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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영주 부석사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산의 지형을 이용해 계단과 축대를 쌓아 극락과 깨달음을 향해 가는 9품 만다라의 이미지를 가진 도량이다. 하품하생인 천왕문을 지나면 중품중생인 범종루를 거치고 상품상생인 안양루를 지나면 마침에 극락정토인 무량수전에 이른다. 아홉 단계를 착한 공덕을 쌓고 수행하면 극락세계에 환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일행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사이 나는 서둘러 극락세계로 향한다. 모처럼 고요한 부석사의 품에 홀로 안겨 사색에 젖고 싶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꽂히는 계단을 묵묵히 오른다. 얼굴은 벌겋게 익고 몸은 땀으로 젖지만 겸손한 초록빛이 마음을 씻어준다. 한 단계 한 단계 석축을 올라설 때마다 새로운 기쁨과 감동들이 더해진다.나는 부석사만이 가진 매력적인 공간감에 이내 빠져들고 말았다. 범종루와 안양루는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며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해야 하는 건물이다. 극락으로 가는 길은 삶의 여정과 비슷하다. 인내와 고뇌가 따르는 삶에서도, 극락으로 가는 길에도 자기를 낮추고 버리는 수행이 필요하다. 한 단계 높은 곳에서 드러나는 세계는 결코 거드름을 피우거나 위압적이지 않으며, 또 다른 풍경과 깨달음으로 환희에 젖게 만든다.극락을 뜻하는 안양루를 통과하여 뒤돌아보는 순간 내 인생을 자축할 수밖에 없다. 시원하게 안겨드는 바람과 굽이굽이 펼쳐진 소백의 능선들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 햇살 아래에서 유순하게 물결치는 아름다운 산하, 나는 한 점의 구름이 되고 신선이 된다. 자질구레한 그 간의 아픔들이 깨끗이 치유되고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것이 극락이런가.단단히 다져진 무량수전 앞마당은 군살이라고는 없다. 외로운 석등 하나가 햇살 속에서 졸고, 오래된 목조건물 무량수전이 서 있다. 나는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전각 앞에서 고려의 향기를 더듬는다.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배흘림기둥, 선비다운 고결함이 묻어나는 문창살, 사뿐히 들어 올린 추녀의 곡선까지 눈길을 뗄 수 없다. 무량수전의 너그럽고 넉넉한 품에 안겨 해질녘 노을을 보고 싶다. 풍만하면서도 간결한 배흘림기둥에 가만히 등을 기댄다. 누구의 품이 이토록 견고하고 편안할까?올 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절이다. 법당 문은 활짝 혹은 반쯤 열린 채 시각적인 시원함을 뿜어내며 나를 맞는다. 안에는 아미타불이 협시보살도 없이 홀로 동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법당이다. 사랑스런 마음으로 다가가는 내게 부석사는 숨기고 있던 속살을 드러낸다.넓고 정갈한 대청마루에서도 불심이 생긴다. 나는 모처럼 바닥에 좌복을 깔지 않고 절을 하기로 했다. 어린 시절 대청마루에서 뒹굴고 놀 때면 살갗에 와 닿던 시원하고 산뜻한 촉감 그대로다.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당당한 무량수전의 너그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의상 대사를 사모한 당나라 여인, 선묘 낭자의 애틋한 사랑과 서리서리 쌓여 있을 역사 속의 불심을 생각한다.뙤약볕이 넘실거리는 마당을 가로질러 안양루 옆에 서서 부석사의 뒤태를 더 감상하기로 했다. 범종루의 정면은`봉황산 부석사`라는 현판을 달고 소백산맥을 향해 날아갈 듯 위풍당당한 팔작지붕이었다. 그런데 뒤쪽은 단아하고도 겸허한 맞배지붕으로 조신하게 몸을 낮추고 있다. 처음 보는 특이한 건축 양식인데 전혀 어색하지가 않고 조화롭다.앞태와 뒤태의 조화가 주는 완벽한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감탄한다. 범종루는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부석사의 중심을 잡아주는 가장 큰 건물이다. 하지만 전체가 무거워 보일까 조용히 측면으로 앉아 있다. 그 동안 왜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 눈길만 머물 뿐 관심은 딴 곳을 향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고착된 습관성이란 얼마나 무서운가.모처럼 부석사의 뒤태를 바라보며 앞만 보고 살아온 나를 돌아본다. 나의 뒷모습은 어떤지 떠올려 보지만 자신이 없다. 우리는 잠깐의 대화나 언행, 즉 앞모습만으로 사람을 쉽게 속단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호들갑을 떨며 좋은 말만 하던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는 흠담을 하거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도 있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뒷모습이다.▲ 조낭희 수필가하지만 첫인상은 큰 호감을 주지 못하지만 사랑과 봉사로 남들 앞에 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넉넉하고 편안하다. 내면이 아름다우면 앞모습은 저절로 빛이 나게 마련이다. 나는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진정한 나를 돌아보는 일에 소홀하지는 않았는가? 부석사 범종루가 아름다운 것은 화려한 앞모습보다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뒷모습에 있다. 양과 음의 조화처럼 앞과 뒤의 완벽한 하나 됨이 존재하는 곳, 당당하면서도 겸허한 자태의 범종루가 진리의 세계를 향하여 비상할 듯 날개를 펼치는 순간, 나의 내면은 자연과 영혼의 깊은 연결감으로 더욱 풍요로워진다. 범종루에는 범종이 없다. 하지만 오래도록 나를 깨우는 깊은 울림이 있다.

2015-06-26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연미사(燕尾寺) 법당에 앉아 있는데 자꾸만 마애석불이 아른거린다. 조심스럽게 달려간 내게 불자 한 분이 온기가 남아 있는 좌복을 건네주고 총총히 사라진다. 거대한 바위불상 아래 두 손을 모으고 서 보지만, 석불의 표정은 읽을 길이 없다. 바위에 둘러싸인 작은 공간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하다. 어떤 근심도 들어서지 못할 태곳적 신성함이 전해진다. 적당히 흐린 하늘과 숨을 죽이는 바람, 깊은 강물과도 같은 침묵이 나를 에워싼다.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앉는다.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예불 소리가 물꼬가 되어 영혼으로 흘러든다. 마음은 제 멋대로 과거를 향해 치닫다가 내면을 더듬기도 한다. 이 은밀한 공간은 내가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줄지 모른다. 섣부른 욕심이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의식이 바꾸어지지 않는 한 나는 결코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없다.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과 뇌가 훨씬 더 말랑말랑해져 있는 것만으로 위안한다.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은 보물 115호로 제비원 석불로 불린다. 전체 높이가 12.38m, 너비 7.2m의 거대한 자연 암석이 몸체이고, 머리는 다른 바위를 조각하여 올려놓은 특이한 불상이다. 전설에는 법당과 석불을 도선 국사가 만들었으며, 선덕여왕 3년(634년)에 비를 맞지 않도록 6칸의 전각을 세워 실내불처럼 만들었다는 기록이「영가지」에 전한다. 하지만 불상의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바위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 그 홀씨가 대들보가 되고 한 집안을 지키는 가신(家神)으로 남아 `성주풀이`의 본원지로도 유명하다. 민초들의 애환을 보듬고 살아온 마애불은 무속신앙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더 친근하다. 얼굴 곱고 마음씨 착한 연(燕)이의 불심과 지붕에서 떨어져 제비가 되어 날아간 어느 와공의 전설, 나는 천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그들과 마주하고 싶다.한참을 상념에 젖어 헤매는 사이, 저만치 홀로 걷고 있는 친구가 보인다. 일상의 긴장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서고 싶다는 친구와 또 다른 의식의 세계로 확장을 꿈꾸는 나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텔레파시 같은 교감 따위는 없어도 우리는 무언가로 얽혀 이곳에 왔다. 개별적 존재로 섬처럼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로 투합시키는 인연의 근원이 궁금하다.나는 좀 더 마애석불을 감상하기 위해 너른 공원으로 향한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과 무심히 달리는 자동차들의 풍경이 잠시 낯설다. 공원은 한적하다. 마애불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을 감상하듯 옷매무새를 갖춘다. 그리고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마애석불과 마주한다.서방을 바라보고 서 있는 마애불은 온화하면서도 기품이 넘친다. 반듯한 자태는 세련된 예술미와 위엄성을 갖추고 있으며, 고려시대 석불에서 볼 수 있는 투박함도 없다. 뚜렷한 이목구비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번진다. 등이 켜지듯 마음이 밝아온다. 언젠가 두근대는 심장을 갖고 태어날 것만 같은 마애불이다. 피그말리온 못지않은 정성과 사랑을 받았을 긴 시간을 떠올린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않은가.가끔 사고의 사각지대에 갇히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초라한 영혼과 홀로임에 몸부림쳐 보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그럴 때 마애불의 미소와 마주한다면 상실감은 채워지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떤 메시지가 들릴 것만 같아 가만히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인다.“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口裏無瞋吐妙香)/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心裏無瞋是珍寶)/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無染無垢是眞常)”문수보살 게송이 떠오른다. 편안한 미소가 무의식적으로 내 안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일까? 참다운 도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때때로 나는 자신을 독립된 실체로만 여겨 감정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다. 마음과 생각을 거짓 없이 전달하는 충실한 메신저인 얼굴, 그는 자주 통제력을 잃고 내 감정을 즉각적으로 토해내 스스로를 당황케 한다. 미소 짓는 얼굴만큼 나와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선업이 있을까?▲ 조낭희수필가마애불의 미소에서 은은한 풀피리 소리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한국인의 얼굴이다. 착한 마음으로 복을 쌓은 연이 처녀의 혼을 그대로 담고 있는 마애석불은 석공의 노련한 손재주가 아니라 불심과 예술혼이 빚어낸 참 얼굴이다. 그가 하나의 돌덩이로 존재하며 제비원을 지킨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일 수도 있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마애불을 올려다본다. 우울했던 마음에 등이 켜지고 웅얼거리던 불안의 파편들이 사라진다.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하고 싶다.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자 먼저 알고 미소로 화답한다. 커다란 등이 활짝 켜진다. 성불의 기회는 순간순간 내 가까이에 있다고 마애불이 속삭인다.

2015-06-19

안동 개목사

자동차가 천등산 자락을 힘겹게 오른다.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가 수도할 때 하늘에서 큰 등불이 비춰주어 99일만에 도를 깨쳐 99칸의 절을 짓게 되었다는 개목사(開目寺)가 저기 저 산 아래 숨어 있다. 사찰과 불교에 박식한 동행인이 고찰에 대한 전설을 풀어낸다. 개목사는 처음 흥국사(興國寺)라 하였다. 당시 안동 지역에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많았는데 비보(裨補)사찰을 삼은 후에 소경들이 없어졌다하여 개목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조선 초기 재상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해 왔을 때, 안동의 지세가 눈병 환자가 많을 형상이어서 개목사로 이름을 바꾸었더니 눈병 환자가 없어졌다고 한다.종교적인 색채를 풍기는 설화든, 훌륭한 목민관의 자세와 풍수도참설을 귀히 여기던 시대성이든, 내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재미있는 전설이나 건축물의 양식보다 절의 기운이나 분위기가 내심 궁금하다.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끊어지는가 싶으면 어느 새 논밭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숨바꼭질을 하듯 이어진다. 멀미가 일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슬슬 시장기가 도는데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무료함을 깨고 나타난 낯선 객을 끊임없이 예의주시하는 햇살과 툭 트인 시야 때문인지 첩첩산중 오지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길이 보이지 않아 당황할 무렵, 밭두렁에 검붉게 익어가는 오디가 보인다. 반색을 하며 달려갔지만 오디는 작고 물기가 말라 별 맛이 없다.어린 시절 뽕나무가 많은 고장에서 자란 내게 오디는 친숙한 간식거리였다. 입 주변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고 나면 며칠 전 새로 산 옷에도 얼룩덜룩 오디물이 들어 있곤 했다. 달콤한 유혹 뒤끝은 언제나 어머니의 꾸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고 열정적이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가슴이 젖는다. 햇살 속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에는 그리운 것들이 가득하다.갑자기 앞이 훤하다. 해발 400m 높이에 자리 잡은 개목사는 제법 넓고 평평한 터를 확보하고 있다. 여염집처럼 작고 소박한 사찰을 돌담이 에워싸고 있다. 오래 된 누문이 있는 전각, 싱그러운 유월의 잎새와 꽃들이 환한 낯빛으로 반긴다. 누문 위에 걸린 `천등산 개목사`라는 현판이 인사를 건네 온다. 겸손한 눈빛이 좋다. 정겨운 시골집 앞에서 감회에 젖듯 선뜻 들어서지를 못한다.넓은 터가 99칸의 절이 있었다는 설화에 신빙성을 실어줄 뿐, 영화의 뒤안길은 참으로 소박하다.“옛날 흥국사에서 공부할 적에/ 때때로 밤이면 꿈속에서 청산에 놀러 갔네/옛적 친하던 주지 스님 생각 간절하니/ 틈내어 나를 위해 한번 다녀가구려.”개목사에서 10년간 수학한 포은 정몽주가 훗날 이곳을 추억하며 지은 시가 돌에 새겨져 입구를 지킨다. 시비는 저 아래 너른 세상이 아니라 풀숲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앞이 트인 경관이 수려하여 해마다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는데 눈부신 하늘만 응시한다. 초연한 자태에서 읽혀지는 여유가 좋다.민가의 대문 같은 누문을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보물 제 242호 원통전과 우측 뒤편에 산신각이 보인다. 1457년(세조 3년)에 건립된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柱心包) 양식의 맞배집인데 지금은 보수를 해서 운치가 덜하다. 한 칸의 툇마루와 양 측면의 풍판 때문인지 지붕의 무게가 누르는 것처럼 안쓰럽다.원통전이라는 현판이 깊은 처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얼굴보다 큰 모자를 눌러쓰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전각은 분명 묵언수행 중이리라. 한 쪽 문이 열린 법당 안에는 목조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원통전 앞에는 탑이나 석등 하나 없다. 작은 마당이 햇살을 이고 정적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오래된 건물 마루에 앉아 원통전을 바라본다. 정오의 뙤약볕이 장악한 사찰은 숨이 멎을 것처럼 적막하다. 산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찰은 무심할 정도로 편안하다. 텅 빈 산사의 적요, 아름다운 침묵은 개목사의 훌륭한 법문이다. 어느 암자가 이토록 외로움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적막이 감도는 산사에 홀로 앉아 침묵이 토해내는 언어에 귀를 기울인다.▲ 조낭희수필가개목(開目)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뜸`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눈을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나를 돌아본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시간을 정지시키고 나는 고요와 하나가 된다. 짧은 시간, 적막 속으로의 몰입은 경이롭다. 온전히 홀로 있는 시간이다. 홀로 됨은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 됨인데, 일상에서 그 짧은 몰입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짧은 명상 속으로 뛰어드는 익숙한 소리들, 봉정사로 넘어가는 오솔길 쪽에서 나를 부르는 외침이 들려온다. 아쉬움을 접고 경내를 빠져 나온다.도도한 강물처럼 햇살이 흐르는 풀밭 너머, 소나무 숲에서 일행이 기다린다. 좋은 인연들을 향해 뛰어가는 내 몸짓이 한결 가볍다. 발밑에서 찰방찰방 시냇물 소리가 나는 것만 같다.

