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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R&D 예산 삭감 유감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2024년도 RD(연구개발) 예산이 전년도 대비 약 16.6%(5조2천억원) 감액된 것에 과학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공계 연구자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삭감된 연구비 때문에 연구과제 수행이 어렵게 되었다거나, 고용 중인 연구원을 해고하게 되었다는 고충 토로와 성토가 이어진다.정부출연연구소들은 예산 부족으로 연구원 채용계획을 줄이거나 없애고, 이는 이공계 석·박사들의 고용 불안을 심화시킨다. 대학에서는 원래도 넉넉하지 않았던 대학원생 인건비를 더욱 줄이는 연구실이 많다. 인건비가 줄어들자 생활비를 벌충하기 위해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그만큼 연구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질 것은 당연하다.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일 과학기술인 간담회에 참석해 RD 예산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겠다고 밝혔다. 5조가 넘는 예산을 일방적으로 줄여 놓고, 반발에 못 이겨 고작 6천억 원을 증액한 뒤에 나온 말이라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인들을 대하는 현 정부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하며 내놓은 핑계는 이른바 ‘이권 카르텔’의 존재다. 이것이 정권의 기조인 ‘노동조합 때리기’, ‘시민단체 때리기’에서 이어진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문제는 정부가 그 이권 카르텔의 정체를 명확하게 짚어내지도 못하면서, 과학기술인들을 ‘예산을 낭비하고 사적으로 전용하는 부패한 집단’으로 치부해 버렸다는 점이다.어떤 집단이든 규범을 어기고 일탈을 저지르는 사례는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례들이 집단 전체의 도덕적 해이로 발전한 상태인지, 아니면 개별적 처벌로 충분히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후자의 경우를 전자의 경우로 섣불리 규정해 버리면, 정상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대다수 구성원들의 모티베이션을 심각하게 저해하게 된다.그렇지 않아도 우수한 이공계 인재들이 의대로, 또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과학에 대한 열정과 소명 의식을 갖고 연구자의 길을 선택한 이들을 이렇게 모욕해 놓고 미래 먹거리나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은 에너지와 명령만 주어지면 작동하는 로봇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지만, 예산을 결정하는 높은 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설령 RD 예산을 삭감 이전 수준으로 돌려놓는다 해도, 가장 든든한 ‘파트롱(후원자)’이어야만 하는 국가와 정부에게 배신당한 과학기술인들의 트라우마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인공지능·첨단 바이오·퀀텀(양자) 등 특정 분야를 ‘3대 미래기술’이라 호명하고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계획 또한 우려스럽다. 해당 분야에만 예산과 지원이 몰리고 다른 분야들은 고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건강한 학술 생태계를 위해서는 학문의 다양성이 필수적이다.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예산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싶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2024-01-23

슬픈 크리스마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탄생일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적, 종교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크리스마스를 매우 중요한 축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도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단지 ‘빨간 날’ 중 하나로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날이다.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와 즐겁게 보내는 것은 물론이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인 만큼 평소 바쁘게 지내느라 잊고 살았던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크리스마스 정신’이라는 표현이 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아기 예수의 뜻을 기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환대하는 인류애를 되새기자는 것이다. 종교와 신앙의 차원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운 사람들과 선물을 교환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 주위에 소외된 이웃은 없는지 살피는 마음이 필요하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누군가가 취약계층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이나 물품을 기부했다는 훈훈한 소식을 접하곤 한다. 이들이야말로 크리스마스 정신을 실천하는 이름 없는 천사들이다.그런데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도 크리스마스 정신을 논하기 어려운 듯하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멀지 않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굶주림과 질병과 죽음의 공포로 신음하고 있다. 이 전쟁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를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전쟁을 멈추고 삶을 이야기하는 일이다. 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 크리스마스 정신은 무력하기만 하다.한국 사회의 상황도 그리 만만치는 않다. 장기화된 경제불황과 산업구조의 변화, 소비심리의 위축으로 인해 대다수 국민의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이 팍팍하니 이웃을 향하는 마음도 인색해지기 쉽다. 보도에 따르면 올해 연탄 기부량이 목표치인 삼백만 장에 백만 장 가까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더구나 기상이변으로 인한 한파의 습격까지 더해진 상황이다. 취약계층의 열악한 주거 형태와 난방비 부담을 생각하면, 이들에게 올겨울이 얼마나 힘겨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화의 결실은 소수가 누리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라는 피해는 특정 계층에게 더 가혹하게 돌아온다. 슬픈 겨울이고 슬픈 크리스마스다.이 칼럼이 나갈 시점이면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웃을 돌보는 마음이 크리스마스에만 발휘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겨울은 길고 봄이 찾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경제를 살리는 일은 책임 있는 분들의 몫이겠지만, 경제가 살아날 때까지 버티게 하는 힘은 서로에 대한 환대와 호혜의 정신에서 나온다. '라면의 상식화'가 아닌, 크리스마스 정신이 상식화된 새해를 기대해 본다.

2023-12-25

세상에 나쁜 옷은 없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경제가 어렵지 않은 시대를 찾기가 더 어렵겠지만 요즘 한국 경제는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경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수입이 줄어든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고 이에 따라 돈이 돌지 않는 악순환이 피부로 체감된다. 상업지구에는 공실이 넘쳐난다. 취업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노동 가치가 하락하다 보니,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기보단 부동산 ‘영끌’과 가상화폐 ‘존버’로 인생역전을 노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경제가 어려울수록 더 잘 팔리는 상품도 있다. 이른바 ‘가성비’ 상품들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론 사태로 촉발된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던 지난 2010년, 롯데마트가 오천 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출시했던 ‘통큰치킨’이 대표적이다. ‘통큰치킨’은 시중 치킨 프랜차이즈 치킨 대비 절반 이상 저렴한 가격으로 출시 전부터 큰 관심을 받았지만, 시장 질서를 교란한다는 항의 또한 만만하지 않았고 결국 출시 일 주일 만에 사라지고 만다.‘통큰치킨’이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한국 경제가 휘청이던 2010년의 풍경을 대표한다면, 2023년의 경제위기를 상징하는 상품은 ‘오천 원 후리스’일 것이다. ‘후리스’란 양털처럼 보송보송하게 처리한 합성섬유와 그것으로 만든 의류를 가리키는 ‘플리스(fleece)’의 일본식 발음이다. 촉감이 부드럽고 보온성이 뛰어나 수 년 전부터 겨울 의류로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오천 원 후리스’는 기성 의류 브랜드가 아닌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제품이다.필자도 두 벌의 플리스 재킷을 가지고 있는데, 둘 중 최근에 산 것은 한 스파(SPA) 브랜드에서 2만 원에 구입했다. 2만 원짜리라고 해서 결코 품질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보다 네 배 더 저렴한 다이소의 ‘오천 원 후리스’ 또한 원단은 조금 얇을지언정 일상복으로 입기에 충분해 보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다이소에서 옷을 사 입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오천 원 후리스’를 필두로 ‘가성비’ 의류가 새로운 트렌드가 되어 가는 모양새다.‘통큰치킨’ 때와는 달리 ‘오천 원 후리스’가 패션산업의 시장 질서를 교란한다는 비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가성비’라는 절대적 가치 앞에서 다른 논리들이 힘을 쓰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람들이 체감하기에 2010년보다도 2023년의 경제 상황이 더더욱 어려운 것일까? 걱정이 크다.‘오천 원 후리스’의 품질이나 ‘가성비’도 중요하지만, 함께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너무 짧아진 옷의 수명’이다. 대형 패션 브랜드들이 매년 유행시키는 옷들이 너무 쉽게 버려지고, 이로 인한 환경 파괴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스파 브랜드 의류를 대량으로 구입해서 한두 번 입고 더러워지면 세탁하는 대신 버려버리면 된다는 내용의 글이 자랑스럽게 온라인에 게시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저렴한 물건을 상대적으로 더 쉽게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필요에 따라 구입해서 필요에 맞게 입는다면 세상에 싸서 나쁜 옷은 없다. 저렴한 옷을 쓰레기로 만드는 유행과 소비가 있을 뿐이다.

