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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 삭감 유감

등록일 2024-01-23 18:26 게재일 2024-01-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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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2024년도 R&D(연구개발) 예산이 전년도 대비 약 16.6%(5조2천억원) 감액된 것에 과학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공계 연구자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삭감된 연구비 때문에 연구과제 수행이 어렵게 되었다거나, 고용 중인 연구원을 해고하게 되었다는 고충 토로와 성토가 이어진다.

정부출연연구소들은 예산 부족으로 연구원 채용계획을 줄이거나 없애고, 이는 이공계 석·박사들의 고용 불안을 심화시킨다. 대학에서는 원래도 넉넉하지 않았던 대학원생 인건비를 더욱 줄이는 연구실이 많다. 인건비가 줄어들자 생활비를 벌충하기 위해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그만큼 연구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질 것은 당연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일 과학기술인 간담회에 참석해 R&D 예산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겠다고 밝혔다. 5조가 넘는 예산을 일방적으로 줄여 놓고, 반발에 못 이겨 고작 6천억 원을 증액한 뒤에 나온 말이라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인들을 대하는 현 정부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하며 내놓은 핑계는 이른바 ‘이권 카르텔’의 존재다. 이것이 정권의 기조인 ‘노동조합 때리기’, ‘시민단체 때리기’에서 이어진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문제는 정부가 그 이권 카르텔의 정체를 명확하게 짚어내지도 못하면서, 과학기술인들을 ‘예산을 낭비하고 사적으로 전용하는 부패한 집단’으로 치부해 버렸다는 점이다.

어떤 집단이든 규범을 어기고 일탈을 저지르는 사례는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례들이 집단 전체의 도덕적 해이로 발전한 상태인지, 아니면 개별적 처벌로 충분히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후자의 경우를 전자의 경우로 섣불리 규정해 버리면, 정상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대다수 구성원들의 모티베이션을 심각하게 저해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수한 이공계 인재들이 의대로, 또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과학에 대한 열정과 소명 의식을 갖고 연구자의 길을 선택한 이들을 이렇게 모욕해 놓고 미래 먹거리나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은 에너지와 명령만 주어지면 작동하는 로봇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지만, 예산을 결정하는 높은 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설령 R&D 예산을 삭감 이전 수준으로 돌려놓는다 해도, 가장 든든한 ‘파트롱(후원자)’이어야만 하는 국가와 정부에게 배신당한 과학기술인들의 트라우마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첨단 바이오·퀀텀(양자) 등 특정 분야를 ‘3대 미래기술’이라 호명하고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계획 또한 우려스럽다. 해당 분야에만 예산과 지원이 몰리고 다른 분야들은 고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건강한 학술 생태계를 위해서는 학문의 다양성이 필수적이다.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예산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싶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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