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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몸과 마음 사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근 20일째 가을장마가 계속되다 보니 우려와 이변도 뒤따르고 있다. 집중호우가 수시로 내리고 태풍이 쏟아낸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부분적으로 유례없이 많은 피해를 가져왔다.또한 일조량이 부족해 곡식과 과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예찰과 더욱이 장기적인 우천과 흐릿한 날씨가 주는 우중충함으로 코로나 블루의 침울함이 더욱 깊어질지도 모를 가을의 길목이다.사람이 보고 듣고 맡고 맛보며 느끼는 등의 감각은 순전히 외부적인 현상과 사물에 대한 반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희소식을 듣거나 맛난 것을 먹으면 기쁘고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인 감각기관의 촉수에 따라 인식과 느낌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으며, 동일한 현상을 두고도 달리 여길 수 있음은 자신의 생각이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어떤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은 몸으로 느끼거나 받아들인 것을 마음이 알고 같이 움직인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인지과학(認知科學) 측면에서는 인간이나 생물의 인식과정을 대상으로 한 지식의 표현, 추론기구, 학습, 시각·청각 등의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를 오래 전부터 진행해왔다. 하지만 몸이 느끼는 것을 마음마저 일치시켜 함께 느끼기란 결코 만만찮고 쉽지 않은 일이다.몸은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직감적으로 움직이는데, 마음은 태평이고 무덤덤할 때가 많다. 또한 행실은 바르고 착한데 마음은 악하고 독한 경우를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곧 몸과 마음이 따로 놀기 때문이며, 마음은 가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거나 몸은 원하는데 마음이 뒤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 그것은 곧 진심과 진솔함이 아닐까 싶다.옛 현인들은 몸과 마음의 일체와 수양을 위해 수신과 도야를 일삼으며 마음의 밭에 진실의 나무를 심고자 노력했다. 진실되고 너그러운 마음의 바탕에서 건실한 나무가 튼실히 자라난다고 굳게 믿었다. 궁극적으로 몸과 마음은 하나이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상호작용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감각적, 감정적 상태와 신체적 변화 사이에는 연관성이 많다. 이를테면 사랑에 가슴이 뛰고, 슬픔에 창자가 끊어지며, 분노에 피가 치솟는다고 하는 것처럼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몸과 마음 사이에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명상(瞑想)’이 있다. 흐트러진 마음을 모으고 번잡함을 가라앉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명상은, 사유와 관조를 통해 성찰하는 일종의 마음수련이라 할 수 있다. 알고 보이는 만큼 느낄 수 있듯이, 평온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고 비추어보면 코로나에 찌든 심약함도, 구름처럼 드리워진 우울감도 말끔히 치유되지 않을까?

2021-09-06

죽장 수해복구 현장에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동동거리면서 시작된 팔월이 건들바람결에 마무리되고 있다. 설마하던 코로나19 감염 4차 유행이 수도권과 지방 전역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위중증자와 사망자가 갈수록 늘어나니 초조와 불안이 가중된다. 거기에 지난주 12호 태풍이 몰고온 엄청난 폭우로 포항 죽장면 일대의 도로와 주택, 농경지에 많은 피해를 가져와 시름을 더하고 있다. 코로나의 난맥상에 자연재난까지 겹쳐서 여전히 안절부절 동동거리고 있다.다른 지역이나 어디 먼 곳의 일처럼 여길 때가 많았었는데, 막상 우리 지역, 그것도 자주 드나들던 곳이 하루 아침에 수마에 할퀴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돼 피해주민들은 얼마나 애가 타고 허탈해할까? 70년을 넘게 입암리에 살면서 이렇게 물난리가 난 적은 처음이라며 한숨을 내쉬는 분이나, 올해 농사는 접는 셈치더라도 사과나무가 뿌리채 뽑히고 농기계마저 떠내려가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는 분들의 탄식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피해현장은 억장이 무너질 정도지만 복구의 손길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피해지역마다 각계각층의 봉사와 구호물품의 지원이 이어지고 온정을 나누는 모습들이 늘어나고 있다. 포항시와 유관기관은 군인, 공무원, 자원봉사자 등 수천명의 인력과 수백대의 장비 동원으로 서서히 상처를 씻어내고 복구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필자 역시 포항예총 산하단체 수해복구의 일환으로 지난 휴일 방흥리 수해현장에서 포항문인협회 회원 등과 함께 작으나마 도움의 손길을 보탰다. 간간이 비 내리는 중에 장화를 신고 자갈에 휩쓸린 사과나무를 일으켜 세우며 가지에 쌓인 풀잎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다 보니 하루가 금세 갔지만, 한결같이 노력과 정성을 다했다.죽장지역의 폭우로 인한 피해 규모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눈덩이처럼 계속 커지고 있다. 죽장면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마을이 주로 하천 주변에 형성돼 있어서, 이번에 하천 범람과 도로 유실 등으로 북부지역 마을 대부분이 피해를 본 것으로 보인다. 근 3년 전에 발생한 포항촉발지진 피해조사 마감이 8월말인데, 죽장지역에 한정되지만 폭우 피해조사를 해야 하니 포항시가 이래저래 바람 잘날 없는 나날이 돼가는 듯하다.사람사는 세상에는 풍파와 재해가 끊이질 않는다지만, 태풍이나 홍수, 지진 같은 자연재난은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도 있다. 천재지변을 탓할 수야 없겠지만,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재앙과 불행 앞에서는 누구라도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기상이변으로 인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풍수해 예방책이나 효과적인 대응체계로 인명이나 재산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듯싶다.예기치 못한 폭우로 초토화된 수해현장에 그래도 재해 구호와 복구에 온정의 손길이 타지역에서까지 답지해 아름답기만 하다. 어려움 앞에서는 모두 하나된 마음으로 힘을 합해 협력하고 봉사하며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뻗어야 하리라. 그래서 수해복구를 앞당기고 수마의 상흔을 애써 지워 더이상 동동거림 없는 가을을 맞이하길 기대해 본다.

2021-08-30

계절의 和音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풀벌레 울음소리가 한결 맑고 또렷해졌다. 처서 지난 하늘은 조금씩 높아져가고 아침저녁의 공기가 서늘해지니, 새벽녘이나 해거름에 새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온갖 벌레들의 합창이 청아하기만 하다. 특히 비가 오고 난 뒤나 습도가 높은 날에 많이 울어대는 지렁이 소리는 어찌나 크고 선명한지, 귀를 의심할 정도로 요란하지만 결코 시끄럽거나 어수선하게 들리지는 않는다.여름날의 문서를 벽장 속에 넣어둔다고 하는 처서(處暑)는 더위를 마감하고 선선해지는 때라 할 수 있다. 요즘처럼 수일째 가을장마가 계속되기도 하지만, 맑은 날에는 노염(老炎)이 만만찮게 꼬리를 물기도 한다. 계절이 바뀌게 되는 현상은 달력의 숫자보다도 먼저 미세한 자연의 변화나 울림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여름날을 노래하는 매미나 가을날을 부르는 풀벌레들의 거침없는 울림이다.“소나기 멎자/매미소리//젖은 뜰을/다시 적신다//비오다/멎고//매미소리/그쳤다 다시 일고//또 한여름/이렇게 지나가는가//소나기 소리/매미소리에//아직은 성한 귀/기울이며//또 한여름/이렇게 지나보내는가” -김종길 시 ‘또 한여름’ 전문최근 들어 장마 같은 비가 수시로 내리다 보니 소나기도 잦아졌다. 무더위와 코로나에 시달리는 후줄근한 일상의 쉼표 같은 빗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나면, 때에 따라서는 하늘에서 고운 무지개가 피어나며 잠시나마 행운의 몸짓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소나기 그치기가 무섭게 매미들은 약속처럼(?) 일제히 선율을 토해낸다. 마치 퍼붓는 소낙비 마냥 온 사방에서 열창(熱唱)을 쏟아내며 여름날을 노래한다. 하긴 7년을 땅 속에서 살았으니 한달 남은 일생을 옹골차게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혼신을 다해 뜨겁고 벅차게 여름날의 세레나데를 구가하는지도 모른다.아직은 한낮의 매미소리가 쟁쟁한데, 어느새 귀뚜리며 여치 따위의 풀벌레와 지렁이까지 합세하여 자연의 시계소리 같은 가을의 시작음(始作音)을 연주하는 듯하다. 하찮은 미물도 이렇게 때가 되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온 힘으로 외치거나 울고 노래하면서 계절의 화음을 이어간다. 피고지는 꽃처럼 자연의 변화는 이처럼 울림이나 색채 등으로 아무런 거리낌이나 막힘없이 이치에 순응하며 넘겨주고 이어져서 조화로움을 더해가고 있다.과연 인간사회에서는 이 같은 자연의 편안한 어울림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일까? 물러나고 나설 때를 알고 목소리를 내고 침묵할 때를 알며, 타인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배려와 존중의 지혜는 그토록 까다롭고 체득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사람에게는 말과 글로 의사를 표시하는 것 이상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낄끼빠빠하며 신뢰와 융통성있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알량한 학식과 경박한 언행은 빈번한 엇박자로 자신과 주변을 찡그리게 하는 불협화음으로 치달아, 종국에는 자승자박의 그물에 갇히게 되는 꼴이 될런지도 모른다.물소리와 바람소리, 새소리와 풀벌레소리 등은 결코 아무렇게나 울리고 들리는 것이 아니라, 동화와 상생으로 공명하고 조율되며 변주하는 것이리라.