2023-12-18

대중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최근 국회 인구위기특별위원회 소속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이 연예인들의 싱글 라이프를 다루는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출생율 저하의 원인으로 지목하여 논란이 되었다. 서 의원은 지난 5일 열린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나 혼자 산다’, 불륜·사생아·가정 파괴 드라마가 너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며 방송사가 따뜻하고 훈훈한 가족 드라마를 많이 개발해서 사회 분위기 조성에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이처럼 대중문화를 사회의 질서를 교란하고 미풍을 해치는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무차별 살인이나 폭력 등의 강력 범죄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자동차 도둑의 시점에서 플레이하는 게임인 ‘GTA(Grand Theft Auto)’나 ‘둠(Doom)’, ‘서든 어택’, ‘배틀그라운드’처럼 총기를 사용하는 일인칭 슈팅 게임들이 원인이자 원흉으로 지목된다. 범인이 이렇게 ‘폭력적인’ 게임에 심취하여 폭력성을 배양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2011년,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게이머들의 폭력성을 알아본다’는 명목으로 PC방의 전원을 강제로 내린 뒤, 비속어로 불만을 표시하는 게이머들의 반응을 그대로 보도하기도 했다.지배 문화, 주류 문화의 시선에서 대중문화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휴식을 주는 ‘오락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동시에 대중문화가 기성의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기도 한다. 불과 1년 전에도 성소수자를 긍정하는 메시지를 담은 남성 동성애자 아이돌 그룹 ‘라이오네시스’의 신곡 ‘It’s OK to be me’가 ‘동성애’를 이유로 MBC에서 방송 금지 판정을 받기도 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저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대체 대중문화와 그 소비층을 얼마나 무시하는 걸까? 필자가 어릴 때 어른들은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니까 오래 보면 바보가 된다’고 했다. 이런 발상의 기저에는 대중을 한없이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시선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대중에게는 스스로 생각할 능력도, 비판적 사고력도 없기에 대중매체가 발신하는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내면화해 버린다고 믿는 것이다.문화연구의 선구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화는 일상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문학이나 예술처럼 ‘고상한’ 것만을 문화라고 여기는 엘리트주의적 문화관을 비판하였다. 노동자 계급, 서민 계급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대중문화야말로 인간의 삶에 녹아들어 있는 문화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의미는 대중문화 작품 안에 완결된 채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과 경험과 만나 ‘디코딩(decoding)’ 되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완성된다. 지금 정치가 고민해야 할 일은 대중문화에 대한 ‘저격’이 아니라 국민들이 생각과 경험을 넓히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삶을 긍정하도록 돕는 것이다.

2023-12-11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을 넘어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는 농인(聾人·청각장애인)의 자녀를 일컫는 말이다.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에게서 자란 코다는 자연스럽게 수어와 청어(음성 언어)를 함께 익히게 된다. 이때 청어가 제1언어가 되고 수어는 외국어처럼 제2언어가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재일조선인의 모어가 조선어이듯, 농문화에 안겨 자라난 코다의 제1언어이자 모어는 수어다.포스텍 소통과 공론 연구소는 지난 12월 1일, 농인 부모님의 이야기와 자신의 코다 정체성을 다큐멘터리 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2015)에 담아낸 이길보라 감독을 초청해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청해 들었다. 이길보라 감독은 국가와 사회가 장애와 장애인을 정상성의 기준으로 구별 짓고 차별하고 격리해 온 역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식적 전환과 실천의 방법들을 들려주었다.이길보라 감독은 청문화(음성 문화)와는 또 다른 ‘농문화’라는 고유의 문화를 지닌 존재로서의 농인, 그리고 농문화와 청문화 양쪽을 오가며 잇는 존재로서의 코다를 부각시켰다. 수어는 소리와 청각에 기반한 청어와는 달리 시각에 기반한 새로운 언어이므로,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하는 코다는 세계를 두 배로 넓고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농인이 ‘결핍된 존재’로서의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고 행복한 존재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장애에 대한 나의 편협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이었다.솔직히 말해 아직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내게는 장애를 비정상으로 구별 짓지 않는 것과 장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해 나가기 위한 싸움이 목적은 같을지언정 방법론적으로 일치될 수 없는 한 쌍의 대척점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에는 장애에 대한 차별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는 변화와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장애인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즉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그 착각 때문에 공감을 선행으로 되돌려주는 ‘착한 장애인’을 폭력적으로 요구하게 되거나, 그토록 공감 능력이 넘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도취에 그칠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공감’이 아니라 장애인 또한 그저 장애를 가진 인간일 뿐임을 인식하고, 인간이 누려야 마땅한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피는 일이다.예컨대, 우리가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생각하는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이동권)와 원하는 곳에서 살 권리(거주·이동의 권리)는 장애인을 대할 때 너무 쉽게 무시된다. 휠체어가 출입할 수 없는 공간들은 장애인의 권리를 넘어 인간의 이동권을 제약한다. 격리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들은 거주·이동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는 셈이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과 시혜적 관점을 넘어, 장애와 장애인 인권을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사고하고 보장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3-12-04

