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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간의 마디와 매듭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어느새 미끈유월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미끄러지듯이 흘러 곧 하반기로 접어든다. 한해가 시작된지 엊그제 같은데 대선과 지선의 큰 너울을 지나고 나니 벌써 여름이고, 태양도 북회귀선을 지나 남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낮의 길이도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 시간은 영속적으로 흐르는 나그네(百代之過客)라 하지만, 천체의 운행과 자연만물의 현상에 근거해 연월일시와 춘하추동 따위의 구분과 마디를 정해 놓고 있다.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평하고 균등한 것인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정도에 따라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도 한다. 예컨대 똑같은 시간이라도 어린아이에게는 더디게만 느껴지고 노인에게는 너무 빠르게만 여겨진다거나, 힘겨운 시간은 지루하고 느리게 가는 것만 같고 기쁘고 좋은 때는 금세 지나가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이른바 ‘시간의 상대성’같은 거창한 이론을 들춰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제각기 시간을 짧은 듯한데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반면, 많은 시간임에도 하릴없이 허비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시간은 절대적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활용의 방법이나 가꾸는 정도에 따른 산물은 다분히 상대적인 것이 사실이다.시간이나 어떤 일에 마디나 매듭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식물의 줄기에서 가지나 잎이 나는 부분을 일컫는 마디는, 생장이나 분화가 진행되는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나무가 휘어지지 않고 똑바로 자랄 수 있는 것은 줄기의 중간중간마다 생겨난 단단한 마디가 있어서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마디와 매듭이 있는 삶 또한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마디는 시간을 지탱해주고 삶을 확장시켜주는 시련이자 지혜의 응축이고, 매듭은 진일보를 위한 정리와 각오인 셈이다. 즉, 식물이나 사람은 마디와 매듭을 통해 튼실하게 진화하고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짧게는 하루, 한달의 계획이나 마감이 중요하고 길게는 분기나 반기, 일년의 목표나 실적을 산출하고 집계하는 것도 일상이나 사회생활에도 마디와 매듭이 두루 적용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5년이나 10, 30년의 중장기적인 청사진이나 자취를 반추하고 정리하는 것은 미래의 포석을 위한 세월의 마디가 그만큼 중차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마디가 약해지면 늘어지거나 부러지기 쉽고, 하는 일들에 마무리가 없다면 성패와 득실을 알 수 없거나 곤고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관과 중심을 잡고 끊고 맺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곤 한다.마디와 매듭은 멈춤이 아니라 더욱 강건해지고 유연해지기 위해 안으로 집중하여 자신의 밀도를 높여 나가는 힘이다. 학업이나 취업, 결혼 등 우리는 삶의 수많은 마디를 거치면서 매듭을 짓고 또 새로운 마디로 나아가게 된다. 제대로 마디가 갖춰지고 매듭 또한 잘돼야 삶과 일도 온전해지고 가치로워 질 것이다.

2022-06-27

잊혀지는 것들에 머무는 시선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새들은 유유히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펄펄 뛰는 자유롭고 활달한 나날이다. 보리는 누렇게 익어 타맥장(打麥場)이 펼쳐지고, 풀과 잎새가 더욱 짙어가는 하지초목심(夏至草木深)이다. 청보리가 익어 하지 무렵에 거둬들이니, 여름날에도 가을철의 추수처럼 보리나 감자를 수확하는 이맘 때를 맥추(麥秋)라 하기도 한다. ‘하짓날은 감자 캐먹는 날이고 보리 환갑이다’는 말도 있듯이, 하지 무렵 감자를 캐어 밥에다 하나라도 넣어 먹어야 감자가 잘 열린다고 해서 요즘도 풋감자를 자주 삶아 먹거나 전을 부쳐 먹기도 한다.‘향그런 꽃 저버려 온 산 푸른데/가랑비 오는 속에 뻐꾸기 울음 울다/봄날 시름은 풀처럼 자라거늘/어느 때 낫을 얻어 마음의 뜰 베리오(芳花謝了滿山靑 細雨970F970F布穀廳 春日傷悲如草長 何時得91E4刈心庭)’- 강성위 한시집 ‘하늘에 두 바퀴의 달이 있다면’중‘봄을 보내며(送春)’중자연현상이나 사람 사는 일들이 별반 다르지 않다. 산길이나 뜨락은 사람이 다니거나 가꾸지 않으면 금세 풀이 자라 무성해지듯이 사람의 관계도 소통이나 만남이 없으면 어느새 소원해지고 서먹해지게 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기 때문이다. 또는 헤어져 가는 사람은 하루하루 멀어지고 오는 사람은 날로 친숙해진다(去者日以疎 來者日以親)는 시구처럼, 절친했던 사람도 멀리 떠나면 점차 멀어지고 자주 만나거나 접하는 사람은 친하고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닐 듯싶다.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시간이 지나고 듣거나 눈에 띄지 않게 되면 조금씩 잊혀지고 기억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망각은 결코 이성능력의 부족이나 타성력이 아니라 삶에 필요하고 삶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수없이 접하고 수집되는 정보가 고스란히 기억에 남아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컴퓨터의 저장장치나 외장하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날이 갈수록 안 좋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밀어내어 정신적 질서와 안정을 찾게 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러한 망각작용에 의해 인간은 건강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그러나 사람들은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고 반추함으로써 만족과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울분과 참회의 계기로 삼기도 한다. 어릴 적의 추억이나 희미한 옛사진을 보며 회상에 젖어드는가 하면, 치 떨리는 고난의 기억을 접해서는 한사코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다짐하고 맹세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도 없다는 말이 생겨난 것일까? 옛 것이나 지난 날들의 시비 속에는 얼마든지 지혜나 교훈으로 삼을 일들이 무수히 많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되새기는 것은 가치와 관점에서 비롯되는 안목일 것이다.6·25전쟁이 발발한지 72년째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고 해결되지 못한 일들이 수두룩하다. 어느 무명용사의 넋이 원혼으로 떠돌아 초연이 쓸고 간 6월의 초목이 저리 짙푸른지도 모른다.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들에 머무는 따스한 시선으로 관심과 챙김, 정리와 기억의 손길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2022-06-20

