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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컬대학 사업은 지방대를 구할까?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글로컬’은 세계적이라는 뜻의 ‘글로벌(global)’과 지역적이라는 뜻의 ‘로컬(local)’을 합친 신조어다. 이 용어는 지역이 지닌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세계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향하고 있다. 한때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이 유행했지만, 이제 ‘한국’은 올림픽이나 월드컵 시즌 정도를 제외하면 더이상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상상되지 않는다. 수도권과 지역 사이의 경제적·문화적 격차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교육부는 대학의 벽을 허물고 대학과 지역의 동반 성장을 이끌어 갈 지방대학을 지원하는 사업을 ‘글로컬대학 사업’이라 명명하여 진행하고 있다. 2026년까지 총 30곳의 지방대를 지정해서 학교당 5년 간 총 1천억 원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최근 15곳의 예비지정 대학이 발표되어 대학가에는 희비가 교차하고 있다.지방대학을 지원한다는 취지 자체는 좋다. 문제는 글로컬대학 사업이 현재의 형태로 강행될 경우, 지원받는 대학과 그렇지 못한 대학 사이의 격차가 훨씬 더 커진다는 점이다. 사업에 선정된 대학은 일시적으로 신입생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그것도 지원금을 교부받는 동안의 한정적 효과가 될 가능성이 높다. 5년 동안 글로컬대학 미선정 대학들은 고사하고, 지원금이 끊기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황폐해진 지방 학술생태계에 몇몇 대학만 외롭게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양한 학문적 관심사를 가진 지방 연구자들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서울-수도권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지방대학의 소멸은 가속화된다. 지방대학 문제가 단지 예산 부족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예산 문제는 지방대학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에 불과하다. 문제의 근원은 서울-수도권 중심주의와 학벌주의에 있다. 물론 재단 자체에 문제가 있는 부실대학의 경우 솔루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별지원을 통한 대학 수 줄이기가 답이 되어서는 안 된다.대학은 학생과 교직원만의 공간이 아니다. 대학은 캠퍼스가 위치한 지역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지방대학이 폐교되면 그 지역 전체가 폐허로 변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폐허는 우범지대로 전락할 우려도 크다. 대학이 교육에 최적화된 공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활력을 잃어가는 지방대학을 시민교육을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적극 연구되어야 한다.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은퇴자 중에는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배움의 열의를 가진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배우고, 이를 통해 은퇴 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돕는 교육정책 수립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는 매년 배출되는 석·박사 학위자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정책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때가 도래했다.‘대학의 벽을 허문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대학 간의 기계적 통합이 아니라, 대학의 교육 기능을 지역사회와 공유하는 일에서부터 탐색되어야 한다.

2023-06-26

흔들리는 가치, 유동하는 이미지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전북 남원은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고장이다. 남원에는 춘향의 영정을 모신 춘향사당이 있으며 매년 5월 5일에 이곳에서 춘향제가 열린다. 이당 김은호(1892∼1979)가 그린 기존 영정이 작가의 친일 논란으로 구설수에 오르자 남원시는 새로운 춘향 영정을 제작하여 사당에 봉안하였다. 새 영정을 그린 김현철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남원 소재 여자고등학교에서 추천받은 7명의 여학생 모습을 참고했다고 밝혔다.문제는 새 영정이 공개된 이후, 영정 속 춘향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다’는 비난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형평운동가 강상호가 그렸다고 알려진 최초의 춘향 영정, 그리고 김은호가 그린 기존 영정에 비해 새 영정 속 춘향의 얼굴은 17세라기엔 너무 나이 들어 보이고, ‘미인’도 아니라는 것이 비난의 요지다.근대문학 연구자로서는 이 논란에 대해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든다. 우선 춘향이 상징하는 가치를 ‘열녀’, 즉 여성의 ‘정조’로 떠받드는 것이 현대사회에 적합한지부터가 의문이다. 두산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남원 춘향사당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 속”에 위치해 있으며 “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한다. 춘향사당이 건립된 1931년에도 여성의 정조라는 가치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서양화가이자 문인인 나혜석은 1930년에 발표한 ‘이혼고백서’라는 글에서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조하는 조선사회를 이렇게 비판했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합니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이제 춘향제는 ‘열녀 춘향’이 아니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 걸고 권력에 맞선 ‘멋지고 용감한 여성’ 춘향을 기리는 축제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이런 맥락에서 새 춘향 영정은 여성의 주체성이라는 현대적 가치를 춘향이라는 기호에 잘 녹여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존의 춘향 이미지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새 영정을 낯설게 느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미지에 대한 기호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며, 특히 ‘춘향전’같이 집단 기억이 관련되어 있는 경우 더욱 그렇다. 1865년, 여성의 나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가 공개되었을 때 남성 관객들이 분노하여 지팡이와 우산으로 그림을 훼손하려 했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가 ‘전통’, ‘고전’이라고 여기는 것은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거쳐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가치들이다. 새 영정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비교 대상으로 내세우는 기존의 춘향 영정들 또한 각각 1931년, 1939년에 봉안된 것으로, 여성에 대한 당대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물일 뿐이다. 호사가들에게 이번 논란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일 뿐이겠지만, 춘향이라는 대중적 아이콘(icon)의 이미지가 어떻게 표현되느냐의 문제는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낯선 것’과 ‘잘못된 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2023-06-19