2015-06-12

청도 운문사 사리암(邪離庵)

몸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청도 운문사 사리암으로 향한다.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유월의 아침은 상큼하다. 벚나무 가로수들이 가르마처럼 하늘 길을 튼 채 신록의 터널을 이루고, 나무들 사이로 깊고 푸른 운문호가 인사를 건네 온다. 때마침 FM에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의 선율 속에 빠져 나는 꿈을 꾸듯 황홀하다.일주문에서 운문사를 지나 사리암까지 이어지는 솔숲 길로 접어들었다. 저절로 아픔이 치유되고 삶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이토록 정갈하고 호젓한 산사 길이 있을까? 출입을 제한하며 숲을 관리해 온 까닭에 골짜기는 생태계의 보고로 풍성하고 기름지다. 모래가 섞인 흙길이 사각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고 계곡물도 신록 속에 몸을 감춘 채 소리없이 흐른다. 몸과 마음이 부요해져 구도자가 된 느낌이다. 도솔천은 속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이른 아침이라 사리암 주차장은 한산하다. 수많은 차량과 가파른 포장길이 언제나 나를 긴장시키곤 했다. 일주문과도 같은 소박한 표지석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예를 표한다. 사리암은 사리를 봉안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간사할 사(邪), 떠날 리(離)로 삿된 마음을 허락하지 말라는 뜻을 가진 암자다.퇴계, 율곡 선생이 좌우명으로 삼으셨던 `사무사 무불경(思無邪 毋不敬)`이 떠오른다. 삿된 생각을 품지 말고 항상 공경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이다. 평생 이 뜻을 새기고 실천하며 살기에는 세상이 만만치 않다. 애초에 인간은 쉽게 유혹에 빠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 수많은 탐욕과의 전쟁, 나는 그 유혹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 지금 사리암을 오르는지도 모른다.부처님의 세계는 멀기만 한데 암자의 이름은 커다란 지침이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드문드문 보이는 불자들도 표지석 앞에서 합장 3배를 한다. 절을 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숙연하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그들만의 정성이며 표현이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 때 찾아오는가? 번뇌와 망상은 쉽게 씻겨지지 않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육신을 수고롭게 하며 마음을 닦는 것이리라.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나도 산길을 오른다.포장된 시멘트 길과 들쭉날쭉 모양이 제 각각인 돌계단은 호거산(虎距山) 중턱에 자리한 사리암에 이를 때까지 여유를 주지 않는다. 구불구불 끝이 없는 1008개의 돌계단은 각도가 꺾일 때마다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가끔씩 다람쥐가 숨바꼭질을 하고 산비둘기가 앞서서 길을 안내한다. 숨이 차고 다리도 아프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마음은 걸러지고 가볍다. 이것이 하심(下心)이런가?어느 해 가을, 친구와 이 길을 오른 적이 있다. 호흡을 고르거나 땀을 식힐 겨를도 없이 그녀는 돌계단에 놓인 대빗자루로 성큼성큼 비질을 하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나뭇잎이 놀라서 멈칫거리고 돌계단은 이내 훤해졌다. 나뭇잎을 밟고 뒷사람이 미끄러질까 배려하는 친구의 마음이 단풍보다 더 고운 오후였다. 그 후로 빗자루만 보면 잔잔한 설법처럼 그 광경이 떠오르곤 한다.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줄기에 땀이 흐를 때쯤, 사리암의 3층 전각이 하늘을 받친 채 위용을 드러낸다. 층암 절벽에 자리한 암자치고는 제법 크다. 세련된 건축미를 자랑하거나 암자 특유의 고즈넉한 고독도 없다. 그저 위무 받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넉넉한 품이 있을 뿐이다.고려 초 보량국사에 의해 창건되어 나반존자 기도처로 알려진 사리암에는 관음전과 산신각, 천태각이 있다. 하얀 눈썹을 길게 드리운 나반존자는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아 독성(獨聖)이라고도 하며, 중생을 제도하려고 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을 기다리는 아라한이다. 스님의 예불소리에 발걸음이 먼저 알고 숨을 죽인다.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사리굴 전설도 유명하다. 굴법당 안쪽 바위 구멍에서 한 사람이 살면 한 사람이 먹을 만큼, 백사람이 살면 백사람의 분량만큼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쌀을 얻을 욕심으로 구멍을 키운 뒤 쌀 대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관음전에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과 나반존자를 독송하는 기도 소리가 전설 따위를 무색케 한다.그들의 절절한 열망이 내 안까지 출렁이며 밀려든다. 무엇에 떠밀리듯 나도 사리굴 앞에 자리를 펴고 정좌하다 백팔 배를 시작했다. 어떤 염불도, 무엇을 청하지도 않았다. 그저 절을 하고 싶다. 아무런 잡념도 일어나지 않는다. 몸은 흥건히 땀에 젖고 마음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다. 부처님이나 나반존자의 힘이 아닌 심즉시불(心卽是佛), 내 마음 안의 부처를 만난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조낭희 수필가요사채 툇마루에 앉아서 땀을 식힌다. 장독대 너머로 펼쳐진 수려한 운문산 자락이 가만히 나를 다독인다. 안개가 걷히고 햇살 가득한 앞마당을 누군가 걸어와 말을 건넨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어느 보살님이 해 오셨답니다.”따끈한 백설기가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다. 나는 눈이 내린 사리암의 겨울밤을 떠올렸다. 초롱초롱한 별들이 사리암의 작은 마당으로 쏟아져 내리는 밤을.

2015-06-05

봉화 청량사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육육봉이 연꽃잎처럼 절을 둘러싸고 그 연꽃 수술 자리에 청량사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봉우리마다 크고 작은 암자가 27개나 있어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메울 만큼 불국토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은 청량사와 외청량사라 불리는 응진전만 남았지만 겸재 정선의 동양화 한 폭을 보듯 비경을 자랑한다. 몇 년 전 처음 청량사를 찾았을 때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은 그야말로 고행길이었다. 서둘러 사찰을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길은 더 험난하고 고되게 느껴졌다. 오늘은 여유를 가지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오른다.결코 쉽게 넘보아서는 안 될 사찰이다. 한걸음 한걸음 뗄 때마다 다리는 아프지만 백팔번뇌 내려놓고 마음을 모으다 보면, 이내 기왓장을 이어붙인 수로를 따라 맑은 물길이 마중을 나오고, 안심당 찻집이 마당보다 낮은 곳에 서서 우리를 맞는다.땀을 닦으며 올려다 본 청량사는 열두 폭 바위 병풍을 두른 듯 아늑하고 편안하다.자연석 축대 위에 자리 잡은 적당한 크기의 전각들과 층을 이룬 담장, 잘 배열된 장독들, 절을 호위하듯 둘러 선 기묘한 봉우리들이 가슴을 뛰게 한다. 수행이나 철학보다 문학과 풍류를 논하고 싶어지는 경관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오층석탑 옆에 서서 낮게 펼쳐진 산등선과 기암괴석 봉우리들을 가슴에 담고 싶다.나무 계단 위로 오색 등이 춤을 춘다. 그러나 `삼각우송` 아래에는 이미 수많은 등산객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땀을 식힌다. 하늘을 찌를 듯 절제된 간결미가 돋보였던 오층 석탑은 등산객들 사이에서 포즈를 취하느라 여념이 없고, 독립영화 `워낭소리`에서 소의 극락왕생을 빌던 노부부의 쓸쓸하고 가슴 시린 장면도 간 곳이 없다. 오늘의 청량사는 뜻밖의 풍경으로 나를 맞는다.초파일을 맞기 위한 형형색색의 오색 등과 등산객들로 절은 잔칫집 분위기로 한껏 들떠 있다. 수 년 전, 기억 속의 청량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맑고 따뜻한, 선비 같은 품을 기대했었다. 마음을 둘 곳이 없다. 경내를 배회하다 사진을 몇 컷 찍어본다. 청량사는 사진 속에서도 화사한 웃음으로 화답해 온다.“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흰 갈매기(白鷗)뿐/ 흰 갈매기야 떠들 리 있겠냐마는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부(魚舟子)가 너를 보고 이곳을 알까 두렵도다.”퇴계 이황 선생이 지은`청량산가`를 떠올리며 유리보전으로 향한다. 현판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중생의 병을 다스리고 생명을 연장해 주는 의술에 능한 부처인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장보살 우측에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는 아무도 없다. 종이로 만든 지불 약사여래불을 향해 기도를 해 보지만 마음은 여전히 어수선하다.기이한 바위 봉우리를 이고 가파른 산 중턱에 자리한 청량사를 둘러보고 정상으로 향하기로 했다. 선비 같은 산, 바람처럼 욕심없는 절이다. 주희의 무이정사를 본 따 지은 청량정사 앞에서 나는 정통 주자학을 계승한 퇴계 선생의 자부심을 읽기보다는 두향을 먼저 떠올리고 말았다.후학들이 그랬듯이 청량산을 두루 돌고나면 퇴계 선생의 정신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초야에 묻혀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고 후진을 양성하며 영남학파의 큰 획을 그은 분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학문적 업적보다 두향의 잔영이 떠나질 않는다. 단양 군수 시절 매화가 인연이 되어 정분을 나눈 관기 두향과의 맑고 그윽한 사랑과 이별, 그리움의 뒤꼍에는 빙기옥골(氷肌玉骨) 매화가 있지만, 사무침이 깊어지면 바람처럼 청량산을 찾았을 법도 하다.단양을 떠난 후 20여 년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향과의 애틋한 사랑과 선생의 학자다운 기품이 발길 닿는 곳마다 숨어 있을 것만 같다.동방의 주자라 불릴 만큼 온건하고 합리적인 학자였지만 그가 더 인간적이고 따뜻해 보이는 것은 두향에 대한 올곧은 사랑 때문이 아닐까. 학문적 깊이와 더불어 수양과 절제, 죽는 날까지 한결같던 지조 높은 사랑은 청량산을 닮았다.▲ 조낭희 수필가명종 때 성리학자 주세붕도 탁문아라는 기생과 청량산에 자주 올라 술에 취해 학문과 재담을 논했다. 탁문아는 `대학`을 거침없이 암송하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춤과 글에 능한 기생이다. 일패 기생과 달리, 정을 주고 몸을 파는 이패 기생이었지만 그들의 관계를 추하거나 난잡하게 여기지 않는 까닭은 선비로서의 사도와 기생이 지켜야 할 기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발 870m의 자소봉과 선학봉을 잇는 아찔한 하늘다리 위에서 나는 조선의 선비와 그들의 연인을 생각한다.지성과 감성이 겸비된 삶, 거기에 초승달 같은 이지적인 사랑까지 품고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바람이 분다.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바람의 몸짓은 더 부드럽고 고혹적이다. 어느 봉우리에서인가 거문고 소리와 노랫가락이 환청처럼 들려올 것만 같다.

