비라인을 기둥 속에 삽입을 금지하였으며 복도에도 기둥을 설치하여 구조성능을 보강하는 등의 조치로 건축물의 내진성능을 대폭 강화하였다. 대만의 경우는 대형의 메모리얼 시설보다는 지진피해 학교 등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여 국민교육장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지진이 빈번한 특성상 관련연구에 치중한 점을 느낄 수 있다./이재춘 시민기자

2019-04-14

“포항 지진 시민기자 참여는 시민 위한 소명에서 비롯돼”

“포항지진을 직접 체험했고 사회과학을 전공한 포항시민으로서, 그동안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포항지진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공유하고 싶었습니다”양만재사진 포항지열발전 정부합동조사단 시민대표 자문위원은 경북매일신문 시민기자로 참여해 지난 2월 17일부터 ‘포항지진과 지열발전 연관성’을 주제로한 기획기사 시리즈 연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복지학 박사이기도 한 그는 이를 두고 “지역 공동체 발전을 위한 소명의식에서 한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본업으로 경북도 장애인권옹호기관 관장을 맡고 있는 양 박사는 “신문기고를 작성하느라 본업을 소홀히 한 것은 결단코 없다”면서 “문서를 대조하고 검증하는 논리적인 작업이어서 업무가 끝난 시간에 틈틈이 포항지진과 지열발전의 연관성을 따지면서 의문점이 잡히면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고 그동안의 경과를 털어놓았다.그는 포항지진 이후 “지진학자들이 제기한 포항지열발전소의 지진 유발가능성 발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이후 이 문제 연구에 몰두하면서 포항 11·15지진 지열발전연구 공동연구단원으로도 참여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과정에서 정부합동조사단 정부합동조사단 시민대표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양 박사는 “포항지진 관련업무에 몰두하면서 본래 업무를 내팽개쳤다는 일부의 질책을 받고 솔직히 부담스러웠다”면서도 “장애인도 포항시민이고, 포항지진 문제는 포항시민 전체의 공익을 위한 일로 본업에 크게 위배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애초 포항지진이 포항지열발전에 의한 유발지진일 가능성이 높다는 전제로 탐구를 시작했다는 양 박사는 “연구를 거듭하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달 20일 경으로 예정된 포항지열발전소에 대한 정부합동조사 발표와 관련해 “자연지진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조사기간이 짧아 여러가지 단서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다만, 정부발표가 명확하게 포항지열발전소에 의한 유발지진이라는 확진을 하지 않을 경우 이해관계자들간 다양한 의견 충돌 등의 갈등이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양 위원은 “정부조사 발표 이후 이해관계를 잘 조정해 하나의 목소리로 집결시켜 포항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지진과 관련해 학계와 전문가들에 대한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양 박사는 “포항지진을 경험하면서 학계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크게 실망했다”며 “일반인도 아니고 학자나 전문가들은 지열발전소와 지진 유발가능성을 경고하는 여러가지 연구와 사례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한 것은 결과적으로 시민들을 속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양 위원은 “경북매일신문 시민기자로 참여해 포항지진과 관련해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시민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감사하다”며 “앞으로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좋은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을 맺었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19-03-05

“범시민대책기구 발족, 시민 통일된 목소리에 힘 실어야”

“포항은 첨단산업도시, 교육연구도시, 국제항만도시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에 더해 지열발전…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연구와 상용화가 성공적 이루어져…‘신재생에너지 허브도시’로 발전됐으면 좋겠다”2013년 4월, 지열발전소를 잘 안다는 포항의 H대학의 G교수가 쓴 칼럼의 일부다.포항에서 지열발전소와 관련된 담론이 지역언론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12월부터이다. 곧바로 2011년 4월에 지열발전소 건설의 사업 주체인 (주)넥스지오가 포항에 선보인다. 이후 이 회사는 포항시와 MOU체결을 하면서 지역발전소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포항시도 2012년 국도비지원사업 발굴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지열발전소 건설 예산을 국비로 확보하겠다며 명시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2012년 4월, “비화산지대인 포항에 아시아 최초 지열발전소 건설, 세계에서는 3번째 흥해 남송리 착공” “지열발전은 기상여건에 관계없이 항시 전력을 생산할 수 있고, 전력 수급에 안정을 기여할 수 있는 대체에너지” 등 화려한 수사와 함께 본사업 시작을 알린다. 당시 포항시는 “흥해읍 일원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포항 Geo-city’ 사업지역으로 조성하고, 지열과 관련된 국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지열발전을 도모할 계획”이라며 포항시 발전의 한 축으로 표방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이 야심찬 계획은 2017년 11월15일 규모 5.4의 지진 한방에 물거품이 된다. 포항에 엄청난 피해를 남긴 지진. 그 생채기가 지금도 계속되기에 포항시민들의 속은 아리고도 쓰리다. 더 속상한 것은 지진의 원인이다. 알아볼 데도 없고 답해 주는 측도 없다. 결국 시민들이 나서 물음을 던졌고, 그것은 정부조사단의 발족으로 귀결됐다. 그 결과가 오는 20일을 전후해 나온다.왜 포항이었을까.결과만 놓고 보면 포항시민들은 참으로 순진했던 것같다. 지열발전소가 몰고 올 문제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별다른 이의제기가 없었던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모두 지열발전소가 대단한 산업이라며 박수치며 맞이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하다. 사고 후 살펴본 바에 따르면 포항이 지열발전 적지였다는 것은 포항에 지열발전소 건립안이 제시된 2010년보다 7년 전인 2003년부터 등장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후 한지원)이 2003년에 발표한 ‘지열에너지 개발을 위한 심부 물리탐사’ 보고서를 보면 한지원의 연구책임자 중심이 돼 포항시 흥해읍 지역을 중심으로 지열발전소 입지 선정에 필요한 각종 조사활동을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2006년에는 흥해지역에 지하 2㎞의 심층지열수 자원을 이용해 전기에너지를 활용하기 위해 1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대목도 있다. 이후 2008년에 지열수 자원 실용화 기술개발 사업에 1차 75억원, 2차 46억원 등 모두 121억원의 예산을 연속 투자한 것으로도 나타난다. 2010년 지열발전소 공모사업으로 발주하기까지 한지원이 사용한 겉으로 드러난 예산만도 약 221억여원에 이르는 것이다. 지열발전에 관련된 여타 연구용역까지 추가하면 예산은 더 증가할 수도 있다.한지원의 포항지열발전소 건설은 포항시에 협조의 손길을 MOU 방식으로 내밀면서 구체화된다. 한지원은 2009년 발간한 ‘전력정보화 및 정책지원’ 보고서에서 “포항을 러시아 극동지역 자원개발 지원도시로 육성하며, 싱가포르와 같은 석유시장 인프라를 구축해 신성장 동력사업을 발전시킨다”고 밝히고 있다. 포항시는 지열발전소와 관련한 MOU를 공식적으로는 2011년에 지열발전소 운영 주체인 넥스지오와 체결했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3년 전에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포항시는 한지원에 포항지질자원연구소의 부지를 무상임대하고, 부지매입과 조성에 33억9천만원의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서를 시의회에 제출, 의결을 받아냈다.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포항지열발전사업 홍보 또한 장밋빛 일색이었다. 2005년의 ‘세계지열에너지 활용현황 및 전망’ ‘경북포항지역에서의 심부 지열수자원 개발사례’와 2006년의 ‘지열에너지자원 개발, 활용 기술 및 동향’에는 이 사업이 포항의 미래라고 적시하고 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한발 더 나아가 2010년 ‘심부지열개발 시추기술의 현황과 미래 전망’ 논문에서 “지열발전소가 원자력과 화력발전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 기술원이고, 지열발전소 건설과 운영에 핵심기술인 심부 지열개발용 시추기술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다소의 시간과 그 과정이 길고도 길었지만 모두가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릴 생각뿐이었지, 곡선 구역은 어떻게 설계하고, 만에 하나 주민 피해를 최소화해 가며 건설해야 한다는 사고 대비 등의 계획과 청사진은 형식에 그쳤다.수천억 원의 국가예산이 투자되는 기술개발 사업이라면 정부는 면밀한 사전준비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 물론 사업 관련 공무원의 경우 전문지식과 정보가 부족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지금 인터넷엔 지천으로 깔린 것이 관련 정보다.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지열발전시스템’(2010년 4월)의 기사부터, 미국학자들이 1993, 2008, 2012년 에 연속 발표한 지열발전과 유발지진 위험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체크리스트 등 지열발전소 우려 정보가 널려 있다. 왜 이런 우려에는 귀를 닫고 과실에만 매달렸는지 안타까운 대목이지만 누가 왜 그 반대편의 위험은 고지하지 않았는지 앞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밝혀나가야 할 사안이라 할 수 있다.정부조사단은 지난 1년여간 조사를 진행해 왔다.지금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결과를 예단할 수가 없다. 다만 3가지 추론 정도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2017년 11월 15일 규모 5.4 포항지진은 △인간이 만들어 낸 유발지진일 가능성 △인간이 만든 지진과 자연지진이 결합된 촉발지진일 가능성 △자연지진일 가능성 등 세가지 유형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규모5.4 포항지진은 지열발전소와 관련성이 있고, 세 번째는 지열발전소와 아무 관련성이 없다는 뜻이다.정조단이 포항지진은 지열발전소와 관련성이 있다는 발표를 할 경우 정부와 넥스지오의 책임을 묻는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실증적 근거는 확보된다. 정부가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시민대표기구와 협상을 통해 보상에 필요한 특별한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수순과 방법을 선택하면 문제해결의 접근은 가능해진다. 시민대책 기구에 누구를 대표로 할 것인지, 시민 요구사항을 어떻게 집약시킬 것인지, 시민대표가 정부와 협상에서 보상액수와 방법을 두고 합의에 도달한 사항을 시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동의할 것인지 등의 의제가 남아있긴 하나 다소 수월한 길이다.그러나 자연지진에 무게를 둔 발표라면 포항시민은 관련성 여부를 가리기 위해 법정으로 옮겨 가야 한다. 어쩌면 최악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다. 최종심인 대법원의 심판을 받기 까지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정도의 기간을 각오해야 한다. 포항 규모 5.4 지진과 지열발전소 관련성의 여부를 다시 판가름하는 재판 절차를 거치면서, 동시에 정부와 (주)넥스지오의 과오를 가리기 위한 법 절차도 가동해야 하고, 긴 법정 다툼에 따른 비용도 감당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대법원이 우리가 원하는 결과로 판단할 것인지 또한 보장할 수 없는 것이 현실로 남는다.정조단이 어떤 내용을 발표하든 이에 대비해 포항시는 정부를 상대로 대응할 가칭 ‘포항지진 보상을 위한 범시민대책기구’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미 포항지진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11·15지진’ 지열발전 공동연구단도 있고, 포항시의회가 구성한 지진피해대책특별위원회도 구성되어 있다. 일부 시민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여러 시민조직도 활동하고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여러 단체들이 활동하다보니 마찰음도 나오고 있다. 목적이 같다면 굳이 이 단체 저 단체 나누어서 대처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지진관련 기존의 단체와 포항시민을 대표하는 학계, 시민사회단체, 포항 여야정당의 대표 등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는 범시민대책기구가 발족하면 우선 목소리가 통일돼 신뢰성과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정조단이 조사결과 발표하는 오는 20일 이전에 미리 구성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는 정조단의 발표 이후 이곳저곳에서 나올 의견의 난립과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범시민대책기구가 있어야 정부를 상대로 효과적인 협상에 나설수 있다. 법적 절차에 필요한 재원과 인력을 확보하는 등 ‘집합적인 지혜’를 모색하려면 단일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다른 사례에서도 많이 봐 왔다. 양만재 박사 지진발생과 함께 경제적 불황으로 포항시민은 여전히 경제적, 정신적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인구가 줄고 부동산 가격 하락을 부채질한 것에 지진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포항시민은 지금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지혜로운 행동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포항시민들의 지진 원인 규명 요구는 무엇을 더 얻고 덜 받아내고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지진으로 덕지덕지 상처 난 민심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이며 어떻게 보면 시민의 권리이기도 하다./양만재 시민기자