여성은 약하지 않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세이렌(Sire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다. 상반신은 인간 여성,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해 잡아먹는다는 이 괴물은 여성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혐오했던 남성 중심 문화의 상상물이다. 오늘날 ‘위험을 경고하는 장치 또는 소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사이렌(siren)이라는 단어 또한 여기서 유래했다.넷플릭스 서바이벌 예능 ‘사이렌 : 불의 섬’은 이 괴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따왔다. 이 프로그램은 경찰, 소방관, 군인, 경호원, 스턴트맨, 운동선수 등 높은 신체능력을 요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외딴 섬에 모여 펼치는 생존 경쟁을 다룬다. 각 직업군들은 네 명씩 팀을 이뤄 다른 팀의 기지를 점령해야 한다.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전략전술과 연합과 적대의 구도가 무척 흥미로우며, 일일 소비 칼로리를 화폐로 사용하여 필요한 아이템을 구입한다는 설정도 참신했다. 무엇보다도 참가자들이 보여주는 뛰어난 신체능력과 정신력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그리스 신화의 세이렌과는 달리 ‘사이렌’의 참가자들은 유혹할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스스로의 성취를 위해 생존하고 경쟁한다. 이 프로그램은 세이렌이 갖는 ‘위험한 여성’의 이미지를 살리면서도, 남성에게 숭배 받을 이유도 필요도 없는 여성들 사이의 대결과 우정이라는 취지를 잘 부각시켰다.참가자들이 고통을 무릅쓰며 승리를 갈구하는 모습에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무한걸스’, ‘언니들의 슬램덩크’처럼 여성이 활약하는 예능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이처럼 ‘강인한 여성의 몸’, 그리고 ‘여성들 사이의 신체적 대결’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은 없었다. 기존 여성 예능이 여성 멤버들의 화합을 강조했다면, ‘사이렌’은 화합과 경쟁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보여준다. 팀원 간의 협력과 단합이 매력의 한 축이라면, 다른 팀을 상대할 때 드러나는 경쟁의식과 승부욕은 또 다른 측면의 매력이다. 승리에 대한 참가자들의 집념은 ‘남성 못지 않다’라는 표현이 실례가 될 정도로 강렬하다.연출자인 이은경PD는 ‘우정’, ‘무력’, ‘승리’라는 스포츠 만화의 매력을 여성이 활약하는 프로그램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기획의도를 밝힌 바 있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경기가 끝나면 친구가 된다’는 스포츠 만화의 가치관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대학 진학, 취업과 창업, 경제적 우월감 획득을 위해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우리의 삶은 경기가 끝나지 않는 스포츠 만화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상대와 우정을 쌓을 여유가 필요하다. 후회 없이 경쟁하고 뒤끝 없이 서로를 인정한 ‘사이렌’의 참가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여성은 약하지 않다. 진짜 약한 것은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요구하고, 거기 기대지 않으면 존속되지 못하는 사회구조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세이렌으로 낙인찍으며 그들의 가능성과 능력을 억압해 왔는가. ‘사이렌’이 보여준 강하고 멋진 여성들의 모습을 스크린 밖, 일상 세계에서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23-06-12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마블의 대표적 프랜차이즈 영화다. 지금까지 총 세 편이 만들어진 이 시리즈는 기발하면서도 삐딱한 상상력으로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의 문법을 해체해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영화의 주요 캐릭터들은 사명감에 불타는 전형적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의 부랑자에 가까운 그들은 각각 어두운 과거와 상처를 지녔으며, 냉소적이거나 유머러스한 태도로 슬픔을 감추고 있다. 슈퍼맨처럼 완벽한 초인이 아닌 이들도 팀으로써 힘을 합치면 우주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1편과 2편이 신적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태어난 스타로드의 이야기를 통해 혈연의 폭력성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유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얼마 전 개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볼륨 3’는 공감의 대상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확장한다. 3편의 주인공은 ‘말하는 라쿤’ 로켓이다. 완벽한 생물을 창조하기 원하는 생명공학자 ‘하이 에볼루셔너리’는 동물의 신체를 개조해 지성을 부여하는 실험을 지속하였고, 로켓은 그의 실험 대상이었다. 그 개조 과정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끔찍하게 묘사되며, 부작용으로 인해 미쳐 버리거나 죽는 동물들도 많다.영화에는 인간에 의해 희생당한 또 다른 동물이 나온다. 우주로 보내졌던 개 ‘라이카’를 모델로 한 ‘초능력 개’ 코스모이다. 미소 간의 우주 경쟁이 치열했던 냉전 시대, 소련은 유인우주선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인간 대신 개나 원숭이 같은 동물들을 태운 우주선을 발사했다. 발사와 대기권 이탈, 우주공간 진입의 과정이 동물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동물들은 모두 발사과정 또는 우주 진입 이후에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안전하게 데려올 계획 자체가 없었다. 우주 왕복선이나 달 착륙, 우주정거장 같은 우주 개발의 성과들은 이 동물들의 죽음 위에서 빛나고 있다.지금 우리가 누리는 과학문명은 수많은 다른 종들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투구게의 피가 꼭 필요한데, 피를 뽑힌 뒤 방생된 투구게는 약해진 탓에 상당수가 죽게 된다고 한다. 또한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백신 수요가 급증하며 투구게를 남획한 탓에 개체수가 급감하여 멸종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그 밖에도 의약품 개발이나 다른 과학적 목적을 위해 희생된 실험동물의 수는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다.중장기적으로는 동물실험 없이도 인체에 안전한 의약품을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에 앞서, 과학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희생된 동물들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들에게 죄스런 마음을 갖도록 하자. 인간에게는 다른 종들을 이용하고 죽일 권리가 없다. 우리의 필요와 이득을 위해서 그렇게 합리화할 뿐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수탈자에 가깝다. 이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2023-05-22

재테크와 인문학의 라이벌 관계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필자는 유튜브를 즐겨 본다. 구독한 채널에 새로 올라온 영상을 시청하기도 하지만, 알고리즘의 추천에 몸과 마음을 맡길 때가 많다. 최근에는 알고리즘이 재테크 관련 영상들을 자주 추천한다. 아마도 내 검색어와 사이트 방문 기록 등을 종합하여 이 40대 남성은 재테크 관련 영상을 좋아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재테크에 투자할 자금도 없지만, 소위 경제 유튜버들의 현란한 말솜씨에 매료되어 한참을 보게 된다. 저축, 보험, 주식, 부동산, 펀드, 코인(가상화폐) 등 콘텐츠의 종류도 엄청나게 다양하다.필자야 가벼운 마음으로 시청하지만, 실제로 재테크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이런 영상들을 보며 공부에 열중할 것이다. 피땀 흘려 모은 종자돈을 투자해야 하니 얼마나 불안하고 애가 탈까. 그 절박함은 대학 입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경제 유튜버들은 이런 사람들의 불안함을 이용해 돈을 번다. 서점에도 재테크 서적이 수두룩하다. 재테크로 돈을 버는 것보다 재테크 콘텐츠로 돈을 버는 것이 훨씬 빠를 것 같다. 퇴근 후 녹초가 된 몸으로 재테크 공부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노동가치가 추락한 사회의 자화상이다.서울 동작도서관은 5월부터 주식, 부동산, 가상화폐 등 ‘시세차익형 재테크’ 서적의 구입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구입 희망도서 중 재테크 관련 서적의 비중이 너무 높아서 장서불균형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은 유행을 타서 한두 번 대출된 뒤에는 서가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경우가 많고, 예산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재테크 관련 희망도서를 모두 구입하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등 다른 분야의 책들은 구입할 수 없기도 하다. 특히 공공 도서관에서 이러한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도서관은 단지 책을 모아놓은 공간이 아니라, 정보의 축적을 통해 독서, 교육, 조사, 연구 활동에 기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동작도서관의 혁신적 시도에 박수를 보내며, 전국의 도서관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인문학이 위기라고 한다. 그 원인으로 종종 지목되는 것이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영상 플랫폼이다. 사람들이 책 대신 영상을 즐겨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은 영화의 라이벌은 다른 영화가 아니라 등산과 예배당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일요일에 등산을 가고 교회에 나가면 영화관을 찾지 않게 되지만, 다른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들면 영화계 전체의 파이가 커진다는 것이다. 탁월한 통찰이다. 사람들이 문화와 여가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면 그 효과는 문화계 전반에 미치게 된다.반면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어떤가? 재테크를 공부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사회. 노동의 가치, 근로소득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사회. 건물주가 ‘갓물주(GOD+물주)’가 되고, 불로소득이 찬양받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이 문학책을 읽고 인문학을 공부하길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문학의 라이벌은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아니다. 재테크를 강요하는 사회가 인문학의 적이다.

