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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이병철 시인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 이국종 교수는`국민 의사`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여섯 발의 총탄을 맞은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일로 유명해졌다. 그의 이야기는 `골든타임`이라는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웅적 면모가 담긴 여러 일화들을 들은 바 있지만 그를 밀착 취재한 다큐멘터리는 볼 기회가 없었는데, 지난주에 두 편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는 시 창작 수업에서 대학생들에게 틀어주었다. 식사 초대를 받은 지인의 집에서도 보여주었다.중증외상이란 응급실 처치 범위를 넘어서는 심각한 외상을 뜻한다. 대부분 교통사고, 산업재해, 낙상, 자해 등으로 발생된다. 빠른 치료를 받지 못하면 환자는 장기 손상과 과다 출혈, 쇼크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초기 대응 시간이 골든타임이다. 이국종 교수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헬기에 오르고, 때로는 줄을 타고 공중에서 내리기도 한다. 지금껏 그를 거쳐 간 중증외상환자만 해도 2천명이 넘는다. 삶과 죽음 사이에 간신히 걸친 채 한 호흡으로 삶을, 한 침묵으로 죽음을 부르는 응급환자들을 매일 돌봐온 것이다.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환자 보호자에게 건네는 한마디 말이다. 이국종 교수는 응급수술을 앞두고 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피투성이 주검이나 다름없는 자식을 보며 혼절 직전인 부모를 향해 `온몸이 다 으스러졌다. 너무 많이 다쳤다. 그래도 제가 최선을 다하겠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약속한다. 그리고 정말 최선을 다 한다. 그가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지는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내 글은 그 처절함의 한 조각도 옮길 수 없다.`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본다. 가슴이 무겁게 주저앉고 온몸이 떨린다.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시간에게, 너무 많은 스스로에게 얼마나 자주 최선을 약속했는지 모른다. 일주일 다이어트 운동하면서도, 낚시 가서 물고기 잡으면서도, 양은냄비에 라면 하나 끓이면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떠들었다. 글 쓰는 데, 공부하는 데, 하루 먹고 사는 데 한 번도 최선을 다한 적 없으면서 그만큼이 최선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타인을 속이고, 삶을 속였다. 부끄럽다. 그래서 입을 닫기로 한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정말 그럴 수 있을 때에만 하는 것이다. 모든 능력과 경험, 육체, 정신, 절실함을 다 쏟아 부을 수 있을 때에만 하는 것이다.`다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것이 끝나거나 남아 있지 아니하다`이다. 수술한 환자가 결국 사망하자 이국종 교수는 유가족에게 `죄송합니다` 하며 고개를 숙인다. 그게 전부다.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지 않는다. 이미 다한 최선을 다시 끌어다 쓰지 않는다. 나는 `죄송하다`가 모든 걸 쏟아 부어 죽을힘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겨우 하는 말이란 걸 또 알았다. 나에겐 그저 잠깐의 부담이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수없이 남발해온 말일 뿐이다. `최선을 다하다`와 `죄송하다` 사이에서 내 삶은 자주 교활했다. 비닐풍선처럼 가짜 약속과 거짓 사과로 부풀기만 했다.나처럼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과 `죄송하다`는 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들이다. 이국종 교수와 팀원들의 헌신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턱없이 부족했던 중증외상치료기관이 조금씩 확대되는 가운데, 지난 6월 아주대병원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 개소식이 열렸다. 테이프 커팅과 기념촬영 순서에서 센터장인 이국종 교수는 저쪽 귀퉁이에 밀려나 있었다.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못해 결국 사진에서 잘렸다. 도지사, 부지사, 국회의원, 도의회 의장, 시의원 등 최선을 다해 눈도장 찍고 공적 부풀려 질기게 연명해온 사람들만 우글우글 했다. 그게 그 사람들의 최선이다. 이국종 교수는 금방 자리를 떠 다시 죽음과 싸우러 갔다. 한 사람을 알려면 그의 최선이 어느 곳에 머무는 지를 보면 된다. 내 최선은 어딜 향하고 있을까. 당신의 최선은 지금 어디 있는가.

2016-10-12

나에게 나를 청탁한다

▲ 이병철 시인나는 한 번도 고가의 선물이나 봉투를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김영란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대학 시간강사와 경북매일 칼럼니스트 신분으로도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가 되는지 궁금해서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알아본 결과 대학 시간강사는 교원이 아니므로 적용되지 않는다. 칼럼니스트 역시 언론사 임직원이 아니므로 해당되지 않을 듯하다. 나는 공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한 끼 식사는 인당 3만원을 넘을 수가 없다. 3만원이면 웬만한 음식은 다 먹는 돈이다. 네 명이서 고기를 먹어도 마장동 한우 모둠 세트 기준으로 배부르게 먹고 냉면 후식까지 추가할 수 있다. 중식당에서 3만원이면 깐풍기나 라조기, 양장피 또는 팔보채에 짜장면을 함께 먹을 수 있다. 3만원이 넘는 비싼 식사를 먹어도 각자 `더치페이` 계산하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선물은 5만원까지만 허용된다. 5만원이면 괜찮은 와인 한 병, 중저가 와인 두 병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사과, 배, 바나나, 포도 등으로 구성된 과일바구니도 충분히 모양을 낼 수 있다. 고기를 선물하려거든 한우 대신 한돈을 푸짐하게 포장하면 된다. 녹차 먹인 보성녹돈 목살 다섯 근에 5만원이다. 영광굴비도 5만원이면 나름 구색을 갖춰 선물할 수 있다.경조사비는 10만원 제한이다. 김영란법 시행 전에 자녀들 시집 장가보낸 공직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고, 혼기가 찬 자녀를 아직 결혼 못 시킨 이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게 우리 경조사비 문화 아닌가. 나는 20만원 냈는데 10만원밖에 회수(?)되지 않는 억울함에 가슴 치는 사람들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한다.그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부정과 비리로 얼룩졌으면 이렇게 엄마가 초등학생 자녀 용돈 상한선 정하듯이 하는 법적 가이드라인이 세워졌겠는가. 정치, 기업, 언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육, 종교, 군, 체육계까지 부정부패에 얼룩지지 않은 데가 없다. 나는 20년 전 초등학교 야구부 시절에 코치가 공공연하게 학부모들에게 고가의 향응을 요구하고, 술집서 진탕 퍼마신 주대를 학부모 이름으로 달아놓는 등 추악한 자태를 이미 목격한 바 있다.대놓고 요구하는 자, 은근히 요구하는 자, 알아서 갖다 바치는 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공하는 자들이 어우러져 뇌물공화국을 만들었다. 공병 장교로 근무하던 때, 민간 건설업체들이 군 공사 수주를 받기 위해, 또는 공사 감독을 느슨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영관급 장교뿐만 아니라 말단 소위들에게도 상품권과 디지털카메라, 과일바구니, 현금 등을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내가 속한 부대에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공병 병과에서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이어져 온 악습이라고 했다.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안다”던 영화 대사처럼, 일부 장교들은 연말연시면 건설 업체 사람들에게 “손이 허전하다”는 등의 노골적 사인을 내기도 했단다. 차떼기나 사과박스, 옷 로비에 비하자면 이런 건 애들 장난 수준이다.남한테 얻어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 비싼 걸 대접해야 성의 표현이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정신 차릴 때가 되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내 돈으로 사면 그만이다. 사 먹을 능력 없으면 먹지 마라. 공직자들은 누가 사주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가질 수 있다.김영란법은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함이지만, 개개인의 거지근성과 노예근성을 고치는 데에도 기능할 수 있다.엊그제, 김영란법 시행 이후에 생일을 맞았다. 법의 눈치를 보느라 지인들이 내게 선물을 주지 않은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나 스스로 내게 선물을 줬다. 평소 갖고 싶던 낚시 용품들을 잔뜩 샀다. 나를 좌우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나는 나에게 나를 청탁한다. 내가 나를 격려하고 접대한다. 더 열심히 살아달라고, 더 좋은 글 써달라고….

2016-10-05

죽음을 이긴 사람들

▲ 이병철 시인모두 잠든 새벽, 불길에 싸인 건물 안에서 이웃들의 잠을, 아니 목숨을 깨웠다. 21개 원룸을 돌며 초인종을 누르고 불이 지르는 비명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시커먼 연기 앞에서 머뭇거렸지만,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불길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5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웃집 문을 필사적으로 두드릴 때마다 숨은 가쁘고 유독가스는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이웃의 죽음이 삶으로 바뀔수록 그는 점점 더 죽음과 가까워졌다. 그러나 온몸으로 소리쳐 스스로를 깨우고, 생명을 깨우고, 무관심과 이기심의 덧문을 잠근 우리 가슴을 두드려 깨웠다.안치범씨는 수십 명의 생명을 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성우를 꿈꾸며 목소리를 다듬던 청년이었다. 생전 음성을 들으니 따스함과 진중함, 바른 성품이 느껴진다. 그의 부모는 주검이 된 아들을 향해 잘했다고, 장하다고 칭찬해주었다 한다. 자신을 희생한 안치범씨도 훌륭하지만, 자신보다 소중한 자식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위엄`을 보여준 부모 역시 훌륭한 분들이다.심장마비로 쓰러진 택시 기사를 그냥 둔 채 제 짐만 들고 자리를 떠난 이들도 있다. 그들은 평일에 해외 골프 여행을 갈 만큼 적당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 비하자면 안치범씨는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청춘이었다. `누가 강도당한 자의 이웃이냐`고 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떠오른다.젊음을 바쳐 불의와 싸운 한 사내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저 홀로 먹고 사느라 정신없는데, 도시의 미친 속도 속에서 경쟁하고 짓밟고 서로를 겨냥하는 송곳이 되는 대신 흙으로 돌아가 농사짓고 살았다. 모두들 수입산 밀을 쓸 때, 몇몇 농민들과 함께 우리 밀을 파종해 수확했다. 소처럼 우직하게 땅을 갈았다. 아침햇살처럼 순박하고 비처럼 성실했다. 이 땅을 너무 사랑해서, 이 땅에 사는 이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들불처럼 환해져서 자식들의 이름을 백두산, 도라지, 민주화라 지었다.백남기 농민은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여한 것도 더불어 사는 이들의 슬픔과 분노를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쌀값이 떨어져 정직하게 땀 흘린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수많은 농민들의 억울함을 전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섰다. 광장에서 그는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고, 300일 넘게 사경을 헤매다 세상을 떠났다. 공권력이 평범한 한 소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지만, 결국은 기득권의 폭력에 의해 타인과 더불어 살았던 한 삶이 무참하게 져 버린 비극이다.안치범씨는 불에, 백남기 농민은 물에 숨졌다. 불과 물은 죽음의 전령이지만, 안치범씨와 백남기 농민 앞에서 우스워졌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때가 있다. 결코 지지 않는 죽음이 인간에게 고개 숙이는 순간이 있다. 안치범씨와 백남기 농민에게 그랬다. 죽음은 인간의 굴종을 즐거워한다. 그런데 이 오만한 죽음이 어떤 삶 앞에서는 겸손해진다. 그 삶을 거두어가는 것이 황송해 무릎을 꿇고 정중히 예를 바친다.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길 수는 있다.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더불어 삶을 사는 것이다. 더불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제 죽음이 곧 세상의 종말인 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는 죽어도 사는 동안 심어놓은 더불어 삶의 씨앗이 세상을 풍요롭게 할 것을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위엄`은 죽음의 순간에 판명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지금도 제 빛과 온기를 나눠 세상의 어둠을 밝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 장작에만 불붙인다. 남의 불을 꺼트릴 궁리로만 골똘하다. 죽음은 어떤 삶에 무릎을 꿇고 그를 겸손히 모실 것인가, 어떤 삶에 목줄을 채우고 비참하게 그를 끌고 갈 것인가. 더불어 삶으로 당당하게 죽음을 무릎 꿇린 안치범씨와 백남기 농민처럼, 나도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죽어야 한다.

