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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갱년기 여성을 위한 맞춤형 운동

박성률트레이닝과학연구소장동국대 의과대학 연구초빙교수 최근 국내외 연구들에 의하면 운동이 건강과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많은 결과들이 제시되고 있다. 규칙적인 운동이 다양한 만성적인 질병의 예방에 효과가 있고, 건강한 삶에 있어서 필수 요소라는 의견도 있다. 갱년기 여성들이 겪는 여러 가지 증상들을 특정 형태의 운동에 의해 치료할 수 있고, 운동을 하고 있는 여성에서 갱년기 증상이나 문제가 적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갱년기 여성들의 경우 호르몬 분비가 감소되어 골다공증, 비만과 혈관의 탄력성 저하로 심혈관계 질환에 잘 걸리고, 심리적으로는 고독감과 우울증에도 곧잘 시달린다. 다수의 국내외 연구에서 갱년기 여성이 활발히 운동하면 열성 홍조, 불면증과 통증에 개선 효과가 있으며,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불안, 초조감이 상당히 줄어든다고 한다.그런데 너무 지나친 신체적 활동은 열성 홍조와 다른 혈관운동 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너무 강도 높은 운동은 근골격계와 관절의 부상과 통증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여 개인별 운동처방과 적절한 감독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맞춤형 운동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는 대목이다.대표적인 증상인 열성 홍조(안면홍조)는 폐경 초기 여성들에게 혈관운동 장애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증상이 되풀이되거나 그 정도가 심할 경우 만성 수면장애, 피로가 나타나며 이에 따라 짜증, 기분의 변화, 집중곤란과 행동장애를 가져와 삶의 질을 저하시킨다.신체 활동은 여성의 심혈관계 질환을 감소시키고 걷기 등 경량 운동은 매우 유익한 효과가 있으며 자신의 건강과 체력 상태를 고려한 운동은 이러한 효과를 더욱 향상시킨다.특히 주 3회, 8주 이상, 중강도로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여성은 운동습관이 없는 여성보다 열성 홍조의 발생빈도가 낮게 나타나는데, 이는 운동을 통해 시상하부의 β-엔도르핀(beta-Endorphin) 분비를 증가시켜 온도조절 중추를 안정시켰기 때문에 운동이 체온조절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 수 있다.폐경으로 인한 에스트로겐 결핍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증가하며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 복부에 지방을 축적시키는데, 이는 심혈관 및 관상동맥 질환의 발병위험을 초래하여 건강증진 및 유지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적절한 신체적 활동과 운동은 내장지방, 피하지방을 줄이고 최대산소섭취량, 탄수화물대사, 혈중지질, 혈압 등을 개선시키고 혈관 내막과 지질 기능을 향상시켜 심혈관계 위험인자를 낮춘다.특히 유연성운동, 저항운동, 유산소운동을 조합해서 하는 복합운동 프로그램에서 열성 홍조 69%, 수면 46%, 통증 46%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났으며, 혈관운동 장애, 심리적 장애, 복부 불쾌감, 피로 등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폐경 전후로 여성은 남성보다 일찍 근육량과 근력의 손실이 빠르게 진행된다. 근육의 손실로 인해 근력이 약화되는데, 특히 50~60대에 15% 정도의 근육 손실이 발생한다. 이같이 여성의 노화에 의한 빠른 근육조직과 기능 저하는 골절과 낙상 위험을 높인다.갱년기 여성에서 규칙적으로 맨몸운동 등 저항운동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근력의 손실을 방지하고 골밀도를 높이는 데 효과는 더욱 커진다.특히 주 2~3회 이상 ‘앉았다 일어서기’, ‘팔굽혀펴기’ 등 맨몸운동은 근육량 증가와 근신경계 기능을 증진시키므로 골절의 위험을 낮추고 낙상에 의한 대퇴골절의 발생 빈도 또한 줄여주는 것으로 많은 연구의 결과들이 밝히고 있다.갱년기 여성들은 골관절염과 같은 퇴행성 관절질환, 요통, 당뇨, 고혈압 등 여러 가지 질환을 함께 가질 수 있고 호흡, 순환계를 비롯하여 피로회복 저하 등 생리기능 측면에서도 예비력이 적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운동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배제하고, 건강 및 체력을 적절하게 향상시키는 방법과 절차가 무엇보다 중요하다.운동처방 전에는 의학적 검사를 통해 신체의 이상이나 질병의 유무 등 건강도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정식 자전거, 실내조정(Rowing Ergometer) 등 측정이 가능한 운동기기로 순환계나 근육과 관절에 부하를 가하여 산소섭취량, 심박수 등 운동능력을 평가하는 체력 및 운동부하 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같이 맞춤형 운동은 적절한 검사항목을 선택하고 해석하여 그에 맞는 운동의 강도와 빈도 그리고 기간과 유형이 주어질 때 효과가 더욱 커진다.사람은 누구나 노화의 과정을 겪는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서 불편함이 생긴다면 그저 두고만 봐서는 안 된다.최근 메타분석 연구에서 여성의 대략 60%는 갱년기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대체요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전문적인 진료와 치료, 그리고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맞춤형 운동을 통해 갱년기 여성들이 삶의 질을 더욱 향상시켜 나갔으면 한다.

2021-12-26

롯데쇼핑몰, 대구 경제에 정말 도움될까

심충택 논설위원 대구시 수성구 대흥·연호동 수성의료지구내 ‘대구롯데쇼핑타운’(롯데몰)이 지난 5월 공사에 들어가 현재 지반정지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14년에 토지분양을 받은 이후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공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롯데몰 부지는 주상복합단지, 또는 호텔이 건설된다는 등등의 소문이 나면서 롯데측의 진의에 대한 무수한 의혹이 제기돼 왔다. 롯데측은 7만7천49㎡ 에 달하는 이 부지를 3.3㎡당 538만원에 매입했다. 부동산업계는 현재 주변 상업용지가 3.3㎡당 1천500만원 선에 거래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수성의료지구는 이름 그대로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이 해외 제약사 등 의료관련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헐값에 부지를 분양한 곳이다.2025년 개점을 목표로 하고 있는 롯데몰은 지난해 6월 지하 1층, 지상 8층, 연면적 25만314㎡규모로 건축허가를 받았다. 대구 신세계백화점(21만4천635㎡)보다 매장 면적이 17% 가까이 큰 수준이다. 백화점, 아울렛, 영화관, 스포츠시설, 외식, 오락 등을 하나의 공간에 집약시킨 대구 최대 쇼핑몰로 만든다는 계획이다.권영진 대구시장은 수성의료지구에 롯데몰이 입점하게 돼 대구경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공식석상에서 밝혀왔다. 정말 대구시장은 롯데몰로 인해 대구경제가 좋아지고 고용이 확대될 것으로 믿고 있는가. 나는 정반대의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우선 롯데몰이 수성의료지구에 둥지를 틀면 반경 2km내에 있는 범어·만촌동과 시지지구의 골목상권은 붕괴될 것이 뻔하다. 전통시장 상인들과 골목상권 자영업자들이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은 백화점, 할인점 같은 대형 쇼핑몰이다. 평소에 집 주변 가게나 전통시장을 주로 이용해 오던 시민들은 생필품 구입이나 외식에 편리한 대규모 쇼핑몰이 생기면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게 돼 있다. 골목상권은 공동체 경제의 정맥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만큼 골목상권에 생계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다. 롯데몰이 얼마나 많은 지역업체를 입점시키고, 대구시민을 직원으로 고용할지 모르겠지만, 주변 골목상권 붕괴는 많은 서민들을 길바닥에 나앉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롯데측은 지난달 롯데몰 사업 주체를 대구 현지법인(롯데쇼핑타운대구)에서 서울 본사(롯데쇼핑)로 변경했다. 사업주체 변경의 의미는 대구 현지법인이 운영 중인 동대구역 신세계백화점과는 달리, 하루 매출액이 그날 바로 서울본사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롯데몰이 신세계백화점과 비슷한 매출액을 올린다고 가정할 경우, 매년 1조원에 달하는 매출액이 서울로 빠져 나가게 된다.사업주체 변경 외에도 롯데측의 신뢰성을 의심할 만한 일이 최근에 또 발생했다. 롯데측과 대구시가 맺은 상생협약에는 롯데몰 건설공사 시 지역업체 이용과 인력참여를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지만, 최근 롯데몰은 지반정지 작업을 하기 위한 공사를 외지업체와 20여억원에 계약체결을 했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대구시는 롯데측 입장만 변호하고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

2021-12-26

넥타이의 퇴조

정장을 자주 입는 남성이면 누구나 자신이 가진 넥타이 중 한두 개 정도는 뜻깊은 추억거리가 있다.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이거나 승진 기념 혹은 생일 등 특별한 날에 받은 넥타이가 바로 그것이다. 넥타이는 남성 패션의 시작이자 완성이라 할 만큼 남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패션이다. 그래서 남성에게 주는 선물로는 넥타이가 제격이다.정치인에게 넥타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좋은 정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빨간색은 열정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싶을 때, 오렌지색은 감성적 표현을 하고자 할 때, 파란색은 평화로운 이미지를 전달할 때 맨다고 한다. 매우 공격적이었던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빨간색 넥타이를 즐겨 맺다. 중국의 시진핑이 자주 매는 자주색은 강력한 중국을 상징한다고 한다.2016년 신사의 나라 영국의 하원은 오랜 전통을 깨고 의원에게 노타이를 허용했다. 시대 흐름을 반영하는 결정이기도 하지만 권위와 격식의 문화를 벗어 던졌다는 평가를 받았다.언제부턴가 직장인 사이에서도 노타이 차림의 캐주얼 복장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한 패션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2000년대 초반 70%에 가깝던 출근시간대 정장차림이 10년 후에는 30%로 줄었다고 한다.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시대적 흐름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정부 공식행사에서도 노타이 차림이 자연스러워지고 있는 분위기다.최근 통계청이 넥타이를 소비자물가지수 조사 대상품목에서 제외했다. 소비가 줄어든 시대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 했다. 17세기 크로아티아 군인 복장에서 유래해 남성패션의 독보적 자리를 차지했던 넥타이가 퇴조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서운함을 느낄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2-26

안동시의회에 등장한 3류 개그맨?