2021-08-23

떠나는 연습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새벽부터 내리는 빗소리에 잠을 깼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서늘한 냉기와 함께 이슬 같은 물기가 바람을 타고 스며들어 얼핏 눈을 뜬 것이다. 무더운 탓에 여름 내내 거의 거실에서 서쪽과 남쪽의 창문을 열어놓고 자게 되면서 새벽이면 지저귀는 온갖 새소리를 자명종 삼아 깨어나곤 했었는데, 오늘은 빗소리가 대신한 것이다. 후드득 새벽부터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더위에 지치고 코로나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씻어주는 듯 아침나절까지 시원하게 내렸다.그러한 빗줄기가 필자에게는 먼 곳에 있는 친구가 하염없이 쏟아내는 슬픔의 눈물처럼 다가왔음은 왜일까?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어느 시구절을 차치하고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가뭄을 적시는 단비가 될 수도 시름을 더하는 홍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새벽부터 처연히 내리는 비는 하늘에서 보내는 친구의 말없는 전갈처럼 전해지니 착잡하기만 하다. 친했던 친구가 세상을 뜬지 꼭 1년만에 은죽(銀竹)으로 보내온 무언의 새벽 안부.“청순한 가슴 결로/주고받던 정겨움//열리고 트인 마음/스스럼없이 나누며//언제나/의형제 같은 눅진함이 있었지//섬과 육지로 이어진 정의(情誼)에는/고난의 갈퀴도 세파의 회오리도//함부로/끊을 수 없는 철석(鐵石)이 스몄는데//불현듯 드리워진/암울의 빗장에도//담담하고 초연하게/단호히 맞섰건만//사십년/학연의 섶은/구천(九泉)에서 떠도네” -拙시조 ‘별리·Ⅰ’ 전문울릉도가 고향인 그 친구와 고교 1년 때 옆자리에 앉게 됐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한데다 집이 울릉도여서 왠지 모를 청순가련함이 들어선지 금세 친해졌다. 필자와 비슷하게 힐끗 잘 웃으면서 가끔 장난도 즐기고, 학업과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서로 격려와 진솔함으로 다독이고 챙겨줬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육지에 나온 친구와 필자의 고향으로 가서 꼴과 나락을 베고 감을 땄는가 하면, 여름방학 때면 울릉도 태하엘 가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며 수영과 잠수를 하고 홍합을 따서 열합밥을 함께 해먹기도 했었다. 졸업 후에도 수시로 친구와 연락하고 드나들며 우정을 쌓아 나갔었다.그런데 어느 순간 그 친구에게 알 수 없는 병마가 스며들어 작년 이맘 때쯤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작년 초여름에 태하성하신당과 친구의 고향집을 손수 찾아 ‘명랑 쾌유’를 간절히 빌었건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직은 산만큼 더 살아도 아까운 나인데, 친구와의 삶의 곡진함을 더 나눠야 하는데, 무엇이 그리 급해 기세(棄世)하듯이 떠나버렸는지 애절하고 비통한 마음 가눌 길 없다.우리는 매일 떠나는 연습을 하며, 매순간 누군가와 무엇을 떠나보내고 있다. 죽음은 어쩌면 또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기에 죽음도 삶의 일부로 여기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준비하여 죽음과 차분하게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이고 죽어서 가는 곳이 어딘지 모르기에,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그 마음으로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

2021-08-16

욕망의 왜곡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더위의 막바지인 말복(末伏)이지만, 좀체 꺾일줄 모르는 코로나19 감염증의 확산세 만큼이나 끈질긴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복날을 나타내는 복(伏)은 엎드린다는 뜻으로, 가을의 서늘한 금기(金氣)가 여름의 무더운 화기(火氣)를 두려워하여 세번(초복·중복·말복) 엎드리고 나면 무더위가 거의 지나가게 되는 셈이라 한다. 이른바 삼복 중에는 더위가 극성을 부리기 때문에 무기력해지거나 기운이 허약해져서 건강을 해치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곤해진 심신을 안정시키고 더위를 잊기 위해 청유(淸遊)하거나 탁족(濯足)을 하고, 보신(補身)음식을 먹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건강한 여름나기를 하고 있다.지긋지긋한 코로나에 시달리는데 더위마저 먹게 된다면 심신은 그야말로 사소한 일조차도 힘들어지게 된다. 소나기는 피해가는 게 낫다고, 코로나든 더위든 조금만 더 엎드리고 몸을 사려 조심하고 회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민감하고 우려스러운 상황에서 독불장군처럼 볼썽사나운 돌출행위로 괜스레 된서리를 맞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폭염과 전염병에 맞닥뜨리기 보다 몇 번 수그리거나 낮추면서 분위기와 여건에 맞게 순응하고 처신해야함은 비단 삼복(三伏)에만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예컨대 일상이나 주변에선 간혹 무지와 독선, 욕심의 남발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보도되거나 일어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판이다. 세상사 요지경(瑤池鏡)이라서 그러는 걸까? 세상이나 만물은 자연이 그러하듯이 음양과 오행에 따라 조화와 질서가 생기고, 상생상극의 이치와 순리 속에 안정적이고 균형적인 변화와 진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대자연계에서도 상생상극의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뤄가듯이 인간사회 역시 개인이나 조직이 화합하고 상충, 상반되는 논리와 견해에 따라 티격태격하는 ‘부조화의 조화’ 속에서 천태만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대부분의 부조화는 관점이나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나고, 아집과 욕망에 사로잡힌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으로 표면화하게 된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나 집단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그들의 노선을 지키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진실을 곡해, 호도하여 합리화시키거나 집요하게 선전, 회유를 조장하기도 한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오해와 갈등을 불식시켜야 함에도, 수시로 말을 바꾸고 억측과 왜곡으로 전(煎) 뒤집듯이 순식간에 번복을 일삼는데 무슨 수로 문제해결과 합목적적인 조화로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전형적인 표리부동이요 자가당착한 일이 아닐 수 없다.인간과 사회생활의 기본은 믿음과 약속이다. 믿음이 없으면 일어서지 못하듯이(無信不立), 신의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고 의지하기 어렵다. 철석같이 믿어왔던 사람이 욕망의 왜곡 같은 불신과 의문, 위선적인 행태를 일삼는다면 실망감을 넘어 환멸감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우연히 쳐다본 석양 무렵의 하늘에 야누스 형상 같은 구름이 바람에 쓸리고 있었음은 무슨 연유였을까? 사람은 어울림의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귀하다는 배려와 존중으로 겸손과 양보의 마음을 서로 나눌 때, 조화로운 공감의 꽃이 피어나리라.