2023-05-15

동물 없는 동물원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어린이날을 맞아 동물원 나들이를 다녀온 가족이 적지 않을 것이다. 코끼리, 기린, 하마, 사자, 얼룩말 등 책에서만 보던 동물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동물원은 가족 나들이의 단골 코스다. 어린 시절의 필자 또한 동물원에서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동물원에 가지 않는다. 철이 들어서, 동심을 잃어서가 아니다. 동물원이라는 공간에서 동물들이 행복하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동물원 우리 안에서 뱅글뱅글 맴도는 동물을 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이상행동의 원인은 너무 좁거나 관람객들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공간 때문에 발생하는 극도의 스트레스다. 만약 당신이 기후도 식생도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납치되어 우리에 갇힌다면? 더구나 낯선 이들이 갇혀 있는 당신을 바라보고 가리키며 웃고 떠든다면? 우리는 이를 ‘폭력’이라고 부를 것이다.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식민지에서 포획한 ‘이국적인’ 동물들을 본국으로 보내 전시한 것이 동물원의 시초다. 희귀종의 보존이나 생태 학습 등의 기능은 한참 뒤에나 덧붙여진 것이고, 그나마도 최우선 목표는 아니다. 동물들을 본연의 서식 환경에서 강제적으로 이탈시켜 관람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동물원의 본질이다. 초기의 동물원에서는 ‘인간 전시’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서구인들의 눈에 신기하게 보이는 원시 부족민을 동물들과 함께 전시한 것이다. 이처럼 동물원이라는 제도는 시초부터 제국주의적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지난 3월, 서울 광진구의 동물원을 탈출한 얼룩말 ‘세로’가 도심지와 주택가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다수의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바나에 있어야 할 얼룩말이 대도시 한복판을 활보하는 이색적인 이미지를 흥미롭게 소비했다. 문제는 동물원과 인간의 도시 모두가 세로에게는 편안하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이다. 닭발집과 중화요리점 앞을 지나가는 세로의 모습이 이질적이라면,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세로 또한 자연스럽지 않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이러한 동물원의 폭력적 속성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청주동물원에는 코끼리 같이 관람객에게 인기 있는 외래동물이 거의 없다.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는 동물은 사육하지 않는다는 방침 때문이다. 외래동물이 차지하던 넓은 공간에서는 늑대, 수달, 오소리 같은 고유종들이 사육된다. 고유종의 종 보존과 번식, 생태 연구도 이루어진다. 다쳐서 구조된 동물들을 치료하고 돌본 뒤 야생으로 돌려보내기도 한다. 전시는 청주동물원의 수많은 기능 중 하나일 뿐이다. 가장 이상적인 동물원은 관람객들에게 동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 동물원일 것이다.에버랜드 동물원의 아기판다 ‘푸바오’의 귀여운 모습이 화제다. 필자 또한 온라인으로 푸바오의 영상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여러 번 지었다. 하지만 푸바오를 직접 보기 위해 동물원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1년 뒤면 중국으로 돌아갈 푸바오가 또 다른 동물원이 아닌 야생의 대나무숲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푸바오가 그곳에서 잘 지낸다는 소식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2023-05-08

AI는 글쓰기 교사가 될 수 있을까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최근 챗GPT(ChatGPT)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가 출시되면서 흥미로운 사용 경험들이 공유되고 있다. 길고 복잡한 내용도 기가 막히게 요약해준다거나 매우 편리한 검색엔진처럼 활용했다는 식의 짧은 감상부터 그럴듯한 소설을 써냈다는 후기, 율격을 갖춘 한시(漢詩)를 짓더라는 후기까지. 작업의 종류와 난이도에 따라 사용 경험도 천차만별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어졌던 일들을 인공지능이 해내고 있다는 놀라움이다.사실 이러한 놀라움은 알파고-이세돌 대국이 불러일으켰던 충격의 연장선상에 있다. 2016년, 구글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세계 최정상급 기사인 이세돌 9단과 총 5판을 대결하여 4번 승리하였다. ‘바둑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길 수 없는 종목’이라는 전제가 깨진 것이다. 이제 바둑과 같이 복잡한 사고와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영역에서도 인공지능이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교육 현장에서는 챗GPT와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 대중화에 대한 우려가 크다. 글쓰기 과제물의 경우 학생이 직접 쓴 것인지, 아니면 대화형 인공지능을 이용해 생성한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몇몇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과제물 작성에 챗GPT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윤리서약을 받기도 한다. 만약 대화형 인공지능을 이용해 생성한 응모작이 문학 공모전에서 입상한다면? 고도로 발달된 인공지능이 쓴 소설과 사람이 쓴 소설을 완벽하게 구별하는 것이 가능할까?물론 아직까지 대화형 인공지능에는 허점이 많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학습과정 자체가 사회문화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학습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주제에 대해 질문할 경우 인공지능은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마치 ‘답변 강박’에 걸린 사람처럼 보유한 데이터를 조합해서 거짓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글을 만든 정조대왕의 업적에 대해 말해줘”라고 명령하면 챗GPT는 “한글을 만든 정조대왕은 조선시대 22대 군주입니다. 그는 국가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한글이라는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라고 답한다.반면 대화형 인공지능이 새롭게 발명된 유용한 도구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긴 글을 요약하는 것처럼 비교적 단순한 작업은 대화형 인공지능의 주특기이다. 나아가 어떤 결과물을 얻기 위해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던지는 과정 자체가 사유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대화형 인공지능을 이용한 모든 글쓰기는 ‘메타적 글쓰기(meta writing·글쓰기 자체에 대한 글쓰기)’이자 비평이라고 볼 수 있다.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해당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명확한 언어로 제시하는 과정, 완성된 결과물을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활용하기만 한다면 대화형 인공지능은 ‘피노키오’의 말하는 귀뚜라미처럼 우리의 ‘외장형 양심’이자 충실한 조언자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2023-05-01