반갑지만은 않은 방어 풍년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겨울 생선이라고 하면 방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제철을 맞아 기름기가 잔뜩 오른 대방어회는 겨울철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무와 함께 푹 쪄낸 방어찜도 빼놓을 수 없다. 유통 기술의 발달로 전국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본래 방어는 제주도를 비롯한 남쪽에서 주로 잡히는 생선이다. 따뜻한 바닷물을 따라 계절마다 회유하는 어종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요즘 들어 동해안 전역에서 방어 풍년을 맞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기장이나 포항 같은 동해 남부 지역은 물론이고, 한참 북쪽인 강원도 지역에서도 방어가 잘 잡힌다고 한다. 올해만 유별난 것도 아니다. 국립수산과학원에 따르면 지난 2010년대 후반부터 방어 어획량에서 동해가 남해를 거의 따라잡았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동해의 평균 수온이 꾸준히 상승한 탓에 겨울이 되어도 방어가 남쪽으로 회유하지 않는 것이다.반대로 동해를 대표하는 어종인 살오징어 어획량은 크게 줄었다. 방어와는 반대로 차가운 바닷물을 좋아하는 살오징어가 주 어장이었던 동해 남부까지 내려오지 않게 된 탓이다. 2009년에 12만t이 넘게 잡혔던 살오징어는 작년(2022년) 어획량이 1.5만t에 불과했다. 서민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횟감이었던 오징어가 ‘귀하신 몸’이 된 지 오래다.몇 년 전부터는 아열대성 어종인 참치가 강원도 주문진 앞바다에서 잡히고 있다고도 한다. 낚시인이라면 쾌재를 부를지도 모르겠다. 제주도까지 가지 않고도 방어나 참치 같은 ‘대물’들을 노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민들로서도 당장은 반가운 일일 수 있다. 채비를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겠지만, 어떤 어종이든 풍어를 맞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하지만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기후변화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복잡해서 예측이 매우 어려우며, 그 결과가 인간에게 이득이 될 가능성보다는 피해로 돌아올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우리가 쌓아 올린 문명은 최소 수 세기에서 수십 세기 이상 안정화된 기후 상태를 토대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따뜻해진 바닷물 때문에 상어를 비롯해 맹독을 가진 문어나 해파리, 고둥처럼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해양생물들이 한국 연근해에 출몰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지난 여름 휴가철, 속초와 고성 등지에서는 상어를 막기 위해 해수욕장의 수영 구역에 상어 방지 그물을 설치하기도 했다.문제는 바다에만 있지 않다. 아열대와 열대 지역에만 서식하던 독충, 해충들이 수입 과일이나 채소, 목재 등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되어 퍼져나가는 일도 드물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몇 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붉은 독개미’ 유입 사건이 대표적이다. 기후변화는 농업과 임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평균 기온 상승으로 경북의 대표 농산물이었던 사과 수확량이 급감한 일은 기후위기 문제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23-11-27

글쓰기의 어려움과 기쁨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내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글로 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지난 18일, 포스텍 캠퍼스에서 열린 ‘제2회 포스텍 SF DAY’에서 김초엽 작가, 김겨울 작가의 ‘SF 북토크’를 찾은 포항 시민들과 포스텍 학생들이 작가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한겨울을 방불케 하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130명이 넘는 청중이 강연장에 모였고, 두 시간이 넘는 강연과 대담 시간 동안 놀라운 집중력으로 두 작가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김초엽 작가는 “‘쓰고 싶은 나’를 발견하는 읽기의 여정”이라는 주제로 화학을 전공하는 과학도였던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6년 차 SF 작가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정표가 되어 준 책들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상세히 소개해 주었다. 또한 김겨울 작가는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청중을 대신해 김초엽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냈다.김초엽 작가의 강연과 두 작가의 대담도 물론 훌륭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청중들의 질문이었다. 20분 남짓 예정된 질의응답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고, 두 작가는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에서 이 장면을 전부 지켜본 나로서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사람들이 아직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새삼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소설, 시, 드라마,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있지만, 엄정한 형식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학술논문과 같은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글쓰기는 자기표현, 즉 ‘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나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 자기표현적 글쓰기의 본질은 아니다. 글로 쓰는 순간 모든 글쓰기는 잠재적인 독자를 갖게 된다. 나의 이야기가 다른 ‘나’들, 즉 독자들에게 전달되어야만 좋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쓰기는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작업이며, 다른 배경을 지닌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글쓰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나와 타인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지평, 즉 글쓰기의 문법을 익혀야 한다. 지루한 국어 시간이나 논술 수업 같은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장르, 예컨대 소설이면 소설, 에세이면 에세이의 장르적 특성과 창작 방법을 익힘으로써 해당 장르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공부를 말한다. 행사장에서 김겨울 작가가 한 질문자에게 조언했듯,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들을 발견하고 거기서 출발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김초엽, 김겨울 작가의 북토크와 같은 문화행사 또한 누군가에겐 독서와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포항을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이러한 문화행사가 더 자주 열리기를, 글쓰기를 통해 확장된 세계를 감각하는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2023-11-20

동빈내항과 포항운하 이야기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필자가 포항을 처음 방문한 것은 몇 년 전, 동해안 자전거 종주 때였다. 최북단 고성에서 출발해 4박 5일 동안 동해안 자전거길을 달려 포항에 이르렀다. 영덕과 흥해 지역을 지나면서 파란 동해 바다와 전원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포항 시내에 진입한 것은 밤 열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모텔이 밀집한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돌이켜 보면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였던 듯하다. 죽도시장에서 생선회로 저녁을 먹으려 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열려 있는 식당이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당시에는 ‘동빈내항’이라는 이름조차 몰랐지만, 은은한 조명이 새카만 수면에 아름답게 반사된 야경이 실망한 나와 일행을 위로해 주었다. 그때의 광경은 내게 포항의 첫인상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포항에 살며 동빈내항이 과거 번창했던 항구였음을 배웠다. ‘포항운하 역사관’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동빈내항은 일제강점기와 1950, 60년대 동안 경북 일원에 식량을 공급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매립으로 인해 형산강과 동빈내항을 잇는 물길이 기능을 상실했고, 주변부는 난개발이 이루어져 낙후된 주거지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양학천, 칠성천의 생활하수가 동빈내항으로 그대로 유입되어 수질 또한 심각하게 오염되었다고 한다. 잘 정비된 지금의 동빈내항과 포항운하 일대를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포항운하는 형산강과 동빈내항 사이의 물길을 복원하여 수질오염을 개선하고, 시민들이 여가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수변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2012년부터 조성 공사를 시작해 2014년에 완공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포항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꼽힌다. 송도동에 있는 포항운하관에 가면 동빈내항과 포항운하 지역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 운하 공사 당시의 사진 등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형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전시관 내 카페에 앉아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리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그런데 포항운하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포항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도, 전시자료도, 멋진 전망의 카페도 아니었다. 전시관 외벽에는 운하 공사에 삶의 터전을 내어줘야만 했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주자의 벽(壁)’이 설치되어 있다. 이 벽에는 지금의 포항운하 자리인 매립지에서 살았던 827세대 주민들의 이름과 집의 위치가 지도상에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다.도시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와 같다는 말이 있다. 도시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와 요구들이 존재하고, 그에 호응해 도시공간 자체가 지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추억하듯, 도시도 이러한 기록과 기억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화려하고 말끔한 모습은 도시가 간직한 이야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된 이야기, 잊혀 가는 이야기들을 사랑한다. 포항운하관 ‘이주자의 벽’이 들려준 이주민들의 이야기가 내 기억 속에도 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2023-11-13

