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와 경주병원 쪽에서 형산강에 놓인 동대교를 건너면 경주시 성건동이 나온다. 이곳은 한때 경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동네 중 하나였지만, 인근 지역들이 주택지로 개발되며 지금은 과거에 비해 한적한 동네가 되었다. 경주 시민들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중앙시장이 성건동에 위치해 있으며, 동대사거리 일대는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즐겨 찾는 경주의 대학로로 유명하기도 하다.
성건동 서쪽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경주는 포항이나 울산 같은 산업도시와 인접해 있으므로 외곽 지역에 산업단지가 발달했고, 그곳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중국인, 동남아인, 러시아인, 중앙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 지역에 모여 살며 이국적인 풍경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요리를 무척 좋아한다. 서울에 살 때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몽골 음식점이 모여 있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근처의 ‘중앙아시아 거리’를 자주 찾곤 했다. 포항에서 일하게 되면서 중앙아시아 요리를 자주 접하기가 어려워 아쉬웠는데, 경주에 러시아 요리 ‘맛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 전 성건동을 찾아가 보았다.
성건동 일대에는 러시아어와 중국어 간판을 단 식당, 식료품점, 찻집, 휴대폰 판매점 등이 즐비해 마치 외국 여행을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꽤 늦은 저녁때라서 문을 닫은 상점이 많아 거리가 어둑한 느낌도 받았지만, 유모차를 끌고 한가롭게 산책하는 가족을 보니 여느 주택가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미리 검색해둔 식당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중앙아시아식 꼬치구이인 샤슬릭과 볶음국수인 라그만을 주문하려 했는데 묘한 메뉴가 보였다.
‘고려인 국시’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냉국수와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고려인 된장찌개’가 그것이었다. 서빙하는 분은 전형적인 서양인의 모습이었지만, 요리하는 분이 고려인이거나 고려인에게 요리를 배운 듯했다. 샐러드 메뉴에는 특이하게도 매운 잉어회 샐러드도 있었다. 신선한 바닷고기를 구하기 어려웠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잉어를 이용해 회무침을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신라 천 년의 수도 경주로 중앙아시아 요리를 먹으러 갔다가 고려인 음식을 만난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이유로 사람의 이동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문명사적 현상이다. 신라 시대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경주까지 찾아왔고, 그중 몇몇은 꽤 오래 눌러살기도 했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무덤인 괘릉을 지키는 무인석(武人石)의 모델을 아라비아인으로 추정하기도 하니까.
단, 그 이동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의 슬픈 역사가 그랬듯, 이념이나 국가 등에 의해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분단과 이산가족의 비극이 잘 보여주듯 거대한 힘이 개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약해서도 안 될 것이다. 성건동에서 경주 속의 작은 아시아를 느끼며 역사와 개인, 이동과 이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