피현진 경북부 안동시의회가 지난 21일 2차 정례회, 제3차 본회의를 열어 각종 안건을 의결하고 30일간의 의사일정을 마무리 했다. 올해 마지막으로 열린 이번 회기에서 안동시의회는 2021년도 행정사무감사, 2022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2021년도 제3회 추가경정 예산안을 처리했다.여기까지는 모든 기초의회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늘 해오던 일이다. 그런데 안동시의회는 이런 당연한 일 외에 타 기초의회에서 하지 않고, 해야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될 일도 하고 있다. 바로 동료 의원에게 장난을 치는 일이다. 그것도 회기 중에.시의회 한 의원은 이날 정례회를 폐회하는 자리에서 단상에 올라 연설하는 동료 시의원을 향해 여러 가지 행동으로 웃기기 시작하는 등 장난을 쳤다. 조례안에 대한 심사보고에 나선 시의원은 이 같은 장난에 웃음이 터졌고, 연신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는 등 곤란해 했다. 하지만 다른 의원들은 이 같은 모습을 제지하지 않고, 함께 웃으며 때로는 장난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당시 본회의장엔 시의원들 외 시장과 부시장, 시청 집행부 공무원을 비롯해 방청객 30여 명이 있었고, 이런 모습은 인터넷과 시청·시의회 사내 방송을 통해 여과 없이 생중계됐다.문제는 이런 일이 이번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10월 열린 제229회 임시회에서도 위의 상황과 같은 상황이 연출된 적이 있었다.방송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의원들의 행동에 부끄러운 일이라고 꼬집기도 했다.어떤 사람은 “초등학생들도 학급회의 등 시간에는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하는데 시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초등학생들만도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 시민들의 대표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안동시의회 윤리강령 및 윤리실천규범 2항에는 의원의로서 품위 유지를 지적하고 있으며, 4항에는 시민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5항에는 시민의 명예를 고양시키기 위해 항상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6항에는 의원 상호 간 예의와 인격을 존중한다고 적고 있다.의원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장난이 스스로 시의회 윤리강령을 모두 어기는 일이고 나아가 의원들 스스로 명예를 갉아 먹는 일이다.기초의회 의원들은 시민을 대리해 자치단체를 감시·견제하는 등 시민들의 민의를 대변하는 아주 중요하고 막중한 의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결코 가벼운 3류 개그맨이 되려해서는 안된다. 특히 그 자리가 회기 중인 본회의장이라면 더욱더 무거운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안동/phj@kbmaeil.com

2021-12-23

성탄절 추억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 청소년 시절엔 부지런히 교회를 드나들었다. 함석지붕의 단층 목조건물과 나무기둥의 종각이 있는 작은 교회에는 낡은 풍금도 있었다. 산과 들 말고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청소년들에게 더없이 좋은 만남의 장소였다. 교회의 청소나 페인트칠 등 자질구레한 일들은 모두 청소년들이 맡아서 했는데, 그 중에서도 성탄절행사 준비가 가장 큰 일이었다. 소나무를 베어와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대나무 뼈대에 창호지를 발라 별모양의 등을 만들었다. 저녁마다 모여 유초등부 어린이들에게 성극과 무용, 합창 연습도 시켰다. 한밤중에 오들오들 떨면서 촛불을 켠 별등을 들고 먼 마을까지 새벽송을 갔던 일도 잊지 못한다. 청소년기가 끝날 무렵, 문학이니 철학이니 독서에 빠져들면서 교회를 떠났지만 해마다 성탄절이면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살을 에는 삭풍에 문풍지 우는 밤이면, “까막까치 다 얼어 죽겠다.” 할머니는 그렇게 짐승들 걱정을 잊지 않았다. 요즘처럼 방음장치 된 이중 창문 안에서는 밖에 태풍이 불거나 난리가 나도 모르겠지만 옛날 창호지문으로는 낙엽 지는 소리 달빛에 수런대는 댓잎소리도 환히 들렸다. 방안에 누워서도 한 호흡으로 자연과 소통하니 어찌 날짐승들 안부인들 궁금하지 않겠는가.단간 셋방에 신접살림을 차려 첫 아이를 얻은 해 겨울이었다. 한파가 닥쳐 밤새도록 전신주가 울부짖고 깨어질 듯 창문이 덜컹대는 밤이었다. 무심결에 ‘까막까치 다 얼어 죽겠네’ 중얼거리다 문득, 낮에 본 시장 바닥의 거지 모자가 생각났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한 여자가 두어 돌이 되었을까 싶은 아이와 함께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시장 땅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린것이 이 밤을 넘길 수 있을까, 생각하니 하얗게 잠이 달아났다. 내 아이는 기침만 해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데….“혹한을 몰아오는 칼바람에/ 밤새도록 전신주가 울부짖고/ 깨어져라 창문이 덜컹댄다// “문 열어라 이놈들아,/ 너희만 살면 다냐?”// 시장 바닥에 실성한 그 여자/ 두어 돌이 되었을까 싶은 어린것과 함께/ 이 밤 무사할까, 얼어 죽지나 않을까”- 졸시 ‘겨울 밤’이튿날 아침에 찾아가보니 먹을 것을 얻으러 갔는지 여자는 보이지 않고 아이 혼자 사시나무처럼 떨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생각나는 대로 읍사무소 사회과로 전화를 해봤으나 아무 대책이 없다고 했다. 몇 군데 교회에 전화를 해서 겨울 동안만 데려다 놓을 수 없겠느냐고 했지만 역시 안 되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교회 청년들을 불러 의논을 했다. 권사인 장모님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결혼 후 건성으로 다니던 교회였다. 텐트가 좋겠다는 결론이 났다. 히말라야 눈 속에서도 텐트로 야영을 하지 않던가. 주머니를 털어 시내로 텐트를 사러갔다. 사정을 얘기 했더니 텐트 값을 많이 깎아주었다.시장 귀퉁이에 텐트를 치고 바닥에는 두꺼운 스티로폼을 깔았다. 오줌에 절은 누더기도 버리고 깨끗한 이불로 갈았다. 따끈한 호빵을 한 봉지 사서 안겨 주었더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어둠이 내리고 희끗희끗 눈발이 날렸다. 성탄전야였다.

2021-12-23

추합의 애환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오늘 포스텍 전화 추합 몇 시에 시작하는지 아실까요?”“카이스트 빠지는 분 계시면 빨리 알려주세요 ”요즘 유명 이공계 학생, 학부모 카페에는 이런 애타는 목소리로 가득하다.추합이란 ‘추가 합격’의 준말인데 한국 입시 시즌의 독특한 풍경이다.카페에는 ‘추합을 위한 빠져요’라는 보드가 따로 설치되어 있어 정보를 주고 받는다. 한마디로 교육부가 대학 정원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코미디 같은 풍경이다.학부모들과 학생들이 애간장을 태우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학이 다른 수험생에 의해 ‘빠지기’를 눈에 빠지게 기다린다. ‘빠진다’는 말은 그 대학을 포기한다는 말이니까 지원자들에겐 정말 애타게 듣고 싶은 말이다.대학을 6개까지 지원할 수 있다고 하니까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긴 하다. 당시에는 대학을 단 한 개만 지원해 낙방하면 후기 대학을 가던가 아니면 재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에 비하면 여러 개의 대학을 동시에 지원해 원하는 대학을 고르는 현 상황은 한보 진보한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여전히 추합에 목매는 현 상황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포스텍을 포함한 우수 대학들에서 합격을 포기한 학생이 수천 명이 된다는 것이 뉴스로 크게 올라온다. 포스텍·카이스트·서울대 동시 합격자가 어디를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나 추가 합격자가 어디를 가는가 하는 것도 초관심사이기도 하다. 이공계는 주로 다른 대학 의대에 중복 합격한 수험생이 등록을 포기하면서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경쟁대학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미국대학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미국 명문 스탠퍼드 대학도 합격을 포기하고 다른 대학으로 간 학생들이 어떤 대학으로 갔는지 통계표를 작성하기도 한다.그러나 한국과 차이점은 스탠퍼드 대학은 정원이 없이 매년 2천500명 정도를 합격시켜 등록한 학생들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대강 1천500명 정도가 되는데 그 숫자는 매년 일정하지 않다. 정원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추합이라는 난리를 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최근 차기 정부에서 교육부 해체를 공학한림원 원탁 토론회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했다고 한다.대학 교무회의에 참석하면 대학에서 가장 골치 아픈 논의가 어떤 학과의 정원을 줄여서 어떤 학과의 정원을 늘리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한국대학에서만 빚어지고 있는 기현상이다.그동안 교육계에서는 “교육부가 없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다”라는 자조적인 말이 있었다. 교육부가 대학지원을 무기로 입학정원에서부터 대학 구조조정까지 여러 가지로 대학을 규제하여 왔기 때문이다.추합으로 고생하고 있는 학생, 학부모를 볼 때마다 정원 자율화와 교육부가 재정지원을 전가의 보도처럼 흔들면서 대학을 규제하는 상황에 마음이 편치 않다. 더 이상 추합으로 전화통을 붙잡고 애를 태우는 모습이 없었으면 한다. 자율은 당분간 혼란스러워도 결국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리를 잡게 된다.

