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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치는 썩어도

조현태 수필가 필자 카톡에 올라온 아름다운 글이 있다. 좀 더 널리 공개하고픈 욕심이 발동한다. 지금 그 내용을 지면에 소개하려 한다.인터넷과 SNS를 통해 컴퓨터를 판매하고 있는 사장님이 경험한 이야기다.며칠 전 사장님이 어떤 아주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은 서울에서 할머니 보호를 받으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단다. 전화를 건 아주머니는 지방에서 따로 생활하는 중이지만 어린 딸에게 중고 컴퓨터라도 구입해 주고 싶어서 전화했단다. 열흘쯤 지나서 쓸 만한 컴퓨터가 나타났다. 아이가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서울 주소로 컴퓨터를 싣고 갔다. 다세대 건물 단칸방에 부업 일거리를 잔뜩 쌓아놓은 걸로 봐서 구차한 형편인가 보았다. 컴퓨터를 조립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보고 환호하며 춤추듯 좋아했다. 할머니는 손녀 어깨를 토닥이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네 엄마가 사 준 컴퓨터라고 설명했다.사장님이 설치를 마치고 큰길에 나오니 정류소에 그 아이가 학원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슴없이 학원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고 학원 방향으로 십분 쯤 갔을 때 아이가 갑자기 화장실이 너무 급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화장실이 있을 법한 가게 앞에 차를 세워주자 사장님더러 그냥 가라면서 황급히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 무심코 아이가 앉았던 자리를 보는 순간 검붉은 핏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첫 생리인 듯했다. 아마 속옷과 바지까지 버렸을 것이다. 당황하며 급하게 뛰어내린 아이 얼굴이 겹쳤다. 당장 화장실에 혼자 가서 어떻게 할까. 아이가 화장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첫 생리를 엄마 없이 겪어야 하는 아이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사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울상 짓고 있을 아이가 떠올라 마음이 급해졌다. 속옷과 생리대라도 구입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다녔으나 사장님이 해결할 사안이 아니었다. 바로 아내에게 전화했다. 즉시 택시 타고 오면서 전화하라고 일렀다. 아내는 위급한 상황을 짐작하고 택시 안에서 사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어떤 물품들을 구해야 하는지 남편에게 차분하게 지휘했다. 드디어 도착한 아내가 남편이 구입한 물품들을 가지고 그 화장실로 갔다. 잠겨있는 화장실 앞에서 “얘야 컴퓨터 아저씨네 아줌마다. 안에 있니?” 울먹이며 겨우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가 잘 처리해주었다. 평범한 가정이라면 축하와 함께 조촐한 파티라도 벌였을 터인데 낯선 화장실에서 혼자 얼마나 곤란하고 무서웠을까 콧날이 시큰해진다. 다시 남편에게 꽃도 한 다발 사라고 전화한다. 눈이 부어서 머쓱해있는 아이에게 꽃다발을 안겨 보내고 돌아오다가 아내가 말했다. 컴퓨터 값 22만원을 되돌려주고 싶지만 중고 컴퓨터 값이 내렸다고 둘러대고 10만원이라도 할머니께 갖다 주자는 통 큰 제안을 했다. 그날 밤 늦은 시각에 아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고 컴퓨터 구입한…”말을 잇지 못하고 목이 매여 울먹이는 소리만 들렸다. 사장님도 아내도 아무 말 못하고 충혈된 눈에서 따뜻하고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정치는 썩어도 우리 사회가 아직은 괜찮다는 카톡 메시지다.

2022-09-20

대통령 곁에 어쩌다 있게 된 탓일까(?)

이명균 창원대 명예교수 정치경험이 거의 없이 떠밀려 대통령 되신 분은 국정 전반에 걸쳐 모르는 부분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정부의 주요 정책들이 ‘공정과 상식, 법과 원칙’에 맞는지를 대통령이 잘 챙기면 된다. 그러나 각 부처장관들은 밤새워 연구하고 배워서라도 부처 업무 특성들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파악하여야 한다.최근에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방경제회생과 인구분산 등 지역균형발전정책으로 현 대통령 임기 내에 대기업 3~5곳과 주요 대학, 특목고의 지방이전 추진을 밝혔다고 보도됐다. 해당 장관은 “젊은이들이 지방으로 가려면 대기업이 내려가야 하며, 공공기관 이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대기업이 지방으로 가기 위해선 대기업에 인재를 공급할 주요 대학과 대기업 직원 자녀들이 공부할 특목고를 세트로 묶어 같이 보내야 한다”고 하였단다. 장관은 또한 “20대 대기업의 본사나 공장,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강대 등 주목을 끌 만한 주요대학, 특목고를 함께 내려 보내야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구체적 언급까지 하였단다.기업이란 사회의 생산단위로서 각 기업마다 특정한 영역이나 분야에서 사람들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판매하거나 그에 따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제활동 조직체이다. 반면에 학교란 대학이든 고등학교이든 사회의 전 분야에서 활동할 다양한 인재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러한 학교를 특정 기업에 인재를 공급할 기관으로 간주하여 세트로 묶어 지방으로 보내는 정책을 추진하겠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대학을 특정 분야의 직업훈련소 정도로 생각하거나 특목고를 특정 대기업 직원들을 위한 사설학원처럼 여긴다는 말인가? 장관이라는 분이 기업도 제대로 이해 못할 뿐만 아니라 학교를 옛 서당 정도로 생각하는 수준 같다.기업유치를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함께 노력하여 해당 기업이 그 지역에서 활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여건을 만들어주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학교란 극히 일부 전문분야를 제외하고는 특정한 지리적 여건과 학생들의 교육과는 상관성이 별로 없다. 학교는 어디에 위치하든 교육을 열심히 잘 시키면 될 것이며, 학부모들의 거주지가 멀리 떨어진 경우는 기숙사제도를 잘 운영하면 된다. 정부의 정책수립과 이행을 여행사의 여행 상품판매나 마트의 세일행사처럼 세트로 묶어서 추진하겠다니 참 희한한 발상이다. 백보 양보해서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충심 끝에 떠오른 생각이라 간주하더라도 관련 부처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먼저 들은 뒤에 언급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구상한 정책에 대한 타당성이나 가능성을 짚어보지도 않고 언론 인터뷰에서 그것도 현 대통령 임기 내에 추진하겠다고 먼저 말했다니 무슨 영웅 심리나 조급증에서 나온 발언인가 싶다.얼마 전 교육부 장관이 대통령 업무보고 사전 브리핑에서 ‘만 5세 초등학교 입학’에 관한 내용을 섣불리 발표했다가 35일 만에 사퇴하였다. 어쩌다 여당으로, 어쩌다 장관으로 보이는 모습들 때문에 대통령이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2022-09-20

돈쭐내드립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자극하는 짜장면. 내가 사는 동네에 ‘복무춘’이라는 오래된 중국집이 있다. 나는 매일 그 집 앞을 지나간다. 춘장 볶는 냄새, 양파와 돼지고기가 커다란 웍에서 지글지글 볶아지는 소리, 달콤새콤한 탕수육 소스 향기, 윤기가 반들반들한 짜장면과 얼큰해 보이는 짬뽕… 시각과 후각, 청각을 모두 사로잡아 유혹하는데, 미치겠다. 다른 음식들도 침샘을 자극하지만 짜장면만큼 강력하진 않다. 짜장면은 내 소울 푸드다.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집에 들어갔다. 짜장면 한 그릇 시켜 맛있게 먹었다. ‘역시 이 맛이야’, 계산하려는데, 카드 단말기가 고장 났다고 한다. 아주머니께서 그냥 다음에 갖다 달라신다. 아니, 요즘 어떤 세상인데. 금방 은행 들러 현금 뽑아 갖다 드렸다. 삐거덕 소리를 내는 낡은 철문을 열고 나오자 옛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어릴 때 동네에 영빈관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엄마한테 듣기로는 아버지 친구분이 하시는 집이었다. ‘아빠 친구 식당이니까 짜장면 한 그릇쯤 그냥 주겠지’ 싶어서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친구랑 그 집엘 가 “저 가방공장 아들인데요” 했더니 정말 공짜로 먹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그랬다. 하루는 친구들 잔뜩 데리고 가 “나만 믿어” 큰소리치고 짜장면 한 그릇씩 먹였다. 어깨가 으쓱했다.이제 와 기억하니 내가 “가방공장 아들”이라고 했을 때 주인 내외분은 어리둥절해 했던 것 같다. “누구라고?” 한참 골똘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같다’가 아니라 ‘다’, 확실하다. 그 시절 동네엔 영빈관 말고도 신흥원, 양자강 등 다른 집들도 있었으니, 아마 엄마가 다른 집과 착각했거나 영빈관 주인께서 아버지와 친우관계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맹랑한 소년의 터무니없는 공짜 주문이었지만, 내가 올 때마다, 심지어 친구들까지 데리고 오는 날에도 “곱빼기로 줄까”, “밥도 줄까”, “더 먹어라” 하셨다. 자식 같아 귀엽고 한편으론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정이 있던 시절이었다.요즘 온라인에서 ‘돈쭐’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돈’과 ‘혼쭐’의 합성어인데, “돈으로 혼쭐을 내준다”는 의미다. 결식아동이나 독거노인들을 돕는 등 남몰래 선행을 해온 사실이 알려지거나 정직한 양심으로 오랜 세월 장사했음에도 건물주의 갑질 등 횡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른바 ‘착한 가게’들을 찾아가서 매상을 잔뜩 올려주는 게 ‘돈쭐’이다.한 학생이 치킨이 먹고 싶다며 떼 쓰는 어린 동생 손을 잡고, 가진 돈 전부인 5천원을 꼭 쥔 채 치킨집 앞을 서성였다. 장사가 안 돼 가게 앞에 나와 밤하늘을 보며 한숨 쉬던 치킨집 사장님은 대번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5천원어치만 먹을 수 있냐고 묻는 형제에게 가게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치킨을 푸짐하게 내줬다. 코로나로 매출이 반토막 나 월세마저 밀렸지만, 돈은 받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알사탕을 쥐어줘 보냈다. 그 후로 초등학생 동생은 몇 번 더 가게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미담은 고등학생인 형이 치킨집 본사로 편지를 보내 알려지게 됐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살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중이라고 한다. 사연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가게 상호와 위치를 공유해 그야말로 잔뜩 ‘돈쭐’을 내줬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중학교 교복을 입으면서부터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수년째 지방 어딘가에, 엄마는 식당에, 포장지 공장에, 인력사무소에. 그래서 나는 학교 마치면 할아버지 할머니 도와 폐지 줍고, 혼자 사당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 던지고 공 차고, 혼자 철가방 들고 분식집 오토바이 배달하고 그랬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아무 데서나 자고 어디서 싸우다 두드려 맞고 그랬다. 술 취해 비틀거리는 새벽길에 교회 지하 기도실에 가 혼자 기도했다. 가족들이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해달라고.이젠 그 비틀거리던 날들도 다 추억이 됐지만, 짜장면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 향기롭다. IMF 사태로 아버지 가방공장 망하고, 얼마 안 가 영빈관도 없어졌다. 기억난다. 춘장 볶는 냄새가 달큼했던, 사진관 맞은편 속옷가게 건물 그 지하 식당. 엄마가 돈 빌렸다는 계란집을 피해서 일부러 빙 돌아 숨어 들어가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이 있던 그 중국집. 지금도 어디선가 장사하고 계시다면, 그분들을 찾아가 돈쭐을 내드리고 싶다.

