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Sire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다. 상반신은 인간 여성,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해 잡아먹는다는 이 괴물은 여성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혐오했던 남성 중심 문화의 상상물이다. 오늘날 ‘위험을 경고하는 장치 또는 소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사이렌(siren)이라는 단어 또한 여기서 유래했다.
넷플릭스 서바이벌 예능 ‘사이렌 : 불의 섬’은 이 괴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따왔다. 이 프로그램은 경찰, 소방관, 군인, 경호원, 스턴트맨, 운동선수 등 높은 신체능력을 요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외딴 섬에 모여 펼치는 생존 경쟁을 다룬다. 각 직업군들은 네 명씩 팀을 이뤄 다른 팀의 기지를 점령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전략전술과 연합과 적대의 구도가 무척 흥미로우며, 일일 소비 칼로리를 화폐로 사용하여 필요한 아이템을 구입한다는 설정도 참신했다. 무엇보다도 참가자들이 보여주는 뛰어난 신체능력과 정신력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과는 달리 ‘사이렌’의 참가자들은 유혹할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스스로의 성취를 위해 생존하고 경쟁한다. 이 프로그램은 세이렌이 갖는 ‘위험한 여성’의 이미지를 살리면서도, 남성에게 숭배 받을 이유도 필요도 없는 여성들 사이의 대결과 우정이라는 취지를 잘 부각시켰다.
참가자들이 고통을 무릅쓰며 승리를 갈구하는 모습에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무한걸스’, ‘언니들의 슬램덩크’처럼 여성이 활약하는 예능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이처럼 ‘강인한 여성의 몸’, 그리고 ‘여성들 사이의 신체적 대결’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은 없었다. 기존 여성 예능이 여성 멤버들의 화합을 강조했다면, ‘사이렌’은 화합과 경쟁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보여준다. 팀원 간의 협력과 단합이 매력의 한 축이라면, 다른 팀을 상대할 때 드러나는 경쟁의식과 승부욕은 또 다른 측면의 매력이다. 승리에 대한 참가자들의 집념은 ‘남성 못지 않다’라는 표현이 실례가 될 정도로 강렬하다.
연출자인 이은경PD는 ‘우정’, ‘무력’, ‘승리’라는 스포츠 만화의 매력을 여성이 활약하는 프로그램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기획의도를 밝힌 바 있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경기가 끝나면 친구가 된다’는 스포츠 만화의 가치관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대학 진학, 취업과 창업, 경제적 우월감 획득을 위해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우리의 삶은 경기가 끝나지 않는 스포츠 만화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상대와 우정을 쌓을 여유가 필요하다. 후회 없이 경쟁하고 뒤끝 없이 서로를 인정한 ‘사이렌’의 참가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여성은 약하지 않다. 진짜 약한 것은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요구하고, 거기 기대지 않으면 존속되지 못하는 사회구조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세이렌으로 낙인찍으며 그들의 가능성과 능력을 억압해 왔는가. ‘사이렌’이 보여준 강하고 멋진 여성들의 모습을 스크린 밖, 일상 세계에서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