나누고 베풀고 누리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초목이 두터워지며 여름날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꽃 피는 봄보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 초입이 더 경치가 좋다(綠陰芳草勝花時)는 걸 보이기라도 하듯이, 잎새는 생기발랄하게 짙어가며 한껏 푸르름을 드러내고 있다. 새들은 숲이나 하늘에서 맘껏 지저귀다가 날아오르고, 작물과 과수는 때맞춰 내리는 비에 싱싱하게 일렁이거나 도톰한 풋열매를 보듬으며 자양분을 채우고 있다. 땅과 하늘 사이에 생장의 기운이 가득하고 마음껏 즐기며 누리는 6월은 누리달이라고도 한다.거침없었던 코로나19의 기세가 서서히 꺾여가자 발목 잡던 제한과 규제도 적잖이 완화조치가 내려져 다행스럽기만 하다. 실로 얼마만에 누려보는 일상의 기쁨이던가. 실외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되어 새싹들의 운동회가 3년만에 다시 열리고 대학에서는 젊음과 열정의 축제가 부활되는가 하면, 다양한 음악적 장르가 융합된 창작뮤지컬이 관객들과 직접 소통하는 대면공연으로 열리는 등 지역의 문화와 축제, 체육 등의 행사가 크거나 작게 재개되는 추세다. 밝고 활기차게 문화생활을 즐기고 체육활동에 임하는 모습은 여유롭기만 하다. 당연히 누려야 하고 생각나는 대로 즐겨야 할 일인데도, 느닷없이 가로막히고 애써 참아야 했으니 오죽이나 갑갑하고 애가 탔을까? 이러한 문화, 야외활동 못지않게 지역사회의 어려움과 취약한 계층에 대한 배려와 관심으로 나눔과 베풂의 손길이 더해지고 있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이미 지난 봄부터 코로나 상황을 고려하여 조금씩 계속적으로 이어왔지만, 6월 들어 봇물 터지듯이 활발하게 움직여지고 있으니 참으로 가상하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름아닌 포스코가 지역사회를 위해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는 상생협력과 봉사활동에 대한 얘기다.포스코는 오늘부터 6월 25일까지 12일간 ‘글로벌 모범시민위크’로 정하고, 포스코가 진출한 전 세계 53개국 포스코그룹의 기업시민 구성원인 임직원들이 동시다발로 봉사활동에 두루 참여하는 특별봉사주간을 운영한다. 2010년부터 실시해온 이와 같은 활동은 포스코가 50여년간 지역사회와 함께해 온 인연을 바탕으로 봉사와 나눔을 통해 상생과 화합의 장이 되도록 추진하는 것으로, 올해는 포스코의 발자취 재발견, 지역생태 보전, 지역사회 돌봄과 나눔 등의 테마로 진행된다. 포항의 경우 환호공원 스페이스워크 일대에 나무심기와 자매마을 시설물 보수, 해양 생태계 보전, 취약계층 나눔 등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지역사회와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친환경 포스코의 이미지가 제고될 전망이다.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고 베풀 때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코로나로 인한 단절과 소외의 아쉬움이 커진 현실에 포스코의 이 같은 일련의 활동은 가뭄 끝의 단비 마냥 지역사회의 그늘지고 미진한 부분을 다소 촉촉하게 적셔줄 것이다. 마침 내일로 예정된 누리호 2차 발사의 성공적인 궤도진입을 바라는 것처럼 누리달에 펼치는 포스코의 나눔활동도 지속적인 추진동력으로 지역과 사회를 밝히고 돌보는 모범적인 궤도에 진입하여 일상에서 마음껏 봉사활동을 즐기고 누리길 기대해본다.

2022-06-13

노래하는 그릇, 소리명상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모내기를 마친 들녘의 저녁때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개구리 소리가 왕왕거린다. 어둠이 깔리면 간간이 소쩍새 소리가 별빛처럼 내려앉고, 심심찮게 부엉이 소리도 드문드문 밤을 수놓고 있다. 자연은 이렇게 수시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온갖 새소리가 새벽을 열어주고 물소리 바람소리가 마음의 청량감을 더해주는가 하면, 시원한 파도소리는 바다처럼 늘 깨어 있으라 철썩이고, 맑게 흐르는 시냇물은 지침없이 부지런하라며 끊임없이 졸졸거린다.자연은 어쩌면 거대한 음악회장이다. 풀밭을 스쳐가며 잎새를 흔드는 바람은 부드러운 선율이 손끝에서 묻어나는 하프같고, 늦거나 빠르게 맴도는 듯 쉼없이 흐르는 물은 장엄하게 연주되는 첼로 같으며, 나는 듯 거침없이 떨어지며 수만 갈래로 부서지는 폭포수는 끝 모를 스토리가 담긴 피아노 소리같다. 거기에 플룻이나 대금 같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구성진 새소리와, 한가롭거나 무단히 울부짖는 짐승들의 어설픈 외침은 악보 없는 관현악의 합주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자연의 소리는 그저 그렇게 시시각각 울리고 변주되며 곡조를 타지만, 전혀 싫거나 거북하지가 않다. 자연의 음률은 너무 시끄럽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하며 편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면 여지없이 듣게 되는 자동차 소리나 공사장의 소음, 공장의 기계음 등은 언짢거나 기피하고 싶지만, 많이 접하고 들을수록 자연음은 마음이 맑아지고 심신의 평온함을 가져다주기에 사람들은 자연을 즐겨 찾고 힐링의 시간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그런데 바쁜 현대생활 속에서 자연을 접하지 않고도 거의 자연에 가까운 소리를 들으며 공감과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 이른바 노래하는 그릇 ‘싱잉볼(Singing Bowl)’은 충분히 그것을 가능케한다. 히말라야에서 비롯된 명상 주발 ‘싱잉볼’은 독특한 소리와 깊은 울림으로 진동의 하모니를 느끼게 하여 몸과 마음의 안정과 힐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명상 치유법의 일종이다. 인간의 몸이 70%가 물로 되어 있고, 소리는 물을 통해 5배 이상 빠르게 이동하기에, 몸 전체를 자극하는 매우 효율적인 수단으로 울림의 파동과 진동의 파장으로 신체의 긴장이완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심신의 활력을 되찾게 하는 사운드 테라피 명상법이기도 하다.최근에 필자는 ‘부부 행복 명상캠프’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실제 싱잉볼을 체험하고 소리를 통한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싱잉볼의 고요한 소리가 주는 아늑함과 미세한 진동이 온몸에 전해지는 가슴떨림을 느끼면서 오묘한 울림의 세계에 흠뻑 빠져드는 것 같았다. 우주의 근원적인 어떤 소리같기도 하고, 깊은 메와 골에서 그윽하게 퍼지는 산명(山鳴)같은 울림을 몸소 느끼는 시간은 그야말로 무아경(無我境)이었다고나 할까?소리는 진동이고 울림이며 물결 같은 에너지다. 저마다 제 목소리를 크게 내며 살아가는 시대에 자연과 타인의 소리를 경청하고 공감하여, 배려와 존중이 공명(共鳴)하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2022-06-06