2022-09-20

가을비와 감자수프

가을비가 내린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비릿한 물의 냄새가 난다. 올해는 비와 관련된 사고가 많았으므로 젖은 아스팔트나 짙게 물든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그저 창문에 달라붙은 빗방울이 한 곳에 오래 맺혀 있는 장면을 응시한다. 가늘고, 연약하고, 지나치게 투명한 비. 세상 위로 두터운 솜이불이 덮인 듯 침울하고 잠잠하다.변화하는 계절에 앞서 해야 하는 몇 가지의 일이 있다. 첫째는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집에 외풍 새지 않도록 창문 보수 공사를 해야 한다.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PVC 재질의 얇은 투명막을 창문 표면에 붙이고, 틈 사이사이엔 ‘뽁뽁이’라 부르는 롤에어캡을 촘촘히 두른다. 그리고 지난 봄 한 쪽에 잘 개켜두었던 두꺼운 천을 가져와서 그 위를 덮는다. 그럼 투명막과 뽁뽁이가 가려져서 훨씬 보기 좋다.간단 보수가 끝났다면 옷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가을 옷을 꺼낸다. 세탁해야 하는 옷과 그만 버려야 하는 옷들을 분류한다. 지나치게 상태가 좋은 건 중고 장터에 팔기도 하고, 영 상태가 엉망인건 버리기도 한다.그렇게 부지런히 집 안을 움직이다보면 어느새 금방 배고파진다. 가을 더위는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금새 열이 오르고 금방 식는다.근사한 식사를 차리기엔 미처 체력이 도와주지 않고, 그렇다고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엔 아쉬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감자를 얇게 썰어 버터와 우유를 넣고 푹 끓여내는 감자 수프다. 감자의 은은한 단맛과 부드럽고 느끼한 크림의 맛이 어우러져 단짠딴짠한 맛이 잘 살아있는데다 따스한 목넘김이 좋은 요리다.재료 준비는 간단하다. 버터 한 두어 조각, 양파, 감자, 우유, 크림, 체다 치즈 정도만 있으면 된다. 중간 크기의 감자 2-3개를 찬 물에 잘 씻은 다음 얇게 썬다. 한손에 단단하게 잡히는 감자의 촉감도 좋지만, 무엇보다 울퉁불퉁한 감자를 찬 물에 부드럽게 흘려 흙탕물을 씻겨 낼 때의 기분이 좋다.짙은 갈색의 껍질을 벗겨내 하얗고 미끌미끌한 감자의 속을 드러내는 과정 또한 케케묵은 반복의 일상을 반짝이게 닦아내는 기분이 든다.재료 준비가 다 됐다면 준비한 냄비에 버터를 넣고 녹힌 뒤 양파 한 개를 썰어 넣는다. 양파의 단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썰어둔 감자와 종이컵 기준 물 2컵을 넣고 10분 정도 익힌다. 감자가 쉽게 으깨질 정도로 익었다면 우유 2컵 반과 생크림 2컵을 넣는다.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우유’와 ‘생크림’이다. 우유나 크림 대신 물을 넣으면 특유의 고소한 풍미와 감칠맛이 줄어든다. 불을 끄고 한 김 식힌 뒤에 끓인 감자를 믹서기에 넣어 간다.나는 스프에 감자가 어느 정도 씹히는 걸 좋아해서 제형을 봐가며 적당히 갈아준다. 간 감자 수프를 다시 냄비에 담고 모짜렐라 치즈 2장을 넣어 2분 정도 더 끓이면 완성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후추나 파슬리를 뿌려 먹거나, 빵 두어 조각을 곁들이면 훌륭한 식사가 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이렇게 만든 감자수프는 마트에서 파는 수프 팩과는 또 다른 맛이다. 물론 손이 많이 가고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만들어 먹는 수프는 재료 본연의 맛이 하나하나 살아 있다. 게다가 보글보글 수프가 끓을 때의 소리와 냄새는 백 마디의 여러 말보다 따스한 위로가 되어 다가온다. 잘 만들어진 감자 수프가 그릇에 담긴 모양새는 순하고도 무해해서 절로 긴장이 풀어진다.가을은 부엌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계절이다. 재료를 물에 씻고 다듬으며 내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럼 여름 내내 멈추어 있던 주방을 다시금 닦고 빛내어 윤택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이 된달까.그간 소음으로 느껴지던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조금씩 새곤 했던 수도꼭지의 물방울 소리, 인상 찌푸려졌던 뜨거운 불이 이제 더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겨울을 대비해 음식을 구비해 두는 가을 다람쥐처럼, 생활의 애정과 부지런함을 품고선 가을의 한복판으로 나서 본다.

2022-09-20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Ⅰ>

오빠. 나. 이 집 비우려고. 넓은 집에 혼자 지내려 하니 겁도 나고, 이 집에 남아 있을 명분도 없고. 오빠. 나 어떻게 해? 부른 배를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거야?안나가 노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노마의 답을 기다리며 안나는 자신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었다. 엄마는 슬리퍼로 등짝을 후려칠 것이고, 아빠는 돌아 앉아 담배만 피워댈 것이 분명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소파로 몸을 옮겨 등을 기댔다.조금만 더 기다려봐. 필립 형님이 방법을 만들어 본다고 했어. 약속을 했으니 뭔가 말이 있겠지.노마에게서 답이 왔다.몰라. 이번 주까지 기다려보고 별말 없으면 나갈 거야.안나는 노마에게 답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덮었다. 필립 형님?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다음날 필립의 아내가 왔다.-우리 집 양반이 애 낳을 때까지 우리 집에 들어와 있으라 그러시네요. 그 몸으로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좀 그렇고, 이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것도 그렇고. 나더러 임산부 케어를 하랍니다.필립의 아내가 안나를 보며 말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안나를 챙겨주던 그녀였다.-그래도 될지?안나가 물었다.-몸이 좀 힘들겠어. 친정에 돌아가 봐도 별수 없을 것이고. 싫은 소리만 듣겠지. 간단하게 중요한 짐만 싸요. 오늘 같이 집으로 들어가게. 짐은 내일 사람들 보내서 옮기면 되니까. 내가, 마음이 왔다 갔다 해. 그러니까 빨리 가야 해요.친정이라는 그녀의 말에 안나는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를 어째, 이를 어째. 안나는 눈물을 흘렸고 필립의 아내는 한숨을 내뱉었다.-아들이래요.어깨를 들썩이던 안나가 울음 끝에 말했다.필립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회화나무를 마주하고 아내가 서 있었다.-여기서 뭐해?필립이 아내의 옆에 나란히 서며 물었다.-사내아이래요.-무슨 말이야?-안나 씨 뱃속의 아기. 이번에 산부인과 가니 말을 해주더래요. 아버님은 벌써 알고 계셨다 그러네요. 아버님이 다른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을 하셨다 하네요. 안나 씨한테조차. 그래도 혹시나 잊어버리셨을까 싶어 지금 아버님께 알려드리는 중이에요. 당신이 있는데도 사내아이를 기다리셨잖아요. 대놓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내가 손자를 낳지 못한 것을 많이 섭섭해 하셨어요. 살아계셨으면 무척 좋아하셨겠지요. 그래서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안나 씨 데리고 왔어요. 일단 애 낳을 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있자고 했어요.필립의 아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목소리가 무거웠다.-그래요. 알겠어. 잘했네. 고마워.-지금 안나 씨,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들어가세요. 어째 우리 딸이 저렇게 된 것처럼 마음이 그래요.바람이 불어왔다. 반쯤 접힌 회화나무 잎들이 박수치 듯 흔들거렸다. 현관으로 향하던 필립의 아내가 발걸음을 멈췄다. 필립을 돌아보며 말했다.-가끔 당신 없이 혼자 있는 밤이면 회화나무 아래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무서워?필립이 물었다.-아니요. 그냥 소리가 나는 것 같을 뿐이에요. 오히려 같이 계신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할 때도 있어요. 누군지 아니까.필립의 아내가 대답했다. 덧붙여 말했다.-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보다 더 가까이 계신 것 같지 않아요?안나와 필립이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옆에 앉았다. 입에 맞지 않더라도 많이 먹어야 한다며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렸고, 안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숟가락을 들었다. 필립이 자기 앞에 있던 오이소박이 접시를 안나 앞으로 밀었다.-이것도 좀 먹어 보세요. 우리 집사람이 이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합니다. 시원하니 맛있어요.안나가 고개를 들어 필립을 보았다. 필립의 아내도 필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감사합니다. 저도, 아기도, 오빠도. 오빠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로봇 관리사 그만두고 올더앤베러 로봇연구실로 들어가기로 했다고.무슨 말이야? 필립의 아내가 눈짓으로 물었다.-실력이 좋다 하더라고. 실력이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우리 회사도 주력사업으로 검토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그쪽으로 경험도 많으니 회사에 제법 도움이 될 거야. 어찌 되었건 이것도 인연 아닌가, 인연.-회장님도 챙겨주시지 않았던 건데. 저희 부모님도 많이 고마워하세요. 감사합니다.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부정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허리와 어깨를 붙잡고 다시 앉혔고, 필립은 안나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안나가 자리에 앉자 필립이 말했다.-우리 이건 확실히 하도록 하지. 안나 씨나, 뱃속의 아기, 그리고 오빠 노마 씨까지는 나의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해 줄 생각이야. 하지만 안나 씨 부모님은 달라. 나는 안나 씨 부모님까지 인연을 넓힐 생각이 없어. 알겠지. 기억해줬으면 좋겠어./김강 소설가

2022-09-19

공립미술학교의 시작 : 프랑스 왕립미술학교

미술이 본격적으로 제도권 기관에서 교육되어진 것은 1648년 프랑스에서였다. 프랑스 보다 80여 년 앞선 1563년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에 의해 피렌체에 ‘아카데미아’가 설립되기는 했었지만 이곳은 미술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학술적 논의가 이루어진 미술원의 성격이 강했다. 프랑스 왕립아카데미 역시 미술원의 기능을 일부분 수행하기는 했지만 일차적인 역할은 절대왕정의 통치철학에 부합하는 미술가를 길러내는 것이었다.아카데미에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고 오랫동안 미술창작의 규준으로 작용하게 될 이론들이 정립되었다. 예를 들어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 주제에 따라 회화 장르를 구분한 것이 아카데미이다. 이렇게 회화를 구분한 것은 장르 간에 서열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역사화는 성서나 신화, 역사적인 사건을 주제로 다룬다. 주로 위대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행위가 묘사되어 있다. 역사화는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해 있다. 반대로 서열이 가장 낮은 회화 장르는 풍속화이다. 풍속화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 오로지 역사화를 그리는 최고 실력의 화가에게만 왕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서양미술사 최초 대규모 전시회의 시작도 아카데미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 14세 치하, 왕실에서 추구하는 미술취향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1667년 전시회가 기획되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강당에 작품을 걸고 시작된 전시회가 왕실의 요청에 따라 매해 정기적으로 개최되면서 몇 차례 장소가 변경된다. 1725년부터 아카데미 전시회 개최장소가 루브르 궁전 살롱 카레(Salon Carr00E9)의 붙박이 행사로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살롱전’이라 불리게 된다.아카데미의 교육과정은 체계화 되어 있었다. 신입생들은 거장들의 작품을 옮겨 놓은 판화를 모범 답안처럼 열심히 따라 그려야 했다. 거장들의 눈을 빌려 구도를 파악하고 인체와 인물 묘사를 익혔다. 그런 후 석고상으로 데생 연습을 한다. 평면을 평면에 모사하는 것과 입체인 석고상을 평면에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석고상의 입체적인 형태를 분석하고 비례와 균형 그리고 빛이 닿는 면과 그림자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설득력 있는 그림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모두 마친 학생들은 실제 모델을 그리는 수업에 참여한다.아카데미는 해마다 ‘로마상’이라는 공모전을 열어 뛰어난 학생을 선발해 로마로 유학할 기회를 주었다. 17세기와 18세기 미술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간다면 로마로 향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고대 유적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로마에서는 아카데미가 모범으로 삼았던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들이 여전히 존재감을 뿜어냈다. 당시 미술의 최신 유행 바로크가 로마에서 발달했고, 각국의 미술가들이 활발하게 교류한 곳이 로마였다. 프랑스 왕실은 로마의 메디치궁을 매입해 그곳에 왕립미술학교 분관을 설치했고, 기량이 뛰어난 학생들을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해 수년 동안 유학할 수 있게 있다.프랑스의 이 같은 미술환경 속에서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엘리트 코스는 다음과 같다. 명망 높은 미술가의 문하생으로 기본기를 다지고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몇 년간의 유학생활 동안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후 파리로 돌아와 살롱전에 출품해 주목을 받고 궁정화가로 발탁된다. 궁중화가로 일하면서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영향력을 펼치면 화가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권력을 얻게 된다.유럽 여러 나라들은 프랑스를 모범삼아 왕립미술학교를 세웠다. 1713년 마드리드에 스페인 왕립미술학교가, 조금 늦은 1768년 영국 왕립미술학교가 설립되었다. 프랑스 왕립미술학교는 1791년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803년 미술학교 보자르(Beaux-arts)로 새롭게 문을 열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2-09-19