2016-09-28

할머니의 추석 선물

▲ 이병철 시인할머니는 앞을 전혀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이시다. 보청기 없이는 아예 못 듣고, 있어도 청력이 극히 제한된 청각 장애인이기도 하다. 나 아닌 다른 곳을 보며 내 이름을 부를 때도 그렇지만, 세 해 전 태어난 외증손자의 얼굴을 볼 수 없으시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 얼마나 보고 싶을까. 주름진 손으로 아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목구비와 살집, 성정을 짐작하는 목소리에 스민 체념과 원한이 참 아프다.나는 할머니가 단 한번만이나마 외증손자를, 나이든 손자의 얼굴을, 세상의 꽃과 구름을, 전국노래자랑 송해 선생의 건재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늘 기도한다. 내가 가진 것 중 뭐라도 바꿀만한 게 있다면 할머니에게 빛을 선물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고작 어쩌다 한번 집에 들를 때 사 가는 족발이나 롤케이크 정도다. 십여년 전만 해도 추석날 장충체육관에 모시고 가 마당놀이 구경도 시켜드렸는데, 이젠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보는 것 대신 듣는 걸 챙겨드린다. 얼마 전 카세트라디오를 새 걸로 바꿔드렸다. 고속도로 휴게소 들를 때면 판소리나 엿장수 메들리 테이프를 몇 개씩 집어 든다.할머니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사과 모양으로 생긴 탁상 알람시계다. 내가 6년 전에 사드린 것인데, 꼭지 부분을 누르면 “아홉 시” 하고 현재 시간을 음성으로 알려준다. 암흑 속에서 시계의 힘을 빌려, 할머니가 스스로 알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정보는 오직 시간뿐이다. 시계가 없으면 굉장히 불안해하신다. 명절마다 아버지가 귀농해 있는 당진 집으로 모시고 갈 때도 차에 탄 몇 시간 내내 사과시계를 두 손으로 꼭 감싸 쥐고 계신다. 시계를 품에 안고 꾸벅꾸벅 졸다가 무서운 꿈을 꿨는지 화들짝 깨어 사과꼭지를 누르는 모습을 룸미러로 볼 때면 마음이 젖는다.얼마 전 그 시계가 고장 났다. 할머니의 답답함을 잘 알기에 새로 구입하려는데, 같은 제품은 모두 품절이거나 영어 음성 안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더 비싸고 좋아 보이는 제품을 살펴봤더니 정각마다 천장에 빔을 쏴 시간을 알리고, “이십 시 이십 분. 삼십 도” 이렇게 현재 시간과 온도까지를 음성 안내해준단다. 빔 기능은 물론이고, 24시간 기준 안내나 온도 알림 기능은 할머니에게 정말 필요 없다. 청력마저 나쁜 할머니에게는 그저 “여덟 시” 단순하게 시간만 알려주면 그만이다. 6년간 쓰던 사과시계도 온도까지 같이 안내해줘 할머니가 늘 어려워했다. 그나마 그게 제일 나았는데, 다시 구하기가 쉽지 않다.이번 추석에 할머니는 결국 시계 없이 먼 길을 다녀오셨다. 장애인 연금 받은 걸 봉투에 넣어 내게 내미셨다. 아무리 짙은 암흑이라도 할머니의 사랑은 늘 환한 봄볕이다. 나를 업어 키운 할머니 등이 참 많이 작아졌는데, 여전히 내가 업힌다. 할머니에게 너무나 큰 것인 장애인 연금이 내겐 적은 용돈일 뿐이고,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과시계가 할머니에겐 가장 소중한 물건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나는 아직도 시계를 구하지 못했다. 할머니 등에서 말 배우던 어린 나처럼, 큰 소리로 또박또박 “두 시!” 외치는 시계가 부디 있었으면 좋겠다.제품 만드는 분들이 음성 안내 시계가 누구에게 절실한 물건인지 헤아려주셨으면 좋겠다. 시각장애인이나 고령자들이 주로 사용할 텐데, 더 쉽게 만들어주길 부탁드린다. 영어 음성과 온도 안내처럼 은행, 관공서 서류도 불필요하게 복잡하다. 나도 헷갈리는 용어가 많은데 장애인이나 고령자들은 오죽할까. 정치, 경제, 법률, 언론에도 쓸데없이 현학적이고 난해한 수사가 많다. 정보가 과잉돼 정작 중요한 게 안 보인다. 일부러 말을 어렵게 꼬아 국민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의심도 든다. 국민안전처와 기상청, 국방부와 외교부도 혐의가 짙다. 온갖 브리핑, 보도자료, 의전 등 자기들만 근사한 디지털시계가 되려는 것 같다. 디지털이 무슨 소용인가. 기상청 슈퍼컴퓨터도 자주 틀린다. 그냥 사과시계만큼만 하자. 때에 맞춰 사실대로 알기 쉽게 말하는 것, 국민에겐 큰 선물이다.

2016-09-21

가을에 오는 것들

▲ 이병철 시인불과 2주 전에 쓴 글에서 폭염과 누진제를 원망하며 징징거린 것이 민망하게 바로 이튿날 가을이 왔다. 예전에 다른 매체에 썼던 글에선 벚꽃 구경 가라고 부추겼는데, 다음날 낙뢰를 동반한 폭우가 내려 꽃이 다 떨어진 일도 있다. 아무튼 미치광이 여름이 갔다. 하늘빛과 바람, 소리와 냄새가 완전히 달라졌다. 어느 새벽에는 집 앞에 나갔다가 입에서 나오는 희미한 아지랑이를 보기도 했다. 가을이다.숨을 쉬면 서늘한 공기 끝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느낌이 난다. 뒷맛이 무거운 와인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다. 숨 쉬는 게 맛있어서 온종일 밖을 돌아다닌다. 참 오랜만이다. 집 뒤에 관악산을 두고도 여름 내내 한 번도 가지 않았는데,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오르내린다. 저녁 하늘이 단풍 빛깔로 물드는 걸 보는 기쁨을 만끽 중이다.여름의 빽빽한 초록 사이로 노랗고 발그레한 것들이 얼굴 내민다. 떼쓰다 악에 받쳐 우는 애 울음 같던 매미 소리도 잠잠해지고 풀벌레들의 음악이 감미롭다.가을엔 풍경의 여백만큼이나 마음도 넉넉해진다. 뭘 해도 환희롭다. 봄도 좋지만 봄은 변덕스럽고 까칠한 데가 있다. 그에 비해 가을은 성숙하고 안정적이다. 예측 가능한 계절이고, 다 자라난 어른이다. 어느 강가나 산기슭에서 가을을 마주하면 세상과 시간을 오래 견딘 지혜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 같다.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은 폭염 때문만은 아니다. 숨 막히는 여름이 지겹기도 했지만, 가을과 함께 오는 것들, 가을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서둘러 그리웠다. 10월 미시령에서 한 계절 먼저 당도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단풍 구경하는 건 나의 연례행사다. 미시령 휴게소 통유리창에 기대 앉아 따뜻한 대추차를 마시면 몸속으로 가을이 빨려 들어왔다. 몇 해 전 폐쇄된 휴게소는 이제 아예 철거돼버렸다. 가을의 추억 하나가 그렇게 무너져 내렸지만, 미시령 넘어 속초에 가 가을바다 보며 물곰탕을 먹는 행복은 올해도 여전할 것이다.섬진강에서 50cm 대물 쏘가리를 잡은 게 작년 가을의 일이다. 올해 그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갑오징어, 무늬오징어, 호래기, 갈치 낚시도 가을이 호황이다. 강화도에 가 연탄불에 구운 가을 전어를 먹을 생각에 벌써 입에 침이 고인다. 전어뿐 아니다. 장호원 복숭아는 여름보다 가을 초입에 먹는 것이 더 달콤하다. 꽃게, 주꾸미, 대하 등 서쪽 바다에서 난 해물들도 가을에 살이 달고 단단하다. 먹을거리와 함께 산책과 여행 등 야외활동을 하면 더 좋다. 여름 성수기의 바가지 요금도 없고, 발 디딜 틈 없는 북새통에서도 해방이다. 문화와 독서의 계절답게 공연과 전시도 많이 열리고 출간도 활발하다. `가을 야구`, 프로야구 포스트시즌도 있다. 그야말로 눈, 코, 입을 비롯해 온몸과 정신이 다 즐거운 계절이다.설악산, 미시령, 을왕리, 광화문, 정동길, 삼청동, 담양 소쇄원, 섬진강, 속초 바다, 강화 교동도, 제주 섭지코지, 전어, 대하, 오징어, 꼴뚜기, 쏘가리, 붕어, 갈치, 복숭아, 사과, 대추, 밤, 잊혀진 계절, 시월의 마지막 밤, 내 생일, 옛사랑, 풋사랑, 첫사랑, 짝사랑, 소주, 와인, 막걸리, 촛불, 기도, 시….가을의 다른 이름들이다. 가을과 함께 오는 이것들을 나는 오래 기다렸다.이제 가을에 자리를 내줄 법도 한데, 폭염보다 뜨겁고 짜증나고 괴로운 여름의 이름들이 아직도 우리를 열 오르게 만든다. 똥파리, 초파리, 모기, 하루살이, 한전, 누진세, 우병우, 롯데, 코리아나호텔, 사드, 송희영, 유람선, 대우조선, 한선교, 멱살, 한진해운…. 참 질기기도 하다. 펄펄 끓던 막강 더위도 때가 되니 알아서 물러나는데, 도무지 물러날 줄 모르는 저 막장 이름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뉴스를 틀어놓고 있으면 창 밖에는 풀벌레 화음 아름다운데, 티브이 속은 여전히 매미소리 요란하다.