2019-03-04

“낙동강 보 개방·해체 민심과 동떨어져”

과거부터 강은 문명의 발상지이다. 왜냐하면 강물을 취수하여 물을 먹고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고 문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낙동강 수계에 몰려 사는 사람들, 낙동강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통 1천만명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이 지금 문재인 정부의 황당한 보 해체 및 상시개방 일정에 분노하고 지켜보고 있다.환경부 산하 4대강 조사평가기획위는 최근 금강의 세종보, 공주보 및 영산강의 죽산보를 해체하고 백제보와 승촌보는 상시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또 4대강 중 한강과 낙동강의 나머지 보도 연내 처리방침을 정한다고 한다. 따라서 금년중 낙동강의 보 전면개방으로 인해 강바닥이 드러나는 낙동강을 보게 될지 모른다.공주보 인근의 농민들은 “왜 한강 3개, 낙동강 8개, 금강 3개, 영산강 2대 등 16개 보 중에서 금강과 영산강보만 철거한다고 야단이냐. 8개나 되는 낙동강의 보는 가만히 놓아두고?”라고 항변한다. 그 이유는 2017년 6월 경부터 시작한 보 개방에 금강, 영산강 지역이 먼저 협조한 때문이다. 낙동강 상류의 상주보, 낙단보 지역은 지자체장과 농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서 그동안 보 개방을 못하다가 금년 2월에야 보개방 모니터링을 위한 보개방을 시행한다. 하지만 낙동강도 먼저 개방한 합천창녕보 및 창녕함안보로 인하여 남강과 만나는 낙동강의 지점이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강물이 마르고, 강주변에서 지하수로 영농하는 농민들의 농업피해가 이미 상당부분 발생하고 있다.이번 보해체 결정을 한 환경부 4대강 조사평가위원회의 불과 7개월 만에 결론낸 졸속 편파행정에 대하여는 언론에서 이미 충분한 지적이 있었다. 2012년 말 경 완공된 4대강보에 대하여는 그간 네차례 감사원 감사와 2014년 말 경 총리실 산하의 4대강민간조사평가위원회의 종합평가가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사·감사결과 대체로 수질은 개선됐고, 이수·치수효과가 있다고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그간 일부 언론은 그러한 객관적 자료는 무시하고, 녹차라떼 등 괴담 수준의 선동적 표현을 사용하면서 국민의 여론을 잘못 이끌어 온 것이 사실이다. 작년 7월에 나온 문재인 정부 감사원은 치수(홍수예방) 에 대하여, 두군데 용역을 주었는데, 연세대 산학협력단은 극히 제한적 범위(전체중 74㎞구간만)로 치수효과를 인정하였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는 0점을 주었다.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평가받은 2014년도 민간조사평가위에서는 치수효과를 전체 사업구간중 93.7%를 인정한 바 있다. 최근 10년 내에 큰 홍수가 없어서 치수효과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데, 과거 홍수가 오면 1년에도 수조원의 홍수피해가 발생하고, 수해의연금을 걷던 기억이 난다.이수(수자원이용)에 대하여, 4대강은 보가 제대로 가동되면 11억t이 넘는 추가적 수자원이 강에 저장된다. 이 물은 지하수를 풍부하게 하고 물고기가 살고, 주민들의 식수걱정을 들어준다. 문재인 정부의 감사원은 연간 전국의 생활 농공업용수의 부족량이 4억t 가량인데 그중 4%인 1천700만t 정도만 4대강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 물확보 지역과 물부족지역의 불일치로 인하여 4대강에서 확보한 물은 본류 주변에만 사용가능하다는 지극히 부정적 평가를 했다. 4대강에 확보한 풍부한 물은 산간오지에 있는 댐물보다는 훨씬 사용 용도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4대강사업을 하면서 물부족지역까지 관개수로를 놓아주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런 사업은 다음 정권에서 순차적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2015년도 여름 극심한 가뭄이 충청권 영남내륙에 덮쳤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의 요청으로 4대강 활용예산 1천74억원을 들여서 공주보에서 31㎞ 떨어진 충남내륙의 예당저수지까지 도수관 공사를 하여 물을 보냈다. 그 후 백제보에서는 보령댐에 물을 보내고 있다. 상주보에서도 11.5㎞ 도수관을 깔아서 경북 가뭄지역에 물을 댔다. 당시 정부는 2019년까지 1조 9천억원을 투입하여 4대강의 11개 보에 담긴 물을 가뭄지역으로 끌어온다는 ‘4대강 하천수 공급 마스터플랜’을 추진한 바 있다. 박승환 변호사(전 한국환경공단 이사장·전 국회의원) 낙동강 주변에는 8개의 광역상수원댐이 있지만, 대구 부산 등 대도시의 시민들과 중소도시는 대개 강물에 식수원을 의존하고 있다. 댐물은 멀리 있어 수도요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대구는 강정고령보 안에서 취수하고, 부산은 하루 100만t이 넘는 물을 하류인 양산 물금과 김해 매리 덕산취수장에서 취수한다. 4대강 공사 전 갈수기에는 항상 강물이 부족하여 두 도시는 상류인 안동댐의 수문을 열어서 물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그래도 물이 부족하여 매리취수장에 가보면 거의 흙탕물 수준의 4~5급수를 고도정수처리하여 부산시민들이 먹었다. 그래서 대체상수원으로 진주 남강물을 논의하다가 실패하였고 2천억원을 들여서 기장의 해수담수화 시설을 지어 놓고도 환경단체의 반대로 폐쇄되어 있다. 낙동강에 보가 만들어진 후에 부산시민들이 낙동강취수에 걱정이 사라졌다. 4대강 공사로 지하수가 풍부해지자 수자원 공사는 창녕지역 낙동강 주변의 강변여과수를 채집하여 부산대체상수원 개발을 논의하다가 중단됐다.4대강 공사 전 갈수기 낙동강 유지용수의 절반은 하수처리장, 산단폐수처리장을 거친 물이었다. 당시의 사진과 자료를 찾아보라! 시궁창 수준의 썩은 물이 흘러가던 강을 되살려 8개의 보를 통해 7억t의 풍부한 물이 확보됐다. 4대강에 43개의 커다란 취수구가 있어서 그 물을 이용하고 있다. 본류의 물이 풍부해지자 지하수위가 올라가서 하천변에서는 지하수를 이용한 수막농법 등이 광범하게 용이하고 농민들에게 도움을 줬다. 상주시장은 상주보가 해체되면 관광자원등 피해가 4천억원이 넘는다고 하였다. 구미보 인근의 낙동강 본류에서는 2013년도부터 해마다 전국 핀수영대회를 개최하여 작년 6회 대회를 마쳤다. 필자도 두 번 참가했는데, 강물이 오염되었다면 전국에서 1천명 가량의 수영인들이 낙동강에서 2㎞수영을 하겠는가? 보가 개방된다니 금년 대회가 가능할지 걱정이다.강의 주인이 누구인가? 고대부터 강물은 그 인근 농민, 주민들이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의 법도 그렇다. 정권에서 자기 마음대로 강물을 마르게 하고 보를 철거할 수 없다. 정권을 떠나서 정부 차원에서 4대강 공사를 하여서 새로운 용수권, 수리권, 경관권, 내수면 어업권 등이 생겼는데, 기득권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해체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2019-03-03

“원전해체연구소 경주가 최적지”

정부가 다음 달 중으로 원전해체연구소 입지를 결정·발표할 예정인 가운데, 경주시를 비롯한 동남권 지자체들의 유치 경쟁이 치열하다. 원해연은 현 정부의 에너지 정책 전환에 따라 탈원전정책의 핵심기지 역할을 할뿐더러, 국내 시장규모만 14조원에 이르는 블루오션산업이어서 양보 없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경북도가 마지막으로 전력을 다해 유치를 노리고 있는 전강원 경북도 동해안전략사업국장을 만나 경북도민들의 바람대로 원해연이 경주에 들어설 수 있을지, 들어선다면 어떤 이점이 생기는지를 물었다.-원전해체연구소가 원전해체산업을 이끄는 중심기관이라고들 하는데,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 기관인지.△고리1호기와 월성1호기 등이 수명을 다하면서 우리나라도 원전 해체 기술 확보가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 국내 원전해체 기술은 선진국의 80% 수준으로, 원해연은 원자력시설 해체기술 자립에 필요한 핵심기술의 종합연구개발 및 성능검증 시설·장비 등을 갖춰 실용화 기반을 확보하고자 추진 중인 연구소다. 해체기술 실증 장치·시설 등이 집적화된 연구기반을 구축해 관련 산업체와 인재 양성에도 활용된다.-경주는 2012년부터 전국 최초로 원해연 유치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 9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이유가 따로 있는가.△원해연 유치는 경북도가 지난 2012년 11월 원자력진흥위원회에 ‘원자력시설 해체 핵심 기반기술 개발 계획(안)’을 상정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안건이 진흥위원회를 통과한 후 당시 소관부처였던 교육과학기술부를 바로 찾아가 경북에 연구소가 유치돼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과기부는 2014년 전국 지자체 대상으로 원해연 유치의사를 문의했고, 경북을 포함해 8개 광역지자체(경북, 부산, 울산, 대구, 전북, 전남, 광주, 강원)에서 참여의향을 밝혔다. 그 가운데 경북, 부산, 울산 3파전 양상으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당시 원해연 예타가 진행됐으나 경제성 분석(B/C) 0.26, 종합평가 결과(AHP) 0.249 등의 결과가 나오면서 사업이 무기한 중단됐다. 표류하던 사업은 2017년 6월 고리1호기 영구정지 행사에서 대통령이 원전해체연구소 설립을 천명하면서 현재까지 진행됐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2012년 이후 지역 국회의원들과 협력관계 구축해 지속적으로 정부에 건의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유치추진단 구성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 중이다.-경주는 감포읍 나정리 일대로 원해연 부지를 계획하고 있는데, 이 지역이 갖는 강점은 무엇인지.△경북은 국내 가동 원전의 절반인 12기(경주 6기·울진 6기)가 가동 중이고, 국내 유일의 중수 원전까지 다양한 원전 유형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원해연 입지로 계획 중인 경주시 감포읍 일대는 한수원과 원자력환경공단 본사, 한전KPS원자력정비기술센터, 중·저준위 방폐장 등 원전 관계기관이 인근에 모두 입지하고 있어서 연계가 용이하다. 원전해체기업 및 연구소 등 관련 시설들이 자리잡게 될 경우를 대비한 확장성 측면에서도 강점이 있다. 인구밀도도 다른 지역보다 낮고, 넓은 임해도 장점이다. 국내 규제여건상 경북은 방사성폐기물 해상운송의 최적지로서 국내 모든 원전 폐기물의 운송 측면을 고려할 때도 총 이동거리가 상대적으로 가장 짧다. 관리ㆍ운영 측면에서도 원전해체연구소는 경주 방폐장과 물리적으로 연계돼야 시너지가 극대화되는 만큼 모든 측면에서 경주가 최적지다.-원해연이 경북지역에 들어서면 원전해체산업뿐만 아니라 정부가 추진 중인 원자력수출도 경북이 선점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데.△정부는 원전해체연구소를 통해 국내 원전해체시장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출까지 목표하고 있다. 원해연이 예상대로 경주로 확정된다면 이미 우리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원자력 설계-건설-운영-폐기물처리 공정에 해체까지 더해져 원자력 전주기 사이클이 형성되는 유일한 지역이 된다. 경북은 원자력 관련 기업, 연구, 인력이 총결집한 지역으로, 해체기술만 완벽해지면 원전수출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경북은 탈원전으로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앞으로도 고통이 지속할 지역이다. 현재 원해연을 제외한 다른 원전 대체사업 계획은 없나.△건국대 김준모 교수가 사회경제적 손실 비용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원전건설과 운영과정에 발생하는 인건비 낙수 효과와 용역·구매대금 등의 기회비용이 2조600여억원 정도 다. 또 정부정책 변화에 따른 지역총생산액 감소 등 갈등의 사회적 비용이 2조3천500여억원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원전 가동에 따른 법정지원금과 지방세수는 60년 가동한다고 가정할 때, 약 5조 360억원, 다 합산하면 약 9조5천000억원의 경제적 피해가 예상된다. 이같은 피해를 줄이려면 울진은 신한울 3·4호기 건설재개만이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경주와 영덕은 지역여건에 맞춰 대안사업을 산업부에 요구 중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의 에너지전환 정책에 따른 피해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도 추진하고 있다. /안찬규기자

