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질 것이다 (Ⅴ)

-안나는 나와 함께 하는 동안만 우리 집안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약속하마. 하지만 안나와 안나 뱃속의 아이는 다르다. 이제 네가 약속해다오. 안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너의 동생으로 인정해다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내가 죽은 뒤에도 그 아이를 경쟁자라 여기지 말거라.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 내가 저 세상으로 갈 무렵이면 너도 이미 제법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는 그저 그 아이가 건강하게 바르게 자라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커 준다면 그때 가서 그 아이가 할 일이 있겠지.-알겠습니다.필립이 대답했다. 만식은 무릎과 허벅지를 손으로 움켜쥐며 필립을 보았다. 억울하다, 서운하다, 그럴 수 없다.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지? 알겠습니다, 라니. 필립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그 여자를 사랑하십니까?필립이 만식에게 물었다.-사랑이 무엇이냐?만식이 대답했다.-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필립이 다시 만식에게 물었다.-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느냐? 젊고 건강한 여자를 가질 수 있다면 너는 거부할 수 있느냐? 내가 칠십 먹은 여자와 함께 있으면 아름다운 것이냐? 돈 있고 건강이 있는데, 욕망이 있는데 왜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도덕, 다른 사람들의 시선, 순리 따위 말하지 마라. 그것들에 신경 쓸 것이었으면 애초에 인공 장기 따위 이식받지 않았다. 나는 벌써 죽었지. 나는 안나의 피부, 가슴, 엉덩이를 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게 사랑이라면 안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게 징그러운 노욕이라면 노욕이겠지. 노욕이면 또 어때.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진 것뿐이다. 안나도 내게서 받고 싶은 것을 받을 것이고. 우리는 서로 주고받은 거다. 너는 다를 줄 아느냐?만식은 이렇게 대답했다.짐을 다 챙긴 만식이 병동의 수간호사를 불렀다. 짐을 집으로 보내 달라 부탁했다.수간호사는 당황했지만 이내 네, 하고 대답했다. 굳이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원래는 안 해드리는 건데.수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흘렸지만 만식은 대답 없이 병실을 나섰다. 확실히 이전보다 숨쉬기 편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것이 맞기는 한데, 어디에 세웠더라? 차를 어디에 세워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하 2층이 맞는데. 만식은 천천히 지하 주차장 벽을 따라 걸었다. 왼쪽 기둥 뒤쪽 낯익은 차가 보였다. 저렇게 먼 곳에 세워두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 문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만식의 손을 잡았다. 만식이 고개를 들었다.-자네가 여기 어쩐 일인가?-회장님 혼자 퇴원하신다고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제 차를 타시지요. 바로 옆에 세워두었습니다.만식은 차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내 차는 어쩌지?안전띠를 매며 만식이 물었다.-옮겨다 놓겠습니다.-열쇠는?-저희에게 비상키가 있습니다. 지금 옮기도록 하겠습니다.-저희라니?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제가 오면서 한 명 더 데리고 왔습니다. 회장님을 모시는 것, 회장님 차를 옮겨 놓는 것 두 가지를 혼자 할 수 없어서.만식을 태운 차는 병원을 빠져나갔다. 십 분 정도 지난 뒤 만식의 차도 뒤따랐다. 만식은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등을 기댔다. 걱정을 했단 말이지. 기특했다.-회장님 드실 음료를 챙겨왔습니다. 직접 달인 것이라고, 직접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고, 꼭 다 드시라 하더군요. 콘솔박스에 있습니다. 만식은 콘솔박스에서 텀블러를 꺼내 텀블러의 뚜껑을 열었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약간은 쓴, 하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만식은 차창을 내리고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이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아서 걸러질 것입니다. 만식은 이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잠시 후 만식은 잠이 들었다. 만식을 태운 차는 경부고속도로로 향했고 만식의 차는 서울양양고속도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두 시간쯤 지나 만식이 탄 차가 금강 휴게소에 들어섰다. 푸드 코트 앞쪽에 정차를 하자 푸른색 티셔츠를 입은 사내가 올라탔다. 사내와 만식을 태운 차는 다시 출발했다.푸른색 티셔츠는 운전석에 앉은 사내와 몇 마디 나누고는 만식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만식이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운전을 하던 사내가 앞좌석에 놓여 있던 가방을 건넸고 푸른색 티셔츠는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내 만식의 어깨에 꽂았다.

2022-02-07

RE 100

RE100은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 100%’의 약자로,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량의 100%를 2050년까지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충당하겠다는 목표의 국제 캠페인이다.2014년 영국 런던의 다국적 비영리기구인 ‘더 클라이밋 그룹’이 처음 시작한 것으로, 여기서 재생에너지는 석유화석연료를 대체하는 태양열, 태양광, 바이오, 풍력, 수력, 지열 등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말한다.RE100은 정부가 강제한 것이 아닌 글로벌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되는 일종의 캠페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RE100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크게 태양광 발전 시설 등 설비를 직접 만들거나 재생에너지 발전소에서 전기를 사서 쓰는 방식이 있다. RE100 가입을 위해 신청서를 제출하면 본부인 더 클라이밋 그룹의 검토를 거친 후 가입이 최종 확정되며, 가입 후 1년 안에 이행계획을 제출하고 매년 이행상황을 점검받게 된다.국내 기업 중에서는 SK그룹 계열사 8곳(SK(주), SK텔레콤, SK하이닉스, SKC, SK실트론, SK머티리얼즈, SK브로드밴드, SK아이이테크놀로지)이 2020년 11월 초 한국 RE100위원회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한 바 있다. 국내 제도는 재생에너지 100% 사용 선언 없이도 참여가 가능하나,산업부는 참여자에게 글로벌 RE100 캠페인 기준과 동일한 2050년 100% 재생에너지 사용을 권고한다. 다만, 2050년까지 중간 목표는 참여자의 자율에 맡겨진다.RE100은 에너지 정책분야에서 쓰이는 전문용어인데, 최근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이와 관련한 질문을 던져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2-07

대통령 후보들, 문화전쟁에 응답하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국제여론조사기관 입소스(Ipsos)와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정책연구소가 세계 28개국을 대상으로 한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총 12개 항목 중 빈부·이념·정당·학력·성별·세대·종교 등 7개 영역에서의 갈등이 1위를 기록하여 ‘문화전쟁(culture war)이 가장 심각한 나라’로 분석되었다.문화전쟁의 핵심으로 지적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갈등은 전체 국민의 87%가 인정했고, 빈부갈등(91%), 계층갈등(87%), 성별·세대·종교 갈등(80%)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매우 높게 인식되었다. 이 같은 국제비교는 우리사회가 당면한 ‘갈등의 심각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통합의 시급성’을 일깨워주고 있다.물론 현대사회에서 각 집단의 가치와 이익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다면적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집단갈등이 적정수준에서 조절되지 못하고 폭발할 경우,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연대의식이 사라짐으로써 국가적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 특히 대선과정에서 경쟁후보들이 득표율 제고를 위해 ‘갈라치기’전략을 구사할 경우 문화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따라서 대통령 후보들은 문화전쟁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대선에서 표를 얻기 위해 온갖 포퓰리즘 공약들을 남발하면서도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문화전쟁에 대해서는 표를 잃을까봐 모른 체하는 ‘비겁한 정치인들’이 대통령 되겠다고 난리다.중병에 걸려 있는 나라의 갈등은 외면하고 선거의 이해득실만 계산하는 후보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 국정을 책임지겠다는 대통령 후보는 당면한 문화전쟁에 분명히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대통령은 ‘진영의 보스가 아니라 국가의 원수’이다. 국민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진영논리나 확증편향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윤리’와 ‘국민에 대한 책임윤리’가 충돌할 때 당연히 후자를 우선해야 한다.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대통령’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문화전쟁을 극복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차기 대통령에게 요구되고 있는 시대적 소명이다.이를 위하여 대통령 후보들은 문화전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 각종 불평등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후, 토론을 통하여 국민의 동의를 구하고, 집권하면 정책으로 추진해야 한다. 후보들은 각자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상호 토론함으로써 국민의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특히 이 공론의 장에서는 문화전쟁의 ‘핵심원인이 되고 있는 승자독식(勝者獨食)’으로 인한 이념 및 정당 간의 갈등해소를 위한 정치제도 개혁, 빈부·학력·성별·세대·계층 간의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는 경제·사회정책들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문화전쟁이 극심한 상황에서 선출되는 새 대통령은 집단갈등을 경계하고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후보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진영논리와 편 가르기, 선택적 공정과 내로남불 정치로 우리사회의 문화전쟁을 최악으로 몰고 왔다는 사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기 바란다.

2022-02-07

상식과 진실에 승복하는 후보를 보고 싶다

김진국 고문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나는 문재인 정권 후계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매우 잘못되고 부족한 정책”이라고 혹평했다. 문 대통령이나 ‘문빠’들이야 섭섭하겠지만 그러지 않고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무엇이 그렇게 잘못된 걸까? 지난달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정권교체’ 의견(56.0%)이 ‘정권 유지’ 의견(36.7%)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의 불만이다. 문재인 정부가 잘못한 일을 꼽자면 한도 없다. 그중에서도 사법 신뢰의 붕괴가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법원은 힘없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다. 돈 있고, 권력 가진 사람이 많다. 주먹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지막엔 법이 옳고 그름을 가려주리라 믿는다. 그 믿음마저 없다면 힘없는 사람이 어떻게 살겠나.그런데 그게 무너졌다. 민감한 재판이 있을 때마다 판사 성향부터 따지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비슷한 사건이 판사에 따라 유죄도 되고, 무죄도 되는 일이 벌어진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나 윤미향 의원 사건에서 범죄는 진영 대결의 축이 되어 진실은 사라져버렸다. 대통령까지 ‘마음의 빚’을 얹었다. 서울·부산시장, 충남지사가 줄줄이 성폭행 사건을 일으킨 것도 기이한 일인데, 여성 인권을 외치던 사람들이 ‘피해 호소인’이란 희한한 조어로 감싸는 데는 탄식만 나온다. 치외법권 특권층인 셈이다.조국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씨는 유죄 확정됐지만, 사법 저울을 믿기에는 신뢰가 너무 바닥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줄줄이 사표를 냈다. 법원이 ‘제왕적 대통령’을 받드는 부속기관쯤으로 인식된다. 경찰은 원래 상명하복의 조직이지만, ‘검찰 개혁’은 검찰과 공수처까지 정권의 하청기관으로 몰았다.진실을 가리는 또 하나의 보루는 언론이다. 그런데 지상파 방송, 통신… 정부 힘이 미치는 매체들은 ‘어용’이란 딱지가 낯설지 않다. ‘공정’은 언론계에서 추억이 되어간다. ‘선전 선동’을 언론의 소명처럼 주장한다. 진실은 숨어버렸다.“거짓말도 반복하면 사람들이 믿게 된다”는 요설을 거부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북한은 아직도 ‘북침’이라고 주장한다. 천안함도, 대한항공 858기 공중폭파, 아웅산 폭탄테러, 김정남 살해도 모두 뒤집는다. 그게 북한만의 일이 아니다. 정치권에서 불리한 것은 무조건 뒤집는다. 진실을 뒤집는 기술자들이 방송을 장악하고 있다. 선거는 진실과 거짓을 마구 섞어 야바위판이 됐다. 궤변가들이 전문가 행세다.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것은 ‘도청’보다 ‘거짓말’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는 일이다. 닉슨의 거짓말을 드러낸 것은 언론과 엄정한 사법 체계다.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는 집요한 수사로 닉슨을 궁지에 몰았다. 닉슨이 콕스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임명권자인 법무부 장관과 차관 모두 이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범죄를 감추어주면서까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문재인 정부에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 많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1년이 넘도록 다투고, 지청장이 사건 수사를 방해한다. 주요 사건 증인이 줄줄이 자살하는데, 진실은 정권이 끝나도록 감춰진다. 범죄자가 큰소리치고, 고발한 사람은 두려움에 떤다. 경험은커녕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나라다.이게 차기 대통령 선거에까지 이어진다. 투자금의 1000배가 넘는 이익을 몰아줬지만 “너는 깨끗하냐”라며 덮어버린다. 정부 공금으로 가족 부식을 사고, 공무원이 민간인의 수행비서, 살림 비서 역할을 한 녹음과 사진이 나와도 아랫사람 탓만 한다. 개인 왕국 같다.사실을 시인하지도, 잘못을 사과하지도 않았다. 반성 없이 고쳐지지 않는다. 시의회에서 지적당한 일이 10년간 이어졌다. 수시로 뒤집는 공약이 어떻게 바뀔지 믿을 수 없다. 진심 어린 시인과 사과가 먼저다. 가뜩이나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한계에 이르렀다. 상식이 통하고, 진실에는 승복하는 사회가 정말 그립다./본사고문