‘에어 조단’의 추억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6학년이 되자 농구화를 신고 등교하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스포츠는 단연 농구였다. ‘슬램덩크’와 ‘마지막 승부’, 그리고 기아자동차, 연세대, 고려대 등이 활약하던 농구대잔치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NBA(북미 프로농구 리그)의 인기 때문이었다.학교 앞 문방구에 가면 NBA 스티커와 수집책을 팔았다. 밀봉된 팩에 NBA 선수 스티커가 무작위로 들어 있고, 그것을 수집책에 붙여서 모을 수 있었다. 그 조잡한 인쇄 품질로 미루어 볼 때 정식 발매된 것이 아니라 이문에 밝은 누군가가 해적판으로 만들어 유통시켰던 것 같다. 수집책에는 선수 이름과 빈 칸이 있어서 모든 스티커를 모으면 이동식 농구대를 받을 수 있었다. 농구대를 놓을 만큼 넓은 마당을 가진 아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 스티커 모으기에 열광했다. 샤킬 오닐, 찰스 바클리, 하킴 올라주원처럼 유명한 선수들의 스티커는 희귀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것은 마이클 조던이었다. 마이클 조던 단 한 명을 채우지 못해 매일같이 문방구를 들락거리며 용돈을 탕진하는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고,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중학생이 된 기념으로 외할머니가 ‘에어 조단’ 농구화를 사 주셨다. 그때는 ‘조던’이 아니라 ‘조단’이라고 불렀다.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아티스’ 운동화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나이키 농구화는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그렇게 재미있던 미니카와 팽이치기가 점차 시들해지고, 빈 농구대를 찾아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이 공원에서 저 공원으로 방황하는 날이 늘어났다. 물론 ‘에어 조단’이 마이클 조던의 농구 실력까지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라서 내 슛은 림을 빗나가기 일쑤였다.최근 개봉한 영화 ‘에어’는 나이키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농구화인 ‘에어 조던’ 시리즈의 탄생과정을 다룬다. 1984년, 업계 최하위였던 나이키는 브랜드를 대표할 새 모델을 찾는 과정에서 NBA 루키였던 마이클 조던을 주목한다. 예산 부족으로 경쟁 업체들에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나이키의 스카우터는 조던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단 한 명의 선수를 위한 농구화 라인업을 제안해 계약을 성사시킨다.이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1980년대 미국발 대중문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당대의 다채로운 풍경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하나의 상품에 불과한 농구화에 스토리를 부여하여 레거시(legacy·유산)로 만들어 내는 미국 문화의 힘이 경이롭기도 하다. 스카우터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 분)를 중심으로 한 ‘에어 조던’ 팀의 활약상도 흥미롭다. 영화가 재현하는 나이키의 개방적인 기업 문화는 모든 직장인들의 꿈일 것이다.무엇보다도 나에게 있어 이 영화는 ‘에어 조단’을 신고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기억을 소환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나이키 농구화처럼 현대적인 것들이 신화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독자 여러분의 ‘현대의 신화’는 어떤 것들인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2023-04-24

황리단길 유감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포항과 경주는 지척이다. 경주에 가면 주로 황리단길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황리단길의 경관은 1960, 70년대에 지어진 구축을 리모델링한 것이 주를 이루지만 일본식 이자까야(주점)나 일본식 라면집, 퓨전 일식집 등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실제로 온라인에서 여행 후기를 찾아보면 ‘일본풍 가게가 많다’는 감상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가게들의 맛과 서비스에 만족했다는 반응이 많지만, 기대했던 풍경이 아니었다며 실망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른바 ‘황리단길 유감’이다.황리단길이 소위 ‘왜색’에 물들었다고 단순하게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황리단길에는 일식 외에도 맛있는 식당과 카페, 재미있는 상점들이 많이 있다. 특히 십 원짜리 동전에 불국사 다보탑 문양이 있다는 점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십원빵’은 매우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진짜 문제는 ‘황리단길 유감’에 내재된 지방에 대한 대상화와 고정관념이다. 서울(수도권)에서 이따금씩 여행 삼아 지방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지방이 그들이 생각하는 ‘지방다움’을 유지하기 바란다. 경주는 신라 천년고도, 전주는 한옥마을, 부산은 자갈치 시장의 분위기가 나야만 한다. 지자체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고자 ‘지방다움’을 강화하는 사업들을 진행한다. 성공적인 사례도 있지만, 지나치다 싶은 경우도 많다. 1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인천의 ‘새우 타워’가 대표적 사례다.이러한 기대와 부응의 프로세스는 기존 거주민들을 소외시키기 쉽다. 때로는 주거지역의 관광지화로 기존 거주민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워지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이 일어나기도 한다. 황리단길이 황리단길이 되기 이전,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황리단길’ 사진들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낙후된 주거지역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본래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지금의 황리단길은 일종의 테마파크가 되었다. 방문자들은 경주 주민들의 일상과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을 거닐며 ‘맛집’과 ‘인스타 핫플’을 즐긴다. 사진만 잘 나온다면 일식이든 한식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지금 황리단길에 투입된 자본은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물론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경주 여행’들이 축적되었을 때, 어떤 헤리티지(문화적 유산)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이다. 냉정히 말해 SNS에 올릴 사진이 잘 나오는 식당이나 카페를 꼭 황리단길에서 찾아야 할 이유는 없다. 황리단길보다 더 ‘핫한’ 또는 ‘힙(hip)한’ 거리가 나타나 입소문을 타게 되면 지금의 인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릴지도 모른다. 장소의 헤리티지는 기존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과정이 누적되어 만들어진다. ‘경주 황리단길’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경험은 경주 주민들의 삶, 경주의 다른 장소들과 어떻게 윈-윈(win-win)할 수 있을 것인가? ‘왜색 논란’을 넘어 함께 고민해봤으면 한다.

2023-04-17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보는 진정한 위로의 방법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2011년 3월 9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은 2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실종자, 47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재해 복구 사업을 통해 도로나 건물 같은 인프라는 상당 부분 복구되었지만, 이재민들의 마음까지 치유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잃은 것은 가족, 연인, 친구, 반려동물, 마을, 학교, 고향처럼 ‘사망자·실종자 수’나 ‘재산피해액’이라는 숫자로 요약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따라서 ‘후쿠시마산 농산물을 먹읍시다’와 같이 경제적 손해를 벌충해주는 방식은 충분하지 않다. 재난 이전의 삶은 어떤 경제적 보상으로도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재난 피해자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를 기반으로 위로를 건네는 일이다. ‘지나간 일은 빨리 잊고 새출발하라’는 식의 조언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들이 이 당연한 사실을 몰라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들(피해자 자신도 포함한)을 애도할 충분한 시간, 그리고 다정하면서도 지나치지 않은 관심이 필요하다. 이는 공동체 전체의 몫일 수밖에 없다. 재난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은 이웃이자 동료 시민이므로.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러한 점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창작자이다. 전작인 ‘너의 이름을’에서 그는 재난으로 인한 상실과 회복의 문제를 다뤘다. 이 주제는 최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도 반복된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엄마를 잃은 여고생 스즈메는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거대 지렁이 괴물)’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규슈의 미야자키현에서 도호쿠의 이와테현까지 일본 열도를 종단하는 이 여정에서 스즈메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는데, 이는 재난 피해자인 스즈메를 사회가 포용하고 위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스즈메는 비로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재난 이후’가 아닌 ‘미래’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조력자들이 민박집 딸, 스낵바 마담, 대학생처럼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 또한 감동을 더한다. 재난 피해자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평범한 시민들의 공감과 선의, 연대이기 때문이다.스즈메는 또 다른 재난을 막기 위해 싸우는 히어로이기도 하다. 거대한 괴물에 맞서는 스즈메의 용기는 그녀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재난을 겪으며 죽음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갔던 경험에서 나온다. 즉, 이 영화는 스즈메를 단순히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스즈메는 상실을 애도하고 ‘재난 이후’의 삶을 일상으로 바꾸기 위해 용감하게 살아가는 피해자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영화라는 감독의 말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지난 십여 년간 우리 사회도 세월호 사건이나 이태원 참사와 같은 재난들을 겪어 왔다. 포항에서는 몇 년 전 지진으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작년에는 폭우로 인해 일곱 명의 귀중한 생명을 잃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상실들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위로해 왔는가. 피해자에 대한 동정과 금전적 보상으로 충분하다고 여겨 왔던 것은 아닌가.

