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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열차를 타고 오가는 것들

등록일 2023-09-04 19:18 게재일 2023-09-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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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지난 9월 1일, 포항과 수서를 오가는 SRT 고속열차가 개통되었다. 이로써 포항역에서 서울 수서역까지 약 2시간 21분 만에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 강남권에 용무가 있는 경북 동해안 지역 주민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으며, 관광객 유치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교통,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역이 서울~수도권과 더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지방 소멸이 가속화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2004년 KTX 경부선이 개통되며 서울~부산 2시간 반 시대가 열린 이후, 많은 환자들이 부산권 병원 대신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을 찾게 되면서 지역 병원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 사례가 있다.

이러한 환자 유출 현상은 단지 재정적 어려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출신 인재들이 지역의료에 종사하는 동기를 약화시키게 되어 지역의료 시스템 전체의 위기를 초래한다. 지금 당장은 지역 병원과 서울권 병원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에 불과해 보일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아주 가벼운 질병이 아니고서는 지역에서 치료가 불가능해 대부분의 환자가 서울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예상된다.

이러한 문제는 지역 인재 유출이라는 측면에서도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지역의 위기와 지방 소멸을 우려하지 않는 지역은 없지만, 그 해결책으로는 고속철도나 공항과 같은 대형 교통인프라의 유치가 여전히 1순위로 내세워진다. 이러한 교통인프라의 확충을 통해 서울~수도권과의 체감적 거리가 가까워지면 지역으로 사람과 자본이 대거 유입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행기와 고속철도는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움직이므로, 지역에서 외부로 유출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부족한 일자리와 경직된 문화로 인해 우수한 인재들이 지역을 이탈하는 속도 또한 가속화될 수 있다.지역성은 중심(서울~수도권)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많은 부분이 형성되는 정체성이다. 지역을 지역답게 만드는 요소가 존재하며, 이것은 중심로부터의 상대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유지되기 어렵다. 필자의 작은할아버지가 1980년대 초 포항에서 일하실 때는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여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포항과 서울 간의 물리적 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상대적·체감적 거리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 교통기술이 더 빠른 속도로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킬수록 지역은 지역다움을 잃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지역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지역을 활성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설적으로 지역사회의 속도를 더더욱 가속화할 필요가 있다. 서울~수도권과 같은 메트로폴리스의 속도를 무비판적으로 지향하라는 뜻은 아니다. 물질문명의 발달 속도에 맞춰 정신문화의 진보도 가속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성차별적 문화,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조직에서의 수직적 위계질서 등을 타파하고, 지역사회와 문화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들이 이런 문제에 염증을 느껴 지역을 떠나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 고속철도의 속도가 지역사회의 타성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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