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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3월11∼12일 이틀간 만세운동에 1천여 명 운집

아무튼 주동자들 중 4명은 사전에 검거됐다. 하지만 포항장날인 11일 수백 명의 군중이 장터로 운집하였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벽에 붙이며 시위행진에 돌입했다. 이날은 일본 군경의 저지로 강제해산 됐다. 하지만 12일 저녁에는 포항교회의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흩어졌던 군중들이 다시 모였다. 이날 밤, 북본동(北本洞, 현재의 중앙동) 포항교회에 모여든 신도들 수백 명은 일단 교회에 모였다가 등불을 들고 시내로 나와 만세를 부른 후 교회에서 경영하던 영흥학교 서편에 다시 모였다. 당시 포항교회는 현재의 포항시 중앙동 451번지에 있었고, 영흥학교는 포항교회 부지 안에 있었다. 교회에서 발기하여 시내를 수㎞ 행진하는 동안 이를 지켜본 시민들도 동참하여 대열이 영흥학교에 다시 모였을 때는 군중의 숫자가 1천여 명이 됐다고 한다. 이런 규모의 군중이 일시에 모인 것으로 보아 포항의 3·1운동은 송문수 등 5명 외에도 또 다른 지도세력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시일 내에 1천여 명의 군중을 모을 수는 없다. 이를 입증해주는 자료가 있다. 바로 위의 송문수 등 판결문과 3·1운동 이후에 설립된 영일청년회를 창립한 구성원들 명단이다.우선 송문수 등의 판결문 중 ‘이기춘과 이봉학은 송문수를 만난 다음날인 10일부터 포항에서 김동은(金東殷) 외 수명에게 송문수로부터 들은 바를 전하고 함께 동참할 사람들을 모집하였다’고 했다. 김동은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6월에 창립된 영일청년회에 창립멤버의 간부로 참가했다. 영일청년회는 창립 당시부터 포항 3·1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이기춘이 운동부장으로 참여했고, 그 다음해 임원개선 때는 김동은이 체육부장을 맡았다. 당시 청년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이일우, 최석규, 이기춘, 김병수, 김동은, 정대여, 정종만, 오치우, 김찬조, 박용수, 김철호 등이다. 이 단체는 김동은 이기춘 외에도 포항 3·1운동에 직접 참여한 최경성, 이상갑, 정학선 등이 깊이 관여돼있었다. 영일청년회를 이끈 청년멤버들이 또 다른 포항 3·1운동의 주력 세력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초대임원 중 덕육부장을 역임한 김복출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남산정교회에서 전도활동을 했다. 이후 포항교회로 파송되어 전도를 했고, 포항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운동부장 이기춘은 동아일보 영일지국과 포항분국에서 기자로서 활동했다. 이와 같이 포항면의 3·1운동은 포항교회와 사립 영흥학교 교사들, 그리고 김동은, 이상갑 등 청년들의 주도하에 3월 11일과 12일 양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던 것이다.포항교회와 사립 영흥학교는 포항면 3·1운동 진원지로서 포항 3·1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었지만, 3·1운동 후 일제로부터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다. 영흥학교 교사였던 장운환과 이기춘은 형기 종료 후 일제의 등쌀에 못 이겨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송문수도 한때 이봉학과 같이 만주로 가 만주 봉천성 일대에 피해 있다가 귀국한 후로는 흥해청년회 창립에 관여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봉학은 출옥 후 대구시 태평로 1가 5의3번지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포항동으로 돌아와 살다가 1974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최경성은 옥고를 치른 후 포항으로 돌아와 1927년 7월 22일 신간회 영일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31년 사립영흥학교의 존폐문제가 대두되자 교장으로서 면민들의 적극적인 성원을 호소하고, 1944년 3월 포항유치원을 창설하여 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4월, 3·1동지회 부회장, 1955년 5월에는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오로지 나라와 향토를 위한 교육,독립,사회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했다. 잡화상으로 재산을 모아 사립영흥학교와 1930년 전후 포항교회 건물을 세울 때 많은 기부를 하였고, 말년에는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후 교회 사감 사택에서 지내며 교회의 온갖 일을 맡아 하다가 대구의 양아들 집으로 옮겨가고는 소식이 끊어졌다.송문수는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10월 10일 흥해중앙교회로 이적(移積)하였고, 1921년 2월 흥해 신명학교 교감으로 선출되었다. 학교 운영경비를 투자하며 학교를 유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이봉학은 옥고를 치른 후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그 외에도 포항 3·1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알려진 사람들로는 이상갑과 정학선 등이 있다. 