지나침의 폐해(弊害)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강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기분은 상쾌하기만 하다. 강둑 언저리에 줄지어 핀 금계국이 노란 웃음으로 손 흔들어 반기고, 듬성듬성 키 자랑하듯 빨간 나팔처럼 흔들리는 접시꽃의 환호를 받으며 강변을 달리다 보면, 바람마저 등 뒤에서 불어와 정말 자전거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는 듯하다. 윤슬로 얼비치는 잔잔한 수면엔 오리떼가 한가로이 유영하고, 간간이 왜가리가 끼룩대며 날아오르는 풍경을 접하는 자전거 출퇴근길은 언제나 가뿐하고 넉넉하기만 하다.그렇게 8km 정도를 달리다가 나머지 2.3km 구간은 최소한 도보나 뜀박질로 사무실 위치까지 가야 하다 보니 거의 ‘철인 2종’이나 다름없는 출퇴근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몇 달간 자전거를 타다가 걷거나 뛰어서 출퇴근을 하다 보니 동료들은 필자더러 아예 형산강까지 헤엄쳐서 건너 ‘철인3종 출퇴근’을 하는게 어떻겠냐며 부러움반 시기 반(?)으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필자는 전혀 그에 개의치 않고 나름의 보법으로 완급을 조절하며 적당히 생활 속의 운동을 실천하고 있었다.그런데 정말 문제가 생겼다. 자전거 통행이 안되는 구간을 걷거나 뛰어서 가다가 하루는 몸의 컨디션이 마냥 좋은 듯해 퇴근길에 거의 단번에 주파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왼쪽 무릎부위가 통통 붓고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진 것이다. 병원의 진찰은 좌슬부의 좌상, 염좌 증상으로 5주 이상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이 따라주지 못함을 짐짓 깨달으며 치료와 안정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본의 아니게 부상상태로 근 2개월간 가료하면서 새삼 깨우친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다. 아침의 출근길부터 무리하지 않고 살살 걸어서 간다거나 퇴근길의 여유로움으로 무한질주(?)를 피했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 넘치는 자신감과 과도한 움직임으로 몸이 여지없이 반응한 것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은 익히 알고 들었지만, 실천하기가 만만찮은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공인이나 위정자의 언행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지나침의 폐단이 빚은 피해와 망신은 부지기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개인의 욕심이나 욕망에서 비롯되는 욕구의 과잉현상은 적당한 제어나 조절이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사람 사는 세상에는 자연의 이치나 순리가 당연하면서도 철저하게 적용되게 마련이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올 것을 생각하고(居高思墜), 가득 찰수록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持滿戒溢)는 구절도 있다. 높은 곳에 있을 때 더욱 겸손하고 조심하라는 가르침으로, 무엇이든지 지나치거나 가득 차서 넘치게 되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40여년 전 필자의 서예 입문시절에 당(唐) 해서의 전범으로 즐겨 쓰던 구성궁예천명의 글귀가 마침 전국지방동시선거에 즈음해서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지나친 과욕으로 마음이 동요되어 정신마저 피곤하게 되는(心動神疲)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2022-05-30

스침과 스밈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연초록 수채화 같은 5월이 벌써 하순으로 접어들어 초목의 두터움 속에 어느새 초여름으로 치닫고 있다. 경쾌한 새소리가 새벽을 깨워주고, 정갈한 햇살과 훈향의 바람이 푸른 오월을 구가하고 있으니,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해도 좋을, 그야말로 네 가지의 아름다움(四美)이 꿈결처럼 찾아드는 때가 아닐 듯싶다. 이른바 좋은 시절(良辰)에 아름다운 경치(美景)를 감상하고 마음껏 즐기며(賞心), 즐거운 일(樂事)을 더불어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언제부턴가/자명종 같은 새소리가 두드리면//깃 터는 아침이/선물처럼 다가와//샘솟는/환희의 빛살/온누리에 뿌리네//터질 듯한 음조로/하루를 탄주(彈奏)하느니//초목의 푸르싱싱/새들의 무정설법(無情說法)//오롯이/추임새 삼는/꿈을 향한 날갯짓” -拙시조 ‘새소리로 여는 아침’ 전문야산과 인접한 우거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갖 새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새벽부터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하루가 시작되고, 밤하늘에 퍼지는 밤새 소리에 그 날을 마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새소리라 하더라도 참새처럼 그냥 짧고 가볍게 스쳐가는 지저귐이 있는가 하면, 뻐꾸기나 소쩍새처럼 구슬픈 듯 애틋하게 깊이 들리는 새들의 울음도 있다. 새소리의 음절이나 음색, 음역이 각기 다르고 사람의 청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과 마음의 울림 정도가 저마다 상이하기 때문이다.흔하게 듣는 새소리가 이럴진대, 사람사는 세상에는 오죽이나 복잡미묘한 소리와 별의별 울림들이 난무할까? 자신의 주관에 따라 자기본위로 제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제 각각의 목소리를 내거나 들으며 살다 보면 자신의 음색과 비슷하거나 편안하게 어울리는 음률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즐겨 부르는 노래나 듣기를 좋아하는 곡을 선호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마음이 통하고 뜻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정을 나누며 공생가치를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같은 무리끼리 어울리며 서로 사귄다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은 결국 물이유취(物以類聚)나 초록동색(草綠同色)처럼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생각이나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된다는 뜻이다.시절인연(時節因緣)처럼 인생행로에는 인연에서 비롯되는 온갖 현상과 만남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부지기수 나타나고 만나는 사물이나 사람들은 대부분 돌차간 스쳐 지나는가 하면, 찰나의 마주침 속에서 부침하며 절로 스며드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체의 공명으로 울림이 커지듯이 사람은 공감으로 투합이 많아지게 된다. 소통과 공감으로 상호관계가 합치될 수 있음은 동조와 합심으로 한배를 탄다는 의미이다. 건성의 비위맞춤이 아닌 진솔한 이심전심으로 마음에 스며든다는 것이다.풍파가 그칠 날이 드문 세상살이는 자신의 이해타산에 따라 이합집산이 많은 곳이다. 위선자의 가식적인 행위나 위정자의 언행에는 무릇 새소리만큼의 무구함이나 명징한 울림이 있기라도 하는 걸까?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이 됨을 명심하여 관계의 소중한 가치를 함께 누렸으면 한다.