2019-03-03

고압력 물 주입으로 단층 자극, 땅 속 응력 변화시켜

지열발전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땅속 열에너지를 이용한 전기발전이다. 고온의 물(온천)이나 암석(마그마) 등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활용한다. 지상에서 주입한 물이 지면 아래의 열에너지를 받아 가열되면서 발생한 증기로 전기를 생산한다. 자연적으로 온도가 높은 화산지대인 일본이나 아이슬란드,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수십에서 수백m 정도만 시추해도 뜨거운 지열수를 통해 발전할 수 있다.포항지열발전소는 이와는 조금 다른 심부지열발전(Enhanced Geothermal System)이다. ‘인공저류지열발전’이라고도 한다. 화산지대가 아닌 곳에서 땅을 깊게 시추해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찬물을 주입해 발생하는 수증기를 이용해 발전기를 돌리는 기술이다. 땅속 온도가 180℃ 이상, 단열(파쇄)대(Fracture Zone)여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핵심기술로 △심부시추기술 △수리자극기술 △미소지진 분석기술 등이 필요하다. 포항지열발전소와 포항지진의 상관관계에서 가장 큰 논란은 수리(유압)자극(hydraulic Stimulation)의 적절성에 있다. 물 주입이라는 자극으로 지층이 영향을 받게 됐고, 이 때문에 결국 규모 5.4의 강진까지 발생했다는 것이 쟁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수압’의 세기에 있다.수리자극은 고압력의 액체를 이용해 지하의 암석 등을 쪼개는 기술이다. 5∼30㎫ 고압수를 땅속에 주입해 균열을 만든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균열 사이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인 저류층이 만들어지게 되고, 물이 지열을 머금게되면서 생성되는 증기가 지상까지 연결되는 파이프를 통해 밖으로 나오면서 발전소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메가파스칼)은 용기에 가스를 채울 때 충전된 압력을 나타내는 압력단위로, 1㎫은 100만㎩(파스칼)과 같다.포항지열발전소는 수리자극이 아닌 수압파쇄(Hydraulic Fracturing) 방식을 사용했다. 가스 채굴 등에서 활용되는 수압파쇄는 말 그대로 수압을 이용해 암석을 강하게 부술 때 사용한다. 통상 50㎫의 압력 정도다.포항지열발전소에서 수압파쇄를 이용해 지상에서 넣은 수압이 89㎫, 지하 암석권에서 압력이 더해져 시추정 지하 4.3㎞에 가서는 최대압이 무려 131.8㎫나 된 것으로 조사됐다. 20∼30㎫이 인체가 2∼3㎞ 심해에 들어가 있을 때 느끼는 압력의 수준이라면, 잠수함조차 쉽사리 들어갈 수 없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 마리아나 해구(깊이 11㎞)의 수압이 110㎫다. 마리아나 해구 가장 깊은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압력보다 더한 고압력의 물이 지열발전을 위해 땅 밑에 가해진 것과 같다.수압파쇄는 여러 국가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클뿐더러 지하수와 표층수의 오염, 소음, 특히 지진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포항지열발전소에서 안전한 방법인 수리자극을 두고 왜 첫 시도부터 지층에 큰 영향을 미치는 수압파쇄를 이용했는지에 대한 대답은 포항지열발전소 관계자들만이 알고 있다.포항지역 대학과 시민·사회단체 등이 모여 만든 11.15 지진지열발전 공동연구단 관계자는 “균열을 하나씩 조절해가면서 진행하는 것이 수리자극이라면, 땅속 균열과 상관없이 땅을 아예 부술 때 하는 게 수압파쇄”라며 “(수압파쇄를 이용한 건)상식에 벗어난 행위다. 천천히 쪼갤 상황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에 쫓겼을 가능성도 있는데, 보고서 등을 보면 원래 계획보다 (사업이) 6개월씩 늦어졌다”고 밝혔다.익명을 요구한 한 지질학자 역시 “지질학자들이 있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사업을 진행하게 하지 않았을 거다. 지질학자들을 다 배제하고 (지열발전)사업을 진행했던 것”이라며 “포항지열발전사업에는 모두가 자원공학과 출신이 참여했다. 대표가 지질학 출신이긴 했지만, 이전에 이런 연구를 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지열발전소가 지진 유발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심은 이미 미국과 스위스, 독일 등 세계적으로도 논란거리다. 지난해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AGU(American Geophysical Union)국제회의에서도 포항지진과 관련해 국내외학자들의 논문이 15편이나 발표되기도 했다. 포항지열발전소는 정말 포항지진을 유발했을까. 포항지열발전소는 1.2㎿급으로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리 일원에서 지난 2012년 10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4천382m 깊이로 시추했다. 2016년 1월 29일 물주입을 시작으로 2017년 9월 18일까지 1만2천798㎥의 물을 땅속에 주입했고, 5천841㎥의 물을 배출했다.기상청 자료를 보면 물 주입 이후부터 규모 5.4 포항 지진이 발생한 2017년 11월 15일까지 규모 2.0 이상 지진은 10회, 2.0 이하 미소지진은 총 63회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공교롭게도 포항지열발전소가 땅속에 물을 주입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규모 2.0 이상 지진이 감지된 것.포항지열발전소 주관사인 (주)넥스지오의 대표이자 지열발전 상용화 기술 개발단장인 윤운상 대표는 학계에서 제기한 유발지진론에 대한 반론으로 McGarr 식을 예로 설명하면서 유발지진이 아니라고 반박했다.윤 대표는 그동안 전 세계에서 발생한 유발지진의 자료를 발표해 “5.4의 지진이 발생하려면 현재 물 주입량의 약 1천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동안 유발지진으로 의심되거나 판명된 지진은 세계에서도 규모 2∼3 정도였다. 5 이상 규모의 강진은 전례가 없다는 말이다. 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포항 지진이 포항지열발전소의 물 주입 시점에서 두 달이나 지나 지진이 발생했다는 점 등을 들며 상관관계가 부족하다는 유보적인 뜻을 취하고 있다.반면에 이진한·김광희·김영희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4월 포항 지진이 자연 지진이 아니고 지열발전소 물 주입 때문에 발생한 ‘유발 지진’이라는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인 ‘사이언스’에 발표했다.연구팀은 2017년 11월 15일 발생한 포항 지진 진원이 지열발전소 주입정 위치와 물 주입 뒤에 발생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또 지진의 진앙이 물 주입지점 근처로 몰려있다고 주장했다.포항지진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정부에서 출범시킨 ‘포항 지진과 지열발전의 연관성 분석 연구단’ 단장 겸 대한지질학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열발전과 포항지진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면서도 “명확하게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지진이 발생한 지점의 땅속 응력 형성 등에 대한 증거가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포항지진이 포항지열발전소로 인한 유발지진인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포항 지진과 지열발전의 연관성 분석 연구단’의 발표도 어느덧 오는 3월 중순께로 성큼 다가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점들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지만, 산업통상자원부 등은 관련 조사가 진행중이라는 이유로 현재까지 어떠한 정보도 차단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뒷맛이 개운하지가 않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19-02-27

포항 지진, 1978년 관측 이후 총 112번 지열발전소 물 주입 후 발생이 ‘108번’

