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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

등록일 2022-09-04 18:03 게재일 2022-09-0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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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교과서에 실린 안톤 쉬나크(A. Schnack·1892∼1961)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학창 시절에 여러 번 읽었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은 끊어져 거의 일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이렇게 시작하는 미문(美文)의 결정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깊이 물든 선홍색 단풍잎처럼 마음이 내려앉아 있을 때, 나는 쉬나크의 글을 읽었다. 더러는 깊은 한숨을 동반하고, 더러는 이국적인 풍광과 습속으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랬던 박박머리 소년은 청년을 지나 중년의 기나긴 터널을 거쳐 초로의 입구에 있다. 쉬나크가 절절하게 써 내려간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내겐 없다.

장 자크 루소는 ‘에밀’(1762)에서,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1869)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두 가지를 지적한 바 있다. 그 하나는 양심의 가책이고, 그 둘은 육체적 고통 혹은 질병이다. 톨스토이가 프랑스어 원문으로 ‘에밀’을 읽고 난 기억을 더듬어 소설에서 루소와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고 나는 짐작한다. 육체적 고통과 질병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둘을 제외한 모든 고통은 상상의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가 깊은 괴로움에 시달리는 이유를 돌이켜보면 그들의 사유가 타당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 이후 정형화된 이른바 ‘트라우마 이론’은 고통의 원인을 모두 과거에서 유추하는 원인론 혹은 인과론이다. 과거에 깊은 슬픔이나 마음의 상처 또는 육체적 고통을 겪은 사람은 예외 없이 지금도 괴롭고 죽기 전까지도 괴로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서 쉬나크의 글을 떠올린다. 그러다 홀연히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나이 먹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젊은 날의 치기 어린 광기나 어리석음일까, 비난의 칼날로 상대를 괴롭힌 일이었을까, 아니면 명절에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은 불효였을까?! 아니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놓고 없던 일처럼 치부해버린 후안무치였을까?!

영원히 사라져버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나락으로 떠나간 시간과 관계와 사건을 돌이킴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반추와 성찰에 담긴 어둑한 자신과 나누는 대화에는 분명 치유 이상의 힘이 있다. 오래전부터 나를 아프게 했던, 하여 기억의 씨줄과 날줄에 깊이 새겨진 고통의 현장을 눈앞에 끄집어내서 용감하게 대면하는 일이야말로 다가올 날들을 예비하는 현명한 자세 아닐까, 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은 아마도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진실하지 못했던 자세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그들과 대면한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차분한 9월 초순의 아침나절이 고요히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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