2022-05-23

바람에 취하고 소리에 젖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5월의 신록 속으로 흠뻑 젖어든다. 연둣빛 잎새와 초록빛 잎사귀의 어우러짐 속에 초목은 나날이 싱그럽고 두터워지고 있다. 녹엽의 나부낌과 연록의 여울 속에 여름날이 어느새 손짓하고 있고, 산천은 온통 푸르고 싱그러운 몸짓으로 청록의 서사시를 쓰는 듯하다. 어디를 둘러봐도 무엇 하나 거리낌 없이 계절의 여왕을 찬미하는 듯하니, 코로나19의 지겨움에서 다소 안도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연을 찾아 신록의 물결 속에 빠져드는 모양새다.필자 역시 지난 주말, 무심코 초록에 빨려들 듯 풀과 나무들이 반기는 호젓한 오솔길을 걸었다. 봄에는 붉은 꽃에 어리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빛조차 붉게 물드는 홍류동(紅流洞) 계곡 일대에 조성된 가야산소리길을 지인들과 함께 걸어본 것이다. 실로 오랜만의 반가운 나들이가 아닐 수 없었다. 하긴 코로나의 시달림에 만남 자체가 꺼려지고 위축과 결핍의 시기를 거의 빠져나갈 즈음의 부담 없는 걸음이었으니 오죽이나 가뿐했으랴. 모처럼의 만남과 더불어 어울림만으로도 충분히 푸근한 시간들이었다.홍류동계곡은 가야산국립공원에서 해인사입구까지 이르는 4km 계곡으로 신라말의 거유(巨儒)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이곳에는 옛길을 다듬고 복원해 계곡을 따라 걸으면서 자연과 역사, 경관을 탐방하고 체험할 수 있는 가야산소리길이 계곡을 넘나들며 완만하게 조성돼 있다. 소리길 주변에는 최치원 선생이 제자들과 시회(詩會)를 가졌다는 주요 문화자원인 농산정(籠山亭)을 비롯 칠성대, 낙화담 등의 명소가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연적 요소를 갖춘 생태학습장이 다양하게 조성돼 있으며, 탐방로 곳곳에는 고운 선생의 시판(詩版)과 담담한 여운을 주는 짧은 현대시 구절이 길바닥의 각석으로 깔려져 이색적으로 읽힌다. 소리길 초입부터 조금씩 들려오는 물소리, 바람소리가 한결 청신(淸新)함을 더해준다. 계곡이 깊어지니 송림 사이로 솔바람이 불어오고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번잡함에 찌든 마음을 금방이라도 씻겨줄 것만 같다. 그에 더하여 요란한 듯 경쾌한 산새들의 재잘거림과 폭포수의 물보라 소리 같은 잎새들의 손 흔드는 소리가 울창한 숲의 음률처럼 변주되니, 과연 자연과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걸어야 하는 가야산소리길로서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세속의 시끌벅적함을 물소리가 막아줄 정도로 고운 선생이 둔세시(遁世詩)에서 남긴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一入靑山更不還)’는 시구절이 계곡을 벗어나서도 한참 되뇌어진다.시원한 초록의 바람에 취하고 청아한 소리에 젖어들다 보니 심신의 곤고함이 자신도 모르게 말끔해진 것 같다. 삶에 지치고 온갖 소음과 불협화음이 난무할수록 산이나 계곡을 찾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계류를 마주하면 어떨까?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觀水洗心) 솔바람 소리 들으며 마음을 정결히 하듯이(聽松心自潔), 자연에 들면 눈이 더욱 맑아지고 귀가 한결 밝아지게 되리라. 푸른달 푸른 바람과 계곡의 울림이 빠듯해진 일상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듯하다.

2022-05-16

새 대통령의 출발과 기대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초록빛 향연이 눈부신 계절이다. 연두와 초록으로 넘실대는 산과 들엔 희끗희끗 아카시아꽃이 수를 놓고, 오월의 고운 꿈으로 내려앉는 햇살은 정갈하기만 하다. 생명의 잔치가 시작되는 봄날이 깊어지자 초목은 무엇 하나 거리낌없이 초록의 진영으로 무성해지고 있다. 바람은 부드럽게 쓰다듬듯이 불어오고 때 맞추어 단비(好雨)가 자분자분 내리니, 들판의 농작물은 춤추듯이 반기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부푼 설렘과 새로운 시작의 봄날은 깐깐오월마냥 활기차고 꿋꿋하기만 하다.5월의 푸르름 속에 새로운 희망과 기대로 오늘은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이다.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를 슬로건으로 국민이 소망하며 염원하는 정책을 실천하고, 국민이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윤석열정부가 국민의 기대와 축복 속에 새롭게 출범하는 것이다. 이른바 공정과 상식이 통하고 정의와 법치가 살아 숨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국민통합과 화합을 이루며 국민의 뜻을 겸손하게 받들어 나갈 새로운 대통령이 첫 발을 내딛는 의미있는 날이다. 그만큼 국민들의 여망과 성원이 큰 날이기도 하다.신선한 새 출발은 언제나 설레고 벅차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 그렇고 첫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의 뿌듯함이 그러하다. 하물며 한 나라의 수장으로 통솔과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는 심정은 오죽하랴.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긍심과 함께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질 것이다. 국민들의 축하와 신임을 받은 만큼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며 당면한 역할과 리더의 책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반이 대립되고 갈등이 난무하며 이해가 얽힌 작금의 현실은 결코 녹록지가 않다. 그렇기에 늘 지도자의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任重而道遠)고 하는지도 모른다.지도자의 길은 지고지난(至高至難)하면서도 지엄(至嚴)하다. 보수와 진보의 틈바귀에 지역과 계층을 아우르고 세대와 성별을 배려하며 균형과 통합을 조율해야 한다. 국민을 살뜰히 섬기면서도 국정철학과 비전을 제시하고 시대정신과 가치를 담아 밝은 미래의 희망을 기약하는 소신이 있어야 한다. 새 정부 출범 때마다 장밋빛 청사진으로 국정운영의 희망을 제시하지만, 임기말에는 대부분 국민들의 기대치와 요구치에 다소의 괴리가 있어 왔다. 그만큼 국정과 위정자에게는 복잡다단함이 많고 민심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그래도 새롭게 내딛는 정부에 또 다른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어쨌거나 좀 더 나아지고 편안한 삶을 희원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바람과 믿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윤석열정부는 특히, 공정과 정의, 통합과 균등을 위한 당찬 의지로 이례적이고 차별화된 정책대안을 마련하는 듯해서 자못 기대가 크다. 이러한 신정부의 순항을 위해서는 늘 국민 앞에 겸손하고 소통을 강화하며 소명과 책임의식으로 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들을 믿게 한다’는 사목지신(徙木之信)의 자세로 굳건히 약속을 지켜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관건일 것이다.