2021-12-23

우울한 크리스마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처음 발견된 오미크론 변이는 델타 변이보다 가벼운 증상을 유발한다는 현지 의료진의 의견이 알려지면서 한때 코로나19 팬데믹 종식을 뜻하는 낭보로 전해지기도 했다. 덜 치명적 방식으로 진화해 감기처럼 가볍게 자나갈 수 있어 올 크리스마스의 선물이 될 거라는 낙관론이었다.그러나 실제는 기존의 변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감염되기 시작해 지금은 세계 89개국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발견되고 있다. 영국 등 유럽에서는 오미크론의 변이가 우세종으로 바뀌면서 각종 상점들이 셧다운에 들어가고 있다.내일이면 크리스마스 날인데 크리스마스 시즌 분위기가 암울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송이 울려 퍼지고 선물 준비로 한창 붐빌 도심거리는 한산하기 짝이 없다. 연말 대목을 잔뜩 기대했던 상인들은 강화된 방역조치로 줄어든 손님에 그저 한숨만 내쉰다. 대목 장사를 망친 상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진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보통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백신을 접종하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벌써 2년째 ‘집콕’ 크리스마스를 맞아야 하니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크리스마스는 기독교에서 예수 크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부활절 다음으로 가장 큰 기념일로 옛날에는 성탄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1949년 정부수립 후 이날을 최초로 공휴일로 지정했다. 70년 이상 공휴일로 지내온 날이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 이날은 시민에게는 그해 마지막 공휴일로서 송년의 아쉬움도 달래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주고받는 미담이 넘치는 날이다. 하얀 눈이 내려 더 아름다워야 할 크리스마스 휴일을 올해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망쳐놓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2-23

독이 든 사과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독이 든 사과’가 정치권에 회자되고 있다. 백설공주는 계모 왕비가 사과 파는 행상인으로 가장해 준 사과에 독이 든 줄 모르고 먹었다가 쓰러졌으나 결국 다른 나라 왕자와 만나 결혼해 잘살게 됐다는 스토리로 이어진다.하지만 독이 든 사과의 본질은 우선 당장 겉보기에는 예쁘고 맛나 보이지만 독이 들어 있어 해로운 물건을 가리킨다. 정치권에서 네거티브전을‘독이 든 사과’로 비유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특정 후보가 경쟁 후보의 약점이나 단점을 후벼파듯이 들춰내 흠집을 내면 상대 후보의 지지도를 떨어뜨릴 수 있어 자신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이미 양식있는 국민들은 네거티브가 횡행하는 선거풍토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 현재 대선판이 네거티브로 혼탁해지고 있는 데는 진영대결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란 진단이 유력하다. 정치권의 양대 진영을 굳이 나눈다면 민주화와 40대, 산업화와 60대 세력으로 나눠진다.혼탁한 대선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경쟁자인 상대 진영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로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한 바를 인정하고, 발전적 경쟁자 관계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양 진영의 소모적 비방전은 정책경쟁에 쓸 시간을 비생산적인 흑색선전에 모조리 소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유권자인 국민들에게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할 지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대의민주주의를 좀먹는다. 이것이 네거티브 선거의 가장 큰 폐단이다.이제 여야 모두 ‘정책선거로의 회귀’를 내걸고 과감하게 변화에 나서야 한다. 우선 집권당인 여당부터 선거에 임하는 자세를 바꿔야 한다. 여당이 여유를 가지고 다양한 정책을 제안하며 야당과 토론을 시도해야 한다. 정치 선진국인 미국의 선거를 보면 여야 대권후보들이 TV토론에 나와 정책을 두고 일대일로 맞붙고, 이에 대한 여론의 찬반동향이 유권자들의 선호에 그대로 반영되곤 한다. 아무리 논란 많은 정책이라 해도 상대방 후보의 약점만을 헐뜯고 비판하는 네거티브전보다는 낫다.야당 역시 여당 후보를 국민과 국가가 더 풍요롭게 잘 살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정책으로 이겨야 한다. 여당과 정부의 실수, 또는 반사이익에 기대어 무작정 정권교체를 주장해선 안 된다. 장기적으로는 권력구조를 포함한 개헌으로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전부 아니면 전무’가 되는 대통령제 권력구조를 여러 정치세력의 합의와 협치로 운영되는 의원내각제로 바꿔야한다. 첨예한 진영대결을 조장하는 양당체제의 선거제도 역시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류·3류 정치는 반복될 수 밖에 없다.서로 헐뜯고 깎아내리는 ‘독이 든 사과’정치, 이제 사라져야 한다. 이번 대선은 누가 국가와 국민을 부강하게 하고, 자유와 권리를 잘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가름하는 선거가 되기를 소망한다.

2021-12-23

코비드(COVID) 세대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또 멈췄다. 일상 회복 지원금까지 쏟아부었지만, 일상은 회복과 더 멀어졌다. 사람의 일상은 살아 있는 유기체다. 그래서 일상은 숨을 쉰다. 일상이 숨을 쉴 수 있는 에너지는 관계다.사람의 일상을 분석해 보면 관계 아닌 것이 없다. 사람은 관계를 맺기 위해 산다. 관계가 단절된 사람에게 있어 일상은 무의미하다. 무의미한 일상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무기력은 사람과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 대표적인 결과는 범죄다.최근 흉악 범죄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일상이 멈춤으로써 사람 관계가 끊겼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람만이 가지는 가장 큰 힘은 이해와 배려다. 그 힘이 현실에서 실현된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지금 이 사회에서 사랑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이 되었다.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기적인 마음이다. 코로나야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변질된 사람의 마음과 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 백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나, 대통령 후보들은 돈으로 국민을 희롱하지 말고 끊어진 사람 관계를 복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관계를 잃어버린 것은 사회만이 아니다. 사회보다 더 위중한 곳이 학교다. 일상보다 더 빨리 멈춘 곳 역시 학교다. 학교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하고, 또 기본적인 기능이 관계 형성이다. 학생은 관계를 배우기 위해 학교를 다닌다. 학생이 배우는 관계는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다. 그 과정에서 학생은 사회를 발전시킬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코로나 대창궐 이후에 교육 당국은 교육의 기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온라인 수업이다. 하지만 온라인 수업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최면에 빠른 정부는 벌써 그것이 임시방편인지 잊어버렸다. 그래서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 형성처럼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만 나오면 온라인 수업부터 생각한다. 온라인 수업은 이제 교육계의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사실은 교육을 뿌리부터 왜곡하고 있지만 말이다.K-방역은 어디 가고 오미크론 이후 학교는 또 멈췄다. 학생의 성장과는 상관없이 온라인 수업 덕분에 교육부 시계는 멈춤 없이 학년말을 향하고 있다. 학교는 학생의 성취도와 무관하게 진급과 졸업 준비로 바쁘다. 과연 학생들의 내년 학교살이는 어떨까?온라인 수업 기간은 학생에게 있어 학습 공백기이다.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특별 교육 기간을 두거나, 교육과정을 조정한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학교는 무책임하게도 그냥 때가 되었으니 학년을, 학교를 떠나라고 학생을 종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학력 저하 타령이다.코로나 시대를 건너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불신과 허무다. 코로나와 불신과 허무, 그리고 관계를 잃어버린 지금 세대를 이름 지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코비드(COVID) 세대’라고 할 것이다. 코비드 세대의 중심에는 온라인 수업으로 학교를 잃어버린 학생이 있다.

2021-12-22

김정은 정권 10년을 평가한다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지난 12월 17일 평양에서는 김정일 사망 10주년 추도대회가 태양궁전에서 개최되었다. 동시에 김정은의 10년의 행적을 찬양하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은 현지 시찰 열차에서 심근 경색으로 사망하였다. 김정은은 장례 시부터 북한 정권의 최고 통치자로 행세하였다. 권력의지가 강한 김정은이 형 김정철을 제치고 미리 후계자로 결정된 결과이다. 1984년생 당시 27세였던 김정은은 애도기간 내내 눈물을 흘렀다. 그 후 그는 당 제1비서로 추대되고 오늘의 총비서, 국무위원장이라는 북한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김정은은 집권 초반부터 권력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그를 둘러싼 당·군 간부를 수시 교체하여 충성도 경쟁을 유도하였다. 공산주의 국가 권력 이양과정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백두혈통론’을 내세워 3대 세습을 이어갔다. 그는 2013년 고모부 장성택마저 공개 처형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이복형 김정남도 처치하였다. 그는 집권 초반부터 2016년까지 현영철, 리용하, 장수길 등 약 100명의 권력 측근을 숙청해 버렸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룡해, 당 조직비서 조용원, 동생 김여정, 현송월 부부장이 그의 핵심 측근이다. 김정은은 집권 후 인민제일주의를 내세워 인민 경제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인민들에게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공언도 하였다. 그는 19개의 경제 개발 특구를 설정하고, 시장 경제의 허용을 통해 북한 경제의 획기적인 발전을 획책하였다. 그러나 4차례의 핵실험과 60여회의 미사일 시험발사는 유엔과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라는 역풍을 초래하였다. 더욱이 코로나 사태의 북·중 국경 봉쇄는 올해 총 교역액을 3억 달러로 추락케 하였다. 김정일 집권 시 3.86%의 경제 성장은 0.84%로 주저앉아 버렸다.김정은의 핵·경제 병진노선에 따른 북미 협상을 통한 체제 보장이라는 외교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가 추구한 2018년 판문점회담, 9·19 평양 합의는 싱가포르와 하노이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연결되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은 북미관계 뿐아니라 남북관계마저 경색시켜 버렸다. 핵개발을 북미 회담의 지렛대로 삼아 북미관계 개선과 체제 안전의 보장이라는 그의 목표는 좌절되어 버린 것이다. 개성 남북 연락사무소의 폭파는 남북관계마저 단절시켰으며 북미간의 외교적 돌파구도 보이지 않고 있다.김정은 정권 10년, 북한 경제 회복과 체제의 안전이라는 그의 목표는 현재로서는 멀어진 꿈이 되어 버렸다. 유엔의 대북 제재와 코로나 팬데믹은 북한의 경제 문제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인민제일주의를 내세운 김정은 정권은 식량 문제마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이 국가 제일주의를 앞세워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시장은 600여 개로 늘어나고 주민들의 휴대 전화는 벌써 800만대를 넘어 버렸다. 엄격히 통제된 북한 사회도 정보화시대에 ‘진공속의 안정’으로 남을 수는 없다. 평양의 봄은 언제쯤 오려는가.