기상청이 포항에 계측기기를 설치, 지진을 관측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지난 1978년부터다.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그동안 포항에서 현재까지 규모 2.0 이상의 내륙지진은 모두 112번 발생했다.자료를 분석해보면 포항시민들 입장에선 눈여겨 볼 부분이 한두 사안이 아니다. 우선 기상청 관측이 시작된 이후 2017년 11월 15일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하기 전까지 일어난 지진은 총 8회에 불과하다. 관측 후 최초 지진은 지난 1986년 3월 17일 발생했다. 규모 3.2였다. 기상청 관측이 시작된 이래 10여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0여 동안 적어도 지진으로 인한 문제는 없었다는 얘기다. 그 후 2년이 지나 1988년 1월과 1999년, 2002년 각 1회씩 규모 2.0 이상의 지진은 16년 동안 총 4회에 불과했다. 적어도 포항은 그때까지만 해도 지진 안전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시민들 또한 포항이 지진대라는 학자들의 보고가 있었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1978년 이후 5회 지진이 발생한 시기는 2016년 12월 23일이다. 그리고 6일 후인 12월 29일 여섯 번째 지진이 일어난다. 이때는 포항지열발전소 사업이 시험가동 중이었다. 지열발전사업은 2015년 5월 착공했으며, 필요한 물 주입이 되는 공식적인 가동은 2016년 1월부터다. 착공 이후 7개월여 동안은 내부적으로 시험가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험 가동 중에 전체 맥락 파악 차원에서 당연히 상당한 물 주입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지진은 2017년 4월 15일 발생했다. 오전 11시 31분에 규모 3.1의 지진이, 그리고 6시간이 지난 오후 5시 16분에 규모 2.0의 지진이 관측됐다. 규모 3.0 이하면 ‘미소지진(microseismicity)’이라 하고 3.0 이상이면 ‘거대지진(macroseismicity)’으로 분류되는 것이 통상적이다.이날 규모 3.1의 거대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은 지열발전 사업을 관리해야 하는 측에서 보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그러나 지열발전소 측이 어디까지 이 사실을 보고하고 대처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아리송하다.특히 당시 인근 주민들이 3.1 지진과 지열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해 논의조차 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사업자 측의 통보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더욱 충격적인 것은 재가동 과정이다. 재가동은 같은 해 7월 말에 이뤄졌다. 외국자문관으로부터 규모 2.0 수준 이하에서 가동하는 기술을 전수받았다는 것이 당국을 설득하는 논리로 제공됐다. 승인이 났고, 다시 물도 주입했다.포항지진범시민대책위는 이 과정에서 집중조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의사 결정과정을 들여다보면 부실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업자 측은 이미 수백억여 원의 사업비가 투자된 때였기에 사활을 걸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당국만이라도 제대로 된 검증을 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앞서 8개월여 전에 경주에서 1978년 관측을 시작한 이래 한반도에 역대 최대인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 전 국민들을 경악케 한 사실이 있었기에 포항지열발전소 재가동 여부는 신중을 거듭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경주지진 당시 연세대 홍태경 교수가 나서 “양산단층에 응력이 쌓여있어 안강 근방에서 큰 지진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는데도, 관계기관 등은 이러한 지적 을 너무 안일하게 접근했다는 지적이다. 재가동 후 석달 반만인 2017년 11월 15일 포항에선 겉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오후 2시 22분 32초에 규모 2.2의 지진이 오더니 12초 후 규모 2.6의 지진이, 그리고 7분 후인 오후 2시 29분 31초에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 포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날 하루 동안 규모 2.0 이상의 지진만 36회 발생했다. 주민들은 극한 공포에 떨어야 했고, 포항을 떠나는 피난행렬이 줄을 이었다. 혼돈 속의 포항은 융단 폭격을 받은 폐허같았다. 다음날인 11월 16일에도 규모 2.0 이상 지진이 16회 이어졌고, 17일 3회, 19일 5회 등 지속해서 일어났다. 2017년 11월 한 달 동안 발생한 지진만도 69회에 달했다.여진은 계속됐다. 한해 악몽을 떨쳐내기 위해 연말 모임을 갖던 시민들은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혼비백산했다. 지진은 새해 첫날인 2018년 1월 1일에도 한차례 일어나 불안감을 안겼다. 또 2018년 2월에는 무려 20회나 발생해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린 시민들은 여진과 땅이 조금만 흔들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후 3월에 3회 5월 31일 1회 관측을 끝으로 지금까지 포항에서 내륙지진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지진은 큰 지진이 일어나기 전의 증상인 전진과 그리고 본진, 여진 등으로 구분된다. 2016년 9월12일 발생한 경주지진의 경우 여진이 3개월여 만에 마무리된 데 비해 포항은 6개월 15일 정도가 걸렸다. 지질학자들과 지진전문가들은 그만큼 포항지진은 땅속에서 지진이 발생할 응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들 분석한다. 딱히 무엇이라 지금 시점에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무언가의 에너지가 충만해 있었다는 것이다.포항시민들은 그 에너지원이 지열발전소 물 주입으로부터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범시민대책위를 구성, 대응하고 있다. 앞서 고려대학교 이진한, 부산대학교 김광희 교수도 포항지진은 자연지진은 아니고 지역발전소 물 주입 때문에 발생한 ‘유발지진’이라는 연구결과를 국제 학술지인 ‘사이언스’에 발표하기도 했다. 연구팀은 포항지진 진원이 지열발전소 주입정 위치와 물 주입 뒤에 발생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내세운다. 포항지진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배경이기도 하다. 물론 일각에선 이를 반박하는 다른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견해도 있다. 똑같은 활성단층에서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 점 등을 볼 때 촉발지진이나 유발지진이 아니라 자연지진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오는 3월 20일 전후로 예정된 정부조사단의 조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현재 진앙지에 가까운 포항 흥해읍 주민들 사이에선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포항지진으로 집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벌써 두 번째 겨울을 추위 속에서 지냈다. 언제 돌아갈지 기약도 없다. 지진 당시 이어지던 정부 고위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의 발길도 요즘은 찾기조차 어렵다. 피해주민들 경우 누군가로부터 왜 그런 지진이 일어났는지 등 시원한 답도 들을 수 없어 더 속이 탄다. 정부조사단의 조사 결과 발표에 상관없이 특별법을 만들어 피해를 당한 주민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함에도 제출된 관련 법안들은 대부분 아직 국회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한 채 잠자고 있다.포항시민들은 포항지진과 관련,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주길 바라고 있다. 자연재해든, 아니면 그 무언가에 의해 일어난 것이든 간에 국민이 큰 피해를 입었으면 복구 등에 보다 발 빠르게 나서줘야 한다는 푸념이다. 국회를 향한 원망의 목소리도 드높다. 무슨 일만 생기면 국정조사 등을 하면서 왜 숱한 의혹과 의문이 있는 포항지진에는 그토록 무관심한가 하는 것이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19-02-25

“스위스 바젤이 포항에 주는 교훈 뼈저리게 느껴야”

2017년 11월15일 포항지진 이후 가장 많이 주목받은 곳은 스위스 바젤이다. 지열발전소 추진 과정에서 미소지진 등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포항과 달리 바젤에선 지열발전소 가동중 지진이 발생하자 민관이 협의, 조사 끝에 가동중단을 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너무나 차이나는 대처방안에 시선이 쏠렸던 것이다. 포항에서도 대응방안을 비교 분석하기 위해 현지를 다녀오기도 했다.바젤에선 2006년 12월 7일 규모3.4 지진이 발생하고 2007년 3월까지 규모2.5 수준 이상의 지진이 9번 발생했다. 불안하기는 바젤 시민들도 마찬가지. 잇따른 지진 발생 원인을 두고 논의가 이어졌고, 급기야 지열발전소에도 불똥이 뛰었다. 우려가 커지자 스위스 정부는 곧바로 조사단을 구성,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2년 9개월 뒤인 2009년 12월 10일 지진발생에 관한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1996년에 Gpower회사 중심으로 진행된 ‘바젤의 지열발전프로젝트’를 13년여 만에 중지시켰다. 지열발전과 유발지진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 조치였다. 포항이 바젤사례에 견주어봐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포항지열프로젝트를 주관한 기관과 전문가들은 바젤프로젝트의 실패 사례를 교훈삼아 지진 재난에 충분히 대처할 준비를 했어야 했었다는 것이다. 포항지열프로젝트의 참여기관은 바젤의 조사결과 발표 이후 1년여 지나서 사업계획서를 제안했다. 그 보고서에는 국내외 지열발전 상용화를 위한 실증사례 조사 항목도 분명 기록하고 있다. 2016년부터 포항지열발전소가 본격적인 물투입을 통한 운영을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5∼6년 동안 바젤 사례로부터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간은 충분했다. 바젤 사례로 배워야 할 교훈에 관한 여러 논문들이 학술지 등에서 발표됐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은 애써 외면한 것인지, 아니면 무지였던 것인지 포항시민 입장에선 묻지 않을 수 없다.포항과 바젤의 지열발전소 경우 위치 선정 조건은 엇비슷한 것으로 나타난다. 바젤은 지열발전에 적합한 지역인 지하 5㎞의 온도가 150∼200℃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열발전 부지 또한 도심 중심가에서 2∼3㎞ 거리를 둔 산업부지(지금은 G-power 주차장)를 선정했다. 포항도 이와 별반 차이없다. 지하 5㎞의 온도가 180℃에다 화강암이 분포되어 있고 5만여 인구의 주거밀집지역인 대단지아파트 단지와 2∼3㎞ 지역이다. 단층지역이라는 점도 양측 모두 유사하다.지열발전소 입지를 선정할 때는 지반의 온도와 함께 지진발생이 가능성이 높은 (활성)단층지역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사항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바젤이나 포항이나 왜 단층지역에 지열발전소를 추진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다만, 포항지열발전사업 추진 전에 이미 바젤에서의 지열발전소가 지진발생에 다소나마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가동을 중지시킨 그 이후 포항사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로만 본다면 당시 포항의 입지 선정이 어떤 절차를 거쳐 결정됐는지 규명이 불가피하다.활동단층의 존재를 알고도 위치 선정을 했다면 예측되는 재해에 손을 놓았다는 점에서 직무유기다. 지질발전을 위해서 선행해야 할 필수 사항으로, 시추할 지하 내부단층 구조를 알기위한 작업으로 ‘3-D 지진조사(seismic survey)’란 것이 있다. 지열발전연구를 주도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L씨, S씨 등 연구원들은 스위스 학자들이 바젤교훈을 발표한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발표한 ‘한국의 EGS 파일러트 프로젝트의 배경과 진전’이라는 논문에서 불행히도 3-D지진조사를 하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재정부족과 그 조사를 할 경우 해당지역 주민들이 지하에서 실험차원이지만 큰 폭발이 일어나면 진동으로 이어지고, 그러면 그 사업 자체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외국전문가의 자문으로 대신했다고 적시한다. 첫 출발부터 매우 중요한 절차가 생략됐다는 것은 이 사업을 얼마나 얕잡아 보고 추진한 것인지를 알게 해주고도 남는다.원자력발전소나 대부분 에너지생산시설 등은 주거밀집지역은 일단 피해서 입지를 선정한다. 그와 달리 포항과 바젤은 도시인구 밀집지역과 근거리에 지열발전 입지를 선정했다. 이는 일단은 ‘경제적인 생존성(economic viability)’때문으로 보인다. 지열발전소에 생산되는 전기에너지와 열을 근접지역주민에게 공급해야 경제적·상업적 이익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위험경보체계의 규제 강화는 필수적이다. 또 해당지역 주민에게 실시간 지진정보를 제공하고, 또한 지열발전소 건설 전후, 운영하는 동안 주민참여와 해당 자치당국과의 개방형 쌍방대화가 필요하다. 그 점에서 포항과 바젤의 차이가 확연하게 갈린다. 바젤은 시민을 상대로 교육을 하고 이해관계자들은 참여시켜 협의와 논의를 지속한 반면, 한국정부와 지열발전프로젝트 참가자들은 포항에서 진지하게 대화나 교육을 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들은 적이 없다. 심지어 주변에 규모2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면 포항시 등에 위험경보작동체계 지침에 의거 통보를 해줘야 함에도 2016년 12월23일 규모2.3의 지진이 발생하자 3일 후인 12월 26일 규모2.5 이상일 때만 통보하도록 규정까지 바꿔 버린다.또다른 비교다. 바젤은 규모3.4 지진이 발생한 이후 3개월여 만에 가동을 중단한다. 포항을 한번 보자. 2017년 4월 15일 규모3.1 수준의 지진이 발생했다. 바젤과는 0.3 수준의 차이로 거의 동일한 수준에 가깝다. 그런데 포항은 3개월여 뒤 7월 말에 재가동했다. 유럽의 지열발전 전문기관(DESTRESS)자문을 받아 재가동했다고 강변하고 있다.2016년 9월 12일 발생한 경주지진과 포항지열발전 가동을 연결시켜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포항지열발전소 측은 2016년 2월에 물투입 압력 131MPa를 지하 암반(파쇄대)에 가한다. 이는 해저 13㎞의 압력이다. 지열발전을 위한 평균 물투입 압력이 20MPa라 할 때 무려 6∼7배에 해당 압력을 단층지역에 가한 것이다. 포항지열발전소와 양산단층에서 발생한 경주 지진 진원지와의 직선거리는 불과 40㎞ 남짓이고 양산단층이 지난 가는 곳에선 수평거리로 10㎞에 불과하다. 8개월 여 전이어서 양측 간 연결고리는 무리라는 시각도 있지만 일각에선 포항지역발전소의 무리한 가압이 동일한 활성단층대를 공유하는 경주 규모5.8 지진의 응력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지진발생 이후 사법당국의 대응도 비교 항목이다. 바젤은 규모3.4 지진 발생 이후 15분 만에 바젤 경찰이 지열발전소 주관사인 Gpower사무실을 찾아 관련서류 전부를 압수했다. 조사에 필요한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바젤시민의 자산을 손상했기에 바젤검찰은 지파워를 조사, 법정에 넘겼다. 그러나 포항은 지금까지 검찰과 경찰 등 사법당국이 포항지열발전소 사업 추진업체인 (주)넥스지오를 상대로 한 어떤 행보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포항은 바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지진이 발생했고, 물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피해가 있었기에 사실 규명을 위해선 추후 비록 수사대상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올지언정 그 당시 관련 증거들을 확보했어야 했다. 오는 3월 20일 전후한 정부지진조사연구단의 조사결과에 따라 사법당국의 움직임도 예상은 된다. 그러나 설령 움직인다 해도 이미 회사는 파산상태나 다름없어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궁금할 뿐이다. 양만재 박사 지열발전으로 인한 사고 시 피해자에 대한 후속 보상대책과 사후 관리 실태를 보면 더욱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스위스 바젤의 경우 지진피해는 650만∼830만 달러, 100억원 전후인데, 지파워는 지열발전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든 보험금으로 주민의 재산 피해를 900만달러 보상해 불만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주)넥스지오는 보험을 가입하지 않았고, 지금은 법정 파산과정의 절차를 밟고 있다. 정부는 시민의 재산피해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보안장치를 왜 사전에 강구하지 않았을까.바젤은 2009년 지열발전소를 중지한 이후에도 지금 관리를 계속하고 있다. 지하에 투입된 물압력 변화에 따른 미소지진을 차단하기 위해 2017년 7월에 물을 배출해내기까지 했다. 포항은 정조단이 지난 8월에 공구를 열고 압력변화를 조사했을 뿐, 그 이후 지진 방지를 위한 사후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정조단의 단장은 압력변화를 체크하는 사후관리에 필요한 예산반영을 정부에 제안하겠다고 한다. 언제 부처에 예산을 반영하고 그 예산을 받아서 사후 대책을 수립할지 포항시민들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 상황이다. 같은 사안을 두고 포항과 바젤의 대처 방안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양만재 시민기자