2022-02-06

나는 실존주의자다

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나는 종종 주위 사람들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실존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반응은 “어머, 그래요”, 또는 “그런데, 실존주의가 뭐에요”라고 묻는다.지금 이 시대야말로 실존주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양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3인방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궁극적인 질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였다. 이 질문이야말로 철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에 끌리는 사람은 분명 실존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물론 실존주의자는 실존주의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지 않고서는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해서 실존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사르트르는 우리들이 언제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가 최고의 실존주의자로 추앙받는 이유는 진정으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이다.며칠 전 오랜만에 서점에 들렸다가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신나게 사가지고 나왔다. 실존주의는 자유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철학이며, 성실과 용기를 무기로 삼아 현실을 직시하고 사물을 철저하게 통찰하는 법을 이야기 하는 철학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동안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실존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간단하고 단호하게 정의한 책은 없었다. 나는 진정한 실존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먼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철저히 파헤쳐 봐야겠다. 현재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는 어떻게 발생했으며, 코로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으며,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분석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진지하고 치열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우리가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 안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잠재력 발견이야말로 실존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획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항목이다.실존주의자를 정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어떠한 상황이든 변명을 하지 않는 사람, 결코 나약하지 않으며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 인간의 존엄과 자존심과 위엄을 당당히 지키는 사람, 정의롭지 않은 일에 의연히 맞서는 사람,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원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인생의 역경 속에서도 부단한 노력을 통해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실존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우리가 사는 사회는 끔찍하게 불공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자적인 자세로 올바른 삶을 목표로 살고자 한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2022-02-06

토끼가 한숨 잔 이유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토끼는 거북이가 느리다고 자꾸 놀렸어요. 그러자 거북이가 토끼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어요. 토끼는 바로 승낙하고 시합에 나섰지만 한숨 자다가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어요.”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다. 거북이의 꾸준함과 토끼의 어리석음이 한눈에 대비되어 보인다. 실제로 이 우화는 거북이의 우직함을 칭찬하거나 토끼의 자만을 나무라는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간단한 이야기 같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아리송하다. 토끼의 잘못을 나무라는 것은 자기보다 많이 느린 거북이와 달리기 시합을 할 때 기를 쓰고 달렸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정말 토끼에게 거북이를 이기기 위해 열심히 달리라고 해야 하나? 한숨 잔 토끼를 게으르다고, 어리석다고 탓하는 것은 약자와 경쟁하는 기득권자를 채찍질하는 셈이다.그렇다고 거북이의 성실함을 칭찬하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기에도 문제는 있다. 태생적인 약점을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 특이하거나 영웅적인 사례를 일반화하여 약자를 다그치는 것은 가혹하다. 한때는 잠자는 토끼를 깨우지 않고 혼자 갔다고 거북이를 나무라는 논리가 인기 있었다. 그러나 이미 불공정한 게임에서 약자에게 강자를 도우라는 요구는 연대나 배려의 의미를 오남용한 것이다.진호(가명)는 느린 학습자라고 불리우는 소년이다.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해 두려움이 많다. 며칠 전 진호와 ‘토끼와 거북이’를 읽으며 거북이는 왜 토끼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을까, 토끼는 왜 한숨 잤을까 물어보았다. 진호는 먼저 이런 말을 한다. 왜 이기는 것만 말해요? 체력이 좋아진 걸로 말하면 안 돼요? 아하, 정말 그렇구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체력이 늘었을 테니 지더라도 의미가 있네. 그러자 뒤이어 이렇게 말한다. 토끼는 일부러 낮잠을 잤어요. 거북이에게 힘을 주고 싶어서요. 거북이는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어서 시합을 한 거예요.학식 높은 어른들도 생각하지 못한 진호의 해석에 머리가 띵했다. 도대체 왜 우리는 토끼를 교만한 게으름뱅이로만 해석했을까? 왜 토끼가 거북이를 이기기 위해 열심히 달렸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거북이는 잠자는 토끼를 깨워 같이 갔어야 한다는 논리에 왜 동조했을까?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어른들, 공정의 프레임에 갇힌 어른들, ‘함께’를 오용하는 어른들을 진호는 멋지게 한 방 먹였다. 진호가 이런 말을 하기까지 혼자 겪었을 고통의 시간을 조금은 짐작하기에 울림은 더 컸다.그런데 진호 친구들은 진호를 위해서 낮잠을 자줄 수는 없을 텐데, 거북이처럼 달릴 수 있겠어? 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네. 저는 할 거예요. 진호, 참 장하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츤데레 토끼와 우직한 거북이가 많아지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2022-02-06

수(藪)를 듣다

북송리 북천수의 사계절을 들었다. 다들 숲이라 이름 붙일 때 이곳은 수(藪)라 불렀다. 수풀, 덤불이라는 뜻의 수이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느껴져 매일 한 시간 이상 걷자고 마음먹고 찾아간 곳이다.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한 해였다.북송리 북천수, 소나무 숲의 이름이 특별하다. 다른 고장에도 있을 테지만 포항은 동네 숲을 많이 간직한 도시다. 선비가 지와 예를 갖추듯 푸른 동해와 깊은 계곡까지 겸비했다. 해안선이 길어서 바람을 막고자 방풍림으로 해송을 길게 심었고, 동네마다 둘레에 나무를 심어 가꿨다. 내 어릴 적 학교 소풍 장소였던 송도 솔밭과 기계 서숲, 여인의 숲, 청하 관송전, 덕동숲, 언뜻 기억나는 곳만도 이만치이다.두내, 양촌, 천방, 큰동네, 건너각단 등으로 불리던 자연마을들은 1914년에 통합되어 북송리가 되었다. 북송리에 북천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북천수가 있어서 북송리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결국, 솔숲이 행정구역 통합을 이루어낸 셈이다. 정월 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은 이 숲의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 후 마을 앞산에서 산제를 지낸다. 이때 전년도에 묻어둔 간수의 상태를 보고 그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풍습이 있다. 이처럼 북천수는 수해방지림인 동시에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오랜 기간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역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큰 마을 숲으로 인정받아 2006년 3월 28일 천연기념물 제46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흥해현지도’와 1938년 조사된 ‘조선의 임수’에 이 숲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조선 철종 때 흥해 군수 이득강이 북천에 제방을 쌓고 4리에 걸쳐 숲을 조성하였는데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숲의 길이가 2천400m, 너비는 150m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광복 직전에 일본인들이 크게 훼손하여 대부분의 노송이 잘리는 운명에 처한다. 그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무단벌목, 방치에 따른 주민 생활오물 투여, 농경지 개발 등으로 인하여 북천수는 숲으로서의 고유한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에 전통마을 숲 복원사업으로 일대 정비를 거치면서 오늘날의 형태로나마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규모는 길이 1천870m, 너비 70m(천연기념물 지정구역 면적은 21만1천923㎡)로 조성 당시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상당 정도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송림은 4곳으로 하동 송림, 예천 금당실 송림,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 그리고 북천수이다.이 숲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숲 가운데 세 번째로 긴 숲으로 알려져 있다. 수종은 소나무와 곰솔이다. 소나무는 뿌리가 깊게 자라기 때문에 방풍림으로 제격이라고 한다. 소나무의 줄기는 붉은색을 띠고 곰솔은 검은색이다. 검은 솔이라 부르다 곰솔이 되었다 한다. 두 나무를 정확히 구분하는 방법은 새순을 보는 것이다. 소나무의 새순은 줄기와 같이 적갈색이나 곰솔은 회백색을 띤다.숲 가장자리에 서부초등학교가 자리했다. 학교 둘레에 소나무가 가득한 걸 보니, 오래전에는 이곳도 북천수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양덕동에 사는 민영 선생님은 아이들을 숲에서 뛰놀게 하려고 이 학교에 보낸다. 자신의 차가 없어서 아이 둘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포은도서관 앞에서 흥해로 가는 차로 갈아탄다. 서부초는 1, 2교시 합쳐서 수업하고 쉬는 시간이 30분이다. 점심시간에도 얼른 밥을 먹어치우고 밖에 나가려고 한다. 아이들은 숲에서 곤충도 관찰하고 솔방울도 주우며 산책을 즐긴다. 민영 선생님이 매일의 수고로움을 겪으면서도 이 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북천수라고 했다.숲 옆을 흐르는 곡강천을 옛날에는 북천이라 불렀다. 북천변에 심은 나무 북천수는 이제 거대한 마을 숲이 되어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다. 서부초에서 아이들을 키우듯, 숲에는 자연 발아유도지 4곳을 설정하여 유목들이 자랄 수 있도록 하였다. 아름드리 둥치가 숲의 과거라면 솔방울이 뿌리내려 서로 키가 다른 어린 소나무들이 숲의 미래다./김순희(수필가)