2021-12-22

산수유 열매, 그리움으로

산수유 꽃차를 우린다. 바짝 말랐던 꽃잎이 화사하게 물에서 피어난다. 찻물이 서서히 노랗게 변한다. 찻잔을 입에 대자 떫은 향이 입안에 퍼진다. 한 모금 입속에 모았다가 삼킨다. 입안에 떫은맛이 금방 사라지고 은은한 차향이 남는다.봄이 오면 고향마을 뒷산에 산수유꽃이 가장 먼저 피었다. 건너편 진달래가 신호를 받아 드문드문 연분홍 꽃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땅들은 들썩들썩,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꽃들이 몸을 비틀기 시작한다. 따스한 바람이 불면 어느 사이 산수유가 뒷산을 가득 물들였다.사물에 대한 추억은 사람마다 다르다. 계절에 따라, 함께하는 이에 따라,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억이 소환된다. 내게 산수유나무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산수유꽃이 피면 노란 꽃그늘 아래 어머니가 있고 열매가 열리면 열매를 따서 가을 햇볕에 말리는 어머니가 있다. 봄이 오면 가장 먼저 어머니의 산수유가 떠오른다.어머니의 삶은 몹시 추웠다. 하루하루를 넘겨도 도무지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머지않아 봄이 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농사일에 허리 한 번 펼 수 없을지라도. 어머니는 봄을 좋아했다. 뒷동산에 산수유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면 자주 중얼거렸다. 봄이 와서 꽃을 피웠는지, 꽃이 피어 봄이 왔는지. 산수유는 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산수유꽃은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의 꽃으로 보인다. 꽃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가면 꽃차례에 노란색 꽃이 소복이 모여 있다. 자그마한 우산을 펼쳐 놓은 것처럼. 마치 별들이 하늘 향해 모든 것을 열어놓은 듯하다. 하늘바라기, 별바라기, 꿈바라기가 거기에 얹혀있다. 충분히 별바라기 했다면 산수유는 이제야 열매를 맺는다. 봄꽃이 모두 피고 지고, 여름꽃도 사라지고 단풍조차 다 떨어진 후에 손톱모양의 열매를 단다.산수유나무의 고향은 중국 산둥성이다. 산둥성에서 구례군 산동면 계척마을로 시집온 새색시가 산수유 열매를 들고 와서 심었다고 한다. 새색시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정서도 많이 달라 힘들었지만,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했다. 새색시는 통일신라 말기의 유학자 최치원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공부하다 급히 귀국하면서 딸에게 산수유씨앗을 쥐여줬다고 한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신라 청년을 만나 지리산 산동면에 시집왔다. 새색시는 많은 날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녔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새색시는 고향의 어머니 또한 많이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마당 안팎에 심은 산수유나무를 보듬고 그리움을 달랬다. 그때 심은 산수유나무가 천 년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 아들나무도 있다. 지금까지 구례군 산동면 일대는 산수유꽃과 산수유 열매로 가득하다. 이순혜​​​​​​​수필가 산수유나무를 ‘대학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산동마을 사람들은 산수유 열매를 팔아 자녀를 공부시켰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꽃을 따서 말리고 열매를 수확할 때 산수유 꽃그늘 아래 있음을 감사하게 여겼다.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의 사랑 덕분에 나무도 살아가고 그들의 아이들도 살아갈 수 있었다. 산수유나무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은 우리와 같은 생명체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나 싶다. 산수유 열매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열매를 따서 씨를 털어내고 말려 차로 마시면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해준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마음까지 따듯하게 데워준다. 산수유차는 온갖 부정한 것을 물리친다고 하여 많은 이들이 즐겨 마신다. 어머니의 산수유는 어떠했을까, 고된 노동에서 허리 펼 때 보았던 희망이었을까, 오종종히 어머니 어깨에 매달린 자식들의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오롯이 산수유꽃과 열매만으로 함박웃음 지었을 어머니의 마음이었을까, 고향의 씨앗을 땅에 묻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것은 또 다른 그리움의 표현이었을까, 골짜기마다 산수유가 물들인 것을 보며 새색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어디에다 그렸을까. 얼마나 깊은 곳에 새겼을까.인생에서 또 한 번의 겨울을 건넌다.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꽃들이 시끌벅적 폭죽을 터트려 꽃을 피울 것이다. 노란 꽃물에 내 마음을 앉혀놓고 있으면 곧 가을에 이르러 붉은 산수유 열매를 볼 것이다.창가에 앉아 산수유 열매를 본다. 창밖의 바람에도 찻물이 노랗게 일렁인다. 내 안의 세포들이 일어나 추억 한 장을 갈무리하고 페이지를 넘긴다.

2021-12-22

오년마다 한 계단씩 가라앉는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큰일이다. 대선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사람들의 믿음을 세우기보다 무너뜨려서 큰일이다. 나라의 갈 길을 보여주기보다 흐리멍텅하게 만들어 큰일이다. 내일이 보여야 하는데 오늘마저 뭐가 뭔지 가늠하기 힘들어 큰일이다. 청년들에게 힘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짐만 안기니 큰일이다. 여성들에게 든든한 무엇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되레 헷갈리게만 하니 큰일이다.믿음직하게 보여주는 건 도무지 없고 거짓과 땜빵만 즐비하니 큰일이다. 학교에서 배운 일들이 모두 다 반대로 벌어지니 큰일이다. 큰 선거가 나라의 큰일이어야 하는데 그 선거가 큰일나게만 만드니 큰일이다. 국민은 고구마를 백개쯤 입에 문 것처럼 답답하고 억울하다. 보나마나 엄청난 돈들을 쓰고있을 터인데 덕이 되는 건 하나도 안 보이니 큰일이 아닌가.대선이 교육을 망치고 있다. 당신들만 없었어도 나름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며 자라고 있었을 다음세대가 대선에서 무엇을 배울까. 온 나라의 선생님들이 학생들 앞에서 정직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집집마다 가정에서 아이들 기르면서 착하게 자라라고 마음도 먹기 힘들지 않을까. 소신과 원칙은 내팽개칠지라도 눈앞의 이익에는 아귀같은 심성들만 즐비한 오늘이 아닌가. 어제까지 애지중지 가까웠어도 정치적 계산에 따라 언제라도 등돌리는 차가운 우정을 보고있지 않을까. 심대하게 틀어졌다가도 술 한잔에 쇼처럼 마술처럼 어깨동무를 하는 세상에 신의와 성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 배운 바는 모두 신속하게 잊어야 하는 세상을 배우는 게 아닐까. 나라는 오년마다 한 계단씩 가라앉는다. 국민은 선거를 겪으며 사나워질 뿐이다.신뢰라면 무너질 바닥도 없다. 이제 우리에게 서로를 믿는 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진영의 의미를 망각하며 떠돌며 헤맨다. 보수와 진보는 발전을 위한 멋진 양 날개여야 하거늘, 당신이 섬기는 바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표에 따라 인기에 흔들리며 마구 오락가락하는 모습들에서 국민은 당신이 무엇을 믿는다는 겐지 알 바가 없다.보수든 진보든 다시 가서 공부하고 오시라. 나라와 국민은 한치라도 잘 살고 싶지만, 진영 간 악다구니에는 지쳐만 간다. 소신과 철학도 보이지 않는 이전투구는 정치도 아니고 씨름도 못 된다. 든든한 오늘을 지켜내든지 희망찬 내일을 가져와야 하지 않겠나. 선진국 문턱에서 후진국 정치를 목격하는 국민의 처지를 헤아려는 보는지.나라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국민은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어제를 돌아보며 오늘을 징검다리 삼아 내일로 달려가야 한다. 말재주꾼을 기다린 적이 없으며 구호만 들먹이는 사람을 기대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여 일하고 또 일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 생각도 반듯하고 실력도 출중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오년 만에 만나는 대선이 대박을 터뜨려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한 계단 올라설 수 있을까. 희망을 당기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2021-12-22

리플리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말한다. 거짓이 탄로 날까 봐 불안해하는 단순 거짓말쟁이와 달리,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믿는다.리플리 증후군의 이름은 미국의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에 쓴 범죄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의 주인공 ‘리플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반항아적 기질의 주인공 톰 리플리는 친구이자 재벌의 아들인 디키 그린리프를 죽인 뒤, 대담한 거짓말과 행동으로 그린리프의 인생을 가로챈다. 즉, 톰 리플리가 아닌 디키 그린리프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린리프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그의 연극은 막을 내린다.실제 현실에서도 리플리 증후군의 사례는 다양하다. 지난 2007년 동국대 교수 임용 및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 선임 과정에서 예일대 박사학위와 학력을 위조한 S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 사건을 ‘재능 있는 리플리 씨’에 빗대어 ‘재능 있는 S씨’로 표현하면서 리플리 증후군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지난 2014년에는 SBS의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2008년부터 6년 동안 48개의 유명 대학교를 전전하며 신입생 행세를 한 학생의 사연을 추적 보도하기도 했다.리플리 증후군이 위험한 것은 욕구 불만족과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본인의 상습적인 거짓말을 진실인 것으로 믿게 되면서 단순한 거짓말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신조어는 최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야당 후보의 부인의 학력과 경력에 대해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공격하면서 다시 소환되고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12-22

아버지와 부대찌개

아버지는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 가방공장 사장이었다. 덕분에 나는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을 보냈다. 우리 집이 있었고, 옥상엔 아버지의 골프 연습 시설이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주말마다 낚시를 다녔고, 엄마는 평일 오전에 에어로빅과 꽃꽂이를 했다. 그러나 IMF 사태로 아버지 공장은 부도를 맞고, 집안 곳곳엔 차압딱지가 붙었다. 아버지는 지방을 전전하는 행상이 되어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다.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아버지가 일 년여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에어쇼 행사장에서 무슨 일을 한다며 놀러오라고 했다. 아버지 본다는 생각에 설레어 토요일 방과 후 성남 비행장으로 갔다. 비행기들이 일으킨 모래바람 너머 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채 소시지를 굽고 있었다. 파인애플을 꼬치에 끼우고 있었다. 나는 좋아하던 군것질거리를 실컷 먹는다며 마냥 즐거웠고, 아버지는 웃었다. 빨간 모자챙 아래 그 웃음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인지 깨달았을 때 나는 어른이 돼 있었다. 머리가 굵어 아버지가 어려웠다.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게 됐다. 같이 목욕탕에 갈 수 없을 만큼 멀고 어색해졌다.아버지는 십 여 년 전 충남 당진 대호만 물가에 컨테이너 집을 짓고 정착했다. 된장과 청국장을 담가 팔고, 낚시하러 오는 손님들에게 서툰 손으로 닭도리탕이나 라면을 끓여 내고, 평생 좋아한 낚시 실컷 하면서 편하게 사시는 듯했다. 그런데 몇 해 전,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하는 날까지 나를 포함한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만큼 무뚝뚝한 분이다.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수술이 잘 됐다. 위를 절제했으므로 식사량이 줄어 몸집이 작아진 아버지, 약해진 아버지는 아들이 감당해야 할 슬픈 풍경이다. 그해 여름 대호만에 갔더니 아버지가 전복을 넣고 옻닭을 삶아주셨다. 고기에는 손도 못 대고 국물만 뜨는 아버지, 아버지 앞이라 울진 못하고 그저 먹기만 하는 나, 내가 먹어 치운 닭 한 마리, 뼈대만 남아 앙상한 낚시 좌대, 아버지 따라 야윈 대호만 물, 먼지 쌓인 아버지 낚싯대, 햇살 내려앉은 장독대, 덜 마른 빨래, 일찍 덮어버린 에어컨, 아무것도 모르는 뒤란의 닭과 개들, 유난히 푸른 하늘, 반짝반짝 빛나는 약통… 내게 각인된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어린 나를 목마 태우던 젊고 건강한 사내에서 힘없는 촌로로 대체된 지금, 나는 빨간 모자를 쓰고 소시지를 굽던 옛날의 아버지 나이가 됐다.얼마 전, 아버지가 천안 단국대병원에서 정기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수면내시경 검사에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어떤 내색을 잘 안하는 아버지는 그동안 동네 친구분과 함께 병원에 다녔는데 이번엔 추수철이라서 동행이 어렵다고, 그래서 “혹시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10시면 끝날 거야” 내게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동네 친구분을 보호자로 하여 병원에 다니셨다니, 아들 눈치를 보시다니, 속상하고 죄송했다.차가 막혀 30분 늦게 도착하니 당진서 먼저 온 아버지는 노란 검사복을 입고 병원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청력이 약해져서 간호사가 묻는 말에 내가 몇 번 대신 대답했다. 혈압 재고 내시경실로 가 검사 받으실 동안 나는 수납하고 원내 약국에서 약 처방을 받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잘 부축해드리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오늘 내내 어지러울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쳐보였다. 아버지를 부축하고 걸었다. 힘껏 붙잡고 싶은데 힘껏 붙잡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들의 마음이다. 부축도 견인도 아닌 동작으로 아버지 팔에 손을 얹은 채 말없이 걸었다.밥 먹고 가자 하셔서, 검사 2시간 이후부터 식사가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럼 먼저 올라가…” 아버지 혼자 식사하실 게 눈에 밟혀 병원 권고를 무시하고 근처 백반집에 들어가 앉았다. 아버지 입맛에 맞게 청국장이나 우렁된장을 시키려는데, 아버지가 부대찌개를 가리켰다. 햄과 소시지 같은 걸 드시는 줄 몰랐다. 아버지의 뜻밖의 취향, 세월은 흐르는데 내가 모르는 아버지가 너무나 많다.어쩌면 아들 입맛에 맞추려고 부대찌개를 시키신 게 아닐까. 아버지는 부대찌개를, 아들은 우렁된장을 생각하는 어긋남이 아버지와 아들의 평생이다. 지금은 어정쩡한 부축에 실린 아들의 가벼움과 아버지의 무거움 사이를 걷고 있지만, 부대찌개를 먹고 아들은 살찌고 아버지는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이다. 부축하는 팔에 점점 힘이 많이 들어갈 것이다. 늘 그랬듯 아버지와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주앉은 밥상 위에 부대찌개 끓는 소리만 들렸다.