2022-05-09

새로운 문화의 발돋움 ‘詩뜨락’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초록이 흐르고 연둣빛이 피어나는 5월은 눈길 닿는 곳마다 푸르기에 푸른달이라 했던가. 봄의 꽃잔치 속에 조금씩 돋아나던 잎사귀가 오월 들어 본격적으로 피어나며 그야말로 초록의 세상을 이루고 있다. 겨울을 이겨낸 진초록 잎새 위에 연초록 잎새가 겹쳐서 피어나니, 마치 울음처럼 복받치는 연둣빛 그리움이 꿈결처럼 흐르는 듯하다. 온통 초록과 연두의 녹엽으로 펼쳐지는 오월은 맑고 푸르러 싱그럽기만 하다.푸르른 오월을 기약이라도 하듯이 4월의 잎새달 끝자락에 초록빛 문화예술의 향기가 5월의 푸르름마냥 진하게 피어났다. 코로나19의 진저리를 떨치기라도 하는 듯 도심 속 작은 정원에서 잔잔한 시낭송과 악기 연주, 시인과 독자와의 대화가 들꽃처럼 소담스레 피어났다. 초록의 계절에 어울리는 시편과 일상 속의 다반사인 커피 마시는 얘기,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행복을 부르는 시낭송의 메아리가 수수한 듯 낭랑한 음성으로 다가오고, 간간이 악기의 선율과 시 같은 노래가 그윽하면서도 유장하게 울려 퍼졌다.이같은 일련의 행사는 4월의 마지막 날 포항시 효자동의 한 켠에서 포항시낭송회가 주관한 일곱 번째 시뜨락(詩가 흐르는 뜨락)의 주요 레퍼토리다. 서옥(書屋)의 좁다란 뒤뜰에서 간소하게 열렸지만, 시낭송과 음악의 문화적인 울림은 어느 공연 못지 않게 넓고 깊었다. 특히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커피시인’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윤보영 시인을 초대하여 그의 스무 번째 시집인 ‘세상에 그저 피는 꽃은 없다 사랑처럼’에 실린 시를 골라 낭송하고, 서예가의 시서(詩書) 작품으로 미니 전시회까지 곁들여 다채로움을 더했다.이른바 감성시인으로 통하는 윤보영 시인은 신춘문예에 동시(童詩)로 등단해 스무 권의 시집을 내면서 간결하고 섬세한 감정으로 공감을 불러일으켜 초등, 중등학교 교과서에 시와 동요의 가사가 수록되는 등 관록있고 독자층이 두터운 시인이다.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재 속에서 시를 끌어올리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발상이 읽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며, 순수하고 긍정적인 감정이 메말라 가는 각박한 시대에 커피 한 잔처럼 따스하게 마음을 데워줄 수 있는 감성적인 시를 많이 썼다. 그에 따라 춘천, 파주, 문경 등지에 ‘윤보영 시가 있는 길’이 조성되기도 했고, ‘윤보영 동시 전국 어린이 낭송대회’ 개최와 ‘윤보영 캘리랜드연구소’ 등의 운영으로 시의 저변확대와 새로운 발전 모색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그러한 저명시인을 모시고 봄과 커피에 어우러진 시잔치를 벌였으니 문화도시 포항의 품격이 적지 않게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다. 경향의 문인을 초대하여 시낭송회와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문학과 예술의 삶을 공감하고 문인과 독자가 소통하는 ‘시뜨락’은 문화의 새로운 발돋움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코로나의 터널에서도 벗어나는 때, 시와 시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펼치는 시뜨락 같은 시낭송 토크가 전국적으로 퍼지고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2022-05-02

물꼬 트는 나눔활동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꽃피고 새가 울며 잎새들이 싱그럽다. 화창한 날씨에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초목은 생명의 잔치를 벌이는 듯 푸르고 싱싱하다. 3년째 발목 잡던 코로나19의 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봄을 즐기는 발걸음도 잦아들며 차츰 활기를 더해가는 것 같다. 아직은 여전히 마스크 너머의 세상이지만, 그간 멀어졌던 몸의 거리두기를 없애고 마음의 거리를 좁히며 아쉬움을 달래는 표정들이 사뭇 밝고 넉넉하기만 하다.만물이 생기를 더해가는 때, 마침내 코로나의 안개도 서서히 걷히는 듯하니 날씨마저 청량하고 산천은 한껏 푸르름으로 일렁이고 있다.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취해졌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가공(可恐)의 코로나19도 홍역, 수두와 같은 2급 감염병으로 조정돼, 일종의 엔데믹(풍토병)으로 가는 대응체계 전환과 일상회복의 길이 열리고 있어서 안도와 다행스럽기만 하다. 그에 따라 최근 한강변의 나들이객이 부쩍 늘었는가 하면 전국 곳곳에서는 3년째 미뤄왔던 축제를 재개한다는 소식 등으로 확연히 달라지고 생기를 되찾아가는 모습들이 역력하다.그에 발맞춰 한동안 뜸해졌던 나눔과 봉사활동도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어서 반갑고 고무적이다. 곧 개방할 경로당이나 무료급식소를 대청소하고 방역작업을 실시하는가 하면, 야외시설에 대한 일제점검 보수와 묵은때 제거, 칙칙한 골목길 담벼락의 벽화 도색, 바닷가와 산책로 주변의 환경정화, 어르신들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장수사진 촬영 등의 다양한 자원봉사활동이 물꼬 트이듯이 동시다발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봉사활동은 포스코 직원과 가족들이 각 부서 자매마을이나 재능봉사단 등을 통해 펼치는 새봄맞이 사랑의 손길, 희망의 나눔활동이다.포스코는 이와 같은 봉사활동을 포함, 임직원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을 활용해 운영되는 1%나눔재단의 고유한 사회공헌 활동으로 정착시켜 2013년부터 다양한 나눔 사업을 적극적, 지속적으로 진행해왔다. 지역별 소외되거나 취약해진 계층에 대한 맞춤형 나눔, 지원사업은 물론, 아동·청소년, 다문화 가정, 홀몸어르신 등을 중심으로 1%나눔사업을 강화하고, 태풍, 화재 등 자연재난을 입은 지역사회에 임직원들의 봉사활동과 연계시켜 피해복구지원과 상생협력을 도모하는 사회공헌 및 기업시민 나눔활동의 가치를 부각시키고 있다.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나눔활동은 많은 것들을 변화, 발전시킬 수 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큰 희망의 씨앗이 되고 한, 두발 내딛는 나눔의 발걸음이 큰 세상을 움직이는 기틀이 된다. 나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함께 나누는 마음들이 자라고 있음은 따스하고 넉넉한 일이다. 배려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온정의 나눔 속에 보람이 싹트고 기쁨과 감사의 꽃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찬란한 햇볕도 나누어 가지고 싱그러운 꽃밭도 함께 뛰놀면 언제나 기쁨이 넘쳐 흐르지 않을까? 코로나로 가뜩이나 메마르고 성글어진 마음 밭에 나눔의 새순들이 신록처럼 움트고 잎새처럼 무성해지면 좋겠다. 나눔과 베풂으로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면 어떨까?