2019-02-21

포항지진 원인 놓고 세계 지질학자·관계자들 논전

지난 10일 포항 동북동쪽 50㎞해역에서 발생한 지진을 두고 기상청이 ‘포항지진’이라고 발표하자 포항시민들은 항의하며 분노를 쏟아냈다. 육지인 포항과는 전혀 상관없는 동해바다 한가운데서 발생한 해상지진을 굳이 ‘포항’에 갖다붙인데 따른 불만이었다. 2017년 11월15일 규모 5.4의 지진으로 쑥대밭이 된 포항이 그동안 지진 피해 극복을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는 마당에 육지와 거리가 먼, 그것도 진앙지가 심해에서 발생했음에도 포항지진이라고 하는 바람에 ‘지진으로 추락한 포항의 대외 신인도를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한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며 허탈해 했다. 이는 포항시민들이 지진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증거다. 특히 포항지진이 포항지열발전소의 영향으로 발생한 유발지진인가 여부를 지난 1여년에 걸쳐 조사해 온 정부조사연구단(이후 정조단) 발표가 오는 3월 20일 전후로 예정되면서 더욱 민감해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이강근 정조단장을 비롯한 조사단원들도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 조사결과에 따라 포항지진은 이해관계집단들로부터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업무 압박감에 정조단장이 올해 초 입원까지 했다는 말도 들린다.정조단의 입장이 어떠한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다만, 포항시민들은 지난해 4월 과학계 학술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사이언스(Science)’지에 실린 두 편의 논문에서 ‘규모 5.4의 포항지진은 포항지열발전소와 무관할 수 없다’는, 다시 말해 유발지진으로 발표한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포항지진으로 시가 집계한 재산피해가 약 845억원이고 복구비는 1천795억원이나 된다. 여기에다 정신적인 피해와 부동산 가격하락, 경제적 침체 등의 ‘비가시적인 피해’는 집계 불가능할 정도다.포항지진은 지난해 연말 미국에서 개최된 지구물리학회포럼에서도 그 원인을 놓고 열띤 논쟁과 토론이 벌어졌다. 포항지진을 따로 떼 내 별도 세션으로 논의할 만큼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미국학회에 참석한 국내 관계자들은 ‘국내엔 조용한데 외국에서 더 많은 관심’에 적잖이 놀랐다고 전한다. 당시 미국학회에서 논의된 사항을 종합해보면 ‘왜 중단하지 않고 사업을 진행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2016년 9월 12일 규모 5.8의 강진이 경주에서 발생한데다 2017년 규모3.1 수준의 지진이 포항지열발전소 부근에서 발생한 것 자체만으로도 추진을 멈추어야 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믿고 그런 일을 강행한 것인가 하는 의견도 나왔다. 또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런 상황에서 외국전문기관의 자문 등을 받았다면서 시설을 가동하다 중단하기를 반복한 사례를 있을 수 없는 일로 꼽기도 했다. 상당수 미국 지질학자들은 앞으로 정조단의 발표가 어떻게 나올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포항지진 원인과 관련해선 미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도 큰 관심사다. 지구과학관련 외국잡지와 지열발전 연구소들은 포항지진은 자연지진이 아니라 지열발전소가 만들어낸 ‘유발내지 촉발 지진’으로 신중히 추정하고 있기까지 하다. 유발지진(induced earthquake)은 넓은 의미에서 인위적 행위(지열발전, 셰일가스 개발, 이산화탄소 및 폐수 지중저장, 광산 개발, 터널 굴착 등 다양한 산업활동)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단층을 건드리거나 해서 지진을 발생시킨 경우에 해당된다. 촉발지진(triggered earthquake)은 간접적으로 지진을 유발시킨 경우다. 즉, 어느 한 곳에 지진 생성 요인이 응력되어 있는데 작은 충격이라도 가해지면 폭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경주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해 포항 등 활성단층에 응력이 형성되어 있는 마당에 지열발전을 위해 지하에 물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기존 단층을 자극시켜 지진을 촉발시켰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다. 지난해 4월 ‘네이처’지 기자도 이와 관련, 글을 썼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파괴적인 지진은 아마 지열발전소가 촉발(trigger)시켰을 것이다’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10월의 뉴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s)잡지도 ‘지열발전소의 운영측이 장소 선정을 현명하게 하고 물 투수율을 적절하게 조정했다면 규모5.4 지진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견해를 기술하고 있다. 포츠담독일연방지질연구원(GFZ)도 ‘포항지진은 인간활동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 지진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또한 지열발전 연구과제를 위해 넥스지오와 서울대 등과 협업을 맺은 스위스 취리히에 본부를 둔 DESTRESS가 발표한 자료도 유발과 촉발에 기울어져 있다. 국내보다 외국에서 먼저 포항지진은 유발지진이든 촉발지진이든 지열발전소로 인한 ‘인위 행위’와 무관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점은 매우 주목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에서 한국의 지진을 놓고 이같이 열띤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그만큼 포항지진이 지질학자들로부터 관심대상이라는 증거다. 지열발전은 세계적으로도 아직은 기술이 미흡하다 할 수 있다. 앞선다는 국가도 그 수준차이는 오십보백보다. 세계 지질학자와 관계자들이 포항지진에 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이를 통해 미래로 한 발짝 더 나아가려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국내외를 막론하고 논쟁과 토론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자료가 있어야 하는 게 통례다. 그러나 현재 포항에는 정부조사단의 구성과 정부 등 기관에서 포항지열발전소 건립과 관련, 정보 확보가 어렵다. 공개를 제대로 해주지 않고 있어서다. 그러다보니 뒷말이 무성하다. 의문스러운 점도 많다. 우선 정부조사연구단부터 살펴보자. 정조단은 포항지열발전소 부실 관리로 문책받아야 할 기관중 하나인 산업자원통상부(이후 산자부) 산하 기관인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이후 에기평)이 기획하고 발족시켰다. 지금 운영관리도 맡고 있다. 에게평은 포항지진 전에 지열발전소 가동에 따른 지진 위험을 통보받고 산자부에 전달하는 감독 기관 역할을 했었다. 그런 기관이 포항지열발전 과정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감사를 해서 결과를 보고한다고 한다. 물론 에기평은 현재 조사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된 대한지질학회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강변할 수 있다. 그러나 씨줄날줄로 얽혀 있는 구조여서 이해상충의 덫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의심의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대한지질학회는 16명의 학자로 정조단을 구성, 지난 1여년에 걸쳐 포항지진이 유발지진인지 여부에 대해 사실 규명을 해오고 있다. 국내 교수 9명, 국외 교수 5명과 조사자문위원 2명이다. 자문위원에는 지열발전소가 포항지진의 원인이라 주장한 고려대 이진한 교수와 자연지진에 무게를 둔 연세대 홍태경 교수가 당초 선정되었으나 두 교수는 몇 달 가지 않아 그만 두었다. 그 자리에는 지금 포항시민 대표가 들어가 있다. 현장의 직접 조사활동은 국내교수들이 맡고 있는데, 그들 9명 중에 5명이 특정학맥이어서 이런 저런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지진 분야의 한 전문가는 “포항지열발전소 기술개발의 당위성과 운영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제공한 핵심학자 다수가 특정 대학 출신이고 그들이 그 분야 주류였다”면서 사제지간, 동문 등으로 얽히고설켜 있는데 조사가 제대로 될 수 있을지를 우려스런 시각으로 보는 측도 있다고 전한다. 양만재 박사 현재 포항의 지진관련 단체 등은 정조단원 중 5명의 외국학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그들이 정부의 영향력과 특정학교의 ‘학연카르텔’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어서다. 국내학자의 부족한 유발지진에 관련된 전문지식과 역량도 겸비했고, 이미 국제학계에서 유명 외국학자들이라는 점 또한 신뢰를 더하는 대목이다. 국내 학자들도 지구과학학회에서 주요연사로 선정되고, 미국과 유럽에서 유발지진 분야의 명성을 갖춘 외국의 저명교수가 참가하고 있는 만큼 이번에 결과가 발표되면 세계학계가 그들의 분석과 판단을 인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포항지진범시민대책위도 그동안 나름대로는 활발하게 움직여 왔다. 그러나 재정적 한계와 정보 접근상의 제약으로 인해 무척 애를 먹고 있다. 지금 필요한 관련 서류와 지열발전소 추진과정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알길 또한 막막하다. 사업을 기획하던 관계자들은 다들 말을 아끼고 있고, 회사 측도 문을 닫아 대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다.정조단은 지난해 2월 조사에 착수하면서 ‘지열발전소와 지진의 연관성에만 조사를 국한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또한 시민입장에선 어떻게 보면 난센스다. 자연지진인 경우엔 시민들의 입장이 정리되어 나오겠지만 유발지진이든 촉발지진이든 간에 포항지진의 원인이 지열발전소와 연관성이 있을 경우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등엔 아무런 로드맵도 나와 있지 않은 상태다. 포항에는 아직도 지진 당시 집이 파손돼 임시거처나 대피소에서 생활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고 지진으로 추락한 경제가 바닥을 기고 있는데도 말이다./양만재 시민기자

