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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대화를 위한 제안

등록일 2016-06-15 02:01 게재일 2016-06-1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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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지난주 경북매일 사회2부 데스크인 홍성식 시인의 생일을 맞아 지인 몇이 서울 상수동에 모여 조촐한 파티를 가졌다. 모던한 분위기의 한정식집에는 시인을 아끼고 또 그로부터 귀애를 받는 이들이 모여앉아 술잔과 함께 풍요로운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 자리가 매우 `인문학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시인, 저술가, 출판인, 방송국 피디, 사진작가, 의원 비서, 기자 등 여러 직군의 참석자들은 문학, 음악, 영화, 음식, 여행, 연애, 정치, 사주명리, 종교, 취미, 술 등을 주제로 대화했다. 지식 나열이나 과시가 아닌, 감각하고 체험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식이었다. 술과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홍성식 시인이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와 백석의 `여승`을 일인극처럼 멋지게 읊었다. 감동적이었다. 나는 전윤호 시인의`늦은 인사`를 답시로 암송했다.

평범한 술자리를 굳이 인문학적 대화라고 칭한 것은, 인문학이 멀리 있거나 특별한 것이 아닌 까닭이다. 얼마 전 `인문학 강의`를 표방하는 한 티브이 프로그램이 논란을 일으켰다. 인기 학원 강사인 강연자가 자기 전공이 아닌 `조선 미술사` 강의를 펼쳤다. 대중들은 감탄했지만 이내 엉터리임이 탄로 났다. 멀쩡히 생존해 있는 화가의 작품을 장승업 그림이라고 소개하고, 서양 미술의 특징도 제멋대로 왜곡해 전달했다. 그를 `인문학 종결자`라고 홍보한 방송국도 망신당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이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상도 가짜 인문학 강의 해프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는 척`하고 싶은 욕심, 현학과 지식을 과시하는 지적 허영,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근대적 가치관에의 맹종이 모여 이룬 결과다. 근대는 지식의 시대이므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앎을 추구한다.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 하고, 알아야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이미 대상에 대한 판단이 완료되었음을 뜻한다. 새로움이 돋아날 수 없는 불모의 상태다. 그날 자리가 좋았던 것은, 많은 대화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기 지식의 울타리 안에 타인을 가두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끝까지 귀 기울여주었다. 한 주제를 두고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들이 자유롭게 오갔다. 그 대화에 참여하기 위한 입장료는 지식이 아닌 감성이었다.

인문학적 대화는 지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물론 지식이 있으면 조금 더 풍요롭다. 하지만 지적능력보다는 감수성이 중요하다. 인텔리가 되려는 강박보다는 딜레탕트로서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태도가 먼저 요구된다. 지식만 쌓으면 독불장군이 되기 쉽다. 반면 풍부한 감성은 타인과의 교감을 가능케 한다. 인문학적 대화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해보겠다.

첫째, “아는 바를 말해봐” 대신 “느낀 것을 말해봐”라고 하자. 둘째, 욕설과 비속어는 사용하지 말자. 셋째, 정치와 사회이슈 등 대중적 관심사에 대해 대화할 땐 미디어 보도 내용을 따라 읊지 말고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을 이야기하자. 넷째, 한 사람이 발언권을 독차지하지 말자. 다섯째, 타인의 해석과 취향을 평가하지 말자. 여섯째, 같은 말이라도 은유적으로 표현해 듣는 사람이 풍요로운 상상을 할 수 있게 하자.

이를테면 맛 표현인데,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 맛을 `떫다`, `묵직하다` 같이 획일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비에 젖은 개 냄새가 난다”거나 “센 강 위로 별빛이 반짝이는 맛”이라고 하는 식이다. 일곱째, 시 낭송이나 노래(고성방가 제외), 음악 연주, 영화 대사나 책 구절 소개를 더해보자.

이러한 것들은 결코 어렵지 않고, 티브이 강연을 통해 배워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은 대학 강의실이나 티브이 강연 프로그램, 두꺼운 책 속에만 있지 않다. 지식보다 감성이 먼저 작동하는 일상의 자리에 있다. 자기중심이 아닌 타자지향의 태도 속에 있다. 인문학적 대화는 오늘 저녁 밥상 위에서,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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