2016-09-07

바깥과 너머를 사랑하는 사람

▲ 이병철 시인최근 몇 가지 이슈들로 문단이 시끄러웠다. 일단락된 것도 있고 현재진행형인 것도 있다. 각각의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와 첨예한 논쟁은 매우 의미 있고 생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좀 피곤하다. 문학 행사장이나 경조사 자리, 술자리에 모인 문인들이 다 똑같은 이야기만 해서다. 모두 입을 모아 문학판의 가십들을 열 올려 떠들었다. 사건의 당사자가 허락한 적 없는 대변과 전언, 풍문에 대한 추측과 확대 해석, 왜곡과 곡해, 특정인의 됨됨이와 과거 행적에 대한 고발성 증언들이 오가는 사이 가만히 자리를 떴다.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자기가 속한 판의 동정에 촉을 세우고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건 본능이다. 원시인들도 누가 더 큰 매머드를 사냥했는지, 어떤 소년이 족장의 딸과 혼인하게 될지 따위를 두고 종일 수다했으리라. 말의 홍수, 정보와 소문의 범람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오죽할까. 직장인들은 회사 돌아가는 상황이나 인사 결과 같은 주제를 두고 하루 종일 심각하게 대화한다. 군인들에겐 며칠 앞으로 다가온 유격훈련이나 정기휴가가 핫이슈다. 온통 그 이야기뿐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공동체가 곧 자기 정체성을 이룬 사람들이다. 성실하고 정직한 이들이다. 직장인이 직장 이야기하고, 군인이 군대 이야기하지 무슨 다른 대화를 하겠는가.문인들의 술자리가 시시해서 일찍 일어난 것은 내가 불성실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작가들처럼 문학에 내 전부를 걸지 않은 까닭이다. 내 관심사는 항상 다른 곳을 향해 있다. 누군가의 문학상 수상, 등단, 시집 발간, 표절 논쟁, 모 작가의 사생활 이야기 같은 건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다. 글 쓰는 사람들이 모여 글 이외의 것들을 이야기할 때, 문학 바깥, 문단 너머의 것을 이야기할 때 그제야 술맛이 난다. 음악, 여행, 스포츠, 영화, 연애, 애완동물, 건축, 쇼핑, 요리 같은 것들이 주제가 되면 침묵을 깨고 대화에 참여한다. 아는 게 별로 없어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두 마디 질문만 해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어차피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로 모인 사람들이다. 문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나치면 재미없다. 문학이라는 동일성 속에 다채롭게 빛나는 개인의 취향과 생활이 나는 훨씬 궁금하다. 같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과 카페에 모여앉아 몇 시간 내내 신앙 간증만 나눈다면 그건 예배의 연장이다. 나는 문인들이 문단 이야기를 하는 게 꼭 회식 자리에서 업무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모든 소식과 풍문을 귀신같이 꿰뚫고 있는 사람은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나는 취미로 낚시와 야구를 즐긴다. 내가 좋아하고 가깝게 어울리는 낚시인들은 대개 낚시 바깥과 너머의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만나면 물론 낚시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지만, 이내 다른 주제로 옮겨간다. 낚시 이야기를 하더라도 장비나 기술, 포인트에 대한 밀도 있는 대화보다 강물 냄새, 새 소리, 바람의 촉감, 별빛, 낚시터에서 마시는 소주 한잔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그 헐거운 수다를 나는 사랑한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야구팀 단체 채팅창에서는 야구 이야기보다 쓸데없는 헛소리들과 온갖 개그, 여행 후기와 음식 리뷰 같은 게 대화의 주를 이룬다. 그러다 경기장에서 만나면 오직 야구에 집중, 최선을 다해 플레이한다. 나는 그게 멋지다고 생각한다.정치 이야기만 하는 사람, 먹고사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 남 험담과 뒷담화만 하는 사람,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 하나님 부처님 이야기만 하는 사람, 음담패설만 하는 사람치고 주변을 유쾌하게 하는 이는 본 적 없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생각인데, 세계관이 한 군데에 고착돼 있다는 증거다. 나는 인식과 사유가 고여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 보다 넓고 다양한 세계를 향해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과 술 마시고 싶다. 자기가 속한 울타리 안도 사랑하지만, 바깥과 너머를 또 사랑할 줄 아는 사람과 여행하고 싶다.

2016-08-31

에어컨 빼앗긴 방에도 가을은 오는가

▲ 이병철 시인숨이 턱턱 막힌다. 땀이 속옷을 적시고 목덜미를 흥건케 한다. 온몸이 축축하고 끈적거린다. 땀과 섞인 선크림이 눈으로 흘러들어 따갑다. 눈에 고인 물기를 빨아먹으려는 날벌레들이 거슬린다. 밤공기는 뜨겁고 새벽은 미지근하다. 사포로 문지르는 듯한 땡볕이 살 껍질을 벗겨낸다. 정수리에 전동드릴이 박히는 느낌, 현기증이 일어난다. 지독한 폭염이다. 처서(處暑)도 지나 가을이 가까운데 이제 와서 더위 이야기를 꺼내는 게 `뒷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더위는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다. 기상청을 믿을 수가 없다. 10월에도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만 같다.만사가 귀찮고 욕구가 단순해진다. 더위를 피해 서늘한 곳에 있고 싶다. 찬물에 몸을 씻고 싶다. 물을 많이 마시니 방뇨와 배변이 활발하다. 쾌적한 데서 먹고 눕고 놀고 싶다. 천국이라 한들 에어컨 없다면 가지 않겠다. 미녀와의 데이트도 야외라면 거절이다. 스킨십도 싫다.1994년에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 해 살인적인 더위를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야생 족제비 수준으로 뛰어놀고, 웬만한 산꼭대기는 한달음에 오를 만큼 체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더위를 제대로 먹은 건 2008년 여름, 가장 덥다는 경북 영천에서 장교 임관 훈련을 받을 때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죽겠는데, 땡볕은 통과시키고 바람은 차단하는 군복을 입고 철모와 소총, 수통 등 쇳덩이들을 매단 채 기어 다니느라 살이 15kg이나 빠졌다. 코피가 터지기도 했다. 몸 곳곳에 땀띠가 나 베이비파우더를 덕지덕지 바르면 거대한 찹쌀떡이 된 기분이었다.2012년 여름, 에어컨 없는 반지하 원룸에서 더위를 견뎠다. 선풍기만큼 쓸모없는 도구가 또 있을까 싶었다. 아예 알몸으로 살았다. 수건으로 감싼 아이스팩을 온몸에 올려두고 가만히 누워 정육처럼 지냈다. 누워 있다가 더우면 바로 화장실로 가 찬물로 씻었다. 하루에 샤워를 열 번쯤 한 것 같다. 그래도 끝내 가을이 오고, 첫눈이 내렸다.이듬해 여름날이었다. 친구와 그로부터 소개 받은, 호감 가던 여성이 내가 사는 방에 술을 사들고 놀러 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이 “불지옥!” 외쳤다. 지옥불에 사는 나는 염라대왕인가 성서에 나오는 다니엘과 세 친구인가. 술판을 펴지도 못한 채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곳을 찾아 헤매다 밤중 산속에 들어가 모기에게 헌혈하며 술을 마셨다. 그 치욕이 분해 며칠 뒤 큰맘 먹고 에어컨을 장만했다. 세상은 에어컨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에어컨 아래서 시도 쓰고 논문도 썼다. 밥도 지어먹고 정말 사람답게 살았다.에어컨 없었으면 나는 이미 죽었다. 덕분에 잠도 자고 글도 쓰고 밥도 먹는다. 그런데 이 최소한의 인간적 삶도 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간아, 달콤했느냐. 네가 누린 것의 수십 배를 거두어가겠다.` 누진세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누진세로 수십만 원을 내고 나면 당장 곤궁해진다. 누진세 무서워 에어컨을 켜지 못하면 책상에 앉아 글도 쓸 수 없고, 침대에 누워 잠도 못 잔다. 글 못 쓰면 밥 못 먹고, 잠 못 자면 체력 떨어져 육체노동도 못 한다. 누진세는 단순한 전기 요금이 아니라 삶의 기본권을 담보로 한 가혹한 고리대금이다.어떤 분들은 에어컨 빵빵한 식탁 위에서 송로버섯과 캐비어, 샥스핀, 능성어, 한우갈비를 먹는데, 나 같은 사람은 불가마 같은 방구석에서 뜨거운 라면이나 후후 불어먹는다. 지난해 한전 영업이익은 11조3천400억원, 올해 상반기에만 누진제를 앞세워 6조원을 넘어섰다. 그 돈은 다 정부의 재정수입이 된다.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마피아들이 유독 많이 들러붙어 있다. 호화스러운 오찬상이 어떻게 차려졌는지 알만 하다. 폭염에 가축들은 죽어나가는데 누진세 무서워 에어컨은 엄두도 못 내는 게 축산 농가의 현실이다. 에어컨 틀지 말고 살라는 건 국민을 축사의 개돼지나 마찬가지로 여긴다는 얘기다. 열 받는다. 덥다.