2022-04-25

나무를 심는 마음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리는 찬란한 봄이다. 길섶에 다소곳이 알거나 모르게 들꽃이 웃음짓고, 언덕이나 길가에 벚꽃이 팝콘처럼 피어나는 개화의 절정이다. 앞서거나 뒤서며 시시때때로 피어나는 꽃들은, 어쩌면 밤하늘의 별들이 땅으로 쏟아져내려 꽃의 화신으로 새롭게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꽃을 보면 마음이 환해지고 별을 보듯 밝아지는 걸까? 대지에 새 옷을 입히는 풀과 별빛같이 총총한 꽃과 가지마다 연둣빛 잎새가 손짓하며 바야흐로 봄날이 깊어 가고 있다.차분하게 또는 현란하게 꽃잔치를 벌이고 나면 산과 들은 온통 잎새 잔치로 이어진다. 꽃이 피기 전부터 이미 실눈처럼 연한 움을 틔우거나, 꽃이 지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앙증맞은 연초록 잎새들이 동시다발로 생명의 손을 내민다. 하루가 다르게 봉긋봉긋 돋아나며 잎차례를 벌이는 나무들은 힘찬 기지개라도 켜듯이 줄기와 가지 마디마디 연둣빛 촉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쪽저쪽 새순이 나무마다 가지마다 어김없이 돋아나기에 4월을 ‘잎새달’이라 하는 걸까?“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빛나는 꿈의 계절아/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목련꽃 그늘 아래서/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 박목월 시 ‘4월의 노래’ 중피어나는 꽃들과 잎새들이 부쩍 돋아나는 4월은 그야말로 빛나는 생명과 약동의 계절이다. 봄 기운이 충만하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잎새달은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튼다’는 말처럼, 강인한 생장을 멈추지 않고 줄기와 이파리를 줄기차게 늘려 나간다. 그래서 나무심기 좋은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해 조림(造林)정책과 산림녹화사업을 강화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나무와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산림육성과 보호를 실천했었기에 녹화사업의 세계적인 모범사례로 기록되기도 했었다.나무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기만 한다. 꽃과 잎새를 드리워 향기와 신선함을 주고, 맑은 공기와 시원한 그늘로 건강과 편안한 쉼을 누리게 해준다. 또한 양식(良識)의 보고(寶庫)인 책 종이를 만들어 주고 세찬 바람을 막아주는가 하면 팍팍한 삶의 터전을 굳건히 지켜주기도 한다. 그러한 나무에는 켜켜이 애환이 스며 있고 나이테마다 역사가 점철돼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식 같고 이웃 같으며 친구 같고 스승 같은 나무와 숲을 잘 가꾸고 보전해야 한다.옛날에는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어 시집갈 때 장롱을 만들어 보냈듯이 나무는 재산의 밑천이기도 했었다. 요즘도 관공서나 기업체에서 기념식수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념식의 요식행위가 아니라, 어쩌면 봉황을 기다리는 벽오동을 심은 뜻처럼 태평성대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염원이 아닐까 싶다. 최근의 울진 산불로 송이 주산지의 소나무 70%가 소실됐다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예년 같은 송이 생산을 하기까지는 최소한 50년이 걸린다니,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해하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녹화와 조림, 산림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청명(淸明)이자 식목일인 오늘, 저마다의 반려나무를 심으며 국토와 마음의 밭을 푸르게 일궈보자.

2022-04-04

상호작용의 이치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모처럼 흠뻑 내린 봄비가 대지의 생명을 일제히 깨우고 있다. 어느새 양지 바른 비탈엔 여린 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앙상하던 가지엔 움이 트는가 하면, 서둘러 꽃을 피우는 봄의 전령(傳令)들은 새뜻하게 웃음짓고 있다. 언 땅과 세찬 바람 속에서도 뿌리와 가지를 건사했기에 땅의 기운과 봄볕의 입김으로 당당히 땅을 헤치고 일어서며 온몸으로 꽃을 피우는 것이다. 노래하듯 흐르는 개울물의 졸졸거림을 추임새 삼아 연둣빛 수양버들이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며 봄맞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봄은 색깔의 변화로부터 온다. 파릇한 새싹이며 연푸른 잎새, 울긋불긋 진달래와 복숭아꽃,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 새하얀 목련과 눈송이 같은 벚꽃 등이 돋거나 피어나면서 천연색 봄의 향연이 시작된다. 삭막하고 스산한 무채색의 겨울 화폭에 군데군데 채색의 삽화가 그려지고 더해지면서 화사한 봄의 캔버스가 알록달록 채워지는 것이다. 봄에 피는 노란 꽃은 어쩌면 봄을 대표하는 컬러가 아닐 듯싶다. 샛노란 개나리와 유채꽃은 희망이나 쾌활, 기대 등의 꽃말을 차치하고라도 노오란 꽃물결을 보기만 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지고 설레지 않을까 싶다.노란 병아리 역시 봄날의 이미지를 더해준다. 노란 개나리꽃 울타리 옆으로 아장아장 걸어가는 병아리떼는 얼마나 귀엽고 앙증맞을까? 3~5월경에 자연부화하는 병아리의 탄생과정은 신기하기만 하다. 껍질을 경계로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고 쪼면서 껍질을 깨고 나와 새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부리로 쪼게 되는데 이것을 ‘줄(5550)’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하여, 줄탁동시(5550啄同時)는 생명의 오묘한 탄생 순간이라 할 수 있다.두 존재가 하나의 계기로 모아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이 비유는, 결국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타인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즉 아무리 좋은 의견을 가지고 있어도 한 쪽의 힘이나 논리만으로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할까? 이렇듯이 어떠한 사물이나 상태의 대부분은 작용과 반작용처럼 동작과 반응으로 나타나는 상호작용의 결과와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가정이나 직장, 사회생활 등과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이처럼 긴요하고도 치밀한 상호작용의 원리와 동작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무엇이든 한 쪽의 주장이나 노력만으로 성사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의 흐름이고 이치다. 학업을 펼치거나 창작활동의 영역에서도 스승의 가르침이나 우연찮은 동기부여를 통해 문리(文理)가 트이고 번뜩이는 예술혼이 살아날 수도 있다. 행운도 어쩌면 준비되지 않은 곳엔 깃들지 않는 인간적 노력의 산물이듯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꾸준히 노력하며 쉼없이 추구하는 손길이 어떤 상황이나 시간과 합치되면 보다 긍정과 희망적인 시너지 효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2022-03-21

긍정과 비판 사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려 열흘째 애태우던 울진산불이 진화돼 천만다행이다. 50년만의 최악인 겨울가뭄에 봄의 초입부터 잇따르던 크고 작은 산불로 많은 피해가 나고, 농어촌의 용수부족과 일부 섬마을의 식수부족 비상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건조한 겨울을 지나면서 빈발하는 전국 산불의 70%가 봄철에 집중되고, 1/3 이상이 사람의 실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안타깝기만 하다. 어쩌면 기후변화의 역습에 인재(人災)가 갈수록 더해지는 양상이랄까?자연의 흐름은 구름이 움직이다가 비를 내리고(雲行雨施), 만물이 두루 은택을 받아 큰 조화로운 기운을 보전하여 이롭고 곧게 된다(保合大和 乃利貞)는 것인데, 이러한 천지자연의 변화에 균형이 무너지고 조화가 어긋나게 되면 결국 운행과 순환에 차질을 빚게 된다. 그래서 간혹 기상이변이니 천재지변 같은 불가항력적인 재앙이 닥치는지도 모른다. 작은 우주라 하는 사람도 자연과 같은 원리로 구성되어 자연과 같이 변화하고 상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와 변화에 따르고 순응하는 것이 자신의 삶과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순조로움과 평정을 지켜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평안과 고요함을 의미하는 평정(平靜)은 곧,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의미하는 중용(中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중용은 동양철학의 기본개념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중(中)’이며, 평상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용(庸)’이라 하여, 중용에서 말하는 이른바 ‘도덕론’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중용은 극단 혹은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도(道)를 택하는 일종의 소신과 지혜라 할 수 있다.지난 주에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향배가 결정돼 민심이 술렁이고 있다. 0.73% 차이라는 역대 대선치고는 유례없이 근소한 차이의 당락이었지만, 어쨌든 결판이 났기에 희비의 쌍곡선이 제각기 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에 겸허하게 더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하거나, 일각에서는 이념이나 진영, 지역이나 세대를 아우르는 민의를 존중하고 당면과제에 충실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거의 국민 절반이 찬반을 보인 것이기에 충분히 일리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이러한 국면일수록 중용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본다. 비등비등한 상황일수록 상대편의 주장이나 논점을 받아들여 여타의 쟁점을 중화 (中和)하고 융합하는 ‘협치의 모멘트’가 묘책이 될 것이다. 절반의 근사점에서는 갈등의 소지도 많고 공감의 여지도 많기에, 긍정과 비판의 사이에서 배려와 존중의 포용력으로 조율하고 합일점을 꾸준히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그 바탕에 어느 한쪽으로도 쏠림 없는 중용의 도를 견지하고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싶다.비를 내리는 것은 하늘의 몫이지만, 융화(融和)는 오직 사람에게 달려있다. 모든 일에 중용의 자세로 굳건히 중심을 잡아 두루두루 살피고 보듬어, 견제와 균형으로 평안하고 화애로운 날들이 열리길 기대해본다.