이상갑은 영일군 포항읍 출신으로 일찍이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된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1925년 8월에 영일청년회, 그해 10월에 영일청년연맹에서 활동하다가 이 무렵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포항 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경북 영일 출신으로 1920년 6월경부터 영일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정학선(1896~?)은 1924년 일본 도쿄에서 최원택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1925년 10월경 포항에서 이상갑, 이재우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포항 야체이카를 결성한 이후 사회주의 운동으로 노선을 바꾼 사람이다.◇포항의 3·1운동 유적지행정동인 포항 중앙동은 중앙동·신흥동·남빈동·상원동·여천동·대흥동·덕수동·덕산동·동빈동 등의 법정동으로 이뤄져 있다. 글자 그대로 포항시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포항역사의 근원이다. ‘포항’이란 지명도 1731년 이곳 대흥동에 세곡(稅穀)을 수송·보관하는 포항창진(浦項倉鎭)이 설치됨으로 인해 생겨났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포항 중앙동 일대에는 포항 3·1만세운동의 근원지인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의 구건물·포항소망교회)터와 그 교회에서 설립한 영흥학교 터, 만세시위를 벌인 포항장터, 일본인의 집단주거지 및 상업용 시설 등 3·1운동 유적지가 있다.1934년경 포항교회를 새로 지을 무렵이었다. 그 장소에 있던 기존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예배당 마루를 뜯어내자 마루 밑에서 1919년 3·1운동 당시 사용됐다고 추정되는 다량의 태극기와 악기 등이 나왔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 순사들의 서슬이 퍼런 시절이라 드러내지 못하고 없애버렸다고 한다.1919년 3월 11일 3·1운동의 시위 장소였던 포항장터는 대흥동에 있었다. 현재로 치면 그 위치는 중앙상가 부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조선시대 칠성강 북서쪽 대흥산 앞에 마을이 형성되어 대흥리로 부르다가 포항창진이 설치되면서 부락명이 포항리로 되었다. 이 동네에 매월 1일과 6일에 포항장이 형성되었다.3·1운동의 유적지로 일본인들의 가옥과 건물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본인들이 주인 행세하며 거주하던 시내 한복판에서 포항사람들이 간 크게도 나보란 듯이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다.1901년 가을에 거래 차 포항에 오게 된 일본인 나카다니 다케사부로(中谷竹三郞)의 회고담에 의하면 그가 이주할 당시 포항 일대(대흥동을 중심으로 한 시내지역)의 한국인 호수는 120~130호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903년 일본 돗토리현(鳥取縣)의 오쿠다구(奧田龜) 삼형제가 처음으로 지예망(地曳網)을 가지고 출어한 이후 1904년 일본과의 통어(通漁)조약이 체결되면서부터 일본어민의 통어 및 이주자가 증가했다. 1905년 초에는 곡물, 해산물 무역을 하는 오카모토 리하치(岡本利八)·이와사 히로이치(岩佐廣一)·오카모토 시로스케(岡本四郞助)를 비롯한 6∼7명의 일본인들이 선두주자로 포항에 왔으며 그 해 말에는 일본인 약 20명이 포항으로 이주했다. 일본인 이주 숫자는 해가 바뀔수록 점점 많아졌다. 그들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난 이유는 일본 정부의 이주정책 때문이었다. 1905년 통감부통치가 실시된 후 일본 정부는 일본어민들을 설득하여 한국으로 단체 이주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상준 시민기자

2019-02-10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들고 수백명 군중이 함께한 그 날

포항교회 부설 포항유치원 4회 졸업사진. 뒤에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는 분이 포항유치원 설립자이자 원장인 최경성씨다. 올해는 3·1 만세운동이 발발한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이를 기념해 경상북도는 독립운동을 이끈 경북인의 역할을 재조명하는데 적극 나선다고 하고, 포항시에서도 100주년 및 시승격 70주년 기념행사를 내실 있게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국권회복을 위한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시민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하는 의도는 칭찬할만하다.포항권(당시 영일군)의 3·1 만세운동은 경북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인 1919년 3월 11일 포항장날을 기해 일어났다.이 시위는 3월 12일까지 계속되다가 퍼져나가 3월 22일 청하장터, 3월 27일 송라 대전리 두곡숲, 4월 1일 연일·동해·장기·오천·대송·연일·달전, 4월 2일 기계·죽장·신광·청하·송라·흥해 등 각 면·동으로 확산됐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하면 포항권의 3·1운동은 시위 횟수가 9회이고, 참가 연인원은 2천900명이며, 사망자가 40명, 부상자가 380명, 피검자가 320명으로 집계되어 있다.