2016-08-24

할 수 있다

▲ 이병철 시인최고의 장면은 이미 나왔다. 남자 펜싱 에페 결승에서 박상영이 보여준 기적의 역전 드라마다. 14대 10, 한 점만 더 내주면 지는 절벽 끝에 서서 날아오는 칼날을 모두 피했다. 피하고 찌르고, 막고 찔렀다. 에페라는 종목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공격 범위인데다 서로 동시에 찌르면 한 점씩 주어진다. 이 에페에서 한 점도 내주지 않고 자기 점수만 다섯 번 연속 득점한다는 것은 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13대 9로 뒤진 채 마지막 라운드를 앞둔 휴식 시간, 박상영이 의자에 앉아 무언가 중얼거리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는 확신과 열정에 가득 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아니 우리가 알 수 없는 땀과 눈물의 과거, 또는 그로부터 이미 완성된 미래를 응시하며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해냈다. 나는 그 장면을 백 번도 더 본 것 같다. 처음 그걸 봤을 땐 가슴이 뛰고 눈물이 흐르는 걸 주체 못해 미칠 뻔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중얼거리기만 해도 온몸이 떨리고 눈이 벌게진다.박상영의 `할 수 있다`에 젊은 사람들이 많은 용기와 힘을 얻었다. 희망 없고 암울한,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나도 `할 수 있다`며 기적 같은 역전을 꿈꾸게 해준 것이다. 박상영은 우리 나이로 올해 스물두 살이다. `할 수 있다`에 청년들이 유독 공감한 것은 그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래이자 어린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펜싱을 한 `흙수저`이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무릎 부상을 극복하고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그를 메달 후보로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무명의 그가 세계적 강자인 게자 임레와 싸워 이겼다.청년들은 여러모로 처지가 비슷한 박상영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현실의 고난들이 게자 임레의 칼날처럼 사방에서 날아 들어오지만 끝내 이길 수 있다는 희망,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꺾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정신이자 신드롬이 되는 중이다. 우리도 그의 과거처럼 눈물과 좌절로 얼룩졌으니까, 그의 오늘처럼 절벽 끝에서 이 악물고 아등바등 버티는 중이니까, 그의 내일처럼 기적 같은 역전의 드라마를 이루어낼 테니까, 할 수 있다.기성세대들이 한강의 기적이니 새마을운동 운운하며 `해봤어?`라든가 `안 되면 되게 하라`를 말하는 건 전혀 와 닿지 않는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 성공한 방식을 따르라고 강요할 뿐이지 그때와 지금 세상이 다르다는 걸 조금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라진 세상의 양면 중 경제 발전이라는 밝은 면만 자부하지 기득권 갑질, 철밥통, 빈부격차, 부정부패, 수저계급론, 천민자본주의 같은 어두운 면은 외면한다.그들은 자신들이 이뤄낸 이 달라진 세상에서, 자신들이 성공한 방식으로 청년들이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지 못한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에 성공해서는 개천을 아예 폐쇄해버린 자들이다. 저 앞에 뒷짐 지고 선 채 제 자식에겐 `해봤어?` 대신 `아무것도 하지 마`, `안 되면 되게 해줄게`라고 하면서 남의 자식들에겐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런 자들의 천 마디 `명언`보다 박상영의 한 마디 혼잣말이 훨씬 더 용기를 준다. `우리 땐 말이야`라고 하며 멀리서 손짓으로 지시만 내리는 어른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쓰러지고 눈물 흘리며, 그럼에도 일어나서 다시 싸우는 또래의 사투가 마음을 움직인다.십여 년 전, 공업고등학교 지하 납땜 실습실에서, 노트에 `전문대 입학, 4년제 편입, 대학원, 박사과정 진학, 작가 등단, 학생들 가르치기` 같은 단어들을 써놓고 그걸 바라보며 `할 수 있다` 중얼거리다 눈물 흘린 소년이 있다. 노트에 적은 것들을 이뤘지만 여전히 캄캄하다. 대출금 이자와 반지하 월세, 생활비에 시달리면서 노트에 몇 개의 단어를 새로 적어 넣는다. 그리고 다시 혼잣말한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2016-08-17

올림픽의 즐거움

▲ 이병철 시인2016 리우 올림픽이 개막했다. 스포츠에 관심 많은 나로서는 올림픽 시청이야말로 여름휴가다. 혹자는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 그것도 국가 대항의 `미니어처` 전쟁에 몰입해 열 올리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 너무 몰입해서 결과에 집착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몸뚱이`들의 부대낌이라든가 우리 삶에 어떤 긍정적 영향도 줄 수 없는 무의미한 경쟁이라든가 하는 식의 폄하는 더욱 곤란하다. 몸 그리고 몸짓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스포츠 경기만큼 감동적인 영화나 문학도 흔치 않다.대회 때마다 밤잠을 설쳐가며 전 종목을 시청한 내게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묻는다면, 딱히 하나를 꼽을 수 없다. 황영조가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의 모리시타를 따돌리고 마침내 월계관을 쓰던 순간이나 여홍철이 도마 위를 높이 날아올랐다가 지상에 불안한 착지를 하던 장면, 문대성의 뒤돌려차기, 최민호의 연속 한판승,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눈물의 은메달,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 등 우리 선수들의 활약이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하지만 올림픽의 감동은 국가를 넘어선 `인간`의 드라마라는 데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육상 400미터 준결승에서 영국의 데릭 레드먼드는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는다. 포기하지 않고 일어선 그는 결승점을 향해 절뚝거리며 걷는다.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허탈함 때문일까.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끌며 울먹이는데, 관중석을 넘어온 한 중년 남자가 곁에서 부축을 시작한다. 아버지였다. 모든 선수들이 경기를 마친 텅 빈 트랙 위, 함께 결승점을 통과하는 부자를 향해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어린 내 눈에 그 장면은 몹시 감동적이었다.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 역도 무제한급 결승에서 올림픽 2연패를 노리던 독일의 로니 벨레르가 압도적인 무게를 들어 올려 우승을 거의 확정, `다시 이 매트 위에 오를 일이 없다`는 의미로 신고 있던 역도화를 벗어 관중석으로 던지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다음 선수는 마지막 시기를 남겨둔 러시아의 체메르킨, 우승권에서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가 세계기록보다 6.5kg이나 무거운 무게를 신청하자 경기장이 술렁였다. 누구도 그가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모두의 불신과 비웃음을 바벨과 함께 들어 올렸고,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확신과 확신의 싸움, 집념을 이기는 집념, 스포츠란 바로 그런 것이다.지난 런던 올림픽도 그렇고, 이번 리우 올림픽을 보면서 크게 느끼는 것은 우리 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가 참 많이 성숙했구나 하는 점이다. 예전엔 월드컵이나 올림픽 경기를 어른들 옆에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실수를 하거나 경기에서 지면, 최선을 다해 싸워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에게조차 `바보`, `병신`, `죽일 놈` 따위 온갖 욕설이 날아들었다. 중계방송이나 언론 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은메달에 그치다`, `동메달에 머물다`, `통한의 패배`, `문턱에서 좌절` 같은 부정적이고 기운 빼는 수사를 모조리 갖다 붙이곤 했다.하지만 이제 사람들 인식이 바뀌었다. 은메달, 동메달을 딴 선수, 예선에서 탈락한 선수에게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게 올림픽 정신이고 올림픽의 진짜 즐거움이다. 우리 사회가 기성세대의 결과 중심주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최선을 다한 과정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 실패와 좌절에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 기쁘다.착하고 순한 우리 선수들만 아직도 `국민들에게 죄송하다`, `내 자신이 한심하다`라고 말한다. 좀 더 뻔뻔하고 당당해졌으면 좋겠다. 우리들을 대표해 거기 있어준 것만으로 감사하다. 그런 말들은 국민에게 해를 입히면서도 단 한 번 고개 숙인 적 없는 저 뻔뻔한 낯들, 국민 위에 군림하며 당당한 저 어깨들, `5만원 한우 선물`에 몹시 당황 중인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2016-08-10

`7말8초` 성공적 휴가를 위해

▲ 이병철 시인온 국민의 휴가철이다. 다들 바다로 계곡으로, 또 해외로 나가 도심이 한산하다. 수천만 명이 동시에 휴가 여행을 간다는 걸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모르는 바 아니다. 공장은 한 번에 쉬고, 협력업체가 쉬면 기업도 쉰다. 자녀들 방학 일정과도 맞추려다 보면 이 시기 외엔 여의치 않다. `7말8초 여름휴가`가 보편 인식으로 뿌리박힌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도 너무하다. 나라 전체가 거대한 공장 내지는 군대 같다.공중에서 찍은 해운대 사진을 보니 바닷물은 보이지 않고 형형색색 수영복 차림 인파뿐이다. 마치 당근과 오이, 감자, 파프리카, 가지, 브로콜리 등 갖은 채소가 들어간 볶음밥 같다. 안 그래도 폭염에 데워진 바닷물인데, 그 안에서 오줌 누는 얌체들 때문에 해수 온도가 더 올랐을 것이다. 해수욕이 아니라 온천욕이다. 물살을 헤치는 대신 무수한 뱃살과 옆구리 살을 헤쳐 나아간다. 워터파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설날 아침 목욕탕인지 분간이 안 된다.계곡은 좀 낫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별로 넓지도 않은 물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물놀이, 뱃놀이, 낚시, 다슬기 줍기, 설거지, 목욕, 빨래, 물수제비가 이뤄진다. 물밖엔 썩은 수박껍질과 퉁퉁 불어터진 라면 면발이 악취를 뿜어대고, 술판, 고스톱판, 고성방가, 노상방뇨, 4륜바이크들의 질주, 청소년들의 집단 흡연, 온갖 욕설과 음담패설, 아기들 울음소리, 파리떼들의 비행이 대낮을 가득 채운다. 이게 휴가라면 차라리 회사에서 일을 하겠다. 나도 `7말8초` 바캉스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족끼리 강원도 계곡에 갔다. 물안경을 쓰고 잠수해 노는데, 눈앞에 무언가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수면을 통과한 햇살이 그 물체 위에 햇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건 금이야` 확신하며 손에 쥔 순간 금은 손에서 물컹거리며 부서졌다. 손을 코에 가져다대봤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금이 아니라 똥이었던 것이다. 어떤 미개한 인간이 상류에서 배변을 했던 모양이다. 황금이란 헛되고 헛되구나, 한순간 빛나다가 결국 손에서 부서지는 똥이로구나! 물질의 허망함을 나는 그 소년 시절에 벌써 깨달았다.스무 살 여름에 친구들과 대천 해수욕장에 텐트 치고 놀았다. 밤에 삼겹살을 굽고 찌개를 끓여 술 마시려는데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 모래가 음식을 덮쳤다. 몇 수저 먹지도 못한 고기와 국물을 버리고, 잡친 기분에 안주 없는 술을 마시다 돗자리에 누워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모기떼에 실컷 물린 발이 팅팅 부어 있었다. 운동화를 신는데 발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순간 세상 짜증이란 짜증이 다 내 것이었다. 웃고 놀리는 친구를 하마터면 두드려 팰 뻔했다.꽉 막힌 고속도로, 꼼짝할 수 없는데 애기는 자꾸 울고, 큰애는 화장실 급하다고 보채고, 아내는 가스 불 안 끄고 온 것 같다며 차를 돌리잔다.운전하는 남편도 배가 고파 죽겠다. 겨우 도착한 휴가지, 열은 열대로 뻗쳐 있는데, 평소 요금의 예닐곱 배 `극성수기` 값을 요구하는 숙박업소, 생수 한 병 3천원, 컵라면 하나 5천원 받는 바가지 장수, 대동강 물장사하듯 파라솔 하나 꽂고 자릿세 뜯어가는 악덕 상술에 `뚜껑`이 열린다. 간신히 화를 누르고 야외에 자리를 펴 고기 굽는데, 예보에 없던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당신이 날짜 정했잖아!`, `당신은 뭘 했는데?`, `진작 좀 알아봐서 해외로 갈 것이지…`, `애 데리고 비행기를 어떻게 타!`,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뭐? 당장 짐 싸!`……휴가를 분산해 쓰자고 제안하거나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에서 여유롭게 보내자는 빤한 말 하진 않겠다. 누가 그걸 몰라서 안 하겠는가. 이미 와버린 `7말8초` 바캉스, 물릴 수도 없다. 사소한 일에도 금방 짜증나고 부아가 치밀겠지만 부디 마음을 다스리고, 참고 또 참으시라. 자칫 가족 여행이 가족 연행으로, 휴가가 휴거의 날로 바뀔 수도 있으니 말이다.