2023-04-10

‘펀 마케팅’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편의점에 자주 들르는 사람이라면 음료 진열대에서 밀가루 포대나 구두약 디자인의 캔맥주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가 협업하는 것을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이라고 한다. 유명 연예인이 직접 디자인한 의류, ‘포켓몬 빵’처럼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식품과 조합한 상품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구두약과 맥주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조합하는 것이 유행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상품에 의외성을 부여함으로써 기업은 시장의 관심을 끌고, 소비자는 이를 소비하며 즐거움을 얻는다.이처럼 대중의 재미와 관심을 공략하는 마케팅 기법을 ‘펀 마케팅(Fun Marketing)’이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재미를 구매의 기준으로 삼는 소비자를 가리키는 ‘펀슈머(fun+consumer)’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어떤 상품이 일단 펀슈머들의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하면 SNS를 통해 그 상품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확산된다. 펀슈머는 단지 재미를 위해 상품의 이미지를 공유할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해당 상품에 대한 호감도 함께 공유되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마케팅 효과를 거두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때 콜라보레이션의 대상이 되는 브랜드 간의 거리가 멀수록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유리할 수 있다. 구두약 디자인의 흑맥주라니, 어떤 맛일지 궁금하지 않은가.그러나 이질적인 브랜드를 조합하는 과정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 유명 빵집에서 인기 메뉴인 ‘튀김 소보로’ 모양 비누를 출시했다가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음식으로 착각하고 먹을 위험이 있다는 항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콜라보레이션 상품을 기획할 때 문화적 리터러시(literacy·이해력) 격차에 대한 배려가 필요함을 잘 보여준다.몇 년 전 시멘트 제조업체가 출시한 ‘○○표 시멘트 백팩’은 시멘트 포대의 디자인과 질감을 실감나게 구현하여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고, 금세 품절되어 온라인에서 정가의 두 배가 넘는 금액으로 거래되기도 하였다. 업체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건설현장 작업자 차림으로 ‘시멘트 백팩’을 매고 있는 이미지를 광고로 내보내고, 이 상품에 ‘내 삶의 무게’라는 이름을 붙였다.이 상품은 ‘펀 마케팅’을 통해 성공적으로 시장에 받아들여졌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시멘트 백팩’은 동료 시민과 노동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지금도 소규모 건설 현장에서는 개당 40kg에 달하는 시멘트 포대를 작업자들이 몇 개씩 등에 지고 나르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이는 대단히 고된 노동이다. 우리가 이용하는 건물들, 시설들 모두 이러한 노동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노동에 대한 존중과 고마움을 잃어간다는 데에 있다. ‘시멘트 백팩’이라는 상품과 시멘트를 ‘곰방치는(건축자재 등을 나르는)’ 건설노동자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가. 관심경제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상품화해도 괜찮은가?

2023-04-03

불법만 아니면 다 괜찮은가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지난 삼일절, 한 아파트 베란다에 일장기가 내걸렸다. 이를 본 주민들은 해당 가구를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했고, 세대주 부부는 ‘일장기 거는 게 불법이냐’라고 응대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토착왜구’라는 신조어로 대표되는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식민주의’의 문제로 보는 관점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많은 영역들에 ‘법’ 외에는 아무런 판단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한다.‘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법언(法諺)이 있다. 인간 사회에는 도덕, 관습, 윤리 등과 같이 법보다 더 넓은 차원의 규범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어떤 행위의 위법성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다 용인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국가나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법이 강제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의 유지와 구성원의 존엄을 위해 규범을 만들어 낸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도로 보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다.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이나 강제 징용 피해자들과 같이 일본의 식민 지배로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존재하고 식민지 경험이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한, 일본이 식민 지배의 책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와 보상을 실현하지 않는 한 삼일절에 일장기를 내거는 행위는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법을 어긴 것이 아니니 처벌할 수는 없지만, 도덕적 비난까지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김수영 시인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을 비판하기 위해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썼다. ‘김일성 만세’와 같은 극단적 의견도 표현할 수 있어야 진정한 언론자유가 성립된다는 뜻이다. 표현의 자유 역시 법으로 강제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성숙한 사회라면 ‘김일성 만세’를 법으로 처벌하는 대신, 공론장에서의 논쟁과 합의, 그리고 교육을 통해 독재자를 찬양하는 행위를 사회적 금기로 만들어 낼 것이다. 금기를 위반하는 자는 시민적 상호부조 시스템에서 추방함으로써 응징하면 된다.독일의 옛 동독 지역에 오래 거주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 지역에서는 네오나치 집회가 종종 일어나는데, 파시즘과 신고립주의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그 몇 배로 모여들어 네오나치 시위대를 감싸고 구호를 외쳐 그들의 모습과 메시지가 외부로 전달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식과 양심, 역사의식을 갖춘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사회의 존재가 필수적이다.‘불법이냐 합법이냐’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린 사회를 상상해 보자. 그런 사회를 반길 사람은 재력과 권력으로 법의 허점을 파고들 줄 아는 자밖에 없을 것이다. 양심과 상식이라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2023-03-20

‘더 글로리’와 학교폭력의 계급화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지난 3월 10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2부가 공개되었다. 주로 로맨스물의 주연을 맡아 왔던 송혜교의 파격적 이미지 변신과 개성 넘치는 악역·조연들의 열연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한번 시청을 시작하면 끝을 보기 전에는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중독성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복수를 테마로 삼는 이야기를 복수극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복수극은 멜빌의 소설 ‘백경(모비 딕)’일 것이다. 작중에서 에이허브 선장은 과거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흰 고래 모비 딕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간다. 결말에서 그의 배는 모비 딕에 의해 박살나고 복수는 결국 실패로 끝난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복수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그런데 요즘의 복수극은 마치 ‘사이다’처럼 시원하고 개운한 복수의 과정 그 자체를 즐기는 장르가 되었다.‘더 글로리’ 1부가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분)이 복수를 결심하게 된 계기와 조력자들을 만나는 과정을 그렸다면, 2부에서는 본격적인 복수극이 펼쳐지며 악역들이 하나씩 몰락해 간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문동은의 복수가 성공할 것인지를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의 복수가 얼마나 통쾌하게 이뤄질 것인지를 기대하며 스토리를 따라간다. 즉, ‘더 글로리’의 시청자들에게 복수의 실패는 곧 ‘고구마’같은 답답함인 것이다. 왜 그럴까?이 문제는 복수의 대상이 누구(무엇)인지와 관련이 깊다. ‘백경’의 복수 대상인 흰 고래는 자연에 속한 존재다. 자연은 인간의 감정이 통하는 대상이 아니므로 선장의 복수심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반면 ‘더 글로리’에서 복수의 이유가 되는 학교폭력은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구조의 모순으로 발생한다. 작중에서 박연진(임지연 분)은 문동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왜 없는 것들은 인생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즉, 박연진이나 전재준(박성훈 분), 이사라(김히어라 분)처럼 경제력과 문화자본을 모두 갖춘 상류층들에게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는 허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은 문동은이나 윤소희(이소이 분)처럼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들을 괴롭혀도 괜찮다고 믿는다. 설령 들키더라도 돈과 권력의 힘으로 무마할 수 있다고.현실에서도 학교폭력은 힘센 아이가 아니라 계급적 우위에 있는 아이가 저지르는 일이 되었다.실제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학폭 썰(사연)’들을 보면 가정형편이 어려워 옷차림이나 꾸밈새가 남루한 아이들이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아이들은 교실에서부터 자신의 계급을 자각하고, 상위 계급에 굴종하는 법을 학습한다. 어른들의 세계를, 이 사회의 근본 구조를 좀 더 날것의 방식으로 답습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집착하는 가치가 ‘능력주의’인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학교폭력을 단지 개개인의 일탈로 볼 것이 아니라, 부의 편중과 교육의 계급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2023-03-13