‘마당개’를 아십니까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개를 마당에 묶어서 키우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절의 개들은 도둑이 들거나 낯선 사람이 침입하는 것을 경고하는 ‘경비견’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허름한 잠자리와 짧은 목줄은 당연했고, 주위에는 제때 치워 주지 않은 똥오줌이 널려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당연히 산책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고, 복날 즈음해서 개장수에게 식용으로 팔려 가는 일도 흔했다.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된 오늘날에도 이런 처지에 놓인 개들이 적지 않다.1m 내외의 짧은 목줄로 마당에 묶여 생활하는 개를 ‘마당개’라고 한다. 공장에서 경비용으로 묶어서 기르는 개를 뜻하는 ‘공장개’라는 표현도 있다. 농어촌 지역이나 공장지대를 지나가다 보면 이런 마당개와 공장개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사람이 반가워 날뛰는 녀석, 경계심을 표출하며 사납게 짖어대는 녀석 등 반응도 제각각이다.2022년 조사에 따르면 도시 지역보다 농어촌 지역에서 마당개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미비한 탓이다. 보호자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즐기는 도시 지역의 개들과, 온종일 짧은 목줄에 묶여 지내는 마당개와 공장개들은 같은 개라고 하기엔 ‘팔자’ 차이가 너무 커 보인다. 인간이라면 어떨까? 어떤 사람이 짧은 줄에 묶여 행동반경을 제약당하고, 배변조차 줄에 묶인 채 그 자리에서 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심각한 학대이자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것이다.보도에 따르면 지난 11월 2일, 경주시는 안강읍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24마리의 개를 구조했다. 오물과 쓰레기와 뒤엉킨 채 방치된 개들은 기생충과 피부병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처럼 적절한 환경과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많은 동물을 사육하는 사람을 ‘애니멀 호더(Animal hoarder)’라고 한다. 이 또한 심각한 동물 학대 행위이다.개정된 동물보호법은 ‘반려동물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질병을 유발하는 행위’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현행법으로 이러한 동물 학대 행위를 예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상해나 질병, 죽음 같은 실제적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안전하고 깨끗한 생활환경을 제공하고 다치거나 아플 때 반드시 치료해주는 등 동물을 기르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를 설정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법적제재가 가능하도록 동물보호법이 추가 개정되기를 바란다.법제도의 개선과 함께 동물권에 대한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페미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반려종이 성립하려면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종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썼다. 인간은 개를 길들여 반려동물로 삼았지만, 개 또한 휴머니티(인간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반려동물은 정복과 지배, 사육의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우리이기도 하다. 마당개에게서 보이는 풍경은 짧은 줄에 묶여 있는 동물이 아니라, 주체의 신화에 속박당한 우리 자신이다.

2023-11-06

다문화 시대와 문해력 교육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문해력(literacy)’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뜻한다. 그런데 단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고, 한국어를 말하고 들을 수 있다고 해서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문해력이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맹률’과 ‘문해율’은 다르기 때문이다. 실질 문해율이란 문서를 읽을 때 글자는 알지만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율이다. 2021년도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 문해율은 OECD 국가 중 중상위권에 위치한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실질 문해력 부족으로 인해 벌어지는 해프닝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단골 소재다. ‘금일’을 ‘금요일’로 잘못 이해한 사례, ‘심심한 사과’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과’라고 받아들인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는 주로 한자어 사용에 익숙한 기성세대와 그렇지 않은 젊은 세대 사이의 차이로 발생한다. 언어는 언중의 필요에 따라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해력이 부족하면 전문적인 정보를 해득하기 어렵고, 오독의 가능성이 증가해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문제를 겪을 가능성도 높다. 더 큰 문제는 세대 간 경험의 차이보다도 더 심각한 격차가 문해력 이슈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다문화가족 아이들이 겪는 실질 문해력 부족 문제다. 농어촌 지역에는 중개업체가 개입된 국제결혼을 통해 형성된 다문화가족이 많다. 이 경우 성역할에 대한 보수적 관념 때문에 결혼이주여성의 한국어가 서툴러도 남편은 자녀 교육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 가정이 적지 않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한국말은 곧잘 하지만, 문해력은 부족하기 쉽다. 생활 환경에서 접하는 한국어의 양과 질이 빈약하고, 잘 정련된 문어(文語)를 접할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이다. 진로 선택, 진학, 취업, 금융거래, 부동산 계약, 복지혜택 등 문해력이 필요한 분야에서도 소외될 수밖에 없다.지난 10월 17일과 18일, 농림축산식품부와 경북농협은 경북지역 다문화가족 및 지역주민 50여 명을 대상으로 ‘다문화가족 농촌정착지원과정’ 현장 교육을 실시했다. 다문화가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꼭 필요한 사업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교육의 기회가 더 많은 다문화가족에게 돌아가야 함은 물론이고, 결혼이주여성 및 다문화가족 2세들을 위한 한국어 문해력 교육 또한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다문화가족 2세들의 문해력 부족 문제는 학교 교육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아이들은 학교보다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길며, 기초적인 문해력이 부족할 경우 교과과정을 따라가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위해 섬세한 정책적·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 우선 방과 후 교실이나 특별활동에서 전문 강사를 고용해 한국어 문해력 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강사 인건비 및 공간 등을 제공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성에게만 자녀 교육을 전담시키는 성역할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 또한 차츰 바꿔 나가야만 한다.