2016-08-03

고독한 군중의 햄버거

▲ 이병철 시인미국 뉴욕에서 인기를 끈 한 햄버거 가게가 한국에 상륙했다. 개점 첫날부터 사람들이 수백 미터씩 줄을 섰다. 일부는 밤샘까지 했다고 한다. 다른 가게 햄버거에 비해 두세 배 정도 비싼데도 연일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항생제 쓰지 않은 쇠고기와 싱싱한 채소, 고객이 조리과정을 볼 수 있는 오픈키친이 이 가게의 특징이다. 기존 패스트푸드의 허접스러운 재료와 맛에 싫증난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 것이겠지만, 이 찜통더위에 햄버거 하나 먹겠다고 두 시간씩 줄을 서는 건 진풍경이 분명하다.`뉴요커들이 줄 서서 먹는 햄버거`라는 소문이 번지면서 `신문물`을 먼저 접하려는 젊은 세대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SNS등 온라인 미디어에서 자꾸 떠드니까 `나도 한번 먹어보자`는 군중심리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에는 광우병 쇠고기라며 `미국 아웃`을 외치던 사람들이 미국산 쇠고기 햄버거에 열광하는 걸 아니꼽게 보는 시선도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냐고 묻고 싶겠지만, 군중심리가 그렇다. 금방 얼굴을 바꾸고, 금방 뿔뿔이 흩어진다.`포켓몬고` 열풍도 마찬가지다. 주변에서 다들 하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포켓몬고의 성지가 된 속초에는 이 군중심리를 틈탄 한철 장사가 성행 중이다. 문전성시를 이루다가 이제는 파리 날리는 치즈등갈비, 불닭, 과일빙수, 조개구이 식당 등 `맛집`의 흥망성쇠도 그러하다. 몇 해 전 `강남스타일`의 대유행과 꿀 바른 감자칩 대란, 영화 `명량`의 기록적인 흥행 역시 군중심리가 이뤄냈다. 그게 어디 1천700만명이나 볼 영화인가.나 또한 철저한 군중이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지만 옆에서 법석을 떨면 엉덩이가 따라 들썩인다. 남들 다 간다는 찜질방을 서른 살 넘어서야 가보고, 소위 `핫`하다는 이태원에서 술 마시고 놀기를 지난주에 처음 해볼 만큼 유행에 무디지만, 페이스북에 열중하거나 방송 유행어를 어쭙잖게 흉내 내기도 하고, 간혹 `착한 식당` 같은 델 기웃거리는 걸 보면 별 수 없는 군중이다. 초등학교 때 소년한국일보에서 콜라 광고 지면을 오려 편의점에 들고 가면 콜라 한 캔 공짜로 준대서 신문 쪼가리 들고 두 시간 줄 선 적도 있다.햄버거와 포켓몬고, 맛집 유행을 지켜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내 눈엔 저 사람들이 너무나 외로워 보인다. 나도 외롭다. `군중`이 되고 싶은 심리가 나쁜가? 군중은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사회에 속한 채 비슷한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다들 `헬조선`과 `흙수저`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출구 없는 터널에 함께 갇혀 있다. 너무 어두워서 옆에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내 눈앞의 암흑에 고립되어 있다. 햄버거 가게 앞에 줄을 서고, 속초행 버스에 몸을 실으며 타인도 나와 같음을 확인하고서야 간신히 안도하는 사람들, 남들 다 하는 내 집 장만, 결혼, 취업에서 낙오되었다는 좌절감과 소외감을 남들 다 하는 햄버거 먹기, 포켓몬 잡기에의 참여와 성취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 받는 사람들이 군중이다.`고독한 군중`을 쓴 데이비드 리스먼은 자본주의 사회의 `외부지향적` 인간은 타인의 생각과 관심, 유행에 집착하며 집단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고 말했다. 현대인들은 겉으로는 활달하고 사교적이나 속으로는 고립과 소외에 대한 불안으로 언제나 괴로워한다. 햄버거 가게 앞에 줄 선 사람들은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군중에 속해있다는 안도감은 뱃속에서 햄버거가 소화되는 순간 함께 사라져버린다. 군중은 해체되고, 개인들은 다시 일인분의 고독과 소외를 안고 저마다의 암흑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아파트 분양이나 땅 투기, 신공항 사업 같은 데 우르르 몰려가는 것보다 햄버거, 포켓몬이 훨씬 건강한 군중심리다. 부디 그렇게라도 불안과 결핍을 해소하길, 잠깐이나마 `남들 다 하는`에 속하길 바란다. 햄버거 가게가 들어선 강남은 서울에서 고독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2016-07-27

매일 하는 일의 숭고함

▲ 이병철 시인프로야구 선수들은 매일 경기에 나선다.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엔 대충 하게 된다. 몇 가지 준비를 생략하고, 정해진 시간과 횟수를 무시한다. 그게 매너리즘이다. 매너리즘은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16년째 활약하며 통산 3천 안타를 눈앞에 둔 스즈키 이치로의 경우 단 하루도 대충 한 적 없다. 그는 `준비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 전 식사와 스트레칭, 러닝 등의 준비를 잘하기 위해 명상, 가볍게 걷기를 선행한다. 철저한 자기관리에 사람들은 경탄하지만 정작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늘 노력할 뿐이라고 말한다.나도 어떤 형식이든 매일 글을 쓴다. 매너리즘은 스스로 만족할 때 찾아오는 것인데, 나에게는 한 번도 온 적 없다. 내 글이 형편없다는 걸 내가 너무 잘 아는 까닭이다. 더 잘 쓰고 싶어서 매일 쓴다. 매일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다. 하나쯤 얻어걸리라는 심정으로 쓴다. 그러다 정말 하나 얻어걸리면, 그건 얻어걸린 것이므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쓴다. 나도 한번쯤 내가 쓴 시를 읽고 천하의 절창이라며 울고 싶다. 그러면 그때부터 나는 눈 뜬 장님이다. 대가로 칭송받는 시인, 소설가들의 글이 몹시 망가져 비틀거리는 걸 안쓰럽게 읽은 적이 많다.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면 대충 한다. 더 노력할 게 없다고 여기는 순간, `만렙`(최고 레벨)을 달성했다고 자만하는 순간부터 대충 한다. 노력과 매뉴얼보다 자신의 경험 및 능력을 신뢰할 때 방심이 스며든다. 그러다 망한다. 대충 하면 아흔아홉 번 성공해도 백 번째에 크게 망하고, 규칙대로 열심히 하면 백번 내내 이븐파는 친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경계 근무를 서나 꾸벅꾸벅 졸면서 산보하듯 하나 아무 일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대충 하다가 철책에 구멍이 나고, 인민군이 노크해서 귀순한다.수십 년 전통을 자랑하는 식당의 음식 맛이 예전 같지 못한 경우가 더러 있다. 이젠 대충 해도 장사가 되니까 비싼 재료는 줄이고, 오래 걸리는 과정을 생략한다.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이제 막 개업한 식당 음식이 훨씬 훌륭하다. 긴장하고,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지난 주말, 영동고속도로에서 끔찍한 사고가 났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관광버스가 도로 정체로 인해 멈춰 있던 승용차를 들이받아 21살 여성 넷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여름휴가를 맞아 돈 모아 렌터카 타고 여행 다녀오던 길에 비명횡사했다. 사고 순간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을 보니 정말 참혹하다. 분노와 슬픔이 몰려오고, 생사 앞 인간의 무력함에 절망했다.살인 버스를 몬 자는 수십 년 경력 베테랑 기사였을 것이다. 매일 하는 운전이라서, 오래 해온 일이라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을 것이다. 나이 들어 체력과 시력, 반사신경이 감퇴한 건 생각 못하고, 제 경험과 기술만 철석같이 믿었으리라. 그 경험 가운데에는 조금 졸아도 아무 일 없고, 스마트폰을 만져도 아무 일 없고, 점심 반주를 하고 핸들을 잡아도 아무 일 없고, 규정 속도를 어겨도 아무 일 없던, `아흔아홉 번 대충`의 평화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매일 하는 일을 만만히 여긴 대가는 너무도 크다. 꽃 같은 목숨 넷을 어찌할 것인가?미친 화차(火車)처럼 들이닥친 죽음을 피하지 못한 이들은, 직업이든 학업이든 매일 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휴식과 충전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매일 하는 일을 대충 한 한 사람 때문에 매일 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온 청춘 넷이 죽었다. 아수라장이 된 영동고속도로를 보면서, 매일 하는 일을 대충 하는 정치인과 공무원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안일함과 적당주의 때문에 매일 하는 일을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 세월호가 그랬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그랬다. 매일 하는 일에 정직한 우리들은 `개 돼지`가 아니다.