2015-05-29

산청 겁외사

오월의 품속에서 반짝이던 경호강 물길이 어느새 가슴 속에서 찰랑거리며 흐른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시간 밖의 절, 겁외사를 찾아가는 오후는 따뜻하고 평화롭다. 뜻밖에도 어수선한 로터리를 끼고 있는 사찰 앞에서 잠시 혼란스럽다. 저절로 백팔번뇌 내려놓고 하심(下心)이 생기는 고요한 사찰을 기대했었다. 1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누각이 일주문인 셈이다. 정면은 `지리산 겁외사`, 뒤편은 `벽해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잘 정돈된 마당 한가운데 성철 스님의 사리가 봉안된 입상이 들어서는 나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생전의 모습으로 걸어 나오실 것만 같다. 조용한 경내에 긴장감이 돈다.석가모니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는 대웅전으로 곧장 향한다.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님,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 앞에서 절을 한다. 성철 스님의 진영을 향해서도 절을 하는 동안 여느 법당과는 다른 분위기를 느낀다. 화려한 단청, 출가부터 다비식 장면까지 스님의 일대기가 그려진 대웅전 외벽도 인상적이다.겁외사는 성철 스님의 상좌인 원택 스님이 성철 스님의 생가터에 세운 절이다. 이영주라는 속명으로 24년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출가 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니 분명 평범한 분은 아니다. 처자식을 버리고 아들을 보러 직접 산으로 찾아온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며 발길을 돌리게 했다는 일화는 언제 들어도 눈시울이 젖어온다. 모질고 독하지 않으면 중 생활 못 한다던 어느 스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그만큼 성불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7남매 중 장남인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고 1936년 해인사에서 승려의 계를 받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7대 종정을 지내기까지의 화려한 이력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를 비롯하여 중도사상과 돈오사상을 대중적으로 만든 분으로 훨씬 더 친숙하다.독서와 토론을 좋아하던 한때를 떠올린다. 성철 스님으로 인해 연기법과 돈오돈수, 돈오점수로 파고들던 지적(知的) 여행은 행복했다. 난해한 선지식은 충만감과 희열을 안겨주었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는 욕심과 편견, 감정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돈오돈수보다는 돈오점수에 일치감을 보이기도 했다. 깨닫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선지식 앞에서 젊음 하나로 과감했던 것 같다.자성(自性)의 경지에 이른 분들의 다양한 이견들을 머리로라도 이해하고 싶었던 치기였는지도 모른다. 수행과는 거리가 멀고 분별심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한 채, 그저 철학적인 담론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그러다 문득 설익은 지식이 삶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느끼고 회의가 오기 시작했다. 지식의 홍수 속에서 끊임없이 허우적대는, 아집과 편견으로 뭉친 나와의 조우는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삶 앞에서 지식은 참으로 초라하고 토론 후의 마음은 공허했다. 언설과 문자에 빠져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어설픈 책 읽기와 독서 토론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마음을 돌아보는 일에 관심을 두고 싶었다. 감히 성불을 꿈꾸지는 못하더라도 참나를 찾기 위한 노력만큼은 생활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 역시 변화를 좋아하는 나의 섣부른 치기였다.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굳게 믿었지만 나를 제대로 살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성철 스님의 입상을 바라보며 나를 돌아본다. 나아진 게 별로 없다. 의욕과 벅찬 희망을 품고 시작한 절 기행도 엉뚱한 곳에 관심이 가 있기 일쑤였다. 잊어버리거나 게으름 때문에 제자리걸음을 하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잦는가 하면, 예기치 않은 관계 속에서는 이내 길을 잃었다. 그런 나를 알기라도 하듯 성철 스님이 가만히 다독여주시는 것 같다.“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 추는 나비 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조낭희 수필가돌에 새겨 놓은 성철 스님의 법어를 읽고 또 읽는다.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져 온다. 어쩌면 이 잠깐의 행복 때문에 절을 찾는지도 모른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참 나를 찾는 것은 아닐 텐데, 나는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해 조바심을 내고 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채비를 서두른다. 내 키보다 훨씬 긴 그림자를 끌고 겁외사 마당을 서성이다 부랴부랴 겁외사를 빠져나와 시간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돌아갈 길이 바쁘다. 시간을 의식할 때 나는 또 다른 편안함을 느낀다.

2015-05-22

완주 송광사

▲ 조낭희 수필가새내기 직장인 딸이 잦은 야근으로 힘들어했다. 꽃다운 나이에 자아 실현은커녕 존재의 결핍과 허무, 상실감들을 토로하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원 없이 잠만 자고 싶다는 딸을 데리고 완주 송광사로 향했다.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를 안고 떠났다.신라 진평왕 5년(583) 도의선사가 터를 잡고 경문왕 7년 보조 체징선사에 의해 중창된 송광사는 산속이 아니라 마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호흡하고 있었다. 국보급 보물들이 많은데도 입장료가 없는 문턱 낮은 가람이다. 일주문부터 다포계 팔작지붕의 화려한 금강문, 여닫을 수 있는 문이 있는 보물 1255호인 천왕문이 대웅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범종을 중심으로 목어, 운판, 법고가 모셔져 있는 아(亞)자형 종루의 열십자 팔작지붕의 우아한 자태도 송광사를 대표하는 보물이다.짐을 풀고 일주문 옆의 전통찻집으로 향했다. 흰 마가렛과 보라색 피츄니아가 예쁘게 핀 찻집에서 마신 쌍화차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정이 묻어나는 전라도 사투리, 신라와 촐라라는 이름을 가진 모녀 고양이의 여유로운 재롱이 낯선 곳에 대한 어색함을 씻어낸다.저녁 예불을 드리러 대웅전에 들어섰다. 소년 같은 웃음과 소탈한 성품으로 예불 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시는 스님과 금세 친해졌다. 흙으로 조소한 국내 최대의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불의 크기가 위압적이기보다는 스님으로 인해 집처럼 편안하다. 나라의 안녕과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무사귀환을 위해 조성되었다는 국보 1243호 대웅전에서 우리는 기도를 한다.홑이불 같은 어둠이 송광사를 덮고 개구리들이 울어댈 무렵, 스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대웅전 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둘러앉아 차를 마신다. 만월에 가까운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밀려들고 때마침 뒷산에서 소쩍새가 운다. 못 다 푼 설움을 비워내기라도 하듯 처연하게 울어댄다. 저절로 몸이 낮아지는 순간이다.스님의 말씀은 참 편안하다. 인품이나 수행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겸손한 대화법이 좋다. 법명을 여쭙자 그냥 `대웅전 스님`이라 부르시란다. 인연 맺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치셨지만, 순간순간 찾아오는 인연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하루 네 번 `천일기도`를 하고 계시는 무성 스님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지친 기색은커녕 밝고 생동적인 모습이 숙연할 정도로 감동적이다.마음을 닦고 수행만 할 수 있는 스님을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생활에 허덕대느라 삶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할 때면 더욱 그랬다. 스님이 호탕하게 웃으신다.“스님의 삶도 만만치 않아요. 깨닫지 못하면 큰 빚을 남기고 가는 거라 늘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돼요.”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나고, 생선을 꿰었던 줄에서는 비린내가 난다는 말이 생각난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 내 영혼이 촉촉하게 젖어든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될까? 깜빡깜빡 비상등을 켜고 나를 점검한다.마당을 지키던 거대한 피라미드형 연등 탑에 불이 들어왔다. 오색등이 송광사를 환하게 밝힌다. 저 진리의 빛 속에 난생처음으로 단 내 연등도 있다. 머리에만 머물러 있던 앎이 가슴으로 내려와 참나를 만나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수도 없이 찾고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며 나처럼 살아갈 것이다.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새벽 예불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실핏줄처럼 생명을 불어넣는다. 딸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대웅전으로 따라나선다. 둘이서 말없이 푸른 어둠 속을 걷는다. 존재적 연결감이 주는 뿌듯함이 좋다. 소소한 마음들이 미풍처럼 서로의 가슴을 적셔 줄 때, 우리는 함께라는 걸 느낀다.스님 일곱 분이 차례로 대웅전에 들어서며 시작되는 새벽 예불은 전율이 일만큼 엄숙하고 경건하다. 사찰의 새벽은 날마다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각, 오늘은 내 영혼이 반짝반짝 윤이 날 것 같다. 예불이 끝나자 대웅전 스님이 함께 천수경을 읽으며 기도를 도와주신다. 스님이 선창하고 딸과 함께 후창한다. 나한전에서 염불소리가 들린다. 인적 없는 경내를 옅은 안개가 지나가고 기도 소리만 낭랑하다. 새벽 산사의 정취에 젖어 홀로 경내를 서성인다. 내 삶이 산사의 새벽처럼 순결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침 공양을 하면서 어젯밤 대웅전 스님이 말없이 주신 팔찌의 출처를 알게 되었다. 여덟 개의 다른 색들이 조화를 이루는 팔찌, 그것은 주지 스님이 `달라이라마 평화의 기도`에 참석하시면서 티베트에서 가져온 성물이었다. 넉넉하고 온화해 보이시던 주지 스님, 토요일 하루는 아침공양을 할 수 있어 설렌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대웅전 스님, 늘 웃는 낯으로 종무소 일을 보는 이쁜 선규 님, 모두가 송광사를 밝히는 등불이다. 한층 밝아진 딸의 얼굴 위로 수행의 가장 큰 적은 게으름이라던 스님의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조낭희 수필가

2015-05-15

울진 구암사

봉화 분천역은 첩첩산중에 있는 작은 간이역이다. 열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을 것만 같은 깡촌이다. 엽서 속에나 숨어 있을 듯한 풍경들이 협곡열차가 생기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오지에 봄과 관광객이 찾아와 들썩인다. 열차는 백두대간을 뚫고 내려오는 낙동강 지류를 끼고 느리게느리게 달린다. 보이는 것은 봄볕에 설레는 산과 계곡뿐이다. 열차는 묘한 향수를 싣고 나아간다. 어린 시절, 여행을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설 때면, 엄마는 잊지 않고 간식거리를 준비해 주셨다.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는 달걀을 까먹을 때쯤이면 열차는 낙동강 철교 위를 철커덕철커덕 심장이 얼어붙는 소리를 내며 건너갔다. 빨려들 것만 같던 도도한 물살과 철교 위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들리던 거칠고 난폭한 문명의 소리가 그리워지곤 한다.10여 년 전, 페루의 마추피추를 향하던 협곡열차도 그랬다. 끝까지 계곡의 손을 놓지 않고 협곡을 달리던 열차는 비슷한 풍경을 하염없이 몰고 왔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개발되지 않은 그들의 삶 속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고독과 정신의 공허함으로 몸부림치지 않는, 때 묻지 않은 그들의 영혼이 부러웠다. 그 즈음 몹시도 바쁘고 지쳐 있던 나는 먼 남미의 협곡열차에 힘든 것들을 내려놓고 돌아왔다.옛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열차는 승부역에 우리를 토해내고 무심하게 사라졌다. 벽처럼 막혀 있는 산의 발목을 적시며 강물은 유유히 아래로 흐른다. 기세등등한 뙤약볕이 모든 것을 위협해도 물은 거침이 없다. 자갈밭에 구르고 햇살에 데워지면서 바다로 흘러가는 법을 스스로 배운다. 우리는 그 물길을 따라 묵묵히 걷는다.`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오래된 영화가 떠오른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계곡에서 송어를 잡기 위해 긴 낚싯대를 던지던 부자(父子)의 모습이 정겹고 아름답던, 잔잔한 영화였다. 흡사 이런 배경이었다. 영화 `박하사탕`의 야유회가 벌어지던 계곡이나 철교 위에서 열연을 한 주인공의 절규가 기차소리에 묻어 들려 올 것만 같다.길은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아련히 건져 올리고, 인적 없는 산중에는 봄이 홀로 절정이다. 도화의 수줍음과 하얗게 터진 조팝꽃의 속살, 맑고 청순한 돌배나무꽃이 한창이다. 키 작은 제비꽃과 양지꽃도 모처럼의 소란스러움에 잠을 깨고 쳐다본다. 산은 모든 것을 가두고 물길과 철길, 세 평의 하늘만 터주고 눈부시게 청정하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역, 양원역에는 하나뿐인 주막이 있지만 기차가 설 때마다 낭만보다는 밀려드는 관광객과 상업성이 혼재한다. 경치가 좋은 곳이면 어디든 북새통을 이루는 좁은 국토가 안쓰럽다. 그 몸부림이 산골까지 밀려들었다. 머지않아 이 길도 세련된 도시 냄새를 풍기며 우리를 맞지나 않을까 두렵다.양원역에서 강물과 이별하고 다리를 건너 울진으로 접어든다. 때마침 강물을 따라 달리는 분홍빛 협곡열차를 향해 일제히 손을 흔든다. 열차 속에서도 팔랑팔랑 응답해오는 수많은 손들이 꽃처럼 아름답다. 가슴 따뜻한 향수가 살아 있는 곳, 비탈진 밭과 오래된 양철지붕들이 변화에 맞서며 버티고 있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정겨운 풍경들이다. 쭉쭉 뻗은 낙엽송들이 연둣빛 새순을 두르고 레이스 빛 그늘을 짜고 있다. 수채화 길이 끝나는 곳에 구암사가 보인다.소박하고 조용한 사찰이다. 가정집처럼 쪽마루를 앞에 두르고 나그네를 편하게 맞는다. 역사가 길어 보이지 않지만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원으로 대한 불교 조계선종 총본산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봉안되어 있고 스님이 계신 방에도 아미타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지암 스님과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누며 청정한 숲 기운을 느낀다.누구나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는 저승골과 거북 바위가 물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용소를 소개해 주신다. 치마처럼 펼쳐진 바위가 온통 계곡을 덮고 그 사이로 물길 깊은 용소가 세 개 있다. 물살은 쉼 없이 중심을 향해 돌며 길을 잃고 있다. 내일이 불확실하다 해도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저 흘러가는 생이 어디 있으랴. 가끔은 곤두박질을 치고, 길을 잃기도 하면서 바다로 흘러가는 법을 터득한다.대웅전이 올려다 보이는 소나무 숲 아래에서 쉬기로 했다. 배낭을 베고 단잠에 빠지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 지친 기색 속에서도 모두 얼굴빛이 맑다. 절에서 떠온 약수로 목을 축이는 동안 과일과 간식거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잔디밭 위에서 펼쳐지는 즉석 만찬이다. 솔바람이 땀을 식혀 주는 나른한 오후의 여유로움을 안고 이야기에 빠진다.▲ 조낭희 수필가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화제로 삼았다. 문명의 편견이 낳은 겉치레의 옷이 주는 허위를 고발한 선구적인 화가를 예찬하며 우리는 간식과 대화, 마음을 나눈다. 소통이 몰고 오는 존재의 울림들로 꽉 찬 하루, 구암사 가는 길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이 남아 있다. 걷다보면 몸과 마음이 백지상태가 되고, 산골의 봄과 공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된다.