2021-08-09

두벌 꽃 능소화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동동팔월, 여름날의 절정이다. 코로나19 방역 대응이 느슨해진 어정칠월의 틈을 타고 들이닥친 4차 대유행에 수도권과 지역별 감염세가 좀처럼 꺾이질 않다 보니, 동동거릴 수밖에 없는 8월이 되고 말았다. 연일 폭염지수 경신 예보와 무관중 올림픽 경기의 열기 못지않게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맞아 초미의 관심사가 돼버린 바이러스 감염증 재확산세에 여전히 불안하고 동동거리듯 조심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화살 같은 땡볕과 난마 같은 코로나가 걷잡을 수 없어도 여름꽃은 쉬엄쉬엄 하나씩 피어나고 있다. 개망초와 쑥부쟁이가 청록의 캔버스를 군데군데 하얗게 수놓는가 하면 낮은 언덕 한 켠에 긴 목을 뽑아내는 산나리 꽃잎이 살랑거리고 있다. 주위로는 배롱나무 가지마다 분홍빛 꽃망울이 등불처럼 켜지고 있고, 그 너머 능소화 덩굴은 수북한 줄기와 잎새를 드리우며 작은 나팔 같은 주황색 꽃을 촘촘하게 매달고 있다. 야트막한 산자락을 배경으로 거의 매일 접하게 되는 우거(寓居)의 뒤뜰 풍경이다.대체로 7월 초부터 집 안 뜨락이며 거리, 담벼락에 누런빛이 감도는 주홍빛 꽃을 피우는 능소화는 곳곳에 공기뿌리가 나와 다른 물체를 붙잡고 생육하는 덩굴나무이다. 금등화(金藤花)라고도 하는 능소화는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장원급제자에게 임금이 관모에 꽂아주던 어사화로 쓰이면서 특히 양반들이 좋아한 꽃이기도 했다. 덩굴로 뻗어가며 꽃이 피고지기를 반복하고, 시들지도 않은 꽃이 통째로 떨어져 품위 있게 진다 해서 양반들이 흠모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옛날에는 선비나 양반집 담장에만 심을 수 있다고 해서 ‘양반꽃’ 또는 ‘선비화’라 불렀다고 한다.그러한 뒤뜰의 ‘양반꽃’이 올 여름엔 두벌로 피어나서 이채롭기만 하다. 분명 지난 6월초부터 몇 송이씩 피어나는 걸 보고 올해는 더위가 빨라서 좀 일찍 피는가 싶었었는데, 그렇게 2~3주 정도 맛보기로(?) 피고는 잠잠하다가 7월 하순부터 본격적으로 피는 것이 아닌가! 드문 현상이거니와 십 수년째 서옥(書屋)엘 살면서 처음 보는 일이라 희한하기만 했다. 그러고보니 무언가 유추되는 일이 있었다. 지난 5월 하순부터 필자의 서실(書室)에서는 회사의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창단한 ‘붓글씨재능봉사단’의 단원들을 대상으로 서예기초과정 단체수업을 시작했었다. 서예에 관심있는 직원들이 모여 붓글씨를 배우고 익혀서 지역사회의 필요한 곳에 재능을 기부하고 전통문화를 나누자는 취지의 강습이었다.도심 속의 서실에서 묵향을 피우며 붓글씨를 배우는 서생(書生)들의 붓놀림이 궁금해선지 뒤뜰의 능소화가 서둘러 망울을 터트린 것은 아닐까? 선비의 기품 같은 능소화가 ‘어른학생’들이 먹을 갈아 붓으로 정성껏 점과 획을 긋고 연습하는 모습이 반갑고 가상해서(?) 애써 담장을 넘어 축화(祝花)처럼 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무렵 때맞춰 담장 아래 붓꽃이 피어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붓은 선비의 또 다른 손이다. 코로나의 난국에도 삼복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서예기초 학습에 열기를 더해가는 수강생들에게 저만치 능소화가 넌지시 격려의 손을 흔드는 듯했다.

2021-08-02

한여름의 삼매경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여름의 한복판, 삼복더위가 본때를 보이고 있다. 짧은 늦장마가 물러나기 무섭게 염천(炎天)은 대지를 달궈 대고 폭서는 염소뿔이라도 녹일 듯 사정없이 작렬하고 있다. 열돔 현상 탓인지 한반도를 에워싼 열(熱)공기층이 고기압에 지붕처럼 갇혀서 코로나19 감염증의 4차 대유행의 기세 못지않게 사람들의 머리 위로 화살 같은 폭염을 내리꽂고 있다.여름은 덥기 마련이지만 출구 없는 터널 같은 코로나 감염증의 재확산에 가뜩이나 지쳐가는데 더위마저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지역감염의 점차적인 확산세를 꺾기 위해 전국 피서지나 야영장의 인원제한과 시설물 통제, 이동자제 권유 등으로 피서마저 쉽사리 떠날 수 없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코로나에 시달리고 무더위에 주눅든 나날 속에 허우적대기만 할 것인가? 코로나의 와중에도 저마다의 생활 패턴 변화와 나름의 습성으로 한줄기 시련 같은 여름날을 차분하게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이를테면 이열치열(以熱治熱)로 더위와 한판 붙어본다든가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는 삼매경(三昧境)에 빠지다 보면 날름거리는 폭양의 혀쯤이야 가볍게(?)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요즘 같은 불볕더위에도 자전거 출퇴근을 고수하고 있는데, 간혹 주말 라이딩을 할 때는 더위와 정면승부라도 하듯이 푹푹 찌는 포도(鋪道)나 비탈진 흙길을 거침없이 달리면서 정말 비오듯 땀이 쏟아져도 몸과 마음은 외려 가뿐하고 개운함 속에 모종의 희열감을 흠뻑 맛보곤 한다. 그리고 혼자만의 몰입하는 시간을 통해 흥취에 젖다 보면 어느새 더위가 얼씬도 못하게 됨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묵향이 피어나는 서실에서 서책을 뒤적이며 붓 끝에 마음을 모아 선지에 한 점 한 획 써내려 가다 보면 운필하는 정중동(靜中動)의 열기 속에 더위는 아예 무색케 된다. 또한 오죽(烏竹) 잎새 가벼이 일렁이는 뒷마루에 편하게 앉거나 누워 관심있는 책을 탐독하다 보면 기웃대던 더위 따윈 댓잎의 바람소리에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만다.각인각색이라 제 나름의 피서법이 있겠지만 필자가 이처럼 수년째 즐기며 터득한 여름 나기 방식은 일종의 삼매(三昧)같은 마음훈련이 아닐까 여겨진다. 삼매란 순수한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일심불란(一心不亂)한 경지를 말한다. 그러한 상태에서 일을 하거나 학습, 운동에 몰두하면 주변의 상황에 개의치 않고 심취하여 열의를 쏟고 최선을 다하게 되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선택과 집중, 도전과 열정도 어찌보면 이 같은 삼매가 바탕이 된 마음작용이 아닐까 싶다. 사상 초유의 무관중으로 열리고 있는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도 정신집중이 잘돼야 선전(善戰)할 수 있을 것이다.굳이 삼매경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취향과 요령을 살려 건강한 여름날을 보내리라고 본다. 미증유의 바이러스 창궐로 인해 의료재난을 넘어 사회, 경제적인 재난의 위기로 파급되는 현실에 더위까지 먹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고 긴요한 대응을 해나갈 일이다.