2016-07-20

제주개와 흑돼지

▲ 이병철 시인닷새간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이른 휴가인 셈이다. 육지에 퍼붓던 장대비 대신 제주도엔 따가운 햇볕이 과즙처럼 쏟아졌다. 땡볕과 야자수, 더운 바람, 샌들과 선글라스의 행렬…. 마치 지중해에 온 것 같아 설렜다.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밀면 한 그릇을 먹고, 해안도로를 달렸다. 에메랄드빛 함덕 바다를 보고 솟구치는 환희를 견딜 수 없어 옷 입은 채로 뛰어들었다. 투명한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맥주를 마셨더니 세상이 다 만만했다. 내가 왕 같았다.만장굴, 한라산, 성산일출봉, 주상절리, 정방폭포 등 제주의 경이로운 자연경관에 감탄했다. 이름난 시장과 카페, 체험 공간에도 들렀다. 낚시꾼으로서도 최선을 다해 놀았다. 배를 타고 한치를 여러 마리 잡아와 회 뜨고, 튀기고, 데친 것도 모자라 속을 채워 순대로 만들어 먹었다. 갯바위에서 노래미와 용치놀래기를 낚아 회를 떠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여행 첫날,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중국 관광객들이다. 성산일출봉을 인해전술로 점령하고 있는데, 여기가 한국 땅인지 아니면 말 통하는 외국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일출봉 정상에서 나란히 앉은 네댓 명의 중국 남자들이 담배를 꼬나물다 그 꽁초를 아무데나 버렸다. 보다 못해 가서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그 미개함이 너무 견고해 도무지 알아먹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주변엔 온통 웃통을 벗거나 내의 차림의, 바로 옆 사람에게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화하는 중국인들뿐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서둘러 내려왔다.몰지각한 중국 관광객들 때문에 잡친 기분을 제주개가 풀어줬다. 더위를 피하러 들어간 한 카페 마당에서 만났다. 날렵한 몸과 초롱초롱한 눈이 과연 영물로 보였다. 3천 년 전에 제주도에 정착한 제주개는 온순하면서도 민첩해 예부터 야생동물 사냥에 발군이었다. 멸종된 줄 알았지만 1986년에 세 마리가 발견되었고, 번식에 노력한 결과 현재는 일반에 분양할 정도로 늘어났다. 카페 주인에게 물으니 단골손님을 알아보고 반길 정도로 영특하고, 멧돼지 같은 유해동물을 쫓을 만큼 용맹하단다. 그 늠름한 모습에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이날 저녁 식사가 환상적이었다. 현지인이 추천한 집에서 흑돼지구이를 먹었는데, 두툼한 고기를 멜젓(멸치젓)에 찍어 먹는 맛이 기가 막혔다. 먹어도 먹어도 젓가락이 멈춰지질 않아, 이러다 내가 돼지가 되겠구나 싶었다. 제주 흑돼지는 질병 저항력이 강해서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육질과 맛이 우수해 최고의 식재료로 각광받는다. 예전엔 인분을 먹여 키워 `똥돼지`로 불렀다. 인간은 똥을 주는데, 돼지는 살을 내어준다. 배설물을 고기로 바꿔내는 진정한 연금술사다. 입안에 감도는 흑돼지의 향과 포만감을 가득 안고 숙소에 몸을 눕혔다. 평소에 악몽을 자주 꾸는데, 낮에 만난 제주개가 드림캐처(악몽을 쫓아내준다는 수호신 또는 부적)가 되었는지 무더위 속 잠결이 함덕 바다처럼 청량했다.아침에 일어났더니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이라는 사람 때문에 한국이 시끄러웠다. “민중은 개돼지다”라는 막말을 마주하니 늠름한 제주견과 맛있는 흑돼지에게 미안해졌다. 인간을 대표해 사과하고, 개돼지의 유익함을 오래 생각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그래서 거기 기생해 피를 빨고, 알을 까고, 살을 갉아먹는 흡충, 기생충, 구더기 같은 것들보다야 개돼지가 훨씬 낫다. 자기들만 배불리고 살아남으려는 이기적 기생충보다 자기를 희생해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적 개돼지로 살고 싶다. 나향욱 같은 자들이 이룬 사회는 상류사회가 아니라`충(蟲)류사회`다. `충류`에게 묻는다. “너는 국민에게 한번이라도 충직하고 믿음직한 개였느냐. 한번이라도 국민을 먹고 살게 배불리는 돼지였느냐.”여행 동안 모기가 간혹 윙윙거렸지만 `막말충` 이상으로 거슬리는 충류는 없었다. 해변엔 반려견과 함께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고, 나는 돔베고기(제주식 돼지수육)와 흑돼지 돈가스를 또 맛있게 먹었다.

2016-07-13

비의 낭만에 대하여

▲ 이병철 시인비의 계절이 돌아왔다. 마른장마라는 조롱을 분풀이하듯 무섭게 쏟아 붓고 있다. 남부 지방에 160mm 장대비가 내린 데 이어 중부 지방엔 200mm의 물 폭탄이 투하되었다. 곧 태풍 `네파탁`도 북상한다고 한다. 시설물과 인명 안전에 유의해야할 때다.재해는 절대 있어선 안 되겠지만, 지난해 지독했던 가뭄을 생각하면 모처럼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반갑기도 하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비 내리기 전의 무거운 구름들과 젖은 공기를, 비 그친 거리의 물 냄새와 바닥에 번지는 가로등 불빛을 좋아한다. 빗소리 들으며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고, 비 맞는 게 좋아서 어지간해선 우산도 잘 쓰고 다니지 않는다. 비 오는 날 차로 한강 다리를 달리거나 비바람 몰아치는 포구의 선술집에 앉아 있기 좋아한다.지난해 여름, 프랑스 파리에서 연인과 함께 비를 맞으며 걸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부터 에펠탑까지, 우산이 없어 작은 손수건으로 한 뼘만큼의 하늘을 가린 채, 비에 흠뻑 젖어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때쯤엔 아예 춤을 추며 걸었다. 유람선 갑판에 앉아 비 내리는 세느 강을 오래 바라보았다. 비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갑자기 내린 비를 피해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로 숨어든 날이 있다. 여름이었고, 겨드랑에선 비에 섞인 땀 냄새가 났다. 정신없이 뛴 까닭일까. 숨은 뜨겁고 몸도 달았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두 눈에 글썽거리는데, 마주 앉은 여자아이에게서 연필 냄새가 났다. 덜 마른 빨래의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하얀 교복이 비에 젖어 반투명한 꽃이 되어 있었다. 말 없는 어색함 사이로 미끄럼틀을 때리는 빗소리, 매미 소리만 시끄러웠다. 그 아이를 좋아했지만, 소나기 그치듯 첫사랑은 금방 말라버렸다.화산유격장에서, 진흙탕에 누워 악명 높은 피티 체조 8번, 온몸을 비트는 중 교관이 `어머님 은혜`를 부르게 했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합창하는 순간 훈련장이 울음바다가 됐다. 다 큰 사내들이 쏟아지는 비를 입으로 다 받아먹으며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빛만 하염없이 두 뺨에 매달고 있었다.나쁜 기억도 있고, 슬픔도 있다. 집중호우에 의한 산사태로 이웃을 잃었고, 비 오는 날 반려견이 차에 치어 죽었다. 공주 유구천에서 낚시하다 삽시간에 불어난 물에 고립될 뻔했고, 부안 위도 갯바위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군대 전술 야영 중에 발 앞에 시퍼런 낙뢰가 떨어진 적도 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지난 2011년 여름 짧은 시간에 300mm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산이 무너진 곳이다.어떤 이에게는 낭만이고, 어떤 이에게는 눈물이다. 비에 의해 가족을 잃거나 재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비는 철천지원수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수해를 두고 `하늘이 야속하다`고 하지만, 정작 야속한 건 사람이다. 엉뚱한 데 예산과 인력을 허비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물바다가 되고 제방과 축대가 다 무너지고 나서야 대책을 마련하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수해 방지 예산을 대폭 줄였다가 서울을 `물의 도시`로 만들고 `오세이돈`이라는 치욕을 뒤집어 쓴 일을 기억한다.자연은 맹수다. 거기 맞서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인간이 노력하면 길들일 수도, 친해질 수도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말한다. “어느 날 밤, 눈으로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는 굉장한 강풍이 일었지요. 내가 자고 있는 오두막을 뒤흔들며 뒤집어엎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작 이걸 비끄러매고 필요한 곳은 보강해두었지요. 나는 불가에 홀로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어요. `이것 보게.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오두막에는 들어올 수 없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겠어.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 되네.`” 수해는 없다. 인재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비의 낭만을 자연에게 요구하고 싶지 않다. 사람에게, 위정자들에게,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다.

2016-07-06

영진이의 자전거

▲ 이병철 시인어릴 적 동네에 `영진아` 하고 부르던 한살 위 형이 있었다. 왜소한 몸, 흐리멍덩한 눈, 덜떨어진 `반푼이` 영진이는 생김새는 외계에서 온 ET 같았고, 굼뜨고 어수룩한 몸짓이 마치 거북이처럼 보였다. 영진이는 잦은 괴롭힘을 당했고, 놀림감이 되곤 했다. 영진이는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거북이 등껍질만 한 가방을 등에 멘 채 낡고 바람 빠진 자전거를 타고, 멸시와 조롱이 가득한 골목을 느릿느릿 빠져나갔다. 말도 표정도 없이 항상 풀 죽어 고개를 숙이고 다니던 영진이지만,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만큼은 얼굴이 환했다. 웃는 걸 본 것 같기도 하다.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몸에 맞지 않는 큰 교복을 입고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자전거를 타던 영진이를 마지막으로 보았다.20년 넘는 세월이 지났고, 영진이를 놀리던 꼬마들은 이제 동네에 살지 않는다. 매일 함께 뛰어놀던 그 아이들 얼굴조차 희미한 내 기억은, 존재감 없던 영진이를 간직할리 없었다. 기억에서 완전히 유실되어, 정말 까맣게 잊고 살았다.얼마 전 방배동 한 빌딩 앞에 놓인, 내가 좋아하는 조각 작품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그 길은 내 오래된 거리산책 코스다. 빌딩 앞을 지나는데, 저쪽에서 자전거를 탄 꼬마가 안장 위에서 신문을 펼쳐 읽느라 두 손은 핸들에서 떼고 고개는 신문에 파묻은 채 보도블록을 달려오는 것이었다. 곡예나 다름없는 운전이었다.“이 녀석아,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꾸짖으러 다가서려는 순간, 신문에 가려진 얼굴이 나타났다.영진이다. 틀림없는 영진이다. 몸은 왜소했으며 생김새는 ET 같고 몸짓은 거북이처럼 느렸다. 영진이는 여전히 등에 등껍질 같은 배낭을 멘 채 낡은 자전거를 달리고 있었다.세상 노을을 다 뒤집어썼는지 벌써 다 늙어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 자리에 발이 붙어버린 내게론 한번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 옛날 멸시와 조롱의 골목을 빠져나가듯, 도시의 소음을 스스로 음소거한 채 자동차와 상점과 사람들의 무표정을 지나쳐갔다.나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잃어버렸던 기억의 파편이 20년 너머에서부터 날아와 가슴에 직격으로 박혀들어, 숨도 못 쉬고 먹먹했다. 눈물샘에서 누군가 페달을 돌려 자꾸 뜨거운 것을 밀어내는지 두 뺨을 타고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살아있었구나, 저 자전거를 집 삼아 이불 삼아 20년을 달려왔구나, 저 자전거 위에서 만나고 헤어졌구나, 울고 웃었구나, 앙상한 다리로 페달을 돌리며 세상의 험한 비탈을 달려왔구나.눈물을 닦느라 정신없는 나를 골목의 전봇대처럼 세워둔 채 영진이는 지나가버렸다. 나를 알아봤을까? 몹시 미안하고 또 무안했다. `영진아, 이리와 봐.` 그 싸가지 없던 어린 날의 내 목소리가 귓가에 두근거렸다.`형!` 나는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린 그 한마디를 끝내 외치지 못했다. 다시 20년 너머로 가려는 듯, 녹슨 노을 속으로 스미어 사라지는 영진이의 자전거를 바라보며, 형, 영진이형… 한참을 중얼거리고 서 있었다.거리를 활보하는 자전거들을 보니 너무 낡은 영진이의 자전거가 차라리 꿈처럼 느껴졌다. 20년 전, 또래들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영진이 형!` 따뜻하게 불러줬다면 자전거 안장은 녹슬지 않았을 테고, 신문지로 가려야 할 아픈 세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 지도 모른다.손에 닿을 듯 하지만 결코 잡을 수 없는 시절이 있다. 괴로운 낮잠 중에 영진이의 자전거가 유년의 골목을 달리는 꿈을 꾼다. 그런데 거기 나는 보이지 않고 영진이만 보인다.빛이 너무 환해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잠꼬대처럼 내가 소리친다. “형, 영진이 형! 이리 와서 술 한잔해요.” 그는 들었는지 아니면 내키지 않는지, 고개를 돌려버린다.