대구교육청 IB교육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국제 바칼로레아(IB) 본부 수장인 올리 페카 헤이노넨 회장이 지난 16일 대구시교육청을 방문, IB교육 현장을 둘러봤다. 그는 대구교육청에서 IB교육 참여 학생들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IB교육이 대구 교육에 도입된지 수년여 만에 상당한 성과를 내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구 교육 현장을 둘러본 본부 수장이 그 성과를 인정하고 있는 마당이다.이날 대구 외국어고를 찾아 영어로 진행하는 IB 수업을 참관한 헤이노넨 회장은 “학생들과 소통의 경험을 했고 IB 프로그램을 통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표현력에 놀랐다”며 “대구 IB 교육을 받은 학생 실력이 뛰어났다”고 소감을 말했다.IB 교육은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 학생이 스스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 시스템이다.1968년, 스위스 제네바의 비영리 교육재단(IBO)에서 개발해 현재 전 세계 161개국 5천465교에서 운영 중이라고 한다.IB교육은 강은희 대구시교육감이 추진하는 핵심사업 중 하나다. 대구교육청은 2019년 7월 IB 본부와 협약을 체결한 뒤 IB 프로그램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대구지역에서는 현재 27개 초·중·고가 IB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IB교육은 대구가 전국에서도 선두주자로 꼽힌다. 현재 초·중·고에서 나아가 대학까지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하지만 아직까지 IB교육은 참여 범위가 소수 학교에 그친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공립학교가 대부분이다. 프로그램을 담당할 교사들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IB교육은 어떻게 보면 전교조가 추구하는 전인교육과도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장벽을 낮춰 가급적 많은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학부모들의 이해와 지원도 이끌어내야 한다. IB교육은 우리 교육의 근본 틀을 바꾸는 일종의 교육 혁명이 될 수 있다. 보다 더 정교한 시스템을 갖춰 우리 교육 현장을 일신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구시교육청의 분발을 바란다.

2022-09-19

포항 냉천범람 원인, ‘상류저수지 책임론’

포항지역에 심각한 태풍피해를 가져온 냉천범람의 원인 중 하나가 오어지의 뒤늦은 수문개방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한국농어촌공사의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지방하천인 포항시 오천읍 냉천 상류에 위치한 오어지는 주변 농경지 245㏊에 농업용수 등을 공급하고 있다. 오어지의 일자별 저수율을 보면, 지난 5일 56%, 태풍이 내습한 6일 100%의 저수율을 기록했다.태풍 내습 당시인 6일 새벽, 몇 시간 만에 수위가 급격하게 차올랐으며, 저수지 둑을 넘은 물이 대량 방류되면서 하류에 있는 냉천 범람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저수지 하류 주민들은 “6일 새벽 4시까지는 저수지 물이 넘치지 않았다. 이후 갑자기 물이 넘쳐흘렀고 시간이 지나면서 걷잡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주민들은 저수지 상단에 위치한 방수문(저수율 65% 지점)이 아니더라도, 저수지 하단부에 있는 이수용 수문(수위별로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 농사를 위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도 열어 저수지 물을 일찍 더 뺐더라면 하류쪽 침수피해가 적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본지 취재결과, 이 저수지의 문제점은 방수문 위치상 저수율 수위 65%가 될 때까지는 물을 빼고 싶어도 뺄 수 없는 구조다. 태풍이 시간당 110㎜라는 엄청난 폭우를 뿌려댔지만, 수위가 방수문에 도달할 때까지 빗물은 계속 저수지에 저장만 됐던 것이다. 이로인해 순식간에 저수지는 만수가 되고 저수지 둑을 넘어 물이 넘치면서 저수지 바로 밑 상가부터 초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하류 주민들은 “농어촌공사에 이수용 수문이라도 개방해 저수율을 낮춰줄 것을 사전에 요구했지만 묵살됐다”고 주장하고 있어, 진상규명을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농어촌 공사는 이와관련 “이수용 수문은 기능 자체가 달라 홍수를 대비해 여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포항시는 냉천범람의 원인을 다각도로 규명해서 앞으로 어떤 강력한 태풍이 오더라도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항구적인 재해방지대책을 세워야 한다.

2022-09-19

대학, 교수 그리고 권력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대학은 ‘진리탐구의 전당’이고, 교수는 ‘가치’와 ‘당위’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대학과 교수들이 권력의 눈치를 봐서야 되겠는가? 김건희 여사의 학위논문 표절과 관련하여 해당 대학과 교수들이 보여준 정치적 행태는 매우 실망스럽다.국민대는 2008년 김건희 여사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이미 2007년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는 “타인의 아이디어나 연구내용 등을 인용 없이 도용하는 행위를 표절”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민대는 최근 표절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에서 “베꼈다 해도 연구내용의 핵심 부분이 아니면 괜찮다”는 매우 정치적인 판정을 함으로써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졌다.이에 국민대 교수회는 자체 재검증을 위해 전체교수투표를 추진했으나 대학본부와 교무위원들의 개입으로 찬성 38.5%, 반대 61.5%로 부결되었다. 이는 대학과 교수들이 ‘지성적 판단’을 하지 않고 ‘지능적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인의 침묵이 범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권력 앞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한 대학과 교수들이 내린 정치적 판단은 ‘역시 Yuji대’라는 오명(汚名)을 남겼다.논문 표절의 피해자인 숙명여대 구연상 교수는 “출처를 숨기는 표절은 정신적 도둑질”이라고 하면서 “국민대가 도둑질을 방치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자신의 논문을 “인용부호, 각주, 참고문헌 없이 몰래 따왔기 때문에 100% 표절이 맞다”고 반박하면서 “어떻게 그런 논문이 통과되었는지 불가사의하다”고 비판했다.나아가 전국 14개 교수·학술단체는 ‘김건희 여사 논문표절 검증을 위한 범학계 국민검증단’을 구성하여 1개월여 조사 끝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해당 박사학위논문은 구연상 교수의 논문 외에도 9명의 논문을 표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피캠퍼스, 디지털타임스, 점집 홈페이지, 사주팔자 블로그 등에서 복사 또는 짜깁기했음이 밝혀졌다. 인용 출처는 대부분 표시되지 않았고, 정상적으로 표기된 것은 187쪽 가운데 8쪽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이러한 엉터리 논문을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했으니 어이가 없다. 물론 교육부의 행·재정적 지원과 감독을 받아야 하는 국민대로서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곤혹스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와 진리의 전당인 대학이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대학의 정의가 무너지면 나라의 정의도 무너진다. 최고의 지성인 교수들이 불의와 야합한다면 나라의 정의는 누가 지키는가?‘학생과 동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대학’이 있고, ‘교수를 부끄럽게 만드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교수가 ‘올바른 교수의 길’을 가려면 ‘권력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권력의 주구(走狗)노릇을 하는 정치교수들은 교수라고 할 수 없다. 표절 당사자인 김건희 여사의 사죄와 학위반납은 물론, 논문의 지도교수와 심사교수들도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해야 한다. 대학은 대학답고 교수는 교수다워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2022-09-19

가을 전시회 감상법… 푼크툼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철, 사진작품이나 옛 유물, 미술작품 전시회를 찾을 기회가 많아졌다.이런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법으로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가 ‘찌름’을 뜻하는 라틴어 ‘푼크티오넴(punctionem)’에서 따온 ‘푼크툼(punctum)’을 추천한다.푼크툼은 사진작품이나 옛 유물, 미술작품 등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똑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추정·해석할 수 있는 의미나 작가가 의도한 바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예를 들어 낙동강 서부 지역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손잡이가 달린 머그잔을 감상한다고 하자. 원래 있던 자리를 벗어나 세상을 돌다 온 유물들은 우리에게 들려줄 정보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이처럼 오랜 세월이 지난 옛 유물들과 소통할 유일한 방법이 바로 푼크툼이다. 객관적인 정보나 해석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기억에 비추어 예술 작품을 느끼는 것이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빙글빙글 웃는 동물 장식을 보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애견을 떠올리며 뭉클해하는 식이다.푼크툼으로 어떤 기억과 감정을 떠올릴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감상하는 작품이 눈에서 곧장 마음속으로 뛰어드는 경험을 하고 나면 잘 모르는 것들도 더욱 더 잘 바라볼 수 있게된다. 푼크툼은 매우 직관적이다. 그래서일까.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다르리라”는 유홍준 교수의 말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9-19