‘피지컬 100’이 남긴 것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최고의 피지컬(physical·신체 능력)을 갖춘 몸을 찾는다.’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의 슬로건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했다. 슬로건에 걸맞게 보디빌더, 격투기 선수, 올림픽 메달리스트, 경찰, 전직 군인, 산악구조대원, 댄서 등 소위 ‘몸을 쓰는’ 다양한 분야의 참가자들이 모였고, 완력, 지구력, 순발력 등의 신체 능력을 테스트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모든 과제는 성별에 상관없이 동등한 조건으로 진행됐으며, 남성과 여성이 직접적으로 맞대결하는 과제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한국 뿐 아니라 해외 시청자들의 눈길마저 사로잡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이 ‘기계적 공정성’일 것이다.참가자들의 신체 능력을 겨루는 ‘스포츠 버라이어티’는 그 역사가 제법 오래됐다. 미국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몸싸움을 벌이는 ‘롤러 더비’나 각종 장애물을 ‘닌자’처럼 통과해야 하는 ‘아메리칸 닌자 워리어’같은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서도 ‘열전! 달리는 일요일’이나 ‘출발 드림팀’ 등이 있었다. 스포츠 버라이어티의 미덕은 참가자들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거나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뛰어난 운동 능력과 잘 단련된 육체를 전시하는 것이다. ‘피지컬 100’ 역시 이러한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그런데 ‘피지컬 100’이 기존 스포츠 버라이어티와 차별화되는 점은 참가자들을 성별에 따라 나누지 않고, 남녀 간의 맞대결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기존에도 남녀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프로그램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코스를 빨리 돌파하는 경쟁이었지 맞대결을 펼치는 방식은 아니었다. 첫 번째 과제였던 ‘일대일 데스매치’에서는 남녀 간의 맞대결이 두 차례나 벌어졌고, 여성 보디빌더 춘리는 남성 못지않은 완력과 투지를 보여주며 큰 성원을 이끌어냈다. 경기 도중 상대 남성이 무릎으로 춘리의 가슴 부위를 강하게 누른 것에 대해 다른 여성 참가자들의 항의가 있기는 했지만, 이는 경기 운영 방식에 대한 항의였지 ‘신체적 특성이 다른 남녀를 맞대결시켜도 좋은가?’라는 문제제기는 아니었다.이 장면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실제적 지위가 상승했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 여성들은 제도적 어드밴티지(advantage·유리함) 없이 남성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해도 될 만큼 자신감에 차 있다. 피지컬 100을 보라”라고. 하지만 그런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국가대표 출신 남성 운동선수가 여자친구를 흉기로 폭행해 구속됐다. 이 사건은 여성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물리적·사회문화적 약자임을 잘 보여준다.2단계 과제 ‘모래 나르기’에서 장은실 참가자와 팀원들이 잘 보여주었듯, 반드시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해야만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피지컬 100’이 보여준 남녀 간의 맞대결, 그리고 ‘최고의 피지컬을 갖춘 단 하나의 몸을 찾는다’라는 슬로건은 어디까지나 방송의 재미를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최고의 몸’ 또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2023-03-06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과 관동대지진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지난 2월 6일 새벽 4시 17분 36초, 튀르키예(터키의 새 이름) 남동부의 도시 가지안테프 인근에서 모멘트 규모 7.7의 강진이 일어났다. 이후 수차례의 여진이 이어지다가, 첫 지진 발생으로부터 9시간이 지난 시점에 가지안테프 옆 지방인 카흐라만마라쉬에서 규모 7.5의 강진이 또다시 일어났다. 이 대지진은 튀르키예 남동부 지역 및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 북부 지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집계된 바에 따르면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현지 시간 19일까지 4만6천명에 달한다고 한다.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은 거대한 천재지변이지만, 그 피해의 상당 부분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예방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에르진은 튀르키예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이지만, 이번 대지진으로 단 한 채의 건물도 무너지지 않고,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내진설계 및 시공이 되어 있지 않은 불법 건축물을 강력하게 규제한 시 당국의 방침 덕분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인간의 힘으로 최소화해낸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미담이 이번 대지진을 대표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대지진이 일어난 튀르키예 남동부 지역은 시리아와 인접해 있다. 십 년 이상 이어진 내전에 시달리다 못해 국경을 넘은 전재민들로 인해 인구가 급증했기에 피해가 더 컸던 것이다. 4만6천여 명의 죽음은 대지진이라는 천재(天災)와 전쟁, 토건비리와 같은 인재(人災)가 중첩된 탓이다.올해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1923년 9월 1일 발생)이 일어난 지 백 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 지진을 우리는 ‘조선인 대학살’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일본인들이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해 품고 있던 우월의식과 조선인들을 멸시하면서도 동시에 불온한 존재로 여겼던 감정에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불을 붙였고, 결과적으로 최소 수천 명에서 최대 1만 명 이상의 일본 거주 조선인이 죄 없이 살해당했다.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도 막대했지만, 그 틈을 타 제국주의와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라는 인간의 이념이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촉발했다는 것이 더 끔찍하다.그 후 백 년이 지났다.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아주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으로 세계 각국의 구호대가 급파되었고, 민간 차원에서도 구호물자를 모으는 활동이 활발하다. 구조견 ‘토백이’의 ‘붕대 투혼’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민족, 인종, 종교, 정치적 입장 따위와는 상관없이 피해자를 돕는 마음이다. 튀르키예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형제의 나라’라는 이념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도 대자연의 분노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도와야만 한다.전문가들에 따르면 한반도에서도 규모 7.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는 인간이 설정한 국경을 개의치 않는다. 서로 돕는 마음에도 경계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