2021-07-26

새들의 지저귐과 날갯짓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새소리에 깨어나고 눈을 뜨는 아침이 싱그럽다. 도심 속이지만 뒤뜰로 이어지는 작은 언덕과 간간이 차들이 오가는 도로 건너 야트막한 산에는 다양한 수목 속에 수많은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래서인지 새벽부터 아침, 낮과 저녁을 지나 밤이 깊을 때까지 우거(寓居) 주변에는 온갖 새소리가 끊이질 않고 수시로 포르릉 대며 날아가는 새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더욱이 주택가와 인접한 아파트 너머 솔숲에 집단서식하고 있는 왜가리떼의 유유한 날갯짓이 눈길만 돌려도 보이고, 끼루룩대거나 색색거리는 소리가 지척의 남창까지 들려오기도 한다.거의 매일 새들의 지저귐 속에 하루를 시작하고 밤새 울음을 자장가(?)로 여기며 하루를 마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짹짹거리거나 깎깍대고 삐르륵하는가 하면 쉬쭉쉬쭉 대다가 새콩새콩하고 보옥보옥하는 등의 경쾌함과 정겨움, 호젓함을 더하는 새 울음소리가 조류 수만큼이나 많고 가지각색이다. 마치 대륙별 인종이 수두룩 하고 언어가 다양하듯이. 뒤섞여 울릴지라도 결코 요란하지 않는 새들의 우짖는 소리는 그들만의 소통 수단이고 말인 셈이다.“언제부턴가/자명종 같은 새소리가 두드리면/깃 터는 아침이/선물처럼 다가와/샘솟는/환희의 빛살/온누리에 뿌리네//터질 듯한 음조로/하루를 탄주(彈奏)하느니 /초목의 푸르싱싱/새들의 무정설법(無情說法)/오롯이/추임새 삼는/꿈을 향한 날갯짓” -拙시조 ‘새소리로 여는 아침’최근 들어 새소리를 가까이서 새벽에 잠이 깰 정도로 들을 수 있다니 새삼스럽기만 하다. 사람들은 결코 알아들을 순 없겠지만, 새나 짐승들의 세계에서는 무리들만이 통하는 미묘한 울림과 특유한 몸동작으로 신호를 하거나 정보를 주고받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뒤뜰 화단의 돌확에 고인 물이나 소나무 아래 간수(澗水)처럼 떨어지는 물방울을 어떻게 알고 몇 종의 새들이 수년째 찾아와 재잘거리며 물을 받아먹거나 몸을 담그기도 하는 걸 간혹 지켜보면서, 짧고 단순한 새들의 지저귐 같아도 새들만의 대화이고 많은 알림을 전해주는 울림으로 여겨지게 됐다.몇 달 전엔가 우연히 TV에서 유럽 알프스의 어느 산골마을에 할머니 둘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100~200m 이상 떨어진 안보이는 곳에서도 특유의 방식으로 의사소통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분명 말로 외치는 것이 아닌, 무슨 새소리나 휘파람 같은 고함을 서로가 알아듣고서 나뭇가지를 이거나 지고 내려오는 모습에서 어쩌면 ‘새들의 소통’도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을까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뒷마당에 삼삼오오 놀러 와서 모이를 쪼아대거나 목을 축이며 주고받는 재잘거림이 새들의 정겨운 대화로 들리는 듯했다. 이른바 무정설법이란, 흐르는 물과 나는 새, 풀, 나무같은 금수초목(禽獸草木)도 모두 법을 설하며 은혜로 우리를 살리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새들이 아침을 열어주고 정답게 지저귀며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에서 새로운 활력과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다행스럽기만 하다. 새의 노래, 매미의 열창, 퍼붓는 소나기는 단순한 듯 강렬하다. 참 위대함은 단순함이며,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이다.

2021-07-19

마음이 흐르는 대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늦장마에 많은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상기온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 듯해, 올해는 34년 만에 가장 늦은 ‘지각장마’가 전국을 상처 내고 있다. 코로나19 감염증의 4차 유행 조짐으로 가뜩이나 불안하고 우려되는 마당에 인명피해와 물적손실을 가져오는 수마마저 덮치니 설상가상이다. 수시로 바뀌는 기후를 탓할 수야 없겠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재난에 근본적인 대비와 예방조치, 신속한 복구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기후문제는 생존의 문제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의 삶을 위협해온 기후변화는 문명과 개발에 따른 숲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되돌아오는 자연의 역습이 아닐까 싶다. 큰 관점에서 보면 빙하기와 온난화를 거치면서 나타나는 지구촌의 새로운 팬데믹도 결국 기후변화와 연관성이 있으며, 어쩌면 우리는 요즘 바이러스가 가져온 ‘역설적 평화’의 위기 속에 위태위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아무리 날씨가 변덕스럽고 기후변화가 심해도 사람의 마음 보다야 더하겠는가? 하루 동안 푹푹 찌는 폭염 속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휘몰아치다가 사정없는 장대비에 앞을 못가리는데, 어느새 여우비가 꼬리치더니 그림 같은 무지개가 드리워지는 걸 적지 않게 목격한 적이 있다. 또한 변화무쌍한 날씨 못지않게 자주 변하고 바뀌게 되는 사람의 마음이나 돌연한 행위를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보아왔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도 이쪽저쪽으로 마음이 오락가락하고 생각이 수시로 기울어지게 됨을 누구라도 몇 번씩은 겪어봤을 것이다.그래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水深可知 人心難知)고 했을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은 복잡미묘하며 생각에 따른 행동이 갈팡질팡할 수도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을 대하거나 의사를 표현할 때는 늘 조심하고 신중하며 한결같음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한가지 일을 두고도 상반된 견해에서 오는 저돌적, 배타적인 생각 보다는,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배려와 포용의 마음이 훨씬 현명하고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 것이다.사람은 마음이 흐르는 대로 말하거나 움직이게 된다. 느낌이나 끌림도 결국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무언가에 관심이 있거나 마음이 가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지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생각이나 행위가 어긋나고 치우치는 것은 평소 개인적인 성향이나 취향의 상충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예컨대 하루 아침에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고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대부분 오해나 공감 부족에서 오는 폐단이 아닐까 싶다.갈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세월이 오래 지나야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듯이(路遙知馬力 日久見人心)이, 오랫동안 함께 지내봐야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다.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럽지 않고 세류(世流)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이라면, 격의 없이 소통하고 흐르는 마음 따라 더불어 오래 갈 수 있을 것이다.

2021-07-12

새벽을 여는 맨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태양이 뜨거워지고 바다나 야외로 떠나는 발길이 잦아드는 7월이다. 여름철에 사람들이 바다를 즐겨 찾는 것은 시원한 파도소리 만큼이나 탁 트인 가슴으로 철썩이는 물결에 몸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름날의 무더위를 피해 강이나 바다, 산이나 계곡 등지로 피서여행을 떠나는 것은 지치고 반복되는 일상의 활력을 재충전하고 휴식과 휴양을 누리기 위함일 것이다. 더욱이 고질 같은 코로나19의 불안과 시달림에 갑갑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탈출한다는 그 자체가 청량제 같은 설레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 피서나 일상의 환기 차원이 아닌,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거의 매일 바다를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그것도 동틀 무렵에 나타나 맨발로 해변의 모래밭을 걸으며 주변에 버려지거나 파도에 밀려나온 쓰레기를 줍고 일출을 맞이하며 하루를 열어가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거나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벽이면 약속처럼 어김없이 모여들어 신발을 벗고 삼삼오오로 거닐며 해변의 쓰레기를 주어온지 벌써 500일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이색적이고 주목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들고/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정호승 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첫 수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별을 보며 도심 속의 바다로 나가서 마대를 옆에 차고 맨발로 모래톱을 거닐며 쓰레기를 줍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닐 수 없다. 작은 일이라도 마음먹기는 쉬워도 실천으로 옮기기는 만만찮다. 개인의 의지나 목적을 떠나 지역과 환경, 건강을 챙기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영일대 맨발 플로깅’은 ESG 관점에서 신선한 자극이고 새로운 희망이 아닐 수 없다. 플로깅(Plogging)이란 걷거나 달리면서 쓰레기를 줍는 운동을 말한다.지난 주말 필자는 애써 시간을 내 영일대해수욕장 맨발 플로깅을 체험했었는데 느낌이 정말 괜찮았다. 여명 속에 맨발로 걸으니 발바닥을 자극하는 모래의 촉감이 좋았고, 한 발 두 발 옮기며 쓰레기를 주우니 파도마저 추임새로 다가왔다. 더욱이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31년된 500원짜리 동전을 물 속에서 줍는 횡재(?)까지 하니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폭죽막대를 비롯한 별의별 쓰레기는 의외로 많았으며 철사 꼬챙이 등은 맨발 걷기나 해수욕장 이용객들의 안전을 위협할 정도였다.맨발로 땅을 밟는다는 것은 ‘어머니의 대지’인 지구와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전적으로 땅에 의존하고 있지만, 95%가 지구와 절연된 상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신선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물과 모래의 질감을 맨발로 느끼는 것은 땅과 우주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기에 환경사랑까지 실천하며 새벽을 열어가고 있으니, 하루가 얼마나 활기차고 풋풋할까? 작지만 숨은 노력들이 세상을 밝힌다.