詩와 음악의 가을 마중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가을을 시샘하는지 또 다른 태풍이 지나갔다. 비록 한반도 아래쪽으로 비껴가긴 했지만, 2주 전에 휩쓸린 태풍피해가 워낙 커서 바짝 긴장과 조바심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태풍으로 인한 풍수해의 상흔이 곳곳에 아직 생채기처럼 남아 있는데, 가공할 태풍이 연이어 위협하게 된다면 설상가상(雪上加霜)의 피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에 정부에서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태풍 대비에 적극적인 행정조치를 시행하는 등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선제적이고도 실효성 있는 현장 대응활동을 지원하며 만전을 기했다.계절의 바뀜이 예사롭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지만, 수십년 전부터는 복병 같은 태풍이 가을날의 길목에서 산천을 할퀴고 들판을 쓸고 가니 천지간에 무엇 하나 순탄치 않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만큼 지구의 환경이 변하고 세상이 달라져서, 에너지의 순환이 점차 거칠어지고 만물의 움직임이 급작스레 코로나19같은 돌연함으로 치닫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난마 같은 기상이변도 계절의 수레바퀴 한 켠에서 무모한 듯 솟아오르는 상사화의 꽃대를 누르지는 못하고, 구절초와 쑥부쟁이의 흰눈 같은 하늘거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리라.마치 가을을 마중이라도 하듯이 일제히 긴 목을 뽑아 붉은 꽃을 피운 상사화가 초록에 어우러진 한켠에서 지난 주말, 시와 음악의 향연이 꽃무릇의 운치 마냥 멋스럽게 피어나고 들꽃 같은 문학 얘기가 도란도란 엮어졌다. 온갖 나무와 화초들이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자리잡아 가지런하고, 새들의 지저귐 따라 바람 결에 수런대는 잎새들도 함께하며 반겨맞는 그곳은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소재한 기청산(箕靑山)식물원이다. 이야기가 있는 박물관식 식물원에서 경북문화재단이 주최하고 공감놀이터 ‘어링블’에서 주관한 ‘이정록 시인 초청강연·시낭송·노래가 된 시’를 테마로 시와 음악의 콜라보를 선보인 ‘붉은 상사화 음악회’가 싱그러움 속에 이채롭게 열린 것이다.시낭송과 수필 낭독이 차분한 음색으로 흐르고 성악과 악기 연주가 우렁차면서도 매끄럽게 울려 퍼지는가 하면, 어링블 꿈다락 어린이들의 이정록 동시집 ‘지구의 맛’ 동시 낭송은 맑은 목청과 고운 표정으로 자연사랑과 환경보전을 환기시켜서 의미가 있었다. 또한 선한 눈길과 맑고 밝은 언어로 많은 독자들과 호흡해온 이정록 시인의 구수한 입담과 해학적인 표현으로 ‘쑥은 쑥스럽게, 바람은 바람직하게’라고 말하는, 인문학적인 감성으로 짧으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며 더욱 아름다워지고 바르게 되는 계기로 시를 쓰게 된다는 세상을 보는 너른 시선이 인상적으로 여겨졌다.상사화 피는 때에 맞춰 소소하고 수수하게 열린 숲속 음악회가 조금이나마 태풍의 상처와 코로나의 상심을 보듬고 다독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현실의 삶이 복잡하고 힘에 부칠수록 자연과 예술을 찾아 교감하며 마음의 안정과 위무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시와 음악으로 가을 마중하듯이, 공감과 치유의 마음 마중으로 정갈한 가을을 열어가자.

2022-09-19

변화는 장수기업을 만든다

김종찬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미국 캘리포니아주에는 남안의 샌프란시스코와 북안의 마린 반도를 연결하는 골든만에 설치된 금문교가 있다. 이 다리는 1937년에 완공된 최초의 현수교라는 것 외에도 그 당시 기술로는 어렵다고 했던 2.7km의 길이를 자랑하며 수면으로부터 높이가 67m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제원을 떠나 이 다리는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어떤 다리들과 비교해도 성능이나 환경과의 조화인 예술성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진단 장비들이 첨단화 되어도 변하지 않았던 것은 정해진 규정을 반드시 지키는 꾸준함이 축적된 문화에 있다. 일상점검을 통해 작은 결함이 심각한 문제로 성장하기 전에 발견하여 조치하고 결과가 표준화되어 매뉴얼에 업데이트되니 성능이 유지되는 것이다. 일상점검은 이상이 자주 발견되는 것도 아니어서 허투루 한두 번 해 보고 ‘적당히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여 지속되기가 어렵다. 문화화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 ‘중요하고 즐거운 일’로 바뀌는 축적의 과정을 겪어야 하며 그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결코 문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금문교를 보면서 기업 역시 100년을 가기 위해서는 처음의 설계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녹슬거나 이음새의 틈이 기준 이상으로 열화 되기 전에 보완해야 하듯 기업도 경쟁력을 잃기 전에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 장치산업은 호황기 때는 규모의 경제를 통해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불황기 때는 매출액은 줄어드는데 고정비 지출은 줄지 않아 경영 성과가 악화되기 때문에 지속적인 유지관리를 통해 기능과 성능의 유지가 매우 중요한 산업이다. 대표적 장치산업인 화학산업도 중국과 중동 국가들의 대규모 설비투자로 인한 공급과잉으로 마진이 한계 상황이지만 바스프(BASF)란 기업은 글로벌 강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바스프는 1865년 독일에서 창립되어 전 세계 11만여 명의 직원이 1만여 개의 제품을 생산하는 거대 화학기업이다. 바스프의 특징 중 하나는 공정 간 프로세스 연결을 의미하는 페어분트인데 이는 자원순환 친환경 공급망 체제라고 얘기할 수 있다. 페어분트를 통해 한 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과 열을 다른 공정의 원료로 투입하는 생산체계를 만들었다. 공정은 환경으로부터 부담스럽지만 제품은 최고의 재활용성을 가지는 것이 강점이다. 제철소에서도 철광석을 녹일 때 많은 열량이 필요하지만 설비 관점에서는 발생된 열을 식히는데 물을 사용하고 그 물은 가정의 난방으로 사용하니 그것도 페어분트라고 할 수 있겠다. 페어분트는 바스프 내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고객사에도 확장하여 바스프와 고객사가 밀접하게 통합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렇듯 바스프의 성공 요인은 100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안주하지 않고 현재 노력에 충실하여 고객과 함께 가치를 높이는 노력과 미래 변화를 예측하여 끊임없이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2022-09-19

국민은 진실 규명을 원한다

김진국 고문 지난 대선은 비호감 선거였다. 여야 후보를 막론하고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0.73% 이겼다. 윤석열 후보를 찍은 사람은 민주당, 혹은 이재명 후보가 싫고, 이재명 후보를 찍은 사람은 국민의힘, 혹은 윤석열 후보가 싫었다는 말이다.왜 민주당 정부를 거부했나. 당시 최대 유행어가 ‘내로남불’이었다. 임기 절반을 질질 끈 조국 사태는 정의를 상대적 개념으로 추락시켰다. 극심한 진영 갈등으로 진실보다 누구 편이냐가 유무죄의 판단 기준이 됐다. 정치인에게는 공정보다 진영과 표가 중요했다.윤석열 대통령은 평생 검사 경험밖에 없다. 표를 던진 사람도 그에게 큰 기대를 한 게 아니다. 미워하는 문 정부의 대항마여서 선택한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공정과 정의의 실현’을 기대했다. 그 일은 검사가 적임자라 생각했다. 그가 잘하리라 기대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를 싫어한 사람도 많다. 정의를 실현한다며 보복의 칼을 빼 들어 정치는 사라지고, 국정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임기 초에 벌써 그런 국면을 마주했다.윤 대통령은 자신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의 기대와 협치 사이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경제도 안보도 매우 어려운 시기다. 국회의 절대다수 의석을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고난의 행군을 할 수밖에 없다.최근 드라마 ‘수리남’이 인기다. 드라마에서는 대통령이 뇌물을 받고 군대까지 동원해 마약상을 돕는다. 수리남 정부가 국가 이미지를 훼손했다며 발끈했다. 90년대 수리남에서 실제 벌어진 일을 모티브로 삼은 드라마다. 하지만 이제 마약을 구하기 어려운 나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범죄는 용납할 수는 없다.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라도 아니다. 과거 한 범죄자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를 외쳐 국민적 공감을 얻었다. 범죄는 밉지만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하나다. 마찬가지로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無權有罪)’도 안 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범죄를 저질러도 건드리지 못한다면 나라가 아니다.그런데도 말이 많다. ‘검수완박’이느니 ‘감사완박’이느니 하는 말이 나온 것도 법 집행의 공정성 때문이다. 한쪽은 공정하지 않은 검사의 수사권을 없애자고 하고, 다른 쪽은 그러면 범죄를 방치하자는 거냐고 반박한다. 한쪽이 그럼 그 권한을 경찰에 넘겨주자고 하자, 다른 쪽은 경찰은 공정하냐고 반문한다.권위주의 정부는 사정 기관을 정치에 이용했다. 야당 의원의 약점을 이용해 협박하고, 협조하게 했다. 선거 운동 중에 구속해 손발을 묶기도 했다. 공권력으로 국민의 선택을 방해하는 정치를 혐오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직전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자금 수사를 중단하도록 지시했다.추석 직전 넥스트리서치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수사를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라는 응답이 51.4%였다. ‘정치 보복 수사’라는 답변은 41.2%였다.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법도 64.5%가 찬성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불법이 있으면 차별 없이 수사하라는 게 국민의 다수 의견이다.정의 실현과 정치 보복은 어떻게 다른가. 수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만 중요하다. 무리한 몰아가기는 역풍을 맞는다. 요란을 떨고, 결과가 허망해도(泰山鳴動鼠一匹) 비난받는다. 그런 일로 국정과 협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때의 ‘논두렁 시계’처럼 망신 주기나 시간 끌기는 정치 보복 의혹을 키우게 된다.특히 정치 수사가 어려운 건 ‘내로남불’이다.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척들을 특별 감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처삼촌부터 구속했다. 그런데도 동생 전경환 문제에 걸렸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남을 치려면 내 주변부터 단속해야 한다. 대통령과 영부인이란 자리보다 더 영예로운 게 있나. 박사가 뭔가. 논란이 된다면 먼저 던지는 게 방법이다. 잘못이 있다면 인정하고 털어버려라. 진실만큼 튼튼한 방패는 없다./본사 고문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2-09-18

구미의 지속가능한 성장, 문화에서 찾아야

김장호 구미시장 유서 깊은 건축물과 걸음을 옮길수록 느껴지는 이국적인 풍경들. 수백, 수천 년 켜켜이 쌓인 도시의 역사와 문화는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에 들르지 않더라도 거리 곳곳에 예술이 흐르고 문화가 펼쳐지는 도시, 삶의 여유와 낭만이 삶의 단면인 도시야말로 현대인이 지향하는 도시의 모습이다.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이나 지중해의 항구도시 프랑스 마르세유 같은 도시들 말이다.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은 한때, 가난과 실업을 대표하는 쇠락한 도시였다.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리버풀은 도시 곳곳에 비틀스의 숨결을 심었고, 음악, 미술, 스포츠 등의 다양한 문화 인프라로 도시를 가난에서 구했다.마르세유 역시 마찬가지다. 높은 실업률과 많은 이주 노동자들로 슬럼화되었던 마르세유는 흉물로 전락한 담배 공장을 예술가들에게 임대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냈다.문화를 통해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는 관광산업의 성장과 지역 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러한 문화 활성화가 우리 구미에 필요하다. 지난 50년 경제발전의 중추도시로 산업 발전과 고도성장을 이끌어온 구미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있어 매우 특별한 도시다. 산업현장에서, 생업 일선에서, 우리 부모 세대가 흘린 땀과 눈물 덕분에 우리는 가난과 배고픔을 이겨내고 공부도 할 수 있었고, 3만 불 시대도 열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성장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구미의 노고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그런 구미가 지금 정체냐 지속성장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도약과 후퇴를 결정하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산업 질서의 재편은 구미에 더 큰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고 있으며, 더 큰 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화예술 활성화가 반드시 필요하다.필자는 민선 8기를 출범하며 낭만과 품격이 있는 도시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제대로 내세울 축제 하나 없는 구미에 대표 명품축제를 육성하고, 미술관, 미디어아트 전시관 등의 문화 인프라도 유치해야 한다. 침체된 원도심 구미역 인근 1, 2번 도로와 인동 시가지도 활성화시켜야 한다. 문화·예술을 곁들여야 할 수 있는 일들이다.마침 구미는 내년 10월 법정문화도시 지정을 목표로 시민들과 함께 문화도시 구미의 청사진을 그리는 중이다. 핵심 키워드는 일과 삶이다. 구미가 가진 산업과 노동, 그 의미와 가치를 통해일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데 방점을 두려 한다. 서면평가와 현장평가를 통과하고 최종 예비도시 선정을 앞두고 있는 만큼, 문화가 시민들의 일과 삶 속에 녹아내릴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일 방침이다.지금까지 구미문화는 척박했다. 경제와 산업에 치중하느라 문화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산업과 문화는 별개일까. 트위터와 페이스북, 구글 등의 첨단 테크 기업들이 몰려있는 실리콘밸리를 보자.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이 상시로 열리는 창의적인 도시로 꼽힌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이 가능했던 건 그러한 다양성과 창의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다양한 인간의 행동 스펙트럼이 어떻게 조합되는가에 따라 문화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즉,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도시의 문화와 정체성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결국 사람이다.이제 구미는 기업도시, 공단도시에 더해 풍부한 문화적 색채를 느낄 수 있는 문화도시, 낭만이 흐르는 예술도시로 나아가려 한다.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이나 프랑스 마르세유처럼 구미의 문화자산으로 구미의 정체성을 살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도시. 그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싶다.