2023-02-20

존재하지 않는 MZ세대와 소통하는 법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MZ세대는 없다. 없지만 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겠지만 사실이다.‘MZ세대’라는 용어는 ‘베이비붐 세대’나 ‘386세대’처럼 사회학적으로 규정된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MZ세대는 “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네이버 시사상식사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거의 20년에 달하는 시기를 하나의 세대로 묶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몇 년 전, 청년론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가 ‘MZ-generation(MZ세대)’이라는 항목 자체가 영문 위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언론매체나 공론장에서도 몇 년 전까지는 MZ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MZ세대’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간 책이 처음으로 출간된 것이 2018년 말이다. 그것도 사회과학서적이 아니라 마케팅과 트렌드를 내세운 책이었다. 즉, MZ세대라는 개념은 M과 Z를 결합한 거대한 취향 공동체, 즉 소비 집단에게 상품을 팔기 위해 만들어진 상업적 용어인 셈이다.그렇다고 해서 MZ세대라는 규정 자체가 무의미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은 아니다.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김춘수‘꽃’ 중에서)고 노래했듯, 언어는 강력한 규정력을 갖는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신구세대의 갈등은 더 이상 ‘세대갈등’이라는 용어에 담지 못할 만큼 커지고 있다. 다만, 우리 사회의 게으름과 낡은 관성은 그 모든 갈등의 원인을 자세히 살피고 해결하는 대신, 시끄러운 것들,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MZ세대라는 더 큰 상자에 담아버리고 ‘취급주의’ 표지를 붙인 채 방치해둔 것이다.MZ세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그들을 MZ세대라고 부르는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기성세대가 마음대로 ‘나’를 MZ세대라는 집단적 정체성에 끼워 넣는 것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필자가 포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포항시 주최로 미혼 남녀를 짝지어 주는 데이트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를 받은 적이 있다. 인구유출에 대한 지역사회와 지자체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청년에 대한 이러한 보수적 이해와 접근이 그들로 하여금 지역을 떠나게 하는 원인 중 하나는 아닐까. 지자체가 나서서 데이트 모임을 주최하기 전에 그들이 왜 연애와 결혼을 꺼리는지, 왜 학교를 졸업하면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를 지역사회가 함께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만약 당신이 MZ세대와 소통하기 바라는 기성세대라면 그들에게서 MZ세대라는 타이틀을 떼어 버리고 그냥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하는 연습부터 해 보자. 당신의 직원이, 부하가, 자녀가 무언가에 서툴다면 그것은 MZ세대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 일이 서툰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예의와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관습과 예의가 유통기간을 지나 상해버린 것은 아닐지 고민해 보시길.

2023-02-13

반지하에 사는 형산강 철새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필자의 집에서 십 분 정도만 걸어가면 형산강이 나온다. 한겨울인 요즘, 추위와 귀찮음을 이겨내고 강변으로 산책을 나가 보면 꽤나 다양한 겨울 철새들을 만날 수 있다. 흰뺨검둥오리나 홍머리오리 같은 오리들, V자 편대비행이 일품인 기러기들, 잠수를 잘하는 물닭과 가마우지, 갈색 목도리가 인상적인 논병아리, 각종 갈매기들과 물수리 같은 맹금류까지. 종류도 개체수도 만만치 않다.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천연기념물인 큰고니, 매, 흰꼬리수리도 종종 관찰된다고 들었다.사실 지금의 형산강은 철새들이 머물기에 아주 적합한 공간은 아니다. 강을 따라 조성된 공업단지와 주택지를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직강화공사 및 콘크리트 제방 공사가 이루어져 왔고, 그 결과 하류에는 철새들이 선호하는 모래톱이나 갈대숲, 자연습지가 거의 사라졌다.인간의 주거에 비유하면 주거지로 선호되지 않는 반지하나 옥탑방 같은 공간인 셈이다. 이 열악한 공간을 매년 꾸준히 찾아주는 철새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전해야 할 판이다. 떠서 노니는 물새 한 마리 없는 강 풍경이 얼마나 쓸쓸할지 상상해 보자. 아니, 그 전에 새가 살 수 없는 강은 사람도 이용할 수 없다.이는 하나의 도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면 필연이겠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적 본능이듯이, 범람하는 것은 강의 자연적 본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명화, 산업화를 위해 강에게 그 본성을 억누를 것을 수십 년 동안이나 요구해 왔다. 지난 수십 년간은 그럭저럭 버텨 왔을지 몰라도 기후위기 시대로 접어든 현재, 과거의 방식은 더이상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작년 가을에 일어난 형산강 범람과 같은 사건이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최선의 방법은 콘크리트 제방을 허물고, 인간의 영역을 범람원 뒤로 후퇴시키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는 단기간 내에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인터스텔라’ 같은 SF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우선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따뜻하면서도 편안한 옷차림으로 형산강 수변공간을 찾아가 보자. 그 척박한 공간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들을 관찰하고, 그곳이 얼마나 인간 편의적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도 직접 느껴보자. 유네스코(UNESCO)에서 1978년에 제정된 ‘동물 권리 선언’은 “모든 야생 동물은 땅이건, 하늘이건, 물이건 본연의 자연 환경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생육할 권리를 가진다”(제4조)라고 주창한 바 있다.지금까지는 ‘먹고 살기 바빠서’, ‘더 잘 살기 위해서’ 잊고, 놓치고 살아왔다고 하지만, 소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한국 사회인만큼 철새들까지 배려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도 충분하다고 믿는다. 해마다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들에게 콘크리트로 덮인 반지하 같은 강이 아니라, 모래톱과 갈대숲이 풍성한 대저택 같은 강을 선물하고 싶다.

2023-02-06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성공적인 스토리텔링 조건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슬램덩크’는 ‘드래곤볼’과 함께 1990년대 일본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지만 그 인기는 한국에서도 대단히 뜨거웠다. 우리가 ‘사쿠라기’와 ‘루카’가 아니라 ‘강백호’와 ‘서태웅’을, ‘쇼호쿠’(원작에서 강백호의 소속 학교명)가 아니라 ‘북산’을 기억하고 또 추억한다는 것은 ‘슬램덩크’가 단지 수입된 일본 문화가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의 일부분으로 녹아들었음을 의미한다. 강백호를 비롯한 북산고의 주전 5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는 ‘초심자가 노력을 통해 성장해 나간다’라는 소년만화의 왕도를 따르면서도, ‘모두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라는 스포츠 세계의 냉혹함을 잘 보여주었다. 그 냉혹함은 비단 스포츠 세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독자들이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의 속성과도 닮아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 최강 산왕고를 제압한 북산이 토너먼트의 다음 경기에서 탈락하는 ‘슬램덩크’의 이야기를 가슴 시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현명하게도 연재 종료(1996년) 후 27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단 한 번도 산왕전 이후의 스토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수많은 후속작을 쏟아냈던 ‘드래곤볼’과 비교하면 대단히 인상적인 행보이다. 이러한 인내와 절제가 있었기에 ‘슬램덩크’의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력이라는 영역에 머물렀고, 덕분에 원작의 메시지와 가치를 훼손하지 않은 채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2023년에 재탄생할 수 있었다.‘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산왕전 이후, 혹은 강백호의 재활 성공 이후의 이야기를 섣불리 건드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산왕전의 스토리라인을 송태섭이라는, 주연 5인 중 하나이지만 원작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캐릭터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전략을 취했다. 송태섭이 현대 일본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지역색을 띠는 오키나와 출신이고,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라는 설정을 추가함으로써, ‘열정과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슬램덩크’의 메시지를 수도권 지역(원작의 배경인 가나가와 현은 도쿄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다)과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한정시키지 않고 사회 보편적으로 확장 시킨 것이다.이러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역 스토리텔링, 도시 스토리텔링, 마을 스토리텔링 등 다양한 스토리텔링 사업들이 한동안 유행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토리텔링은 ‘기존에는 없던 것’,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열심히 찾아내어 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제철 도시’ 포항과 같이 강렬한 스토리를 이미 갖고있는 지역이라면 굳이 ‘더하기(+)’ 방식의 스토리텔링 전략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산왕전의 메인 스토리를 건드리지 않고 그 맥락과 배경(context)만을 풍부하게 만들었듯이, ‘제철 도시’라는 스토리를 국가나 기업이 아니라 노동, 여성, 생태, 문화와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 보다 풍부하게 이야기해내면 된다.