이는 전국적으로 봐도 결코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포항의 3·1운동이 이제까지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포항 3·1운동의 실체를 시민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다음으로 유적지가 있는 포항교회(구 포항제일교회)와 시위 장소였던 중앙동 일대의 역사적 장소성에 대한 중요성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1운동은 전국 곳곳서 해당지역의 환경과 참여자의 특성에 따라 양상을 달리해 발생했다. 따라서 지역의 특성과 연계한 사례연구가 필요하고 기념사업도 이에 맞춰 특성화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포항의 3·1운동에 대해 과연 제대로 연구하여 시민들을 상대로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또 시민들이 그런 교육을 접할 기회는 있었던가를 반성해야 한다. 매월 1일과 6일에 열리던 포항장은 사라지고 없지만 포항장터는 찾을 수 있다.일제강점기 일본인의 흔적들, 그리고 구 포항제일교회 건물도 아직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제대로 된 실태조사를 해 이들 유적들과 연계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어떨까.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던 중앙동 한복판에서 경북 최초로 3·1운동을 일으킨 지역성을 살린 역사적 의미를 되찾고, 역사적 공간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역사체험 콘텐츠를 개발하여 활용한다면 호국문화도시의 이미지를 한층 제고할 수 있고, 지역 화합과 발전에도 이바지 할 것이다. ◇포항 3·1운동의 전개과정과 참여자포항면의 3·1운동은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와 포항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영흥학교 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포항교회는 1905년 5월에 설립되었지만 3·1운동 당시 건물을 철거되고 1934년에 건립된 교회 건물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이 교회는 일찍이 대구 남성정교회를 설립한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안의와(본명은 제임스 E. 애덤스·James Edward Adams)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로서 대구 3·1운동을 이끈 남성정교회와 같은 계파의 교회이다.남성정교회 목사인 이만집 등은 같은 선교사가 개척한 포항교회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동참할 인물들을 물색하다가 포항교회 장로 최경성과 송문수를 영입하였다. 최경성은 이미 20세가 되던 1903년에 남성정교회에 입신(入信)하였다. 2년 후인 1905년 포항으로 이사하게 됨에 따라 포항교회로 입적(入籍)하였다. 때문에 이만집과는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송문수는 19세에 포항교회에 입신(入信)하였는데, 특히 1913년 봄에는 기독교 장로파 주최의 대구성경학교를 졸업하였으므로 역시 이만집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그래서 최경성과 송문수는 함께 대구의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이 주동자가 되어 포항의 3·1운동을 이끌게 된다.1911년 11월 1일 포항교회 교인들은 최경성 장로를 중심으로 소중한 우리말과 우리문화를 지키고 가르치기 위하여 영흥학교라는 근대식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의 교사들 역시 포항의 3·1운동을 이끈 주역들이다.포항면 3·1운동은 일제 강점기 때 작성된 송문수 등의 이른바 ‘포항면의 3·1운동’ 관련 판결문을 분석하면 전개과정이 재구성된다. 그 내막을 살펴보면, 포항동에 거주하는 송문수는 같은 교회 장로인 최경성과 같이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있었던 대구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최경성은 현장에서 검거되어 구속되었고, 송문수는 잡히지 않고 3월 9일경 포항으로 돌아왔다. 그가 포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외 1명이 송문수의 집으로 찾아가 그에게 대구부에서의 시위운동 상황을 물었다. 이기춘은 같은 교회 교인이면서 영흥학교 교장이었던 백영옥의 사위였다. 이봉학은 영흥학교 교사로서 송문수의 처남이다. 장운환은 같은 교회 영수(領袖)이면서 영흥학교 교사로 있었다. 송문수는 이들을 포항동 남쪽 끝의 인적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애국지사들이)조선의 독립을 계획하고 현재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운동에 관한 서면을 제출하려고 이태왕(고종황제를 말함)으로부터 날인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이완용이가 거절하였고, 그 후 왕은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었다. 당시 경성에 있는 조선인 현모씨가 위와 동일한 취지의 서면을 작성하여 예수교 교회의 날인을 받아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한 결과 동 회의에서 오는 3월 28일까지 조선인민이 소요하고 있으면 (세계 만방이) 조선의 독립을 허용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였다.그러면서 송문수는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을 설득하여 포항에서도 대구부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시위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다.