2022-09-18

그리스 최고의 영웅 - 헤라클레스자리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을 꼽으라면 단연 마초적인 캐릭터 헤라클레스다.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제왕 제우스와 페르세우스 손녀인 알크메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알크메나는 티린스의 왕 암피트리온의 왕비, 즉 유부녀였지만 바람둥이 제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제우스는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녀에게 다가갔던 것이다.이를 안 헤라는 화가 머리까지 치솟았다. 헤라는 어린 헤라클레스에게 뱀 두 마리를 보내 죽이려고 했지만, 헤라클레스가 목을 눌러 죽여 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헤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훗날 헤라는 헤라클레스에게 주문을 걸어 아내와 아들을 죽이게끔 만든다. 죄를 뉘우친 헤라클레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를 12년을 섬기며 그가 명하는 12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신탁을 듣게 된다. 해라가 신탁을 통해 헤라클레스에게 고난의 모험을 겪게 계략을 짰던 것이다.처음 ‘사자자리’ 신화 황금사자를 죽이는 일부터, 괴물 뱀 히드라를 퇴치하는 일, 케리네이아 산에 사는 사슴을 비롯해 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 크레타의 황소, 괴물 게리온이 가지고 있던 소, 사람 잡아먹는 4마리의 말,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마지막 임무)를 산 채로 잡는 일이었다. 이 외에도 3천 마리 황소가 사는데도 30년간 청소하지 않은 아우게이아스 왕의 가축우리를 정리하는 일, 사나운 새를 퇴치하는 일,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 띠를 탈취하는 일, 요정妖精 헤스페리데스가 지키는 동산의 황금 사과를 따오는 일 등 모두 12가지의 힘든 업을 모두 마쳐야 했다.이 과정에서 지하세계 하데스에게 사로잡혀 있던 테세우스를 구해주었으며,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다는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며 바위산에 묶여 있던 프로메테우스를 구출해 주는 등 그의 영웅담은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마침내 고난의 12가지 임무를 모두 마친 헤라클레스는 오이칼리아 공주 이올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왕이 약속을 저버리자 배신감에 격분한 나머지 오이칼리아 왕자이자 친구인 이피토스를 죽이고 만다. 헤라클레스가 분을 삭이지 못하게끔 꾸민 집념의 헤라 작품이었다. 이에 대한 벌로 헤라클레스는 옴팔로스 나라 옴팔레 여왕의 몸종으로 들어가게 된다. 헤라클레스는 영웅의 모습 대신 여장을 하고 3년을 지낸 뒤에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훗날 자신의 두 번째 아내 대이아네아라를 유혹한 켄타우스로 족 네소스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네소스가 죽기 전 헤라클레스가 변심하면 히드라의 독이 스민 자기 피를 옷에 발라서 입히라는 거짓말을 아내가 곧이곧대로 믿는 바람에 죽음을 맞는다.하늘의 신들은 지상의 영웅이 죽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으나 제우스만은 그러지 않았다. 비록 인간의 육신은 불에 타버렸을지라도 자기 아들은 영원히 죽지 않음을 알았다. 신들은 헤라클레스를 하늘로 올려 헤라와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고 헤라의 딸이자 청춘의 여신인 헤베와 부부의 연을 맺어 준다.헤라클레스자리는 여름철 북쪽 하늘의 별자리로, 직녀성과 지난번에 다뤘던 왕관자리 중간에서 3등성 이하의 어두운 별들과 더불어 H자를 이루고 있다. 독자들은 직녀별을 찾아 서쪽에 무릎을 꿇고 거꾸로 서 있는 헤라클레스를 그려보시기를 바란다. 중심 부분에 H자로 펼쳐진 별들이 헤라클레스의 몸체인데, 특별히 밝은 별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있어서 쉬이 찾을 수 있다. /박필우 스토리텔러

2022-09-18

과거를 묻지 마세요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영화배우 겸 가수로 이름을 날린 나애심(1930∼2017)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가 1958년에 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 이제 꽃이 피어나고 희망이 환하게 빛나는데 지나간 시절을 새삼 물을 이유가 있느냐는 노래다. 지금과 여기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천만번 지당한 얘기다.하지만 세상은 온갖 종류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그나 그 여자의 과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적잖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다. 과거의 누적이 현재에 응축돼 있고, 과거는 미래에도 깊고 너른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란 얘기다.우리는 이런 주장을 트라우마 이론 혹은 인과론 또는 결정론이라 부른다. 20세기 심리학의 대가 프로이트(1856∼1939)의 이론이 여기에 바탕을 두고 득세해왔다.과거에 경험한 마음의 상처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이 트라우마 이론의 토대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현재의 불행이 생겨나고, 그것은 과거를 바꾸지 못하는 한 미래까지도 계속되리라는 논리다. 많은 사람이 이런 논리로 현재의 불행을 과거로 돌리는 것에 동의하면서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문제는 과거에 마음의 상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누구나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괴로움과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과 성숙을 이뤄나간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말처럼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기에 우리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행불행을 결정한다는 트라우마 이론은 지독할 정도로 운명론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염세적이다.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든 인물이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다.인간은 감정이나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며,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들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의 지금과 여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게다. 나아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지금과 여기에서 생각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아들러의 담대한 주장이다.아들러의 주장에는 많은 게 함축돼 있다. 과거에 의지하거나 과거를 핑계 삼아 현재의 엄살을 합리화하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결론이다. 현재의 행과 불행의 원인을 오직 과거에 돌리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 과거의 노예이자 수인(囚人)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묶인 인간의 미래 역시 과거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두 번째 결론이다. 아들러는 과거와 미래의 무관함을 강력하게 천명하는 용기의 심리학 이론가다.세 번째, 아들러는 지금과 여기를 살아가야 한다고 천명(闡明)한다. 그러므로 지금과 여기를 용기 있게 살려면 과거나 미래 따위는 던져버리라는 그의 주장에 상응하는 노래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창밖에 물까치 조용히 운다.

2022-09-18

노인공화국

우정구 논설위원 얼마전 통계청이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현황 및 전망에 의하면 2070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전체의 절반 가까운 46.4%로 추산됐다. 올해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중 17.5%보다 28.9% 포인트가 늘어난다.같은 기간 세계 인구는 79억7천만명에서 103억명으로 증가하고 한국은 5천162만명에서 3천765만명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세계 29위인 우리 인구가 59위로 하락한다. 저출산과 폐쇄적인 이민정책 등을 주요 원인으로 분석했으나 결과를 놓고 보면 매우 충격적이다.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로 전락하고 평균 가구원 수가 2040년에 가서는 현재 2.37명에서 1.97명으로 줄어든다. 한집에 사는 사람이 평균 2명이 안 된다는 분석이다.노인인구가 줄면 일할 수 있는 인구감소는 당연하다. 일할 수 있는 연령층이 대폭 줄어들면서 한국의 경제 성장은 뒷걸음질 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과 공무원 연금은 고갈 상태에 빠지고 지하철에는 돈내고 타는 사람보다 무임승차하는 노인이 더 많다.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의 절반이 65세 이상 노인이어서 노인들의 정치적 파워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경제적으로 생산력이 없는 노인을 위한 정책이 국가 정책의 주요 위치에 등장하면서 사회는 활기를 점차 잃어간다.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현재 65세로 통용되는 노인 연령을 10년에 1세씩 상향하는 제안을 했다. 노인 부양률을 줄이고 연금수급 개시의 연장 등 실효적인 은퇴연령을 늘리면서 사회적 충격을 흡수하자는 제안이다. 노령화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해결을 위한 실제적 접근법이 서둘러 만들어져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9-18

포항·포스코, 지금처럼 손잡고 위기 극복을

포스코지주사(포스코홀딩스) 서울설립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던 포항시와 포스코가 태풍 ‘힌남노’ 피해복구 과정에서 화해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강덕 포항시장과 김학동 포스코 부회장은 지난 15일 포항제철소에서 만나 태풍피해 대책을 논의한 뒤, 포스코는 제철소 울타리에 차수벽을 설치하고, 포항시는 냉천 범람을 막기 위한 항구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 그동안 포스코홀딩스 주소이전문제 등으로 포스코와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이 시장이 이번에 포항제철소를 방문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태풍피해 이후 산업부 장관 방문에 동행한 적은 있지만, 양측의 현안협의를 위해 직접 포항제철소를 찾은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다. 이날 이 시장은 “포항제철소의 빠른 조업정상화를 위해 시 차원에서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강조하면서, “국가기간산업인 포항제철소가 침수로 조업을 중단했다는 사실에 시정을 책임지고 있는 당사자로서 매우 착잡하다”고 밝혔다.이 시장이 언급한 것처럼, 포항제철소는 국가기간산업이다. 이번 재해로 포항제철소 조업이 중단되자 철강자재를 쓰는 자동차·조선·기계·건설분야 주요 대기업들이 모두 비상사태에 접어든 것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포항시민들도 태풍피해를 당하면서 포항제철소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다시 한번 절감했을 것이다. 이 시장이 수해복구과정에서 과거의 섭섭했던 감정을 털어내고 포스코와 동반자 관계를 구축한 것은 포항은 물론, 국가 전체적으로도 바람직하다.포스코도 이번 재해복구과정에서 포항시라는 울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태풍피해가 완전히 복구되면, 그동안 지방자치단체와의 갈등관계를 주도적으로 풀 필요가 있다. ‘상생협력 TF’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안들도 양측이 신뢰를 기반으로 허심탄회하게 풀어나가면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이강덕 포항시장과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직접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재해복구도 최대한 앞당길 수 있고, 상생협력과 같은 현안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다.

