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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100’이 남긴 것들

등록일 2023-03-06 19:36 게재일 2023-03-0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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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최고의 피지컬(physical·신체 능력)을 갖춘 몸을 찾는다.’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의 슬로건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했다. 슬로건에 걸맞게 보디빌더, 격투기 선수, 올림픽 메달리스트, 경찰, 전직 군인, 산악구조대원, 댄서 등 소위 ‘몸을 쓰는’ 다양한 분야의 참가자들이 모였고, 완력, 지구력, 순발력 등의 신체 능력을 테스트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모든 과제는 성별에 상관없이 동등한 조건으로 진행됐으며, 남성과 여성이 직접적으로 맞대결하는 과제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한국 뿐 아니라 해외 시청자들의 눈길마저 사로잡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이 ‘기계적 공정성’일 것이다.

참가자들의 신체 능력을 겨루는 ‘스포츠 버라이어티’는 그 역사가 제법 오래됐다. 미국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몸싸움을 벌이는 ‘롤러 더비’나 각종 장애물을 ‘닌자’처럼 통과해야 하는 ‘아메리칸 닌자 워리어’같은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서도 ‘열전! 달리는 일요일’이나 ‘출발 드림팀’ 등이 있었다. 스포츠 버라이어티의 미덕은 참가자들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거나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뛰어난 운동 능력과 잘 단련된 육체를 전시하는 것이다. ‘피지컬 100’ 역시 이러한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

그런데 ‘피지컬 100’이 기존 스포츠 버라이어티와 차별화되는 점은 참가자들을 성별에 따라 나누지 않고, 남녀 간의 맞대결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기존에도 남녀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프로그램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코스를 빨리 돌파하는 경쟁이었지 맞대결을 펼치는 방식은 아니었다. 첫 번째 과제였던 ‘일대일 데스매치’에서는 남녀 간의 맞대결이 두 차례나 벌어졌고, 여성 보디빌더 춘리는 남성 못지않은 완력과 투지를 보여주며 큰 성원을 이끌어냈다. 경기 도중 상대 남성이 무릎으로 춘리의 가슴 부위를 강하게 누른 것에 대해 다른 여성 참가자들의 항의가 있기는 했지만, 이는 경기 운영 방식에 대한 항의였지 ‘신체적 특성이 다른 남녀를 맞대결시켜도 좋은가?’라는 문제제기는 아니었다.

이 장면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실제적 지위가 상승했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 여성들은 제도적 어드밴티지(advantage·유리함) 없이 남성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해도 될 만큼 자신감에 차 있다. 피지컬 100을 보라”라고. 하지만 그런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국가대표 출신 남성 운동선수가 여자친구를 흉기로 폭행해 구속됐다. 이 사건은 여성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물리적·사회문화적 약자임을 잘 보여준다.

2단계 과제 ‘모래 나르기’에서 장은실 참가자와 팀원들이 잘 보여주었듯, 반드시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해야만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피지컬 100’이 보여준 남녀 간의 맞대결, 그리고 ‘최고의 피지컬을 갖춘 단 하나의 몸을 찾는다’라는 슬로건은 어디까지나 방송의 재미를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최고의 몸’ 또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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