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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 무렵

등록일 2021-12-20 20:20 게재일 2021-12-2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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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날씨가 제법 추워지니 비로소 겨울이 느껴진다. 세월의 바퀴는 세모로 치닫고 계절의 수레는 한겨울로 굴러간다. 잎새를 떨군 나무들은 당당한 외로움의 가지를 드러내는데, 휑한 들녁은 텅빈 충만으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만고청산은 조곤조곤 동면의 생물들을 품으며 파리한 푸른빛으로 세한(歲寒)의 화폭을 채우는가 하면, 사람들은 복잡다단한 삶의 질곡에 성찰과 침잠의 몸짓으로 또 한 차례의 연륜을 쌓아가고 있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다. 세찬 칼바람에 눈보라가 휘날리는, 그야말로 북풍한설에 산하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추워야 겨울의 제격이 아닐까 싶다. 그런 겨울이라야 추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필자의 어린시절 겨울은 혹독했지만, 오히려 강추위 속의 겨울놀이로 나름 즐거웠다고나 할까? 매운 바람결에 나목의 신음 같은 전율이 오싹해져도 언덕 위에서 손등이 부르틀 정도로 연날리기를 하고, 얼어붙은 무논에서 얼음지치기를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거나 깨어진 얼음장 밑으로 두 발이 빠져도 온종일 한데서 추위와 꼿꼿하게 맞서며 재미난 겨울놀이를 즐겼던 것 같다. 그렇게 보낸 동심의 추억이 있었기에 해마다 맞는 겨울이 가슴 시리게 푸근하기만 하다.

‘한겨울 시린 마음 겹겹으로 고이 접어/사랑방 아랫목에 꼬옥 재워두면/눈치는 겨울밤에도/서럽지 않으련만’ - 강성위 시조 ‘겨울밤’ 전문

동지가 다가오는 겨울밤은 길기만해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금세 배가 출출해졌다. 그럴 때면 으레 또래들과 뜨뜻한 구들방에 둘러 앉아 시시닥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무나 고구마를 깎아서 먹고, 살얼음 낀 식혜를 단지에서 퍼먹으며 요기를 달랬다. 요즘처럼 인스턴트식품이 거의 없던 시절 식혜는 겨울 별미 중의 최고였다. 시원 달콤하고 걸쭉 매콤하며 아삭 새큼한 맛이 우러나는 안동식혜는 낮에 일하다가 새참으로 먹기도 했지만, 겨울밤에 친구들과 어울려 먹는 맛이야 말로 어떤 음식맛과도 견줄 바가 못됐다. 구멍 난 문종이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간혹 떡가루 같은 눈발이 소리없이 날리던 겨울밤, 아늑하고 쿰쿰한 사랑방에서의 먹거리 나눔은 달달하고 정겹기만 했었다.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지는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하였다. 동지를 기점으로 낮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면서 양기(陽氣)가 살아나기 때문에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으로도 전하고 있다. 나이를 빨리 먹고 싶어 동지팥죽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릴 적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요즘은 나이 한살 더 먹기가 두렵기만 하니, 연치(年齒)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지에 즈음하여 팥죽에 대한 의미와 주변을 살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예부터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경사나 재앙이 있을 때에 팥죽, 팥밥, 팥떡을 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코로나의 난마를 팥죽 한그릇으로 이겨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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