2021-07-05

요구와 기대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담장 위 능소화의 배웅 속에 유월이 가고 있다. 길손인양 건듯건듯 불어오는 바람 결에 이제 막 피어나는 능소화가 나풀나풀 반기지만, 미끈 유월은 어느새 슬며시 상반기의 담장을 미끄러지듯이 넘고 있다. 초록 잎새의 변조 속에 여름채비를 하는가 싶었는데, 별반 해놓은 일도 없이 벌써 반년이 지나가고 있으니 세월여시(歲月如矢)가 새삼스럽기만 하다.상반기를 보내면서 저마다 과연 어느 정도의 진척과 성과가 있었는지는 각자가 헤아리고 챙겨야 할 몫이다. 개인의 목표와 계획, 애씀과 성취의 정도는 모두 자신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즉 단순 반복되는 무채색 같은 일상을 무지개빛 아름다움과 설레임으로 채우는 것은 순전히 자기자신이 새롭게 추구하고 힘과 정성을 쏟아 나가기에 달린 것이다. 하는 일이나 하고자 하는 과업의 경중 완급을 가늠하여 믿음과 의욕으로 몰입하고 밀어부치면, 자신과 주변에서 바라보는 요구와 기대를 어느 정도는 부응하고 충족시키지 않을까 싶다. 이른바 요구와 기대는 어쩌면 사람의 일생에 늘 따라붙고 함께하는 바람과 기다림이 아닐까 싶다. 태어나 자라면서, 자라나 배우면서, 배우고 일하면서, 일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사회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성장, 성숙과정에서의 요구와 기대는 늘 존재하고 결부되며 이어지게 마련이다. 자식들의 건강과 행복,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일은 모든 부모들이 원하고 갈망하는 희망사항일 것이다. 부모로서의 바람과 요구 속에 자식으로서의 요구와 기대가 어우러져 가정이 굴러가고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그러나 인간생활에 있어서 요구가 지나치게 많거나 기대가 너무 커지게 되면 예기치 못한 갈등과 마찰이 빚어질 수 있다. 요구(要求)란 받아야 할 것을 달라고 청하거나 모자람을 보충하고 과잉을 배제하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예컨대 부모가 자식들에게 무탈하기를 바라면서 몸조심하고 행복하기를 비는 마음과 비슷하다. 반면 기대(期待)는 자녀들이 학업을 성취하고 사업에 성공해서 출세하고 잘살게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일들은 요구하는 수준과 기대하는 범위의 차이와 괴리 속에 차질과 파행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가 숱하게 나타난다.최근에 조직과 사회적인 시스템의 요구와 기대수준의 엇박자로 인명피해와 물적 손실을 가져와 안타깝기만 하다. 철거건물 붕괴사고나 물류센터 화재사고 등은 직간접적인 사고원인이 있겠지만, 크게 보면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사안을 간과하거나 희망적으로 기대하는 부분을 너무 안이하게 경시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조직이나 시스템, 제품이나 운영 등에는 조건과 능력에 부합되는 최소한의 요구사항과 기대수준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한 요구나 기대에 따른 절차나 검토, 확인사항이 결여되거나 편법에 휩쓸리게 되면 결국 폐단과 불행이 파생하게 된다.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지키고 해야 할 것에 대한 요구치와 이루고 바라는 정도에 대한 기대치의 적절한 균형과 보합으로 보다 알찬 하반기를 맞을 일이다.

2021-06-28

마음결 따라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게 만물이 자란다. 고른 햇살에 때맞춰 비가 내리니 식물과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군데군데 연하거나 진하던 잎새들이 일제히 녹색으로 성큼성큼 기세를 뻗어가고 있다. 길섶의 풀이나 들꽃들은 저절로 피고 흔들리며 앙증맞게 손짓하는가 하면, 언덕배기에 뻗은 뽕나무 가지에는 검붉은 오디가 저절로 익어서 떨어지고 있다. 어디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는 한가로움을 노래하는데, 저녁답의 무논 주변에 깔리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요란한 듯 정겹기만 하다.현란한 꽃잔치가 끝나자 청산과 들판에는 초목이나 곡식들이 하루가 다를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과실이나 곡식이 자라고 익으면서 주변에는 달갑잖은 잡초도 덩달아 가세한다. 망종(芒種)을 전후해서 텃밭이나 옥답에는 농부들의 발길이 잦아든다. 보리를 수확하고 밭갈이나 모내기철의 들일이 많아서 들로 가는 발걸음이 많기도 하겠지만, 연중 낮길이가 가장 긴 하지 무렵에는 곡식이 자라는 것 못지않게 이틀이 멀다 하고 웃자라는 잡초를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논밭에 해를 끼치는 온갖 잡풀을 제초하고 농작물을 잘 건사해야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어릴적 농촌에서의 여름철은 ‘잡초와의 싸움’이기도 했었다. 들마다 고랑마다 농작물의 번성에 방해가 되는 잡초를 뽑고 또 베어내도 얼마나 끈질지게 돋아나고 거세게 뻗어가는지, 비가 잦은 6월 장마철엔 몇 차례 김매기를 해도 제초한 흔적이 전혀 나지 않을 정도로 금세 무성해졌다. 심지어 일손이 모자라 한동안 김매기를 놓치기라도 하면, 담배나 고추 작물을 짓누르듯 에워싼 거침없는 잡초더미를 보며 푸념부터 하시던 어머니께선 ‘호랑이가 새끼 쳐도 모를 정도로 우거졌다’는 말씀을 입에 달곤 하셨으니, 잡초의 위력(?)이 얼마나 어마무시할까.‘향그런 꽃 져버려 온 산 푸른데/가랑비 오는 속에 뻐꾸기 울음 울다/봄날 시름은 풀처럼 자라거늘/어느 때 낫을 얻어 마음의 뜰 베리오(芳花謝了滿山靑/細雨970F970F布穀聽/春日傷悲如草長/何時得91E4刈心庭)-강성위 한시집 ‘하늘에 두 바퀴의 달이 있다면(1991년)’중 ‘送春’잡초는 논밭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생각과 마음에도 여러가지 잡념 같은 풀들이 얼마든지 생겨나고 자라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정이나 비리, 과욕이나 무시, 편견이나 오만, 시기나 사악함 등도 어찌 보면 선량하고 진실됨을 갉아먹고 순리와 법도에 구멍을 내며 정의와 평온함에 흠집과 파문을 일으키는 악초악목(惡草惡木)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선현들은 늘 마음을 다스리며 절제와 경계의 낫으로 마음 자락에 웃자라는 잡스러움과 졸렬함의 풀잎을 베어내며 마음공부를 일삼았던 것이리라. 마음은 몸의 주인(心爲身主)이요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身爲心器)이니, 주인이 바르면 그릇은 마땅히 바르게 된다(主正則器堂正)고 했다. 평소에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꾸준한 자기노력과 한결 같은 수양이 따라야 한다. 뽑고 베어내도 속속들이 비집고 드는 잡풀 같은 우환을 멀리하고 사유의 뜰을 넓히며 마음이 흐르는 대로 몸을 저절로 움직이면, 마음결 따라 배이는 지덕과 풍운이 인향만리(人香萬里)로 피어나지 않을까?