2021-12-21

겨울의 기억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어떤 계절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늘 “겨울”이라 답한다.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지만, 우선 눈 내리는 풍경을 마주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봄과 여름, 겨울에 미뤄둔 고민이나 일들을 한꺼번에 실행하기도 하고, 고마운 이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용기내어 보내기도 한다.그렇게 한 해를 얼렁뚱땅 마무리 지으며 새 시작 앞에서 겨우 의연한 척 해본달까. 그게 일 년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계절인 겨울에 내가 해보곤 하는 일들이다.눈을 보며 먹는 겨울 간식도 좋아한다. 겨울밤만 되면 속이 답답하다는 엄마는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잦다. 군고구마나 옥수수, 감자 같은 걸 한 솥 크게 삶아 쟁반 째로 내어오면 각자 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가족은 금세 거실로 모여든다. 겨울 간식이 가족간의 따스한 정을 나누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고구마의 맛이 심심해질 때쯤엔 손으로 찢은 잘 익은 김장김치를 올려 먹고, 목이 막힐 쯤엔 차가운 동치미 한 사발을 들이켜 퍽퍽함을 씻어낸다. 이불 안에서 손이 노래 질 때까지 까먹는 귤의 맛도, 폭닥한 외투 속에 붕어빵을 안고 뒤뚱뒤뚱 집으로 향하는 것도 이 계절에서만 누릴 수 있는 묘미다. 이쯤 되니 내가 겨울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다.만성 비염을 앓고 있는 난 매일 코가 닳아 있지만, 그래도 겨울을 좋아하는 건 아무렴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겨울에 태어났단 점이다.2001년 겨울이다. 엄마는 셋째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만삭이었던 엄마는 출산 시기가 앞당겨 오자 나와 둘째를 데리고 잠시 외할머니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어느 새벽 급격한 태동을 느낀 엄마는 급히 나주병원으로 옮겨갔고, 어린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확인하자마자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서럽게 울음을 쏟아냈다.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외할머니는 허벅지를 찰싹 때리더니 언니는 동생 앞에서 절대 울어선 안 된다며 쏘아봤다. 열손가락 모두 금과 옥반지를 끼고 있던 할머니의 손은 얼마나 맵고 매몰찼던지. 동생이고 뭐고 내 마음 하나 이해 못해주는 할머니가 미워 더 큰 소리로 울어대면 할머니는 애써 등을 진 채 외면했다.외할머니는 동네에서 멋쟁이라 불릴 만큼 반짝이는 옷을 즐겨 입었고 그만큼이나 흥도 많으셨다. 누가 보건 말건 기분이 좋으실 땐 춤을 추곤 하셨는데, 검정색 라디오를 이리저리 똑딱이다 보면 댄스의 시작을 알리는 시끄러운 트로트가 쿵광거리며 흘러나왔다.실크 소재의 검은 상하의를 갖춰 입고선 오른발과 왼발을 차례로 내밀며 나아가는 그 스텝은 어린 내가 보기엔 얼마나 난해하고 우스꽝스러웠는지. 지금 떠올려보면 다 유쾌했던 어린 날의 추억들이다.외할머니는 호랑이 선생님 역할도 하셨다. 넌 이제 초등학생이니 구구단 정도는 눈을 감고서도 외워야 한다며 2단부터 9단까지 엄격히 가르치셨는데,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삼은 육… 그 특유의 리듬감에 맞춰 낮게 외는 소리는 그때 외할머니에게 눈물 콧물 빼며 배운 것이다.추가로 전국 8도 지도를 펼쳐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경기도-평안도-황해도-함경도 순으로 한 번에 외는 수업도 들어야만 했다. 무사히 수업을 이수한 덕분인지 지금도 낯선 지명을 들을 때면 아아, 거기 경상북도에 있는 곳? 하며 직감적으로 알아맞히곤 한다. 이런 게 조기교육의 결과인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장난감이나 책 한 권 없는 지루한 일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창문을 내다보는 일이었다. 엄마는 열 밤을 자고 온다고 했고, 그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분명 동생을 품은 엄마가 등장할 거라 생각했으니까.그때부터 창문을 보는 습관이 생겼달까. 사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 몰랐지만 글을 쓰다 보니 틈만 나면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이유가 위의 경험 때문이란 걸 방금 깨달았다.눈이 잔인할 만큼 거세게 내리는 날엔 늘 크고 작은 이별이 있었다. 늘 예고 없는 헤어짐은 한 겨울 속이었고, 극단으로 스스로를 몰아 방치하는 것도 전부 극심한 추위 속이었다.거듭 돌이켜 보면 이별과 슬픔으로 이루어진 계절인데도 어쩐지 나는 차갑고 매운 바람 부는 겨울이 와야 비로소 나의 오랜 집 안에 들어선 듯하다. 다시금 떠올려보자면 분명 울적하고 지루한 시간이지만 그것이 나를 지탱하고 있음을 안다.

2021-12-21

노인을 위한 나라

김규종 경북대 교수 “개 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알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와야 겨우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어. 늙은이들에 대해서 누구 하나 관심이 없잖아.”2008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말이다. 이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인을 거듭하는 연쇄 살인범 쉬거를 추적하는 황혼의 보안관 벨. 그는 확연히 달라진 미국의 현주소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국 사회에 만연한 노인들에 대한 끔찍할 정도의 무관심이다. 노인이 알몸에 개 목걸이를 걸치고 거리를 배회해야 비로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노인에 대한 무관심이 어디 미국만의 문제인가?! 우리나라에서도 노인들에 대한 무관심은 극에 달한 형편이다. 선거철이면 표 때문에 얼굴 들이미는 정치인들 말고 누가 노인들에 대해 깊은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기야 아직도 ‘고독사’의 정확한 통계치마저 없는 나라고 보니 노인을 향한 냉대에 가까운 무관심과 무반응, 무신경은 당연지사처럼 보인다.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 하루 24시간의 변화나, 1년 사계절의 운항이나, 생로병사의 필연적인 수순(手順)은 변화가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입증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경영대학원 마우로 기옌 교수가 펴낸 ‘2030 축의 전환’은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베푼다. 그 가운데 하나가 ‘노인’에 대한 관점의 필연적인 변화다.기옌 교수에 따르면, 불과 9년 뒤인 2030년의 70대 노인들은 요즘의 50대처럼 원기 왕성하고 혈기방장하며 쓰임새가 클 것이라 한다. 그들 자신의 건강에 관한 관심과 엄격한 자기관리, 나아가 사회 전반적인 의료와 영양의 진보가 그 바탕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확보한 부(富)가 젊은 세대를 압도하기 때문에 돈을 벌고자 하는 기업은 주 고객 대상으로 70대 이후의 세대에게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우리 주변에도 강건하고 의욕에 넘치는 은퇴한 세대가 즐비하다. 그들 가운데 남성들은 등산이나 신체 단련에 시간을 소모하고, 여성들은 각종 모임에 분망하다. 그들은 돈은 적게 받아도 좋으니 일자리를 달라고 하소연한다. 집에서 온종일 얼굴 맞대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부부의 불화와 반목(反目)을 예방하는 최적의 수단이 남성의 출근 아닌가?! 여기서 문제가 생겨난다. 기업은 고임금과 정비되지 않은 노동법을 근거로 노인 재취업에 난색이다. 하지만 노인 문제를 방관하면 어떤 문제가 불거질 것인지는 명약관화! 이제라도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토론회나 공청회부터 열어야 한다. 적정한 임금 수준과 노동 가능 시기를 조율하여 숙련된 노인 노동력을 사회적으로 방치하고 낭비하는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누구나 노인이 된다는 명제만큼 자명한 이치도 없다. 인생 3막을 열어가려는 노인들에게 새로운 활기와 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이제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2021-12-21

