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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세상

등록일 2016-06-08 02:01 게재일 2016-06-0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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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애먼 사람이 깔려 죽었다. 여섯 살 난 아들과 만삭의 아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전남 곡성의 아파트 옥상에서 한 대학생이 자살을 위해 뛰어내렸고, 마침 귀가 중이던 곡성군청 공무원 양대진씨와 부딪쳐 둘 다 목숨을 잃었다. 두 죽음 모두 안타깝지만, 양씨의 경우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끝내 신발을 벗고 들어가지 못한 집에는 저녁 밥상이 차려져 있었을 것이다. 어린 아들이 삐뚤빼뚤 벽에 그려 넣은 낙서도 있고, 새로 태어날 아기가 입을 작은 옷도 있었을 것이다. 양씨와 가족들은 그 일상의 행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 중에 전동차가 들이닥쳤다. 외주업체 직원이 사망했다. 숨진 김군은 열아홉 살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컵라면과 공구가 들어 있었다. 밥도 못 먹고 종일 강도 높은 작업을 혼자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스크린도어 수리 일을 하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동차를,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세상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전동차보다 더 무섭게 김 군을 윽박질러, 쫓기듯 몸을 맡긴 곳이 그 비좁은 스크린도어 안이었으리라. 그는 생일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아침이면, 이젠 영원히 오지 않는 그 아침이면 컵라면 대신 어머니가 끓여준 미역국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강남역 화장실에서 아무 죄 없는 여성이 죽임을 당했다. 남양주 지하철 공사현장이 붕괴되어 일용직 근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사람이 떨어지고, 벽돌이 떨어진다. 뒤에서 누군가가 칼로 등을 찌른다. 지하철 전동차가, 버스가, 트럭이 사방에서 돌진한다. 가습기 틀어놓고 자다 죽는다. 문병 갔다가 괴질에 걸려 죽는다. 보도블록이 푹 꺼져 싱크홀에 빠진다. 머리 위, 등 뒤, 발밑, 양 옆, 집 안팎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세상은 원래 예측 불가능한 우연과 혼돈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삶은 언제나 죽음을 품고 있지만, 호스피스 병동 환자도 아니고 전쟁터의 군인도 아닌 우리가 이렇게 단 하루만큼의 내일도 약속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니 숨이 턱턱 막힌다. `오늘도 무사히` 스티커를 자동차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가방, 책, 신발, 냄비, 화장실, 변기, 꽃잎, 강물, 당신과 나, 유무형의 온갖 것에 다 붙이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운전 중에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캄캄했다. 두어 차례 더 그러자 차를 세우고 친구와 운전을 교대했다. 다음날 시간강사 출강을 해야 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수업은 내내 힘들었고, 겨우 마치고 퇴근하던 저녁에 또 현기증이 일었다. 혼자 사는 집에 있다가 괜히 불안하여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검사 결과 별 이상이 없어 귀가했다. 아침에 볼일이 있어 알람을 맞춰 놓고 눕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일을 확신하는 나의 습관이 불현듯 낯설어서 그랬다. 그럼에도 알람 소리에 눈을 뜨리라는 것을 믿는 마음이 고마워서 그랬다. 아니, 아침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천진함이 무섭게 느껴졌다.

이웃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모두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 있다. 사회가 죽음을 조장하고 조성하고 조직한다. `반지하 원룸에 혼자 사는 시간강사`인 나 역시 사회 구조가 펼친 죽음의 네트워크에 붙들려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내일`을 말할 수 없다. 다음에 만나자고 약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해야 한다. 간절히 바라보고 귀 기울이고 어루만져야 한다. 아름답지만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언제 어디서 죽어나갈지 모르는, 영화 `데스티네이션` 같은 비명횡사의 시대다.

한 소설가는 1년에 한 번 유서를 업데이트한다고 한다.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선 한 장의 유서를 쓰는 일이 미래 목표를 적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다. 그나마 주어진 오늘이나 제대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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