2021-06-21

장기읍성의 文士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뻐꾸기 울음소리 이슬비에 젖어 드는 장기읍성을 거닐었다. 산딸기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밤꽃향이 그윽하게 피어나는 산성 둘레는 청록일색의 싱그러운 파노라마였다. 멀리 보이는 현내 들판에는 판서(板書)하듯이 온갖 작물들이 자라고 있고, 동악산 자락 대숲에는 산성을 호위하듯 창 같은 죽순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엷은 안개의 마중 속에 주변으로 천천히 눈길을 돌리면서 마름모꼴 읍성의 내력을 생각하며 옮기는 발걸음이 느긋하기만 했다. 포항문인협회 주관의 2021년 포항문학 하계세미나로 열린 ‘제35회 보리 문학제’에 동참한 것이다. ‘보리누름 문학제’는 지난 1986년 고 손춘익 아동문학가를 비롯한 지역 문인들이 대보 구만리 보리밭으로 떠났던 소풍에서 비롯됐다. ‘동해산문’에 실린 한흑구의 명수필 ‘보리’의 문학성을 기리며,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때 지역의 문인들이 회동하여 탁주 한사발에 글을 논하고 시를 읊조리던 것이 현재는 ‘보리 문학제’로 이어져 문인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색있는 문학행사로 자리매김했다.문학의 자취를 둘러보며 시민과 문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개성있는 예술적 감각과 문학적인 소양을 키우는 취지로 올해 35회째 맞이한 보리 문학제는 지난 12일 ‘벼랑 끝에서 길을 찾다’는 테마로 장기읍성과 장기유배문화체험촌 일원에서 열렸다. 첩첩산중, 바다에 둘러싸인 장기면은 예부터 사대부 유배지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 단일 현에서 가장 많이 정배된 곳이지만, 당시의 석학이나 정객들이 형벌의 땅에 머물면서 학문연구와 문풍이 되살아난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녹음은/서슬 푸른 정배(定配) 마냥 에워싸도/보리물결 의연히 원숙으로 익어가는/변방의 적거지(謫居址)에는/이끼 새삼 푸른데//혹독함이 키운 뿌리 튼실함을 더해가고/비운의 귀양살이 충정 외려 드높아/정념(情念)의 웅숭깊음이/초연하게 자라네//처연함에도/문기와 인지(人智)가 솟아/우암(尤菴)이 어리고 다산(茶山)이 배인 둘레/맥추(麥秋)의 바람결 따라/학덕이 넘실대네-拙시조 ‘장기유배지 소견’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펼친 강학과 남긴 시문들은 학문을 숭상하는 문화적인 풍토가 됐다. 외지고 궁벽한 귀양지에서 유배의 좌절을 서책 탐구와 저서 집필, 유생 교육 등의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지역의 소객(騷客)들이 1.4km 정도의 성곽을 둘러보고 녹음 속의 ‘우암과 다산의 사색의 길’을 걸으면서, 문필의 현대적인 계승과 문학의 새로운 지향점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사회적인 양상과 시대를 반영하는 문학은, 코로나의 고역에 시달리는 국민들에게 과연 어떤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문사(文士)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걸까?돌아오는 길, 신창리 해변의 몽환적인 해무 속에서 몇 편의 자작시와 수필을 낭독하고 경청하는 내내 파도도 흥겨운지 철썩대는 음률로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문학지망생인 포항문예아카데미 23기 수강생들도 그렇게 함께 어울리고 나눈 시간들이 정겹고 넉넉하게 맥랑치는 듯했다.

2021-06-14

포스코의 나눔과 베풂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6월의 아침을 노래하는 새소리가 경쾌하다. 저만치 보이는 포스텍 소나무숲 주위로는 백로와 왜가리가 유유히 날고, 효자아트홀 앞의 숲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사방에서 합창으로 들린다. 노랗게 익어가는 살구가 앞집 지붕 위로 보이는가 하면, 우거(寓居)의 뒤뜰에는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눈과 귀와 가슴을 열면 보이고 들리며 느끼는 것들이 많아서 누리달이라 하는가? 녹음이 반가운 6월은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나라를 지키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몸바친 수많은 분들과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혼신의 몸부림이 처절했었던, 위국 충의와 민중항쟁을 기리고 기념하는 때이기도 하다. 거룩한 뜻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숭고한 헌신과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보전되고 국민들의 안위가 보위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6월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엄숙하고 경건하게 선열을 기리고 위훈을 되새기며 추모와 보훈의 뜻을 다지게 된다.호국보훈의 달에 감사와 보은의 뜻을 담은 나눔과 베풂의 손길들이 참으로 가상하게 여겨진다. 포스코의 특별 봉사활동주간, 이른바 ‘2021년 글로벌 모범시민 위크’에 포항·광양·서울·인천지역의 그룹사·협력사는 물론 포스코그룹이 진출해 있는 6개 대륙, 53개국에서 기업시민 구성원인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다양한 봉사활동과 재능 나눔을 대대적으로 펼친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코로나19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희망을 전하고, 특히 올해는 정부의 2050 탄소중립 선언에 동참하는 의미로 지구를 살리기 위한 친환경활동 등으로 실시됐다. 작년에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참전유공자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에 감사를 되새기는 보훈기념물을 헌정하고,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서 조경작업 등의 환경정화활동을 하기도 했었다.여름의 길목에 이와 같은 움직임은 코로나19로 지쳐가는 이웃과 시민사회에 생기를 불어넣고, 시원한 녹음을 드리우는 푸른 숲처럼 위무와 희망을 아낌없이 주는 고마운 일이 아닐까? 봉사는 남을 배려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자발적인 의지와 섬기고 받드는 자세로 타인에게 도움과 용기를 줘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다만 일회성, 쇼맨십의 봉사활동이 아니라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으로 진정성과 공익성이 나타나도록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코가 지난 1991년부터 지역사회와의 자매결연을 시작하고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포스코봉사단을 창단해 임직원이 함께 하는 나눔의 토요일, 맞춤형 재능봉사, 1%나눔재단의 지원사업 등으로 체계적, 장기적인 사회공헌활동의 폭과 깊이를 더해가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할 것이다. 나눔과 베풂은 소박한 마음으로 이웃과 더불어 정성을 쏟을 때 아름다운 감동으로 피어난다. 학식과 재능을 나누고 일손과 노력을 더하며 온정과 물질을 베풀면 주변과 사회가 더 밝아지고 따뜻해지리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풂으로써 느끼는 보람과 만족감은 그렇게 해본 사람만이 체득하고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그렇게 베풀고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한결 향기롭고 살맛나는 행복한 누리가 될 것이다.

2021-06-07

듣는 책, 읽는 그림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많은 풍경을 접하게 된다. 초록의 잎새가 일제히 손 흔들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오리가 몸짓하며 금계국 노란꽃의 반김이 환호처럼 보인다. 차르륵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와 두 바퀴가 굴러가는 윙윙거림,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정겹고 시원하기만 하다. 거기에 한 쪽 귀로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게 되면 기분은 때에 따라 날아갈 듯 신나기도 한다.그렇게 자전거 타는 재미(?)에 빠져 즐겨 타면서 올해 들어서는 이어폰으로 음악 대신 책을 듣는 쏠쏠함을 누리고 있다.참으로 편리해진 세상이다. 책을 귀로 듣다니?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책 읽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도 아닌데,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정말 책을 읽듯이 들을 수 있다니 얼마나 유익할까?이른바 귀로 듣는 책, ‘오디오북’의 등장 덕분이다. 오디오북이란 책을 음성으로 낭독해 눈이 아닌 귀로 듣는 디지털 콘텐츠이다. 디지털기술의 발달로 비단 책만이 아니라, 방송이나 뉴스, 학습강좌 등의 왠만한 내용도 거의 모두 손 안의 스마트폰을 통해 보거나 들을 수 있다. 기술의 혁신과 문명의 진보가 갈수록 인간생활에 이로움을 더해주고 있다.바쁜 현대생활에 쫒겨 책을 가까이하기 힘들어지면서 독서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에 오디오북 같은 새로운 독서방법이 주목받고 있다.특히 독서시간이 부족한 바쁜 직장인들에게 최적의 독서방법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코로나19 시대에 비대면을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 같다.다른 일을 하면서도 책의 내용을 들을 수는 오디오북은 시간과 장소에 제약없이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며, 배경음악이나 효과음 등을 적당히 넣어 극적인 효과까지 낼 수 있는 특장점이 있다.출퇴근이나 청소, 빨래, 운동, 식사 등을 하면서 청각적인 독서를 하며 상상의 나래를 무한정 펼 수 있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필자는 주로 ‘책 읽는 다락방J’가 들려주는 음성을 즐겨 듣는다. ‘나를 사랑하는 연습’이라든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등의 에세이를 부담 없이 들으며 페달을 밟다 보면, 30여분의 출퇴근 시간이 짧게만 여겨진다. 그래서 간혹 퇴근길에는 연일이나 대송, 강동, 안계 등지로 돌아오곤 하면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담(詩談)을 들으며 들꽃의 향기를 맡기도 하고 들판의 정경을 시처럼 읽기도 한다. 또한 102세 철학자 김형석 명예교수의 ‘백년을 살아보니’와 ‘선하고 아름다운 삶’ 등의 인생강연을 들으며 내 삶의 노른자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한다.요즘은 이처럼 보고 읽는 것과 듣고 그리는 감각의 영역이 서로 넘나들면서 융복합적인 콜라보로 다양한 콘텐츠를 연출하고 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다채로운 멀티미디어 문화를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새로운 즐길 거리’를 취향이나 목적에 맞는 아이템으로 두루 활용하고 접목하면 자신의 삶에 크고 긴요한 도움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21-05-24