2022-02-06

관직은 손님처럼

백선기 칠곡군수 ‘재세여려 재관여빈(在世如旅 在官如賓)’이라는 경구(警句)가 있다. 세상살이는 나그네처럼 하고 관직 생활은 손님처럼 하라는 뜻이다.조선 후기 문인 성대중은 규장각에서 교서관 교리의 벼슬에 있을 때 이 글을 좌우명으로 삼아 벽에 써 붙여놓고 공직에 임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관직을 자신의 특권이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익을 버리고 미래를 내다보며 청렴하게 업무를 처리했다.돌이켜 보면 필자도 모든 혼과 열정을 군정에 쏟아붓고 칠곡군 최초의 3선 군수라는 영광을 얻었지만 결국 손님처럼 왔다가 오는 7월 후임 군수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손님처럼 떠나야 한다.개인 백선기는 자연인으로 돌아가지만, 칠곡군수 자리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리더의 선택은 조직과 지역의 운명을 좌우하기에 후임 군수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고자 한다.첫째, 현재보다 미래를 내다보며 기본과 원칙을 지켜나갔으면 한다.2011년 취임 당시 칠곡군은 전국 82개 군(郡) 단위 자치단체 중 예산 대비 채무 비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한 해 이자로만 30억원 이상을 지출했다.심지어 시중 금리보다 훨씬 높은 6% 이상의 고이율 지방채도 떠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재정 불건전단체’로 낙인이 찍혀 군민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필자는 일부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눈앞의 인기보다 미래를 내다봤다. 2012년부터 ‘재정건전화 로드맵’을 마련해 채무 청산 작업에 본격적인 속도를 냈다. 채무상환을 위한 재원은 고질 체납세 징수, 낭비성 예산 감축, 행사 경비 절감, 선심성 보조금 관리강화 등을 통해 마련했다.또 군수 관사를 매각하고 부채상환을 위해 각종 ‘경상경비 10% 절감’을 실천해 매년 8억원의 비용을 아꼈다.이를 통해 재정 건전성이 향상되자 지역의 명운을 결정할 대형 국·도비 사업을 본격적으로 유치할 수 있었고, 2018년 군비 부담 일반채무를 전액 상환해 국·도비 사업과 코로나19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군의 재정 건전성 확보로 차기 군수의 어깨가 가벼워지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둘째, 포퓰리즘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선거를 앞두고 정부에 이어 지방자치단체장들도 경쟁적으로 선심성 정책을 펼치고 있다. 농민수당, 출산장려금, 육아 수당 등 지자체의 현금복지 경쟁은 우려스러울 정도다. 2017년 지자체 전국 평균 재정자립도는 53.7%를 기록했으나 지자체가 앞 다퉈 무상복지에 뛰어들면서 지난해에는 48.7%로 50%대를 밑돌았다. 포퓰리즘의 망령에 사로잡힌 현금복지로 인해 재정난이 심화되어 정작 필요한 사업에 재정을 투입하기 어렵게 됐다. 차기 군수는 미래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포퓰리즘을 멀리했으면 한다.셋째, 지도자는 청렴해야 한다.다산 정약용 선생은 청렴은 백성을 이끄는 자의 본질적 임무로 모든 덕행의 근본이라며 청렴하지 못하면 관리의 자격이 없다고 했다. 지도자는 본인뿐만 아니라 조직의 청렴도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011년 취임 당시 칠곡군이 국민권익위원회 청렴도 평가에서 최하위인 5등급에 이름이 올라 충격을 받았다. 강력한 자구책을 통해 청렴도가 점진적으로 상승해 현재는 경북도 최상위권인 2등급을 기록하고 있다.넷째,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을 갖추어야 한다.과거에는 절차를 무시하고라도 목적 달성을 위해 밀어붙이는 강한 추진력이 주효했다면, 지금은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와 이해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설득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이 요구된다. 필자는 지역민의 다양성에서 오는 불협화음을 군민 대통합 위원회를 통해 하나의 목소리로 순화 시켜 계층 간 화합을 이끌어냈다.끝으로, 군수는 벼슬이 아닌 공복으로 봉사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군민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군수를 군민들은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도하고 민간부문에 일일이 간섭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은 자율, 경쟁, 책임의 원칙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중시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읽고 군정을 꾸려나가야 한다.손님은 잠시 머물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떠난다. 후임 군수는 다음 손님을 생각하며 행정을 펼치는 아름다운 손님이길 기대해 본다.

2022-02-06

상부상조 정신

좀도리라는 말이 있다. 전라도 지방의 방언으로 절미(節米)란 뜻이다. 경상도에서는 종도리라고도 부른다. 아낙네들이 밥을 준비할 때 쌀이나 보리를 한줌 씩 덜어 항아리에 담아두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부엌의 한쪽에다 좀도리 항아리를 놓아둔다.좀도리 항아리에 어느 정도 곡식이 쌓이면 제사를 지낼 때나 집안에 갑자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이를 꺼내 사용한다.경우에 따라서는 시장에 내다 팔아 딸아이의 꽃신발이나 양말을 사기도 하고 또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썼다. 식량이 넉넉하지 못했던 옛 시절 우리의 주부들은 이런 방법으로 근검절약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또 이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전해져 왔다.십시일반(十匙一飯)의 시(匙)는 숟가락이고 반(飯)은 밥이다. 열 사람이 자기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씩 덜어 다른 사람을 위해 밥 한 그릇을 만든다는 사자성어다.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다수가 힘을 모은다는 뜻으로 쓰인다.과거 조선시대 향약은 마을 단위의 자치규약이다. 이 규약에는 마을주민이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자고 한 약속을 담아 두었다. 나라의 개입 없이 주민들 스스로가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상부상조 정신을 담은 규약인 것이다.지난해 연말에 시작한 이웃돕기 성금이 1월 말로서 초과 달성했다. 법인보다는 개인이 더 많은 이웃돕기 행렬에 동참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대구는 112억원, 경북은 169억원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쓰일 예정이다.특히 이웃돕기 성금 모금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불경기를 뚫고 목표달성을 무난히 했다는 것이 뿌듯하다. 지역민들의 상부상조 정신이 빛나 보이는 결과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2-06

장예모(張藝謀)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1950년에 출생한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장예모의 ‘원 세컨드 (1초)’가 상영되고 있다. 대구에서도 상영관이 희귀하여 한 군데서만 영화를 볼 수 있다. 모택동의 문화혁명 당시 하방을 경험한 반동 집안 출신 지식인 장예모의 아픈 기억을 담은 영화다.3년에 걸친 하방을 마치고 갖은 고생 끝에 그는 모택동이 죽고 난 다음인 1978년에야 북경 영화학원의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영화 인생 밑그림을 그린다.1982년 대학 졸업과 함께 ‘광서영화제작공사’의 촬영기사로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영화와 만난다. 1982년 5세대 감독의 선두주자 진개가(陳凱歌)의 영화 ‘황토지’의 촬영감독이 된다. 1987년에 그는 ‘오래된 우물’의 촬영감독 겸 주연배우로 이름을 알린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장예모는 1988년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을 받아 세계적인 감독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1992년 ‘귀주 이야기’, 1999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로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는다. 1994년에는 ‘인생’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다. 이외에도 그가 받은 국제 영화제의 수상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세계 영화제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것은 현대 중국의 복잡다단한 사회·정치문제의 천착이 바탕이다. 소품을 만들되 소품 이상의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는 역량과 날카로운 시각을 소유했던 덕이다.1999년 ‘집으로 가는 길’로 대약진운동 시기의 사회상을 그려낸 장예모의 영화 세계는 2002년 ‘영웅’을 기점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천하를 통일하다 보면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대(국가)를 위해 소(개인과 가문)는 얼마든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일관되게 관철되기 시작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2008년 북경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을 총괄하는 총감독 자리에 오른다. ‘어용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한다.1990년대 중국 영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장예모의 영화는 서서히 관객들에게 잊히기 시작한다. 여전히 뛰어난 색감과 활달한 무협을 바탕으로 한 ‘연인’이나 ‘천리주단기’ 혹은 ‘황후화’ 같은 영화도 속절없이 망각(忘却)되기에 이른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 ‘원 세컨드’로 귀환했다. 단 1초를 위해 고군분투를 마다하지 않는 어떤 아비의 삶을 그려내는 따사롭고 온정이 넘치는 영화.고희를 넘긴 그에게 문화혁명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는 듯하다. 대수롭지 않은 싸움으로 여덟 살짜리 딸과 생이별하고 오랜 수형생활을 해야 했던 사내의 고통과 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강렬하게 그려져 있는 ‘원 세컨드’. 그와 함께 어린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려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누이의 살가운 혈육사랑도 애틋하게 묘사된다.‘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장예모의 시선과 연출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특히 부드럽게 춤을 추는 사막의 모래가 연출하는 기막힌 능선의 풍경을 잡아내는 렌즈는 아, 하는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영화 인생 후반기가 환하게 열리기를 기원한다.

2022-02-06

‘작심삼일(作心三日)’은 정상적 반응이다

사공정규​​​​​​​동국대 의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 지난 칼럼 ‘새해 결심’에서 비록 코로나19로 우리의 일상이 송두리째 변했지만, 명확한 목표가 있는 사람이 목표가 없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보이기에 ‘새해 결심’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바 있다.갈등이론의 대가로 200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셜링(메릴랜드대) 명예교수도 새해 결심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갈등할 때 “할 것인가”로 결정하라는 것이 갈등 이론의 핵심 이론이다.미국 설문조사 기관 통계뇌조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새해 결심을 연말까지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8%에 불과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새해결심이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다.왜 우리의 새해 결심이 ‘작심삼일’이 될까? ‘작심삼일’은 뇌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로버트 마우어(미국 UCLA 의과대) 교수에 의하면, 뇌의 ‘방어 반응’때문이다. 급격한 행동의 변화는 뇌의 입장에서는 오랜 세월 유지했던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거부감을 보이는 ‘방어 반응’을 불러일으킨다.즉, 안 하던 공부나 운동을 갑자기 하면 뇌는 마치 “호랑이 같은 맹수가 나타났다”고 느끼고 ‘방어 반응’이 작동되는 것이다. 이 때 뇌는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날린과 코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들이 스트레스를 대항할 수 있는 힘은 안타깝게도 3일 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3일이 지나면 더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이다.새로운 변화가 새로운 습관으로 자리 잡기 위해 뇌가 새로운 변화를 기억해야 한다. 뇌가 새로운 변화를 기억하려면 3주간 새로운 일을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단기 기억으로 입력된 정보가 뇌 전체에 정착됨으로써 중기 기억으로 이행 저장돼 새로운 변화가 새로운 습관 회로로 바뀔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다.그런데 이것이 중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이 되어 새로운 습관 회로를 만들어 새로운 습관이 되려면 평균 66일이 필요하다.뇌 과학과 마음의 원리에 따른 ‘작심삼일’을 벗어나 기어코 새해 결심을 이루어 내는 두 가지 제언을 하려한다.첫번째 전략은 전래동화 ‘3년 고개’에서 찾았다. 넘어지면 3년 밖에 못 산다는 어느 산골 마을, 그 고갯길에서 넘어져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깊은 고민을 본 손자가 “계속 넘어져 넘어질 때마다 계속 3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 않느냐”고 알려준 고정관념을 깬 역발상이 있는 반전의 이야기이다.‘작심삼일’이 됐다면, 또 ‘작심삼일’하면 된다. ‘작심삼일’을 7번 반복하라. 3일을 7번 반복하면 21일이 된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 해석을 잘해야 하는데, 시작은 반이지만, 두 번 시작한다고 ‘합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수학적으로 7번 연속해야 확률이 99%가 된다. 21일이 되어야 뇌 변화의 기초가 마련되고 평균 66일이 되어야 비로소 새로운 습관 회로가 만들어지며 정신적 요소까지 감안 한다면 최소 100일은 돼야 새로운 회로가 굳건해진다.두 번째 전략은 “과잉 목표를 세우지 마라”이다. 자넷 폴리비(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실패를 거듭해도 계속해서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 ‘헛된 희망 증후군(false hope syndrome)’이라고 했다.새해 결심이 매번 실패하는 이유는 방법론이나 내·외부 상황 탓보다 가능한 목표가 아닌 과시하기 좋은 과잉목표를 세우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쌓아온 뇌 습관 회로를 단기간에 급속한 변화를 이끌어 내려하기에 뇌의 ‘방어 반응’에 막혀 실패하는 것이다.큰 변화보다는 작지만, 점진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좋다. 로버트 마우어(미국 UCLA 의과대) 교수는 ‘스몰 스텝(small step)’을 제안한다.즉 평소 안 하던 운동을 새해를 맞아 갑자기 하루 1시간 일주일 내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10분, 주 몇 회’처럼 가볍게 시작함으로써 뇌의 ‘방어 반응’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우리의 옛 조상들도 새로운 목표를 한 순간에 모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스몰 스텝(small step)’을 강조했던 것이다.터무니없고 무리한 결심으로 인한 반복된 실패로 마틴 셀리그만이 말한 학습된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자포자기 하지말자. 실패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난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인디언 기우제처럼 성공할 때까지 반복하자.무리하지 않게 포기하지 않고 뇌의 ‘방어 반응’을 잘 달래면서 반복을 통해 습관을 잘 들이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계획대로 목표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임인년(壬寅年) 2022년에는 뇌 과학과 마음의 원리를 알고 새해 결심을 이루기를 응원 드린다.