2022-03-14

치곡(致曲)의 마음으로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봄이 오는 길목이 순탄치만 않다. 날씨가 풀리기가 무섭게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하늘을 가리고, 기류의 변화로 돌풍과 강풍이 불어와 나무와 풀들을 동면에서 깨우고 있다. 유례없는 겨울가뭄에 바람마저 잦아드니, 크고 작은 산불의 복병이 화마로 돌변해 여지없이 봄의 발목을 새까맣게 태우고 있다. 코로나19 감염증은 정점을 향해가는 듯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연일 역대 최다치를 보이며 애태움을 가중시키고, 후보 선출에서부터 선거유세까지 약 6개월간의 대선 레이스도 오늘로 마감되지만, 선거 막판 구도 재편에 초박빙 혼전이 안개보다 더한 깜깜이 판세로 요동치는 형세다.어쨌든 긴장과 불안의 동토에 요원할 것 같은 봄날이 가까운 발치에서 서성대고, 진영과 이념 대립의 난무 속에 치열한 혼조세를 보였던 혼돈의 대선정국도 내일이면 판가름 나게 된다. 추운 겨울 속에서도 풀과 나무는 땅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쉼없는 물긷기로 봄날을 준비해왔듯이, 지역과 세대, 계층과 선전의 소용돌이 속에 대선후보들은 진정한 민의와 대의를 읽고 수렴하여 새봄 같은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 기저에 지극하게 정성을 다한다는 치곡(致曲)의 마음을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치(致)’는 미루어 지극히 하는 것이요 ‘곡(曲)’은 전체가 아닌 일부분이니, 치곡은 작은 일에도 모두 지극하게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중용 23장에 나오는 구절로, 매우 정성스럽다는 ‘곡진(曲盡)하다’와 비슷한 말이다. 즉, 치곡은 사소한 일도 무시하지 않고 정성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매사의 정성스러움(誠)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곧 겉에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곧 뚜렷해지며, 뚜렷해지면 곧 밝아지고, 밝아지면 곧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곧 변하게 되고, 변하면 곧 생육된다.(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며, 變則化니라)’-중용 23장그러니까 치곡(致曲)은 ‘誠→形→著→明→動→變→化’의 과정을 통한 변화는 전혀 새로운 존재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밝아진다는 말과 변화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늘 긍지를 갖고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게 되면 겉모습만 변하는 아니라, 알맹이 자체가 완전히 변화하는 것으로, 오직 세상에서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것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唯天下至誠 爲能化)는 것이다.자연은 지성의 세계이다. 흙 한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조차 공(空) 것이 아니라 모두 제 나름의 특성과 자질로 형체가 있고 성의를 다해 생육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하듯이(至誠感天) 하늘 아래 극진한 정성(天下至誠)이야말로, 사람과 세상을 능히 움직이고 바꿀 수 있을 것이다.위정자이건 대다수의 민초이건 온 마음을 다해 순리와 이치에 따르고 온전함과 순수함을 위해 정성과 노력을 기울일 때, 진정한 화평과 감화의 꽃이 피어날 것이다.

2022-03-07

한 몸 같은 포항과 포스코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우려했던 산불 발생이 심상찮은 것 같다. 50년만의 최악인 겨울가뭄에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산불로 예기치 못한 피해와 손실을 초래했다. 최근의 영덕 산불은 강풍과 혹한으로 축구장 560개 면적의 산림이 순식간에 소실되고 주민대피령까지 내려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대대적인 산불진화 노력으로 조기에 진화됐다. 불은 잘 이용하면 유용함을 주지만, 부주의나 실수로 발화가 되면 화마로 돌변해 위협적이고 가공스러운 혀를 날름거리며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그런데 겨울철의 산불이나 건물 화재가 아닌 전혀 색다른(?) 불이 길거리에서 일어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공생협력을 도모하며 호혜발전을 유지해온 관계라면? 미상불 세계적인 철강도시 포항에서는 근 달포 전부터 난데없는 현수막의 물결이 거리 곳곳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고 있다. 그것도 지금의 포항과 대한민국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한 국민기업 포스코에 대한 대대적인 규탄과 성토라니, 하루 아침에 돌변한 일도 아닌데 이 무슨 이변인지 씁쓸하기만 하다.이른바 포스코가 창립 54년 만에 지주사 체제 전환을 확정하면서 지주사인 포스코홀딩스를 수도권에 설립한다는 소식에 포항 지역사회와 정치권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음을 대자보로 드러낸 것이다. 지주사 전환으로 지역경제 침체와 지방소멸 위기를 걱정하면서 포스코의 결정에 반대하고 철회를 종용하는 시민·관변단체 등의 현수막이 포항시 전역을 도배하듯이 앞다투어 설치되고, 대선후보들의 현수막도 길목마다 곳곳에 내걸리니, 가히 포항은 작금 ‘대자보 수난시대(?)’를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어느 시대나 사회이건 사람사는 세상에는 늘 문제와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복잡다단함에 생각이나 관점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얽혀 유불리와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긴장이나 사회적인 문제를 어디서, 어떻게 풀고 매듭짓는가에 있다. 그러한 해결이나 모색을 통해 사회와 국가는 진보의 걸음을 걷고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리라.포항시와 포스코의 유례없는 긴장 고조에 대다수의 시민과 직원들은 어쩌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고민과 딜레마에 빠질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표리부동(表裏不同)하는 것도, 맞불작전(?)으로 직접 나서기도 곤혹스러운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관건은 일부 억측되고 곡해된 일방적인 물살타기 같은 논리와 주장보다는, 실체적 진실을 통한 이해와 신뢰로 소모적인 논쟁과 배타적인 대립을 불식시켜 나가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본다. 반 백년 이상 포항에 뿌리를 내린 포스코가 ‘움직이는 마법의 성’이 아닌 이상 절대 포항을 떠나서도,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우발적인 영덕 산불이지만 총력대응으로 조기진화한 것처럼, 무겁게 드리운 영일만의 전운(?)이 동반적 자세와 합리적인 해법으로 걷혀져 따스한 봄볕이 비치길 기대해본다. 포항과 포스코는 언제까지 한 몸이나 다름없다.