2019-02-19

“위험관리 위해서라도 ‘주민 참여권리’ 보장 필수”

지열발전소 건설에 있어 시민참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indispensable factor)라 할 수 있다. 지열발전소 건설과 운영 시 거대지진이든 미소지진이든 어떤식으로든지 지진위험에 직면해 있기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주민에게 위험을 알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진이 미치는 범위가 해당 발전소지역에 제한되지 않고 발전소 주변지역 주민의 생명과 재산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니다. 외국에는 지열발전 위험 관리를 위해 지역주민과 자치단체(regional authorities), 다시 말해 ‘이해관계집단(stakeholder)’의 참여와 대화를 주요 절차로 여기고 있다.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과학자의 참여권리(getting the science right)’도 중요하지만 ‘주민의 참여권리(getting the participation right)’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포항지역발전소를 추진한 정부와 과학 관계자, 넥스지오가 포항사업의 건설과 정에 주민참여를 제대로 보장하였는가는 중요한 사안이다. 특히 지금은 11·15 지진 당시의 원인이 무엇인지 등 책임을 가리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어 반드시 짚어보아야만 하는 항목이라 할 수 있다. 추진 주체들이 시민의 권리를 배제하였다면, 시민들 입장에선 왜 그랬는지 등 그 과정을 살펴 볼 권한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현재 포항시민들은 정부 등이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실현한다는 목적에만 집중하여 시민의 권리를 외면했다고 주장하며 사업주체들과 맞서고 있다.그동안의 시민대책위의 자체 조사 결과로는, 정부 등은 지열발전기술개발사업(이후 지열프로젝트로 표기)에 주민참여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다. 이는 2010년 정부가 지열프로젝트를 실천하기 위한 사업자를 공모하면서, 요구한 제안서에서도 확인된다. 사업자들에게 입지선정 과정에 직면하는 주민저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또한 지열발전소 운영으로 초래할 수 있는 지진위험을 사업자가 해당지역 주민과 함께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주로 지열발전에 필요한 시추관련기술, 지열평가기술 등을 주요 과업으로 제안하고 이것들을 평가하는 것을 사업의 목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지열발전의 지식과 기술의 당위성을 제안하였던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후 한자원)의 보고서에도 주민참여에 관한 담론을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지열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던 (주)넥스지오를 비롯한 참여기관들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지역주민 및 포항시와 만나 대화를 했고, 2011년 4월 포항시와 넥스지오가 MOU를 체결하고 착공식도 했으니 일정 절차는 거쳤다는 주장이다.넥스지오가 포항시민 외 대학과 연구소의 관계자들과도 만났다는 기록도 있긴 하다. 지열사업에 참여했던 서울대 M교수가 2018년 재생에너지 관련 외국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도 포항프로젝트를 실행하는 2단계 작업의 ‘소통프로그램’을 실행하면서 외국연구소와 기업, 대학, 언론계 등 173개 조직의 740명의 사람들을 만났다고 적시한다. 그러나 포항시민들은 그 자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지는 않는다. 에너지 관련 학계와 컨퍼런스에서의 논문 발표 등 사업주체측의 추가적인 활동 등이 주민과의 소통은 형식적이었고, 전문가 집단과 대화는 그들만을 위한 대화공간이었다고 반박한다. 지역주민과 지진위험을 둘러싼 ‘개방형 쌍방대화(open two-way communication)’였어야 하는데 지진이 나고 난 후 조사를 해보니 절차상 형식을 맞추기 위한 일방적 대화였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열프로젝트 실천을 위해 과학자나 전문가가 나서 주민상대로 건설의 장밋빛 당위성을 전달만 한 공청회를 소통 불능의 단적인 사례로 꼽는다. 어떻게 보면 이는 포항에 상주하고 있는 시민단체나 연구기관, 대학, 시민들의 지열발전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일방적 추진이 진행됐다고 봐도 무방한 대목이다.지열발전소 추진 측의 시민 기만 행위는 이후에도 나타난다. 넥스지오는 2015년에 지열발전소 건설을 완공하고 2016년 1월부터 전기 생산에 필요한 물 투입을 시작한다. 물 투입이 시작되면 규모 3 미만 수준의 미소지진 뿐만 아니라 규모3 이상의 거대지진도 발생할 위험이 있다. 통상적으로는 지열발전소로 인한 지진은 ‘미소지진(microseismicity)’이 발생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거대지진(macroseismicity)도 발생했고, 학계도 거대지진의 위험을 밝히고 있다. 학계와 현장 전문가들은 지진위험을 예방·완화하기 위한 일명 ‘교통신호체계(traffic light system)(이후 위험경보체계)’의 기술을 개발해 놓고 있다. 물투입에 따른 압력이 지하 암반과 충돌하면 지진이 발생하는데 그 지진의 강도에 따라 물투입을 중단하거나 줄이는, 작동을 알리는 시스템이다. 포항지열발전에 사용한 위험경보체계는 물 투입에 따른 지진강도가 규모2 수준 이상이 발생하면 넥스지오가 기상청, 포항시, 산업자원부,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등에 보고하고 물투입 압력을 중단하는 체계이다. 2016년 1월부터 가동되었으며, 12월 23일 지열발전소 근거리에서 규모 2.2의 지진 발생이 감지된다. 규모2 이상의 지진이 발생했으니 절차에 의거, 포항시는 넥스지오로부터 지진통보를 받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포항시는 그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 그러니 포항시는 위험경보의 작동체계 조차 몰랐다고 한다.더 기가 찬 것은 다음 조치다. 2016년 12월 23일 규모2.2 지진 발생 이후 지열프로젝트 참여기관들은 12월 26일에 포항시를 제외하고 정부에만 통보하는 지진강도 수준을 규모 2에서 규모 2.5로 전환했다. 포항지열발전소에서 약 600m 떨어진 곳에 학생과 임직원 합쳐 4천여명의 한동대학의 인구가 있고, 또 2㎞ 거리에 대단지 아파트와 일반주택을 합쳐 5만여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한다. 근거리에 5만여명 시민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규모2 수준보다 더 낮은 수준에서 포항시에 통보하는 위험경보체제를 구성해야 했다. 그럼에도 지진수준을 낮추기는커녕 더욱 높였다. 왜 규모2 수준에서 규모2.5로 올리고 포항시를 배제했을까. 그 이유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사안이다.시민들 입장에선 혀를 내두를 일이 더 있다. 2017년 11월 15일 규모5.4의 지진 재난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지열발전소 부근에는 규모 1 이상에서 규모3.1 수준의 지진이 63차례나 발생했다. 그런데도 포항시민에게 알리지 않았다. 위험경보체계는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외국의 지질학자들은 “지역주민이 지진위험을 감당할 수 없다고 의견을 표방하면 지열발전소의 위치를 옮기거나 아니면 지열발전소를 포기를 제안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힌다. 정부지진조사단(이후 정조단으로 표기)의 국제학자인 월리엄 엘스워스(William L. Ellsworth)도 “지열발전소의 운영과정을 실제 확인할 수 있도록 시민에게 확신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며, 위험경보체계에 지역주민의 참여를 중시했다. 지열발전소 과정에서 시민참여는 절대적 요인이라는 것이다.주민 배제는 규모5.4 지진 발생 이후에도 계속됐다. 정부가 포항지진과 지열발전소의 연관성을 조사하기 위한 연구조사단을 구성하면서 포항시민을 대표하는 조사원을 참여시키지 않았던 것. 포항시와 시의회, 포항북구지역 김정재국회의원의 강력한 요청으로 정조단은 작년 10월에 2명의 포항시민대표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기에 이른다. 자문위원의 역할은 말 그대로 자문 정도다. 조사활동에 정조단원처럼 의견을 낼 권한조차 없다. 실제, 현재 자문위원은 시민이 원하는 물음과 여론을 전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공개할 필요가 있는 정보는 공개해야 한다는 정보공개법조차 무색해지는 국면이다.정부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넥스지오, 관련 전문가들은 지열발전기술개발사업에 주민참여가 필수사항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국제학학회나 학술지에 포항지열발전소 건설과 운영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인용한 논문 다수가 주민참여를 중시하였던 것은 그 단적인 사례다. 그렇지만 정작 사업 추진과정엔 어떻게 된 심판인지 시민참여가 배제된 의문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포항시민들은 지금 지열발전소 추진 측에게 묻고 있다. 과연 주민 안전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첫 시도된 이 사업의 진척과 성과가 우선이었는지를. 양만재씨는 경북대 사회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박사학위를, 영국 더럼대학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8년 4월부터 포항 11·15지진 지열발전연구 공동연구단원으로, 같은해 10월부터 정부조사단 포항시민대표 자문단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2019-02-17