2023-10-23

걷고 싶은 도시, 포항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철길숲 산책로가 끝나는 유강리 정수장과 형산강을 잇는 상생숲길 인도교가 지난 10월 10일 준공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철길숲 산책을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다. 이로서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도 형산강 맞은편 연일 지역까지 도보로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분들께도 희소식일 것이다.‘걷기 좋은 도시’를 넘어 ‘걷고 싶은 도시’를 지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시민의 이동권 문제와 직결된다. 자동차를 이용한 이동에는 기본적으로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걸어서 이동할 권리를 ‘보행권’이라고 한다. 아직은 비교적 낯선 개념이지만, 앞으로 더 강력하게 지향해야 하는 권리이자 가치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보행권 차원에서 포항의 도시공간은 아직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보행 인프라가 갈 갖춰져서 도보로 이동하기 좋은 지역은 철길숲 근처와 형산강변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인프라 정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또한 도보 이동은 자동차를 이용할 때와는 전혀 다른 도시경관을 감각하게 해 준다. 철길숲이나 형산강을 따라 오래 걸어 본 사람이라면 직관적으로 알 것이다. 보행로를 따라 걸으면 자동차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완전히 다른 풍경과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다. 하늘, 나무, 풀, 유유히 흐르는 강물, 지나쳐가는 사람들, 산책 나온 반려견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까지. 보행자의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와 습도, 바람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포항을 자동차로만 경험한다면, 포항을 반쪽밖에 느끼지 못하는 셈이다.도보 이동은 지구환경 보호의 차원에서도 권장된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물론이고, 최근 보급되기 시작한 전기차조차도 완전히 친환경적이지는 않다. 배터리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은 논외로 하더라도, 동력인 전기 생산 과정에서 대량의 탄소가 배출되기 때문이다. 보행 인프라를 잘 구축하여 멀지 않은 곳은 걸어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친환경인 이유다. 마찬가지로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교통수단인 자전거 도로도 함께 정비해야 한다. 보행자와 자전거 탑승자가 모두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보행로와 자전거 도로를 확실히 분리하는 편이 좋다. 마지막으로 도보 이동은 시민의 건강 증진에도 큰 도움을 준다. 최근 맨발 걷기 붐이 뜨겁지만, 굳이 맨발이 아니더라도 걷기는 최고의 운동이다. 편안한 신발 한 켤레 외에 특별한 장비가 필요 없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으며, 관절을 비롯한 신체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운동에 따로 시간을 투자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현대인으로서는 이동과 운동을 동시에 할 수 있으니 더없이 좋다. 스마트폰의 걷기 어플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매일매일의 걸음 수를 확인할 수 있으니 걷기에 재미를 붙이기 쉽다.가을은 걷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다. 운동을 위해서든, 출퇴근길이든, 볼일 보러 오가는 길이든 상관없다. 더 추워지기 전에 잘 맞는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서 보자. 걷고 싶은 도시, 포항을 만나게 될 것이다.

2023-10-16

정주하고 싶은 경북을 위하여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경상북도는 지난 9월 14일,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 비전 선포식에서 ‘청년이 살고 싶은 경북시대’ 실현을 위한 ‘경북형 6대 프로젝트’ 구상을 발표했다.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그중에서도 지역 청년들이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 기업에 취업해서 지역에서 정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경상북도, K-U시티 프로젝트’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지역 인재의 유출은 비단 경상북도뿐 아니라 모든 지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다.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일자리 부족이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일자리도 결국 지역 생태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서울과 수도권이 지역을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구조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 지역의 자율적인 생태계가 붕괴된 것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중요한 것은 일자리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소프트웨어 자체를 바꿔 나가는 일이다.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교육 및 문화예술산업을 적극 육성하여 지역 주민들이 물질적·정신적 풍요로움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시적인 생산인구 증가 효과는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지역 인재가 지역에서 정주하는 선순환 모델은 만들어내기 어려울 수 있다. 경상북도의 K-U시티 프로젝트가 지역 생태계를 복원하고 정주하고 싶은 지역사회를 만드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또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외국인 유학생 1만 명 유치. K-드림(Dream) 프로젝트’에 관한 부분이다. 지역 대학의 경쟁력을 키운다는 측면에서 외국인 유학생 유치가 필요하다는 취지에는 동의한다. 심각한 저출산 기조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고, 이미 대부분의 대학에서 외국인 유학생이 그 공백을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문제는 이렇게 대학으로 유입되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학습 능력과 한국어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는 시스템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대학 입장에서야 실적도 되고 등록금 수입도 늘어나니 외국인 유학생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문턱이 낮으니 한국 대학은 진지하게 배움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한국 체류를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겨지게 된다. 많은 동료 교사·강사들이 한국어 능력이 부족하여 강의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외국인 유학생들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외국인 유학생 1만 명 유치를 진지하게 준비하고자 한다면 언어 능력과 학습 능력이 충분한 학생을 선발하는 시스템, 그렇게 입학한 유학생들의 학습과 생활을 도울 전문 상담 인력, 그리고 부족한 한국어 학습을 담당할 한국어 교육 전담 인력의 확충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교육과정을 따라가기 어려운 외국인 유학생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학 교육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2023-09-18

그런 과학은 없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동해는 천혜의 어장이며 수산업은 포항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다. 따라서 포항 지역사회는 바다 건너편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에 대해 대단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지난 8월 24일 오전‘일본 후쿠시마오염수방류반대포항시민행동’은 죽도시장 개풍약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전 오염수 방류를 강행하는 일본 정부, 그리고 반대와 견제는커녕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우리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방류를 앞두고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정화 시설(ALPS)을 거친 원전 오염수는 방류해도 안전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일본 정부 또한 이를 오염수 방류의 ‘과학적’ 근거로 삼고 있다. 다소 황당하게도 우리 정부가 국민의 세금인 예산을 들여 이 ‘과학적’ 논거를 홍보하는 광고를 제작ㆍ방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 결과 상식과 안전의 문제여야 하는 것이 정쟁의 소재가 되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은 반증 가능하기 때문에 비로소 과학성을 확보한다고 보았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자 지식 체계이지만, 결코 그 자체로 완벽한 진리는 아니다. ‘ALPS로 걸러진 원전 오염수는 방류해도 안전하다’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주장 또한 지속적으로 반증되고 확인되어야 하는 가설이자 이론에 불과한 셈이다. 방류된 오염수가 중장기적으로 해양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해양생물들의 먹이사슬에는 얼마나, 어떻게 축적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다.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이번 오염수 방류가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서가 아니라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는 일찍이 산업 폐수의 무분별한 방류로 인해 이타이이타이병이나 미나마타병 같은 공해병을 겪은 바 있다. 미나마타병은 수은 중독에 의해 발생하는 병이다.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위치한 신일본질소비료 공장에서 1950년대부터 중금속인 수은이 포함된 공장 폐수가 바다에 무단으로 방류되었고, 그것이 먹이사슬을 따라 축적되어 어패류를 섭취한 사람들이 신체 마비, 정신지체 등의 심각한 증상을 겪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83년, 울산 온산공단 인근 주민들이 겪어 왔던 전신 통증과 마비 증상의 원인이 공단에서 바다로 흘러나온 중금속 때문임을 밝힌 ‘온산병’이 대표적인 공해병 사례로 알려져 있다. 쉽고 저렴하게 산업 폐수를 처리하려던 시도가 수년~수십 년 뒤 무서운 질병으로 돌아온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과학적으로’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다. 과학은 결코 100%를 이야기하지 않으며, 과거에는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건 실험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옳다. 과학의 이름으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아가 저지할 수 있도록 과학계와 시민사회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2023-09-11