행복의 메아리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산에는 메아리가 산다. 골이 깊거나 뫼가 높으면 메아리가 더 많이 울린다. 산림이 울창할수록 메아리가 더욱 짙푸르고 계곡물이 맑을수록 메아리가 한결 청아하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잎새 소리도 어쩌면 산의 울림, 자연의 메아리가 아닐까 싶다. 자연은 시시때때 빛깔과 향기로 무언의 형체를 드러내고 소리와 울림으로 묵언의 수행을 일삼는 듯하다. 메아리를 머금은 산은 천년만년 무덤덤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만물의 변화무쌍함을 품으며 내밀한 울림으로 웅숭깊음을 채워가고 있다.사람에게는 행복의 메아리가 있다. 감사와 기쁨과 만족에서 비롯되는 행복의 메아리는 늘 가까운 곳에서 피어나고 있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행복의 메아리를 듣거나 울리지 못하고 엄벙덤벙 살아가는 듯하다. 작은 만족이나 배려와 존중, 이해와 공감, 도덕과 윤리, 사유와 교감, 역할과 기여, 노력과 성취 등 행복의 원천은 결코 어렵거나 거창한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듣거나 느끼고 만들어가는데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색하기만 한 것 같다. 자연과 멀어져서 부자연스러움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행복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일들은 마음먹기에 달렸듯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생각이 결정되고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같은 일이나 현상을 두고도 생각이나 관점에 따라 인지하고 판단하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음은 각자의 마음자리나 마음씀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一切唯心造)는 말처럼, 행복이나 불행도 결국 자신의 마음자락에서 결정되고 생겨나는 것이다.즉 마음의 밭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행복을 가꾸고 환희로 키워내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코로나19의 터널이 행복의 메아리를 멎게 한지 2년째, 언제 끝날지도 모를 환난에 여전히 일상을 잠식 당하고 있다. 몸도 마음도 메말라가는 코로나블루에 단비 같은 백신접종이 시작된지 수개월 째지만,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마음 챙김을 잘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른바 ‘마음 챙김’이란 현실에 처해진 자기연민으로 마음을 다잡아 어렵고 불편하고 힘겨움에도 차분하고 신중하게 자신과 주변을 성찰하여 긍정과 능동의 마음근육을 키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고통과 괴로움을 구분하여 참고 줄일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로 희망을 싹틔워 활로를 모색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을까?평온한 마음과 자기확신의 샘에서 행복의 물방울이 샘솟아 날 수 있다. 조급하고 불안함, 시기나 짜증에서는 살핌의 여유도 챙김의 따스함도 스미기 어렵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밝은 표정과 따뜻한 말 한 마디, 진심 어린 가슴과 다정한 손길로 다독이고 격려하는 마음결에서 행복의 여울이 잔잔하게 흐를 것이다.산에 옷을 입히듯 나무를 심고 가꾸면 메아리가 살아나듯이, 사람에게도 긍정과 배려의 몸짓, 칭찬과 감사의 표현을 켜켜이 쌓아가면 속속들이 행복의 메아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행복도 결국은 자신이 하기에 달린 미지의 선물꾸러미다.

2021-05-17

짙어지는 신록 마냥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신록의 싱그러움이 날로 달로 두터워지고 있다. 풋풋하고 연푸른 잎새들이 일제히 손 흔들고 수수한 이팝꽃과 아카시아꽃이 가세하며 생기를 더하고 있다. 지천에 초록의 물감이라도 풀어놓은 듯 들판이나 산천에는 생명과 성장의 몸짓이 왕성하다. 간간이 송화가루가 누런 연기처럼 날리면서 연초록 물결 위에 희뿌연 꽃빛이 어리는 산야는 푸르고 생기발랄한 수채화를 그려가는 듯하다.파스텔톤 색조에 만화방창한 5월은 정겨움과 은혜와 고마움과 숭고함이 가득한 달이다. 가정의 달이기에 그만큼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배려하고 포용하며 존경하고 기념하는 날이 많은 걸까? 온화한 날씨만큼이나 가슴 따뜻하고 살가운 정으로 사람들은 가족을 보듬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주위를 살펴 하나하나 베풀게 된다. 자라나는 새싹들이나 언제나 고마우신 어버이,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 가정을 이루는 부부 등에게 각별한 의미를 부여해 뜻과 정성을 다하고 챙기며 기리는 모습은 정겹고 아름답기만 하다.해마다 오월이면 필자에게는 잊지 못하고 떠오르는 분이 계신다. 아련한 초등학교 5, 6학년 담임이셨던 은사님이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선생님께선 멋쟁이 총각 훈남(?)으로 늘 배움과 운동을 강조하시며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45년이 흘렀음에도 은사님의 모습은 더욱 또렷해지고 베풀어 주신 은덕은 나날이 짙어가는 신록 마냥 한결 두터워지고만 있다. 졸업한지 30년만에 처음으로 전화를 드렸었는데, 당시 포항교육청교육장으로 계시던 은사님께서는 한 세월 저편 제자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으시며 각별한 반가움으로 한동안 수화기를 놓질 못했었다.2년 간의 담임시절 동안 은사님께선 60여명 학급 학생들의 일기장을 유난히 자주, 철저히 검사하셨다. 일기를 몇일 거른 학생에게는 따끔한 벌을 내리고, 잘 쓴 일기장에는 도움말씀과 아울러 학급 조회시간에 칭찬하기도 하셨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저학년 때부터 듬성듬성 대충 써오던 일기를 아마도 당시 선생님의 훈학방침의 영향으로 그때부터 제대로, 꾸준히, 쉼없이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진 것 같다. 어쩌면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생활 속의 글쓰기와 메모하기를 즐기고 간혹 시조도 긁적이며 글쓰기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십 수년 전 제자의 첫 개인전 때 직접 오셔서 축사를 해주실 정도로 늘 건재하신 은사님께서는 요즘은 매주 실리는 필자의 칼럼 졸고에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한번도 놓치신적 없이 조언과 덕담으로 격려해 주신다.어쭙잖은 글이지만 은사님께서는 언제나 공익의 가치와 공동선의 영향력을 강조하시며 촌철의 혜안으로 마치 45년 전 서툰 일기장에 도움말을 쓰시듯이 알림톡으로 채근하고 가편해 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게 날이 갈수록 사제지간의 정은 깊어만 가니 새삼스럽고 그윽하기만 하다.배움에는 끝이 없다. 평생교육이 시사하듯이 인간은 가정, 학교, 직장, 사회 등 전 생애에 걸쳐 학습과 교육으로 이뤄진다.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敎學相長)하듯이 자연과 인간이 가르치면서 배우고, 가정과 사회가 배우면서 가르치는 학습문화가 조성되길 기대해본다.