일본인 집단 거주지였던 본정동에서 당당히 만세운동

포항지역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활동은 다양했다.어업은 물론이고 잡화, 곡물무역, 금융, 농축산업, 어업, 제염업, 공업, 상업, 교통업, 공무원, 자유업 등에 종사하면서 큰 부를 축적하였다. 3·1 운동 당시 이들은 동해안의 어장과 대규모의 전답 및 목장을 갖추고 지역민들을 소작으로 고용하기도 하면서 사실상 포항의 경제와 정·관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일부 지역민들은 호구지책으로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어장이나 상점 등에 고용되어 민생고를 해결하던 실정이었다. 일본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포항은 당연히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치안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3·1운동이 있기 전 일본인들은 지역 의병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때문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일본 보병 제14연대 병력 중 1개 소대병력이 1907년 7월경 포항에 주둔하게 된다. 대도시가 아닌 영일만지역에 일본군 1개 소대병력을 배치한 이유는 장기와 포항 등지에서 무역이나 광산, 수산업을 하던 일본인들이 의병들로부터 많은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현재의 포항 지역인 장기군 지역(현재 장기면, 구룡포읍, 호미곶면과 경주시 양남·양북 포함)에는 장헌문이 이끄는 장기의진이 있었다.장기의진은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탄광 등 광산을 습격하여 화약을 빼앗고 일본인들을 쫒아내는가 하면, 구룡포를 거점으로 어업경영과 곡물 무역을 하던 도가와 야스브로(十河彌三郞) 경영의 장기 모포리 점포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보다 더 공격적인 산남의진은 흥해와 청하 등의 일본순사주재소를 수시로 공격했다.포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나날이 들려오는 비보를 접해야만 했다. 장기지역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탄광과 일본인 장사치들이 피습당했다는 소문이 금방 퍼지는가 싶더니 흥해와 청하의 분파소가 의병들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불안에 떨었다. 급기야 나카타니 다케사부로(中谷竹三郞)의 집에 모여 일본군대를 포항에 급파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청원서는 결사의 각오로 다케다 야스아키(武田安秋), 세토구치(瀨戶口), 산조오(三藏) 등 3인이 급히 대구에 있는 경북도청으로 가서 접수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일본군 14연대의 병사 약 30명이 수비대장 나카지마(中島) 중위의 인솔로 포항에 도착한 것이다. 그제야 일본 거류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포항에 도착한 수비대들은 주둔할 막사가 없어서 나카타니 다께사부로의 집과 오카모토(岡本), 이와사(岩佐)등 세 명의 집에 나누어 거주하면서 의병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1910년 포항에 포항헌병분견소를 설치하였고, 1914년에는 이를 승격시켜 대구헌병대 관하의 포항헌병분대를 설치하여 영일군·영덕군·경주군·울릉군을 관할하게 하였다.포항의 3·1운동은 이 같은 일군경의 삼엄한 경계와 무자비한 탄압을 따돌리며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당시 포항면의 인구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24.35%로서 이들이 사실상 포항의 경제계와 정·관계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던 본정(本町)에서 당당하게 3·1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재도 중앙동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일신해운(포항수협 관사)을 비롯한 약 5채의 일본식 가옥이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장소성을 살린 독립테마 역사체험프로그램 개발 필요1913년 포항면(浦項面)이 생기면서 중앙동 일대가 포항동이 되고,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한 포항동에 포항면사무소가 들어섬으로써 이곳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1914년 형산강 사방축제공사가 착수되고 1915년에 연일 생지리에서 현 북구청 자리로 영일군청사가 옮겨옴으로써 중앙동(구 포항동) 일대는 급부상하였다. 이어서 경찰서, 세무서, 소학교, 역, 우편국, 지방법원출장소 등 대부분의 관공서가 이 일대에 이전 또는 신설하게 되자 이곳이 포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관공서 외에도 어업과 관련된 해운건물, 일본가옥들과 상가건물들이 들어섰다.이후 중앙동에는 각종 어업 보조 산업이 번성하여 냉동공장, 통조림공장, 주물공장 등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포항-울릉간 여객선 터미널은 이곳에 있다가 1995년 항구동으로 이전하였다.덕산동은 각종 관공서가 밀집되고 주변에 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발전하였다. 일제시대 초기 군청거리 서쪽 마을에는 숲이 울창하여 천연두로 죽은 어린애의 시체를 나무 위에 덕(체봉)을 매어 놓기도 하였다고 하여 체봉거리라 부르기도 했다. 덕수동은 1963년 3월 1일 건립된 포항시개항지정기념비가 있다. 수도산은 본래 백산(白山)이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모갈거사(茅葛居士)란 분이 은둔하다가 순절한 후부터 그 충절을 되새겨 모갈산(茅葛山)이라고 부르다가, 1923~1926년에 상수도 배수지를 이 산정에 설치한 후부터는 수도산이라 부르게 되었다.이 산에 조성된 덕수공원에는 라이온스동산과 모갈거사순절사적비, 모갈정, 충혼탑과 관음사·극락사·보현사 등의 사찰, 반공순국청년동지위령비와 포항사당, 이명석선생 문화공덕비 등이 위치하고 있다. 여천원이 있던 현재의 덕수성당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한때 포항신사(浦項神社)가 자리하기도 했다.구(舊) 포항의 도심지역으로서 포항역과 중앙상가 등이 위치하고 있었던 중앙동은 요즘 들어 중앙상가는 텅텅 비고 그나마 ‘불종거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10년 여천동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집과 백성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진화조직체계를 갖추고 현재 고려요양병원 자리에 경종대를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화재 등 위급한 사항을 알려 신속한 대피와 구조에 사용하였다. 그 종을 불종이라 불렀다.이후 이 거리는 불종로라 불리며 한때 젊은이들이 활보하는 거리로 주목받았으나 중앙상가의 상권이 죽어가면서 이 거리도 시들어가고 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중앙동은 조선후기 이후 포항의 중심지이며 상권뿐 아니라 관공서가 들어섬으로 인해 정치적 공간으로의 기능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와 지배세력으로 성장했고, 시장이 형성되어 경향각지의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내왕(來往)했다. 이곳에서 기독교인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났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지역과 참여자의 특성에 따라 3·1운동의 양상이 달라졌던 점을 부각시키려면 지역특색과 장소성을 살린 역사체험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활성화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중앙동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주무대이자 3·1운동의 역사적 공간이라는 점이 부각되어야 한다. 참여자들은 기독교인 중심이었다.포항교회의 건물터에 유적비부터 세우워야 한다. 3·1운동의 주무대였던 포항장터에도 조형물과 안내판도 세워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들에 대한 실태조사와 보존여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인근 죽도시장과 연계한 체험객 마케팅전략을 세우고, 문화예술허브와 독립운동 역사체험프로그램을 연계하는 사업도 추진해 볼 필요가 있다.아울러 매년 3·1운동 기념식에는 중앙상가 일대에서 전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대대적인 만세축제를 개최하여 정기행사로 정착시킨다면 선열들의 추념 및 애국정신 고취는 물론 호국문화도시의 이미지 제고에도 한 몫 할 것이다. 아울러 시민들의 소통과 화합, 포항의 정체성 확립의 장 마련에도 더 이상 좋을 게 없을 것이다./이상준 시민기자끝

2019-02-11

3월11∼12일 이틀간 만세운동에 1천여 명 운집

아무튼 주동자들 중 4명은 사전에 검거됐다. 하지만 포항장날인 11일 수백 명의 군중이 장터로 운집하였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벽에 붙이며 시위행진에 돌입했다. 이날은 일본 군경의 저지로 강제해산 됐다. 하지만 12일 저녁에는 포항교회의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흩어졌던 군중들이 다시 모였다. 이날 밤, 북본동(北本洞, 현재의 중앙동) 포항교회에 모여든 신도들 수백 명은 일단 교회에 모였다가 등불을 들고 시내로 나와 만세를 부른 후 교회에서 경영하던 영흥학교 서편에 다시 모였다. 당시 포항교회는 현재의 포항시 중앙동 451번지에 있었고, 영흥학교는 포항교회 부지 안에 있었다. 교회에서 발기하여 시내를 수㎞ 행진하는 동안 이를 지켜본 시민들도 동참하여 대열이 영흥학교에 다시 모였을 때는 군중의 숫자가 1천여 명이 됐다고 한다. 이런 규모의 군중이 일시에 모인 것으로 보아 포항의 3·1운동은 송문수 등 5명 외에도 또 다른 지도세력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시일 내에 1천여 명의 군중을 모을 수는 없다. 이를 입증해주는 자료가 있다. 바로 위의 송문수 등 판결문과 3·1운동 이후에 설립된 영일청년회를 창립한 구성원들 명단이다.우선 송문수 등의 판결문 중 ‘이기춘과 이봉학은 송문수를 만난 다음날인 10일부터 포항에서 김동은(金東殷) 외 수명에게 송문수로부터 들은 바를 전하고 함께 동참할 사람들을 모집하였다’고 했다. 김동은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6월에 창립된 영일청년회에 창립멤버의 간부로 참가했다. 영일청년회는 창립 당시부터 포항 3·1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이기춘이 운동부장으로 참여했고, 그 다음해 임원개선 때는 김동은이 체육부장을 맡았다. 당시 청년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이일우, 최석규, 이기춘, 김병수, 김동은, 정대여, 정종만, 오치우, 김찬조, 박용수, 김철호 등이다. 이 단체는 김동은 이기춘 외에도 포항 3·1운동에 직접 참여한 최경성, 이상갑, 정학선 등이 깊이 관여돼있었다. 영일청년회를 이끈 청년멤버들이 또 다른 포항 3·1운동의 주력 세력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초대임원 중 덕육부장을 역임한 김복출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남산정교회에서 전도활동을 했다. 이후 포항교회로 파송되어 전도를 했고, 포항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운동부장 이기춘은 동아일보 영일지국과 포항분국에서 기자로서 활동했다. 이와 같이 포항면의 3·1운동은 포항교회와 사립 영흥학교 교사들, 그리고 김동은, 이상갑 등 청년들의 주도하에 3월 11일과 12일 양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던 것이다.포항교회와 사립 영흥학교는 포항면 3·1운동 진원지로서 포항 3·1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었지만, 3·1운동 후 일제로부터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다. 영흥학교 교사였던 장운환과 이기춘은 형기 종료 후 일제의 등쌀에 못 이겨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송문수도 한때 이봉학과 같이 만주로 가 만주 봉천성 일대에 피해 있다가 귀국한 후로는 흥해청년회 창립에 관여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봉학은 출옥 후 대구시 태평로 1가 5의3번지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포항동으로 돌아와 살다가 1974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최경성은 옥고를 치른 후 포항으로 돌아와 1927년 7월 22일 신간회 영일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31년 사립영흥학교의 존폐문제가 대두되자 교장으로서 면민들의 적극적인 성원을 호소하고, 1944년 3월 포항유치원을 창설하여 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4월, 3·1동지회 부회장, 1955년 5월에는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오로지 나라와 향토를 위한 교육,독립,사회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했다. 잡화상으로 재산을 모아 사립영흥학교와 1930년 전후 포항교회 건물을 세울 때 많은 기부를 하였고, 말년에는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후 교회 사감 사택에서 지내며 교회의 온갖 일을 맡아 하다가 대구의 양아들 집으로 옮겨가고는 소식이 끊어졌다.송문수는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10월 10일 흥해중앙교회로 이적(移積)하였고, 1921년 2월 흥해 신명학교 교감으로 선출되었다. 학교 운영경비를 투자하며 학교를 유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이봉학은 옥고를 치른 후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그 외에도 포항 3·1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알려진 사람들로는 이상갑과 정학선 등이 있다. 이상갑은 영일군 포항읍 출신으로 일찍이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된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1925년 8월에 영일청년회, 그해 10월에 영일청년연맹에서 활동하다가 이 무렵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포항 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경북 영일 출신으로 1920년 6월경부터 영일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정학선(1896~?)은 1924년 일본 도쿄에서 최원택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1925년 10월경 포항에서 이상갑, 이재우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포항 야체이카를 결성한 이후 사회주의 운동으로 노선을 바꾼 사람이다.◇포항의 3·1운동 유적지행정동인 포항 중앙동은 중앙동·신흥동·남빈동·상원동·여천동·대흥동·덕수동·덕산동·동빈동 등의 법정동으로 이뤄져 있다. 글자 그대로 포항시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포항역사의 근원이다. ‘포항’이란 지명도 1731년 이곳 대흥동에 세곡(稅穀)을 수송·보관하는 포항창진(浦項倉鎭)이 설치됨으로 인해 생겨났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포항 중앙동 일대에는 포항 3·1만세운동의 근원지인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의 구건물·포항소망교회)터와 그 교회에서 설립한 영흥학교 터, 만세시위를 벌인 포항장터, 일본인의 집단주거지 및 상업용 시설 등 3·1운동 유적지가 있다.1934년경 포항교회를 새로 지을 무렵이었다. 그 장소에 있던 기존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예배당 마루를 뜯어내자 마루 밑에서 1919년 3·1운동 당시 사용됐다고 추정되는 다량의 태극기와 악기 등이 나왔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 순사들의 서슬이 퍼런 시절이라 드러내지 못하고 없애버렸다고 한다.1919년 3월 11일 3·1운동의 시위 장소였던 포항장터는 대흥동에 있었다. 현재로 치면 그 위치는 중앙상가 부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조선시대 칠성강 북서쪽 대흥산 앞에 마을이 형성되어 대흥리로 부르다가 포항창진이 설치되면서 부락명이 포항리로 되었다. 이 동네에 매월 1일과 6일에 포항장이 형성되었다.3·1운동의 유적지로 일본인들의 가옥과 건물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본인들이 주인 행세하며 거주하던 시내 한복판에서 포항사람들이 간 크게도 나보란 듯이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다.1901년 가을에 거래 차 포항에 오게 된 일본인 나카다니 다케사부로(中谷竹三郞)의 회고담에 의하면 그가 이주할 당시 포항 일대(대흥동을 중심으로 한 시내지역)의 한국인 호수는 120~130호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903년 일본 돗토리현(鳥取縣)의 오쿠다구(奧田龜) 삼형제가 처음으로 지예망(地曳網)을 가지고 출어한 이후 1904년 일본과의 통어(通漁)조약이 체결되면서부터 일본어민의 통어 및 이주자가 증가했다. 1905년 초에는 곡물, 해산물 무역을 하는 오카모토 리하치(岡本利八)·이와사 히로이치(岩佐廣一)·오카모토 시로스케(岡本四郞助)를 비롯한 6∼7명의 일본인들이 선두주자로 포항에 왔으며 그 해 말에는 일본인 약 20명이 포항으로 이주했다. 일본인 이주 숫자는 해가 바뀔수록 점점 많아졌다. 그들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난 이유는 일본 정부의 이주정책 때문이었다. 1905년 통감부통치가 실시된 후 일본 정부는 일본어민들을 설득하여 한국으로 단체 이주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상준 시민기자