2015-05-08

김천 청암사

봄비가 성주호를 적신다. 운무의 흐느낌조차 안온한 4월, 자기만의 색깔로 다투어 피어나던 파스텔톤의 빛깔들이 차분하게 호수 속에 잠들었다. 봄날의 유혹 앞에서 호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하지만 그 내면에는 굉장한 소용돌이가 있음을 안다. 뒤늦게 핀 산벚꽃들과 색색깔의 연둣빛 치장이 이어지는 무흘구곡을 따라가면 청암사가 나온다. 청암사는 직지사의 말사로 헌안왕 3년(859)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으나, 인조 25년 화재로 전소되어 혜원 스님이 중건하였다. 여러 번의 전소와 폐사로 성쇠를 거듭했지만 지금은 청암사 승가 대학이라는 비구니 강원이 설치되어 100여 명의 스님들이 공부하는 사찰이다. 단청 없이 나무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반가의 고택 같은 전각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불령산 북쪽 진입로의 경관도 아름답지만 인현왕후로 인해 더욱 알려졌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되었을 때 서인의 신분으로 3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환궁 후 인현왕후는 큰스님에게 서찰을 보내 고마움을 전하고, 불령산 적송림을 국가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하여,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일주문 앞에 도착했을 때 비는 그쳐 있었고 인적이 없다. 촉촉하게 젖은 흙길을 걷다 보니, 목조로 만든 무시무시한 사천왕상 대신 벽에 그려진 사천왕이 맞는다. 여느 사찰과 달리 표정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긴장감이 돌만큼 엄숙한 통과의례가 오늘은 마음이 가볍다. 저만치 청암사 전각들이 보이고 맑은 물소리와 푸른 이끼,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필체조차 흉하지 않다.재물을 멀리한 스님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는 우비천(牛鼻泉), 그 샘물을 마시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을 알고 친구가 물 한 바가지를 권한다. 경각심을 주기에는 낡고 묵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은 걸까? 부채를 가린 스님의 자세보다는 재물을 얻는다는 전설에 재미삼아 물을 들이킨다. 결국은 잃어버리고 말 것들이란 걸 알면서도 경계에서 얼쩡거리는 나와의 조우, 물맛이 덤덤하다.조용한 경내에는 봄비가 도둑고양이처럼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한다. 반가의 사랑채 같은 육화료 앞에는 오래 된 자목련 한 그루가 몸을 풀다 침묵 중이다. 봄을 알리는 목련의 개화치고는 늦어도 한참 늦은데 해산은 느리고도 신중하다. 목련은 연못 없는 절에는 연꽃을 대신하여 심는 나무다. 그러나 이토록 품격 있는 자목련을 본 적은 없다. 60년의 수령치고는 줄기가 굵고 이끼까지 두른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단아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던 백목련 봉오리는 죽음 앞에서 우리를 실망시킨다. 순백의 흰빛은 질척거리며 품위를 잃는다. 몰락한 폐가마냥 쓸쓸하고 허무하다. 그나마 자목련은 큰 자줏빛 꽃잎이 주는 우아함과 후덕함이 있다. 정숙하고 마음씀이 넉넉한 반가의 여인 같다. 목덜미가 유난히 애처로우면서도 꿋꿋해 전통적인 한국 여인 같은 꽃이다. 인기척이 없는 육화료 마루에 앉아 자목련을 하염없이 바라본다.숙종을 두고 장희빈과 빚어졌을 사랑과 갈등, 기구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삶을 생각하니 명치끝이 아려온다. 매혹적이고 향이 강한 매화는 선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나 봄을 훔친다는 목련은 향기가 없다. 꽃샘추위 이겨내며 꽃을 피워보지만 봄날의 꿈은 짧고도 짧다.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는 슬픈 꽃말 하나 남기고 지고 만다. 뒤안길은 슬프고 외롭다.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게 인생이라지만, 후덕하고 어질다고 평가받는 인현왕후는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돌아볼까? 성주호의 잔잔한 수면이나 우아하게 봄비를 맞는 자목련처럼, 고요함을 위한 내면은 번민과 아픔의 연속이었으리. 명예를 회복하지만 3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비련의 여인 명성왕후, 이 비 그치고 나면 자목련도 후두둑 실밥이 터지듯 바쁘게 꽃을 피우고 떠날 것이다.육화료 마루에 앉아 자목련에 빠져 있을 때, 가냘픈 체구의 젊은 스님 한 분이 올라온다. 합장을 하고 인사를 건넨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는 목소리, 눈빛도 미소도 선하다. 또 다시 성주댐 속에 잠들어 있던 파스텔톤의 봄이 떠오른다. 스님이나 수녀님, 성직자의 편안한 낯빛과 마주할 때 우리는 겸허한 행복을 맛본다.▲ 조낭희 수필가하지만 누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하는가가 나 자신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나는 나 자신 외의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짧은 생은 끊임없이 갈등만 하다 어느 순간 목련처럼 지고 말리라. 아름다운 감성과 현실적인 꿈을 내려놓고 묵묵히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 어쩌면 그 삶이야 말로 진정한 향기를 뿜어내는 불사(不死)의 길인지 모른다. /조낭희 수필가

2015-05-01

밀양 만어사

염불 소리가 봄 햇살을 업고 마중을 나온다. 대웅전 법당문은 활짝 열려 있고 한 켤레의 신발만이 기도 중인 뜰에는 햇살이 눈 부시다. 문턱을 넘어 나오는 예불 소리에서도 봄 향기가 묻어나고, 작은 법당에서는 탁 트인 경관이 들어와 함께 기도중이다. 만어사는 46년 수로왕이 창건하여, 신라 시대에는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던 사찰이다.`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無隻山)의 신승(神僧)을 찾아가서 새로 살 곳을 부탁하였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 터라고 일러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자 수많은 종류의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머물러 쉰 곳이 이 절이었다. 그 뒤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하였고 고기들은 크고 작은 화석으로 굳어 버렸다고 한다.대웅전에서 조금 벗어나면 왕자가 변했다는 미륵돌을 모셔 놓은 미륵전이 있다. 높이 5m 정도의 뾰족한 자연석은 전각 안에 다 들어서질 못하고 엉덩이 부분이 빠져나와 있다. 아들을 얻지 못하는 여인이 기원을 하면 득남을 하고, 위급한 일이 생기면 땀을 흘린다는 바위다. 사람의 눈에 따라 사리를 입은 부처님의 모습이 보인다는 신비로운 돌이다.미륵전 아래에는 너비 100m 길이 500m에 이르는 거대한 암괴류(巖塊流)가 이색적인 풍광을 자랑하는데, `삼국유사`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화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었다”고 전한다. 약 3만 년 전 빙하기에 주변부의 깊은 땅속에서 심층풍화를 거친 화강암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미끄러져 내려와 형성된 것이다. 우리말로 너덜, 너덜겅 혹은 돌너덜이라고 하는데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물고기를 상징하는 절답게 대웅전 불상 대좌에도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물속에서도 두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는 항상 깨어 있으면서 재액을 방지해 준다는 의미를 가진 신물이다. 눈을 크게 뜨고 정진하라는 뜻의 목탁이나 빈 몸속을 두드림으로써 비움의 미학을 전하는 목어, 추녀 끝에서 바람의 노래를 전하는 풍경도 물고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거대한 물고기 떼, 만어사 돌너덜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무엇일까?왕자를 따라왔던 물고기들이 변했다는 만어석(萬魚石)은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거센 파도에 휩쓸려 산을 오르내리듯 모양도 자연스럽고 경이롭다. 두드리면 맑은 쇳소리가 나서 종석(鐘石)이라고도 한다. 누군가 옮겨놓은 듯한 돌무리도 장관이지만 다양한 소리가 신비롭다. 무심코 작은 돌멩이로 바위를 두드려 보니 맑은 종소리가 나는가 하면 목탁 치는 소리도 난다. 세종 때는 이곳의 돌을 이용하여 편경이라는 악기를 만들었다고도 한다.특별한 놀이기구가 없던 어린 시절엔 큰 바위나 나무, 자연이 좋은 놀이터이며 친구였다. 새록새록 몰려드는 추억 때문인지 돌너덜이 포근하고 정감이 간다. 모처럼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돌너덜을 밟고 아슬아슬하게 걷기도 하고, 봄빛 가득한 돌 위에 앉아 사진도 찍는다. 나찰녀의 아가리처럼 컴컴한 바위틈 구멍에 얼굴을 박고 우우 소리를 질러보고도 싶다.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쪽으로 가보니 상처투성이가 된 바위들이 흉물스럽다. 낙서처럼 새겨진 이름들과 소리를 듣기 위해 두드린 흔적들을 온몸에 두른 바위들이 고통을 호소한다. 평범하지 않아서 받은 조명은 영광보다 시련이 컸다. 오랜 세월 맞고 맞은 멍 자국들이 하얀 얼룩이 되어 아픔을 토해낸다. 애절한 눈빛들이 몰지각했던 내 행동을 돌아보게 한다. 단순한 호기심이 빚어낸 결과 앞에서 영혼은 남루해진다.일상에서 고요함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대웅전과 삼 층 석탑, 커다란 자연석에 조각된 부처님을 바라본다. 복을 바라고 화를 멀리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민간신앙의 흔적인 삼성각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중생들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화신이라면, 돌너덜도 다를 바 없다.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돌과 산허리를 채우고 있는 돌너덜은 같은 형상과 전설을 가졌지만, 다른 운명으로 살아간다. 성스럽다는 것은 외부의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날마다 뜨는 태양, 풀 한 포기, 하나의 미물도 부처님의 화현일 수 있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존귀한 대상이다.▲ 조낭희 수필가내 존재가 바로 서지 않으면 나를 부양할 수 없다. 오염되지 않고 집착 없이 사물을 대하는, 참 자아를 놓치지 않는 일상이 결국 기도하는 삶이다. 마음을 닦고 싶어 좋은 사찰을 찾아다녔다. 어색하던 기도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그런데 그 기도가 타성에 젖거나 일회성에 그친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상처투성이가 된 만어사 돌너덜이 경종을 울린다. 밤이 오면 돌너덜은 아픈 몸으로 하늘과 소통할지 모른다. 왕자를 따라왔던 그 날처럼 산 아래 펼쳐진 운해를 향해 펄떡이며 나아가는 꿈을 꿀지도 모른다. 만 마리 물고기가 고통 없는 세상을 향해 힘차게 뛰어 오르는, 장엄한 불법의 세계를 상상하며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조낭희 수필가