2022-09-18

쌀값 폭락에 무너지는 농심, 정부 대책 필요

전례 없는 쌀값 폭락으로 농민들이 신음하고 있다. 공급 과잉이 원인이다. 지난해 미곡생산량(백미·92.9%)은 388만1천601t으로 전년보다 10.7%(37만5천22t) 증가하며 2015년 이후 6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반면 1인당 쌀 소비량은 해마다 급감하고 있다. 서구식 식습관과 육류 소비 증가 등 때문이다. 지난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6.9㎏이다. 2000년 93.9㎏에서 21년 만에 37㎏(39.4%)이나 줄었다. 이에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김영록 전남도지사는 전국 쌀 주산지 8개 광역자치단체 도지사들을 대표해 지난 15일 국회에서 ‘쌀값 안정 대책 마련 촉구’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비료와 농자재 가격은 연일 오르고 있으나 쌀값은 폭락, 농업인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다고 했다.통계청에 따르면, 산지 쌀값은 세 차례 시장격리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0월 22만7천212원(80kg)을 기록한 이후 지속해서 하락해 2018년 이후 처음으로 17만 원 선이 무너지면서 지난 5일 기준 16만4천740원(80kg)을 기록했다. 8개 시도지사는 성명서를 통해 “생산비 상승과 쌀값 폭락으로 농업인들이 이중고를 겪고 있다. 쌀농사가 흔들리면 농업인들의 삶은 물론 대한민국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안까지 제시했다. 식량안보 강화와 해외원조 확대를 위해 수입쌀 포함 80만t인 공공비축 물량을 순수 국내산 쌀 100만t으로 확대하고 2022년산 햅쌀 출하 전 2021년산 벼 재고 물량을 전량 매입할 것을 주문했다. 2022년산 공급과잉 예측 시 선제적 시장격리와 논 타작물 재배사업 국고지원 부활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쌀은 우리 농업의 근간이다. 때맞춰 국회 농축수산위 법안소위에서 쌀 초과생산량을 자동으로 정부가 매입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법적 뒷받침까지 마련된 셈이다. 이제 정부가 빨리 나서야 한다. 지자체의 힘만으로는 쌀값 안정대책을 마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정부는 햅쌀이 나오기 전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2022-09-18

세대간 교류를 위해

이정희 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옛날이야기를 보면 “옛날 옛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습니다”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아마 이것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가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가능성이 크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들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정겹다. 그만큼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교류가 빈번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어른들이 “요즘 애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또한,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내가 자랐을 때와 달라도 너무 달라”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온다.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또래간의 대면 커뮤니케이션도 서툴고, 세대간 커뮤니케이션은 더더욱 힘들어 한다. 굳이 집 밖에서 인간관계를 맺지 않아도 집안에서 비대면 교류가 가능해 지게 되었다.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서로 이야기 하면서 미묘한 감정 변화나 표정의 변화 등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과도 익명으로 얼마든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고, 의견이 맞지 않는 다거나 가치관이 다를 경우에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으면 되고, 상대가 싫어지면 관계를 끊으면 된다. 이런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성립된 것이다.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같은 또래, 같은 나이의 동급생끼리만 접할 기회가 대부분이고, 다른 연령층과의 교류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예를 들어 노인들과 중고등학생들과의 교류, 또는 노인들과 초등학생, 유치원생들과의 교류는 생각보다 훨씬 적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나이의 동급생끼리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세대간의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사회 환경 속에서 의도적으로 세대간 교류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미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서는 세대간 교류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대간 교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너무 부족하다.먼저, 곳곳에 있는 경로당과 노인정 등은 명칭을 바꾸고 세대간 교류의 장으로 마련했으면 좋겠다.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과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어야 하겠다. 여기에 대학교육에서 세대간 교류를 위한 새로운 강의가 개설되면 좋겠다.세대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소하고, 해결하거나, 예방하여 살기 좋은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022-09-18

족집게 코칭이 필요해

유영희 작가 장윤정은 자타가 인정하는 트롯 신이다. 본인이 노래를 잘할 뿐만 아니라 남의 노래를 잘 들어주고 조언도 잘해준다. ‘장윤정의 도장깨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장윤정은 노래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레슨해준다. 프로그램 이름을 가만히 보니, 처음에는 ‘원포인트 레슨’이었다가 ‘족집게 코칭’으로 바뀐 것 같은데, 변경된 이름이 훨씬 좋다.출연자들이 어느 정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장윤정이 레슨 신청자의 노래 부르는 습관 한두 가지를 귀신같이 포착해서 교정해주면 노래가 완전히 달라진다. 전 국민 가수 만들기라는 부제가 왜 달려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런 고급 레슨을 받을 수 없는 일반인들도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노래를 잘하게 될 수 있게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나 역시 한때 노래를 잘하고 싶어서 보컬 레슨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고, 혼자 노래방에 가서 몇 시간씩 노래를 불렀던 경험이 있는 터라 흥미 있게 영상을 보면서 장윤정 레슨의 요점을 이해하게 되었다.레슨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노래와 상관없는 나의 습관이나 성격을 드러내지 말고 노래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몸짓과 목소리와 표정을 노래 가사에 일치시키고, 지나치게 멋을 부리지 말라는 등 신청자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준다. 그런 조언을 듣는 신청자의 표정은 깨달음에서 오는 환희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영상 몇 개를 보니 그런 습관이 생기는 배경에는 노래 부르는 이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런 예 중에 가장 인상적인 출연자는 탈북 가수 노수현이다. 장윤정은 노수현에게 떠나는 임을 원망하는 가사를 자기 탓하는 방식으로 부른다면서 원망할 때는 확실하게 원망해야 한다고 하자 노수현이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구체적인 말은 안 했지만 아마도 누군가 자신을 떠났어도 자기 탓만 했던 경험이 있었던 듯하다.이렇게 가수는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습관과 마음을 보지만, 글쓰기 강의를 하는 사람은 글을 보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본다. K대 강의에서 어느 학생이 글마다 편차가 심하고 분노가 많이 느껴져 불러서 물어보니, 자신은 키보드 워리어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공격적인 글로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고 한다.성인 글쓰기 반에서는 어느 수강생이 친구와 통화하는 장면을 쓴 것을 읽고 그때 마음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니, 자기 자랑만 하는 친구가 달갑지 않아서 빨래를 널며 통화했던 것 같다고 한다. 이렇게 글을 보면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글을 지도할 방향을 알게 된다.그런데 노래나 글은 짧아서 이렇게 코치도 할 수 있고 귀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다. 특이한 습관과 결핍으로 가득 찬 우리 인생도 누군가 한눈에 알아보고 코칭해주면 좋으련만, 인생은 길기도 길어서 코칭해 주기도 쉽지 않고 자기 삶을 볼 수 없으니 고치기도 어렵다. 그러나 노래든 글이든 자신을 자꾸 표현하고 코칭을 받다 보면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되고 그러면 삶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용기 내어 나를 표현해보자.

2022-09-18

어떤, 생태행위-살금살금

이원만 맏뫼골놀이마당 한터울 대표 포항의 대안공간 ‘space 298’에서 ‘어떤, 생태행위’라는 콘셉트로 2022년 하반기 릴레이 전시를 하고 있다.첫 전시는 판화작가 이윤엽의 ‘둥질(nesting)’이다. 지난 8월 30일부터 9월 7일까지 진행된 이번 전시에서는 판화, 드로잉, 회화, 오브제 설치, 공동체 미술 등 다채널에서 활동하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이윤엽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담담하게 조명하였다.경기 수원 원천(현재 광교신도시), 화성 목리 창작촌(현재 동탄 신도시), 평택 대추리(현재 캠프 험프리스), 그리고 현재 안성 남풍리에 정착하기까지 지역의 변화와 삶의 행복과 지속의 문제는 이윤엽 작업에서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윤엽은 그가 만난 사람들, 이웃이었던 사람들, 그들의 힘, 같이 먹은 밥, 농사짓는 땅, 같이 겪어 낸 계절을 그린다.이번 전시 안내책자에 둥질은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여 공동체를 꾸리며 진화해가는 생태학적 관점에서의 삶의 과정과 양상을 일컫는다’고 한다. 진화를 한다는 말에 ‘어떻게?’라는 의문이 생겨 오래 전시를 둘러보고 책자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그러다가 나는 ‘왜가리’란 작품에 붙인 작가의 글에 꽂혔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진화’이야기를 들려주는 삼촌을 만났기 때문이다. 망치자루가 녹아내리는 목판에 ‘일자리가 녹고 있다’는 제목을 붙이고서는 ‘그게, 포스트 휴먼이에요?’라는 글을 보태며 미래의 인간에 대한 담론에 못질을 하더니 ‘왜가리’에서는 ‘인간이 새와 이렇게 한통속일 수 있다’며 자신이 생각하는 진화 된 인간, 포스트 휴먼을 퍼포먼스로 보여준다.상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작가가 우유를 사러 시내에 가다보니 논에 왜가리가 가만히 서 있는 걸 보았는데 미꾸라지나 개구리를 기다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올 때보니 그대로여서 뭔가 수상쩍었단다.가만히 보니 다리에 줄이 감겨서 날아가지 못하고 있더란다. 그래서 풀어주려고 다가갔는데 왜가리가 웬 짐승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근처에 가지를 못했다.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왜가리처럼 가만히 서있기로 했단다. 한걸음 다가가서는 또 가만히 서있고, 또 한걸음 다가서서는 서고 그렇게 살금살금 조심조심 다가가니 왜가리가 공격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줄을 풀어줄 수 있었고 왜가리는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는 이야기다.전시를 기획한 이병희 space 298 디렉터가 말하는 이윤엽 작가의 작업특징은 ‘리더미컬한 자율’이라고 한다. 아, 맞네. 살금살금, 조심조심. 얼마나 리더미칼한가! 그리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일에 가담한 것 아닌가!리드미칼한 자율적인 움직임으로 그는 왜가리와도 한통속인 인간으로 진화해 인간들이 버린 줄에 구속된 왜가리의 줄을 풀어 주었으니 ‘어떤 생태행위’가 아닌가! 심지어 ‘고마워요’라는 왜가리의 인사말까지 들었다고 생각한다니 얼마나 행복했을까!이렇게 잘 이해가 되는 전시라니!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가 운영한다는 유튜브에서 띵까 띵까 춤추며 작업시작 준비운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아하 인간의 진화가 쉽네’라고 생각했다.지구가 불타고 있다. 기후위기가 아니라 지구가열이다. 가뭄을 보라, 폭염을 보라, 폭우를 보라. 산불을 보라, 태풍을 보라. 고래 뱃속을 보라. 바다가 화가 났다. 인간이 욕망을 줄이고 ‘공생하는 인간 호모심비우스’로 진화하지 않으면 2050 탄소중립을 이뤄내지 못하면 여섯 번째 대멸종, 6도의 멸종이 올 것이다는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바닷물 수위가 올라가니 바닷가나 지하, 지상 1층의 부동산은 구입하지 말아야하나? 이 암울한 지구에 내가 내 자식들을 살게 할 수는 없으니 결혼과 출산은 고려해 봐야하나? 그래도 이 정도에서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정말 큰 일이잖아’우리가 답답해하고 있는 그런 지점에 이윤엽 작가는 ‘뭐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아’라며 시큰둥하니 우리 앞에 왜가리판화를 내밀어 보여준다. 고도성장 이후의 우리의 삶이 우리인간이 진화해 가야할 하나의 방향을 본 것 같아 반갑고 고맙다.작고하신 이어령 선생은 마지막 노트에 지금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눈물 한 방울’이라고 쓰셨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있는 눈물. 인간은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며 눈물은 ‘희망의 씨앗’이라고 하셨다.눈물 한 방울로 뜨거워진 지구를 식힐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그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은 살금살금 다가가서 고래의 지느러미에 걸린 그물을 풀어주고 바다사자 목에 걸린 줄을 풀어줄 수 있는 인간으로 진화할 것이다. 살금살금, 찔끔찔끔, 우리도 그렇게 매일 조금씩 진화했으면 좋겠다.