2019-02-10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들고 수백명 군중이 함께한 그 날

포항교회 부설 포항유치원 4회 졸업사진. 뒤에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는 분이 포항유치원 설립자이자 원장인 최경성씨다. 올해는 3·1 만세운동이 발발한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이를 기념해 경상북도는 독립운동을 이끈 경북인의 역할을 재조명하는데 적극 나선다고 하고, 포항시에서도 100주년 및 시승격 70주년 기념행사를 내실 있게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국권회복을 위한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시민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하는 의도는 칭찬할만하다.포항권(당시 영일군)의 3·1 만세운동은 경북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인 1919년 3월 11일 포항장날을 기해 일어났다.이 시위는 3월 12일까지 계속되다가 퍼져나가 3월 22일 청하장터, 3월 27일 송라 대전리 두곡숲, 4월 1일 연일·동해·장기·오천·대송·연일·달전, 4월 2일 기계·죽장·신광·청하·송라·흥해 등 각 면·동으로 확산됐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하면 포항권의 3·1운동은 시위 횟수가 9회이고, 참가 연인원은 2천900명이며, 사망자가 40명, 부상자가 380명, 피검자가 320명으로 집계되어 있다.이는 전국적으로 봐도 결코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포항의 3·1운동이 이제까지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포항 3·1운동의 실체를 시민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다음으로 유적지가 있는 포항교회(구 포항제일교회)와 시위 장소였던 중앙동 일대의 역사적 장소성에 대한 중요성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1운동은 전국 곳곳서 해당지역의 환경과 참여자의 특성에 따라 양상을 달리해 발생했다. 따라서 지역의 특성과 연계한 사례연구가 필요하고 기념사업도 이에 맞춰 특성화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포항의 3·1운동에 대해 과연 제대로 연구하여 시민들을 상대로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또 시민들이 그런 교육을 접할 기회는 있었던가를 반성해야 한다. 매월 1일과 6일에 열리던 포항장은 사라지고 없지만 포항장터는 찾을 수 있다.일제강점기 일본인의 흔적들, 그리고 구 포항제일교회 건물도 아직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제대로 된 실태조사를 해 이들 유적들과 연계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어떨까.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던 중앙동 한복판에서 경북 최초로 3·1운동을 일으킨 지역성을 살린 역사적 의미를 되찾고, 역사적 공간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역사체험 콘텐츠를 개발하여 활용한다면 호국문화도시의 이미지를 한층 제고할 수 있고, 지역 화합과 발전에도 이바지 할 것이다. ◇포항 3·1운동의 전개과정과 참여자포항면의 3·1운동은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와 포항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영흥학교 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포항교회는 1905년 5월에 설립되었지만 3·1운동 당시 건물을 철거되고 1934년에 건립된 교회 건물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이 교회는 일찍이 대구 남성정교회를 설립한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안의와(본명은 제임스 E. 애덤스·James Edward Adams)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로서 대구 3·1운동을 이끈 남성정교회와 같은 계파의 교회이다.남성정교회 목사인 이만집 등은 같은 선교사가 개척한 포항교회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동참할 인물들을 물색하다가 포항교회 장로 최경성과 송문수를 영입하였다. 최경성은 이미 20세가 되던 1903년에 남성정교회에 입신(入信)하였다. 2년 후인 1905년 포항으로 이사하게 됨에 따라 포항교회로 입적(入籍)하였다. 때문에 이만집과는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송문수는 19세에 포항교회에 입신(入信)하였는데, 특히 1913년 봄에는 기독교 장로파 주최의 대구성경학교를 졸업하였으므로 역시 이만집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그래서 최경성과 송문수는 함께 대구의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이 주동자가 되어 포항의 3·1운동을 이끌게 된다.1911년 11월 1일 포항교회 교인들은 최경성 장로를 중심으로 소중한 우리말과 우리문화를 지키고 가르치기 위하여 영흥학교라는 근대식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의 교사들 역시 포항의 3·1운동을 이끈 주역들이다.포항면 3·1운동은 일제 강점기 때 작성된 송문수 등의 이른바 ‘포항면의 3·1운동’ 관련 판결문을 분석하면 전개과정이 재구성된다. 그 내막을 살펴보면, 포항동에 거주하는 송문수는 같은 교회 장로인 최경성과 같이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있었던 대구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최경성은 현장에서 검거되어 구속되었고, 송문수는 잡히지 않고 3월 9일경 포항으로 돌아왔다. 그가 포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외 1명이 송문수의 집으로 찾아가 그에게 대구부에서의 시위운동 상황을 물었다. 이기춘은 같은 교회 교인이면서 영흥학교 교장이었던 백영옥의 사위였다. 이봉학은 영흥학교 교사로서 송문수의 처남이다. 장운환은 같은 교회 영수(領袖)이면서 영흥학교 교사로 있었다. 송문수는 이들을 포항동 남쪽 끝의 인적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애국지사들이)조선의 독립을 계획하고 현재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운동에 관한 서면을 제출하려고 이태왕(고종황제를 말함)으로부터 날인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이완용이가 거절하였고, 그 후 왕은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었다. 당시 경성에 있는 조선인 현모씨가 위와 동일한 취지의 서면을 작성하여 예수교 교회의 날인을 받아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한 결과 동 회의에서 오는 3월 28일까지 조선인민이 소요하고 있으면 (세계 만방이) 조선의 독립을 허용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였다.그러면서 송문수는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을 설득하여 포항에서도 대구부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시위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다.송문수의 말을 들은 이들은 즉시 같이 동참하겠다고 의사를 밝히고 곧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거사일은 포항장날인 1919년 3월 11일로 잡았다. 이기춘과 이봉학은 송문수를 만난 다음날인 10일부터 포항에서 김동은(金東殷) 외 여러 명에게 송문수로부터 들은 바를 전하고 함께 동참할 사람들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송문수가 대구에서 갖고 온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벽보첩지를 만들고, 시위 때 군중들에게 나누어줄 선전문까지 인쇄하는 등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이 일본 밀정에게 탐지되었고, 이틀만인 11일에 주동자 4명이 모두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고 말았다는 것이 판결문에 나타난 당시의 상황이다.이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보안법위반이다. 이들은 미수범임에도 이례적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송문수는 징역 6월, 이기춘·이봉학은 징역 5월, 장운환은 징역 4월의 실형을 각 선고받았다. 미수범은 모든 경우에 다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특별히 정해진 경우에만 처벌된다. 처벌하는 경우라도 그 형은 기수범보다는 감경(減輕)하는 것이 통상적임에도 이들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을 보면 그만큼 포항 3·1운동이 지역 정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판결문상에 나타난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외 1명’에서 그 ‘외 1명’이 누군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이다. 그가 일본의 밀정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고서는 주모자들이 거사일 전에 미리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리가 없고, 판결문에 적시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임에도 그 인적사항을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위 판결문은 포항의 3·1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3·1운동을 일으킨 목적이다. 파리강화회의에 단순히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한다는 주장을 펴나가는 것만으로는 호소력이 없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거국적인 비폭력, 평화적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도 원인이 되었다. 또한 신한청년당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제출한 ‘독립청원서’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오는 3월 28일까지 조선인민이 소요하고 있으면 (세계만방이 조선의)독립을 허용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소요하고 있는 까닭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라고 하여 포항에서도 만세시위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 두었다.하지만 판결문상으로만 분석하면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등은 갑자기 이 운동에 끼어들어 불과 2일 만에 모든 거사 준비를 완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치상으로도 맞지 않다. 불과 이틀 만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수백 명의 군중을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에서 작성한 ‘고등경찰요사’에서도 밝혔듯이 각지에서 일어난 3·1운동이 실행되기까지는 수일 내지 십 수 일 동안의 준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포항교회의 교인이었던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등도 최경성, 송문수와 같이 이미 이만집 등이 대구부에서 3·1운동을 준비하던 3월 4일경부터 포항교회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시위운동 계획을 세웠고, 이미 상당한 준비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다만 이들이 검거되어 일경에 조사를 받을 때 거사 모의가 사전부터 치밀히 계획된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진술하였던 것이다. 만약 사실대로 진술할 경우에는 미리 계획된 범죄로 취급되어 중한 형벌을 받게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이상준씨는 향토사학자이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회원)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겸하고 있다. 포항대학 외래교수(한국사)를 지냈으며 현재 검찰공무원(서기관)으로 재직중이다.

2019-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