2022-02-06

광주 아파트 붕괴사고는 총체적 부실 탓

이재혁대구경북녹색연합 대표 최근 국내 대기업이 건설 중이던 광주의 한 아파트가 무너졌다.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처참했다.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한국건설신화와 자존심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거주공간인 아파트의 붕괴사고는 예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린 것과 분명 결이 다른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왜 이런 사고가 반복되는 것일까? 건설현장에서 붕괴사고는 거푸집공정에서 많이 발생한다. 거푸집이란 콘크리트 타설시 유출 방지 및 타설 후 강도를 발현, 경화하기까지 작용하는 내·외부 환경으로부터 콘크리트를 보호해 형상과 치수를 확보하는 가설구조물이다. 거푸집 붕괴사고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발생되고 있고 다수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하는 중대재해로 이어진다.이번 사고를 살펴본 전문가들은 콘크리트의 품질을 우선 지적했다. 최상층까지 콘크리트를 쉽게 올리기 위해 물을 많이 배합해 점성을 낮추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이렇게 되면 거푸집이 받는 압력이 커지고 콘크리트와 철근이 잘 붙지 못한다고 한다. 사고현장에 콘크리트 가루가 많은 점이 의혹의 핵심이다.또 콘크리트에 들어가는 자갈·모래 등 골재를 잘못 관리했거나 배합 비율을 제대로 맞추지 않았을 공산도 크다. 콘크리트 강도를 높이기 위해 넣는 혼화제나 시멘트 관리가 부실한 업체 등 현장에 콘크리트를 납품한 업체 10곳 중 8곳이 품질 관리 미흡으로 부적합 판정을 받은 곳이었다고 한다. 레미콘업체에서 사용하는 골재에 대한 전수조사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골재의 출처와 강도가 적절한지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부실시공도 큰 문제였다. 통상적으로 14일의 굳힘 과정과 28일의 동바리(공사 중의 중량물을 일시 지지하는 가설기둥)의 설치 기간이 필요하지만, 사고당일 작업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37층까지 동바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콘크리트 타설 또한 35층은 7일, 36층은 6일 만에 타설 공정을 마쳤다고 한다. 시공과정의 허술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현실이다.설계는 잘 지켰을까? 광주 화정동 현대아이파크 아파트는 건축물 뼈대를 보 구조물이 없이 기둥과 슬래브로 구성하는 무량판 구조로 설계됐다. 사업 승인시 6개의 기둥을 세우기로 돼 있었는데 시공 도면에는 기둥이 2개에 불과했다고 한다. 건설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감리과정도 문제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6월부터 3개월에 1회씩 총 11권 분량의 감리보고서가 사업승인주체인 구청에 제출되어 자재, 시공 및 구조안전 모두 적합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붕괴사고를 통해 결과적으로 건축 사고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감리 과정 또한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 드러났다.필자는 과거 건축자재중 난연샌드위치패널의 문제점을 알리고 화재에 약한 가짜난연샌드위치패널을 건축현장에서 퇴출시킨 경험이 있다. 공인된 시험기관이 업체에 로열티를 받으며 일반스티로폼과 철판사이를 난연 접착제로 접합한 엉터리 기술을 업체에 넘겨 생산했다. 이를 국토부와 시험기관이 비호하고 현장단속에 제외하는 것도 모자라 불량난연패널 시공 된 곳에 덧대어 시공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을 언론과 경찰의 도움으로 바로 잡을 수 있었다.건설현장과 건설자재, 건설시공의 문제는 일일이 나열하기가 버거울 정도이다. 건축자재의 부실은 시공을 아무리 잘해도 사고와 직결된다. 건축자재의 품질 기준을 엄격히 지키고 시험기관의 비리를 확실히 바로 잡아야 건설현장의 사고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중요한 인부 수급 문제나 전문성 결여도 심각하다. 인력부족으로 현장 기술직에 숙련되지 않는 인력들이 투입되고 이마저도 인부를 구하기 어려워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들로 충당하고 있다. 오죽하면 불법 외국인들이 없으면 현장이 멈춘다고 할까. 이를 빌미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서로 상대의 현장에 확성기를 단 차량으로 연일 집회를 일삼는다. 주변 시민들이 소음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이다.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정부와 국회는 과거 여러 사고와 마찬가지로 땜질 처방만 할 것이 분명하다. 정부 고위 관계자의 현장방문과 국감 등에서 호통치는 모습 외에 구조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까? 국토부는 현재 건설사고조사위원회를 2달간 운영해 사고원인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한다고 한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지만, 이번만은 원인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이 제대로 나오길 희망해본다.광주시는 피해자 긴급지원 대책과 겨울철 사용하는 한중콘크리트의 품질관리 강화를 발표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제도개선과 건설현장에 대한 행정지도, 지도점검을 정확하게 했다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국회도 기업에게만 책임을 돌리지 말고 제도개선을 통해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데 노력해야한다. 누구의 책임을 묻기 전에 각자 위치에서 다시는 붕괴사고가 나지 않게 노력을 이제라도 시작했으면 한다.

2022-02-06

밝은 봄날을 맞고 싶다

윤영대​​​​​​​​​​​​​​수필가 쓸쓸한듯 설 명절을 보내고 나니 바로 입춘(立春), 봄의 문턱에 선다. 그러나 아직 진정한 봄은 아니다. 겨울이 끝난다는 느낌을 가슴에 안을 뿐…. 일일 평균 기온이 5~10℃, 최저 영하로는 내려가지 않아야 초봄이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벌써 새 생명이 태동하는 첫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의 입춘 절입 시간은 2월 4일 오전 5시51분. 입춘방을 붙이려면 동트기 한참 전인 새벽이라 어렵겠지만 그렇게 해야 복이 온다고 하니 어쩌랴. 작년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붙였으나 올해는 대선도 있고 하니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써 볼까? 아니면 코로나 난리에 우울한 마음을 풀고 문 활짝 열어 마당 쓸며 황금 주워 복 받을 욕심에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로 할까? 아니, 올해는 검은 호랑이 해이니 호랑이 호(虎)자를 크게 써 붙여볼까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춘첩 붙이는 것이 굿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있으니 먹 갈아 한 장 멋있게 써 붙여야겠다.중부지방엔 흰 눈이 흠뻑 내려 산과 들을 하얗게 덮어 아름답지만 이곳 동해안에는 건조주의보가 내려져 참한 겨울 풍경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입춘에 맑고 바람불지 않으면 풍년이 든다 했으니 만족하자. 새해 첫날 새벽 마을로 나가 처음 듣는 짐승 소리로 그해의 운수를 점친다는 청참(聽讖)의 풍속에는 까치 소리는 풍년과 행운을, 참새의 재잘거림은 흉년과 불행이라고 한다. 선거 바람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까치인가 참새인가? 빌딩 숲속에서는 새소리도 듣기 힘드니 만나는 이웃과 덕담 인사를 밝게 나누어야겠다. 아침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귀여운 꼬마의 배꼽 인사가 바로 까치 소리다.이제 복조리 풍습도 잊은 지 오래다. 내 서재에는 수년 된 복조리 1쌍이 아직도 걸려있어 또 동전 몇 푼 넣어두어야겠다. 복조리는 쌀을 일어 낱알을 고르듯 그해의 행복을 일상에서 일어 얻어려는 기원이리라. 대나무를 잘게 쪼갠 죽사(竹絲)로 엮어 만들거나 사서 방이나 부엌 귀퉁이, 대청마루 기둥에 달아 돈과 엿 등을 넣어두곤 했지만 지금은 새벽녘에 복조리 사라 외치며 팔러 다니는 장수들도 없다. 올봄에는 밝은 정신으로 복조리 하나 잘 엮어서 나라를 맡길 인재를 잘 골라내자. 봄은 ‘보다’의 어원을 갖는다 말이 있다. 모든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자연과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도 밝은 마음과 올바른 눈,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다봐야 하며, 특히 올해는 잘 살펴보아야 참된 봄을 맞을 것 같다.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라 한다. 봄은 영어로 spring- ‘튀다 솟아오르다’의 뜻처럼 봄기운에 땅이 녹으면 샘물도 힘있게 솟고 식물도 대지의 기운을 끌어올려 새싹을 틔운다. 서설(瑞雪)이 내려 덮인 대지의 껍질을 뚫고 생명의 봄날을 올리는 것이다. 이 계절을 많은 음악가도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하고 시인도 따뜻한 마음으로 얘기해 왔다. 봄은 모든 생명의 교향악이기도 하다.화창한 봄날에 봄바람 살랑 부는 봄동산에 올라 봄나들이 나온 어여쁜 봄처녀가 부르는 봄노래 들으며 봄꽃 한아름 안고 봄맞이를 하고 싶다.