2022-09-18

‘신재생에너지 축소’는 기업경쟁력 포기

위현복(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지난 8월 30일 윤석열 정부의 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이 발표되었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년마다 수립되는데 이번에 발표된 초안은 전략환경영향평가, 관계 부처 협의 등을 거친 뒤 올 연말께 확정될 예정이다.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을 요약하면, ‘원전 확대, 신재생에너지 축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기본계획은 지난해 문재인 정부 시절 내놓은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완전히 뒤집은 것으로 평가된다. 2021년 9월 30일 발표한 NDC 상향안에서는 신재생에너지가 30.2%로 가장 높게 설정됐고, 그다음 원전 23.9%, 석탄 21.8% 순이었다. 그런데 8월 30일 발표된 기본계획 초안에서는 원전이 32.8%로 8.9%포인트 늘어났고, 신재생에너지는 8.7%포인트 줄어 21.5%가 되었다.신재생에너지가 대폭 감축된 것은 한국 지형 특성상 태양광·풍력설비 등을 대폭 늘리기 어려운 데다, 원전 대비 불안정한 비용 문제, 발전 설비 인근 주민들의 거부감 등이 고려됐다고 한다. 신재생에너지 보급 속도와 송배전망 건설비 등 현실적인 어려움도 감안된 것으로 알려졌다.독일을 예로 들어서 국제적인 신재생에너지 비중 증가 속도를 살펴보자. 독일은 1990년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1.0%다. 2000년에 들면서 6.6%이던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2020년에는 44.9%까지 올라갔다. 독일의 2030년 신재생에너지 목표는 65%이고 2050년에 80%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영국의 경우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2000년 초 2.7%에서 2020년 42.3%까지 증가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2000년 1.5%에서 2020년 6.4%로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독일은 매년 250억 유로 즉, 34조 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입하여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있다. 현재 선진국과 우리나라와 신재생에너지 격차는 현재 무려 20년에 달한다.유럽 여러 국가가 신재생에너지 공급에 집중하는 이유는 RE100(신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약속하는 글로벌 캠페인) 때문이다. RE100은 각 정부가 주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기업들이 국제단체와 함께 2050년까지 기업에서 사용하는 전기 100%를 신재생에너지로 사용하고 거래 기업도 100% 신재생에너지를 쓰도록 하겠다는 자발적인 협약이다.벌써 30여 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들이 RE100을 달성했고, 주요 글로벌 기업 대부분이 2027년까지 RE100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EU에서는 2026년부터 CBAM(탄소국경조정제도)을 실시하여 EU로 수출하는 국가에 탄소국경세를 징수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미국도 곧 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법안을 준비 중이다.우리나라는 무역이 GDP에서 60%나 차지할 정도로 해외교역을 통해 먹고사는 나라다. 따라서 RE100이든, CBAM이든,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될 수 있는 나라다. 지난해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22% 넘어선 미국조차 향후 하나의 완결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468조 원을 투입하고 있다. 이 돈은 태양광·풍력에 대한 투자, 새로운 송·배전망 구축, 전기 충전소 신규 건설, 전기자동차 보조금 지원 등에 소요되는 자금이다.이런 국제적인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전 정부에 비해 오히려 축소하는 것은 충격적이다. 요즘 산업현장에 가보면 대부분 기업들이 RE100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는 곳은 거의 없다. EU에서는 2026년부터 발효하기로 한 CBAM을 2025년으로 앞당기려는 움직임이 있고, 미국도 곧 시행할 태세여서 조만간 우리 국가 경제가 난관에 봉착할 수 있는데도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외면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우리나라 지역 특성이 신재생에너지 축소 이유로 거론된다고 하는데, 신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독일의 경우 국토의 대부분이 위도 50° 이상, 우리나라는 위도 38° 이하에 위치해 있어 햇볕 양이 우리나라가 훨씬 풍부하다. 우리나라가 하루 평균 햇볕을 쬘 수 있는 시간은 약 3.9시간이고, 독일은 약 2.8시간에 불과하다.풍력에너지도 한국은 3면이 바다로 형성돼 있어 독일에 비해 비교적 풍부한 나라이다. 부지 또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으로 표현되는 오랜 농경 정책을 유지하다 보니, 식량안보라는 이름으로 농지에 태양광을 쉽게 설치할 수 없도록 돼 있어 신재생에너지를 설치할 부지가 부족할 뿐이다.한국환경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주요국이 신재생에너지를 25%씩 증가시키는데 17년~30년 걸린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부터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2배 내지 3배의 속도로 신재생에너지를 공급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고 한다.이제 신재생에너지 시대를 맞아 자원 빈국인 우리가 ‘신재생에너지 자립’만큼은 반드시 이뤄야 한다. ‘신재생에너지 자립’을 위한 충분한 햇볕과 바람, 토지가 있다. 선진국이면서 제조업 강국인 독일을 모델로 해서 최단기간 내에 ‘신재생에너지 자립’을 달성하는 것이 우리나라가 국제무역을 통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윤석열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축소는 기후 위기 대응과 기업의 수출 경쟁력까지 동시에 포기하는 정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022-09-18

태양광 복마전

우정구 논설위원 복마전(伏魔殿)은 마귀가 숨어 있는 전각으로 나쁜 일이나 음모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악의 근거지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소설 수호지(水滸志)에 등장하는 표현이다.책에는 왕의 심부름으로 용호산에 은거하고 있는 장진인을 만나러 간 홍신이 그곳에서 복마지전을 발견하고 그 속에 놓인 석비(石碑)를 들추니 108명의 마왕이 뛰쳐나왔다는 얘기로 꾸며져 있다. 100명이 넘는 마왕이 숨어 있었던 곳이니 악의 굴이라는 의미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부와 권력이 얽혀있는 듯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각종 비리 사건들을 언론은 복마전에 곧잘 비유해 보도한다. 부산 엘시티 의혹이나 대장동 사건 등도 복마전으로 불렸다.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면서 친환경 에너지사업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인 태양광 사업이 복마전이 됐다는 소식이다. 정부 합동부패예방추진단이 전국 12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태양광과 관련한 정부 사업비 운영실태를 표본 조사했더니 2천600억원이 넘는 돈이 부당하게 집행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한덕수 총리가 이를 두고 “태양광 사업에 나랏돈이 밑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새고 있다”고 개탄하듯 언급해 사태가 매우 심각함을 짐작케 한다.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번에도 정부의 눈먼 돈이 얼마나 새어 나갔는지 궁금하다. 샘플 조사에서 드러난 비리가 빙산의 일각일 거라는 관측이 나오니 정부 사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탈원전의 대안으로 문재인 정권이 의미심장하게 추진한 태양광사업이 위법과 비리로 얼룩졌으니 사업의 신뢰 추락은 물론 전 정권의 친환경 정책에도 누를 남길 수밖에 없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9-15

복수의 정치학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한국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는 여야간 정치보복이 반복되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다. 정치보복이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대통령제를 선택한 이후 정권을 잡은 대통령들이 나름대로 정치적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권 후 자신의 업적을 쌓는 데 몰두했다.예를 들면 좌우 대립의 혼돈 속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한·미 동맹을 이끌어낸 이승만,‘한강의 기적’으로 경제를 일으킨 박정희, 탈냉전의 북방정책으로 한국 외교의 르네상스와 남북 화해의 시대를 연 노태우, 독재정권과 목숨 걸고 싸워 민주화를 쟁취하고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을 단행한 김영삼, 외환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살리고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한 김대중이 있었다.물론 5·18 광주사태와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정권을 쿠데타 동지인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물려줬다가 감옥살이를 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예외다. 이들은 각자의 시대가 던져준 어려운 숙제들을 피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정치보복 얘기가 나온 것은 바로 그 이후의 대통령부터다.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수사를 받던 중 극단적 선택을 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구속됐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집권기간 동안 적폐청산으로 포장된 ‘분열의 정치’를 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보수·진보의 갈등도 모자라 친이·친박, 친노·반노, 친문·반문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인물 중심의 프레임이 난무했다. 결국 ‘국민통합’은 점점 더 이루기 힘든 과제가 됐다. 국가원수가 정치적 반대세력을 정죄하는 데 온힘을 쏟으며 포용의 자세를 버린 결과다.윤 대통령의 위기 요인은 분명하다. 부인의 허위 경력 의혹과 장모의 비리 혐의 등에 대한 뭉개기다.‘공정과 상식’을 모토로 집권한 그가 자신 주변의 허물을 모른체 하다보니 집권 후 고정 지지층까지 흔들리며 지지율이 떨어진 것이다.끝내는 야당이 ‘김건희특검법’으로 공세에 나섰다. 이에 맞서는 방법은 정공법이 최선이다. 부인의 과실이 있다면 사과하면 그뿐이고, 장모의 비리가 있다면 그에 상응한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런 연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수사 역시 똑같이 공정하게 처리하면 된다. 사실 이 대표에 대한 사법리스크는 야당 측도 짐작하는 바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의 핵심 인물들이 공포영화의 주인공처럼 잇따라 목숨을 끊고 있는 것이 국민적 의혹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도 야당은 이 대표에 대한 수사 자체를 ‘정치보복’프레임을 걸며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려한다.보수와 진보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며 권력의 부패를 견제하는 민주주의 작동원리는 존중돼야 한다. 이것이 정치보복이란 독소로 부패되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여야 정치권이 내면의 양심과 역사의 엄중한 요구에 귀를 열고, 응답해야 할 때다.

2022-09-15

정부는 포항제철소 정상화에 총력 쏟아라

정부와 경북도가 태풍 ‘힌남노’로 심각한 피해를 본 포스코 포항제철소와 철강산업단지 기업들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4일 “철강산업 피해 관련 수해 현장 복구를 총력 지원하고, 수요산업 및 수출입으로의 파급을 최소화하기 위해 ‘철강 수해복구 및 수급점검 TF’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이날 제1차 TF 회의를 열어 피해복구현황과 애로사항, 자동차·조선산업의 철강재 수요현황 및 전망에 대한 의견을 듣고, 포항지역 철강생산이 정상화될 때까지 TF를 계속 가동하기로 했다. 정부는 곧 ‘철강수급 조사단’을 구성해 정확한 피해상황 파악, 현장 복구지원 및 철강 수급영향에 대한 전문가 진단을 시행한다. 회의에 참석한 장영진 산업부 1차관은 “포항제철소 2열연공장의 경우 재가동까지 최대 6개월 걸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경북도도 이날 포항철강산업단지에서 이철우 도지사 주재로 ‘포항철강공단 정상화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기업들은 “모터, 기계 등 장비·설비 침수피해가 커 장비 세척, 정비 전문 인력을 지원해달라”고 건의하면서, 항구적인 수해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경북도는 “신속한 피해복구를 위해 주 52시간 연장근로 신청 시 고용노동청에서 조기에 인가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현재 포항제철소와 포항철강산업단지의 피해복구가 지연되며 국내 산업계 전체가 비상이 걸린 상태다. 통상 산업현장에선 한 달치 재고만 확보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복구가 빨리 이뤄지지 않으면 자동차, 조선, 건설 등 산업 전반에 위기가 닥치게 된다. 산업부 조사단이 포항제철소에서 큰 피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책임여부를 따지겠다는 소리도 들리는데, 우선은 조업정상화를 위해 총력을 쏟는 것이 순서에 맞다. 철강재는 ‘산업의 쌀’이라고 불려왔을 정도로 국내 대부분 산업의 핵심 자재다. 산업부 TF와 조사단, 그리고 경북도는 포스코와 힘을 합쳐 철강재 생산 정상화가 하루라도 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모든 복구조치를 마련하길 바란다.

