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장면은 이미 나왔다. 남자 펜싱 에페 결승에서 박상영이 보여준 기적의 역전 드라마다. 14대 10, 한 점만 더 내주면 지는 절벽 끝에 서서 날아오는 칼날을 모두 피했다. 피하고 찌르고, 막고 찔렀다. 에페라는 종목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공격 범위인데다 서로 동시에 찌르면 한 점씩 주어진다. 이 에페에서 한 점도 내주지 않고 자기 점수만 다섯 번 연속 득점한다는 것은 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13대 9로 뒤진 채 마지막 라운드를 앞둔 휴식 시간, 박상영이 의자에 앉아 무언가 중얼거리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는 확신과 열정에 가득 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아니 우리가 알 수 없는 땀과 눈물의 과거, 또는 그로부터 이미 완성된 미래를 응시하며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해냈다. 나는 그 장면을 백 번도 더 본 것 같다. 처음 그걸 봤을 땐 가슴이 뛰고 눈물이 흐르는 걸 주체 못해 미칠 뻔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중얼거리기만 해도 온몸이 떨리고 눈이 벌게진다.
박상영의 `할 수 있다`에 젊은 사람들이 많은 용기와 힘을 얻었다. 희망 없고 암울한,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나도 `할 수 있다`며 기적 같은 역전을 꿈꾸게 해준 것이다. 박상영은 우리 나이로 올해 스물두 살이다. `할 수 있다`에 청년들이 유독 공감한 것은 그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래이자 어린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펜싱을 한 `흙수저`이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무릎 부상을 극복하고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그를 메달 후보로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무명의 그가 세계적 강자인 게자 임레와 싸워 이겼다.
청년들은 여러모로 처지가 비슷한 박상영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현실의 고난들이 게자 임레의 칼날처럼 사방에서 날아 들어오지만 끝내 이길 수 있다는 희망,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꺾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정신이자 신드롬이 되는 중이다. 우리도 그의 과거처럼 눈물과 좌절로 얼룩졌으니까, 그의 오늘처럼 절벽 끝에서 이 악물고 아등바등 버티는 중이니까, 그의 내일처럼 기적 같은 역전의 드라마를 이루어낼 테니까, 할 수 있다.
기성세대들이 한강의 기적이니 새마을운동 운운하며 `해봤어?`라든가 `안 되면 되게 하라`를 말하는 건 전혀 와 닿지 않는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 성공한 방식을 따르라고 강요할 뿐이지 그때와 지금 세상이 다르다는 걸 조금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라진 세상의 양면 중 경제 발전이라는 밝은 면만 자부하지 기득권 갑질, 철밥통, 빈부격차, 부정부패, 수저계급론, 천민자본주의 같은 어두운 면은 외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뤄낸 이 달라진 세상에서, 자신들이 성공한 방식으로 청년들이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지 못한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에 성공해서는 개천을 아예 폐쇄해버린 자들이다. 저 앞에 뒷짐 지고 선 채 제 자식에겐 `해봤어?` 대신 `아무것도 하지 마`, `안 되면 되게 해줄게`라고 하면서 남의 자식들에겐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런 자들의 천 마디 `명언`보다 박상영의 한 마디 혼잣말이 훨씬 더 용기를 준다. `우리 땐 말이야`라고 하며 멀리서 손짓으로 지시만 내리는 어른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쓰러지고 눈물 흘리며, 그럼에도 일어나서 다시 싸우는 또래의 사투가 마음을 움직인다.
십여 년 전, 공업고등학교 지하 납땜 실습실에서, 노트에 `전문대 입학, 4년제 편입, 대학원, 박사과정 진학, 작가 등단, 학생들 가르치기` 같은 단어들을 써놓고 그걸 바라보며 `할 수 있다` 중얼거리다 눈물 흘린 소년이 있다. 노트에 적은 것들을 이뤘지만 여전히 캄캄하다. 대출금 이자와 반지하 월세, 생활비에 시달리면서 노트에 몇 개의 단어를 새로 적어 넣는다. 그리고 다시 혼잣말한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