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 시인불과 2주 전에 쓴 글에서 폭염과 누진제를 원망하며 징징거린 것이 민망하게 바로 이튿날 가을이 왔다. 예전에 다른 매체에 썼던 글에선 벚꽃 구경 가라고 부추겼는데, 다음날 낙뢰를 동반한 폭우가 내려 꽃이 다 떨어진 일도 있다. 아무튼 미치광이 여름이 갔다. 하늘빛과 바람, 소리와 냄새가 완전히 달라졌다. 어느 새벽에는 집 앞에 나갔다가 입에서 나오는 희미한 아지랑이를 보기도 했다. 가을이다.숨을 쉬면 서늘한 공기 끝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느낌이 난다. 뒷맛이 무거운 와인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다. 숨 쉬는 게 맛있어서 온종일 밖을 돌아다닌다. 참 오랜만이다. 집 뒤에 관악산을 두고도 여름 내내 한 번도 가지 않았는데,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오르내린다. 저녁 하늘이 단풍 빛깔로 물드는 걸 보는 기쁨을 만끽 중이다.여름의 빽빽한 초록 사이로 노랗고 발그레한 것들이 얼굴 내민다. 떼쓰다 악에 받쳐 우는 애 울음 같던 매미 소리도 잠잠해지고 풀벌레들의 음악이 감미롭다.가을엔 풍경의 여백만큼이나 마음도 넉넉해진다. 뭘 해도 환희롭다. 봄도 좋지만 봄은 변덕스럽고 까칠한 데가 있다. 그에 비해 가을은 성숙하고 안정적이다. 예측 가능한 계절이고, 다 자라난 어른이다. 어느 강가나 산기슭에서 가을을 마주하면 세상과 시간을 오래 견딘 지혜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 같다.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은 폭염 때문만은 아니다. 숨 막히는 여름이 지겹기도 했지만, 가을과 함께 오는 것들, 가을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서둘러 그리웠다. 10월 미시령에서 한 계절 먼저 당도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단풍 구경하는 건 나의 연례행사다. 미시령 휴게소 통유리창에 기대 앉아 따뜻한 대추차를 마시면 몸속으로 가을이 빨려 들어왔다. 몇 해 전 폐쇄된 휴게소는 이제 아예 철거돼버렸다. 가을의 추억 하나가 그렇게 무너져 내렸지만, 미시령 넘어 속초에 가 가을바다 보며 물곰탕을 먹는 행복은 올해도 여전할 것이다.섬진강에서 50cm 대물 쏘가리를 잡은 게 작년 가을의 일이다. 올해 그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갑오징어, 무늬오징어, 호래기, 갈치 낚시도 가을이 호황이다. 강화도에 가 연탄불에 구운 가을 전어를 먹을 생각에 벌써 입에 침이 고인다. 전어뿐 아니다. 장호원 복숭아는 여름보다 가을 초입에 먹는 것이 더 달콤하다. 꽃게, 주꾸미, 대하 등 서쪽 바다에서 난 해물들도 가을에 살이 달고 단단하다. 먹을거리와 함께 산책과 여행 등 야외활동을 하면 더 좋다. 여름 성수기의 바가지 요금도 없고, 발 디딜 틈 없는 북새통에서도 해방이다. 문화와 독서의 계절답게 공연과 전시도 많이 열리고 출간도 활발하다. `가을 야구`, 프로야구 포스트시즌도 있다. 그야말로 눈, 코, 입을 비롯해 온몸과 정신이 다 즐거운 계절이다.설악산, 미시령, 을왕리, 광화문, 정동길, 삼청동, 담양 소쇄원, 섬진강, 속초 바다, 강화 교동도, 제주 섭지코지, 전어, 대하, 오징어, 꼴뚜기, 쏘가리, 붕어, 갈치, 복숭아, 사과, 대추, 밤, 잊혀진 계절, 시월의 마지막 밤, 내 생일, 옛사랑, 풋사랑, 첫사랑, 짝사랑, 소주, 와인, 막걸리, 촛불, 기도, 시….가을의 다른 이름들이다. 가을과 함께 오는 이것들을 나는 오래 기다렸다.이제 가을에 자리를 내줄 법도 한데, 폭염보다 뜨겁고 짜증나고 괴로운 여름의 이름들이 아직도 우리를 열 오르게 만든다. 똥파리, 초파리, 모기, 하루살이, 한전, 누진세, 우병우, 롯데, 코리아나호텔, 사드, 송희영, 유람선, 대우조선, 한선교, 멱살, 한진해운…. 참 질기기도 하다. 펄펄 끓던 막강 더위도 때가 되니 알아서 물러나는데, 도무지 물러날 줄 모르는 저 막장 이름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뉴스를 틀어놓고 있으면 창 밖에는 풀벌레 화음 아름다운데, 티브이 속은 여전히 매미소리 요란하다.
2016-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