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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긴 사람들

등록일 2016-09-28 02:01 게재일 2016-09-2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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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모두 잠든 새벽, 불길에 싸인 건물 안에서 이웃들의 잠을, 아니 목숨을 깨웠다. 21개 원룸을 돌며 초인종을 누르고 불이 지르는 비명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시커먼 연기 앞에서 머뭇거렸지만,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불길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5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웃집 문을 필사적으로 두드릴 때마다 숨은 가쁘고 유독가스는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이웃의 죽음이 삶으로 바뀔수록 그는 점점 더 죽음과 가까워졌다. 그러나 온몸으로 소리쳐 스스로를 깨우고, 생명을 깨우고, 무관심과 이기심의 덧문을 잠근 우리 가슴을 두드려 깨웠다.

안치범씨는 수십 명의 생명을 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성우를 꿈꾸며 목소리를 다듬던 청년이었다. 생전 음성을 들으니 따스함과 진중함, 바른 성품이 느껴진다. 그의 부모는 주검이 된 아들을 향해 잘했다고, 장하다고 칭찬해주었다 한다. 자신을 희생한 안치범씨도 훌륭하지만, 자신보다 소중한 자식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위엄`을 보여준 부모 역시 훌륭한 분들이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택시 기사를 그냥 둔 채 제 짐만 들고 자리를 떠난 이들도 있다. 그들은 평일에 해외 골프 여행을 갈 만큼 적당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 비하자면 안치범씨는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청춘이었다. `누가 강도당한 자의 이웃이냐`고 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떠오른다.

젊음을 바쳐 불의와 싸운 한 사내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저 홀로 먹고 사느라 정신없는데, 도시의 미친 속도 속에서 경쟁하고 짓밟고 서로를 겨냥하는 송곳이 되는 대신 흙으로 돌아가 농사짓고 살았다. 모두들 수입산 밀을 쓸 때, 몇몇 농민들과 함께 우리 밀을 파종해 수확했다. 소처럼 우직하게 땅을 갈았다. 아침햇살처럼 순박하고 비처럼 성실했다. 이 땅을 너무 사랑해서, 이 땅에 사는 이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들불처럼 환해져서 자식들의 이름을 백두산, 도라지, 민주화라 지었다.

백남기 농민은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여한 것도 더불어 사는 이들의 슬픔과 분노를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쌀값이 떨어져 정직하게 땀 흘린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수많은 농민들의 억울함을 전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섰다. 광장에서 그는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고, 300일 넘게 사경을 헤매다 세상을 떠났다. 공권력이 평범한 한 소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지만, 결국은 기득권의 폭력에 의해 타인과 더불어 살았던 한 삶이 무참하게 져 버린 비극이다.

안치범씨는 불에, 백남기 농민은 물에 숨졌다. 불과 물은 죽음의 전령이지만, 안치범씨와 백남기 농민 앞에서 우스워졌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때가 있다. 결코 지지 않는 죽음이 인간에게 고개 숙이는 순간이 있다. 안치범씨와 백남기 농민에게 그랬다. 죽음은 인간의 굴종을 즐거워한다. 그런데 이 오만한 죽음이 어떤 삶 앞에서는 겸손해진다. 그 삶을 거두어가는 것이 황송해 무릎을 꿇고 정중히 예를 바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길 수는 있다.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더불어 삶을 사는 것이다. 더불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제 죽음이 곧 세상의 종말인 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는 죽어도 사는 동안 심어놓은 더불어 삶의 씨앗이 세상을 풍요롭게 할 것을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위엄`은 죽음의 순간에 판명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지금도 제 빛과 온기를 나눠 세상의 어둠을 밝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 장작에만 불붙인다. 남의 불을 꺼트릴 궁리로만 골똘하다. 죽음은 어떤 삶에 무릎을 꿇고 그를 겸손히 모실 것인가, 어떤 삶에 목줄을 채우고 비참하게 그를 끌고 갈 것인가. 더불어 삶으로 당당하게 죽음을 무릎 꿇린 안치범씨와 백남기 농민처럼, 나도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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