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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나를 청탁한다

등록일 2016-10-05 02:01 게재일 2016-10-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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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나는 한 번도 고가의 선물이나 봉투를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김영란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대학 시간강사와 경북매일 칼럼니스트 신분으로도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가 되는지 궁금해서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알아본 결과 대학 시간강사는 교원이 아니므로 적용되지 않는다. 칼럼니스트 역시 언론사 임직원이 아니므로 해당되지 않을 듯하다. 나는 공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한 끼 식사는 인당 3만원을 넘을 수가 없다. 3만원이면 웬만한 음식은 다 먹는 돈이다. 네 명이서 고기를 먹어도 마장동 한우 모둠 세트 기준으로 배부르게 먹고 냉면 후식까지 추가할 수 있다. 중식당에서 3만원이면 깐풍기나 라조기, 양장피 또는 팔보채에 짜장면을 함께 먹을 수 있다. 3만원이 넘는 비싼 식사를 먹어도 각자 `더치페이` 계산하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선물은 5만원까지만 허용된다. 5만원이면 괜찮은 와인 한 병, 중저가 와인 두 병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사과, 배, 바나나, 포도 등으로 구성된 과일바구니도 충분히 모양을 낼 수 있다. 고기를 선물하려거든 한우 대신 한돈을 푸짐하게 포장하면 된다. 녹차 먹인 보성녹돈 목살 다섯 근에 5만원이다. 영광굴비도 5만원이면 나름 구색을 갖춰 선물할 수 있다.

경조사비는 10만원 제한이다. 김영란법 시행 전에 자녀들 시집 장가보낸 공직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고, 혼기가 찬 자녀를 아직 결혼 못 시킨 이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게 우리 경조사비 문화 아닌가. 나는 20만원 냈는데 10만원밖에 회수(?)되지 않는 억울함에 가슴 치는 사람들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부정과 비리로 얼룩졌으면 이렇게 엄마가 초등학생 자녀 용돈 상한선 정하듯이 하는 법적 가이드라인이 세워졌겠는가. 정치, 기업, 언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육, 종교, 군, 체육계까지 부정부패에 얼룩지지 않은 데가 없다. 나는 20년 전 초등학교 야구부 시절에 코치가 공공연하게 학부모들에게 고가의 향응을 요구하고, 술집서 진탕 퍼마신 주대를 학부모 이름으로 달아놓는 등 추악한 자태를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대놓고 요구하는 자, 은근히 요구하는 자, 알아서 갖다 바치는 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공하는 자들이 어우러져 뇌물공화국을 만들었다. 공병 장교로 근무하던 때, 민간 건설업체들이 군 공사 수주를 받기 위해, 또는 공사 감독을 느슨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영관급 장교뿐만 아니라 말단 소위들에게도 상품권과 디지털카메라, 과일바구니, 현금 등을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내가 속한 부대에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공병 병과에서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이어져 온 악습이라고 했다.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안다”던 영화 대사처럼, 일부 장교들은 연말연시면 건설 업체 사람들에게 “손이 허전하다”는 등의 노골적 사인을 내기도 했단다. 차떼기나 사과박스, 옷 로비에 비하자면 이런 건 애들 장난 수준이다.

남한테 얻어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 비싼 걸 대접해야 성의 표현이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정신 차릴 때가 되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내 돈으로 사면 그만이다. 사 먹을 능력 없으면 먹지 마라. 공직자들은 누가 사주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가질 수 있다.

김영란법은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함이지만, 개개인의 거지근성과 노예근성을 고치는 데에도 기능할 수 있다.

엊그제, 김영란법 시행 이후에 생일을 맞았다. 법의 눈치를 보느라 지인들이 내게 선물을 주지 않은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나 스스로 내게 선물을 줬다. 평소 갖고 싶던 낚시 용품들을 잔뜩 샀다. 나를 좌우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나는 나에게 나를 청탁한다. 내가 나를 격려하고 접대한다. 더 열심히 살아달라고, 더 좋은 글 써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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