2016-06-29

남성은 되지만, 여성은 안 된다고?

▲ 이병철 시인신안 섬마을에서 초등학교 여교사가 학부모 등 남성 3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술을 강권해 취하게 한 후 관사로 데려다준다고 하면서 범죄를 저질렀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후 지역 주민들 반응이 가관이었다. “젊은 남자들이 그럴 수도 있지”, “여자가 꼬리치면 안 넘어올 남자가 어디 있나”, “어떻게 처녀가 술을 그렇게 마셔” 따위 정신 나간 이야기를 듣자니 인간에 대한 환멸이 몰려 왔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자는 지옥”이다. 고려대 남학생들이 단톡방에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심각한 언어성폭력을 가한 것이 밝혀졌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찌질`하다. 오간 대화를 보면 `성교`라는 단어만 들어도 지들끼리 몸을 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중학생들 같다. 머릿속이 `야동` 판타지로 가득 찬 철부지들이다. 그들을 옹호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 “자기들끼리 한 말인데 어때”, “실제 행동한 게 아니잖아”, “원래 남자들은 다 그래” 같은 말은 모두 공범의식의 발로다.네 명의 여성이 연예인 박유천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대부분 유흥업소 종업원들인데,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다. “꽃뱀들이 제대로 물었네”, “몸 파는 여자들이 감히 성폭행 운운해?” 등 비아냥거림 속에는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그저 육체로 여기는 동물적 사고와 `씨받이`, `수청`으로 대표되는 전근대의 가부장적 성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혐의대로라면, 박유천은 치밀한 성범죄자다. 직업 특성상 어디다 쉽게 하소연 못하는 여자들만 대상으로 CCTV 없는 화장실에서 일을 저질렀다.남자는 그래도 되는데 여자는 그러면 안되는 게 너무나 많다. 남자는 외도를 해도, 성매매를 해도, 음담패설과 성희롱을 해도 `남자니까` 괜찮은데, 여자는 술을 마셔도, 짧은 옷을 입어도, 늦게 돌아다녀도, 성적인 농담을 해도 `여자니까` 안 된다. 남자들은 터무니없이 당당하고, 여자들은 묵인한다. 성매매를 하고 바람을 피우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의 문제이니 그저 들키지만 말라는 여자들의 태도도 문제다. 나는 영웅호색이라는 말도 싫고, 야당 지도자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권력자가 “남자 아랫도리 문제는 신경 쓰지 말라”며 일축했다는 일화 속 `남성 아랫도리 프리패스 주의`도 불편하다.박유천을 고소한 여성들더러 꽃뱀, 매춘부 운운한 자들은 신안 성폭행범을 두둔한 지역 주민과 다를 바 없다. 여성들이 왜 유흥업소에서 일하는가?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것이다. 그들 말마따나 `쉽게 돈 버는` 성매매 인프라는 남자들이 만든 것이다. `남자는 원래 다 그래`와 `남자는 그래도 되지만 여자는 안 돼`는 모두 남자들의 공범의식과 침묵, 용기 없는 소심함이 키워낸 암세포들이다. 어떤 남자들은 나더러 고상한 척한다고, 가식적이라고 할 것이다. 맞다. 선배 시인들이 어린 여자 시인들을 앞에 두고, 또는 없는 자리에서 음담패설과 성희롱하는 걸 방관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선배라서, 자리를 어색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하는 내 비겁함이 싫어 문인들 술자리에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나쁜 입은 다물게 하고, 나쁜 손은 꺾어버릴 생각이다. 원래 남자들은 다 그렇다면, 나도 똑같음을 인정하고 내 안의 괴물이, 야수가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이성과 합리, 신사적 태도로 스스로를 제어해야 한다. 자기 통제에 실패해 선을 넘는 친구나 지인이 있다면 그가 폭주하지 못하게 붙잡아줘야 한다. 그 옛날 남편들은 술, 도박, 외도 3관왕에다 아내 폭행까지 더한 그랜드슬램 달성자들이다. 그게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모진 세월을 산 한 할머니의 TV 인터뷰가 기억난다.“다시 태어나면 새가 되어 세상을 맘껏 날아다니고 싶다”고. 남자들이여, 우리 아내와 딸, 누이와 애인들에게만큼은 그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스런 속박을 물려주지 말자. `여자는 안 돼`에 가두지 말고, `남자는 돼`로 도망가지 말자.

2016-06-22

인문학적 대화를 위한 제안

▲ 이병철 시인지난주 경북매일 사회2부 데스크인 홍성식 시인의 생일을 맞아 지인 몇이 서울 상수동에 모여 조촐한 파티를 가졌다. 모던한 분위기의 한정식집에는 시인을 아끼고 또 그로부터 귀애를 받는 이들이 모여앉아 술잔과 함께 풍요로운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 자리가 매우 `인문학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시인, 저술가, 출판인, 방송국 피디, 사진작가, 의원 비서, 기자 등 여러 직군의 참석자들은 문학, 음악, 영화, 음식, 여행, 연애, 정치, 사주명리, 종교, 취미, 술 등을 주제로 대화했다. 지식 나열이나 과시가 아닌, 감각하고 체험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식이었다. 술과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홍성식 시인이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와 백석의 `여승`을 일인극처럼 멋지게 읊었다. 감동적이었다. 나는 전윤호 시인의`늦은 인사`를 답시로 암송했다.평범한 술자리를 굳이 인문학적 대화라고 칭한 것은, 인문학이 멀리 있거나 특별한 것이 아닌 까닭이다. 얼마 전 `인문학 강의`를 표방하는 한 티브이 프로그램이 논란을 일으켰다. 인기 학원 강사인 강연자가 자기 전공이 아닌 `조선 미술사` 강의를 펼쳤다. 대중들은 감탄했지만 이내 엉터리임이 탄로 났다. 멀쩡히 생존해 있는 화가의 작품을 장승업 그림이라고 소개하고, 서양 미술의 특징도 제멋대로 왜곡해 전달했다. 그를 `인문학 종결자`라고 홍보한 방송국도 망신당했다.`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이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상도 가짜 인문학 강의 해프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는 척`하고 싶은 욕심, 현학과 지식을 과시하는 지적 허영,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근대적 가치관에의 맹종이 모여 이룬 결과다. 근대는 지식의 시대이므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앎을 추구한다.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 하고, 알아야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그러나 `안다`는 것은 이미 대상에 대한 판단이 완료되었음을 뜻한다. 새로움이 돋아날 수 없는 불모의 상태다. 그날 자리가 좋았던 것은, 많은 대화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기 지식의 울타리 안에 타인을 가두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끝까지 귀 기울여주었다. 한 주제를 두고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들이 자유롭게 오갔다. 그 대화에 참여하기 위한 입장료는 지식이 아닌 감성이었다.인문학적 대화는 지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물론 지식이 있으면 조금 더 풍요롭다. 하지만 지적능력보다는 감수성이 중요하다. 인텔리가 되려는 강박보다는 딜레탕트로서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태도가 먼저 요구된다. 지식만 쌓으면 독불장군이 되기 쉽다. 반면 풍부한 감성은 타인과의 교감을 가능케 한다. 인문학적 대화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해보겠다.첫째, “아는 바를 말해봐” 대신 “느낀 것을 말해봐”라고 하자. 둘째, 욕설과 비속어는 사용하지 말자. 셋째, 정치와 사회이슈 등 대중적 관심사에 대해 대화할 땐 미디어 보도 내용을 따라 읊지 말고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을 이야기하자. 넷째, 한 사람이 발언권을 독차지하지 말자. 다섯째, 타인의 해석과 취향을 평가하지 말자. 여섯째, 같은 말이라도 은유적으로 표현해 듣는 사람이 풍요로운 상상을 할 수 있게 하자.이를테면 맛 표현인데,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 맛을 `떫다`, `묵직하다` 같이 획일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비에 젖은 개 냄새가 난다”거나 “센 강 위로 별빛이 반짝이는 맛”이라고 하는 식이다. 일곱째, 시 낭송이나 노래(고성방가 제외), 음악 연주, 영화 대사나 책 구절 소개를 더해보자.이러한 것들은 결코 어렵지 않고, 티브이 강연을 통해 배워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은 대학 강의실이나 티브이 강연 프로그램, 두꺼운 책 속에만 있지 않다. 지식보다 감성이 먼저 작동하는 일상의 자리에 있다. 자기중심이 아닌 타자지향의 태도 속에 있다. 인문학적 대화는 오늘 저녁 밥상 위에서,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2016-06-15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세상