2022-02-03

입춘첩(立春帖)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일 년을 24등분 한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는 중국 주(周)나라 때 만들어 졌다고 한다. 동이족으로 알려진 희화자(羲和子)라는 사람이 주나라 책력을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지구에서 보기에 태양이 하늘을 일 년에 걸쳐 이동하는 경로인 황도(黃道)를 기준으로 해서 달을 기준으로 한 음력(陰曆)과는 맞지 않는다. 태양의 기울기에 따라 변하는 온도의 차가 농경사회에서는 중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에 따로 24절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황도 좌표의 경도(經度)를 황경이라 하는데 춘분을 기점(0°)으로 하지는 90°, 추분은 180°, 동지는 270°, 다음 춘분까지는 360°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충렬왕 때 도입이 되었고, 2016년 12월 1일 중국의 신청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입춘(立春)은 이십사절기의 시작인 첫 번째 절기다. 봄이 들어선다는 의미가 있지만, 중국 화북지방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서 우리나라에서는 한참 이르다. 아직은 겨울이 가시지 않았지만 설명절과 겹치니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도 있고, 봄을 좀 가불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입춘첩을 써 붙이는 등 한 해의 안녕과 행운을 기원하는 풍습은 지금도 남아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대궐에서는 설날에 문신들이 지어 올린 연상시(延祥詩) 중에서 잘된 것을 선정하여 대궐의 기둥과 난간에다 입춘첩을 써 붙이는데, 이것을 ‘춘첩자’라고 한다. 경사대부 및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일반 민가와 상점에서도 모두 입춘첩을 붙이고 새봄을 송축한다. 이것을 ‘춘축’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민간에서는 입춘첩으로 그 해의 행운을 빌고 축원하는 상서로운 글귀를 써서 대문이나 대들보, 부엌문 등에 붙였다. 주로 쓰이는 입춘첩으로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댜경(建陽多慶)’,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거천재(去千災) 래백복(來百福)’,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등이 있고, 사대부들은 좋은 글귀를 새로 지어 쓰거나 혹은 옛사람들의 문장 중에서 좋은 구절을 골라 쓰기도 했다.나라가 하 수상해서 입춘첩이라도 써 붙이고 싶은 심정인데, 이 시국에 어울리는 문구로는 어떤 것이 좋을까. 우선은 ‘괴질극복, 평상회복’이었으면 좋겠다. 2년 동안이나 조금도 누그러질 기미가 없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온 세계를 불안과 우울의 그늘로 뒤덮고 있다. 올해는 부디 그 먹구름이 걷히기를 기원한다. 또 하나는 대선이 임박한 때이니 만큼 제대로 된 인성과 식견을 가진 사람이 선출되어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의미로 ‘양재선출, 정상국가’를 써 붙이고 싶다. 특히나 북한의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급변사태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굳건하고 긴밀한 한미 동조로 일단 유사시에 대한 철저한 플랜을 마련해야 한다. ‘확고한 한미동조’야 말로 ‘확실한 통일한국’의 첩경이다. 위태롭고 불안한 정권은 바꾸어야 한다.

2022-02-03

영부인 검증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영부인(令夫人)’은 원래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에 대한 존칭으로 쓰이다가, 현대에는 대통령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선출직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영부인은 법적 직책이 아니다. 따라서 의전과 예우 규정은 있지만, 법적 책임과 권한은 전혀 없다. 하지만 정치 현실에서 영부인은 대통령에 대한 사적 영향력이 워낙 큰데다 실제로 최고 권력을 구성하는 핵심으로서 관행처럼 정치·사회적 역할을 해온 게 사실이다.우리나라에서 영부인의 지위와 역할을 가장 인상적으로 구현한 인물은 박정희 대통령 부인 고 육영수 여사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초대 영부인이자 유일한 외국인 영부인이었으나 공적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반면에 육 여사는 권위적이고 외골수였던 박 대통령을 목련처럼 온화한 기운으로 감싼 현숙한 부인 이미지에다 어린이와 장애인 등 약자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던 사회운동가로서 활동을 많이 해 생전에 ‘국모(國母)’칭호를 들었다.전·현직 대통령의 영부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선호도 조사 결과, 육영수 여사가 과반수를 넘는 65.4%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민주화 이후 영부인의 역할이나 정체성도 바뀌었다. 김대중 대통령 부인 고 이희호 여사나 노무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는 ‘국모’대신 대통령과 동지적 지위와 역할을 한 사례다.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나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동지적 역할보다는 내조에 더 치중한 영부인으로 평가된다.시대적 흐름에 따라 그 역할과 정체성이 바뀌고 있지만 영부인은 대선 후보의 러닝메이트란 점에서 언제든지 쟁점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영부인 검증이 핫이슈가 되고 있다.지난 연말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가 모 언론사 기자와 7시간 통화한 내역이 방송을 통해 공개돼 국민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이번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부인 김혜경씨가 황제의전 논란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논란은 경기도청 전직 7급 주무관 A씨가 자신의 상관이었던 전직 5급 사무관 배씨와 나눈 문자 등을 언론에 제보하면서 시작됐다. 이 후보의 경기지사 시절 배씨와 A씨는 의전 업무를 위해 각각 비서실과 총무과 소속 별정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A씨는 김씨의 약품 대리 처방, 음식 배달 등의 개인 심부름,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 등을 제기했다.이 후보 측과 민주당은 가족 문제가 불거진 데 대해 사과하면서도 5급 사무관인 배씨가 7급 주무관이었던 A씨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며 김씨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배씨도 김씨와 무관하게 자신이 A씨에게 지시한 것이라고 했지만 궁색한 해명이다. 특히 공무원을 사적으로 유용하거나 경기도 법인카드를 생활비로 쓴 게 사실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행위다.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다. 영부인 검증은 후보검증에 맞닿을 수 있다. 한 점 의혹없이 사실규명이 이뤄지길 바란다.

2022-02-03

중산층의 붕괴

중산층은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에 중간 정도의 부를 가진 집단이다. 먹고사는 걱정은 안 하지만 부자라고 보기에는 어렵게 느껴지는 계층이다.과거 직장인 상대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중산층을 부채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자, 월급여 500만원 이상, 자동차 2천cc급 중형차 소유, 예금 1억원 이상 소유자 등을 기준으로 본다고 대답했다.OECD는 중산층의 기준을 소득 중간값의 75∼150% 소득계층을 말하고 있다. 중위소득의 75% 미만은 빈곤층, 150% 이상을 고소득층으로 본다는 것이다.서구에서는 중산층을 소득보다는 생활방식이나 태도를 판단 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사람은 외국어 하나쯤은 구사할 줄 알아야 하고 영국 사람은 불의와 불법에 대처하는 정의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또 미국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정의감이 중산층 분류 기준에 포함된다.지난해 대선에 출마한 이낙연 민주당 전 대표는 중산층 경제론을 내세운 바 있다. 중산층이 두터워야 국가 경제도 튼튼하다는 뜻이다. 중산층은 나라마다 기준은 다르나 국가 경제의 허리라는 데는 생각이 같다.최근 통계청이 밝힌 2021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월평균 가구소득이 600만원 이상인 사람의 91%가 본인은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중산층 이하라고 생각한다는 응답이 나왔다. 상당한 수준의 소득이 있으면서도 대다수가 상류층은 아니라는 것이다.이는 아파트 가격 폭등으로 근로소득과 지산소득 간 격차가 커진 것에 따른 인식의 변화로 풀이되고 있다. 집이 없는 무주택자는 소득이 많아도 자신을 상류층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파트 가격 폭등이 낳은 또다른 사회적 부작용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2-03

일요일 아침의 페미니즘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나에게는 7살 4살, 두 딸이 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 미투(ME TOO) 운동 등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던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갈 것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낑낑대며 읽고 있던 어느 주말로 기억한다. 소파에 누워 소꿉장난을 하는 두 아이를 보고 있었다. 큰 아이가 엄마, 작은 아이가 아빠 역할이었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언니가 매번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왜 나만 자꾸 아빠 역할을 해야 하는지 따져 물었다. 동생의 투덜거림에 큰 아이는 너무나 당당하게 “너는 머리가 짧고 나는 머리가 길잖아”라고 답했다. 머리카락의 길이와 엄마/아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차분히 설명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감출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 아침.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세탁이 막 끝난 빨래를 건조대에 널기 위해 가져왔다. 별 생각 없이 아내에게 빨래를 받아서 널고 있는데, 큰 아이의 말이 귓가에 내리 꽂혔다. “아빠가 왜 빨래를 널어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큰 딸이 왜 머리카락의 길이와 엄마·아빠를 연결시켰는지 말이다. 부끄러웠다.대선을 앞두고 ‘이대남’의 마음을 얻기 위한 거대 양당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성폭력 무고죄 신설, ‘여성가족부’ 폐지 등과 같은 공약이 들린다. 이 와중에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젊은 여성 정치인은 자기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힘 있는 야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가, 정확히는 ‘힘’있는 ‘정당’이 정말 젠더평등을 만들 수 있을까?제도가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 제도를 만든다. ‘이대남’을 의식한 정치권의 정책도 ‘취업’이란 일상에서 이대남이 느낀 분노로부터 시작된 것 아닌가. 취업을 위한 ‘공정’과 ‘경쟁’이란 원칙은 최소한의 규칙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 그럴까? 정부가 무능력하고 위선적인 사람들로 채워져 있어서? 그럼 정권이 바뀌면 달라질까?지금의 취업 전쟁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정치계와 경제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공정’과 ‘경쟁’이란 원칙은 ‘위계’를 동반한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에서 벌어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 싼 논쟁을 생각해보자. ‘내가 이 스펙을 쌓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데….’로 요약되는 분노는 결과적으로 정규직·비정규직의 위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왜 우리는 정규직·비정규직이란 구도를 벗어나기 어려운가? 젠더평등이란 단순히 남성·여성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 등과 같은 이분법적 사회 체계 전반을 겨냥한 언어이다.이런 일상에서 아이들이 학습하는 젠더 감각은 어떤 것일까? 나의 일상과 무의식을 다시 돌아볼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공범이 될 수 있다.

2022-02-02

③ “해양치유 - 안온함을 얻다”