송문수의 말을 들은 이들은 즉시 같이 동참하겠다고 의사를 밝히고 곧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거사일은 포항장날인 1919년 3월 11일로 잡았다. 이기춘과 이봉학은 송문수를 만난 다음날인 10일부터 포항에서 김동은(金東殷) 외 여러 명에게 송문수로부터 들은 바를 전하고 함께 동참할 사람들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송문수가 대구에서 갖고 온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벽보첩지를 만들고, 시위 때 군중들에게 나누어줄 선전문까지 인쇄하는 등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이 일본 밀정에게 탐지되었고, 이틀만인 11일에 주동자 4명이 모두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고 말았다는 것이 판결문에 나타난 당시의 상황이다.이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보안법위반이다. 이들은 미수범임에도 이례적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송문수는 징역 6월, 이기춘·이봉학은 징역 5월, 장운환은 징역 4월의 실형을 각 선고받았다. 미수범은 모든 경우에 다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특별히 정해진 경우에만 처벌된다. 처벌하는 경우라도 그 형은 기수범보다는 감경(減輕)하는 것이 통상적임에도 이들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을 보면 그만큼 포항 3·1운동이 지역 정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판결문상에 나타난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외 1명’에서 그 ‘외 1명’이 누군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이다. 그가 일본의 밀정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고서는 주모자들이 거사일 전에 미리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리가 없고, 판결문에 적시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임에도 그 인적사항을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위 판결문은 포항의 3·1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3·1운동을 일으킨 목적이다. 파리강화회의에 단순히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한다는 주장을 펴나가는 것만으로는 호소력이 없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거국적인 비폭력, 평화적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도 원인이 되었다. 또한 신한청년당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제출한 ‘독립청원서’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오는 3월 28일까지 조선인민이 소요하고 있으면 (세계만방이 조선의)독립을 허용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소요하고 있는 까닭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라고 하여 포항에서도 만세시위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 두었다.하지만 판결문상으로만 분석하면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등은 갑자기 이 운동에 끼어들어 불과 2일 만에 모든 거사 준비를 완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치상으로도 맞지 않다. 불과 이틀 만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수백 명의 군중을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에서 작성한 ‘고등경찰요사’에서도 밝혔듯이 각지에서 일어난 3·1운동이 실행되기까지는 수일 내지 십 수 일 동안의 준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포항교회의 교인이었던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등도 최경성, 송문수와 같이 이미 이만집 등이 대구부에서 3·1운동을 준비하던 3월 4일경부터 포항교회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시위운동 계획을 세웠고, 이미 상당한 준비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다만 이들이 검거되어 일경에 조사를 받을 때 거사 모의가 사전부터 치밀히 계획된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진술하였던 것이다. 만약 사실대로 진술할 경우에는 미리 계획된 범죄로 취급되어 중한 형벌을 받게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이상준씨는 향토사학자이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회원)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겸하고 있다. 포항대학 외래교수(한국사)를 지냈으며 현재 검찰공무원(서기관)으로 재직중이다.

2019-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