▲ 이병철 시인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애먼 사람이 깔려 죽었다. 여섯 살 난 아들과 만삭의 아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전남 곡성의 아파트 옥상에서 한 대학생이 자살을 위해 뛰어내렸고, 마침 귀가 중이던 곡성군청 공무원 양대진씨와 부딪쳐 둘 다 목숨을 잃었다. 두 죽음 모두 안타깝지만, 양씨의 경우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끝내 신발을 벗고 들어가지 못한 집에는 저녁 밥상이 차려져 있었을 것이다. 어린 아들이 삐뚤빼뚤 벽에 그려 넣은 낙서도 있고, 새로 태어날 아기가 입을 작은 옷도 있었을 것이다. 양씨와 가족들은 그 일상의 행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 중에 전동차가 들이닥쳤다. 외주업체 직원이 사망했다. 숨진 김군은 열아홉 살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컵라면과 공구가 들어 있었다. 밥도 못 먹고 종일 강도 높은 작업을 혼자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스크린도어 수리 일을 하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동차를,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세상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전동차보다 더 무섭게 김 군을 윽박질러, 쫓기듯 몸을 맡긴 곳이 그 비좁은 스크린도어 안이었으리라. 그는 생일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아침이면, 이젠 영원히 오지 않는 그 아침이면 컵라면 대신 어머니가 끓여준 미역국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강남역 화장실에서 아무 죄 없는 여성이 죽임을 당했다. 남양주 지하철 공사현장이 붕괴되어 일용직 근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사람이 떨어지고, 벽돌이 떨어진다. 뒤에서 누군가가 칼로 등을 찌른다. 지하철 전동차가, 버스가, 트럭이 사방에서 돌진한다. 가습기 틀어놓고 자다 죽는다. 문병 갔다가 괴질에 걸려 죽는다. 보도블록이 푹 꺼져 싱크홀에 빠진다. 머리 위, 등 뒤, 발밑, 양 옆, 집 안팎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세상은 원래 예측 불가능한 우연과 혼돈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삶은 언제나 죽음을 품고 있지만, 호스피스 병동 환자도 아니고 전쟁터의 군인도 아닌 우리가 이렇게 단 하루만큼의 내일도 약속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니 숨이 턱턱 막힌다. `오늘도 무사히` 스티커를 자동차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가방, 책, 신발, 냄비, 화장실, 변기, 꽃잎, 강물, 당신과 나, 유무형의 온갖 것에 다 붙이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운전 중에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캄캄했다. 두어 차례 더 그러자 차를 세우고 친구와 운전을 교대했다. 다음날 시간강사 출강을 해야 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수업은 내내 힘들었고, 겨우 마치고 퇴근하던 저녁에 또 현기증이 일었다. 혼자 사는 집에 있다가 괜히 불안하여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검사 결과 별 이상이 없어 귀가했다. 아침에 볼일이 있어 알람을 맞춰 놓고 눕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일을 확신하는 나의 습관이 불현듯 낯설어서 그랬다. 그럼에도 알람 소리에 눈을 뜨리라는 것을 믿는 마음이 고마워서 그랬다. 아니, 아침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천진함이 무섭게 느껴졌다.이웃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모두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 있다. 사회가 죽음을 조장하고 조성하고 조직한다. `반지하 원룸에 혼자 사는 시간강사`인 나 역시 사회 구조가 펼친 죽음의 네트워크에 붙들려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내일`을 말할 수 없다. 다음에 만나자고 약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해야 한다. 간절히 바라보고 귀 기울이고 어루만져야 한다. 아름답지만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언제 어디서 죽어나갈지 모르는, 영화 `데스티네이션` 같은 비명횡사의 시대다.한 소설가는 1년에 한 번 유서를 업데이트한다고 한다.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선 한 장의 유서를 쓰는 일이 미래 목표를 적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다. 그나마 주어진 오늘이나 제대로 살고 싶다.

2016-06-08

고등어는 억울하다

▲ 이병철 시인고등어 매출이 급감했다. 정부가 가정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고등어를 지목하자 언론에서도 장단을 맞췄다. 정부 발표와 언론 보도만 보면 고등어가 무슨 오염물질덩어리인 것만 같다. 칼슘과 단백질, DHA가 풍부한 맛있는 생선, 게다가 저렴하기까지 한 고마운 고등어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창문 열고 환기 시키며 구우면 아무 문제없단다. 충신에게 역적 누명 씌워 유배 보내는 어리석은 역사가 서민들 밥상 위에서 재현되었다. 김창완의 `어머니와 고등어`, 노라조의 `고등어`는 불온선전가요란 말인가. 정말 고등어가 문제라면 그 생선이 잡히는 바다가 공해의 본산이란 말인가?.고등어 하나로는 부족했는지 이번엔 삼겹살을 저격하고 나섰다. 고기 굽는 연기를 차단 못하는 식당의 영업을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장대비 맞으면서 옆 사람이 분무기 뿌렸다고 성내는 꼴이다. 어디에든 책임을 떠다 넘기고 싶겠지만, 삼겹살은 건드리면 안 된다. 서민들이 그나마 큰 부담 없이 외식 기분 내면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다. 불가침의 영역이 있는 법이다. 인물로 치자면 삼겹살은 이순신, 김연아와 같은 존재다.경유차가 미세먼지의 가장 큰 원인이라며 경유값을 올린다고 한다. 환경에도 도움 되고 경제적이라며 경유차 사라고 부추길 땐 언제고 이젠 타지 말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주장하는 논리가 빈약하면 자꾸 사족을 덧붙이는데, 지금 정부 하는 모양이 그렇다. 왜 중국에는 아무 말 못하는가? 미세먼지 대부분이 중국에서 발생한 것인데, 그쪽은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왜 애꿎은 고등어, 삼겹살, 경유차를 탓하나? 학창 시절에 그런 녀석들 꼭 있었다. 힘센 놈에겐 찍소리도 못하고,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만 괴롭히는 `양아치`들 말이다.탁상행정과 과잉충성이 문제다. 고등어 사태는 말을 위한 말, 의견을 위한 의견, 그걸 분별 못하는 리더의 무지와 비전문성, `뭐라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허튼 짓인 줄 알면서도 오버해서 결과를 더 만들어내려는 관계부처들이 어우러져 만든 촌극이다. 근무 태만한 군의관을 징계 차원에서 격오지 부대로 보낸다는 국방부의 한심한 발상도 그렇다. 최전방 격오지가 무슨 유배지인가? 긍지를 가지고 근무하는 병사들 사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병사들에게 더 나은 복지와 혜택을 주지는 못할망정 불성실한 군의관에게 귀한 몸을 맡기게 하다니, 그런 계획을 제안한 자에게 미세먼지를 먹이고 싶다.21사단 공병 장교로 복무하던 2010년 12월, `VIP`께서 동부전선 최전방 해발 1242미터 고지 가칠봉 대대에 방문한다고 해 난리가 났다. 구불구불한 비포장 산악도로를 일주일 내내 오르내리며 소대원들과 지뢰 및 폭발물 탐지 작업을 했다. 가칠봉 대대는 더 호들갑이었다. 병사들의 헌 운동화 대신 새 운동화를 자리마다 배치하고, 한겨울에 꽃과 잔디를 심어 없던 화단도 만들었다. 가관은 러닝머신을 조달해 막사 내에 둔 것이다. `보여주기`의 극치였다.VIP께선 우리가 고생하며 지뢰 탐지하고 쓸고 닦은 산악도로 대신 헬기를 타고 가칠봉에 방문했다. 죽 쒀서 개도 못 준 꼴이었다. 탁상행정과 과잉충성, 리더의 어리석음이 이룬 삼위일체는 군대뿐만 아니라 기업과 국가 운영에도 만연하다. 세월호 구조 실패했다고 해경을 해체한 것이나 강남역 살인사건 후속 대책으로 남녀공용화장실을 분리하겠다는 것 역시 핵심을 놓친 근시안적 사고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김흥국이 “건강을 위해 라면을 먹지 않는다”고 한 김구라에게 뜬금없이 “말조심하라”며 호통을 친 일이 있다. 라면 장사 하는 사람들 굶어 죽으라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다. 정부의 말 한마디에 어민과 유통·가공업체, 생선구이 가게까지 다 망하게 생겼다. 말조심해야 한다. 곧 닭꼬치, 노가리, 곱창, 막창, 캠핑, 전국체전 성화, 모기향, 불꽃놀이까지 다 규제하게 생겼다. 나부터 잡아가라. 엊그제도 경유차 타고 나가 캠핑하며 삼겹살 굽고 생선 구워 먹었다.

2016-06-01

부서진 오월

▲ 이병철 시인3월에 종영한 드라마 `시그널`을 지난 주말 동안 몰아서 다 봤다. 정규 방영 때 시청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일주일 내내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혔을 것이다. 이재한 형사(조진웅)의 대사 몇 개가 기억에 남는다. “죄를 지었으면 돈이 많건 빽이 있건 죗값을 받게 해야죠. 그게 우리 경찰이 해야 될 일이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장면과 “며칠 전만 해도 살아 있는 사람이었는데, 날 위로해주고, 웃어주고, 착하고, 그냥 열심히 살던 사람이었는데! 그 미친놈 똑같이 죽여 버릴 겁니다” 라며 포효하는 대목에서 `죗값`과 `똑같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한참 머문다.집값, 밥값, 생활물가, 등록금… 모든 게 다 비싼데 죗값만 턱없이 싸다.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을 흉기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으로 세상이 뒤숭숭하다. 경찰은 이 살인범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고 발표했다. 재판에서 정신분열이나 심신미약에 의한 살인이 인정될 경우 선고 형량이 가벼워질 것이다. 어버이날에 두 자녀가 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며칠 전에는 부산에서 50대 남성이, 인천 주택가에서 고교생이 아무에게나 흉기를 휘둘렀다.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작동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 죽이는 게 무섭지 않은 것이다. 죗값이 싸니까.술 먹고 심신미약상태에서 사람 죽였다고 10년, 정신분열증으로 사람 죽였다고 7년, 초범이고 뉘우친다고 5년, 미성년자라고 3년,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무혐의, 돈 있고 빽 있어서 집행유예…. 이게 죗값인가? 죄는 큰데 그 값은 너무 적다. 제대로 된 죗값은 도대체 누가 치르나? 결국 선량한 사람들이 다 뒤집어쓴다. 싼값에 용서를 얻은 이들은 출소해서 또 사람을 죽인다. 재범이 아니더라도, 잠재적 범죄자들은 `10년 살고 나오면 그만`이라고, `재워주고 밥 먹여주는 감옥 생활도 할 만하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이들이 다 치르지 않은, 또 치르지 않을 죗값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20대 여성이, 어린 여자아이들이, 우리의 가족과 이웃이 살해당하고 성폭행 당하고 칼에 찔리고 벽돌로 머리를 강타 당한다.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부서진 사월`은 알바니아 고원 지대에 아직도 남아 있는 관습법 `카눈`을 소재로 하고 있다. 소설의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는 대신 `카눈` 이야기를 짧게 해보려고 한다. `피는 피로써 값을 치른다.` 이는 카눈 26항 125조의 내용이다. 누군가 살해되어 피를 흘리면, 그 가족은 `피의 복수`라는 명분을 얻게 된다. 가해자 또는 그 집안 남자를 살해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죽고 죽이는 끝없는 보복으로 이어진다.이 야만적 관습법이 다시 부활한 배경에 눈길이 간다. 1990년에 공산정권이 붕괴된 후 들어선 정부의 부패가 문제였다. 부패한 정부와 공권력을 사람들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사법체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15세기의 관습법인 카눈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필리핀에서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온갖 마약과 매춘, 납치, 살인 등 강력범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기존 사법체계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이 `흉악범을 모두 죽일 것`이라며 사형제 부활을 공언한 두테르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오늘날 법이 아무리 체계화되었다고 해도 법이 닿지 못하는 사각이 분명 존재한다. 법이 어루만지지 못하는 슬픔이 넘쳐난다. 법이 위로는 커녕 2차 가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사법체계가 알바니아나 필리핀처럼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죗값이 비싸야 법도 권위가 생긴다. 법이 삼엄하게 느껴져야 한다. 도무지 죄 지을 생각이 들지 않아야 한다.“내 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그놈은 내가 반드시 죽인다”고 한 `개구리 소년` 아버지의 형형한 음성이 아직도 가슴을 날카롭게 찌른다. “내가 용서 안 했는데 누가 용서를 해?”라던 영화 `밀양` 속 전도연의 절규도 생생하다.

201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