스위스의 한 고급 호텔, 세계적인 지휘자 ‘프레드 밸린저’는 이곳에서 지인들과 함께 휴가를 보낸다. 가벼운 산책과 마사지, 목욕 등으로 하루를 채우며 과거를 회상한다. 가족과 친구, 직업, 예술혼 등 가벼운 대화가 오간다. 평생을 지휘자로 살아온 예술가답게 곳곳에서 소명의식이 묻어난다. 물론 대화의 진짜 화두는 ‘나이 듦’이다.세계적인 영화 거장 ‘파울로 소렌티노’의 2016년 작품, 영화 ‘YOUTH’(유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젊음과 쇠퇴하는 육체를 주제로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 동시에 대자연의 풍광과 머드 마사지, 물의 이미지로 영상미를 추구한다. 의사와 함께 건강상태를 확인하며 목욕과 산책, 마사지하는 모습이 무한 반복된다. 유영하는 신체는 신비와 노화의 양극단을 오간다. 휴양의학을 풍경 삼아 인생 황혼기를 의미심장하게 그려냈다는 평가가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휴양의학의 관심이 높다. 휴양의학은 산과 바다, 기후에 숨어있는 치유자원을 의학적으로 활용해 질병 예방과 증상완화, 재활을 돕는 의학이다.영화에서처럼 노년층의 항노화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심리·재활치료로 확장될 가능성이 높아 코로나 이후 각광받고 있다. 바닷가 해양치유자원을 활용한 휴양의학의 경우, 현재 시범 사업에 들어가 태동기를 맞는 중이다.실제 완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에서 테레인쿠어(Terrainkur·지형요법)를 진행하는 치료집단을 만난 적이 있다. 해양 테레인쿠어는 백사장이나 해안 산책로를 걷거나 뛰는 운동치료로 해양지형요법이라고 한다. 도심의 평지보다 운동효과가 좋고 지구력 향상에 제격이다. 당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대오를 갖춰 백사장을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참가자 대부분은 해풍을 맞으며 파도소리에 집중했다.해풍 또한 해양치유자원의 하나로, 음이온이 풍부해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해양수산부는 완도와 태안, 울진, 경남 고성에서 해양치유 시범사업을 추진, 해양치유센터를 건립 중에 있다.해양치유, 아직은 생경한 단어다. 해수와 해풍, 머드 등 해양치유자원을 활용한 자연치유법으로, 휴양의학의 한 분야다. 프랑스와 이스라엘,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치료 효과가 입증돼 실제 처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천식이나 폐쇄성 폐질환 환자의 경우, 의사 처방으로 해양치유센터에서 휴양 치료가 권해진다.프랑스에서는 탈라소테라피(thalsso-theraphy)라는 해양치유법이 하나의 의료체계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의 드라보나디르 의학박사에 의해 처음 도입된 치유법으로, 의료인과 해양자원 전문가 등이 참여해 치유 대상과 목적, 치유방법 등을 면밀히 살펴 만성 호흡기 질환과 피부질환, 불면증 등을 치료한다. 이 외에도 해양치유법에는 해양 테레인쿠어(Terrainkur·지형요법-해안가 걷기)와 해풍욕, 솔트테라피(Salt therapy·소금치료요법), 헬리오테라피(Heliotherapy·태양광선요법), 해초요법 등 다양한 치유법이 존재한다.해양수산부는 지난 달 ‘해양치유자원의 관리 및 활용에 관한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2026년을 목표로 세부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형 해양치유 모델(K-Marine Healing)을 창출, 해양치유 자원을 발굴하고 해양치유 서비스 인프라를 조성한다고 한다. 해양치유 전문인력 양성기관을 지정하고 전문자격 이수 과정도 설계한다. 해양치유 전문가와 함께 바다를 벗 삼은 치료를 받는 날도 멀지 않았다.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모래성을 쌓다보면 안온한 몰입을 경험하곤 한다. 칼 구스타프 융의 모래놀이라는 전문적인 심리 치료법을 언급하지 않아도 모래 놀이의 효능은 이미 입증돼 있다. 정현미작가 필자 역시 가끔씩 찾아오는 우울감을 따사로운 햇살 아래 해풍을 맞으며 날려 보내곤 했다. 아이와 함께 모래동굴을 파고, 바닷물을 길어와 채우며 바다를 만끽했다. 의료진과 해양치유자원 전문가가 만든 프로그램이 아니었는데도, 효과와 효능은 그 어떤 항우울제보다 탁월했다.관계는 존재를 선행한다. 오롯이 혼자 존재하는 이는 없다. 코로나19 이후 단절된 관계는 존재를 흔들었고, 사회 곳곳에서 파열음이 났다. 결국 다시 회복이다. 해수부에서 내건 슬로건 역시 ‘코로나로 지친 몸과 마음을 바다에서 치유하라’고 권한다. 물론 코로나 팬데믹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바다는 흐른다.이번 주말, 가족들과 함께 겨울바다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불안은 던져두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래사장을 걸어보자. 눈 시린 겨울바다를 응시하며,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안온함이 느껴질 것이다.

2022-02-02

마음 계산법

양태순수필가 울진 매화리에 갔다. 만화 원작을 그린 벽화가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골목길을 걷다 보니 추억이 돋는 그림이 많다. 만화가 이현세가 직접 그렸다는 벽화 앞에서 천천히 읽으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 만화를 고등학생 때 읽었다. 전체적인 줄거리만 기억날 뿐 세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읽으면서 엄지는 왜 오혜성보다 마동탁을 더 좋아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나를 위해 야구 경기에서 져달라는 엄지의 부탁 앞에서 기가 막혔다. 혜성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짐작되어 가슴이 쩌정 울렸다. 그때도 지금도 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가정은 만약을 포함한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라면, 만약에 그렇다면을 생활에서 사용할 때가 있다. 이런 말은 대개 어떤 대처 방법을 묻는 뒷말이 따라붙는다. 듣는 상대방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게 된다.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가사로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영화가 있었다.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영화 개봉과 동시에 주제가는 온통 거리를 점령했다. 커피숍과 백화점을 비롯하여 젊은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었다. 데이트하는 연인 사이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면, 기뻐하는 일이면 다 해줄 거야? 이런 질문으로 연인을 시험에 들게 하여 답이 마음에 안 들어 다투기도 했다. 친구는 이 노래를 좋아했고 우리는 손잡고 다니며 흥얼거리기도 했다. 내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만화였다.나는 학생 때 만화가게에 자주 갔다. 안타나 홈런처럼 깔끔한 직설화법에 매력을 느꼈다. 시리즈로 빌리면 다섯 권에서 열 권이 넘는 것도 있었다. 용돈 대부분을 거기서 썼다. 밤새 읽느라 눈동자가 뻑뻑했다. 주제는 주로 축구, 야구, 복싱 등 스포츠 경기에서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선수로서 성공하는 스토리였다. 결론은 뻔했지만 만화책을 놓을 수 없었다. 소설처럼 문장이 화려하거나 사건을 베베 꼬지 않는 단순 명쾌함이 좋았다.나는 지금도 해피앤딩을 좋아한다. 드라마에서 고생 끝에 성공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살게 되었다는 결말에 웃음이 난다.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고 시청자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을 만나면 짜증이 난다. 현실이 갑갑한데 드라마라도 행복하면 엔도르핀 충전으로 다운되었던 기분이 업되고 피곤한 뇌도 쉴 수 있으면 일석이조라고 생각한다.매화리에서 나에게 물어본다. 상대방을 위해 뭐든지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외인구단 오혜성은 시합에 져주기 위해 일부러 야구공에 눈을 맞기도 했다. 내 몸을 다치거나 꿈을 버리면서까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내것을 아무것도 잃지 않는 선에서 타협할 확률이 높다. 아마 신체나 정신 둘다를 포기하지 않는 가정하에서 최선이란 이름을 붙일 것이다.나는 아직도 둘을 주고 하나를 얻는데 익숙하지 않다. 반값에 물건 사는 것은 좋아하지만 마음 계산법은 다르다. 목도리를 선물하면 장갑을 받고 싶고 밥을 샀으면 커피는 얻어먹고 싶다. 늘 받기만 하는 것은 미안해서 거리가 멀어지고 늘 주기만 하는 것은 쪼잔해서 불만이 쌓일 것 같다. 서로 간의 마음이 오고가야지 일방통행은 찜찜하고 눈치가 보여서 싫다. 마음을 쌓는데는 똑 부러지는 계산 말고 넉넉한 어림이 좋지 싶다.요즘은 언택트 시대다. 마주 앉아 밥 한번 먹기도 어렵다. 이 시기만 지나면 얼굴 보자는 인사를 한 지 2년이다. 그 사이 연락처에 오른 인물들 대부분과 마음의 거리가 늘어났다. 가족과 친구 몇 명만이 전화와 잠깐의 만남을 이어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주파수 반경을 벗어났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과 나누는 정을 대신하는 것은 없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연결선 선로를 보수해야겠다.곧 봄이 오고 매화가 필 것이다. 찬바람을 맞으며 홀로 고군분투하여 만개한 매화는 늘 반갑고 어여쁘다. 힘들여 꽃을 피워 대가 없이 향기를 멀리까지 나누어 준다. 참 대견하다. 이번 봄에는 마음 계산법을 내려놓고 줘도 줘도 더 주고 싶은 일방통행 사랑법을 실천하리라. 두루 봄소식을 전하는 전화기에서 단내가 나고 웃음이 넘쳤으면 한다. 매화나무가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2022-02-02

새해 아침, 대한민국 정치인들에게

장규열 한동대 교수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다. 코로나와 대선정국은 새해라 하여 긴장과 혼돈을 멈추지 않는다. 새롭게 시작하고자 해도 두 해를 넘게 넘실거리는 코로나의 기운은 감염자 하루 이만명을 넘기며 머물고 있다. 새 대통령을 뽑으면 새로운 나라가 펼쳐질 것인지 의심스럽지 않은가. 밖에서 들어온 코로나와 안에서 자란 대선판은 새해가 되어도 희망과 기대를 불러오기보다 체념과 실망을 안기는 모습이다.새해 덕담은 후보들 험담에 쓸려가고 호랑이해의 기대는 코로나 긴장에 발목이 잡혔다. 어느 해라고 똑같을 수 없겠지만, 올해 설 풍경은 사뭇 서먹하고 서글프다. 그렇다기로 남은 기운마저 꺾을 수 있을까. 새롭게 만날 새날들을 낙담과 실망으로 채울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와 겨레는 용기와 희망을 기대하지 않을까.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코로나로 바뀐 세상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긴 힘들 터이다. 만남과 소통, 문화와 경제, 디지털과 온라인은 예견해 오던 ‘완전히 다른 세상’을 당기고 말았다.학교와 직장은 비대면교육과 원격근무가 기본이 되었고 인간의 일상은 만나지 않고 거의 해결하게 되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낭만과 즐거움은 모니터와 유리벽 너머로 해소해야 한다. 고약한 대선판은 인간존재의 바닥을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는지 처연하고 부끄러운 밑바닥을 흔들며 보여주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된들 바람직한 사회문화적 품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설득하기보다 남의 흠결을 끝없이 들추며 공격과 험담으로 채우는 선거판은 ‘투표의 의미’를 거의 잊게 만드는 게 아닌가.코로나도 선거도 곁으로 밀고서 새해에 보았으면 하는 징조들을 헤아려 보자.새해에는 정치뉴스를 조금 덜 보았으면 한다. 일상이 정치로 오염된 나머지 보통 사람들 속내까지 다툼과 혐오가 물든 세상은 바른 모습일 수가 없다. 정치가 뭐라고 편을 가르고 진영을 나누어 당신은 어느 편인지 굳이 묻게 만드나. 어느 한쪽이 언제나 맞거나 온통 틀렸던 적도 그리 없으니 이제는 그만 좀 하시라고 외치고 싶구만, 대선에 나선 후보들은 쉬지도 못하고 흠결만 나눈다.새해에는 일상에 성실한 나날을 되찾고 싶다. 정치가 일상을 왜곡하게 하기보다 일상이 정치를 흔들어 정신차리게 해야 할 모양이다. 자기네들 싸움판에 국민을 핑계삼는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오로지 국민의 삶이 나아지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정치를 찾아와야 한다.새해에는 더 넓게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배우고 싶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데, 우리는 아직도 좁은 국토에만 갇혀 있을까. 생각의 지평이 길었으면 하고 바라보는 시각이 넓었으면 한다. 특별히 다음 세대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광각의 시야를 심었으면 한다. 우물 안에서만 복닥거리며 다툴 게 아니라 너른 세상으로 눈길을 돌렸으면 한다.‘그래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아직도 많다’는 걸 배웠으면 한다. 코로나도 대선도 지난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 이제부터 헤아리며 기다려야 한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2022-02-02