2015-04-24

장성 백양사

▲ 조낭희 수필가아름드리 갈참나무의 중후함과 파스텔 톤으로 물들어가는 애기단풍들의 두근거림이 길을 밝힌다. 연못에 몸을 담근 쌍계루의 반영도 봄빛으로 수줍다. 하늘과 나무, 햇살, 말끔한 차림의 백암산까지 연못 안에 모여 자기를 반추한다. 약간의 긴장과 평화로움이 살아있는 완벽한 데칼코마니, 백양사의 봄날은 유난히 투명하다.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와 더불어 5대 총림의 하나인 백양사(白羊寺)는 632년(무왕 33)에 여환이 백암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고려 때 중연 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조선 선조 때 환양 선사가 다시 백양사라 고쳐 불렀다.백양사의 이름은 흰 양을 제도한 데에서 유래한다. 환양이 백학봉 아래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흰 양도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다. 법회가 끝나던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이 소멸하여 다시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며 절을 하였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다. 그 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 불렀다.천왕문을 들어서는데 매화향이 먼저 반긴다. 천연기념물 486호로 고불총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고불매는 올해도 때를 놓치지 않았다. 검은 수피와 이끼 낀 옷을 입은 350살의 홍매화가 몸을 푸는 날, 봄비 온다는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수줍고도 우아하다. 고령의 산통이 빚어내는 환희, 깊고 은은한 향기가 물결친다. 연륜과 불심이 묻어나는 눈물겨운 산고, 그것은 성숙된 아픔 뒤에 맞는 희열이기도 하다.고불(古佛)이라는 이름이 붙기까지 한 그루 매화나무의 일생을 생각한다. 함께 동심을 나누었을 동자승과의 추억, 지혜롭던 노승과의 아름다운 별리만 있었으랴. 천형 같은 외로움과 번뇌로 숱한 밤 잠 못 이루었을 긴 시간들은 단단한 옹이가 되었으리. 불쏘시개로 베어질지라도 평범한 속가의 뒤뜰을 어느 한 때는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애잔한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해탈한 듯 기품 넘치는 초연함으로 섰지만 유난히 꽃빛이 맑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수백 년을 백양사에서 살아온 고불매는 전생에 쌓은 공덕이 컸나 보다. 섬세한 향기가 땅을 진동시키고 보는 이를 감동케 하는 저 노장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불심 가득한 한 그루의 매화나무가 촛불이 되어 백양사를 밝히고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햇살 가득한 뜰에 앉아 온몸으로 매화향기를 맡는다. 나를 돌아보고 삶을 생각한다. 문명의 이기에 발목 잡힌 도시에는 소비만 있을 뿐, 죽비가 없다.문득 염불 소리가 나를 깨운다. 대웅전의 예불소리다. 어쩌면 천왕문을 들어설 때부터 예불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고불매에 정신이 팔려 내 모든 감각은 차단되어 있었다. 공감 능력에 비해 균형 감각이 떨어지는, 고질병과 같은 나의 실수를 자책하며 서둘러 대웅전으로 향한다. 늦은 인사에도 부처님은 온화하고, 스님의 염불 소리는 고불매의 향기만큼 깊고 은은하다. 108배 대신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는다. 총림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지 않은 소박함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정갈한 기운을 가득 안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8층 석탑으로 향한다. 팔정도를 상징하는 석탑은 너른 마당을 두고 대웅전 뒤에 자리 잡았다. 홀로 봄볕을 쬐는 사리탑과 멀리 백학봉의 훤한 이마가 조화롭다. 탑의 둘레 모서리마다 팔정도가 새겨져 있다. 바른 삼매(正定)·바른 생각(正念)·바른 정신(正精進)·바른 생활(正命)·바른 행동(正業)·바른 언어(正語)·바른 사유(正思)·바른 견해(正見), 팔정도의 의미를 하나하나 가슴에 새긴다. 무슨 이유에선지 탑돌이는 수행의 의미보다 낭만성이 강해 보였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던 김현과 호랑이 처녀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곤 했다. 초파일 밤, 연등을 들거나 합장한 채 소원을 빌며 탑을 도는 일은 상당히 문학적이고 운치 있어 보였다. 언젠가 나도 달빛을 밟으며 소원을 비는, 그런 탑돌이를 해 보고 싶었다.염불소리 낭랑하고 매화 향기 그윽한 봄날, 나는 백양사 뒤뜰에서 탑돌이를 한다. 두 손을 모으고 진지하게 탑을 돈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다, 나를 바로 보고 제대로 관찰하라, 뜻을 두고 나아가면 길은 언제나 통해 있다, 노를 젓지 않으면 배는 떠밀려 간다, 실천이 곧 수행이다, 모서리마다 팔정도가 죽비처럼 꾸짖는다. 팔정도는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부처님의 행복론이다. 삶의 방향이 보인다.고장 난 시계바늘처럼 돌고 또 돌았다. 나를 돌아보고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백양사 고불매가 노령에도 향기를 피워내듯, 내 삶에서도 향기가 묻어나기를 소원한다. 일상이 언제나 오늘처럼 깨어있다면 좋겠다. 충만한 기쁨을 안고 돌아서는 나를 백암산이 배웅한다. 대웅전 염불 소리가 한참을 따라 나온다. 연못 속에는 봄날의 한 때가 여전히 기도 중이다.

2015-04-17

승주 선암사

▲ 조낭희수필가선암사 찾아가는 길은 용기를 내야할 만큼 먼 초행길이지만 봄비가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설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선암매를 비롯하여 수백 년 된 매화 70여 그루가 자란다는 절, 나는 우중(雨中)에 고령(高齡)의 선암매와 마주하고 싶었다. 선암사는 신라 진평왕(542년) 때 아도 화상이 비로암 자리에 창건했지만 도선 국사가 지금의 터에 중창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또 절 서쪽에 10여 장이나 되는 큰 돌이 평평해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1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답게 깊고 중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대가람이다.늦게 찾아온 봄이 깨어날 채비를 서두르는데 봄비 몇 방울이 듣다가 그친다. 부도밭을 지나고 보물 40호인 승선교를 만난다. 조선 숙종 때 호암 선사가 자연 암반 위에 축조한 무지개다리인 홍예교이다. 계곡과 나무, 물에 비친 강선루의 반영이 그림 같다. 이름 그대로 신선이 내려와 머물 만한 비경이 아치 안으로 펼쳐진다.선암사는 사천왕문과 협시보살, 어간문이 없어서 삼무(三無)의 사찰로 유명하다.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이 지켜준다고 믿어 사천왕문을 만들지 않았으며, 대웅전의 석가모니부처님이 탐진치 삼독(탐욕, 화냄, 어리석음)을 멸하고 항마촉지인으로 마구니에게 항복받아 협시보살상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대웅전의 어간문은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 출입할 수 있다하여 아예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일주문을 지나 범종루 누문을 거치면 만세루가 막아선다. 그로 인해 붉게 이우는 동백들과 인사를 나누며 돌아가는 느긋함을 배운다. 쉽게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가람 배치가 마음에 든다. 만세루를 끼고 돌아서면 그제야 수수하고 전아한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세월로 단청이 벗겨져 담백하고 우아하다. 대웅전 앞을 지키는 두 기의 삼층석탑이 간결미를 더하고 뒤켠의 홍매화 한 그루가 고풍미를 뿜어낸다.법당 안에는 주존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홀로 모셔져 있다. 정성을 다해 삼 배를 올린다. 법당에 서면 한없이 작고 낮아지는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먼 길을 달려온 내가 부처님만큼 큰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안의 부처를 만나는 날, 나는 모처럼 넉넉하게 불전을 올린다.오래된 석축과 돌담, 섬세하게 꾸며놓은 정원을 감상하며 선암매를 찾아 나선다. 독특한 가람배치와 자연스럽고 소박한 짜임들, 전각들은 웅장하지 않으면서 자유분방한 듯 질서를 갖추고 있다. 나란히 어깨를 맞대거나 각을 지어, 대칭과 비대칭을 반복한다. 그 사이로 길은 막힌 듯 트여 있다. 품격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선비다운 풍모가 느껴지는 사찰이다.선암매를 찾아 기웃거리는데 한 무리의 사진작가들이 시끄럽다. 무우전 돌담길을 지키는 매화들이 일제히 펴서 눈이 부실만큼 화사하다. 원통전 돌담 뒤의 천연기념물 488호인 선암매는 노령의 기품을 유지한 채 몸 풀 날을 기다린다. `종정원`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무우전은 흑백사진 속의 고향집 같다. 아련한 추억 속의 돌담길을 배경으로 수십 그루의 매화들이 애간장을 녹인다. 운무의 흐느낌도 매화향기에 실려 고혹적이다. 다투듯 피어나는 애끓는 사랑, 선암사의 4월은 온통 열애 중이다.늦은 사랑이 내게로 왔다/ 가장 늦은 사랑이 첫사랑이다/ 봄 여름 가을/ 꽃시절 다 놓치고/ 언 땅 위에서/ 나는 붉어졌다/ 누구는 나를 가리켜 봄이라 하지만/ 꽃물을 길어올린 건/ 겨울이다 인색한 몇 올의/ 빛을 붙들어 온몸을 태운/ 한 그리움의 / 실성(失性)/ 그리워할 누군가가 있는가/ 지금 그리워해도 되는가/ 너는 묻지 않았으니/ 스스로 터져 봄날이 되는 사랑아/ 아직 얼어붙은 하늘에 뾰루퉁 입 내민/ 붉은 키스/ 가장 이른 사랑이 내게로 왔다. -이상국의 `홍매`- 화심은 흐린 날씨마저 뜨겁게 달구고 뒷산의 운무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킬 새라 가까이 다가서질 못하는데, 사진 작가들의 빗나간 예술혼이 씁쓸하다.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는 언행과 탐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저만치 물러서서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하며 질펀한 매화향에 젖는다.절절한 아름다움 속으로 파고드는 기습적인 전율,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부처님의 가피이리라.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손을 모으는 일, 그것뿐이었다. 선암사 부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황홀한 홍매화의 모습으로, 무언가에 집착하는 인간으로, 때로는 운무 가득한 자연이 되어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 온기는 깊고 아늑하다.가슴에 온전히 담아둘 수 없는 아쉬움을 접고, 시간에 쫓겨 선암사를 빠져나온다. 해마다 안개 낀 봄날이 오면 선암사가 그리워 한 차례 열병을 앓을 것만 같다. 의식이 성장하는 진통, 수백 번 앓아도 괜찮은, 그런 열병이라면 좋겠다. /조낭희 수필가