고속열차를 타고 오가는 것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지난 9월 1일, 포항과 수서를 오가는 SRT 고속열차가 개통되었다. 이로써 포항역에서 서울 수서역까지 약 2시간 21분 만에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 강남권에 용무가 있는 경북 동해안 지역 주민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으며, 관광객 유치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교통,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역이 서울~수도권과 더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지방 소멸이 가속화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2004년 KTX 경부선이 개통되며 서울~부산 2시간 반 시대가 열린 이후, 많은 환자들이 부산권 병원 대신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을 찾게 되면서 지역 병원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 사례가 있다.이러한 환자 유출 현상은 단지 재정적 어려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출신 인재들이 지역의료에 종사하는 동기를 약화시키게 되어 지역의료 시스템 전체의 위기를 초래한다. 지금 당장은 지역 병원과 서울권 병원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에 불과해 보일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아주 가벼운 질병이 아니고서는 지역에서 치료가 불가능해 대부분의 환자가 서울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예상된다.이러한 문제는 지역 인재 유출이라는 측면에서도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지역의 위기와 지방 소멸을 우려하지 않는 지역은 없지만, 그 해결책으로는 고속철도나 공항과 같은 대형 교통인프라의 유치가 여전히 1순위로 내세워진다. 이러한 교통인프라의 확충을 통해 서울~수도권과의 체감적 거리가 가까워지면 지역으로 사람과 자본이 대거 유입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행기와 고속철도는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움직이므로, 지역에서 외부로 유출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부족한 일자리와 경직된 문화로 인해 우수한 인재들이 지역을 이탈하는 속도 또한 가속화될 수 있다.지역성은 중심(서울~수도권)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많은 부분이 형성되는 정체성이다. 지역을 지역답게 만드는 요소가 존재하며, 이것은 중심로부터의 상대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유지되기 어렵다. 필자의 작은할아버지가 1980년대 초 포항에서 일하실 때는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여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포항과 서울 간의 물리적 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상대적·체감적 거리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 교통기술이 더 빠른 속도로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킬수록 지역은 지역다움을 잃어가게 된다.그렇다면 지역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지역을 활성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설적으로 지역사회의 속도를 더더욱 가속화할 필요가 있다. 서울~수도권과 같은 메트로폴리스의 속도를 무비판적으로 지향하라는 뜻은 아니다. 물질문명의 발달 속도에 맞춰 정신문화의 진보도 가속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성차별적 문화,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조직에서의 수직적 위계질서 등을 타파하고, 지역사회와 문화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들이 이런 문제에 염증을 느껴 지역을 떠나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 고속철도의 속도가 지역사회의 타성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길 기대한다.

2023-09-04

경주 속의 작은 아시아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와 경주병원 쪽에서 형산강에 놓인 동대교를 건너면 경주시 성건동이 나온다. 이곳은 한때 경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동네 중 하나였지만, 인근 지역들이 주택지로 개발되며 지금은 과거에 비해 한적한 동네가 되었다. 경주 시민들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중앙시장이 성건동에 위치해 있으며, 동대사거리 일대는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즐겨 찾는 경주의 대학로로 유명하기도 하다.성건동 서쪽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경주는 포항이나 울산 같은 산업도시와 인접해 있으므로 외곽 지역에 산업단지가 발달했고, 그곳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중국인, 동남아인, 러시아인, 중앙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 지역에 모여 살며 이국적인 풍경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필자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요리를 무척 좋아한다. 서울에 살 때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몽골 음식점이 모여 있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근처의 ‘중앙아시아 거리’를 자주 찾곤 했다. 포항에서 일하게 되면서 중앙아시아 요리를 자주 접하기가 어려워 아쉬웠는데, 경주에 러시아 요리 ‘맛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 전 성건동을 찾아가 보았다.성건동 일대에는 러시아어와 중국어 간판을 단 식당, 식료품점, 찻집, 휴대폰 판매점 등이 즐비해 마치 외국 여행을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꽤 늦은 저녁때라서 문을 닫은 상점이 많아 거리가 어둑한 느낌도 받았지만, 유모차를 끌고 한가롭게 산책하는 가족을 보니 여느 주택가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미리 검색해둔 식당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중앙아시아식 꼬치구이인 샤슬릭과 볶음국수인 라그만을 주문하려 했는데 묘한 메뉴가 보였다.‘고려인 국시’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냉국수와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고려인 된장찌개’가 그것이었다. 서빙하는 분은 전형적인 서양인의 모습이었지만, 요리하는 분이 고려인이거나 고려인에게 요리를 배운 듯했다. 샐러드 메뉴에는 특이하게도 매운 잉어회 샐러드도 있었다. 신선한 바닷고기를 구하기 어려웠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잉어를 이용해 회무침을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신라 천 년의 수도 경주로 중앙아시아 요리를 먹으러 갔다가 고려인 음식을 만난 것이다.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이유로 사람의 이동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문명사적 현상이다. 신라 시대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경주까지 찾아왔고, 그중 몇몇은 꽤 오래 눌러살기도 했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무덤인 괘릉을 지키는 무인석(武人石)의 모델을 아라비아인으로 추정하기도 하니까.단, 그 이동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의 슬픈 역사가 그랬듯, 이념이나 국가 등에 의해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분단과 이산가족의 비극이 잘 보여주듯 거대한 힘이 개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약해서도 안 될 것이다. 성건동에서 경주 속의 작은 아시아를 느끼며 역사와 개인, 이동과 이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2023-08-21