44번 버스의 교훈

이창훈 경북도청본사취재본부장 중국 오지의 한 시골길을 버스가 달리고 있다.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던 청년이 손을 흔들어 버스를 세운다. 2시간이나 기다렸다는 말에 젊은 여성 운전사는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이후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다시 2명의 남성을 태웠고, 잠시 뒤 이들은 강도로 돌변한다. 두 강도는 승객들의 금품을 모두 빼앗고 폭행까지 한다. 그러다 여성 운전사를 훑어보고는 성폭행을 하기 위해 강제로 차에서 끌어 내린다. 청년은 승객들에게 그냥 두고 볼 거냐고 소리치지만 승객 모두 고개를 돌린다. 청년 혼자 강도들을 막아 보려 하지만 오히려 강도의 칼에 찔려 부상만 당하는 등 두 사람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운전사는 승객들을 말없이 돌아본다. 뒤늦게 청년이 버스에 타려 하지만 운전사는 청년을 매몰차게 버려둔 채 버스를 몰고 떠나 버린다. 허탈한 청년은 다른 차를 얻어 타고 길을 가는데, 교통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경찰이 보인다. 청년이 탔던 44번 버스가 교각을 들이받고 언덕 밑으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운전사와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는 경찰의 말에 청년은 허탈한 미소를 짓는다. 이 여성 운전자는 이 버스에서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은 청년 한 명이라고 생각했고, 나머지 모두는 자신이 선택한 죽음의 길에 동반시켰다. 한마디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비겁한 방관자의 최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 내용은 중국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지난 2001년 홍콩에서 영화 ‘버스 44’로 제작돼 알려졌다. 러닝타임 11분 밖에 안되는 독립영화지만 너무나 강력한 메시지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지금 우리나라는 향후 수십년을 좌우할 대통령을 뽑는 중요한 시기에 도래했지만 국민은 어느 때보다 참담한 상태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골라야 하나 후보마다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있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여당의 이재명 후보는 대장동 비리 의혹에다 형수 욕설, 여배우 스캔들, 최근 아들의 도박 혐의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시장·군수 후보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의 많은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 야당의 윤석열 후보는 검찰 총수까지 올랐지만, 아내와 장모 리스크에 공정과 정의라는 본인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고, 어정쩡한 사과 등 대통령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를 기대하기는 부족해 보인다.선거일이 다가오고 있지만 국민을 위한 정책 대결은 보이지 않고, 서로의 치부만 들추어내는 네거티브가 극에 이르고 있다. 사태가 이렇다보니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로 상당수의 젊은층을 비롯 중장년층도 투표에 무관심해 지고 있다는 여론조사결과다. 하지만 후보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않을수록 국민이 이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 44번 버스의 방조자가 되어 함께 자멸의 길을 걸을 수는 없지 않은가.플라톤은 말했다. “정치를 외면하다 보면 오히려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고. 문득 랭보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오 성(城)이여, 계절(季節)이여,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었으랴’.

2021-12-21

30대 장관

핀란드 산나 마린 총리는 1985년생이다. 34세이던 2019년 총리에 취임했다. 그녀는 파격적 내각 구성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19명의 장관 중 12명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그 중 마린 총리를 포함해 4명이 30대 여성이다. 마린 총리 내각은 작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잘 관리해 국민의 70% 지지를 얻었다.세계적으로 30∼40대 지도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은 만 39살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뉴질랜드 저신더 아던도 2017년 37살 나이에 총리로 임명된 여성 지도자다. 벨기에 샤를 미셸 총리도 38살에 총리가 됐으며 오스트리아 제바스틴 쿠르츠 총리는 35살의 현직 총리다.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은 47살에 대통령이 됐고, 영국의 캐머린 전 총리는 43살에 총리에 취임했다.정치 지도자의 연령층이 낮아지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특히 지구촌 곳곳에서의 30대 국가 지도자 탄생은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다. 젊은 지도자 등장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기성정치에 대한 실망이라는 것이 보편적 분석이다. 국내서도 지난 6월 국민의 힘 당 대표 선출에서 36세의 이준석 후보가 뽑혀 돌풍을 일으켰다. 이 대표의 당선은 세대교체 이상의 의미를 담아 우리 정치사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윤석열 국민의 힘 대선후보가 집권 후 청년인사 중용 방침을 밝히고 있다. 차기 내각 구성에 30대 장관 인선도 말했다. 젊은 층의 장관 등용은 여러 면에서 고려할 부분이다. 디지털화 시대에도 바람직한 선택이며 기성정치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부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기도 하다.국회의원과 장관의 평균 연령이 50∼60대에 머물고 있는 한국정치 현실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란 면에서 기대감도 있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2-21

19세기, 피아노가 있던 풍경

영화 ‘피아노’의 전개는 섬세하다. 그 섬세함은 순전히 배우들의 연기력에서 기인한다. 배경은 생경하고 아름다우며, 진행은 겉잡을 수 없이 전개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빼곡히 화면을 채우고 있다. 여기에 시대적 배경과 장소, 피아노라는 사물과 주인공 ‘에이다’의 인물 설정들이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영화는 하나의 층위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다양한 층위가 겹겹이 쌓여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쉽게 짐작된 층위가 만만찮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우선, 19세기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뉴질랜드라는 장소부터 시작해야 한다. 18세기 초 영국은 뉴질랜드협회를 세우고 식민운동을 시작한다. 연이어 뉴질랜드 토지회사를 설립하고 뉴질랜드의 토지를 마음대로 팔아 먹는다. 당연히 원주민인 마오리족과 백인들의 충돌이 일어나고, 19세기 말에 들어서 인종분쟁이 끝나고 마오리족의 공식적인 영국화가 시작된다. 서구의 식민주의와 원주민 사이 문명간의 충돌이 첨예했던 식민주의 뉴질랜드다.이러한 배경에 여섯 살때부터 말하기를 그만두고 침묵을 선택한 ‘에이다’는 미혼모로 아홉 살 난 사생아 딸 ‘플로라’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머나 먼 곳 뉴질랜드라는 낯선 땅에 도착한다. 그녀의 짐이 뉴질랜드 해안가에 부려질 때, 피아노도 함께였다.‘에이다’와 딸 ‘플로라’가 뉴질랜드에 도착하면서 남편 ‘스튜어트’와 근처에 살고 있는 ‘베인스’가 등장한다. ‘스튜어트’와 ‘베인스’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온 백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현지에서의 생활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뉴질랜드로 옮겨 진 피아노는 이들 사이에서 단순한 악기 그 이상의 배치에 놓이며, 다양한 층위의 상징과 은유로 역할을 맡는다.피아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장소를 이동한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말처럼 “아주 무겁고 시끄럽고 거추장스러운 악기”가 바다를 건너 해변가에 머물기도 하고, 진흙탕길의 밀림을 거쳐 ‘베인스’의 집으로 다시 ‘스튜어트’의 집으로 옮겨 다닌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깊은 바다 속으로 잠긴다. 피아노가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모종의 거래가 일어난다. 땅과 육체, 감정의 거래조건으로 피아노가 놓인다.식민주의는 쟁탈의 역사였다. 원주민의 관념에서 거래될 수 없는 것들을 유럽에서 건너 온 백인들이 빼앗고 거래하며 ‘탐욕’과 ‘욕망’을 채워 나가던 시기다. 원주민의 역사에서 땅을 비롯한 자연은 주인이 없었다. 그것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공동으로 잠시 이용할 뿐이었다. 쟁탈의 세계관과 원주민의 세계관이 충돌하여 피로 물들던 시대다. 이러한 식민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는 ‘호기심’과 ‘에로티즘’이라는 요소를 더한다.말을 하지 않는 ‘에이다’는 손가락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우선 수화(手話)가 그러하며, 간단한 의사전달을 위해 연필을 잡은 손가락이 그러하다. 그리고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피아노,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가락이다.주인공 ‘에이다’가 ‘왜 말하기를 그만두었는가’와 ‘왜 그토록 피아노에 집착하는가’의 직접적인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피아노가 놓인 곳 마다 ‘에이다’는 피아노를 따라다니며 연주한다. 뉴질랜드의 해변에서 ‘베인스’의 집에서 손가락을 이용해 피아노를 치고 대화를 나눈다.다양한 층위의 은유와 상징으로써 피아노는 여러 방식으로 거래된다. 물론 피아노를 둘러싼 거래품목들, 주고 받는 것들이 일반적이지 않다. 여기에 최종적으로 거래를 끊어내는 방식이 충격적이며 명쾌하다.피아노의 이동과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의 거래 내역 속에서 식민주의와 여성성과 에로티즘 등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다. 그래서 섬세하게 보기보다는 거칠게 보아야한다.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기저에 놓인, 그 다양함이 어느 선상에서 출발하느냐의 문제다. 혈연과 결혼, 가족 단위에서 국가적 단위로까지 이어지는 바탕에 깔린 ‘탐욕’과 ‘욕망’ ‘호기심’ ‘에로티즘’과 ‘사랑’의 단어들이 부정과 긍정,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를 넘나든다. 19세기 뉴질랜드가 그러하다.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생경하고 아름다운 풍광과 정확하게 나눠지지 않는 복잡한 감정들과 풍성한 의미를 담은 피아노 선율과 함께하는 영화다./(주)Engine42 대표