2022-02-21

手不釋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계절의 시계는 어김없이 가고 있다. 지척에서 기웃거릴 듯한 봄날은 서둘지 않고 기다림과 설레임 속에 차분한 걸음으로 오고 있다. 한결 포근해진 날씨에 이른 봄맞이라도 하듯 모처럼 보경사 인근의 산을 찾았다. 인적이 드문 산언저리에는 메마른 낙엽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고 부러진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겨울가뭄이 심해선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바스락거림이 눈 밟는 소리 마냥 정겹게 여겨졌다.봉긋하게 쌓인 낙엽더미를 지날 때마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밭을 걷듯 푹푹 밟아 보기도 하고, 한아름의 낙엽을 공중으로 날려 눈처럼 맞기도 하다가, 푹신한 낙엽더미에 그대로 드러누워 낙엽을 이불 삼는 재미가 쏠쏠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한적한 산길에서 장난도 치고 익살을 부리며 한참 오르다 보니 어느새 산마루에 이르렀다. 탁 트인 시야에 송라와 월포지역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오고 그 뒤로 동해 바다가 푸른 실루엣으로 드리워졌다. 오후의 햇살 속에 올망졸망 발 아래로 펼쳐진 멋진 광경을 사진으로 남기려 했으나 아뿔싸, 산행 전부터 줄어들던 폰 배터리가 벌써 소진돼버려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등산 초입부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르며 갖가지 재미에 빠지다 보니 한동안 폰을 의식하지 못한 것 같다. 정상 주변을 돌아 하산하며 폰의 시달림(?)없는 산행 내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훨씬 많았음은 불문가지였다. 스마트폰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휴대폰 이상의 많은 의미를 갖게 된지 한참이나 됐다.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보는 것도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거의 온종일 손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휴대폰이니,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글을 읽으면서 부지런히 공부한다는 뜻의 수불석권(手不釋卷)이 요즘은 너나없이 ‘수불석폰’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만큼 스마트폰의 활용성과 의존도, 영향력이 커진 셈이다.문명에는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듯이 시대의 총아 같은 스마트폰에도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온갖 소통이며 정보, 지식, 콘텐츠 등을 언제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기기는 분명 우리의 일상에서 편리함과 유용함을 주는 도구지만, 여러 부작용과 위험성에 노출돼 경계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길을 걷는 사람들을 일컫는 ‘스몸비 현상’을 스마트폰 사용자의 95%가 경험한다는 통계와 운전 중 스마트기기 사용율이 42%로 높아져 갈수록 사고발생과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다 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순간의 방심과 실수가 사고로 이어지듯이, 스마트폰 과의존이나 미디어 중독 예방을 위한 디지털기기 거리두기로 자기조절능력을 향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휴대폰에 구애됨없이 5시간여 산행을 하는 동안 짧게나마 자연을 보는 여유와 눈을 새롭게 가진 것 같다. 스마트폰과 멀어질수록 자연과 가까워지고, 수불석권할수록 세상 속에서 정을 나누며 지혜와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2022-02-14

봄빛 희망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이 선다는 입춘은 예고편으로 아직은 봄날이 한참 있어야 온다. 설 연휴가 끝나기 무섭게 코로나19 오미크론의 확진자가 하루가 다르게 폭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예상과 우려를 넘어 걷잡을 수 없는 역병의 딜레마에 속수무책으로 빨려드는 것 같다. 3년째 계속되는 지리멸렬한 바이러스의 변이에 몸서리만 쳐지는데, 계절과 세상의 봄날은 허공의 그물에 갇혀버린 듯 싸한 바람이 여전히 빈 가슴을 후비고 있다. 코로나에 빼앗긴 일상에도 과연 봄이 오기는 오는 걸까?그러나 얼음장 밑에서도 봄물은 흐르고 눈 덮인 산야에서도 복수초가 피어나듯이, 봄은 분명 더딘 걸음으로나마 조금씩 오고 있다. 차디찬 땅 속에서도 뿌리는 물긷기를 멈추지 않고 새움을 준비하는 여린 풀들은 단단해진 흙을 하나씩 밀어내고 있다. 비록 비닐하우스 작물이긴 하지만 미나리나 부추 등의 채소는 파릇하고 싱싱하게 싹을 키워 벌써부터 봄의 향과 입맛을 한껏 돋우고 있다. 무채색 겨울빛이라 하지만, 대지는 이처럼 알게 모르게 동면 속에서도 봄빛 생동과 희망을 품으며 만물을 다독이고 채비하고 있다.“솔숲 다한 곳에 물소리 새롭고(松林盡處水聲新) 한적한 개울녘엔 미나리 싹 돋아나네(閒溪濕地芹芽發)” - 강성위 한시 ‘次送元二使安西’ 중봄은 색깔과 향기로 온다. 파릇한 새싹이며 향기로운 꽃에서 새봄의 빛깔이 반짝거리면서 눈과 코를 자극할 때 비로소 봄날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봄은 결코 쉽사리 호락호락하게 오지 않는다.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가 내리면서 두어 차례 봄샘추위가 지나가야 미상불 봄처녀의 발길이 살포시 닿게 되는 것이다. 새 풀 옷을 입고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찾아오는 봄처녀를 맞이하기 위해 봄의 전령인 달래와 냉이가 서둘러 여린 싹을 내밀고 양지 바른 개울 가에는 미나리 싹이 돋아나는 것이리라. 얼음이 녹고 쌓인 눈도 녹아 개울에 보태기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한결 새롭고 맑은 것이리라.이렇게 봄이 다가오면 자연은 저절로 풀리고 녹고 새롭게 돋아나며 더불어 흐르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는 결코 그렇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숱하고 흔하기만 하다. 끝없는 질시와 반목, 불신과 배신이 팽배하고, 갈등과 대립의 긴장 속에 배타와 독선이 판을 치는 형세이니, 어느 날에야 얼음장 같은 냉랭함이 녹고 칼날 같은 빗장이 풀릴 수 있을런지 요원하기만 하다. 개인적인 해묵은 감정이나 견해차도 그렇지만,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즈음해 그러한 기류가 더욱 가세되고 증폭되는 듯해 안쓰러움을 넘어 안절부절하기만 하다.미증유의 블랙홀 같은 코로나19의 난마에 구멍 난 가슴인데, 난무하는 가담항설에 시달리는 민초들의 시선은 고뇌일까 고소(苦笑)일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역병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좀 더 편하고 나은 삶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봄빛 가득한 희망의 새싹이 풋풋하게 피어나길 기대해본다.

2022-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