냉방도 복지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뜨거워진 공기가 한반도를 뒤덮은 ‘열돔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정체된 대기를 뒤흔들어 줄 것으로 기대됐던 6호 태풍 카눈마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며 한동안 이 폭염을 감내해야만 할 것 같다.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세계 전체가 이상고온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에어컨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에어컨 사용이 환경파괴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강한 유럽인들에게도 올여름 더위는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폭염으로 인한 가뭄의 영향으로 미국 중부 곡창지대의 옥수수 수확량이 20% 이상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국제 곡물시장에서 식량 가격이 폭등하지 않을까 염려된다.이처럼 이상고온현상이 지속되다 보니 온열질환(열사병) 환자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야외작업이 많은 직업군은 물론이고,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거나 비용이 부담돼서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나곤 하는 노년층과 저소득층이 온열질환에 특히 더 취약하다. 공사 기한에 쫓겨 폭염에도 공사를 강행할 수밖에 없는 공사장 야외작업자나, 잠시 밭을 돌보러 나갔던 고령의 농민이 열사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도시의 경우 쪽방촌이나 달동네에 거주하는 취약계층이 온열질환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 이처럼 추위나 더위, 수해나 가뭄 등 기상위기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후취약계층’이라고 한다. 정부에서는 내년부터 기후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31일까지 경북도내 온열질환자 109명 중 60세 이상의 비율이 42%(39명)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젊고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더위다. 노년층에게는 더더욱 버겁고 위험할 수밖에 없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전통적 돌봄 시스템이 붕괴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노인 혼자, 또는 노부부 단둘이 살아가는 가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농촌지역의 경우 청년인구 유출 현상이 더해져 기후취약계층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농촌지역이 많은 경북의 특성상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문제다.겨울철이 되면 어려운 이웃에게 연탄을 전달하는 봉사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곤 한다. 추위에 고통받는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추위뿐 아니라 더위 또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려 했는데 주민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는 소식도 적지 않게 들린다. 에어컨은 사치재라는 낡은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직 많은 것이다.개인이 변화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면 정부와 지자체가 먼저 ‘냉방 복지’를 적극 시행해야 한다. 기후취약계층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냉방쉼터를 설치하고 집 구조상 가능하다면 에어컨 설치와 전기요금 지원도 고려해볼 수 있다. 경비노동자의 경우 근무공간의 온도를 일정 기준 이하로 유지하는 것을 의무화하도록 법령이나 조례를 제정하는 방법도 있다. 이러한 법적, 제도적 지원이 꾸준히 이루어진다면 사회적 인식 또한 바뀌어 나갈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냉방도 복지다.

2023-08-07

군인은 ‘공짜 인력’이 아니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집중호우가 한반도 거의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 경북 예천 내성천에서 실종자 수색에 투입됐던 해병대원 故 채수근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인간띠’를 만들어 실종자를 찾던 중 갑작스럽게 하천 지반이 내려앉으며 해병대원 세 명이 물에 빠졌고, 두 명은 헤엄쳐서 빠져나왔지만 안타깝게도 채 상병은 그러지 못했다.당시 현장에 투입된 해병대원들에게는 가장 기본적 안전장구인 구명조끼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폭우로 인해 하천의 수량과 유속이 급격히 증가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원들은 맨몸으로 물속에 들어가야만 했다. 더구나 이들은 수중구조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은 인력도 아니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안전불감증을 다시 한번 상기시킴과 동시에,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한 청년들을 얼마나 허술하고 박하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한국은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남성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는 대외적으로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선전되지만, 정작 그 의무를 다하는 주체인 청년들에 대한 존중은 찾아보기 어렵다. 군인들이 외출·외박을 나가는 소위 ‘위수지역’의 물가가 유독 높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징병된 청년들을 이윤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 것이다. 이번 폭우와 같이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지역사회에 큰 피해가 발생하면 신속한 복구를 위해 군이 대민지원에 나선다. 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군 활동의 일환이며 군 이미지 향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병사들의 희생이 따른다면 어불성설이다. 하천에서 실종자를 수색하던 해병대원들에게 상부에서 ‘해병대임을 알리는 빨간색 상의’ 착용을 지시했다는 언론보도는 과연 무엇을 위한 대민지원인지를 되묻게 한다.故 채수근 상병의 소속 부대인 해병 제1사단은 작년 가을 태풍 힌남노로 인해 경주와 포항 일대에 막대한 호우 피해가 발생했을 때 현장에 투입되어 활약한 바 있다.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이러한 활동은 대단히 고맙고 소중한 도움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故 채수근 상병과 같은 불의의 피해자가 발생한다면 그 의미 또한 퇴색될 수밖에 없다.이제 군인을 ‘공짜 인력’으로 생각하는 일은 그만두자. 그들도 군인이기 이전에 우리 모두와 동등한 사람이자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다. ‘천연자원이 없어 사람이 최고의 자원’이라는 나라에서 사람의 가치와 목숨을 가장 하찮게 취급하는 아이러니한 일들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 수뇌부의 인명 경시 경향과 안전불감증에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모병제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국가주의·권위주의적 가치들이 힘을 잃은 현재, 징병제야말로 ‘열정페이’로 유지되는 가장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언제까지 애국심을 이유로 청년들의 시간과 생명을 착취할 것인가. 휴전 중인 분단국가의 특수성을 언급하며 모병제 전환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분단으로 인한 군사적 긴장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가.

2023-07-31

장마가 아닌 ‘한국형 우기’가 온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1973년에 발표된 윤흥길의 소설 ‘장마’의 마지막 문장이다. 작중에서 한 달 가까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는 이야기에 음울한 분위기를 더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이념대립과 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런 장마를 경험하기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장마철이라고 하면 6월 말에서 7월 말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 한반도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고온다습한 고기압과 북쪽의 차가운 고기압이 만나 기압골이 형성되어 많은 비가 오게 된다. 이를 장마 전선이라 부르며, 7월 말 장마 전선이 한반도를 지나 북상하면 비로소 장마가 끝나고 8월 무더위가 찾아오는 것이 상식이었다.장마철에는 우중충한 날씨가 길게 이어지고, 그동안 비가 약해졌다 강해졌다를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요 몇 년 동안의 장마철 날씨는 그렇지 않았다. 뙤약볕이 내리쬐다가 갑작스럽게 집중호우가 쏟아지고, 비가 그치면 다시 하늘이 개어 폭염이 이어지곤 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폭우는 동남아시아 같은 아열대성 기후의 특징인 ‘스콜’, 즉 열대성 소나기를 연상하게 한다. 아열대 지역에만 서식하던 새, 곤충, 물고기, 식물 등이 최근 들어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차가운 물에 서식하는 냉수성 어류의 서식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한반도의 기후 자체가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그러다 보니 몇몇 기상학자들은 ‘장마’가 아니라 ‘한국형 우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장마’라는 단어로는 지금의 기상현상을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7월 9일부터 전국을 강타한 집중호우는 50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고, 그에 대한 대비 또한 충분하지 못했다. 14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충북 오송 지하차도 침수사건은 시간당 30.5㎜라는 집중호우로 인해 인근의 하천(미호천)이 넘치며 일어났다. 미호천에 설치된 임시 제방이 집중호우로 인해 불어난 수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한 탓이다.기존의 장맛비가 아니라, 아열대성 집중호우 상황을 가정해 하천을 정비하고 제방 또한 그 기준에 맞춰 설치했다면 이와 같은 불의의 사고를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유행했던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개념을 기상이변 상황에도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작년 9월, 8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지역사회에 큰 슬픔을 가져왔던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 침수 사고를 기억한다. 당시에도 냉천이 그토록 급격하게 범람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피해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안전불감증의 문제인 동시에, 수십 년간 쌓아온 기상상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기후위기 시대로 돌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기후위기를 ‘뉴 노멀’로 상정하고 ‘한국형 우기’에 대비해 기상정책과 인프라를 정비하자. 탄소 배출량을 줄여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 상황 자체를 해결하려는 근본적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2023-07-24

