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계절이 돌아왔다. 마른장마라는 조롱을 분풀이하듯 무섭게 쏟아 붓고 있다. 남부 지방에 160mm 장대비가 내린 데 이어 중부 지방엔 200mm의 물 폭탄이 투하되었다. 곧 태풍 `네파탁`도 북상한다고 한다. 시설물과 인명 안전에 유의해야할 때다.
재해는 절대 있어선 안 되겠지만, 지난해 지독했던 가뭄을 생각하면 모처럼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반갑기도 하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비 내리기 전의 무거운 구름들과 젖은 공기를, 비 그친 거리의 물 냄새와 바닥에 번지는 가로등 불빛을 좋아한다. 빗소리 들으며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고, 비 맞는 게 좋아서 어지간해선 우산도 잘 쓰고 다니지 않는다. 비 오는 날 차로 한강 다리를 달리거나 비바람 몰아치는 포구의 선술집에 앉아 있기 좋아한다.
지난해 여름, 프랑스 파리에서 연인과 함께 비를 맞으며 걸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부터 에펠탑까지, 우산이 없어 작은 손수건으로 한 뼘만큼의 하늘을 가린 채, 비에 흠뻑 젖어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때쯤엔 아예 춤을 추며 걸었다. 유람선 갑판에 앉아 비 내리는 세느 강을 오래 바라보았다. 비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해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로 숨어든 날이 있다. 여름이었고, 겨드랑에선 비에 섞인 땀 냄새가 났다. 정신없이 뛴 까닭일까. 숨은 뜨겁고 몸도 달았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두 눈에 글썽거리는데, 마주 앉은 여자아이에게서 연필 냄새가 났다. 덜 마른 빨래의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하얀 교복이 비에 젖어 반투명한 꽃이 되어 있었다. 말 없는 어색함 사이로 미끄럼틀을 때리는 빗소리, 매미 소리만 시끄러웠다. 그 아이를 좋아했지만, 소나기 그치듯 첫사랑은 금방 말라버렸다.
화산유격장에서, 진흙탕에 누워 악명 높은 피티 체조 8번, 온몸을 비트는 중 교관이 `어머님 은혜`를 부르게 했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합창하는 순간 훈련장이 울음바다가 됐다. 다 큰 사내들이 쏟아지는 비를 입으로 다 받아먹으며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빛만 하염없이 두 뺨에 매달고 있었다.
나쁜 기억도 있고, 슬픔도 있다. 집중호우에 의한 산사태로 이웃을 잃었고, 비 오는 날 반려견이 차에 치어 죽었다. 공주 유구천에서 낚시하다 삽시간에 불어난 물에 고립될 뻔했고, 부안 위도 갯바위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군대 전술 야영 중에 발 앞에 시퍼런 낙뢰가 떨어진 적도 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지난 2011년 여름 짧은 시간에 300mm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산이 무너진 곳이다.
어떤 이에게는 낭만이고, 어떤 이에게는 눈물이다. 비에 의해 가족을 잃거나 재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비는 철천지원수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수해를 두고 `하늘이 야속하다`고 하지만, 정작 야속한 건 사람이다. 엉뚱한 데 예산과 인력을 허비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물바다가 되고 제방과 축대가 다 무너지고 나서야 대책을 마련하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수해 방지 예산을 대폭 줄였다가 서울을 `물의 도시`로 만들고 `오세이돈`이라는 치욕을 뒤집어 쓴 일을 기억한다.
자연은 맹수다. 거기 맞서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인간이 노력하면 길들일 수도, 친해질 수도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말한다. “어느 날 밤, 눈으로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는 굉장한 강풍이 일었지요. 내가 자고 있는 오두막을 뒤흔들며 뒤집어엎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작 이걸 비끄러매고 필요한 곳은 보강해두었지요. 나는 불가에 홀로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어요. `이것 보게.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오두막에는 들어올 수 없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겠어.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 되네.`” 수해는 없다. 인재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비의 낭만을 자연에게 요구하고 싶지 않다. 사람에게, 위정자들에게,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