2022-09-15

반도체 산업 육성에 지방이 소외되선 안 된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반도체산업경쟁력 강화특별위원회 초청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양금희 의원(대구 북갑)과 김영식 의원(구미을) 등 지역의원들은 반도체산업 육성과 관련해 지역의 현안을 건의했다.양 의원은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지방대학에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 마련 등 정부의 관심을 요청했으며, 김 의원은 구미 국가산업단지 5단지를 반도체 특화단지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 또 조명희 의원(비례대표)은 반도체 인력양성을 위해 지방거점대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반도체 산업 육성은 새 정부의 핵심 경제전략이다. 정부는 10년간 반도체 인력을 15만명 양성하고, 5년간 340조원의 기업투자를 이끌어 반도체 초강대국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날 오찬에서 윤 대통령도 “반도체는 4차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며 우리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강조했다.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도 반도체 산업시장 선점에 불꽃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내서도 정부 반도체 산업 육성계획에 맞춰 지방도시마다 관련산업 유치에 혈안이다. 그러나 정작 정부의 전략은 수도권 규제완화 등으로 이어져 지방의 도시는 소외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정부가 수도권 비수도권 구분없이 반도체 학과 정원을 확대했다고 하지만 학생들의 수도권 선호를 감안하면 지방대학은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수 있는 것이다.특히 정부의 대규모 투자전략이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수도권과 비수도권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화될 수 있다. 윤 정부가 국가 시책으로 지향하는 국가균형발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경북 구미 국가산업단지에는 SK실트론, LG이노텍 등 123개의 반도체 관련기업이 있으나 반도체특화단지 지정에 소외돼 있다. 구미시와 경북도가 특화단지 지정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정부의 도움없이는 힘들다. 반도체특화단지로 지정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수도권 집중화에 밀리고 있는 것이 지방의 현실이다.반도체 산업의 지방도시 확대는 지방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정부의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2022-09-15

이재명 구하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영화다. 라이언 일병은 4형제 중 막내인데, 위로 세 형들이 모두 참전을 했다가 전사했다. 이를 알게 된 육군참모총장이 그 막내아들만이라도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행방을 알 수 없는 라이언 일병을 구출해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 임무를 맡은 밀러 대위와 7명의 대원들이 벌이는 활약상이 영화의 줄거리다. 마침내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지만, 그 작전을 수행한 대원들은 밀러 대위를 포함해 여섯 명이 죽고 두 명만 살아남는다. 이 영화는 웅장한 규모와 실감나는 전투장면이 압권이지만, 한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섯 명이 희생되었다는 측면에선 생각의 여지가 많다.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이재명 대표를 구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물론 위의 영화에 나오는 라이언 일병과 이재명 대표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네 아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서 세 아들이 죽은 노모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정신에 대한 경의와도 ‘이재명 구하기’는 거리가 멀다. 구태여 공통점을 찾자면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다는 걸 들 수가 있겠다.민주당의 ‘이재명 구하기’는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여당시절부터 수사팀을 해체하고 정권에 추종하는 검사들로 교체하는가 하면 검찰총장의 옷을 벗게 하고, 꼼수와 편법을 써서 검찰 수사권을 완전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래놓고 이재명을 대선후보로 밀었다가 낙선을 하자 대신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주고 당 대표를 시키더니 당헌까지 개정하는 등 3중 4중으로 ‘방탄조끼’를 입혔다. 그래도 검경의 수사가 계속되자 ‘김건희 특검법’을 들고 나와 맞불을 놓고, 심지어는 법무장관과 대통령의 탄핵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하도 기상천외해서 대한민국 헌정사에 길이 남을 일이 아닐 수 없다.라이언 일병은 낙하산을 타고 적진에 뛰어들었지만 이재명 대표는 온갖 비리의 의혹에 둘러싸여 있다. 허위사실공표(선거법위반)로 기소된 것을 시작으로 변호사비 대납 의혹, 대장동과 백현동 개발특혜 의혹, 성남 FC 의혹 등 지금 수사 중인 사건만도 십여 개나 된다. 그야말로 항우장사도 어쩔 수 없는 사면초가여서 민주당이 이재명 대표를 무사히(?) 구출할 가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영화에선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려다가 여섯 명의 대원이 죽었지만, 겹겹으로 둘러싼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끝내 이재명도 구하지 못한 채 엄청난 희생만 치르게 될 것이란 얘기다. 오로지 진영논리에 눈이 멀어 애당초 부당하고 승산도 없는 일에 올인 하다가 명분도 실리도 잃고 치명상만 입게 될 것이 빤히 보인다.밀러 대위는 죽으면서 라이언 일병에게 가치 있게 살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했다. 그래야 자신과 대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력투쟁을 하고서도 이재명을 구하지 못한 민주당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이재명은 이제라도 국회의원직과 당대표직을 내려놓고 성실하게 검찰의 수사에 임하는 것이 그나마 당과 자신을 위한 최선이 될 것이다.

2022-09-15

인생도 운전처럼

윤영대 수필가 차를 운전하여오면서 인간의 삶도 운전과 같음을 알았다. 사고 없는 운전을 위해서는 운전 기술도 있어야 하지만 신호와 차선을 잘 따라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듯이 탈 없이 인생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도 지켜야 할 법과 가야 할 길을 잘 알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가끔은 뜻하지 않는 장애물도 만나고 위반해 보고 싶은 유혹도 있을 것이며 자신도 모르게 교통위반 딱지가 날아오기도 한다.운전의 기본은 가고 서는 것이다. 출발과 정지의 기술뿐만 아니라 가야 할 때와 서야 할 때를 잘 판단해야 하는데, 그 가고 서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신호등이며, 길이 교차하거나 갈라지는 곳, 또 주의해야만 하는 곳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의 인생에도 무수한 신호등이 깜빡거린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호등일 뿐이며, 모르고 지나치기 쉽고 지나고 나서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이다. 빨간 신호가 들어오면 괜히 짜증 나고 푸른 신호에 맞게 잘 통과하고 나면 기분이 좋듯, 우리 삶도 앞이 막히거나 잘 풀리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일이 잘되어 나가면 몸도 마음도 즐겁고 가벼워진다.빨간불은 정지 신호다. 그러나 좀 있으면 파란불이 켜진다. 그런데 그 몇 초간을 묵묵히 잘 기다리는 사람과 사뭇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성격 탓만은 아닐 것이다. 파란불은 계속 달려도 좋다는 신호다. 그러나 언제 빨간 신호로 바뀔지 모르는 것에 대비하여 브레이크에 발을 얹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흔히 푸른 신호를 보고 달려왔을 때, 가속해 통과하려고 하기 쉬운데 자칫 신호 위반과 함께 사고의 위험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인생도 그렇다. 앞날이 약속되고 순탄하게 승승장구할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안하무인으로 달려나가다 보면 자기 페이스를 잃고 큰 실패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호는 빨간불보다는 파란불일 때 더 위험하다. 푸른 신호에서 브레이크를 밟아가는 사람과 가속페달을 밟는 사람, 이 두 경우 항상 사고는 후자의 경우에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적한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릴 때 빨간 신호가 보이면 속도를 줄이며 다가가서 정지하는 일이 없이 다음 푸른 신호에 맞추어 통과하는 시도를 한다. 빨리 가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서서히 가다가 서지 않고 통과하는 것이 쾌감도 있고 서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우리의 인생에도 신나게 달리는 푸른 신호만 켜지는 것이 아니다. 빨간 신호가 들어오면 잠깐 서서 허리도 펴고 눈을 들어 앞을 보는 여유를 가지자. 명절날 정체된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버스 전용차선으로 용감하게 질주하는 규정 위반의 차들을 본다. 바쁜데도 차선을 지켜 가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규정을 지키며 천천히 밀려가는 많은 차량을 볼 때 동행의 평온함을 느낀다.푸른 신호 앞에서 브레이크를 조금씩 밟아가는 지혜와 밀리는 차량의 물결을 따라 천천히 달리며 멀리 보는 여유를 운전하면서 깨달았다. 남은 내 인생의 운전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2022-09-15

삶의 종점을 내려다보며

정미영 수필가 비바람이 하릴없이 들이치는 날이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국화원이 소슬히 떨고 있다. 오늘 떠나는 망자의 삶에도 비바람이 많았는지, 국화원이 슬픔을 응축한 채 웅크리고 있다.작년, 신축 아파트 담장 너머에 이층 건물이 들어섰다. 세련된 외벽에 국화꽃 한 송이와 국화원이라는 글자만 간판으로 걸려있어 몇몇 사람들은 미술관인줄 착각하지만, 이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례식장이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에 존재와 부재의 형체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서로 껴안고 이별하는 공간이다.나는 조문객의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며 가늠해 본다. 가까운 이와의 별리가 주는 슬픔의 깊이를.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는 사람,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 울음을 삼킨 채 눈물을 훔치는 사람 등 죽음 앞에서는 같은 상실의 무게를 지닌 것 같아도, 톺아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농도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공무원이셨던 친정아버지는 출장을 떠난 길 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비보를 접하고 황망히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보았던 안내판에 쓰인 망자의 이름이 낯설었다. 내 아버지지만, 더는 부를 수 없는,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없는 공허감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영정사진을 쳐다보면 짙은 슬픔의 농도로 무거워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그 날의 장면들이 오버랩 될 때면 장맛비에 봇물 터지듯 가슴속에 눈물이 쏟아져 차오른다. 먹먹하게 온몸을 짓누르는 강렬한 슬픔이 상실감으로 변주되어 내 마음속으로 재빨리 휘감아 흘러 들어온다.며칠 전,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죽음을 대하는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무겁고 엄숙하지만은 않았다. 고인은 삼 년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했다. 죽음의 유예기간 동안 아흔여섯 살의 고인과 가족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고, 서로 따뜻하게 감싸 안는 시간이 많았단다. 그런 연유로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지인은 평온하게 전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서아프리카 가나에서는 댄싱 장례식이 유행이라고 한다. 상여꾼들이 관을 어깨에 짊어지고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바닥에 앉거나 드러눕는 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로 장례식장을 흥겹게 축제 분위기로 이끈다. 망자를 절차에 따라 추모하는 엄숙하고 차분한 진행이 아니라 템포 빠른 음악과 경쾌한 춤을 통해 고인과 작별하고 유가족과 조문객을 위로한다고 한다.나에게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고인의 생전 삶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이켜보는 것은 좋은 의미인 것 같다.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준비가 필요한 일은 각자의 죽음을 잘 대비하는 일임에랴.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현재에 남겨진 사람에게도, 서로가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도록 이별 연습을 미리 해보면 좋을 성 싶다.웰다잉(Well-Dying)! 가족들이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훈훈한 내 장례식 풍경을 만들려면 평소에 자주 떠올려야 될 단어다.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금기(禁忌)를 상기(想起)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 성찰을 통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뚜렷하게 돋을새김으로 각인된 의미 있는 장례에 대한 나만의 인식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어느덧 나도 계절을 알리는 인생시계의 시침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오늘, 나의 장례식 장면을 두 눈 감고 상상해 본다.향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듯하더니 울컥, 미세한 애잔함이 눈물로 변해 뚝뚝 흘러내린다. 장례식장의 차가운 공기, 껴안고 흐느끼는 가족들,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온몸을 감싸고돈다. 삶의 종점, 먼 것 같지만 언젠가는 내가 닿을 곳이다.나는 지금, 나의 장례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국화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2022-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