세상은 반대에 끌린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1990년대 중반에 SBS에서 방영했던 ‘LA 아리랑’이라는 시트콤 드라마를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난다. LA 한인타운에서 살아가는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과 애환을 코믹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드라마는 신(scene)이 전환될 때마다 LA 한인타운의 풍경들을 잠깐씩 비춰주는데, 가로수로 야자수가 심어진 모습, 번화한 거리에 한글 간판이 붙어 있는 모습들이 이국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이 드라마는 ‘아메리칸 드림’의 1990년대 버전에 가까웠던 것 같다.드라마에서는 거의 재현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자리 잡기까지 이민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결코 작지 않았다. 아시아계 이주민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가시적·비가시적 차별이 존재하며,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증가하기도 하였다. 흑인이나 히스패닉(중남미계 미국 이주민)의 경우 인구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관계로 이들을 조명하는 문화적 시도들도 많은 반면, 아시아계 이주민에 초점을 맞춘 문화콘텐츠는 매우 드물었다.그런데 최근 들어 한국계 이민자의 삶을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영화 ‘미나리’, ‘라이스보이 슬립스’나 캐나다에서 대흥행한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한국계(넓게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 찾기의 문제에 주목하였다.지난 6월 14일 개봉한 장편 애니메이션 ‘엘리멘탈’ 또한 아시아계 이민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는 땅, 불, 바람, 물이라는 네 가지 원소들이 모여 살아가는 ‘엘리멘트 시티’를 배경으로 불 종족 여성 ‘앰버’가 겪는 이중적 억압의 문제를 너무 무겁지 않게 이야기한다. 작중에서 불 종족은 다른 세 종족에 비해 사회문화적으로 차별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루어 살아간다. ‘엘리멘탈’이 특히 인상적인 점은 인종차별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집단 내부의 억압과 차이의 문제도 함께 다룬다는 것이다. 앰버는 ‘불’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에 의해 자신이 대표되는 것을 힘겨워한다. 앰버의 아버지는 그녀가 잡화상을 물려받길 원하지만, 앰버는 이민 1세대인 부모가 힘겹게 일궈낸 것들을 존경하면서도 그것을 물려받아 지켜내는 일에 커다란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민족주의적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들은 동포인 동시에 영원한 타자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이민자 개개인의 목소리와 욕망은 소거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이산(離散)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존중과 함께 그들을 타자가 아니라 사회에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부여하는 동료 시민이자 이웃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급속히 다문화 사회로 진입해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엘리멘탈’ 포스터에는 “세상은 반대에 끌린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낯선 것, 다른 것, 이질적인 것들이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2023-07-10

사람값이 제일 싼 나라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때 이른 폭염이 찾아온 지난 19일, 경기도 하남시의 외국계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일하던 30대 노동자가 사망했다. 주차장에는 변변한 냉방장치가 없었고, 건물 5층에 마련된 휴게실이 있었지만 5층까지 이동하려면 3시간마다 주어지는 15분의 휴식시간이 거의 끝나버리기 때문에 주차장 근무자들은 그 휴게실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주차장은 벽면이 뚫려 있는 구조다. 근무자들은 햇볕과 열기에 그대로 노출된 주차장 구석에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사망한 30대 노동자의 업무는 쇼핑카트를 회수해 매장 입구 쪽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매장은 항상 손님들로 붐볐고, 쇼핑카트는 한 시간에도 200여 개씩 쏟아져 나왔다. 그는 섭씨 33℃에 달하는 폭염 속에서 철제 카트 수십 개씩을 밀고 다니며 하루 4만3천 보, 약 26km를 움직였다. 해당 대형마트 체인은 양질의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포털사이트에서 해당 대형마트 이름에 ‘추천템’을 더해서 검색하면 수많은 제품들이 검색된다. 공산품, 식품 등 상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유통구조를 혁신하고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다고 한다. 소비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 마트가 저렴하게 판매하는 상품에는 사람, 즉 서비스도 포함되어 있다. 행복하게 쇼핑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에게 마트 직원이 카트를 정리해 주는 서비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차장 근무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냉방장치도, 휴게실로 이동해서 휴식할 충분한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사용한 카트를 제자리에 돌려놓자’라는 공중도덕 차원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가 어떤 상품을 아주 저렴하게 구입했다면, 그 상품의 생산-유통-판매 과정 중 어딘가에서 ‘마른 수건에서도 물을 짜내는’ 원가 절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쉬운 원가 절감 방법은 기술혁신이나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인건비 절감이다. 이 사실을 사회구성원 모두가 통감하지 못하는 이상 이와 같은 사고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저출산과 고령화, 인구절벽 문제로 국가 소멸이 우려된다고들 한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에 불과했다. 평균적으로 한 명의 여성이 0.78명의 자녀를 낳는다는 뜻이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을 뜻하는 ‘비혼율’도 매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특히 소득분위가 낮은(임금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비혼율이 더 높게 조사된다. 무엇이 한국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양질의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 지금 한국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양질의 일자리는 감소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자동화·무인화로 대표되는 산업구조의 변화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성장도 결국 사람을 위한 일이다. 로봇과 AI 기술이 생산성을 극적으로 향상시키고 인건비를 제로에 가깝게 만든다 하더라도, 그렇게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를 이용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더 큰 이윤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사람값을 ‘후려치는’ 풍토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이상, 한국 사회에 미래는 없다.

2023-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