2021-12-20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 쪽샘의 유리구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가 있다. 우리는 이 ‘작은 세계’를 통해 유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고,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작은 세계’는 보존과학이라는 분야를 통해 우리에게 새롭게 밝혀진다. 쪽샘 유적에서 발굴된 1400년 전 유리구슬에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가 있다.유리는 흔한 물질이다. 하지만 고대에는 유리가 권력자의 사치품이었다. 유리는 화려한 색상, 특유의 광택과 투명함을 띠며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구성이 약해 깨지기 쉽다. 인류가 유리를 처음 만든 건 약 4500년 전. 학계에선 지중해 지역에서 유리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유리가 한반도에 처음 출현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으로, 중국의 철기문화와 함께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가 되면 다양한 유리제품이 등장한다. 특히 유리구슬은 고대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리제품 중 하나다. 고대의 유리구슬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 주로 장신구의 재료로 사용됐고, 이런 장신구는 권력자의 죽음과 함께 무덤에 매장됐다가 발굴이라는 학술적 행위를 통해 다시 빛을 보게 된다.발굴된 유리구슬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매우 작은 기포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기포는 유리구슬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단서다. 고대 유리구슬을 제작하는 방법은 크게 4가지였다. ①기다란 유리를 금속 봉에 스프링 형태로 감아서 제작하는 감은기법 ②넓은 판 형태의 유리를 금속 봉에 감아 열을 가한 후 양 끝 부분을 접합해 만드는 접은기법 ③유리 융액을 잡아당겨 유리 관을 만든 후 잘라서 제작하는 늘인기법 ④거푸집 중앙에 철심을 꽂은 후 작은 유리 조각을 넣고 가열하거나 유리 융액을 부어서 제작하는 주조기법 등이다.고대의 유리는 당시 제작 기술의 한계와 유리 융액의 높은 점성으로 인해 기포가 외부로 방출되지 못하고 유리 내부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구슬의 형태를 만들 때 사용되는 힘의 방향에 따라 기포의 배열이 다르다. 감은기법과 접은기법은 구슬을 꿸 수 있는 구멍의 방향과 교차하는 가로방향으로 기포가 배열되며, 늘인기법은 구멍의 방향과 평행하는 세로방향으로 기포가 배열된다. 그러나 유리 용액을 부어서 제작하는 주조기법은 기포의 방향성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쪽샘의 유리구슬은 어떤 방법으로 제작했을까? 발굴된 유리구슬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구멍의 방향과 평행하는 세로방향으로 기포가 길게 늘여져 있는 것이 확인됐다. 즉, 이 구슬은 늘인기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늘인기법으로 제작한 유리구슬의 경우 한반도에서 관련한 부산물이 보고된 바가 없고 기술적인 난이도를 고려하였을 때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걸로 추측된다.쪽샘의 유리구슬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에서 제작했을까? 유리는 모래나 석영광물을 넣어 용융(融解·고체가 열에 의해 액체가 되는 현상) 과정을 거쳐 만든다. 석영광물을 녹이기 위해서는 1700도에 육박하는 고온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저런 온도를 높이는 기술이 없었기에 용융온도를 낮추기 위해 융제(融劑·원물질의 녹는점보다 낮은 온도에서 융해하게 하는 물질)를 첨가한다. 융제를 첨가하면 화학적으로 불안정한 구조가 되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다시 안정제를 첨가하고, 다양한 색상의 유리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착색제를 더할 수 있다. 융제로 사용한 재료는 나트륨(Na), 칼륨(K), 납(Pb) 등이 있는데 첨가되는 재료에 따라 유리 종류가 구분된다. 나트륨을 사용하면 소다 유리, 칼륨을 사용하면 포타쉬 유리, 납을 사용하면 납 유리로 분류한다. 한편 안정제로 사용하는 재료는 칼슘(Ca), 알루미나(Al), 마그네슘(Mg) 등이 있다. 소다 유리 중 알루미나 함량이 높은 경우 고(高)알루미나 유리로 분류하며, 함량이 낮은 경우 광물의 탄산소다를 사용한 네트론 유리와 해양 식물의 재를 사용한 식물재 유리로 다시 분류할 수 있다. 첨가된 융제와 안정제의 성분을 통해 고대 유리의 제작지를 추정할 수 있다. 포타쉬 유리는 인도나 동남아시아산 초석이나 식물의 재가 원료다. 고(高)알루미나 유리는 아시아의 특징적인 조성으로 주로 남아시아 혹은 동남아시아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네트론 유리는 지중해 지역의 원료로 제작했고, 식물재 유리는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원료로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김세희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쪽샘에서 발굴된 유리구슬은 감청색이 가장 많다. 그외 벽색, 청록색, 황색 등이 있다. 분석 결과 감청색 유리구슬은 초석을 사용한 포타쉬 유리와 소다 유리로 밝혀졌다. 많은 양을 차지하는 소다 유리는 고(高)알루미나 유리와 네트론 유리 계통이 확인됐다. 벽색과 청록색, 황색의 유리구슬은 대부분 고(高)알루미나 유리다.아직 한반도에서 발굴된 고대 유리구슬의 유통 경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최근 학계에선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제작된 유리구슬이 해양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유입됐다는 견해가 발표됐다. 아울러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리구슬의 성분 조성이 인도나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출토되는 유리구슬의 성분 조성과 유사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쪽샘 유적에서 발굴된 유리구슬 역시 아직까지 제작지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최근 연구 성과를 고려한다면 교역이나 교류를 통해 외국에서 유입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현재 쪽샘 지구에 대한 발굴이 진행 중이다. 출토된 유리구슬에 대한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기에 쪽샘 유리구슬의 ‘작은 세계’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

2021-12-20

동지(冬至) 무렵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날씨가 제법 추워지니 비로소 겨울이 느껴진다. 세월의 바퀴는 세모로 치닫고 계절의 수레는 한겨울로 굴러간다. 잎새를 떨군 나무들은 당당한 외로움의 가지를 드러내는데, 휑한 들녁은 텅빈 충만으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만고청산은 조곤조곤 동면의 생물들을 품으며 파리한 푸른빛으로 세한(歲寒)의 화폭을 채우는가 하면, 사람들은 복잡다단한 삶의 질곡에 성찰과 침잠의 몸짓으로 또 한 차례의 연륜을 쌓아가고 있다.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다. 세찬 칼바람에 눈보라가 휘날리는, 그야말로 북풍한설에 산하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추워야 겨울의 제격이 아닐까 싶다. 그런 겨울이라야 추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필자의 어린시절 겨울은 혹독했지만, 오히려 강추위 속의 겨울놀이로 나름 즐거웠다고나 할까? 매운 바람결에 나목의 신음 같은 전율이 오싹해져도 언덕 위에서 손등이 부르틀 정도로 연날리기를 하고, 얼어붙은 무논에서 얼음지치기를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거나 깨어진 얼음장 밑으로 두 발이 빠져도 온종일 한데서 추위와 꼿꼿하게 맞서며 재미난 겨울놀이를 즐겼던 것 같다. 그렇게 보낸 동심의 추억이 있었기에 해마다 맞는 겨울이 가슴 시리게 푸근하기만 하다.‘한겨울 시린 마음 겹겹으로 고이 접어/사랑방 아랫목에 꼬옥 재워두면/눈치는 겨울밤에도/서럽지 않으련만’ - 강성위 시조 ‘겨울밤’ 전문동지가 다가오는 겨울밤은 길기만해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금세 배가 출출해졌다. 그럴 때면 으레 또래들과 뜨뜻한 구들방에 둘러 앉아 시시닥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무나 고구마를 깎아서 먹고, 살얼음 낀 식혜를 단지에서 퍼먹으며 요기를 달랬다. 요즘처럼 인스턴트식품이 거의 없던 시절 식혜는 겨울 별미 중의 최고였다. 시원 달콤하고 걸쭉 매콤하며 아삭 새큼한 맛이 우러나는 안동식혜는 낮에 일하다가 새참으로 먹기도 했지만, 겨울밤에 친구들과 어울려 먹는 맛이야 말로 어떤 음식맛과도 견줄 바가 못됐다. 구멍 난 문종이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간혹 떡가루 같은 눈발이 소리없이 날리던 겨울밤, 아늑하고 쿰쿰한 사랑방에서의 먹거리 나눔은 달달하고 정겹기만 했었다.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지는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하였다. 동지를 기점으로 낮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면서 양기(陽氣)가 살아나기 때문에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으로도 전하고 있다. 나이를 빨리 먹고 싶어 동지팥죽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릴 적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요즘은 나이 한살 더 먹기가 두렵기만 하니, 연치(年齒)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동지에 즈음하여 팥죽에 대한 의미와 주변을 살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예부터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경사나 재앙이 있을 때에 팥죽, 팥밥, 팥떡을 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코로나의 난마를 팥죽 한그릇으로 이겨낼 수도 있지 않을까?

2021-12-20

영덕 지방소멸을 저지할 물적 토대 ‘공모사업’과 국비확보

박윤식 경북부 지난 10월 18일 행정안전부는 전국 기초단체 중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있는 행정구역 89곳을 지정·고시했다.전국 229개 기초단체의 39%에 해당하며 경북과 전남이 각각 16곳으로 가장 많았다.지난 20년간 인구가 감소한 지역은 151곳으로 66%에 달한다.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에 따르면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수도권으로 유입되는 인구가 기존의 2배 이상으로 증가하고 있고, 그 중 75%가 젊은층이어서 지방의 인구절벽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 역시 작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는지 연간 1조원의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국고보조사업 선정 때 지방에 가점을 주는 등 행정적·재정적인 지원책을 내놨다.하지만 문제는 어미 주둥이에 물려있는 모이는 하나인데 한껏 입을 벌리며 처절히 울어대는 새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다 줄 수 없다는 것은 살릴만한 놈에게만 모이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결국 노력하고 노력하는 지방자치만 살 수 있는 구조로 변화한 것이다.그러한 변화속에서 영덕군은 매년 새로운 공모사업과 국비 등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영덕군이 최근 정부예산 심의과정에서 2022년도 국비 예산 62억5천만원을 추가로 확보한데 이어 ‘2022 어촌뉴딜300’ 신규대상지로 선정돼 110억원을 확보하는 등 대형 국책사업을 연이어 유치함으로써 군예산을 전년대비 112억원이 증액된 5천125억으로 편성했다.주요 사업을 살펴보면 △국립해양생물종복원센터 건립 △강구대교 건설 △축산~도곡 국지도 개량사업 △포항~삼척 동해중부선 철도부설 △고래불해수욕장 해안 생태탐방로 △영덕시장 재건축의 일환인 도시재생인정사업 등 영덕군을 새롭게 변화시킬 새로운 활력사업들로 구성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새로운 무한경쟁시대에 군민의 행복은 이러한 지방자치단체의 노력들이 모여서 이뤄 지는 것이다. 이희진 영덕군수는 “국책사업 추가확보와 군예산 증액 편성을 통해 군민 모두가 행복한 영덕, 지속발전이 가능한 영덕을 만들기 위해 온힘을 다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영덕군이 국비와 공모사업에 목을 메는 이유는 지방 세수가 적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정된 먹이를 먹기 위해선 잘 훈련된 전투부대원이 필요하다.최근 도시에서 일하고 농촌 전원주택에서 생활하며 바닷가 주택에서 힐링하는 듀얼라이프가 새로운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만큼 ‘영덕형 듀얼라이프’ 에 대한 구체적인 추진체계를 수립해야 한다.머무르다 떠나는 관광도시 영덕이 아닌 정착을 위해 다시 찾는 영덕이 될 때 지방 소멸 위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영덕/newsyd@kbmaeil.com

