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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웃

등록일 2022-09-01 18:08 게재일 2022-09-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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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폭염과 가뭄을 지나온 풀들이 가을의 초입에 서 있다. 날마다 이 들판에 나와 거닐면서 나도 그들과 함께 여름을 지나왔다. 망초와 고들빼기는 벌써 제철을 마감하고 달맞이꽃도 줄기 끝에 남은 꽃을 마저 피우고 있다. 그들에게 이 가을은 한 생의 마지막 계절이겠다. 다른 풀들에 비해 대가 무른 코스모스가 가뭄을 많이 탔다. 이번 가을에는 제대로 꽃을 볼 수 있을까 조바심을 했는데, 며칠 전부터 비가 내려 지금은 제법 생기를 회복한 상태다. 노랗게 벼 익은 들판을 배경으로 코스모스와 억새가 피어있는 풍경이 좋아서 다른 풀들보다 마음이 더 간다. 도깨비바늘은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미국쑥부쟁이는 외래종인데도 토종 쑥부쟁이보다 이 땅에 더 잘 적응을 했다. 타국에서 한국 농촌으로 시집 와 억척스럽게 사는 여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쑥대와 명아주, 강아지풀도 쇠어가면서 가을 문턱을 넘고 있다.

벼들이 고개를 숙인다. 이삭이 영글수록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속이 차고도 겸손한 사람을 일러 고개 숙인 벼이삭에 비유한다. 딱 맞는 말이다. 빈 쭉정이들이 오히려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설쳐대는 세상이 아닌가. 조와 수수, 기장도 알이 차면 고개를 숙인다. 밀레의 그림 ‘만종’의 부부처럼 고개 숙인 자세에는 경건함이 감돈다. 겸허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자연에 경전 아닌 것이 없다. 흔하디흔한 들풀일수록 더 강인한 생명의 메시지를 보여준다. 이대로 가면 이 들판 벼농사는 풍년이겠지만 아직은 모른다. 작년 가을에는 태풍이 없었지만 비가 너무 자주 와서 쓰러진 벼가 많았다. 같은 품종이라면 이삭이 실한 벼일수록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기 쉽다. 소출이 적어도 키가 낮고 이삭이 작은 품종을 선택할 것인가는 농부의 판단에 달렸다. 누운 벼가 물에 잠겨 추수를 포기한 논도 더러 있었다. 거센 비바람 앞에서는 오히려 못난 벼가 잘 견딘다.

메뚜기들이 날거나 뛰는 게 더러 눈에 띈다. 옛날 같으면 이맘때쯤 들길을 가면 가마솥에 콩 볶듯 메뚜기들이 튀었는데 지금은 드물게 눈에 띌 정도다. 농약과 제초제 때문에 살아남은 메뚜기들이 많지 않은 것이다. 개체수가 줄어든 것뿐만 아니라 크기도 작아졌다. 메뚜기만큼이나 흔하던 개구리도 어쩌다가 보이고, 물방개 소금쟁이 물장군 같은 물벌레들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미꾸라지도 없어졌다. 벼들만 풍년인 들판은 사람들에게만 풍요롭게 보일 뿐이다. 부지런한 농부일수록 생태계엔 더 적이다. 논둑의 풀이라도 그냥 두면 좋으련만 수시로 제초제를 쳐대는 바람에 풀벌레들이 깃들 곳이 없어졌다.

날마다 들길을 걷는 것이 일과의 하나인 나에게는 들녘의 풀들이 이웃이고 그들의 안부가 주요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바람과 구름과 비와 햇볕을 한 이불처럼 같이 덮고 사는 사이다. 가뭄에 풀들이 시들어 가면 나도 목이 타서 비를 기다리게 된다. 현대를 살면서 인간사회의 사정에도 무관심 할 수가 없지만, 내 삶의 본령은 자연과 함께 사는 것이다. 자연은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도 가지고 있다. 여름 가고 가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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