2021-05-10

오월의 햇살처럼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비 내린 뒤의 신록이 한결 싱그럽다. 연하던 이파리들이 차츰 짙어져 초록세상을 수놓고 파릇한 보리는 잔잔한 파도의 속삭임처럼 여울지고 있다.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한 ‘오월은 푸르구나’의 가사처럼 5월은 아동들의 꿈이 자라고 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푸른달이라고도 한다. 오월의 바람과 빛깔, 소리와 향기는 부신 햇살 속에 쏟아지는 자연의 멜로디처럼 들리고 보이고 흐르는 듯하다. 꽃은 피어 절로 지고 잎은 돋아 청록의 몸짓으로 마음의 자극을 주는 계절, 설렘과 희망을 파종하는 봄날이 깊어 가고 있다.나날이 짙어 가는 풀빛과 번져가는 녹엽을 보니 초록동색(草綠同色)이란 말이 떠오른다. 풀빛과 녹색은 같은 빛깔이란 뜻으로,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같은 처지나 기풍과 뜻이 맞는 사람들이 동류를 찾아 모인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유유상종과 비슷한 말로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취향이나 생각, 관점이나 신념 등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이같은 동류의식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로이 맺게 하고 친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마치 꽃이나 나무, 풀들이 신록 일색으로 물결치는 것처럼.그러나 아무리 초록이 동색이고 끼리끼리 어울린다지만, 그 이면에는 상대방과의 초점을 맞추고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이해와 노력이 있어야 최소한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부류의 구성원이라도 시각의 차이와 주관이 다름을 인정하고, 말 한마디라도 긍정적이고 이타적인 방향으로 주고받으면 한결 부담 없고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다. 즉, 원활한 소통으로 서로가 공감하고 배려와 절제로 상호 존중의 미덕을 지켜나갈 때, 진정한 어울림과 향긋한 초록동색의 넉넉한 초원이 펼쳐질 것이다. 십 수년째 작은 정원이 딸린 집에 살면서 자연의 섬세한 움직임과 미묘한 변화를 가까이서 느끼고 있다. 예컨대 나무나 풀들이 자리잡고 생겨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잎이 돋고 자라는 것 같지만, 옆가지가 서로 부딪치면 적절히 한쪽으로 성장을 멈춘다거나 수분 공급을 중지해 마른 가지로 남겨두는 걸 몇 번씩 지켜봤다. 또한 앞집 담장을 넘어간 담쟁이를 앞집 주인이 매몰차게 다 걷어버리자 몇 년 후에 새롭게 돋아나는 담쟁이가 아무런 유도를 하질 않았는데도 방향을 아예 옆으로만 틀어 올해도 계속 덩굴을 뻗어가고 있다. 수목과 식물들도 이렇게 양보와 절제가 있고 경계와 견제 속에 동류상구(同類相救)로 서로를 지켜가는 듯하다. 해와 달은 모든 사물을 공평하게 비춘다(日月無私照) 해도 자연만물은 저마다의 생김새에 따른 생장과 기능, 번성의 정도가 다르다. 인간의 생리적인 활동과정이나 동·식물의 생태계는 복잡미묘하지만 공통의 요소와 차별화된 부분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해 상생과 공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오월의 햇살은 푸른 숲 잎사귀에 샘물 같은 새뜻함을 적시고 강물 위에 금가루 같은 윤슬을 뿌려주고 있다. 비슷하면 좋아지듯이 초록으로 어우러지는 오월숲처럼 풋풋하고 사랑스럽고 숭고한 나날이 됐으면 좋겠다.

2021-05-03

성장과 일하는 기쁨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봄날이 깊어지니 초목의 성장이 한창이다. 가지가지 연록, 청록의 잎새가 나부끼고 군데군데 담록, 초록의 풀잎들이 손짓하는 산야는 온통 생동과 성장의 산실이다. 눈길 한번 돌리기가 무섭게 풀과 잎들은 성큼성큼 자라고 아찔할 정도로 금세 무성한 모습을 보이니, 과연 대지는 봄의 장단에 맞춰 싱그런 생동의 춤사위를 펼치는 듯하다. 생명이 깃든 온갖 만물은 이렇게 색과 빛을 드러내거나 소리와 모양으로 환호하고 몸짓하며 봄의 환희를 누리고 있다.생명이 있는 모든 물체는 움직임과 드러남으로써 성장하고 번식하며 번성해진다. 이러한 움직임과 성장은 저절로 나타나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생을 위한 노력과 일련의 작용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즉 생존하기 위해서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일손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세한 움직임의 변화가 이어지고 더해져 생태계는 생장하고 번성하게 되지만, 사람이건 동, 식물이건 활동이나 성장을 멈추게 된다면 이내 모든 기능이 감쇠하고 자연순환의 법칙에 따라 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인간에게는 신체적인 발육이 일어나는 육체적인 성장과 마음의 작용이 이뤄지는 정신적인 성장이 있다. 신체적인 변화와 발달은 일정기간에 단계적으로 나타나다가 어느 시점에 멈추게 되지만, 사고와 지능에 따른 정신적인 영역은 시기나 범주에 관계없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엔 아이들의 생각이 어른들의 지식을 앞설 수도 있고,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얼마든지 젊은이 보다 참신한 생각을 던질 수도 있는 것이다. 경험과 습관, 인지와 사유에 따라 다르고 차이 나는 정신연령이나 수준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어느 때건 움직이고 일하는 사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고 본다. 농작물을 가꾼다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쓴다거나 취미를 계발하고 작품을 만들며 문화적인 생활을 누리는 따위의 일들은, 일의 가치와 보람을 차치하고라도 대상 자체를 즐기며 몰입과 희열을 느낄 수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성장의 폭과 깊이를 더해갈 수 있다. 육체노동이든 정신적인 감정노동이든 모두 생각하고 움직여야 실행으로 이어지며, 그러한 과정에서 수반되는 행위자의 건강, 의지, 소신, 인내, 절제, 천착, 안목 등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매번 새롭게 무장되고 온전해야만 일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나이가 들어도 일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일거리를 찾거나 만들어서 일하고, 꾸준한 자기계발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애씀 자체가 성장의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랫동안 일하는 기쁨으로 심신의 강건함과 성숙을 가져올 수 있다면 한결 뜻있고 넉넉하지 않을까?초록의 푸르싱싱함이 성장의 활력을 부추겨선지 곡우 지난 들판엔 새로운 일 년을 준비하는 농부들의 일손이 많아지고 바빠지고 있다. 저마다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성장과 일하는 기쁨을 누려보자. 땀과 정성은 수고와 결실을 결코 배반하지 않으리라.

2021-04-26

역할과 기여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몇 차례의 꽃잔치에 이어 산과 들엔 잎새들의 잔치가 한창이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싱그러운 잎새들이 넘실대는 초록세상, 진초록 위에 연초록 잎새가 겹쳐서 피어나고 군데군데 산벚꽃들이 희끗희끗 수놓으며 수채화 같은 자연의 화폭을 드리우고 있다. 신열인듯 환희인듯 울음처럼 복받치는 그리움인듯, 온통 초록의 물결로 일렁이는 4월은 잎새달이라고도 한다. 초록의 농담(濃淡)으로 펼쳐지는 왕성한 신록의 향연이 코로나블루로 지쳐가는 일상에 생기와 활력으로 그나마 위무해주는 듯하다.봄의 싱그러움과 상쾌함은 가까이 다가가면 자세히 느낄 수 있다. 벌들이 잉잉거리며 일년을 준비하는 소리와 꽃송이가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모양과 빛깔, 그리고 향긋한 봄의 맛! 꽃과 풀과 나무들의 미세하고 섬세한 순간의 움직임과 순차적인 변화는, 자연의 시간이 흐르는 대지에서 저마다 창조적인 손길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조화와 균제를 이뤄가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즉 구름이 떠돌다가 비를 내리면(雲行雨施)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水流華開) 싹이 돋아나듯이, 자연만물은 때가 되면 시의적절히 제각각의 모양새대로 구실과 기능을 하며 큰 세상을 움직여가고 있는 것이다.대자연이 이럴진대 인간사회도 이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출생해서 성장하고 성숙, 완숙하여 소멸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수많은 관계와 자리, 역할과 부름으로 필요에 따른 구실을 하거나 공공의 기여를 하게 된다.즉 살아가고 활동하는 것이 저절로 주어지고 당연히 이뤄지는 것 같지만, 생장과 생업, 연명의 과정에는 자의적인 목적과 노력, 타의적인 가치와 요구가 수반돼 자신의 삶이 다채롭게 꾸며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뤄지는 각양각색의 삶이 모이고 더해져서 사회가 조화롭고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마치 연록, 담록, 황록, 진초록의 잎새가 온 산천에 어우러져 잎새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나 하나 꽃피어/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말하지 말아라/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조동화 시 ‘나 하나 꽃 피어’ 중예전에는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오롯이 파고들며 자신과 가정만 잘 꾸려가면 되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차츰 주변의 상황이나 위상, 관록에 비춰서 그에 걸맞는 역할이나 사명을 해야함으로 인식전환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이를테면 사회를 위한 공헌활동이나 재능기부 또는 관변단체나 협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제반활동을 통해 자신을 재발견하고 진정한 보람과 행복을 찾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기회와 여건은 오지만 누구라도 그렇게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않은 일일 것이다. 굳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작은 나눔과 베풂, 헌신과 기여로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보다 밝고 아름다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섬김과 봉사로 채워가는 정성과 노력의 꽃들이 여기저기서 피어나면 온통 미덕의 향기 가득한 꽃밭이 되리라. 신록의 물결 속에 초록의 언어로 공동선의 편지를 쓰는 고운 봄길을 우러르고 싶다.

2021-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