2015-04-10

김제 금산사

▲ 조낭희 수필가지평선을 볼 수 있을 만큼 너른 곡창지대에 우뚝 솟은 산, 그 품에 안긴 금산사가 보고 싶었다. 강인하고도 넉넉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금산사로 향했다.우리를 맞아준 것은 심한 황사 속에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서성이는 겨울의 그림자였다. 봄 햇살의 몸짓이 어딘지 불안하다. 보제루 앞을 지키는 목련 봉오리의 창백한 눈빛과 관광객들의 분주한 발걸음, 넓은 터와 웅장한 전각에서 여느 사찰과 달리 장군다운 기상이 느껴진다. 이른 봄날의 사찰은 어수선하지만, 희망과 기대감으로 술렁인다. 황사가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목련처럼 금산사는 미륵불이 도래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어, 통일신라 때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최고의 미륵도량으로 알려졌다. 또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자신의 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중수했으며,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중기 사상가 정여립이 혁명을 꿈꾸었고, 조선 후기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과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 역시 모악산과 금산사를 무대로 활동했다. 어지러운 세상, 미륵의 힘을 빌려 세상을 구원하려 했던 이들의 꿈과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사찰이다.금산사의 중심 전각은 미륵전으로 금당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불전으로 국보 62호이다. 1층은 대자보전, 2층은 용화지회, 3층은 미륵전의 구조로 되어 있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 중생을 구제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장육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금산사에 가신 분은 주인 찾아 인사하소`라는 유명한 금산사가(歌)가 생각나 미륵전으로 향한다. 발걸음이 떨려온다.법당문은 열려 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삼존불이 숨이 막힐 듯 웅장하다. 주불이 11.82m, 좌우 보불이 8.8m로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진표율사가 처음 세운 미륵불은 철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다시 목불로 조상하였지만, 그마저 불에 타고 지금 있는 석고불은 1938년에 중건된 것이다. 크기에 눌려서일까? 3배를 하는 동안 한없이 작고 낮아진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한참을 서서 삼존불을 우러러보지만 미륵불의 마음을 읽을 길이 없다.동행인이 미륵존불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시루모양의 철수미좌가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쪽문을 열고 불단 뒤로 난 좁은 통로를 들어선다. 승승장구하던 견훤의 도피와 한이 떠오르고, 시대를 앞서갔던 명민한 역사 속의 인물들도 생각난다. 순간 나를 붙들고 있던 한계의식이 부끄럽다. 지금까지 사찰에서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느낌이다.거대한 미륵장육상을 받치고 있는 쇠로 된 연화대를 조심스레 만져본다. 가슴이 뭉클하다. 오랜 세월로 심하게 부식되었지만 불자들의 손길이 닿은 곳은 매끄럽게 윤이 난다. 믿음과 염원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유토피아적 미래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떡시루 연화대가 부식되기 전에 미륵불이 나타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다.떡시루는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솥이 모든 것을 조화시킨다면 시루는 그것들을 익혀 성숙시킨다. 시루는 솥 위에 있을 때 비로소 제 역할과 쓰임을 다한다. 둘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시루에 넣고 찌듯이 미륵불이 새로운 세상을 오게 한다는 믿음에서 만들어진 연화대이다. 어쩌면 역사는 그 가능성 하나로 발전해 왔는지 모른다. 미륵전에서 조금 떨어진 마당에 커다란 석련대가 보인다. 아름다운 연꽃과 작은 잎들이 새겨져 화려하고 우아하다. 오랜 세월에도 크게 파손된 흔적 없이 양호하다. 그러나 제 역할을 잃고 보물 23호라는 이름표만 단 채 쓸쓸히 마당을 지키고 있다. 부식되어 가면서도 큰 미륵불을 받치고 있는 떡시루 연화대와는 대조적이다.석련대 앞에 서서 솥과 시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제 쓰임을 다 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나는 솥의 존재를 무시한 채 시루 같은 존재로 살아가지는 않는가? 어쩌면 물과 숯을 외면하고 좋은 떡시루만 찾아 헤매는 아둔한 무쇠솥일 수도 있다.대적광전 옆 돌담위에 측백나무가 폭포수처럼 가지를 아래로 드리우며 자란다. 측백나무의 유연한 생명력은 인공돌담을 자연스럽게 가려주어 운치를 더해 준다. 멋진 솥과 시루의 만남이 빚어낸 경관이다. 세상이 힘들수록 아집을 버리고 나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어울림이 필요하다.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는, 그런 솥과 시루의 인연을 기대해 본다.인생은 무(無)라고 말하지만 존재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느릿느릿 목표를 향해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가녀린 봄 햇살이 언 땅을 녹이듯, 새로움을 위한 시도는 언제나 필요하다. 나이를 핑계로 방치하거나 잃어버렸던 의욕들을 다시 점검해 본다. 낯선 지방에서 만난 금산사, 그 눈빛은 의욕과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목련이 몸을 푸는 날, 금산사 떡시루를 생각하며 소박한 꿈을 다시 설계해 보리라. /조낭희 수필가

2015-04-03

영천 거조암

▲ 조낭희 수필가아침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 부딪치는 소리에 지난 시간의 문을 열고 말았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또 다른 기억과 생각을 몰고 온다. 무심코 주고받은 말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상처를 내기도 하고,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행동들에 자조적인 물음을 던져보기도 한다. 이런 날은 침묵하고 싶다. 홀로 거조암으로 향한다.자동차는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다, 개발의 훈풍을 기대하는 소도시의 국도를 천천히 달린다. 낯선 길은 새롭고 신선한 감동을 안겨 주지만 이 길은 익숙하고 편안하다. 오늘 같은 날, 봄빛이나 흙냄새를 기대하는 건 사치다. 사금파리가 되어 내면을 아프게 하는 것들과의 조우, 나는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아픔이 힘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거조암은 은해사보다 먼저 지어 원래 거조사라 불렀다. 신라 효성왕 때 원참조사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는 설과 경덕왕 때 건립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래에 와서 거조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으로 거조암이라 부른다. 오백나한상이 있어 오백나한절이라고도 한다.국보 제14호인 영산전은 몇 안 되는 고려 시대 목조건물 중 하나로 단정한 맞배지붕이다. 법당 안에는 오백나한상이 극락도의 배열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데, 법화스님이 신통력을 발휘해 이 오백나한상이 모두 스스로 극락도의 그림처럼 자리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때문에 영험 있는 나한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불자들이 많이 찾는다.봄물이 잔뜩 오른 과수원을 지나고, 평범한 마을을 지난다. 작은 호수를 스치듯 지나면 새로 지은 일주문이 나타난다. 휑하고 쓸쓸한 일주문이다. 때로는 산비탈 험준한 길을 쉼 없이 오르다 보면 산사에 닿기도 전에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거조암 가는 길에 그런 것을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대신 일주문을 지나 영산루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어 짧은 시간에 다녀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영산루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돌계단을 오르면, 출입문이 하나뿐인 큰 영산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단청이 없고 칠도 하지 않아 소박한 간결미가 돋보이는 중심전각이다. 영산전 앞에 별 특징 없는 삼층석탑이 허전함을 달래며 반긴다. 열린 법당 문 정면에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무엇보다 삼존불 뒤에 있는 우아한 후불탱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려한 듯 차분한, 품격이 넘치는 붉은 바탕의 영산탱이다. 독특한 색감에 빨려 한동안 선 채로 감상한다.뒤늦게 3배를 하고 만(卍)자 형태로 배치된 오백나한상을 만나러 화살표를 따라 법당을 돈다. 나한이란 아라한의 준말로 저잣거리의 무뢰배인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익살스럽거나 무심한, 때로는 험상궂은 표정들이 개성 넘치고 자유스럽다. 오늘 같은 날은 근엄한 부처님보다 나한상들이 훨씬 친근하다. 갖가지의 표정과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한상들에게서 나를 찾는다.오백나한상 모두에게 사탕이나 동전을 하나씩 놓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설이 있다. 오늘도 그 영험성에 의존하여 간절히 빌고 간 불자가 몇 사람 있었나 보다. 모두 같은 양의 사탕과 동전이 놓여 있다. 나는 눈에 띠는 나한상에게만 보시를 하니, 차별을 하는 셈이다.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법당을 돈다.기분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나한상은 다르다. 지루하고 권태로운 날에는 험상궂은 나한상이, 구름처럼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날에는 마주 웃어주는 나한상이, 오늘 같은 날에는 자비로운 미소도, 해학적인 표정도 아닌 그저 무심한 표정이 좋다. 누군가를 배려해서 쏟아낸 말이, 혹은 고치고 고쳐 쓴 글이 본질과 멀어져 허탈감을 맛보아야 할 때는 어떤 말이나 표정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그는 무심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것 같다. 준비해 온 사탕과 동전을 앞에 놓고 예만 갖출 뿐 소원은 빌지 않는다. 수많은 나한상과 눈을 맞추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생각과 행동이 경솔해 스스로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 할지라도 지나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상처가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아 덧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비가 오다 개는 날이면 얼마나 많은 우산을 잃어버렸던가. 내 안에 있는 불필요한 것들도 그처럼 쉽게 잃어버리거나 망각했으면 좋겠다. 도(道)는 단순함에서 온다고 했다. 비워야겠다고 결심하면 할수록 더 차오르는 게 마음이다. 마음이 흘러가는 곳을 가만히 응시해 본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스스로가 못마땅해 화가 나면 나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내면을 지그시 바라보며 거조암을 빠져나온다.“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진푸티상사의 염송이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자애롭고 편안한 소리가 내 안으로 흘러든다. 누구에게나 상처만큼의 회복 시기가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파할 수 있어 더 아름다운지 모른다. 무심코 산 쪽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이 마른 가지 사이로 분주히 설렘을 실어 나르고 있다. 나는 볼륨을 좀 더 높인다.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햇살 좋은 오후다. /조낭희 수필가

2015-03-27

통영 비진도 비진암

▲ 조낭희 수필가문득 봄소식이 궁금하여 남해의 섬, 비진도를 찾았다. 산수가 수려하고 풍광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해산물이 풍부하여 보배에 견줄 만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섬이다. 공기는 투명하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벌써부터 돌아갈 뱃시간을 생각하며 바쁜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나는 모처럼 낯설지 않은 것들과 호흡하며 바닷가 산책로를 걷는다. 밭둑에서는 매화꽃이 터지고, 길가에는 새로 돋은 쑥이 무리지어 나풀거린다. 햇살에 반사되어 빛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위를 통통배가 지나간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바다와 마주 하고 싶다.통통배 소리조차 정적 속으로 흡수되는 시간, 친구는 저만치 뒤에서 카메라에 섬 풍경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타박타박 봄빛 속을 걷는다. 똑같은 풍경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길이다. 한참을 걷자 이색적인 바다풍경이 펼쳐진다. 긴 사주를 중심으로 전혀 다른 바다가 나란히 공존한다. 서쪽은 고운 모래사장과 산호빛의 잔잔한 바다가, 동쪽은 깊고 그윽한 푸른빛의 바다가 몽돌해안을 넘실거린다.조각보를 이어놓은 듯한 밭에는 채 뽑혀나가지 않은 시금치들이 봄나물에 밀려 존재감을 잃어 간다. 새로운 것 앞에서 빛을 잃고 묵묵히 견뎌야 하는 인고의 힘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나 보다. 쑥이며 달래, 마늘잎을 파는 할머니들 뒤로 가파르게 솟은 선유봉이 꿈을 꾸듯 졸고 있다. 비진도를 지키는 아름다운 자존심들이다. 다양한 바닷빛을 연출하는 신비로운 섬, 그 안 어딘가에 비진암이 있다.미인의 치맛자락 같은 산호길이 한동안 바다를 끼고 이어진다. `바다 백리길`의 한 구간에 속하는 경관 좋은 명품길이다.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오솔길 옆으로 끝없이 바다가 속살대고, 이따금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흔들린다. 섬 전체가 투명한 베일에 싸인 듯 고요하고 평화롭다. 구실잣밤나무 그늘에 서서 바람이 햇살을 업고 바다 위를 흐르는 광경을 지켜본다. 느슨한 시간과 꽉 채워진 여유, 종잡을 수 없던 일상이 잠시 닻을 내린다.비진암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평온한 돌담길을 끼고 돌자 조금 높은 곳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망부석 같은 암자다. 비진암으로 향하는 돌길 위에는 동백나무가 토해낸 붉은 잔해들이 뒹군다. 추억을 삭이지 못해 동백꽃의 낙화법은 무겁고 슬플 수밖에 없는 걸까. 모가지가 부러진 통꽃의 주검들, 선혈이 낭자한 꽃잎 곁을 봄 햇살이 말없이 지키고 있다. 동백꽃의 눈부신 절규와 봄빛의 짧은 동거가 겨울 송가처럼 애절하다.충신이 간언하다 목이 잘린 것처럼 통째로 진다하여 동백꽃을 충신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나는 슬픔이 듣는 그리움을 먼저 떠올리고 말았다. 노란 꽃가루가 붉은 꽃잎에 번져 주검조차도 고혹적이다. 자존심과 절개를 목숨처럼 여기며 왔건만 그 뒤안길은 시리고 허무하다. 화사한 봄날, 눈물처럼 지는 동백꽃을 보노라면 자연의 이치는 모질고 잔인하다.비진암을 지키는 동백나무 앞에서 `춘희`를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가슴에 흰 동백꽃과 붉은 동백꽃을 꽂아 월경일을 표시하며 호색한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냈던 고급 창녀, 그녀의 애절한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비진도의 동백꽃에는 아픔은 있지만, 순수함이 빚어내는 품격이 있다.“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친구가 `동백아가씨`를 흥얼거린다. 식상할 정도로 듣던 노랫말이 울컥 가슴을 적신다. 봄날의 비진암이 빨갛게 물이 든다. 동백나무가 드리워진 돌계단은 속세를 벗어나는 출구가 아니라 그리움 짙어지는 인연의 늪으로 빠져드는 입구 같다. 일주문도 불이문도 없다. 작고 소박한 법당이 전부다. 그리운 인연들을 끊기엔 동백꽃은 청순하고 봄 햇살은 지나치게 매혹적이다.깎은 머리가 파르스름한 비구니 스님이 반겨줄 것만 같은데 아무도 없다. 법당은 오래 비어 있었는지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다. 처마까지 가지를 드리운 동백나무의 붉은 정념들이 햇살에 반짝이고, 동박새들의 지저귐이 염불을 대신한다. 문틈으로 들여다 본 법당 안에는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닫혀진 문 밖에서 선 채로 삼배를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은 회색빛 바다가, 사람이 그리운 날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법문을 들려줄 것 같은 암자다. 좁은 툇마루에 앉아 얼굴도 모르는 스님을 기다린다.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한참을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스님이 계시지 않은 빈 암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런데도 법당 안 부처님이 그리움에 지쳐 빨갛게 멍이 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비진도의 동백꽃이 모두 이울고 나면 비진암 석등에도 불이 켜질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온다. 친구가 또 다시 동백 아가씨를 흥얼거리며 뒤따른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다. 비진암과 동백꽃의 눈빛을 기억하는 동안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2015-03-20