포모 증후군

포모(FOMO)증후군은 영어로 ‘Fear Of Missing Out’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말로, 자신만 흐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심각한 두려움 또는 세상의 흐름에 자신만 제외되고 있다는 공포를 나타내는 일종의 고립공포감을 뜻한다.예를 들어 비행기나 기차를 놓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나 몇억 원씩 오르는 아파트 가격을 보고 영끌해 집을 매수하는 현상, 주식시장의 무서운 상승세에서 수익을 냈다는 지인들을 보고 빚투나 몰빵을 하는 사례가 포모증후군 때문일 수 있다.원래 포모 현상은 마케팅 분야에서 유래됐다. 1996년 마케팅 전문가 단 허먼이 처음 이런 현상을 확인하고, 논문을 ‘브랜드 관리 저널’에 발표했다. 그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어떤 기회나 기쁨을 놓칠지 모를 가능성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소비자 심리학의 새로운 발견이라고 했다.그 이후 벤처투자가 패트릭 J. 맥기니스가 2004년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의 매거진 ‘하버스’에 기고한 글에서 ‘포모’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홈쇼핑 방송에서 ‘매진 임박’, ‘한정 수량’ 등을 강조하는 것 역시 포모 마케팅의 사례다. 일종의 사회적 불안인 포모증후군은 소셜미디어의 부상과 함께 널리 알려졌다. 이 증후군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계속 알고 싶어 하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소셜미디어에 빠져들게 하는 특징을 갖는다.포모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비행기나 기차를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출발 1~2시간 전 공항이나 기차역에 도착하게 한다. 다만 주식 투자자들은 이 증후군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대다수의 개인투자자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준비 없이 투자를 시작하게 하고, 투기적 자산에 거액을 베팅하게 하기 때문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2-02

설 명절 연휴는 어떻게…

윤영대수필가 이번 설 연휴는 5일이다. 국민의 일상생활과 각종 여가활동을 계획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발표하는 달력 제작 기준인 ‘월력요항’을 보면 일요일 52일에 국경일, 설날 등 공휴일 19일을 합하여 71일이 휴일인데, 올해는 석가탄신일, 추석, 한글날, 성탄절 등이 일요일과 겹쳐져 그 4일을 빼면 67일이나 된다. 여기에 토요일까지 포함하면 전체 휴일 118일 중에서 가장 긴 연휴이고 여기에다 유급 휴가를 잘 쓰면 최장 9일간을 쉴 수가 있다고 한다. 대체공휴일 때문이다. 공휴일이 토·일요일이나 다른 공휴일과 겹치는 경우 대체공휴일을 지정할 수 있는 제도이며 설·추석날 전·후와 어린이날 등 7일만 적용되었으나 2021년 8월15일부터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등 국경일 4일이 추가되어 11일로 늘어났다. 그래서 일 년 중 1/3쯤 쉬게 되는데 올해는 3일 이상 연이어 쉬는 날들이 6번이나 있다. 우리에게 휴일의 의미는 바쁜 직무와 일상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쉬는 날이었고, 토요일도 조기 퇴근도 없이 살아온 지난날에 비하면 토요일 휴무제가 있고 최저임금 탓인지 퇴근 시간이면 칼같이 직장을 빠져나오고 야간근무도 거의 없어진 듯한 지금, 쉬는 것은 그냥 일상이 된 듯하다. 우리의 전통명절에는 설날, 정월 대보름, 단오, 칠석, 추석이 있어 피곤한 삶의 중간중간에 가족과 이웃, 지인들과 따뜻한 정을 느끼고 민족의 하나 됨을 느끼기도 하지만 점점 희미해져 가는 현실에서 고유한 풍속들의 가치를 잊고 명절 휴일의 의미는 그냥 ‘논다’는 것이 아닐까?올해 가장 길다는 이번 설 연휴도 마음 느긋이 가족들과 어울려 행복을 느껴보는 것이 좋겠지만 벌써 2년째 법석을 떨고 있는 코로나19의 오미크론 변이 사태로 불안한 마음에 진정한 명절 휴일을 느껴보기 힘들 것 같다. 갑자기 8천 명대를 넘어 여태껏 기록을 경신하더니 이제 1만 명 선을 넘었다. 설 연휴 비상사태를 염려한 각 지방자치단체도 특별방역대책을 세우고 선별진료소를 증설하고 강화된 시민 행동수칙을 알리고 있다. 귀향하기 전 예방접종을 완료하고 가능한 방문을 자제하며 거리 두기 등으로 모임 자체를 줄이라고 한다. 차례도 소규모 가족으로 지내고 온라인 성묘를 권하며 어른들에게는 비대면 세배를 드리란다. 귀향 때 개인차량 운행 시 고속도로휴게소도 가능한 패스하라고 한다.이러한 연휴에 택배노조의 투쟁으로 배송 대란이 우려되고 그에 따른 배송지연과 파손, 훼손, 분실 등의 피해도 염려된다. 물류뿐만 아니라 통신 서비스 문제를 걱정한 통신3사는 안정적 서비스 제공을 위해 시설의 집중관리 체제를 점검 보완하여 통신 인프라의 품질향상에 힘을 쏟고, 자가용 운행 증가에 따른 고속도로 정체 구간의 트래픽에 대한 대책도 강구하며 비대면 가족 모임을 돕기 위해 무료 영상통화를 제안했다니 고맙다. 또 설 연휴 기간 중 택배 선물과 안부 인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위험도 우려된다고 한다.명절을 명절 같이 보내지 못하는 요즈음의 세상, 참된 시민질서의식을 발휘하여 질병의 큰 파도를 넘어 밝은 우리의 명절을 즐기도록 하자.

2022-01-27

선거판 막장드라마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광산 갱도의 가장 안쪽 막다른 곳을 막장이라고 한다. 광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땀 흘려 일하는 절실한 삶의 현장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대한민국 산업을 일으킨 동력을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막장이란 말이 ‘막장드라마’나 ‘막장국회’처럼 좋지 않은 쪽으로 쓰여 광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다. 이 때의 막장이란 ‘갈 데까지 간, 가장 나쁜 상태’란 의미가 된다. 막장드라마란 조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보통은 불륜, 패륜, 선정, 폭력 등 불건전하고 비상식적이거나 자극적인 요소들을 남발하여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저질 드라마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대선정국이 가열되자 여기저기서 막장드라마를 뺨치는 사건들이 불거지고 있다. 공영방송이 야권 대선후보 배우자의 사적인 전화통화 녹취록을 공개한 사건이 그 한 가지다. 유튜브방송 기자를 자칭하는 인물이 비열하고 간교한 속임수로 접근해서 수십 차례 통화한 것을 몰래 녹음하여 퍼뜨리고 공영방송에까지 넘겨준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조차 짓밟은, 인간성의 막장을 보여주는 추악한 짓이다. 그것을 받아 방송한 MBC나 한 건을 잡았다고 쾌재를 부르며 본방사수니 뭐니 호들갑을 떤 여권 인사들이나 상식적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은 마찬가지로 보인다.여권 대선후보를 둘러싼 추문과 의혹들은 어떤 막장드라마도 따라가지 못할 막장의 극치를 보여준다. 먼저 후보자가 친형과 형수에게 내뱉은 악담과 욕설은 보통의 비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끝까지 들을 수 없을 정도다. 인성의 밑바닥까지 더럽혀진 사람이 아니고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들이다. 자신을 닦고 집안을 바로 꾸린 후에야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진대, 피를 나눈 형제에게도 그런 패악질을 해대는 사람이 생판 남인 국민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하겠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그야말로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할 일이다. 국민은커녕 형제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자신의 야욕과 영달을 위해서만 못할 짓이 없는 사람에게 어찌 나라를 맡기겠는가.관련자들이 몇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 ‘대장동사건’도 또 다른 막장드라마다. 월세도 못 내서 폐업하는 소상공인들이 부지기수인데, 불과 몇 억의 자본금으로 수천억을 벌었다는 것은 막장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이 아닌가. 당시의 시장이었던 사람은 본인이 설계하고 결제한 일인데도 비리와 부정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열흘이나 함께 여행을 한 부하직원도 모른다는 사람의 말을 누가 믿는가. 그런 인물을 대선후보로 지지하는 국민들이 무려 40% 가까이 되어서 지지율 1위인 여론조사도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다.대통령직은 국운을 좌우하는 자리다. 악화일로의 미·중관계나 연이은 북한의 도발로 위험이 고조되는 시국에 사리사욕이나 진영논리로 대선에 임하는 것은 천추의 한을 남기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되든 내 알 바 아니라는 방관이나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냉소적인 양비론도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방기한 무책임한 태도다.

2022-01-27

달성군의 송해 선생님

송해 선생님(95)은 현역 최고령 연예인이자 방송 진행자로 모르는 이가 없다.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월남하였다.군 생활을 대구에서 했고 이곳에서 달성군 기세리가 고향인 부인 석옥이 여사를 만났다. 처가가 대구였으니 대구와의 인연이 적지 않다. 지금도 그는 대구가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한다.그가 특별히 달성군과 인연이 더 깊어진 배경에는 김문오 달성군수와 오랜 교분 덕분이다. 부인의 고향이 달성군이라는 사실을 계기로 2011년에 달성군은 그를 명예 군민으로 위촉했다. 다음해는 달성군 홍보대사로 모셨고 해마다 열리는 비슬산 참꽃축제의 사회자도 맡겼다.그는 달성군내 주요 행사 때마다 자주 방문하면서 달성군과의 인연을 쌓아갔는데 김 군수의 공로가 컸다는 것이다.달성군 옥포면 기세리에는 옥연지를 배경으로 송해 공원과 그 옆자리에 송해기념관이 있다. 2016년 조성된 송해공원은 송해 선생을 모티브로 해 꾸며져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전국적으로도 잘 알려져 한해 70만∼8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지난해 12월 개장한 송해기념관에는 선생이 기증한 물품 432점과 송해 선생의 발자취, 전국 노래자랑 공간 등이 마련돼 송해 공원과 잘 조화돼 가볼 만하다.KBS가 최장수 TV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 MC 송해의 기네스 세계기록 도전에 나섰다고 한다. 도전부문은 ‘최고령 TV음악 탤런트 쇼진행자’다. 현재 심사가 진행 중이라 한다.그의 기네스 도전이 성공되길 기원한다. 그의 도전이 성공하면 대구 달성군에는 ‘세계 최고령 MC’ 보유 기념관이 있는 새기록을 가지게 된다. 그 또한 좋은 일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1-27

거짓과 진실의 경계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대선후보들의 TV토론에서 어느 후보가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을까. 대선 후보들의 TV토론에 국민들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여야 후보간 박빙승부가 예상됨에 따라 대선후보에 대한 최종 판단이 TV토론에서 갈릴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당초 31일 예정됐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양자 TV토론은 법원이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무산됐고, 같은 날 TV방송 없이 양자토론이 벌어지게 됐다.민주주의 직접선거 역사상 최초의 TV토론은 1960년 미국의 케네디(민주)와 닉슨(공화당)간에 벌어졌다. 당시 선거 분위기로는 유명세나 실력면에서 차기대통령은 닉슨이 따논 당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TV토론 한판으로 승부가 뒤집혔다. 케네디의 상쾌한 말투, 쾌활한 미소와 표정에 여성 표심이 확 쏠렸고, 닉슨은 침울하고 창백하고 딱딱해보였다.그러나 요즘 선거에서 이처럼 일방적으로 당할 후보는 없다. 유권자들도 TV토론 내용만 보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의 경우에는 보수와 진보 진영간 다툼으로 규정되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더 잘했다는 진영논리가 작용한다. 그래서 토론을 누가 더 잘했다는 여론조사 결과와 상관없이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다.지난 2012년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간 TV토론이 대표적인 사례다. 박근혜 후보가 터무니없는 동문서답의 답변을 했는데도 선거에서 이겼기 때문이다.토론기술이나 능력측면에서 보면 이재명 후보가 앞설 것이 분명하다. 이 후보는 TV토론을 위해 수많은 스파링을 소화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였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를 줌으로 연결해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해 논쟁했고, 삼성경제연구소를 방문해 학자들과 토론을 주도했으며, 경총을 방문해 10대그룹 CEO들과 경제현안에 대해 토론했다. 관훈클럽, 한국지역언론인클럽, 신문방송편집인협회, 방송기자토론, 삼프로TV 등에 나와 막힘없는 토론실력을 보여줬다.이에 비해 윤석열 후보는 삼프로TV에 나와 몇몇 경제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그래선지 윤 후보는 TV토론을 피했다. 그랬던 윤 후보가 올들어 TV토론에 대해 적극 임하겠다는 태세다. 어차피 이재명 후보와는 대통령 자리를 건 한판승부를 피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으리라.사실 TV토론에서 누가 더 잘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논리에는 이겼지만 태도가 나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풍부한 지식보다 신사적으로 발언하고, 상식에 부합하는 발언이 중요하다. 특히 이번 비호감대선에서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평가에 유의해야 한다.즉, 누가 더 진실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포인트다. 따라서 임기응변으로 진실성이 떨어지거나, 논리의 변경, 과거 발언과의 일치성 여부가 작용하는 도덕성 같은 것들이 함께 작용하는 TV토론은 윤 후보에게 더 유리할 수 있다. 다가오는 대선후보 TV토론에서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어디쯤일지 다같이 지켜보자.

