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초순 저녁답, 고즈넉한 고택마당이 부산해졌다. 한쪽에서는 전(煎)을 부치거나 어묵 끓이는 냄새가 구수하게 진동하고, 다른 편에서는 야외무대에 현수막을 설치하며 음향시설을 준비하는 등 무슨 잔치라도 벌이려는 듯 하나씩 구색을 갖춰가는 모양새가 바쁘기만 하다.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며 일손을 돕던 몇몇 사람들은 막걸리를 몇 잔씩 들이켜고는 김이 설설 나는 정구지전을 손으로 쭉쭉 찢어 안주삼아 먹기도 하는 등 벌써부터 분위기에 들뜨는 듯했다.
이윽고 어둠이 내리고 풀벌레 합창의 선율 속에 설장고 가락의 들썩임으로 오프닝 되면서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됐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아슴하게 찾아 들고 마종기의 ‘우화의 강’이 담담하게 흐르는가 하면, 코로나19의 딜레마에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가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정호승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시의 울림이 역경의 고비(苦悲)를 이겨내는 용기와 희망의 북돋음처럼 전해졌다. 거기에 그윽한 대금소리가 심금을 파고드는 듯 구성진 시조창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들숨과 날숨으로 경쾌하게 여울지는 하모니카 멜로디 ‘숨어 우는 바람 소리’가 고택의 마당을 휘감는 듯했다.
이러한 레퍼토리는 경북문화재단 지역문화활성화 지원사업으로 진행된 코로나 극복 기원 힐링 콘서트로, 포항지역의 박기영 시낭송가가 기획·연출한 ‘시(詩)와 음악(音樂)이 흐르는 고택(古宅)을 거닐다’의 부분적인 행사 정경이다. 이 행사에는 (사)시 읽는 문화와 포항시낭송회의 시낭송가와 초청 게스트, 주민 등이 참여해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시 양동마을 만호고택에서 소박하면서도 다채롭게 열렸다. 넓직한 마당 한 켠에는 국화와 쑥부쟁이가 소담스레 피어 반기고 옛적의 흐릿한 등잔불 마냥 정겨운 불빛이 얼비치는 고택을 배경삼아 시를 읊고 시조창을 하며 대금과 하모니카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은, 정말이지 고색창연함 속에 설레임으로 즐기는 이색적인 풍류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시낭송에 어울리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맵시나 남·여고생 교복 또는 기타 고상한 차림 등으로 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을 시의 행간에 담아, 흐르는 배경음에 매끄러우면서도 차분하고 애절하고 청순가련하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시의 감칠맛을 한껏 더하며 시 나눔의 마당을 고조시켰다. 그 즈음 툇마루 밑의 아궁이에서 지피는 군불로 몽실몽실 피어나는 연기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고택 곳곳에 운무처럼 스며들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까지 했다.
그렇게 보낸 두 시간여 시낭송과 음률의 흥취 속에는 별빛도 내려앉고 밤이슬도 내려앉아 모두가 촉촉함에 젖어드는 감미로운 어울림의 마당이었다. 양동마을 이장까지 시종 참관하여 깊은 관심 표명과 문화적인 발전방향의 덕담까지 해줘서 눈길을 끌었다. 이렇듯 문화는 생활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즐기고 누리며 만들어갈 때 활성화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