2021-12-20

윤석열 후보에게 드리는 고언(苦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제1야당의 윤석열 후보는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책임이 있다. 정권교체 여론은 50%가 넘는데 윤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30∼40%선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윤 후보가 국민의 정권교체 열망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윤석열은 정치에 입문한지 이제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정치신인이다. 살아 있는 권력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저항정신은 높이 평가하지만, 문재인 정권의 실정에 아우성치는 국민의 고통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윤 후보가 국민의 여망을 받들어 대권을 잡으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에 각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첫째, ‘권력불나방’들의 감언이설(甘言利說)을 경계하면서 오직 ‘국민의 소리’만을 경청해야 한다. 선대위 출범이 늦었던 것도 윤 후보의 측근과 당대표 및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다툼 때문이었다. 미래 권력을 두고 벌이는 대선캠프에도 충신과 간신이 있다. 노회(老獪)한 정치꾼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권력에 혈안이 된 간신들의 요설(妖說)을 멀리하고 충신들의 고언을 경청해야 한다. 선대위 출범을 앞두고 내분이 극심했을 때 상임고문단이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역할을 함으로써 가까스로 당이 화합할 수 있었다. 이제 윤 후보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소명의식과 혜안(慧眼)이다.둘째, ‘보수의 혁신’이 중도 확장의 첩경이자 대선 승리의 길임을 명심하라.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과 2030’의 마음을 얻으려면 꼴통보수를 버리고 혁신보수의 길을 가야 한다. 윤 후보의 전두환과 5·18 관련 실언(失言)에서 입증되었듯이 극우세력에 휘둘리는 순간, 중도는 물론 다수 국민의 마음은 떠난다. 인재를 영입해서 ‘외적 이미지를 새롭게 포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수의 혁신을 통한 ‘내용의 실질적 변화’이다. 총괄선대위원장 김종인의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려면 보수의 혁신이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정치신인 윤석열’을 후보로 선택한 이유가 ‘보수혁신을 통한 정치혁신’에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마지막으로 ‘국정의 미래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국민이 정권교체를 바라는 것은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국정청사진이 없다는 것은 기대할 것이 없다는 뜻이 된다. 이미 죽은 권력이나 다름없는 ‘반(反)문재인’ 정서에 기대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윤 후보가 말하는 “국민을 위한 국가”, “지속가능한 일자리 창출”, “공정한 세상”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은 윤 후보가 역설하는 정권심판론 보다 정권교체 이후의 새로운 삶에 더 관심이 크다. 김종인 위원장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실력 있는 정부가 국민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 후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국민에게 호소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지 그 철학과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2021-12-20

무형문화재 ‘갯벌 어로’

갯벌어로가 무형문화재로 선정돼 화제다. 문화재청은 갯벌어로를 신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고 20일 밝혔다. 무형문화재는 형태로 헤아릴 수 없는 문화적인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형체가 없기 때문에 그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지정 대상이 된다.예를 들어 인류의 정신적인 창조와 보존해야 할 음악·무용·연극·공예기술 및 놀이 등 물질적으로 정지시켜 보존할 수 없는 문화재 전반을 가리킨다. 이번 무형문화재 지정 범위는 맨손이나 손 도구를 활용해 갯벌에서 조개류·연체류 등을 채취하는 어로 방식인 갯벌어로를 비롯해 관련 전통지식, 공동체 조직문화(어촌계)와 의례·의식 등을 모두 포함한다.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 갯벌을 무대로 어민들이 일군 전통 어로 방식이다.갯벌어로는 오랜 기간 갯벌이 펼쳐진 한반도 서·남해안 전역에서 전승되며, 조선 시대 고문헌에서 갯벌에서 채취한 해산물을 공납한 기록이 확인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화재청은 갯벌어로에 쓰이는 도구나 방식이 지질이나 지역에 따라 달라 그 기술의 다양성이 학술연구 자료로서 가치와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특히 갯벌어로는 지난 9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제작한 광고영상에서 민요 옹헤야를 배경 음악으로 바지락을 따러 가는 어민들의 경운기 여러대가 갯벌을 달리는 장면이 화제를 모았다. 20일 오후 기준 영상을 본 시청자 수는 3천471만명을 넘었다.어로 방식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례는 이번이 두번째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9년 한국 어촌문화와 생업의 근간인 어살(漁箭)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바 있다.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화로 자리잡기까지의 오랜 염원이 어느덧 무형문화재로 자리매김해가는 듯 싶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12-20

어떻게 살 것인가

조현태​​​​​​​수필가 조선조 시대에 병조판서와 대제학까지 역임한 ‘윤회’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출중한 인격자였다.그가 젊은 시절에 시골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행색이 말이 아닌 까닭에 여관주인이 투숙을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뜰아래 앉아있었다. 그때 주인집 아이가 까만 구슬을 하나 들고 나왔다. 구슬을 손바닥에 굴리며 놀다가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구슬은 데구루루 굴러서 장독대 사이로 들어갔다. 아이는 구슬을 찾느라 요리조리 살피다가 금세 포기하고 들어가 버렸다.그런데 그 순간 커다란 거위 한 마리가 나타나 그 구슬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여관에서 야단법석이 났다. 엄청난 값어치가 나가는 흑진주를 도둑맞았다는 것이다. 앞뒤 상황을 간추려보던 여관 주인 내외는 구슬을 훔칠만한 사람이 새로 나타난 윤회 밖에 없다고 의심했다.날이 새면 관가에 고발하겠다며 도망가지 못하게 그를 기둥에 묶어놓았다. 갑자기 도둑으로 취급받게 된 윤회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까닭 없이 봉변을 당하기는 억울하지만 워낙 명확한 진실을 알고 있으니 그다지 염려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장 어떻게 할 방도가 없으니 그저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윤회는 주인에게 자기 곁에 거위도 함께 붙들어 매 달라고 청했다. 주인이 생각하니 엉뚱하고 괴이하지만 귀중한 보석을 찾기 위해 윤회의 요구대로 거위를 붙잡아 따로 묶어 두었다.이튿날 아침, 자신을 끌고 가려는 주인을 보고 윤회는 우선 ‘거위 똥부터 살펴보라’고 말했다. 이상하게 여긴 여관 주인이 우습다는 투로 나무랐다. 없어진 흑진주와 거위 똥이라니 도대체 두 가지 물체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코미디의 한 부분 같기도 하지만 일단은 윤회의 말대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거위 똥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속에 흑진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윤회는 그때서야 어제 본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은 부끄러워하며 사과하고 나서 말했다.“그런 줄 알았으면 어제 저녁에 말하지 왜 지금에야 그 이야기를 하느냐?” 그러자 윤회는 “만약 그 때 말했다면 당신이 거위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 조금만 참으면 거위를 살릴 수 있기에 일시 수모를 참았노라.”덕을 세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진실이란 어떻게 감추든지 언제 밝히든지 사실 그대로 남아있게 마련이다. 윤회에게 ‘진실은 흑진주를 훔치지 않았고, 때가 되면 거위에게서 찾을 수 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위가 자신의 입장을 증명해 줄 상황이 어느 시점이든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거위를 다치지 않게 진실이 밝혀진다면 자신의 덕이 올바로 세워진다는 것이다.근간에 스스로를 덕망 있는 사람이라고 외치며 백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그런 사람을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 여기지만 출중한 인격자는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거위를 잡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둥에 묶일 줄도 알고 관가에 끌려가서 곤장을 맞지 않아도 될 것은 알지만 거위 배를 가르지 않으면서 도둑 누명을 벗지는 못하고 있다.덕을 제대로 세워서 윤회를 능가하는 인품이 지금 시대에도 있기를 빌어본다.

2021-12-19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윤영대수필가 이제 대선도 80여 일 남았다. 그런데 국가 미래의 꿈을 보여주기는커녕 갈수록 서로 헐뜯는 시끄러운 잡음들이 연일 매스컴과 SNS를 달구고 있다. 대통령 후보자들의 기본 자질은 고사하고 주변의 인물, 특히 가족들의 참하지 못한 언행들이 우리 귓전에 맴돌며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우리가 흔히 들어오던 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가 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자신을 수양하고 다음에 집안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는 옛 가르침을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을 통해서 배워왔다. 대통령 후보자의 개인 능력이나 인격과 품성은 유권자 각자의 판단일 수 있지만 최근 가족의 행위들을 볼 때 옛 가르침이 가슴을 치게 만든다.이재명·윤석열 후보 둘 다 법학과를 나와 변호사, 검사로서 또 도지사, 검찰총장직을 수행하면서 나름대로의 국가통치 방법을 익혀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들과 아내의 석연치 않은 비행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 안타깝다. 그것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그러한 것들이 떠도는 자체가 후보 자신들의 문제다. 공인으로 국민 앞에 나서려면 본인과 가족의 법적, 도덕적 검토가 필요하다. ‘내로남불’이라는 희한한 말들이 이곳저곳 떠돌며 품격을 떨어트리고 사회의 빈축을 사고 그에 대한 변명도 사죄도 진실이 아닌 듯하니 이 나라의 미래를 맡기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사람들은 자기 자식 나쁜 점을 알지 못하고 자기 밭에서 자라는 곡식의 싹이 큰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요즈음 대선 정국에 절절히 맞는 것 같아 안쓰럽다. 이재명 후보는 대장동 개발사업 논란에 휩싸여 말 바꾸기를 거듭하더니 아들의 불법도박과 성매매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며 “아들 말을 믿는다”하며 고개를 숙였다. 윤석렬 후보는 고발 사주 의혹으로 질책을 받더니 최근 부인의 허위 경력 의혹에 “공정 상식에 맞지 않다”고 사죄했다. 그 진실공방이 연일 들쑤셔대지만 듣고 보는 국민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이러한 인물들이 국가수반이 되고자 나서는 것 자체가 ‘수신제가 후 치국’이라는 옛 선현의 일깨움과 멀기 때문이다. 연좌제라는 말은 요즘 사라졌어도 아들의 비행, 부인의 허위가 후보 행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정치사를 보면 가족·형제 측근들의 돈에 얽힌 비리들이 꼬리를 문다. 전두환은 형제 비리로 ‘29만 원’만 남았고 노태우는 ‘6공 황태자’를 낳았고 김영삼은 ‘소통령 아들’이 재임 중 구속되었으며 김대중은 아들 ‘홍삼 트리오’가 청탁과 금품수수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고 노무현은 형 때문에 비운을 맞아 결국 투신자살하였다. 이명박은 다스 논란, 처가의 로비 사건으로, 박근혜는 측근의 비선실세 국정농단 등으로 투옥되어 있다. 참으로 부끄럽고 불행한 통치자들의 모습이다. 모두 자신을 갈고닦으며 집안을 두루 살피지 못하고 외적인 과시와 투쟁만을 해온 결과이다.공자의 가르침에는 수신에 앞서 정심(正心)을 가지라 했다. 자신과 가정에 대한 바른 마음으로의 통찰이 필요하다. 내년 대선을 염려하며 후보들에게 한 마디 ‘수신제가 후 치국평천하’.

2021-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