2023-01-16

포항을 녹색교통 도시로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전 세계가 기후위기로 신음하는 가운데 2023년 새해가 밝았다. 대규모 공업지대가 주거·상업지역과 인접해 있는 포항의 공간적 특성상 대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과 같은 문제에 대해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강덕 포항시장도 신년사에서 “사람 중심의 친환경 도시”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녹색교통은 에너지 소비량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최소화하는 저탄소 교통체계이다. 보통 녹색교통이라고 하면 지하철이나 경전철 같은 대중교통수단, 그리고 최근 자동차 산업의 트렌드인 전기차를 떠올리기 쉽지만, 녹색교통의 ‘근본’ 격인 교통수단은 바로 자전거다.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나 덴마크의 코펜하겐 같은 유럽의 도시에서는 지금도 자전거가 교통량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덴마크의 경우 ‘자전거 고속도로’ 시스템을 도입하여, 코펜하겐을 중심으로 인근 20개 소도시를 지나는 총 길이 200km 이상의 자전거 전용도로를 구축하였다. 그 결과 지하철로 30분 가까이 걸리는 구간을 자전거로는 11분 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되어 시민들이 실용적인 교통수단으로서 자전거를 애용하고 있다.반면 한국의 자전거 문화는 교통수단보단 레포츠용에 가깝게 발전해 왔다. 연배가 어느 정도 있는 독자라면 ‘쌀집 자전거’를 기억할 것이다. 무거운 쌀 포대를 몇 개씩 올리고도 끄떡 없이 골목길을 내달리던, 투박하지만 튼튼한 쌀집 자전거. 오토바이와 트럭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교통수단으로서의 자전거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서울의 한강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곳을 통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시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강 자전거도로에서 집과 직장이 있는 지역으로 진입하는 길은 자전거로 달리기 위험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산과 언덕이 많은 지형도 자전거 교통이 대중화되는 데에 큰 걸림돌이다.필자가 생활하며 느낀 포항은 녹색교통을 일상화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춘 도시이다. 도시공간의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자전거 이동이 용이하며, 도심을 가로지르는 형산강 자전거도로와 철길숲 자전거도로가 잘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형산강과 철길숲을 잇는 간선도로를 정비하고, 냉천과 칠성천, 포항운하 등 기존 하천과 수로를 따라 자전거도로를 조성하면 거의 모든 지역을 자전거로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녹색교통 시스템이 완비된다. 차도 가장자리를 분리시켜 자전거 전용도로로 만든 서울시의 청계천 자전거도로를 벤치마킹해도 좋겠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전거 도로는 이용하기에 따라 전동 킥보드나 전동 휠 같은 ‘라스트 마일 모빌리티’(대중교통에서 내린 뒤 최종 목적지까지의 교통 공백을 메꿔주는 이동수단)와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녹색교통 인프라 정비의 필요성과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의식 변화의 중요성이다. 도로는 자동차의 전유물이 아니며,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빠르고 편안하게’ 보다 ‘조금 느리지만 저탄소로’ 이동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할 때다.

2023-01-09

과메기와 기후위기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포항에 와서 과메기 맛을 재발견했다. 저장과 유통기술의 발달로 타지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찬바람이 불면 찾아오는 햇과메기의 맛은 포항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별미다. 김이나 돌미역, 곰피 쌈으로 먹는 것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방식은 썰지 않은 ‘짜배기’(배를 갈라 말린 것)를 한 손에 들고 베어먹으며 맥주를 마시는 것이다. 과메기 하면 막걸리와의 궁합을 떠올리기 쉽지만, 꾸덕하게 기름기 오른 제철 과메기는 참치 뱃살에도 밀리지 않는 진한 맛 덕분에 맥주와도 잘 어울린다.과메기는 주로 예전에는 청어, 최근에는 꽁치로 만든다. 그 시대에 가장 많이 잡혀서 저렴한 생선을 사용하는 것이다. 지금은 내륙지방에서도 신선한 활어회를 얼마든지 맛볼 수 있지만, 불과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신선한 생선은 바닷가 사람들이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새우젓이나 북어 정도가 내륙지방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해산물의 전부였던 시대가 고작 백여 년 전이다. 서민들도 육고기 맛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상허 이태준의 소설 ‘사상의 월야’(1941)에는 배고픈 아이들이 북어를 널어 말리는 덕장에서 꼬챙이로 북어 눈깔을 빼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만큼 육고기나 생선 같은 단백질 식품을 접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을 잘 보여준다.‘탄소 발자국’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의 원료 채취, 생산, 수송 및 유통, 사용, 폐기 등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발생량을 이산화탄소 배출량으로 환산해 파악하는 것이다. EPA(미국 환경보호청) 보고서에 따르면 양고기 1kg를 소비하는 것은 39.2kg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며, 이것은 약 145km를 운전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양과 같다고 한다. 양을 기르고 도축하고 운송하는 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과메기의 탄소 발자국은 어떨까? 물론 원재료가 되는 생선을 잡는 과정과 유통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겠지만, 이후부터는 태양과 바람, 그리고 영상과 영하를 오르내리는 기온의 힘으로 만들어진다. 특히 햇과메기를 산지 인근에서 소비한다면 온실가스 발생은 최소화될 것이다. 내륙에서는 소금에 절이거나 바짝 말린 해산물을 먹고, 해안가에서는 활어와 선어를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과메기는 교통과 냉장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귀한 해산물을 내륙지방까지 전하기 위해 고안된 ‘적정 기술’(해당 공동체의 상황에 맞춰 고안된 기술)이었다. 따라서 미식과 괴식 사이에 놓인 지역 특산물이 아니라, 생산, 유통, 소비의 전 과정에 걸쳐 적정 기술의 차원에서 과메기를 재평가해야 한다. 과메기 자체를 신화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지혜와 절제의 미덕을 배우자는 것이다.계절과 지리에 상관없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신선한 해산물과 과일, 채소, 푸짐한 육고기를 먹고 싶다는 소비자본주의적 욕망이 탄소 발자국을 늘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메기를 먹으며 기후위기를 생각해 본다.

2023-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