경주 칠불암

▲ 조낭희 수필가지척의 거리에 있는 고도 경주는 가깝고도 먼 도시이다. 자주 들르긴 하지만 천 년의 역사를 제대로 음미하거나 감동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신라의 전통 문화와 예술이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소극적이었다. 용장골에서 시작된 긴 산행의 행렬을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며 맞는다. 봄이 오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리 높지 않지만 신라 불교예술의 보고인 지붕 없는 박물관, 간 밤에 내린 비로 자욱한 운무가 숲을 지키고 있었다. 신비롭고 몽환적이다.젖은 솔 내음이 후각보다 가슴을 먼저 자극한다.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말문이 막히고 겸허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정직한가. 자연은 끊임없이 비경을 만들어내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예술가이며 가치를 논할 수 없는 예술이다.는개가 내린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소리 없이 젖어들며 느낌으로 자기를 알려온다. 가냘프고 미약한 몸짓이지만 우리를 적당한 감성과 차분함에 젖게 하는 사랑스런 존재다. 칠불암을 향한 설렘은 간곳이 없다. 는개 내리는 이 솔숲길을 마냥 걷고 싶다.“어머나! 개불알꽃이 벌써 피었네요.”“개불알꽃이 며느리밑씻개와 결혼했다는 소식 들었어요?”소녀 같은 감성을 가진 어느 시인의 경탄에 위트 넘치는 입담이 이어진다. 봄이 놀라서 주춤거린다. 계절 좋은 어느 날, 개불알꽃과 며느리밑씻개가 결혼식을 올리고 남산 백운사 아래 길가에 신혼방을 차린 후 애기똥풀을 낳고 천년만년 살았단다. 지천에 널려 있는 풀꽃들이 왜 내게는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을까. 자연을 사랑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만 받을 수 있는 특별한 풀꽃들의 초대가 부러울 뿐이다.남산이 멋진 배경을 연출하니 다들 재치가 반짝인다. 다리는 아프지만 칠불암을 향하는 마음은 경쾌하다. 이영재를 넘어 가파른 바위 계단을 내려가면 곧 칠불암이 나타난다고 누군가 격려한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운무가 비경을 연출하는 이 비탈진 산등성이 어느 쯤에 칠불암이 숨어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존경하는 문인이 칠불암에 대한 예진스님의 사랑과 열정, 달빛 냄새를 얘기할 때마다 나는 꿈을 꾸듯 온몸으로 들었다. 나도 달빛냄새를 맡고 싶다.조용한 칠불암의 옆구리를 습격하듯 들어선 한 무리의 등산객들은 마애불 앞에서 잠시 숙연하다. 4.26m 높이의 병풍바위에는 항마촉지인을 한 본존이 꽉 차게 부조되어 있으며,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도 인체보다 훨씬 장대하다. 사각 돌기둥에 부조된 4구의 부처도 훼손되지 않은 채 늠름하게 남산을 지키고 있다. 모진 세월을 버텨온 힘은 무엇일까? 위엄 있고 근엄한 자태 속에서도 잃지 않은 자비의 덕이며 신라인의 염원이리라.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삼존불은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천년의 시간을 뚫고 금방이라도 걸어 나와 미소로 제압할 것만 같다. 남산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국보 312호인 마애불상군, 그 이름을 따온 칠불암은 원효가 머문 도량과 현존하는 유물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작은 법당에는 부처님을 따로 모시지 않고 마애불상군이 보이는 벽에 커다란 유리문을 내어 안과 밖을 하나로 묶었다. 작은 지혜로 인해 법당의 영역은 창 너머 마애불상군과 남산 전체로 확장된다. 근엄함 뒤에 감추어진 미소를 찾느라 뒤늦게 점심공양을 서두른다. 먼저 도착한 문인이 좁은 마루에 걸터앉아 공양을 하다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짓한다. 연꽃 위에 앉은 사방불에 이어 5방불이 따로 없다. 칠불암을 찾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피로 모두 5방불이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편안해질까.마애불상군이 보이는 돌 위에 앉아 비빔밥을 먹으며 내 안에도 미소를 심기로 다짐한다. 대화를 나누며 먹는 오찬은 소박하지만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칠불암을 사랑하는 지인이 신선암으로 안내한다니, 운이 좋으면 달빛 냄새로 낭만적인 후식까지 곁들일지 모른다.일행들 몰래 찾아간 낭떠러지에 신선같은 마애불이 기다리고 있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산야를 배경으로 구름을 타고 유희좌를 하고 있는 관음보살상은 온화하면서도 인자하다. 아우라가 넘친다. 수행하던 승려가 마애불을 사모하다, 그 열정을 참지 못해 바위 아래로 몸을 날리자, 연꽃잎으로 변해 산산이 흩어졌다는 애틋한 전설을 가진 마애불이다.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마애불을 앉힌 신라인의 불심 앞에 가슴이 먹먹하다.옆에서 마애불의 미소가 보인다고 하는데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빛의 방향을 가늠하고 자리를 옮겨가며 애를 써보지만 마애불은 쉽게 미소를 띠지 않는다. 후일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리다 무심코 돌아본 순간, 달빛 냄새가 가득하다. 보름달이 훤히 산등성이를 밝히면 미소가 드리워질 신선암, 그 냄새가 온몸으로 파고든다. 대낮에 본 달빛냄새는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황홀했다.

2015-03-13

양산 통도사

▲ 조낭희 수필가통도사에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는 한참이나 지났다. 바람이 분다는 소식에 친구의 가슴에도 분분히 매화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걸까. 통도사의 자장매가 궁금했나 보다. 그녀의 용기에 내 마음은 이미 매화 꽃잎 화사한 나무그늘에 앉아 있다. 자장율사를 기리기 위해 스님들이 심고 자장매라는 이름을 붙여준 홍매화,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봄은 언제나 통도사 홍매화에서 시작된다. 꽃봉오리를 터뜨렸다는 소식이 들리면 겨울은 갑자기 수척해지고 내 안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파란 싹을 틔우듯 새로운 각오로 무언가를 꿈꾼다. 칙칙한 일상도 산뜻해질 것만 같다. 이러한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면 그제야 세상은 봄빛을 쏟아낸다.통도사는 영축산에 자리한 대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 율사가 창건했다. 석가모니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로 규모가 큰 적멸보궁과 사리탑이 있다.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 하여 통도사라고 칭했다.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설과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하여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대웅전은 부처의 신골(身骨)인 사리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대신 큰 유리 벽 뒤로 펼쳐지는 노송들의 자태가 심장을 뛰게 한다. 일상을 내려놓고 법당에 들어서면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다른 세계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독특한 전각이다.언젠가 와본 통도사를 소개하는데 그녀는 온통 홍매화를 만날 생각에 마음을 빼앗긴 듯하다. 천왕문을 들어서자 매화향이 먼저 반긴다. 홍매화는 보이지 않고 수많은 전각과 상춘객만 어지럽다. 이토록 진한 향을 가슴에 품고 사막 같은 겨울을 건너오다니 가슴이 두근댄다. 경이로운 생명의 순환 앞에서 통도사가 허파처럼 숨을 쉰다.뒤늦게 영각 앞에 선 홍매화와 눈이 마주쳤다. 수령이 350여 년이나 된 자장매는 화사한 분홍빛으로 차려입고 마지막 정념을 토해내고 있다. 수줍은 미소는 없지만 고풍스런 사찰의 안주인다운 기품이 넘친다. 두껍고 거친 수피와 작고 여린 꽃이 토해내는 짙은 향기, 그 불균형이 빚어내는 눈부심은 슬프도록 황홀하다.북풍한설 이겨내고 두근거림으로 피었다가 진한 향기를 토해내는 꽃, 이황과 두향의 사랑이 더 고상하고 영원성을 가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리라.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할 때, 관기 두향이 매화를 선물하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당시 두 부인과 아들을 연달아 잃은 퇴계의 빈 가슴에 매화 같은 두향의 존재는 참으로 그윽했으리. 그러나 짧은 인연을 끝으로 퇴계는 풍기군수로 떠나면서 두향이 준 수석 2개와 매화 분 하나를 평생 가까이 두고 그녀를 대하듯 사랑을 쏟는다. 두향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둘의 사랑은 사려 깊고 지조가 있었다.퇴계는 임종 시에도 수척한 몸으로 `매형(梅兄) 볼 면목이 없다`며 송구스러워했고, 매화에게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매화 사랑이 극진했다. 애틋한 사랑과 절개는 지금도 천 원권 지폐에 남아 향기를 발하는데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삭막하지는 않은가. 매화꽃이 필 때면, 잠시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할 것 같다. 그 작은 여유가 봄을 맞는 예의리라.매화 향 가득 품고 일주문을 빠져나와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를 걷는다. 수백 년 된 노송들이 숲 그늘을 만들고 흙길의 감촉도 좋다. 우리가 두어 번 만나는 동안 겨울은 무심하게 가버렸다. 그러나 또 다른 계절이 있어 이토록 아름다운 만남을 준비할 수 있다. 친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도 맑다. 속절없이 홍매화가 진다 한들 어떠랴. 자장매를 함께 보러 가자고 불러주는 벗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문득 다산 정약용의 죽란시사(竹蘭詩社)가 생각난다. 젊은 시절, 서울 인근에 사는 남인계 청년들의 문예창작과 풍류를 즐기는 사교 모임이다. 다산 집 마당에는 꽃과 과일나무가 가득한데, 심부름하느라 쫓아다니는 비복들의 옷깃에 스쳐 상처를 입을까봐 마당의 동북쪽으로 대나무 난간을 세운다. 이를 죽란(竹蘭)이라 하고, 때 맞춰 찾아오는 선비들도 죽란을 거쳐 온다 하여 모임의 이름을 죽란시사라 했다. 살구꽃이 피면, 복숭아꽃이 피면,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초가을 서늘할 때 서지(西池)에 피는 연꽃을 보기 위해, 국화가 피면,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세모(歲暮)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번씩 모이되, 모임 때마다 술, 안주, 붓, 벼루 등을 갖추어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참으로 멋스럽고 운치 있는 모임이다. 꽃이 피고 싹이 트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우주의 신비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고 교분을 쌓았으리. 멋과 풍류가 빠지지 않는 옛 선비의 삶이 오늘은 그리 부럽지 않다. 우리의 대화처럼 물빛도 찰랑거리며 흐른다. 친구에게서 매화향이 나는 것 같다. 봄을 시샘하는 겨울바람이 장난을 치며 따라온다. 통도사의 조춘(早春) 풍경은 그림처럼 평화로웠다.