2022-01-27

정부주도 공정한 산업정책 전환해야

서정헌 스틸앤스틸 대표 지금까지 우리 정부의 철강관련 산업정책은 선도기업을 우선적으로 키우고 선도기업으로부터 낙수효과로 여타 철강사를 동반성장시키는 선도기업 주도의 양적성장이었다. 철강은 기초소재 산업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상공정을 장악하고 있는 선도기업이 잘 돼야 하공정도 잘 될 수 있다는 선도기업 중심의 성장전략이 유효하다.우리 경제가 탈제조업화 되고 한중간 국제분업구조에서 한국 철강산업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우리나라 철강산업이 성숙기를 지나고 있다.더 이상 신규투자를 통해 선도기업이 시장지배력을 강화하기 어렵게 되면서 선도기업 중심 양적성장이 부담스럽게 되는 것이다. 선도기업 주도의 산업정책은 고도성장기 양적성장에는 유효할지 몰라도 성숙기를 지나면서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이제 선도기업이 잘 되는 것이 한국 철강산업이 잘 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선도기업 입장에서도 다른 철강사에 대한 배려와 동반성장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든다. 선도기업으로부터 낙수효과가 줄어들면서 선도기업과 여타 철강사 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철강산업에서 선도기업의 입지와 역할이 그만큼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선도기업 주도의 성장전략은 진정한 산업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진정한 철강산업 경쟁력은 상공정을 장악하고 있는 선도기업의 시장지배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철강 하공정의 경쟁력과 철강과 철강수요산업의 산업간 관계에서 나온다. 철강과 수요산업이 효율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야 철강산업 경쟁력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철강산업 경쟁력은 철강 선도기업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강 하공정과 수요산업의 경쟁력을 기반으로 마치 벽돌을 쌓아 올리듯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때로는 경쟁력 있는 상공정 제품을 수입하더라도 하공정 경쟁력을 먼저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철강 하공정과 수요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철강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는 수요중심의 성장전략이 바람직할 것이다.철강 하공정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선도기업의 힘이 지나치게 남용되지 않도록 정부가 선도기업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 만약 공정경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구조조정도 선도기업의 시장지배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 하도급 불공정거래에 대한 규제를 통해 철강 하공정과 유통이 경쟁력을 회복할 때 진정한 철강산업 경쟁력도 가능해진다.우리나라 철강산업의 국제경쟁력을 생각하면 공정한 철강사 간 경쟁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정부 주도의 공정경쟁을 위한 노력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공정경쟁을 이유로 철강 선도기업을 지나치게 견제할 경우 선도기업과 철강산업의 경쟁력이 빠르게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철강사 경쟁력을 위해서는 공정경쟁이 중요하지만 철강산업에서 경쟁이 지나치면 신규투자를 유발하고 과잉으로 초래할 수 있다.그래서 철강시장에서는 적정 경쟁의 강도가 중요시된다. 철강은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소규모 경제에서는 독과점적 시장구조가 불가피하다. 과점적 시장구조에서 적정경쟁을 위해서는 선도기업 간 경쟁구도가 중요하다. 우리나라 철강시장에서는 현실적으로 두 선도기업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경쟁과 공조가 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경쟁과 공조를 통해 분업화와 특화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국민경제를 생각하면 철강산업은 자신보다 수요산업 성장에 기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역할일 수 있다.따라서 철강관련 산업정책을 추진할 때 철강뿐만 아니라 철강 하공정과 전후방산업 그리고 국민경제를 함께 고려하는 더 넓은 시각의 접근이 필요하다.수입규제와 같은 대외 이슈를 다룰 때도 철강사간 경쟁구도와 같은 국내 이슈를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철강산업이 직면하고 있는 사양화와 수입규제, 구조조정, 탄소중립 이슈도 마찬가지다.2022년에는 한국 철강산업은 선도기업과 상공정 중심이 아니라, 하공정과 수요산업 경쟁력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철강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공정한 산업정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2022-01-26

인류의 또 다른 동반자

오낙률시인·국악인 겨울이면 땔감과 먹거리가 곤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음식물을 버리는 행위가 사회적 차원에서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사람들은 음식물에 조금만 이상이 있거나 과식의 위험이 있다 싶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음식물을 내다 버린다. 과거, 음식물을 버리는 행위가 크게 죄악시되던 시절과는 크게 비교가 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음식물을 버리는 방법에서도 과거와 현재는 많이 비교된다.필자의 어릴 적 기억에 의하면, 커다란 물통을 부엌 가까운 곳에 두고 버려진 음식물 하며 심지어는 설거지 한 물마저도 한데 모아 쇠죽 끓이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부엌과 연결된 하수구에는 지렁이 같은 미물들이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극소량의 음식물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공생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가축이 없는 집에서는 버려야 할 음식물이 생기면 가축을 기르는 이웃집까지 가져가서 가축에게 먹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과거에는 음식을 버려도 버리는 게 아니라, 심지어 지렁이나 박테리아 같은 미물들의 먹이로 이용된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도시에서 엄청난 양으로 버려지는 음식물들을 생각하면 그 버려지는 방법에 있어서 의심의 눈길을 멈추기 어려운 형편이다.실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생명이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모를 것이다.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음을 통해서 시야에서 멀어져 갔는지를, 만약에 그들의 죽음이 모두 분해되지 않고 쌓여 있거나 땅속에 묻혀 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땅의 여기를 파도 저기를 파도 그들의 주검이 나온다면 인간의 삶은 어떠했을까.인간에게 그런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파리이거나 구더기이거나 그보다도 더 작은 하등의 생물들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삶의 동반자에게도 눈길을 돌려 보은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렇다고 파리나 구더기가 득실대는 환경에서 살아도 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나 작은 생명에게까지 감사한 마을을 가지고 그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자연을 마주하고 사는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오늘날 지상에 사는 생명체가 어디 인류뿐일까. 어차피 자연과 공존하고 상생하는 것이 인류의 삶이라면, 인간에게 별로 유익하지 않다고 느껴지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하등의 생명에게까지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함이 마땅하다.아마, 인간부터 먼저 살고 봐야 하던 시절엔 주위의 다른 생명들에게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제 물의 순환이라는 커다란 명제 앞에서 어느 정도 풍요를 누리고 사는 인간은,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저 인류의 또 다른 동반자들에게 배려와 사랑의 눈을 돌려 세심하게 그들의 삶도 응원해야 함이 마땅하다. 물론 필자가 말하는 하등의 생명이란, 요즘 인간 사회활동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바이러스류는 포함하지 않는다. 적어도 생명이라 말함은 햇볕과 물과 흙을 근간으로 하는 생명을 말함이다.

2022-01-26

회색 코뿔소와 저승사자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코스피가 이번 주 들어서 블랙 먼데이를 기록했다. 13개월 만에 2천800선 아래로 하락한 것이다. 미국발 긴축 한파가 우리나라 자산 시장을 덮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골드만삭스는 올해 미국 연준의 금리 인상이 4회 이상을 초과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그렇지만 우리 경제는 작년까지도 유동성 파티를 즐겼다. 부동산은 폭등세를 멈추지 않았고, 동학개미와 서학개미로 양분된 개인 투자자들은 국내외 주식 시장에 올인했다. 대출이 증가하면서 국내 은행이 작년에 벌어들인 이자 수익만 30조 원을 넘었다.미국의 정책분석가인 미셸 부커 전 세계정책연구소장은 ‘회색 코뿔소가 온다’라는 책에서 분명히 눈에 보이는 위험 징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회색 코뿔소 현상’이라고 지칭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나라의 가계 부채를 회색 코뿔소에 비유하며 경고했지만, 국내 가계 대출은 이미 1천800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자고 나면 자산 가격이 오르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불안감도 극도로 커졌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눈앞의 공포보다, 벼락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영끌족과 빚투족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조지프 르두가 말했던 것처럼 불안은 본질적으로 온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속성이 있다.회색 코뿔소가 목전에 다다르자 금융당국의 수장들이 잇따라 경고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가계 부채 저승사자를 자처하는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회색 코뿔소로 비유되던 잠재 위험들이 하나둘씩 현실화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다양한 리스크가 일시에 몰려오는 퍼펙트 스톰을 경고했던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금융회사들은 부동산 관련 자산에 대해 충당금을 충분히 적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저승사자의 대출 규제 처방으로 가계 부채 증가세는 잠시 주춤한 상태이다. 하지만 대선 정국에 돌입한 정치권에서는 저승사자가 잠가놓은 빗장을 다시 풀고자 할 수 있다. 전방위적 대출 규제에 대해 실수요자 프레임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올해 1분기에는 은행의 대출 규제가 완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최근에 정부는 14조 원 규모의 추경안을 의결해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가 1월에 추경을 편성한 것은 1951년 이후 71년 만에 처음이다. 대선 직전의 추경은 1997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이다. 2022년판 고무신·막걸리 선거라는 비난도 일고 있다. 회색 코뿔소가 코앞에 와있다지만,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에서는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가 앞서고 있다.경제 상황에 대해 정치권과 금융당국의 인식이 엇박자가 날 때마다 회색 코뿔소가 다가오는 진동음도 커진다. 일각에서는 회색 코뿔소가 블랙 스완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점도 경고하고 있다. 그만큼 모든 자산에 심각한 거품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예견되는 경제 위기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는 회색 코뿔소를 막아낼 저승사자의 존재가 절실하다. 대권을 잡겠다고 나선 후보들도 회색 코뿔소에 대응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무섭게 느껴지는 저승사자를 이번에는 국민들이 반길지도 모를 일이다.

2022-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