2015-03-06

청경과 탁금은 원래 하나

▲ 조낭희 수필가옛 기억을 더듬으며 군위 인각사를 찾았다. 부푼 기대와 달리 평지에 있는 경내는 쓸쓸하다 못해 황량하다. 개울 건너 학소대만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절을 지키고 있다. 인각사는 한 때의 영화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해서 일연 스님으로 인해 유명해진 인각사는 전국불교의 본산이었을 정도로 대가람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퇴락하기 시작하여 옛 전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폐사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다 삼국유사의 고향으로 각광받으면서 조금씩 옛 모습을 복원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발굴할 게 많아서 그런지 어딘지 어수선하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와 신라의 향가 등 귀중한 자료가 기록된 문헌, `삼국유사`를 일연 스님이 이곳에서 완성하셨다.혹자는 삼국유사가 불교와 신라중심에 머물렀다고 비판하지만 우리나라 고대 역사,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기록한 서사시로서 큰 가치를 띠고 있다. 스님은 이 책뿐만 아니라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충렬왕 때 국존에 책봉되었을 정도로 큰스님이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를 봉양키 위해 편안한 삶을 버리고 인각사로 낙향한 욕심 없는 분이다.스님이 입적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중국 최고의 명필 왕희지체를 집자하여 보각국사비를 만들었다. 지나치게 좋은 것은 오히려 평범한 것보다 못한 법인가? 보각국사비는 생각지도 못한 수난을 당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왕희지체에 관심을 보이며 무절제한 탁본이 이어졌다. 특히 왜적이 엄동설한에 비석을 쓰러뜨리고 불을 지펴 탁본을 하는 바람에 훼손이 심해, 결국 열 몇 개의 덩어리로 깨져버리고 말았다.보각국사비의 글씨를 갈아 마시면 유생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임신한 여인은 영재를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게다가 국내외에서 이어지는 탁본 요구에 승려들이 고의적으로 파손했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보각국사비의 수난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다행히 파손되기 전에 탁본한 것이 남아 있어 인각사비는 왕희지체로 웅장하게 복원되었다. “겁화(劫火)가 모든 것을 살라 산하가 다 재가 되어도 이 비석은 홀로 남아, 이 글은 마멸되지 않으리.” 당대 대표적인 문신 민지가 쓴 비문의 끝머리 구절이다. 그런데도 개인의 탐욕에 눈이 멀어 소중한 우리것을 지키지 못해 부끄럽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다.“맑은 거울(청경)과 탁한 쇠(탁금)는 원래 다른 것이 아니요, 흐린 물과 맑은 물은 그 근원이 같다. 다른 것은 거울의 닦고 닦지 않음과, 물의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데 있을 뿐이다. 모든 부처와 중생의 불성도 거울과 물의 경우와 같아서, 다만 어리석고 깨달은 차이만 있을 뿐이니, 누가 감히 무지하고 슬기로움에 다른 종자가 있다고 말하겠는가”몇 번이나 읽고 싶어지는 이 명문 역시 민지가 쓴 비문의 서문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왕희지 서체를 음미하면서 스님의 행적과 정신을 마음에 아로 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슬픈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각사비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인각사 뒤편에 있는 선조의 묘소를 참배하러 다닌 적이 있다. 학소대의 비경과 쓸쓸한 인각사가 내려다보이는 유택 앞에서 할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현감을 지낸 조부가 이곳에 잠드실 때 인각사 스님들이 도와주셨다는 말씀을 끝으로, 잊지 않고 인각사에 들르셨다. 어렴풋한 그 때 기억으론 전각 하나만 달랑 남은 서글픈 사찰이었다. 인각사에서 할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서너 명의 남자가 인각사비 앞에서 종이 위에 물을 뿌리고 마구 두드려대는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본 적이 있다. 후일 그들이 탁본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가 인각사를 자주 들렀던 이유는 무엇일까?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할아버지는 하교하는 나를 기다렸다가 숙제를 도와주시곤 했다. 처음 글자를 배우고 익힐 때 정성들여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며 엄하게 가르치셨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할아버지 덕에 나는 글씨체만큼은 칭찬받으면서 컸다. 인각사비 앞에 서니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잔잔히 밀려든다.컴퓨터와 휴대폰의 등장으로 글씨체의 중요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급변하는 시대는 늘 새로운 무언가를 요구해 왔으며 사람들은 쉽게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며 떠난다. 가난했던 그 때나 풍요로운 지금이나, 우리가 소중한 어느 한 부분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인각사비의 명성과 추억을 더듬으며 찾아 왔지만 거친 얼굴조차 쓰다듬을 수 없다. 보호망에 갇힌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돌아서야 했다.상처뿐인 영광, 두 동강이 난 몸은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나고 있다. 염불소리라도 들렸으면 좋겠다. 그윽한 향기 피우고 열매 맺는 쥐똥나무 울타리나, 굴뚝새 몇 마리쯤 친구 되어 날아와 주어도 이처럼 서글프지는 않으리. 황량한 계절이 인각사비를 더욱 쓸쓸하게 하는 오후다.

2015-02-27

참선하는 마음으로

함월산 기슭에 자리한 골굴사는 신라인의 호국불교 정신과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禪武道)를 양성시키는 중요한 사찰이다. 초입부터 여느 산사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일주문 앞에 무예 조각상들이 일렬로 서 있어 소림사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선무도가 어디에서 열리는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벽안의 앳된 청년이 서툰 우리말로 알려 준다. 선무도장 안에는 무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맨발로 무예를 펼친다. 절도 있는 동작들과 흐트러짐 없는 눈빛이 실내를 긴장시킨다. 연마된 몸동작, 정신의 혼연일체, 모두 숨을 죽이고 하나가 된다.일곱 동물의 동작에서 따온 선무도를 보며 나는 호랑이의 포효하는 듯한 강인함과 학의 고고함을 느낀다. 단순히 공격이나 방어의 무예가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를 함께 수양하는 무도임을 알 수 있다. 선을 통해서 무를, 무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선무불이(禪武不二), 즉 정과 동이 끊임없이 상생하며 빚어내는 멋진 선(禪)의 예술이다.선무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아나파나사티 경전에 근거를 둔 전통 수행법으로 몸과 마음, 호흡의 조화를 통해 깨달음을 구하는 움직이는 선이다. 신라의 화랑도와 조선의 승병 정신을 계승해 오다가 갑오경장 이후 승병제도가 폐지되고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맥이 끊겼다. 그러다 몇 사람의 노력으로 다시 세계인의 수련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벽안의 젊은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들은 무엇을 구하러 동양의 작은 나라 절집을 찾아왔을까? 지켜보는 내내 신기하고 대견하다. 건강한 정신세계를 찾아 한적한 사찰에서 몸과 마음을 닦는 이방인, 안정된 미래를 위해 선진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우리의 젊은이가 잠시 교차된다. 행복의 조건은 각자 다르다. 하지만 거대한 흐름에 떠밀려가듯 자신을 잃고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진정한 행복 찾기는 힘들 것이다.아리따운 영국 아가씨가 동양의 사부를 위해 좌복을 깔아주고 예를 갖춘다.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자기 관찰과 점검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수련이다. 뿌듯하기보다는 엄숙한 무언가가 밀려든다. 어쩌면 선무도는 그녀에게 존재의 구원과도 같을지 모른다. 그녀의 선택과 앞으로의 수행을 위해 나는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머지않아 벽안의 청춘에도 천년 미소가 깃들 수 있기를 빌어본다.몇 분의 스님과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청소년들, 외국인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점심 공양을 한다. 생각했던 엄격함이나 까다로운 규제는 보이지 않는다. 세속적인 욕심을 접고 참 나를 찾는 사람들, 사찰 문화를 체험하며 지친 심신을 정화하는 아이들, 그들에게서 연꽃 향기가 날 것만 같다.혜각 스님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대화를 나눈다. 조용조용한 말투와 선한 눈빛이 결이 고운 분이라는 인상을 준다. 시종일관 흔들림 없는 스님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내공, 남성적으로 보였던 선무도의 고요한 평화로움을 읽는다. 스님만의 독특한 향기가 실내를 환히 밝힌다.차분해진 마음으로 마애여래좌상을 만나러 포장된 언덕길을 오른다. 골굴사는 1500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스님이 불국사보다 약 200년 앞서 지었다. 주불인 마애여래좌상과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12개의 인공 석굴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서 한국의 둔황석굴이라 부른다. 길은 가파르지만 설렘으로 가득하다.멀리 정상쪽에 4미터 높이의 여래불이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를 반긴다. 낯설지 않은 천년의 미소, 그 온화한 표정이 통일신라 시대의 석불임을 알려준다. 절의 초입과는 달리 마애여래불이 있는 산은 과거 속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처럼 친근하다. 고난과 풍파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은 마애불, 저토록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억만 겁의 세월인들 고단하랴.거대한 석회암을 깎아서 만든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른다. 작은 석굴들 속에 있는 앙증맞은 불상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바위계단을 오르는 긴장과 스릴감도 좋다. 석굴을 파서 목조 기와로 입구를 장식해 놓은 이색적인 법당인 관음전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르며 툭 트인 전망을 감상한다. 산만했던 마음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이 귀중한 시간이 참으로 감사하다.▲ 조낭희 수필가마애불은 코앞에 있지만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머리 숙여 돌 천장 아래를 지나고, 앞에서 끌어 주며 서로를 챙겨주는 사이 마애불의 미소가 소리 없이 내 안에 깃든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도상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는다. 자기와 남을 돌아보라고 여래불은 가파른 암벽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마애불 앞에 서서 나도 따라 미소를 지어본다. 그리고 멀리 동해를 바라본다. 별다른 노력 없이 몸과 마음에 병 없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시간들이 겨울나무의 삭정이처럼 푸석거리며 떨어진다. 일상에서 깨어있는 의식으로 자신을 주시할 수 있는 자세, 쉽지 않지만 건강한 삶을 위해서 지향해야 할 과제다. 실천이 따르는 참된 믿음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준다. 삶이 풍요로울수록 매스를 가할 수 있는, 그런 지혜를 갖춘 사람이 진정 아름답다

2015-02-13

참모습에 귀 기울여야

함월산(含月山)은 넉넉하게 기림사를 품고 있다. 몇 번을 다녀가도 그리움이 묻어나는 품격 있는 사찰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넓고 완만한 숲길이 천왕문까지 이어진다. 기림사는 한때 불국사를 말사로 두었을 만큼 큰 사찰이다. 인도의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라 부르던 것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절을 중수하면서 `기림사`로 바꾸었다.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수행하던 승원 중에서 첫 번째로 꼽히며 당시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에서 따온 이름인데 여전히 고찰다운 풍모를 자랑한다.푸른 대숲이 겨울바람에 몸을 떨며 천왕문 입구를 밝힌다. 검(劍), 비파(琵琶), 탑, 용을 쥐고 있는 사천왕상이 오늘도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는지를 살핀다.저절로 긴장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문을 지나면 비로소 청정도량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림사는 불자가 아닌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삼천불상과 오백나한상, 대적광전의 삼존불 그리고 다양한 탱화와 건칠보살좌상 등 볼거리도 많지만, 사대부 집을 들어선 듯한 편안한 분위기도 한 몫을 한다. 대부분 전각들은 맞배지붕으로 장중한 인상을 주지만 넓은 경내는 여유로우면서도 안온하다.십 오륙 년 전, 땅거미가 질 무렵 처음 기림사에 들렀다. 경내를 한 바퀴 돈 후, 잠시 쉬고 있는데 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때마침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에 나는 빨려들 듯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둠이 타종 소리에 몸을 떨며 고요히 내려앉았다. 어떤 음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한 소리에 반해 나는 기림사의 새벽이 궁금했다.그 후 몇 달을 벼루다가 이른 새벽을 달려 기림사를 찾았지만 신도가 아니란 이유로 거절당했다. 경비원은 나의 간절한 애원에도 단호했다.국보급 보물이 많아 입장시간에만 허용한다고 했다. 간간이 새벽 예불을 드리러 온 불자들은 합장 하나로 쉽게 통과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개 짖는 소리만 살벌했다. 그 당시 담장 높은 기림사가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한 때의 쓴 기억을 회상하며 인적 드문 경내에 들어섰다. 정면 7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건물이 보인다. 임진왜란 때 승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진남루이다. 처마를 받치는 새 날개 모양의 공포와 부재로 쓰인 화반의 꽃 모양이 볼 만하지만, 진남루는 문을 닫은 채 침묵 중이다.갑자기 전각 기둥에 세로로 걸려 있는 주련의 내용을 아느냐고 동행인이 묻는다. 떠듬거리며 몇 자 읽어보지만, 흘림체로 쓰인 한자는 알 길이 없다. 글자들은 나의 답답함에도 아랑곳 않고 희디흰 도포자락을 휘날리듯 고고하다. 친근하면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부담스러운 글을 동행인이 풀이해 준다. 나는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인다. 겨울 햇살과 바람도 숨을 죽이고 요란하게 지저귀던 새들도 잠시 노래를 멈춘다. 서서히 눈앞에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진다.“遠觀山有色 近聽水無聲(원관산유색 근청수무성)春去花猶在 人來鳥不驚(춘거화유재 인래조불경)頭頭皆顯露 物物體元平(두두개현로 물물체원평)如何言不會 只爲太分明(여하언불회 지위태분명)”“멀리 바라보니 산은 그 빛깔이 있고/ 가까이 들으니 물은 소리 없이 흐르네.봄은 가도 꽃은 머물러 있고/ 사람이 다가가도 새는 놀라지 않네.하나하나 제 모습을 드러내지만/ 만물의 참모습은 원래 평등한 것.어떤 말로도 말할 수 없지만/ 너무나도 분명하다.”▲ 조낭희 수필가멋진 오언율시다.`금강경오가해`에서 따온 글귀인데 기림사의 정경을 그대로 묘사한 듯하다. 짧지만 종교와 문학, 철학을 두루 아우르는 깊고 그윽한 글이다. 그런데도 나는 올 때마다 무심히 지나쳤다. 감동이 컸기에 나의 무지함이 더욱 커 보인다. 부족한 부분에 부끄러워하기보다 알고 있는 것에 교만해질 때가 많았다. 단청도 불상도 없는 한적한 진남루 앞에 서서 나는 내면을 살핀다.말보다 본질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강한 울림이 오래도록 떠나질 않는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 앞에서 그 참모습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했던가. 누군가에 의해 나름대로 해석되거나 알려진 것, 혹은 주변에 끌려 참모습을 놓칠 때가 많다.사고의 한계는 많은 것을 왜곡시킬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사유의 틀에 의해 알려진 인간화된 신과 자연을 보고 있지는 않은가 반문해 본다.누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가슴 뿌듯한 행복감이 밀려든다.크리스천인 동행인도 종교의 경계를 허물고 고즈넉한 산사 마당에서 선시(禪詩) 속에 잠겨 든다. 같은 여행지도 동행인에 따라 감흥은 다르다. 그가 해박함을 풀어낼 때마다 숨어 있던 기림사가 깊은 속살을 보여주며 위용을 드러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모습이 있다. 잠시 침묵하던 새들도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2015-02-06